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10화 (10/109)

#10. 이상한 아저씨

경애와 수호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면접을 마친 선혜도 집으로 돌아왔다.

수호가 현관으로 달려가다가 선혜를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수호의 눈에 안 하던 화장을 하고 투피스를 단정히 차려입은 선혜의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엄마 진짜 예쁘다.”

정말 정말 예뻤다. 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선혜가 해사하게 웃으며 수호를 안고 입을 맞췄다. 평소같으면 뽀뽀하지 말라고 밀치는데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 모습이 꼭 반한 것 같았다.

“하이고. 네 아들 너한테 반했나 보다.”

경애가 키득거리며 웃다가 물었다.

“면접은 잘 봤어?”

소파에 다가가 털썩 앉자 경애가 다가오며 물었다. 선혜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괜찮게 본 것 같아.”

“잘됐으면 좋겠다. 거기, 현성 출판사에 속한 계열사라면서. 현성 출판사 내 친구 아들이 입사했는데 글쎄 대우가 그렇게 좋대.”

“근데 너무 기대하지 마. 나이도 나이고.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대기업은 나이 따지고 들어서.”

경애가 선혜의 현실적인 말에 비쭉 입을 내밀었다.

문득 태준이 생각난 경애가 선혜에게 태준에 대해 물으려는 찰나였다.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다. 새 메일이 왔다는 알람이었다. 메일을 열어 표지 제안서를 확인하자마자 선혜는 몸을 일으켰다.

“엄마. 저녁 먹고 갈 거야?”

“응? 아, 어. 그래야지.”

“그럼 나 밥 좀 해 주라. 지금 또 외주 들어와서.”

“그래. 엄마도 오늘 가게 맡겨 놓고 나와서 한가해. 뭐 먹고 싶어? 엄마가 재료 사다가 해 줄게.”

“할머니. 나 카레.”

수호의 말에 경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호야. 할머니가 카레 맛있게 끓여줄게. 고기 팍팍 넣어서. 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그럼 돈까스도!”

선혜는 경애와 수호가 대화 나누는 걸 보고 웃으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

태준은 오피스텔이 완공되어 태연의 집에서 나와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짐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무렵 태준은 근처 스포츠 센터에 있는 수영장에 정기 회원 등록을 했다.

촤아아. 태준의 긴 팔이 물살을 가르고 뻗어나간다. 시원스레 뻗은 다리가 물을 차올리면 장신의 몸이 물 안에서 쏜살같이 뻗어 나간다. 탄탄한 근육이 빼곡하게 들어찬 신체가 자유자재로 물속을 유영한다.

접영으로 수영장 레일을 몇 번 오간 태준은 사다리를 올라 풀장을 벗어났다. 그의 손이 왼쪽 둔부 쪽 수영복을 끌어 올렸다. 몸에 익은 버릇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하얀 피부에 근육이 만들어낸 음영이 선명했다. 수영을 오래한 것답게 어깨는 널찍했고 늘씬한 허리로 뻗어나가는 역삼각형 라인이 뚜렷했다. 헐렁한 바지 형식의 수영복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 또한 슬림하면서도 탄탄했다.

그런 태준의 왼쪽 다리에는 커다란 수술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한때는 수영선수가 꿈이었었다. 사고로 인해 좌절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선수 생활을 더는 못한다고 해서 태준이 수영을 아예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꿈은 취미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물을 가르고 있노라면 스트레스나 복잡한 생각이 모두 정리되곤 했다.

하지만 요즘 떠오르는 생각은 수영을 해도 정리되지 않았다.

수영모를 벗고 귀에 고인 물을 털어내며 그는 자연스럽게 선혜 생각을 했다.

전에도 선혜에 대한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와 재회한 이후부터는 매일같이 숨 쉬듯 그녀 생각을 했다. 얼굴을 못 보게 된 근래 들어서는 더욱 자주 생각이 났다.

조만간 연차라도 내서 세빈의 등·하원을 도와볼까. 누나 의심은 어떻게 무마시키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자, 오늘도 다들 고생 많았어요. 풀장에서 너무 오래 놀지 말고 들어가요. 그럼 안녕!”

