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2화 (12/109)

#12. 부탁합니다

한편. 선혜는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재잘재잘 물어오는 민영과 지민에게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아는 동생이에요.”

하지만 제대로 먹힐 리 만무했다.

“아니, 어떻게요?”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민영의 입에서 더한 질문이 튀어나오기 전에, 선혜가 입을 열었다.

“전에 프랑스 패키지여행 갔었는데 그때 같은 팀에 있었거든요. 친하진 않고 말 좀 튼 사이예요.”

거짓말에 서툴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술술 나왔다. 자신의 또 다른 이면을 새삼스레 발견한 기분에 어쩐지 씁쓸해졌다.

그런데 선혜의 말에도 지민의 의심은 풀어지지 않았다.

아니면 그냥 아니꼬운 걸지도. 자기더러 알은척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선혜여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후로도 얼굴이 한참 동안 벌겠으니까.

“패키지요? 재벌들도 패키지여행을 다니나?”

재벌? 그 단어에 선혜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재벌이라뇨?”

“몰랐어? 신 주임, 현성 출판사 회장님 막내아들이잖아.”

“……네?”

누가, 뭐라고?

선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되묻자 민영이 물었다.

“뭐야. 진짜 몰랐어?”

“네. 그냥 부잣집 아들인 줄은 알았는데…….”

타고 다니는 차가 외제 차고 슈트 또한 흔치 않은 브랜드의 것이어서 그럴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현성 출판사 회장의 막내아들이라니.

……맙소사.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

다행히도 민영과 지민의 질문 세례는 거기에서 끝났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시간대였고 각자 업무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선혜는 사수인 민영이 다른 걸 물어볼까 싶어 긴장했지만, 다행히 민영은 일 말고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속으로 안도함도 잠시. 자꾸만 손에 땀이 찼다.

이 레어미디어의 모기업이 현성 출판사라는 건 선혜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웹소설 출판사 중에 꽤 큰 규모인 레어미디어를 계열사로 둘 만큼, 현성 출판사는 그 규모가 제법 큰 회사였다.

그런 현성 출판사 신현철 회장의 막내아들이라니.

불현듯, 배우 신태연이 어디 기업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연예인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었는데. 알았다면 이곳에 이력서를 넣을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태준의 정체를 알고 나자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뭔가 꼬여도 제대로 꼬인 듯한 느낌.

그러고 보니, 태준도 분명히 그 기획부 직원들이 자신과 무슨 사이냐고 물었을 것 같은데 뭐라고 대답했을까.

제발 아무 사이 아니라고 대답했기를 바랐지만 불안했다.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시선과 대놓고 타인이 있는 곳에서 알은 척을 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회장의 막내아들. 그와 잘못 엮이면 회사 생활은 다 한 거나 다름없었다.

만약 작은 낌새라도 보여 소문이 퍼지면 회사 생활이 힘들어질 건 안 봐도 비디오.

어쩌지. 연락이라도 하고 싶은데 핸드폰 번호를 모른다.

그런데 그 순간 컴퓨터 바탕화면에 떠 있는 사내 메신저가 눈에 들어왔다.

선혜는 파티션 너머로 힐끔 민영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느라 이쪽에는 관심이 없는 듯싶었고 그건 맞은편 자리인 지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선혜는 빠르게 메신저를 클릭했다. 로그인한 뒤 기획부에 들어가자 마지막 열에서 두 번째에 있는 그의 이름이 보였다.

선혜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빠르게 태준의 이름을 클릭하고 타자를 쳤다. 키보드 소리가 이렇게나 크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저기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읽음 표시가 단숨에 사라지더니 칼같이 답이 왔다.

[왜요?]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있을까 하다가 마땅한 장소를 생각해냈다.

[비상구로 잠깐 나올래요? 할 말이 있어서.]

비상구라면 둘만 있기 좋을 터.

[언제요?]

태준의 답장에 선혜가 타닥 타자를 빠르게 쳤다.

[지금요.]

[맨입으로요?]

뭘 부탁하려고. 선혜가 멈칫하는 새에 메시지가 떴다.

[번호 알려주면 나갈게요.]

선혜는 화를 내리누르는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새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싫음 말고.]

‘이 남자가 진짜…….’

그래도 어쩌겠나. 그녀가 부탁하는 을의 처지였으니.

선혜는 숫자 키패드를 하나하나 꾹꾹 눌러 태준에게 보냈다. 읽음 표시가 뜨는가 싶더니 핸드폰이 지잉 진동했다.

[지금 나갑니다.]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선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메신저를 껐다.

