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7화 (148/148)

외전 7. 끝나지 않는 이야기

900년 겨울. 그해의 마지막 날, 페렌트 왕도 릭센에 눈이 내렸다. 끝없이 내리는 눈에 소리가 모두 묻힌 듯 유난히도 조용한 밤이었다.

세상을 뒤덮는 함박눈 사이로 대낮처럼 불을 밝힌 왕궁의 모습이 보였다. 궁인들은 소리 없이 움직이며 신년회 준비의 막바지에 박차를 가했다.

이번 신년회는 출산 이후 쭉 메르디에스에 머물렀던 국왕 부부가 왕궁으로 귀환해 치르는 첫 행사였다. 바짝 기합이 든 궁인들은 종종걸음을 치며 손님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한동안 적적했던 왕궁에 활기가 돌았다.

“궁내부장님, 리카서스 후작께서 성문을 지나셨다고 합니다.”

글레나 뒤를 이어 새 궁내부장이 된 이블린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폐하께는 내가 전하마. 귀빈을 모시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

“네.”

이블린의 명을 받은 시녀가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몇 시간 뒤면 근 한 달간 준비한 신년회가 시작된다. 이는 새로이 궁내부장이 된 이블린이 주관하는 첫 행사였다.

긴장감으로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이블린은 태연한 얼굴로 한숨을 꾹 삼키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점검했다. 신년회 준비야 모두 끝났으니 남은 것은 무사히 행사를 치르는 것뿐이었다.

“폐하께선……. 아니다. 왕녀님께 드실 시각이구나.”

이블린은 습관처럼 아리아드네의 위치를 확인하려다 시각을 보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작년 늦봄, 페렌트에는 큰 경사가 있었다. 페렌트 왕가의 유일한 후계라 할 수 있는 왕녀가 탄생한 것이다.

모두의 사랑 속에 태어난 아이였다. 첫 아이를 향한 국왕 부부의 사랑 또한 지극했다. 왕녀를 귀애하는 마음이 어찌나 유별났는지 국왕 부부는 손수 아이를 기르다시피 했다. 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왕후가.

보통 귀족 가문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유모나 전담 시녀의 몫이었다. 부모의 역할은 적당한 인력을 배치하고 성장 과정을 점검하는 것이지, 아이를 직접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후는 그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했다. 실제로 왕녀는 유모나 전담 시녀의 품에 안긴 시간보다 왕후의 품에서 훨씬 오랜 시간을 보냈다.

부모의 지극한 애정 속에서 자란 왕녀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자라는 만큼 말도 활동량도 넘쳐나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곤 했지만.

왕녀가 태어난 이후로 아리아드네의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리아드네는 공식 일정을 대폭 축소하고, 아이와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덕분에 이블린이 아리아드네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수월해졌다. 지금은 국왕 부부가 왕녀의 처소에 있을 시각이었다. 역시나, 왕의 근위대가 왕녀의 처소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블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폐하, 이블린입니다.”

“들어와.”

아리아드네의 허락에 이블린은 열린 문 사이로 발을 디뎠다.

“이브!”

그녀를 발견한 왕녀가 방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네, 리시테아 님. 이브입니다.”

리시테아 메르디에스. 페렌트 왕실의 유일한 후계인 왕녀 리시테아는 유진의 검은 머리카락과 아리아드네의 푸른 눈을 골고루 물려받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아빠, 이브, 이브야.”

유진의 발등에 올라가 손을 맞잡은 채로 방 안을 아장아장 돌아다니던 리시테아가 이블린을 가리키며 손을 뻗었다.

“리시, 이브한테 갈까?”

“응!”

유진의 제안에 리시테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리시테아의 손을 맞잡은 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문가에 선 이블린에게로 걸어갔다.

물론 발등에는 리시테아를 곱게 얹은 채였다. 리시테아는 혼자 걸을 때보다 빠르고 능숙해진 걸음이 신나는지 쉴 새 없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제힘은 조금도 들이지 않고 이블린 앞에 당도한 리시테아가 유진의 발등에서 폴짝 내려왔다.

“이브 좋아!”

리시테아가 이블린 앞에서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어서 자신을 안아 달라는 듯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블린이 웃으며 리시테아를 품에 꼭 안았다. 아이의 부드러운 살결과 따끈따끈한 체온에 이블린은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파혼을 겪으며 결혼 생각은 없어졌지만, 아이만 낳아 키우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요즘 이블린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아빠!”

