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1화 (11/109)

#11. 다시 만난 애 아빠

뭐 하러 등·하원 도우미를 쓰냐며 억척스레 말리는 경애의 잔소리에 결국 도우미는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선혜는 수호를 데리고 등원 준비를 마친 뒤 유치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잘 다녀와, 우리 아들.”

수호를 유치원 앞에 데려다준 선혜는 수호와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수호가 유치원 안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돌아서는데 멀리 주차된 세단에서 세빈이 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세빈의 옆에 서 있는 양복 입은 남자는 당연히 태준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

선혜는 세빈과 함께 돌아서는 기사의 얼굴을 보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세빈이 생글거리며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선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안녕.”

기사를 한번 쳐다본 선혜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세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줌마?”

반쯤 입을 벌리고 있던 선혜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얼른 들어가 세빈아. 늦겠다.”

“네. 안녕히 가세요.”

세빈이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이내 유치원 건물로 멀어졌다. 멀어지는 세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혜는 기사의 옆을 지나쳐 차에 올라탔다.

차창 너머로 이쪽을 힐끔거리다가 세단에 올라타는 기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선혜는 세단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다, 그런 자신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이 실망감은.

기사가 데려다줄 수도 있지. 원래는 늘 그렇지 않았던가. 그리고 불편한 사람 안 마주치면 좋아해야지, 왜.

그런데 순간 마지막으로 봤던 태준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쳤다.

카페 의자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던 모습. 6년 전과 똑같이 맑게 빛나던 연갈색 눈동자.

어쩐지 가슴이 욱신욱신 쑤시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떨치듯 선혜는 거칠게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날은 하원 때도 태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마찬가지.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학부모도 모두 떠나고 아이들도 유치원으로 들어가 휑한 유치원 앞.

수호를 데려다준 선혜는 유치원 앞 나무 기둥에 기대어 한참을 서 있었다. 태준과 재회한 날, 그가 세빈을 안고 서 있던 곳이었다.

선혜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먼 곳에 시선을 두기도 하고, 그러다 간간이 씁쓸하게 웃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 핸드폰이 띠링 울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급하게 핸드폰을 들어서 확인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레어미디어 중간 채용 최종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기다리던 연락이었건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선혜는 손을 느리게 아래로 떨어뜨렸다. 고개를 숙인 채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인사도 없이 떠날 줄은 몰랐는데.

문득, 자기가 그렇게 두고 간 날 태준의 마음도 이러했을까 생각했다.

자업자득인 모양이지.

선혜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나무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냈다. 그리고 씁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다가 중간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잠시뿐. 선혜는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봄의 끝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

“신 주임.”

업무를 보고 있던 태준은 김형주 과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바람 쐬고 올까?”

김형주 과장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들은 태준은 선선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형주 과장을 비롯하여 임성균 대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은 나란히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들고 흡연 구역인 회사 옥상으로 향했다.

“하. 날씨 기가 막히다 기가 막혀. 주말엔 내내 비 오더니. 아주 눈이 부시다 부셔.”

김형주 과장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뱉은 탄식에 임성균 대리가 물었다.

“주말에 가족 여행 가신다고 하시더니.”

“어휴. 비 와서 차는 막히지, 마누라는 예민하지, 애는 울지. 환장하는 줄 알았다, 진짜.”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김형주 과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셋은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하늘에 흩어지는 연기가 자취를 감출 때쯤이었다. 김형주 과장이 무언가 퍼뜩 떠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참,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이요?”

소문에 밝은 김형주 과장이 운을 틔워내자 임성균 대리가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이번 2차 채용 때 어마어마한 신입이 들어왔대, 글쎄.”

김형주 과장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건 임성균 대리뿐이었다. 태준은 난간에 기대어 서서 연기를 내뿜고는 탁탁 담뱃재를 털고 있었다.

“너, 앤틱이라고 들어봤냐?”

앤틱. 그 예명을 들은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에 은퇴 선언한 그 일러스트레이터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신 주임도 아는구나?”