근처 유아 풀장에서 수영 강사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막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네!’ 하고 선생님의 인사에 화답하는 소리가 타일 벽을 통해 웅웅 울렸다.

형형색색 수영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자 귀여워 절로 웃음이 샜다.

태준이 그 옆을 지나가는 때였다.

“아저씨! 수영하는 거 진짜 짱 멋있었어요!”

덩치 큰 한 아이가 엄지를 척하니 내밀며 태준에게 소리쳤다.

여자인 수영 강사가 그를 돌아보며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건넸다.

대충 고개 숙여 받아준 태준이 저를 향해 말을 건 아이에게 친근한 투로 대꾸했다.

“너도 선생님께 열심히 배워. 그럼 아저씨처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안 그래도 요새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그쵸, 선생님?”

“응? 어, 그래. 잘하고 있지.”

강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태준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차가운 물도 그녀의 붉어진 뺨을 식혀주진 못했다.

어쩐지 더 있다가는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태준이 발걸음을 떼려는 그때였다.

첨벙. 아이 중 한 명이 물을 차는 소리가 들려 태준은 무심결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피부가 흰 남자아이 하나가 첨벙첨벙 물을 차고 있었다. 선망의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아이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고개를 숙인 아이였다.

태준은 그 아이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수호?”

저를 부르는 태준의 목소리에 수호가 물을 차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똑같은 빛깔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너, 수호 맞지?”

수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몹시도 닮은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더니만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버릇처럼 왼쪽 수영복 춤을 끌어 올린 수호가 총총 멀어졌다.

그런 수호의 뒷모습을 보는 태준의 눈이 가늘어지다가 반가움을 담고 휘어졌다.

*

탈의실.

“야, 근데 그 아저씨 진짜 멋있지 않냐? 키도 크고 몸짱에 얼굴도 엄청 잘생겼어.”

“우리 선생님이 그 아저씨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아, 진짜?”

재잘재잘. 샤워를 마친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에 근처에 있던 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들 중에 가장 먼저 옷을 입은 수호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사물함 문을 닫았다.

“근데 윤수호. 너는 그 아저씨랑 어떻게 알아?”

수호는 간단히 대답했다.

“유치원 친구네 외삼촌.”

“진짜? 와, 좋겠다 너는. 그런 멋진 아저씨도 알고.”

“별로.”

시니컬하게 대꾸하는 수호를 보며 아이들이 몰래 입을 비죽거렸다.

수호는 탈의실 중앙에 있는 평상에 앉아 있다가 핸드폰이 울려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엄마, 선혜였다.

“어, 엄마. 나 지금 옷 다 입었어.”

다급한 선혜의 목소리가 건너에서 들려왔다.

- 수호야, 미안한데 엄마가 늦잠을 자서 지금 일어났거든. 지금 금방 가니까 탈의실에서 조금만 기다릴래?

“알겠어.”

- 낯선 사람이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해도 쫓아가면 안 된다?

“응, 엄마.”

선혜와 통화를 마친 수호가 몸을 돌리는 때였다.

“우리 먼저 가면 돼?”

친구 중 한 명이 묻는 말에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보자며 아이들과 손 인사로 헤어진 수호는 탈의실 한 가운데에 놓인 평상에 앉아 선혜를 기다렸다.

지금 출발했으면 십 분 정도 걸리려나. 시계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샤워실 문을 열고 누군가가 나왔다.

태준이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던 그가 수호를 보더니 잠시 멈칫했다.

수호는 그의 시선을 피했고 태준도 별말 없이 그런 수호의 앞을 지나가 그다음 칸에 있는 자신의 전용 사물함 앞에 섰다.

옷을 빠르게 입고 짐을 챙긴 그가 칸을 나오다가 슬쩍 아까 수호가 앉아 있던 평상을 바라보았다. 수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핸드폰을 쳐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새. 선혜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태준은 수호를 보면 양가감정이 들었다. 선혜의 아들이라 이뻐해 주고 싶다가도 아이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괜히 속이 심란했다.

잘해주고 싶다가도 중간에 무언가가 가로막히는 애매한 느낌.

그런데 저렇게 혼자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쓰인다.

결국 돌아서지 못한 태준은 수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아이의 옆에 앉았다.

