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만난 애 아빠-3화 (3/109)
  • #3. 나 알잖아

    서울 부촌에 자리한 사립 유치원 앞은 아이들을 데리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엄마들이 대부분이었고 간혹가다 육아휴직을 얻은 아이 아빠들도 보였으며 흔치 않게 기사로 보이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원래는 유치원 버스가 있었으나 매체를 통해 유치원 버스에서 일어나는 불의의 사고가 여럿 보도됨에 따라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버스를 없앤 지 한 달.

    이제는 익숙한 유치원 앞 풍경이었다.

    선혜는 근처에 차를 세우고 유치원 앞으로 다가갔다. 봄날치고 햇빛이 유난히 눈이 부셔서 근처에 서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섰다.

    지나가는 학부모들과 가볍게 목인사를 주고받으며 유치원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런 선혜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간간이 닿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의 그늘 밑에 서 있기에 눈에 띄지 않을 법도 했건만 주위 환경은 그녀의 외모를 가리는 데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만큼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였다.

    애 엄마라고 보기 힘든 얼굴에 몸매까지. 감탄과 부러움, 그리고 시기 어린 시선들이 선혜를 한차례 훑고 지나갔지만 정작 선혜의 표정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선혜는 문득 불어온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순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남자가 가로등에 부딪혔다. 선혜를 보고 멍해져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 벌어진 불상사였다.

    우당탕하는 소리에 선혜가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봤다. 선혜와 눈이 마주친 자전거 운전자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부랴부랴 자전거를 세워 도망치듯 내뺐다.

    선혜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때였다.

    “어머, 우리 자기는 오늘도 외모가 열일하네?”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와 선혜는 옆을 돌아보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훅 넘어왔다. 진한 화장과 화려한 액세서리. 높은 구두. 수수한 선혜와는 상반되는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진한 눈화장 사이로 잡힌 잔주름이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수호와 동급생인 민희의 어머니, 연지였다.

    선혜는 미소 띤 얼굴로 연지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민희 어머니.”

    “안녕 못 하는데 이걸 어쩌나.”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늘어뜨리는 연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기 내가 소개해준 남자, 주말에 퇴짜 놨더라?”

    선혜는 그저 웃었다. 사실 오늘 나오면서도 이 얘기를 할 거라고 내심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런 선혜를 보며 연지가 투덜거렸다.

    “아니, 다시 시작하기에 그런 남자가 또 어디 있다고. 자기가 아직 어려서 그러나 본데 남자는 외모가 아니라 능력이야. 한번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는 게…….”

    “민희 어머니.”

    선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지를 불렀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 연지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신경 써 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분과는 인연이 아닌 것 같아서 정중히 거절한 것뿐이에요. 좋은 분 소개해주셨는데, 본의 아니게 마음 상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흠잡을 데 없는 예의 바른 거절에 연지는 눈을 흘기면서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콧소리 섞인 헛기침을 허공에 내뱉을 뿐.

    미혼모 주제에 뭐 저리 도도하게 군담. 속으로 그 한마디를 삼키며 연지가 아니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자기가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결국 한발 물러난 연지였다.

    선혜는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한 채 유치원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숨긴 채로.

    연지가 유난히 적극적이긴 했지만 연지 말고도 선혜에게 새 시작을 권유하는 사람은 많았다.

    이제 갓 서른에 출중한 외모를 썩히는 게 아깝다며 다들 앞다투어 남자를 소개하기 바빴다.

    하지만 정작 선혜 본인은 새 시작할 생각이 없었다.

    프리랜서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넉넉한 데다 엄마인 경애의 지원 또한 든든하여 수호를 키우는 데 무리는 없었다.

    아들과 단둘이 사는 현재의 생활은 충분히 행복했다.

    두 사람의 삶에 누군가 끼어드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주위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나갔을 뿐.

    이제는 그것도 점점 지쳐가지만.

    더구나 주말에 연지가 소개해주었던 남자는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나는 기분에 선혜는 고개를 저어 기억을 털어냈다.

    앞으로는 다시는 그런 자리 나가지 말아야지. 결심 선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시간을 확인하니 하원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오늘은 조금 늦게 끝나나.’

    선혜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초조하게 목을 빼고 바라보는 때였다.

    멀리서 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손 인사를 하는 아이들 사이로 수호가 보였다.

    수호는 선생님에게 손을 살짝 흔들더니만 선혜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계단을 내려왔다.

    선혜가 기다리지 못하고 입구 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선혜가 수호와 눈을 맞추고 쪼그리고 앉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긴 선혜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아들, 오늘은 어땠어?”

    “그냥 그랬어.”

    아이답지 않게 시니컬한 대답을 하는 수호다.