그새 이블린의 품에서 벗어난 리시테아가 유진을 부르며 다시 팔을 벌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리시테아의 손을 잡아 제 발 위에 얹었다.

리시테아는 그것이 퍽 만족스럽다는 듯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이쯤이면 거의 탈것 취급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취급도 마냥 좋은 듯, 웃으며 한 발씩 바닥에서 뗐다 붙이며 제자리걸음을 해 주었다.

“아빠, 엄마, 엄마야!”

“이번에는 엄마한테 갈까?”

그의 물음에 리시테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유진의 발등에 얹힌 리시테아가 이번에는 아리아드네 앞으로 곱게 배달되었다.

“엄마!”

“리시, 재밌니?”

“응!”

“이 장난꾸러기, 네 아빠 발에서 언제 내려올 거야? 응?”

아리아드네가 리시테아를 꼭 안은 채로 온몸에 마구잡이로 뽀뽀를 해 댔다. 아이는 간지럽다는 듯 온몸을 꼬며 웃음을 터트렸다.

발등 걸음마에 재미를 붙인 리시테아는 요즘 제 아빠만 보며 발등에 올려 달라 조르곤 했다. 아무리 범인의 체력과 비교할 수 없는 그라도 힘들지 않을 리가 없는데, 유진은 무엇이든 그만하자고 말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아이가 힘들어 먼저 나가떨어지거나 흥미를 잃을 때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놀아 주는 훌륭한 아빠였다.

리시테아가 같은 놀이를 하자 조르는 것이 삼십 분만 넘어가도 다른 거 하자며 살살 꼬드기는 아리아드네로서는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인내심이었다.

“이블린, 사람들이 슬슬 도착할 때가 됐지?”

아리아드네가 딸아이의 보들보들한 볼에 쪽 소리를 내는 것으로 뽀뽀 세례를 마치고는 몸을 일으켰다.

“네, 리카서스 후작께서 성문을 지나셨습니다.”

“리에트와 르네가?”

신년 연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다리에 매달린 채로 방긋방긋 웃는 리시테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짧게 다듬은 검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이쪽으로 안내해. 리시랑 얼굴도 볼 겸.”

“리시!”

아리아드네의 다리에 매달린 채로 빙빙 돌던 리시테아가 제 이름에 반응하며 소리를 질렀다.

“좋아?”

“좋아!”

아리아드네가 손가락을 굽혀 동그란 코끝을 톡톡 두들기자, 리시테아는 웃음을 터트리며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정말 깨어 있는 동안에는 조금도 쉬지 않는 무한 체력이었다.

“네, 그럼 두 분을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녕, 이브.”

아리아드네의 다리에 매달린 리시테아가 이블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리시테아는 하루에 몇 번씩 보는 사람들에게도 매번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인사를 해 댔다. 어쩌면 아이에게는 인사도 하나의 놀이인 걸까.

“피곤하진 않아?”

슬쩍 다가온 유진이 아리아드네에게서 리시테아를 떼어 내 품에 안았다. 리시테아가 제 무게를 실어 아리아드네에게 막 매달리기 시작한 때였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리시테아가 아리아드네에게 몸으로 치댄다 싶으면 냉큼 아이를 데려갔다.

그의 유난 덕에 아리아드네는 리시테아가 신생아일 때도 삼십 분 이상 안아 본 일이 드물었다. 종일 아이를 본 건 자신이면서 지금 누구한테 피곤하냐고 묻는 건지.

“내가? 아니, 오늘 한 것도 없는데 뭐가 피곤해.”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가 아리아드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는 동안 리시테아는 유진의 등을 타고 넘어와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리아드네는 제 아빠를 마치 나무처럼 타고 넘나드는 딸아이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다.

정말 남다른 운동 신경이었다. 사실 메르디에스 핏줄들은 하나같이 몸을 쓰는 일에 영 소질이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검사를 꿈꾸고도 평생 명검만 수집한 레너드 같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리시테아는 도무지 메르디에스 같지가 않았다. 이런 점은 아마도 아빠를 닮은 모양이었다. 주 양육자인 유진이 몸으로 잘 놀아 주는 편이라 더 그럴지도.

“정말 메르디에스에서는 보기 드문 능력인데……. 응?”

아리아드네가 버릇처럼 리시테아의 코끝을 문질러 주자 아이가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세 가족이 평화로운 시간을 한껏 만끽하던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어린아이가 보무당당하게 등장했다.

“나 왔느니!”

우렁찬 소리와 함께 등장한 아이는 리에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딸, 르네였다.

“르네, 제발…….”