혹시라도 누가 봤을까 한 번 더 주위를 살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영이 의아한 얼굴을 들어 선혜를 보았다. 그런 민영에게 선혜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그래. 다녀와요.”

선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부서를 나섰다.

유리문 너머로 아무도 이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확인한 선혜는 화장실이 아닌 비상구 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

사무실에서 나온 태준은 여유로운 얼굴로 비상구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는 길에 걸린 디자인 부서 팻말을 손으로 한 번 툭 치고 지나가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상구에 다다르자 그의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비상구 문을 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선혜가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비상구에는 벽에 작은 쪽창이 하나 나 있었는데, 그 쪽창을 통해 비스듬히 쏟아지는 햇살을 등지고 가만히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꼭 후광을 등에 업은 듯 찬란했다.

단정이 빗어 한데 묶은 다갈색 머리. 햇살 아래 더욱 음영 지어 뚜렷한 이목구비.

유치원 앞에서 만날 때마다 늘 맨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회사에 온답시고 화장을 했는지 눈가와 입술이 반짝반짝했다.

단정히 차려입은 정장은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선혜의 색다른 모습을 눈에 하나하나 담는 태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선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태준은 그에 정신을 차리고 씁쓸하게 미소를 짓다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앞에 서서 물었다.

“할 말이 뭐예요?”

선혜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말을 좀 맞췄으면 좋겠어서요.”

태준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창가에 기대어 서서 선혜의 말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그쪽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묻길래 프랑스 패키지여행 갔을 때 같은 팀이었다고 했어요. 그냥 아는 동생이고 말만 터서 이름하고 나이만 대충 아는 정도로만 이야기했으니까 태준 씨도 그렇게 해 줘요. 아니, 그냥 모르는 척해 줘요.”

“모르는 척?”

태준이 되묻자 그녀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나, 이 회사 오래 다니고 싶어요. 괜히 회사 시끄러워지면 피해 보는 건 나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선혜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들었어요. 신태준 씨, 신 회장님 막내아들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일개 사원일 뿐이다. 누가 손해를 볼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대로 말을 좀 맞춰줘요. 괜히 다른 얘기 하지 말고요.”

태준은 말없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선혜를 보았다.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겁니까?”

“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얄궂은 표정이 태준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근데 부탁하는 사람 치고 태도가 영.”

순간 선혜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선혜는 곧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부탁할게요.”

“약한데.”

선혜가 미간을 구기고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뭘 더 어떻게 하라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뭘 원하는 데요?”

“별 건 아니고.”

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밥 한번 먹죠.”

선혜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곤란해요. 애 보느라 시간이 안 난다고요.”

평일 점심은 당연히 안되고 저녁에도 수호를 데리러 가야 해서 안 된다. 주말에도 수호를 돌봐야 해서 시간 내기가 힘들었다.

왜 자꾸 사람 난감하게 만드는지. 괜히 부탁한다고 해서 사서 고생을 한다 싶었다.

극단적인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사실상 제일 편한 방법.

그만두면 된다. 회사 급여와 복지가 좀 아깝긴 했지만…… 그래도 불편하게 하루하루 버티는 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사직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까짓거 그만 두지 뭐.

“제가 아무래도 괜한 부탁을 드린 것 같네요. 그냥 없던 일로 해 줘요.”

마음을 반쯤 굳히고 그렇게 돌아서는 때였다.

탁. 갑자기 눈 앞에 단단한 팔이 드리워졌다. 선혜가 굳은 얼굴로 앞을 돌아보았다.

태준이 팔을 뻗어 가던 길을 막은 것이었다. 선혜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태준이 팔을 내리더니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커피라도 마시던가요.”

커피.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선혜의 눈이 반짝였다.

“커피 한 잔이면 되는 거죠?”

선혜가 재차 확인차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혜는 태준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걸음 내딛으려다가 멈칫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또 팔로 가로막아 뭔가 요구하지 않을까 싶어서. 선혜의 속내를 알아차린 태준이 웃으며 가라는 뜻으로 손을 펼쳐 보이자 그제야 마음 놓고 멀어지는 선혜였다.

탁. 문이 닫히자 태준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의 끝이 다소 쓰게 물들었다.

“밥 한번 같이 먹기 어렵네.”

그래도 커피가 어디야.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오늘은.

*

한편. 선혜는 비장한 표정으로 곧장 1층 카페로 내려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하나요.”

그란데 사이즈 커피 하나가 금방 나왔다. 홀더를 끼운 선혜는 곧장 아까 태준과 만났던 비상구로 향했다.