모를 리가 없었다. 요새 들어 갑자기 외주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기획부 쪽에서도 난감해하던 차였는데.

“그 앤틱이 글쎄, 오늘 우리 회사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대.”

그 말에 임성균 대리가 입을 떡 벌렸다.

“애, 앤틱이 우리 회사에 들어왔다고요?”

“그래. 그래서 우리 대표님 요새 입이 귀에 걸리셨대. 듣자 하니까 이사님도 면접 때 꽤 마음에 들어 했다더라고.”

형의 마음에 들었다니. 사람 보는 눈이 제법 까다로운 태석임을 알기에 태준의 눈에도 흥미가 얕게 일었다.

“근데 더 대박인 건 뭔 줄 알아?”

“뭔데요?”

김형주 과장이 감탄 어린 얼굴로 손짓까지 곁들여가며 말했다.

“그 앤틱이 글쎄, 그렇게 예쁘다더라. 연예인 저리 가라래. 근데 어찌나 철벽인지, 남자 사원 대부분이 벌써부터 아주 끙끙대는 모양이야.”

태준은 그 대목에서 관심을 껐다.

예쁘다고 한들, 설마 그 여자보다 더 예쁠까. 태준은 어제 수영장 근처에서 보았던 선혜를 떠올렸다.

언제 아는 척 인사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는 때에 손끝에 있는 담배가 다 타들어 갔다.

태준이 담배를 지져 끄는 걸 본 김형주 과장과 임성균 대리도 담배를 껐다.

막 옥상을 나서는데 김형주 과장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핸드폰을 확인한 김형주 과장이 혀를 짧게 찼다.

“부장님이 나간 김에 커피 좀 사 오라신다.”

태준이 말했다.

“임 대리님이랑 저랑 다녀오겠습니다. 과장님 먼저 들어가시죠.”

“아니야. 나도 같이 가지, 뭐.”

세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자잘한 업무 관련 대화를 나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20층에 멈춰 섰다. 닫힌 문 너머로 재잘거리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자인 팀인가.”

익숙한 목소리 하나를 캐치한 김형주 과장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절로 앤틱이라는 신입사원이 생각났는지 김형주 과장과 임성균 대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문을 바라보는 그때, 문이 열렸다. 숫자를 무의미하게 응시하고 있던 태준도 열린 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열린 문 너머에는 디자인팀의 임민영 대리와 김지민 주임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낯선 얼굴이 하나 더 있었고.

하지만 태준에게 있어서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불과 어제 수영장 앞에서도 봤던.

“……!”

“……!”

엘리베이터 앞에는 선혜가 서 있었다. 태준을 보고 놀란 얼굴을 채 숨기지 못한 채로.

그건 태준도 마찬가지였다.

선혜를 담은 태준의 눈이 커다래진 채로 느리게 깜박였다. 선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태준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곧, 선혜가 황급히 눈을 돌렸다. 당황한 눈꺼풀이 살며시 떨리는 걸 태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빤히 쳐다보며 눈에 담았다. 태준의 시선이 선혜가 걸고 있는 사원증에 닿았다.

[디자인팀 신입사원 윤선혜]

느릿한 호선이 태준의 입가에 걸쳐졌다.

이런 횡재가 있나.

“어머. 우리 김 과장님 아니셔?”

“……어, 임 대리 오랜만.”

입사 동기인 임민영 대리와 인사를 나누던 김형주 과장이 멍한 얼굴로 어느 한 곳을 쳐다보다 느리게 대답했다.

입사 동기인 김지민 주임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임성균 대리도 엘리베이터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임민영 대리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새침하게 두 남자를 쳐다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윤선혜 씨, 뭐 해. 안 들어오고.”

태준을 보고 놀라 굳어 있던 선혜가 임민영 대리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에 머뭇거림이 묻어난 건 태준만이 알 수 있었다.

“혹시…… 그 앤틱?”

김형주 과장이 선혜를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 선혜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디자인팀 신입사원 윤선혜라고 합니다.”