리에트가 전전긍긍하며 뒤따라 들어섰다. 그녀는 가끔 제 딸을 정말 눈에 넣어서라도 숨기고 싶을 때가 있었다.

“참, 왕궁에서는 조심하기로 약속하였지.”

그제야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던 리에트의 말이 떠올랐는지 르네가 쭉 내민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구입니까.”

딸아, 너라서 걱정인 거야. 너라서. 리에트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위가 꽉 조이는 것처럼 아팠다. 르네를 키우며 얻게 된 신경성 위염이었다. 이러다간 연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리에트가 쓰러질 판이었다.

“이블린, 필요하면 부를게. 사람들 좀 물려 줘.”

“네, 폐하.”

유능한 궁내부장 이블린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물러났다. 탁, 순식간에 사람들이 사라지며 문이 닫혔다. 르네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살이라는 게 참으로 쉽지 않구나.”

더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삶에 통달한 듯한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하는 이가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어린아이라니. 어쩔 수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마를 짚은 작고 통통한 손도, 뾰족한 입술로 내쉬는 한숨도, 삐딱하게 선 짤따란 다리도 그저 귀엽기만 했다. 저를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홱 고개를 쳐든 르네가 주위를 둘러보다 리시테아를 발견하곤 곧장 다가갔다.

“오오, 이것이 네 아이냐?”

르네의 짙은 남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고사리 같은 르네의 손가락이 유진에게 매달린 리시테아의 발등을 슬슬 쓸었다.

자그마한 발등을 만지는 르네의 얼굴은 몹시 신중했다. 마치 식탁에 올라온 미끈한 푸딩과 한바탕 전투를 치를 때처럼. 어찌나 몰입했는지 르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이란 참으로 작구나.”

르네는 제 손에 폭 들어오는 자그마한 발을 보고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왕녀가 이젠 두 살이라 했던가? 이렇게 작은 발에도 있을 건 다 있다는 게 놀라웠다.

르네가 왕녀의 발을 만지작거리며 한껏 몰입한 그때였다. 아리아드네와 인사를 나누느라 딸에게서 잠깐 시선을 뗐던 리에트가 그 광경을 보고는 하얗게 질렸다.

“르, 르네, 왕녀 전하께 그 무슨 무례한…….”

왕족의 몸에 허락받지 않고 손대는 행위는 시해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리에트는 르네를 말리려 다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딸에게 닿기도 전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물방울이 두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아빠! 이거 뭐야?”

눈이 휘둥그레진 리시테아가 눈앞에 떠다니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토옥, 톡, 리시테아의 손이 닿자마자 물방울이 가볍게 터지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왕녀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지더니 이내 정신없이 물방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물방울에 단단히 홀린 얼굴이었다.

“르, 르네!”

리에트가 새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다른 사람 앞에서 함부로 능력을 쓰면 안 된다고 약속한 것이 몇 번이던가.

르네의 능력을 들킬 바에야 차라리 이상한 말을 하는 쪽이 백배 나았다. 리에트는 정말 이 자리에서 딱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놔둬. 리시도 좋아하는데, 뭘.”

“…….”

아리아드네의 태연자약한 반응에 리에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했다. 이 자리에서 당황한 건 리에트뿐이었다.

어린 왕녀야 그렇다 쳐도, 왕도 왕후도 하나같이 너무 태연했다. 자유자재로 물을 다루는 르네의 능력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런 그녀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아리아드네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아, 르네 능력 말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그땐 저런 물방울 몇 개가 아니었지. 연못의 물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으니까.”

아, 그래서……. 리에트는 갑자기 몰려오는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성물을 잃은 리카서스에서 물을 다루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까.

리에트는 그것을 저울에 올려 득실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 저울에 올라가야 하는 것이 제 딸이었기에.

무엇보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좀 특이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리에트는 제 딸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봐 그것이 늘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덤덤한 반응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이 별것도 아닌 일로 유난을 떤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르네는 왕의 유일한 대녀였다. 설사 르네의 능력이 밝혀지더라도 왕에겐 그것을 막아 주고 지켜 줄 만한 능력이 있었다.

리에트는 그제야 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리에트의 걱정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러다 왕녀 전하께 물방울이라도 튀면…….”

귀하신 몸이 아닌가. 리에트는 왕녀가 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리에트의 염려에 르네가 고개를 치켜들고는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했다.

“내겐 물을 다루는 것이 숨 쉬는 것보다 편한 일이라고 하지, 헉!”