탁! 창가에 내려놓는 거센 손길에 커피가 넘칠 듯 말 듯 출렁거렸다. 선혜는 짧게 심호흡을 하며 괜히 죄 없는 커피를 노려 보다가 손을 잔에서 떼어냈다.

그런데 문득 홀더에 그려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눈여겨 보니 무슨 편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커피와 함께 메시지를 전해보세요.]

홀더에 별게 다 그려져 있다 생각하며 몸을 돌리던 선혜는 뭔가 생각났는지 재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혹시 몰라 넣어놓은 작은 펜이 손에 잡히자 선혜는 커피를 향해 다시금 돌아섰다.

선혜는 창가로 성큼성큼 다가가 커피 홀더를 벗겨냈다. 그리고 메시지 칸에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새겨 넣었다. 그리고 도로 잔에 끼운 뒤 몸을 돌렸다. 얕은 숨이 입 밖으로 샜다.

이 정도면 됐겠지.

태준에게 짤막한 메시지를 남긴 선혜가 비상구를 나섰다.

*

한편. 업무 중이던 태준은 메시지가 오는 소리에 핸드폰을 들었다.

[커피 비상구 창가에 있어요.]

뭐?

눈을 동그랗게 뜬 태준은 메시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 형주에게 화장실에 간다고 대충 둘러대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마침 디자인팀 사무실로 들어가는 선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썹 한 쪽을 삐딱하게 올리던 태준은 비상구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창가에 다다른 그의 발걸음이 탁 멈춰 섰다.

입 밖으로 헛웃음이 절로 터져나갔다.

창가에 떡하니 놓여 있는 벤티 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홀더에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메시지.

[부탁합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나는 같이 카페 가자고 한 거였는데.

‘커피 한잔이면 되는 거죠?’

왜 그렇게 재차 확인하나 싶었는데 이러려고 그런 거였나.

태준은 기가 찬 얼굴로 커피를 쳐다보다가 손에 들었다. 창가에 기대어 뚜껑을 열고 그대로 목으로 기울였다.

벤티 사이즈의 커피가 남김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남은 건 빈 잔과 홀더 뿐.

“어지간히도 쓰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태준은 비상구를 나섰다. 비상구 앞에 놓인 쓰레기통으로 컵과 홀더를 같이 버리려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는 선혜가 홀더에 적어넣은 글귀를 응시하다가 홀더는 주머니에 챙기고 컵만 버렸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주머니에서 홀더를 빼내어 책상에 놓아두었다.

‘이게 뭐라고.’

실소하면서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거기에 또박또박 적힌 글씨마저도 소중하게만 느껴져서.

태준은 선혜에게 하듯 빙긋 웃어 보이고는 업무를 시작했다.

*

퇴근 시간이 임박하여 직원들이 하나둘 일어나는 디자인팀 사무실.

“우리 윤선혜 씨 환영식은 언제쯤으로 잡을까?”

한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 제안에 짐을 챙기던 민영이 글쎄요, 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좀 그렇고, 금요일 어때요?”

“이번 주는 곤란하고. 다음 주 금요일 어때?”

“그것도 괜찮죠. 선혜 씨, 약속 없지?”

민영의 말에 선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 들어가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위한 환영식인데 빠질 수가 없었다.

“그럼 다들 집에 가서 월요병 잘들 치유하고. 선혜 씨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 앞으로도 잘해 봐요, 우리?”

한기주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선혜는 미소 띤 얼굴로 조심히 들어가시라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온 선혜의 시선이 힐끔 기획부로 향했다.

유리문 너머로 막 이쪽을 돌아보던 태준과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선혜는 몸을 돌려 또각또각 멀어졌다.

*

집으로 들어간 선혜를 경애와 수호가 마중 나왔다. 저를 맞이해 주는 수호를 웃는 얼굴로 안고 도닥인 선혜는 수호의 손을 잡고 거실로 들어섰다.

수호가 블록으로 만든 성을 보고 짧게 감탄하던 선혜가 거실 소파에 힘없이 앉았다.

등받이에 길게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힌 채 긴 숨을 내뱉는데 경애가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첫날인데 어땠어?”

걱정과 기대가 반반 묻어난 질문에 선혜가 입을 열었다.

“그만두고 싶었는데…….”

“뭐?”

경애가 정색하며 반문하자 선혜가 웃어보였다.

“그냥 참았어.”

“왜. 누가 괴롭히든?”

“엄마. 누가 괴롭혀?”

수호마저 정색하며 돌아본다. 선혜는 농담이라며 고개를 내젓고는 웃을 뿐이었다.

자꾸만 생각나려는 태준의 얼굴을 애써 지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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