“친구들은 다 어디 가고 혼자 있어?”

태준이 제법 다정하게 물었는데도 수호는 묵묵부답이었다.

허. 무시하는 것 보소. 제 엄마를 쏙 빼닮았네. 입을 꾹 다물고 쳐다도 안 보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선혜 아들이었다.

“엄마 기다려? 늦으신대?”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어쩐지 좀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괴롭혀서 반응을 보고 싶은 짓궂은 마음도 들었다.

태준이 슬그머니 손을 들더니 검지로 수호의 뺨을 쿡 찔렀다.

역시나, 반응이 있었다. 수호가 제 뺨을 손으로 가리며 태준을 홱 돌아보았다.

아이 주제에 눈에 제법 힘을 줄 줄 알았다. 이것도 제 엄마를 닮았네.

수호에게서 선혜의 닮은 점을 이모저모 찾아내는 태준의 입가에 따듯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잠시뿐. 엄한 척 표정을 굳히며 눈을 가늘게 뜨는 태준이다.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수호가 뺨을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엄마가 낯선 사람이랑 말하지 말랬어요.”

제법 반항기 있게 생겼으면서 엄마 말은 착실하게도 듣는 모양이었다.

“아저씨가 낯설어? 유치원 앞에서 우리 매일 같이 봤었잖아.”

“울 엄마랑 안 친하잖아요.”

그 말에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멋쩍은 얼굴로 앞을 돌아보는 때였다.

“아저씨, 우리 엄마 좋아하죠?”

정곡을 찌르는 말에 태준이 수호를 홱 돌아보았다. 지금껏 무시할 땐 언제고 이제는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준이 관자놀이를 멋쩍게 손끝으로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우리 엄마 좋아하지 마세요.”

아이 치고 꽤 단호한 어조였다. 태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우리 엄마, 그런 거 싫어한단 말이에요.”

“엄마 쫓아다니는 아저씨들 많았나 봐?”

“네.”

수호가 간결하게 대답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선혜를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비단 선혜만 귀찮게 군 것은 아니었다. 선혜의 아들인 수호한테도 점수를 따려고 꽤 용을 썼다.

맛있는 걸 사 주겠다고 꼬드기면서 은근히 선혜의 번호를 묻는 사람도 있었다.

수호는 그런 아저씨들이 싫었다. 엄마가 싫어하는 게 어린 자신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데 정말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혜는 수호에게 신신당부했다.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애 엄마들이 아이에게 하는 뻔한 교육에는 특히나 아저씨들을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야.”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는 말에 수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태준을 바라보았다.

태준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이 났다. 태준을 바라보던 엄마, 선혜의 눈빛도.

경계를 하긴 해야 하는데 뭔가 아리송한 느낌에 미간을 좁히는 때였다.

태준이 고개를 돌려 수호를 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말을 걸지 말라고 했는데 뭐 하는 건가 싶어 수호가 눈을 찡그리는 때였다.

태준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왜.]

“말 걸지 말라니까요?”

태준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또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안 걸었는데.]

……이 아저씨가? 수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때였다.

[바-보.]

저를 놀리는 태준에게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찰나였다. 수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에 찍히는 두 글자, [엄마].

혹시 번호라도 뜰까 싶었지만 번호는 없고 이름만 뜬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호를 향해 손을 흔들더니 또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안녕.]

태준이 멀어진 뒤 그가 나간 방향을 노려보던 수호가 샐쭉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아저씨야.”

*

태준은 스포츠 센터 구석의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아까 수호와 티격태격하던 게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샜다. 재밌는 애라니까.

씨근덕거리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부드럽게 담배 끝을 빨아들이는데 멀리서 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선혜의 차였다.

태준은 수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안아주고,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선혜의 얼굴을 눈에 빠짐없이 담았다.

아는 척을 할까 하다가 말았다.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아이한테 갈 수는 없었으니까.

수영하러 올 때는 앞으로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때였다.

곧 두 사람이 차에 올라탔다. 때마침 흡연을 마친 태준도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껐다.

“주말마다 보게 생겼네.”

그렇게 중얼거린 태준도 곧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저 꼬맹이는 어떻게 구슬린담.

어려운 고민이 그의 걸음걸음을 뒤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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