르네가 한껏 잘난 척을 하느라 잠시 주의를 놓친 그 순간이었다. 속이 빈 물방울이 나타나야 할 자리에 물줄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아, 리에트가 그토록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르네가 장난을 치다가 방 안을 물바다로 만든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리에트는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왕의 대녀이면 무얼 하나. 금쪽같은 딸에게 물벼락이나 내리는 사고뭉치인걸.

리에트의 영혼이 지옥과 지옥을 오가고 있던 그때였다. 왕후의 가벼운 손짓에 왕녀를 향해 쏟아지던 물줄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해진 리에트가 왕후와 왕을 번갈아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왕녀의 부친께서 여러모로 좀 유능하셔서.”

리에트는 그제야 이 사람들이 르네의 능력에 놀라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저런 능력을 수시로 보는데 르네를 보고 놀랄 이유가 없지.

종일 시달렸더니 이젠 놀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대강 아무 말이나 해 맞장구를 쳤다.

“……네, 그래 보이시네요. 왕녀께선 정말 아무 걱정이 없으시겠어요. 이토록 유능한 부친을 두셔서.”

내내 왕녀만 보고 있던 왕후의 시선이 그제야 리에트를 향했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서늘한 회색빛 눈동자가 무심히 그녀를 훑어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위압적인 사내였다. 리에트는 왕후의 시선이 떠나자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남자랑 무서워서 어떻게 살지? 리에트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뎅그랑― 멀리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외성의 성문을 닫을 시각이 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곧 연회 시작할 시간이네. 이젠 슬슬 가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리에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 누가 오는지는 알지? 리에트는 다 처음인가?”

리에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신년회는 왕의 최측근들만 모여 조촐히 치르는 사적인 행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이는 면면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늘 모이는 이들은 명실공히 페렌트를 이끌어 가는 핵심 인물들이었다.

리카서스 후작이 되며 꽤 그럴싸한 위치에 올랐다지만, 리에트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왕궁에 든 것도, 리카서스 후작이라는 신분으로 왕도에 온 것도.

리에트는 작위 승계식조차 서남부의 리카서스 영지에서 치렀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리카서스 영지에서 이루어진 리에트의 작위 승계식에 참석했다.

서남부에서 리카서스의 지배력을 회복하고, 왕가와 리카서스가 결탁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분히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승계식이었다.

그것은 리에트가 이끄는 리카서스가 서남부 패권을 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승계식조차 영지에서 치르는 바람에 리에트는 왕도에 자리 잡은 이들과 안면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

“……네. 이제까진 뵐 일이 없었죠. 재상님과도 서면으로만 연락했으니까요.”

긴장이 되는지 리에트는 손을 주무르며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소심한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모두가 놀랄 만큼 과감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리에트였다.

‘뭐, 괜찮겠지?’

오늘 모이는 이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리에트의 위장이 걱정되다가도, 또 대범한 그녀의 행보를 보면 어련히 잘할까 싶기도 했다.

“리시.”

이대로 가기 전에 딸아이와 뜨거운 포옹이라도 할까 싶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사랑스러운 딸은 르네가 만들어 준 물방울에 혼을 빼앗긴 상태였다.

톡, 톡, 토옥, 톡, 쉴 새 없이 생겨나는 물방울을 터트리느라 리시테아는 몹시 분주했다. 아리아드네가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하지 못할 만큼.

“어쩜, 제 엄마는 안중에도 없는 것 좀 봐.”

짐짓 서운한 척해 보았지만, 혼이 나간 리시테아에게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그런 그녀를 달랜 건 유진이었다. 아리아드네를 뒤에서 끌어안은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여긴 내가 보고 있을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잘 시간이기도 하고.”

“알았어. 힘들면 다른 사람들 불러. 혼자서만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말썽꾸러기 딸을 그에게만 맡기고 내빼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아리아드네가 당부하듯 덧붙이자 그는 알겠다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리시 재우고 갈게.”

“알았어. 좀 이따 봐.”

왕과 왕후는 서로의 볼에 짧은 입맞춤을 하고 떨어졌다. 리에트는 국왕 부부의 애정 행각에 좀 머쓱해져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쳐 둘에게서 멀어졌다.

조금 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사내와 저 왕후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왕을 보는 왕후의 얼굴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리에트는 커튼, 벽의 모서리, 천장 등을 훑어보며 어색한 순간을 흘려보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식사 자리에 억지로 비집고 앉아 의자를 차지한 기분이었다.

