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5화 (5/109)

#5. 남편이 누구인지

스케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거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태연은 도어록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우리 딸 왔어?”

태준에게 안겨 있는 세빈에게 손을 뻗자 세빈이 순순히 팔을 벌려 품에 안겼다. 태연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세빈을 품에 꼭 끌어안고는 연신 입을 맞췄다.

“누가 보면 한 몇 달 안 본 줄 알겠다?”

태준이 비딱하게 말하며 신을 벗었다.

“너도 한번 낳아 봐. 누나 마음 십분 이해할걸?”

태준은 태연의 충고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봉투를 부엌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비스듬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녹기 전에 먹어. 아님 냉동실에 넣어놓든지.”

“넌 같이 안 먹고?”

“피곤해서. 씻고 좀 잘래.”

뭐가 그렇게 피곤하냐고 핍박하려던 태연은 길었던 비행기 시간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욕제 빨간 건 쓰지 마라.”

태준은 대답 대신 한 손을 들어 올리고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비행기 한두 번 타는 것도 아니고. 뭐 저리 골골대나 모르겠네, 젊은 애가.”

닫힌 욕실 문을 보며 중얼거린 태연은 세빈과 함께 태준이 사 온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세빈이 간간이 태연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태연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스크림 사 줄 테니까 방금 있었던 일은 엄마한테 비밀이다.’

‘왜 비밀인데 외삼촌?’

‘넌 몰라도 돼.’

태준은 끝까지 세빈이 졸라도 대답하지 않았다.

세빈은 아이스크림 사이에 든 초코칩을 씹으며 행복하게 웃었다. 비밀을 지켜준 대가치고 너무나 달고 황홀했다.

다음에 또 외삼촌 비밀 알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세빈은 생각했다.

*

한편, 태준은 태연이 풀지 말라는 입욕제를 푼 원형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유치원 앞에서 마주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잔뜩 당황해 놓고서는 모른다고 요령 없이 시침을 떼던 얼굴.

그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얼마 만에 본 거더라, 하다가 6년이라는 햇수를 떠올리고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6년. 6년이라.

벌써 그렇게 됐나.

세월에 깎여 닳을 만도 하건만 그때의 기억과 감정은 왜 이리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 모를 일이다.

특히 아를에서 니스로 돌아온 후의 일들은 강렬하기만 했다.

*

아를에서 니스까지 기차를 타고 걸리는 시간은 대략 여섯 시간 남짓.

니스에 도착하니 어느덧 밤이 다 되어 있었고 연 가게라고는 술집이 전부였다.

둘은 별수 없이 손님이 적은 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안주를 넉넉히 시키고 주인이 추천해준 와인 한 병을 시켰다.

안주도 반쯤 비우고 와인도 바닥을 보일 무렵.

몽롱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창밖으로 비에 젖은 풍경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을 태준은 턱을 괸 채 응시하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둘이 처음으로 마주친 곳은 공항 서점이 아니었다.

서울의 어느 도로 한복판에서 둘은 한번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갓길을 따라 달리던 와중, 차도에서 인도 쪽을 향해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하여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켜뜬 태준은 눈앞의 여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었다.

오토바이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얼굴이 놀랄 만큼 예뻐서는 결코 아니었다.

앞섶이 뜯어진 원피스. 찢어진 스타킹.

그리고 발갛게 부은 뺨 위로 선명히 낙인처럼 찍혀있던 손자국.

누가 봐도 폭력의 흔적이 역력한 모습을 보고 얼어있는데, 그 순간 여자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자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미안한 얼굴로 태준에게 고개를 숙인 뒤 빠르게 멀어졌었다.

그때 본 여자의 얼굴이 뇌리에 새겨져 잊히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미인이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아닌 것 같았다. 예쁜 여자라면 연예인인 누나를 통해 질리도록 봐왔다.

반했구나.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그때 쫓아가 붙들어 병원이라도 데려갔어야 했는데.

짧은 인연에 아쉬워했었다.

그래서 공항 서점에서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거기다 여행지까지 같아서 얼마나 반갑던지. 경계하며 철벽을 치는 모습에 더는 다가갈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었는데 이렇게 니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를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전날 경계했던 모습이 떠올라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아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기차역에 있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녀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수상쩍은 놈들도 여럿 보였고.

결국 보이지 않는 보디가드를 자처한 태준은 그녀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지켜주기로 결심했다. 니스에 도착한 뒤로 줄곧 그랬던 것처럼.

여자에게 접근하려는 남자들을 퇴치하면서도, 이 여자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태준은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빗물에 화장기가 씻겨 내려간 모습마저도 예쁘기만 했다. 그냥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반응한다.

낯선 감각이었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태준은 모르지 않았다.

“저기, 혜교 씨.”

가짜 이름을 알려준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렇게 불렀었다.

“핸드폰 번호 알려주면 안 돼요?”

대답 없이 빤히 쳐다보자 입안이 괜히 바짝 말랐다. 태준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 한국 가서도 그쪽이랑 연락하고 싶은데.”

이 인연을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알려주면 안 돼요?”

거듭 묻던 태준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살짝 들이밀었다.

“저기요?”

여자의 눈꺼풀이 반쯤 닫혀 있었다. 살짝 내리깐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발갛게 상기된 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오가는 숨결은 와인 향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저기요 혜교 씨, 취했…….”

걱정스러워 그렇게 묻는 때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툭, 태준의 입술을 건드렸다.

태준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굳혔다.

손가락은 계속해서 움직여 태준의 얼굴 위를 더듬었다. 입술에서 뺨으로, 오뚝한 콧대를 쓸어보다가 독특하게 꺾인 짙은 눈썹을 따라 움직인다.

