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련을 버릴 기회
선혜는 청소기가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밤을 새운 탓에 눈꺼풀이 무겁기가 천근만근이었다. 늘어진 몸도 마찬가지.
전에는 며칠씩 밤을 새워서 작업해도 멀쩡했었는데. 가면 갈수록 밤을 새우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건가.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선혜는 곧 몸을 반쯤 일으켰다. 침대를 짚은 손목이 아침부터 욱신거렸다. 손목을 허공에 털며 침대에서 내려와 서는 그때였다.
투둑.
인중께가 축축해지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코피가 투둑 쏟아졌다.
또…….
급한 대로 고개를 젖히고 휴지를 찾아 손을 더듬거리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곁눈질로 바라본 문 앞에는 선혜의 엄마인 경애가 서 있었다.
순간 미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잠시뿐.
인사를 건넬 새도 없이 청소기를 내려놓은 경애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빠르게 티슈를 뽑고는 선혜의 코를 틀어막았다. 뒤통수를 잡아 누르는 손길이 다소 억셌다.
“지지배야. 코피가 나면 고개를 숙여야지, 들면 어떡해?”
엄마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선혜는 멋쩍게 웃었다.
“미안.”
“너 또 밤새웠어?”
“응. 엄마는 언제 온 거야?”
“방금. 어휴. 저번에도 코피 흘리더니, 또야? 너 진짜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니? 손목도 아프다며.”
걱정이 담뿍 담긴 말투에 괜히 코끝이 찡했다.
얼마 전에 대판 싸웠음에도 먼저 다가와 주는 엄마가 선혜는 고맙기만 했다.
“코피도 나는데 쉬고 있어. 더 자도 되고.”
경애가 그렇게 말하며 선혜를 침대에 앉혔지만 경애 혼자 집을 청소하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 선혜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쉬라니까.”
“괜찮아. 휴지로 막고 하면 되지. 이리 줘, 엄마. 내가 할게.”
경애는 순순히 청소기를 넘겼다. 두 모녀는 어질러진 집을 닦고 쓸었다.
*
정리와 청소를 대충 마친 두 모녀는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 제철인 딸기가 제법 야무지게 달아서 자꾸만 손이 갔다.
“수호 데리러 안 가?”
시계를 힐끔 쳐다본 경애가 선혜에게 물었다. 이쯤 되면 수호 데리러 간다고 부산을 떨 시간인데 느긋하게 여유 부리는 모습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등·하원 도우미 붙였어.”
“뭐? 뭔 도우미?”
듣도 보도 못한 말에 경애가 놀라며 물었다.
“등·하원 도우미라고, 애들 등·하원만 시키는 도우미가 따로 있어서.”
“갑자기 왜?”
“그냥.”
선혜는 짧게 대답하며 딸기를 입에 가져다댔다.
의아한 얼굴을 한 채 딸기를 포크로 찍던 경애가 문득 눈을 찡그리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포크를 잡은 선혜의 오른 손목에는 손목 보호대가 채워져 있었다. 간간이 아픈지 손목을 돌리며 인상을 찌푸린다.
늘 그렇듯이 잠을 못 자 푸석한 얼굴. 그렇다고 지친 기색에 예쁜 얼굴이 가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외려 경애의 안타까운 마음에 부채질했다.
방금 전 코피를 쏟던 모습이 떠올랐다.
등·하원 도우미를 붙여야 될 정도로 몸이 많이 상한걸까.
가슴이 저며와 안타까운 얼굴로 선혜를 보는 경애다. 그러다 곧 비장한 얼굴로 포크를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너, 남자 소개받을래?”
딸기로 향하던 포크의 움직임이 허공에서 멈췄다. 선혜가 눈만 들어 경애를 쳐다보았다.
“엄마 일하는 가게에 자주 오는 단골이 하나 있는데, 어쩌다 네 사진을 보더니 소개해달래.”