리에트는 불편한 이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바람을 알았는지 아리아드네가 곧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르네는 리에트에게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 보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왕후가 그러라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외모가 좀 무서워서 그렇지, 나쁜 사람 같진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리에트가 아리아드네를 따라 그 자리를 벗어났다. 둘은 긴 회랑을 지나 중앙 궁 입구를 향해 걸었다.

“……폐하,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리아드네 반걸음 뒤에서 걷던 리에트가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딸아이의 무례를 늘 너그러이 받아 주셔서…….”

아리아드네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별일 아닌 것은 아니었다.

“뭐,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리카서스를 이어야 하니 지금 이대론 좀 곤란하지.”

르네의 나이도 벌써 여섯 살이었다. 언제까지고 아이의 무지나 엉뚱함으로 상황을 면피할 순 없었다. 요즘 리에트가 가장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르네가 제 위치에 걸맞은 적절한 사회적 규범을 익힐 수 있을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영민한 아이잖아. 금방 배울 거야.”

“제발 그래야 할 텐데요.”

아리아드네의 위로에 리에트는 한숨처럼 웃고 말았다. 아무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아이라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니. 리에트는 르네 걱정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이 키우는 게 참 쉽지 않지.”

“그러니까요. 도무지 익숙해질 틈이 없어요. 아이는 계속 자라니까 어제와 오늘이 또 달라서.”

매일매일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어쩔 땐 정답이 없는 문제를 끝없이 풀어야 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지.”

“네, 정말요.”

그리고 그 문제의 끝에는 매일매일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에트를 가장 크게 웃게 하는 것도, 가장 아프게 울게 하는 것도 언제나 딸이었다. 별안간 목소리를 낮춘 리에트가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르네가 왕녀 전하 뵙는 게 많이 기대됐나 봐요. 이틀 전부턴 잠도 안 자고 기다릴 만큼이요.”

“르네가 정말 그랬어? 리시테아가 보고 싶어서 잠을 설쳤다고?”

“남다른 데가 있다 해도 아이는 아이니까요. 아직 혼자 자는 것도 못 해요.”

“정말?”

“네. 비밀이니 꼭 지켜 주셔야 해요.”

리에트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낮아졌다.

“아, 큰 비밀이지. 그럼.”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도 덩달아 낮아졌다. 몹시 귀여운 비밀이었으나 그것을 별거 아닌 것처럼 취급할 순 없었다.

여섯 살에게는 여섯 살의 절박함이, 두 살에게는 두 살의 간절함이 있기 마련이니까.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신뢰보다 배신을 먼저 가르칠 순 없지 않은가.

“약속해. 그런 이야기 들었다는 것도 잊어버릴게.”

아리아드네는 이 비밀을 평생 함구하는 것은 물론, 아예 잊어버리겠다며 단단히 약속했다.

“네, 믿어요.”

리에트는 쿡쿡 소리를 죽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렌트 왕과 서로의 아이 이야기를 나누고, 또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다니.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리에트, 르네 말이야.”

아리아드네가 어딘가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도 동생 갖고 싶어 해? 처음 만났을 땐 그런 말 했던 것 같아서.”

동생? 갑작스레 전환된 화제에 의아해진 리에트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폐하께서 둘째 생각이라도 있으신 걸까?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리에트에겐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물을 말한 담력이 없었다.

“요샌 조금 덜하긴 해요. 작년인가? 갑자기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기다리던 게 꼭 동생일 필요는 없다고.”

“그래?”

르네를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루안이 생각나곤 했다. 렉사에게 자신의 영혼을 나눠 주었던, 그래서 그녀를 다시 살게 했던 루안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자신이 르네를 다시 만났듯이, 르네도 기다리던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르네는 운명의 사람이라도 기다리나 봐.”

아리아드네는 다만 르네의 기다림이 너무 길지 않기만을 바랐다.

“제 딸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르네가 특별하긴 하지.”

그런 대화를 하는 사이에 어느새 두 사람은 중앙 궁 입구에 다다랐다. 아리아드네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이블린이 막 입을 연 그때였다.

“폐하, 마침…….”

낮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입구에 들어섰다.

그는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 내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하더니, 이윽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을 숙였다. 느슨하게 묶은 붉은 머리카락이 남자의 고갯짓에 따라 앞으로 흘러내렸다.

“페렌트 방벽을 지키는 부러진 검, 리뮈르의 대주 달미에르가 페렌트 단 하나의 기둥, 가장 찬란한 영광, 국왕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는 작년 겨울 리뮈르 공작 위를 이어받으며 페렌트에서 단둘밖에 없는 양대 공작 중 한 명이 된 달미에르 리뮈르였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대주껜 도무지 숨길 수 있는 게 없네요.”