    그런 수호를 보며 피식 웃은 선혜가 가방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메고 가도 괜찮은데.’ 하며 투덜거리던 수호는 선혜의 완강한 손짓에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가방을 벗어 건네주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반가운 얼굴로 선혜에게 다가왔다.

    턱선에서 살랑이는 결 좋은 단발머리에 인형같이 예쁘장한 얼굴.

    얼마 전 전원 온 수호와 같은 반 친구인 세빈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세빈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해 오자 선혜가 기특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응. 안녕.”

    “오늘도 엄청 예뻐요, 아줌마.”

    세빈이 엄지를 척 내밀며 하는 말에 선혜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세빈이 네가 훨씬 더 예뻐.”

    “정말요? 히히.”

    “빨리 집에나 가, 장세빈.”

    선혜의 칭찬에 부끄러운 얼굴로 헤실거리던 세빈이 수호의 타박에 입을 댓 발 내밀며 샐쭉거렸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아줌마.”

    인사를 마친 세빈이 수호를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수호는 질렸다는 얼굴로 세빈이 멀어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혜는 그런 수호를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이상하게 세빈이한테 까칠하더라?”

    “귀찮게 하잖아, 자꾸.”

    수호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까칠한지. 확실히 성격은 자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외모는 아빠를 쏙 빼닮았지만.

    불현듯 아이 아빠 생각이 났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요즘 들어 자주 꾸는 꿈. 아니, 정확히 말하면 꿈을 통해 형상화되는 과거의 기억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했던 꿈 탓일까. 잇따라 떠오르는 기억 또한 선명하기만 하다.

    비가 내리는 니스의 밤거리.

    거리를 덮치던 물보라.

    자신을 품에 당기던 강인한 팔과 단단하고 따듯했던 품.

    그리고.

    ‘뭐, 이미 늦었나.’

    내리는 비 탓에 수채화처럼 번진 풍경 속에서 이어지던 입맞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기억을 더듬어가던 선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애 옆에 두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선혜가 한숨을 내쉬자 수호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런 수호와 눈이 마주치자 선혜는 싱긋 웃으며 수호의 손을 잡았다.

    “얼른 집에 가자.”

    재촉하듯 말하며 몸을 돌리던 그때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쏴아아.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쓸고 지나간다.

    제법 바람이 거세서 선혜의 긴 머리가 이리저리 흩날리며 앞을 가렸다.

    선혜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시야가 트이고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안기는 세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 엄마가 유명한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엄마 이름이, 신태연이었던가.

    아이를 안아 드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세빈을 데리러 온 기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무심결에 남자의 얼굴을 본 선혜는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까 선혜가 서 있던 나무 아래.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세빈을 한 팔로 안아 든 채 서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그늘 아래에서도 눈에 띌 만큼 잘생긴 남자였다.

    남자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세빈이 재잘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흐트러진 아이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짓은 투박했지만 다정했고 피식 웃는 입꼬리와 휘어지는 눈매가 유독 매력적이었다.

    왼뺨에 은근히 패는 보조개는 그 매력을 한층 더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시야에 담겼다. 동시에 익숙함이 피어올랐다.

    ……꿈일까.

    내가, 잠에서 덜 깼나.

    바보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이었다.

    “엄마, 왜 그래?”

    수호가 맑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수호의 목소리에 뒤늦게 반응한 선혜가 퍼뜩 정신을 차린 그 찰나.

    남자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결국에는.

    “!”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음과 동시에 손에 들려있던 수호의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쏴아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시금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 귓가에 울려댔다.

    선혜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떠 보였던 남자는 어느덧 표정 없는 얼굴로 선혜를 보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도, 큰 키도, 단단하고 넓은 어깨도 여전했지만.

    “…….”

    무엇보다도 그녀를 향한 올곧은 시선이 그대로였다.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는 저 눈빛.

    선혜는 뒤늦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빠르게 주워들고는 수호의 손을 고쳐잡고 보챘다.

    “가자, 얼른.”

    그렇게 몇 발자국 떼었을까.

    얼마 안 가 앞이 가로막혀 선혜의 발걸음이 도로 멈추고 말았다.

    내리깐 눈동자에 단단한 구두 끝이 들어왔다. 선혜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헛숨을 삼키자 코끝에 옅은 담배 냄새와 섞인 스킨 향이 흘러들어왔다.

    페로몬에 반응하듯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꽉 쥔 주먹 사이로 땀이 찬다.

    몸을 돌려 가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선혜는 석상처럼 굳은 채로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나 알죠.”

    중저음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귓가를 휘감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선혜는 쿵쿵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에는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나 알잖아.”

    동요를 머금은 눈동자가 한껏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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