“나 애 엄마인 건 알아?”
“안 그래도 얘기했는데 상관없다더라. 한번 꼭 만나고 싶대.”
경애가 상기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유명 로펌 변호사라고 하는데 수익이 워낙 좋아서 사무실 하나 새로 차린다고 하더라고. 얼굴도 그만하면 훤칠한 편이고, 성격도 시원시원하니 좋고. 게다가…….”
탁. 선혜가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에 경애가 입을 다물었다.
“엄마. 나 남자 필요 없어.”
선혜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경애가 입을 힘주어 다문 표정으로 선혜를 보았다. 그 얼굴에 서린 속상한 기색을 외면하며 선혜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만 좀 해.”
저번에 싸운 일도 있고 해서 참고 넘기려고 했는데 넘어가지 지가 않았다. 변호사라는 말에 지난 주말 일이 생각이 났다.
연지의 성화에 못 이겨 그녀가 주선한 소개 자리에 몇 번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늘 상황과 자리가 편치 않았기에, 이번에 소개해줄 남자가 변호사라고 했을 때에도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정말 최악이었다.
연지가 말했던 것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그녀와는 열 살 차이였다. 나이 차도 나이 차지만,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성격에 허풍만 잔뜩 늘어놓았다.
결혼하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하겠다나 뭐라나.
아니, 결혼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김칫국을 한 항아리는 족히 들이마신 것 같았다.
나이도 많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 왜 결혼을 못 했나 싶었는데.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전 약혼자였던 양재민, 그 남자가 생각났다. 선혜 인생 최대의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남자가.
결국 그날 먹은 밥이 다 얹히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했던지.
그때를 생각하니까 짜증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선혜의 반응을 보고 한발 물러서는가 싶던 경애는 아무래도 기회가 아까웠는지 포기하지 못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응? 한 번만 만나 봐. 만나봤는데 괜찮을 수도 있는 거잖아. 잘하면 수호한테 좋은 아빠가 되어줄 수도 있고.”
선혜가 딱딱하게 말했다.
“나, 지금까지 혼자서도 수호 잘 키웠어. 앞으로도 잘 키울 자신 있고.”
“선혜야.”
“안 그래도 주위에서 난리들인데 엄마까지 그러지 마, 좀.”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엄마는 너 걱정 돼서.......”
“걱정 같은 거 안 해도 돼!”
결국, 선혜는 폭발하고 말았다.
“나 잘살고 있어. 남편 없어도 혼자 잘하고 있다고. 그리고 남편이 꼭 필요한 거야? 꼭 남자를 만나야 해? 오히려 남자 잘못 만나서 인생 망한 사람도 있……!”
선혜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감정이 과하면 늘 사람은 실수하는 법이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경애의 눈이 상처를 입고 흔들렸다. 선혜가 입을 다물고 난감한 얼굴로 이마를 손으로 쓸다가 입을 열었다.
“엄마, 나는…….”
“……갈게. 딸기나 마저 먹어.”
옷가지를 챙겨 일어나는 경애를 따라나선 선혜가 현관에서 경애를 붙들었다. 경애가 야멸차게 그 손을 뿌리치고 홱 돌아보았다.
붉어진 경애의 눈시울을 본 선혜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너는 엄마 마음을 그렇게 몰라! 너는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잖아! 그래, 너 여기저기 시달리는 거 알아. 너 예쁘고 능력 좋지. 그래서 주위에서 안타까워하는 것도 잘 알고. 엄마라고 다르겠어? 엄마는 더해! 나는 너 기왕 사는 거,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단 말이야. 이렇게 혼자 고생하지 말고 좋은 남자 만나서 편하게 살면 얼마나 좋니!”
경애가 울분을 터트리며 가슴을 탁탁 쳤다.
“뻑 하면 무리해서 밤새고, 피곤해서 골골대는 꼴 보는 내 마음이 어떨 것 같은데! 하나뿐인 딸래미 죽어라 고생하는 거 보면 내 속이 다 썩어 문드러진다고!”