별거 아닌 손길인데 너무나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아랫배가 싸해지며 굳어지는 느낌이 났다.

낯선 감각.

다시금 내려와 입술을 더듬는 그녀의 손을 태준이 낚아채듯 붙들었다.

그러자 휘청 몸이 기울며 거리가 가까워졌다.

느리게 들어 올린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테이블이 작은 탓에 거리가 몹시도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태준을 밀어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을 오롯이 바라볼 뿐.

다소 야릇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태준은 겨우 여자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만 가죠. 숙소에 데려다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일어나자 여자도 테이블을 짚고 일어났다.

계산하러 가며 태준은 불안하게 뒤를 보았다.

휘청이는 걸음걸이. 잔뜩 풀어진 얼굴.

무방비한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고자 바라본 창밖으로는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

.

.

축축하게 젖어 든 인도에 여자의 발이 이리저리 퍽퍽 내디뎌졌다.

태준은 여자의 한쪽 팔을 잡아 넘어지지 않게 부축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숙소가 정확히 어디예요?”

잔뜩 풀린 눈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초점이 흐렸다. 어딘지 가늠하려는 듯 미간을 좁혀보지만, 소용이 없는 듯했다.

태준이 답답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몰라요?”

“아뇨, 아는데…….”

말끝이 흐려지다 고개가 푹 숙여진다.

“정신 좀 차려봐요.”

“…….”

“……미치겠네, 진짜.”

태준은 입술을 사리 물다가 우산 너머를 쳐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는 자신이 묵는 호텔이 있었다.

데려가야 하나.

하지만 아무 일도 없으리라 장담을 못 하겠다.

그녀만큼은 아니었으나 자신 또한 꽤 취한 상태였다. 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감정 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다른 호텔 방을 잡아주자니 이 상태로 혼자 두기는 불안했다.

‘어떡하지.’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때였다.

일순 손이 휑해졌다. 여자를 부축하던 손이었다.

놀라서 옆을 바라보자 차도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보도블록 아래로 발을 잘못 내디딘 그녀의 몸이 차도 쪽으로 휙 기울었다.

그 순간 멀리서 달려오는 차 한 대가 있었다.

태준이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향해 재빨리 다가가 끌어당겼다. 가녀린 몸은 강한 힘에 그대로 끌려왔다.

바퀴가 지나간 웅덩이에서 물보라가 치고 빠앙- 하는 클랙슨 소리가 멀어졌다.

서늘한 간담을 붙든 채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태준은 안도의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태준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자신이 품에 안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태준의 눈이 진동하듯 흔들렸다. 가슴이 엇박자로 뛰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몸이 확 달아올랐다.

몸에 감겨오는 여체는 따듯했고, 가냘팠고, 또한 부드러웠다.

얼굴에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자극적이었는데 젖은 몸이 밀착되어 있으니 아까와는 차원이 다르게 이성이 흔들렸다.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태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안 돼. 정신 차려.’

인내를 한계까지 끌어올린 태준이 심호흡을 하며 팔을 겨우 풀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쉰 태준이 품에 안긴 그녀를 밀어내려는 그때.

꽉. 여자의 두 손이 태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하얀 셔츠 자락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셔츠 너머로 닿는 손길에 이성을 붙든 고삐가 아슬아슬하게 당겨졌다. 그러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한 순간에는 거의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위험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에 힘을 주는 찰나였다.

여자가 발돋움을 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이 다가온다 싶은 순간 태준이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던 그가 돌연 픽, 헛웃음을 흘렸다.

“뭐, 이미 늦었나.”

말을 마친 태준이 그녀의 턱을 움켜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우산이 떨어졌다. 비에 젖을 새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내리는 비는 차가웠지만 뜨겁게 타오른 정염을 식히지는 못했다.

낭만으로 물든 니스의 밤거리,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로를 탐하는 진한 입맞춤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선명하기만 하다.

거칠게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지던 옷가지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던 야경 아래 하나하나 드러나던 새하얀 살결. 열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과 어깨를 틀어쥐던 가느다랗고 작은 손까지.

태준은 손을 들어 뻣뻣해진 목덜미를 느리게 문질렀다. 잠시 참았던 숨을 몰아쉬자 입욕제의 향기가 폐부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장미향. 입욕제.

떠오르는 기억 한 자락에 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새벽에 깬 그녀를 조심히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내려주었을 때였다. 그녀가 차오른 물속에 다급히 입욕제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입욕제는 왜요?’

‘……보일까 봐요.’

그 말에 태준은 이미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데 새삼스럽다며 웃었었다. 내외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게 느껴졌었다.

장미 향에 취했는지 그녀에게 취했는지.

욕조 안에서 이어지던 입맞춤은, 숨 막힐 정도로 황홀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긴긴밤이 지나가고 다음 날 아침.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건 미안하다고 적힌 쪽지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찾아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금방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태준은 그녀를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알려준 이름이 거짓이었으니까.

그녀는 거짓만을 남겨 놓은 채 그렇게 사라졌다.

태준의 심장에 ‘첫사랑’이라는 결코 지울 수 없는 낙인과 강렬한 첫 경험의 기억을 남겨 놓은 채로.

그때 느꼈던 허탈감이 다시금 밀려왔다.

태준은 길게 누우며 물 안에 몸을 어깨까지 담갔다.

물에 젖은 얼굴에는 아쉬움과 체념이 반반 섞여 있었다.

남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러워 죽겠다. 미치도록.

“하…….”

태준의 긴 한숨 소리가 욕실 안에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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