아리아드네가 숨기려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하지만 소리 내어 인사하기도 전에, 눈이 보이지 않는 달미에르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건 놀라웠다.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달미에르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폐하께서 계시는 곳은 언제나 특별하니까요. 꼭 눈으로 봐야만 아는 건 아니지요.”

몇 년 전만 해도 예민한 성정이었던 달미에르도 여러 일을 겪으며 퍽 둥글어졌다. 요즘의 그는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이런, 공작 위까진 이은 대주께 더는 드릴 게 없는데요. 이만한 찬사를 공으로 받을 수도 없고. 무엇을 원하시나요?”

“감히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

아리아드네가 말없이 눈썹을 삐딱하게 세웠다. 장난은 이쯤 하자는 뜻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달미에르가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멀리서 말씀을 나누시는 폐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회랑을 거닐며 리에트와 나눴던 대화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회랑과 중앙 궁 입구 사이에 막힌 데가 없는 걸 감안하더라도 정말 대단한 청력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자칫 대주께 큰 상을 내릴 뻔했군요.”

아리아드네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대 대주와 공비께서도 평안하시죠?”

“네, 폐하의 은덕으로 두 분 모두 무탈하십니다.”

달미에르가 리뮈르 공작 위를 승계한 건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선대 공작이었던 달헤임은 노쇠하였다는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리뮈르는 디움으로부터 페렌트를 수호하는 방벽이었고, 리뮈르 대주는 눈과 얼음의 기사단을 이끄는 자여야 했다. 왕도에 체류하는 달로아가 리뮈르 공작 위를 이을 순 없었고, 그렇다고 승계에 적합한 다른 혈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달미에르는 묵묵히 리뮈르 공작 위를 받아들였다. 아들에게 공작 위를 물려주고 무거운 짐을 벗은 달헤임은 달리케와 충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아리아드네와 달미에르가 몇 가지 근황을 나누며 대화를 이어 가던 중이었다.

“아니, 갑자기 그렇게 혼자만 가면―”

철컥철컥,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입구에서 웬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입이 댓 발이나 나와 투덜대던 남자가 아리아드네를 발견하고는 하던 말을 뚝 멈추었다.

“리카르도 경,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달미에르 뒤를 이어 도착한 사람은 리카르도였다.

“폐하, 신 리카르도 인사 올립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신발에 문제가 있었는지 그가 걸을 때마다 왼쪽 신발의 잠금쇠가 바닥에 부딪히며 쇳소리를 냈다. 변함없이 허술한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럼요. 경은 여전히 왕도로 돌아올 생각이 조금도 없나요?”

아리아드네가 슬쩍 미끼를 던졌다. 돌아올 답이야 뻔하지만.

“네, 그것이 그러니까…….”

곁눈질로 달미에르를 힐끔거린 리카르도가 어물어물 말끝을 늘어뜨렸다. 그러자 달미에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나섰다.

“폐하, 리뮈르에서 리카르도 경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시는 분이 그를 뺏어 가려 하시다니요. 제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마물을 상대하는 일에 가장 능통한 두 집단을 꼽으라면 단연 리뮈르 기사단과 성기사단이었다.

그간 교류가 전무했던 두 집단이었으나, 성 상티모니아가 붕괴하며 갈 곳을 잃은 성기사단 출신 기사들이 리뮈르로 속속 몰려들며 상황이 바뀌었다. 성기사단 출신 기사들이 리뮈르로 향한 것은 그곳에 자리를 잡은 리카르도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리카르도는 성기사단 내에서 뛰어난 실력과 두터운 인망으로 단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아직도 간간이 “여기가 리카르도 부단장님께서 계신다는…….” 따위의 소리를 하며 찾아오는 기사들이 있었다.

언제나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리뮈르로서는 리카르도가 고급 인력들이 저절로 달라붙는 인간 자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절 아끼는 분이 혼자만 홀랑 내빼십니까?”

“이게 다 경을 아끼는 마음에 이러는 거 아닙니까.”

리카르도와 달미에르가 한창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였다.

“미에르!”

누군가가 새된 목소리로 달미에르를 불렀다. 왕도에서 리뮈르 대주 달미에르를 저렇게 부를 사람이야 뻔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달로아가 대뜸 쌍둥이 동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야, 너 내가 보낸 초상화들 어쨌어. 또 쳐다도 안 봤지?”