바락바락 소리치던 경애의 씨근덕거리는 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선혜는 꼼짝도 못 하고 굳은 듯이 서서 그런 경애를 마주 보고 있었다.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떨어지려는 눈물을 가둔 경애가 선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 그렇게 일해서 몸 망가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그리고 그러는 거, 못 할 짓이야. 나한테도, 그리고 수호한테도.”
말을 마친 경애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벌컥 열린 문틈 사이로 반쯤 몸을 뺀 그녀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돈이 그렇게 벌고 싶으면 차라리 회사를 들어가던지.”
지난번 싸움의 원인을 다시 한번 짚은 경애가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쿵. 삐리릭.
닫힌 현관문 앞에서 선혜는 뜨거워진 눈시울에 손바닥을 꾹 눌렀다.
끓어오르는 속을 삭이고 있는데 멀리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겨우 든 선혜가 힘없이 거실 좌탁으로 걸어가 핸드폰에 손을 뻗었다.
발신자는 등·하원 도우미.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선혜는 내키지 않은 기색으로 집을 나서고 있었다.
등·하원 도우미는 고용한 지 일주일 만에 사표를 냈다.
‘사모님.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사정이 생겨서 더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도우미가 일을 못 하는 이유인즉슨, 임신해서였다. 입덧이 심하고 몸이 영 안 좋아 일을 할 수 없다고.
선혜는 곧바로 도우미를 구한 업체와 연락을 했지만 사람을 바로 구하기는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난감했지만 별수 있나. 그렇다고 어제 싸운 경애에게 수호의 등원을 맡기기에도 염치가 없었다.
결국, 선혜는 수호의 등원에 다시금 동행해야 했다.
태준이 생각나 발걸음이 가볍진 않았다.
그 남자와 마주치기 싫어 등·하원 도우미를 쓴 거였는데.
설마 이 아침부터 마주칠 리는 없겠지. 그래, 애 아빠도 아니고 외삼촌인데. 그때만 데리러 온 거겠지.
선혜는 그렇게 불안으로 동당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차를 몰았다.
차창 너머로는 유치원 건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태준은 미국에서 경영수업을 마치고 귀국한 이래로 태연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계속 눌러사는 건 아니었고, 구해놓은 신축 오피스텔이 공사 업체와 문제가 생겨 아직 완공되지 않아 입주를 못 했기 때문이었다.
공짜는 아니었다. 머무는 조건으로 태준은 세빈을 돌봐야 했다.
해외 출장이 잦은 매형은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누나인 태연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세빈에게 많이 신경 써 주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이제는 등원 준비도 능숙하게 해냈다.
세빈의 단발을 양 갈래로 묶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너, 되게 열심이다?”
꽤 적극적으로 돕는 태준이 신기했는지 눈치 빠른 태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연예인인 누나를 닮아서 그런지 연기에 일가견 있는 태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이제 곧 회사 들어가면 세빈이 보는 것도 힘들 텐데. 기회 될 때 많이 봐둬야지.”
그 말에도 태연은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태준 덕에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별말 없이 넘어갔다.
태준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거실로 향하는 태연의 뒷모습을 흘끔거리다 회심의 미소를 몰래 지어 보였다.
태연한테 한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세빈의 등·하원을 이토록 적극적으로 돕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유치원 앞에서 또 선혜를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자기를 의식해서인지 등·하원 도우미로 보이는 사람이 수호의 등·하원을 돕고 있었다.
그래도 매일같이 기대를 품었다.
오늘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하지만 일주일째 허탕이었고, 회사 입사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어 마음이 초조해지고 있었다.
꼭 다시 한번 만났으면 좋겠는데.
미련을 버릴 시간 정도는 필요할 테니.
날짜를 확인하는 태준의 입 밖으로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