“맞죠, 앤틱? 히야.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기획부 과장 김형주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주고받는 걸 본 태준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기획부 임성균 대리라고 합니다.”

임성균 대리는 선뜻 선혜에게 악수할 생각도 못 한 채 허리까지 숙여 가며 인사를 건넸다. 임민영 대리와 김지민 주임이 선혜의 뒤에서 새초롬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니. 소문이 빙산의 일각 수준이었네.”

김형주 과장이 신기하다는 듯이 선혜를 보며 자꾸만 웃었다. 임성균 대리도 마치 땡잡았다는 얼굴로 실실 웃고 있었다.

두 남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선혜는 그런 두 사람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희미했지만 분명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웃어? 저에게는 웃는 얼굴 한번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여자가 다른 남자들에게 웃는 모습이 태준에게 곱게 비칠 리 없었다.

더는 볼 수가 없어 태준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히 죄 없는 엘리베이터 문만 노려보는데 옆에서는 계속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잘해 봐요, 우리. 기획부랑 마케팅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거든.”

“아니, 언제부터 기획부랑 마케팅부가 그런 사이였대요? 원수 사이 아닌가?”

임민영 대리의 까칠한 투에 김형주가 껄껄 웃었다.

“이제부터라도 잘 지내보면 되지!”

“맞아요. 그럼 되는 거죠.”

임성균이 맞장구를 치는 소리 뒤로, ‘하하!’ 두 남자가 목소리를 높여 웃는 소리가 좁은 엘리베이터에 메아리쳤다.

임민영 대리와 김지민 주임은 기가 막힌 듯 웃으면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두 여자의 시선이 둘 사이에 있는 선혜를 스쳐지나 앞으로 향했다.

선혜는 자기도 모르게 맞잡은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태준이 몹시도 신경 쓰여 자꾸만 손에 땀이 찼다.

둘 사이에 김지민 주임이 있어 그다지 부담스럽지만은 않은 거리였음에도 그가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기가 막힌 우연에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선혜는 힐끔 눈만 굴려 태준의 가슴에 걸린 명찰을 힐끔 쳐다보았다.

[레어미디어 기획부 주임 신태준]

기획부면 같은 층이었다.

같은 부서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아는 척을 할까 싶어 엘리베이터에 타지도 못했었는데, 무표정으로 앞만 쳐다보는 태준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선혜가 안도의 숨을 몰래 내뱉는 그때였다.

“오랜만이네요.”

나직하게 뱉어진 태준의 목소리에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잡소리가 동시에 사라졌다.

태준의 옆에 있던 김지민 주임이 힐끔 옆을 돌아보았다.

옆에 있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안 모양인지, 그녀가 얼굴에 홍조를 띠며 배시시 웃었다.

“오랜만은요. 어제도 뵈었었…….”

“주임님 말고요.”

태준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선혜를 바라보았다.

“윤선혜 씨.”

선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쪽 말입니다.”

굳어 있던 선혜가 뻣뻣한 목을 돌려 태준을 쳐다보았다.

선혜의 까만 눈동자와 태준의 연갈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정신없이 두 사람을 오고 가고, 임민영 대리가 선혜에게 무어라 물으려는 찰나.

땡.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가장 먼저 나선 건 선혜였다. 의아함을 채 거두지 못하고 임민영 대리와 김지민 주임이 선혜의 뒤를 따라나섰다.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던 김형주 과장과 임성균 대리는 뒤늦게 태준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서자 따라나섰다.

“뭐야. 신 주임, 윤선혜 씨랑 아는 사이야?”

“네.”

“어떻게?”

김형주 과장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태준은 잠시 무어라 대답할지 생각했다.

순간 할 만한 대답 하나가 생각났다. 자조 어린 실소가 입가에 피어올랐다.

“그냥…….”

아. 이 호칭. 쓰고 싶지 않았는데.

“아는 누나예요.”

놀라 입이 반쯤 벌어진 두 사람을 두고 태준은 성큼성큼 카페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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