“그걸 내가 왜 봐야 해?”

불쾌한 듯 미간을 구긴 그가 제 멱살을 잡은 달로아의 손을 쳐 냈다.

“그거야 당연히 네가 결혼을 해야 내가 안 하니까! 둘 중 하나만 하면 봐주시겠다잖아. 그러니까 네가 가야지.”

“아하, 날 네 인생의 희생양으로 삼겠다?”

달미에르의 입가가 삐딱하게 비틀렸다.

“희생양이 아니지. 작위도 승계했겠다. 딱 좋은 시기야. 제발 가 주라. 어? 내가 앞으로 평생 오빠라 부를게.”

“넌 그 소리가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내밀더라. 나한테 동화 한 닢만도 못한 걸.”

“그럼 그냥 가 주던지.”

여섯 살 어린애도 아니고. 그가 팔을 휘저어 자신에게 매달리는 달로아를 떼어 냈다.

“싫어. 난 소중한 누이가 리뮈르 계승 서열에서 밀려나는 걸 차마 볼 수가 없거든.”

현재 리뮈르 계승 서열 1순위는 여전히 달로아였다. 새로이 리뮈르 공작이 된 달미에르가 후사는커녕 혼인도 아직인 탓이었다. 달로아는 때때로 그것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미에르, 너 늘그막에 나한테 작위 넘기려고 그러지?”

“왕도에서 구르더니 눈치가 좀 늘었네. 알면 됐어.”

눈을 치뜬 달로아가 추궁하듯 묻자, 달미에르가 피식 웃으며 응수했다.

“왜 너까지 날 못 부려 먹어서 난리야.”

두 사람이 별일도 아닌 걸로 옥신각신 실랑이를 시작했다. 저 남매는 볼 때마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저기…….”

그때, 막 도착한 다음 사람이 입구에 들어섰으나 두 사람이 왁왁 소리를 내지르며 싸우는 통에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너는 진짜―”

요리조리 피하는 달미에르를 잡으려 팔다리를 허우적대던 달로아가 마침내 오도카니 입구에 선 인영을 발견했다.

“시안! 오랜만이야.”

달로아가 반색하며 달려가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시안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모두들 오랜만입니다. 폐하께서도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우리 무심한 수호자님께서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셨네요.”

아리아드네의 인사에 시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번번이 약속을 어겨서…….”

그렇지 않아도 여러 차례 약속을 미룬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바빴다는 핑계를 대기엔 상대가 페렌트 국왕이었다.

“탓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반갑다는 인사였지.”

황급히 손을 저어 시안을 일으킨 아리아드네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올 사람은 다 왔으니 이만 들어갈까요?”

곁에서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블린이 사람들을 신년회장으로 안내했다.

이번 신년회가 열리는 곳은 보통의 연회장이 아닌 왕의 내실과 연결된 응접실이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편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아리아드네의 의향에 따른 결정이었다.

이블린은 신년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안락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응접실을 꾸몄다.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오는 벽난로와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 낮은 테이블, 어디서든 편하게 앉을 수 있게 곳곳에 배치한 소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

한 달 내도록 매달린 일이었다. 신경을 쓴 만큼 자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낮게 심호흡을 한 이블린이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테이블에 놓인 붉은 액체를 들이켜던 여자가 모인 사람들을 쭉 훑어보더니 픽 웃으며 말했다.

“늦었어.”

캐롤린이었다. 벌써 제법 마셨는지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블린이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지금 시각을 가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신년회를 시작할 시각이 맞았다. 캐롤린 주위에 나뒹구는 술병만 보면 파장 분위기 같긴 했지만.

당초 이블린이 의도한 편하고 안락한 분위기도 충분히 구현된 것 같았다. 지나치게 잘 구현된 것 같아 문제였지.

“뭐야? 왜 그래?”

달로아가 얼떨떨해하는 이블린 너머로 응접실 안쪽을 보더니 펄쩍펄쩍 뛰었다.

“리스벨 공, 기다려 준다고 했잖아요.”

응접실로 뛰쳐 들어간 달로아가 테이블 위에서 나뒹구는 빈 병을 요리조리 살피더니 볼을 잔뜩 부풀리며 투덜댔다.

“술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기다려. 그 약속을 믿은 사람이 순진한 거지.”

캐롤린이 손에 든 잔을 빙글 돌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와, 진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달로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빈 술병을 집어 들었다.

이건 한 해에 생산하는 양이 50병뿐이라는 리가산 백포도주였다. 작황이 좋은 해에만 생산하기 때문에 언제 다시 마실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귀한 몸이었다.

“너무―”

“내가 설마 혼자 마셨을까.”

캐롤린이 웃으며 뒤쪽에서 새 술병을 꺼냈다. 개봉하지 않은 리가산 백포도주였다. 술병을 받아 든 달로아가 감격한 얼굴로 한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믿었습니다. 감히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제 심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쌍둥이 누이의 잽싼 태세 전환을 목격한 달미에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너, 뭐 하는 거야?”

“네 건 없으니까 침 흘리지 마.”

달로아가 제 동생을 잔뜩 경계하며 병마개를 땄다. 마개를 열자 숙성된 포도의 달콤한 향기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겨울이 길고 혹독한 지리적 특성상 리뮈르 사람들은 유독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달로아는 술과 도박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종류의 인간이었고.

그에 반해 왕도 사람들은 술을 식사에 곁들이는 음료 정도로만 여겼다. 좀처럼 마음에 맞는 술친구를 찾지 못하던 달로아는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잔이 아니라 병째로 술을 곁들이는 캐롤린을 발견했다.

탁월한 미각과 모든 주종을 아우르는 깊은 조예, 거기에다가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주량까지. 캐롤린 리스벨은 하늘이 내린 주당이었다. 이후로 달로아와 캐롤린이 급격히 가까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혈육보다 술 따위가 우선이라니. 가볍게 혀를 찬 달미에르가 제 누이에게서 멀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로아는 벌써 캐롤린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빠르게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 꼴을 본 아리아드네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마셔. 저번처럼 속 아프다고 다음 날 기어 다니지 말고.”

캐롤린이야 동이째 술을 마시고도 다음 날 말끔한 얼굴로 앉아 있는 사람이라지만, 달로아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네네, 걱정 마시래도요.”

문제는 그 말을 하는 달로아가 조금도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거였다.

“저…….”

한창 술을 퍼붓던 달로아가 무언가를 망설이듯 주위를 맴도는 시안을 발견하고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응? 앉아. 앉아.”

달로아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시안의 빈 잔을 채웠다. 시안은 빈 잔을 채우는 영롱한 빛깔의 액체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치 정오의 햇살을 모아 담은 것처럼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에 가득한 기대를 읽었다. 어서 이 위대한 술을 마시고 네 감상을 말해 봐!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맛이라고!

애주가들은 좋은 술을 마시는 것만큼이나 남에게 좋은 술을 먹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원래 음주라는 것은 시간을 들여 술에 담긴 시간을 먹는 행위였으니까.

시안은 잔에 담긴 술을 여러 번에 나눠 천천히 마셨다. 가볍고 산뜻한 느낌이 시작하는 술로 딱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맛과 신맛이 균형이 가히 환상적이었다.

좋은 술을 마신 시안은 자신도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었다. 젠체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숙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렵게 말을 마친 시안이 쑥스러운 듯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에 달로아와 캐롤린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시안. 이건 내가 혹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달로아는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으려 씰룩이는 입가를 단속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달로아는 평생 자신이 술이 약하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주량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그녀는 캐롤린과 술잔을 부딪치는 횟수가 늘수록 더 오래, 더 많이 마시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렸다.

“좋은 약 있어?”

기대로 부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 손을 모은 달로아가 시안의 대답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네.”

시안이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병에 담긴 푸르죽죽한 액체는 도무지 맛을 짐작할 수 없는 괴이한 색이었다. 하지만 저것은 소르체의 물건이 아닌가. 맛을 몰라도 효과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달로아는 병에 든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마치 흙탕물을 마시는 기분이었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흙 맛이 나는 푸르죽죽하고 걸쭉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흘러갔다. 마시는 순간, 온몸에 활력이 돌며 혈액에 남아 있던 알코올이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알게 모르게 둔해졌던 감각이 되살아나며 머리가 맑아졌다.

이런 신통한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크게 감탄한 달로아가 빈 병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의약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아닐까요?”

그러자 캐롤린이 챙그랑 잔을 부딪치며 말을 더했다.

“그게 아니라 소르체가 위대한 거지.”

이어지는 소르체를 향한 찬사에 시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한쪽에서 술과 칭찬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있을 때, 리카르도가 응접실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여기 성유주는 없습니까?”

성유주는 성 상티모니아 예식에 주로 쓰여 성직자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은 술이었다. 자신이 속했던 성 상티모니아는 스스로 버렸을지언정, 그때 형성된 취향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어, 여기 있다.”

성유주가 든 병을 발견한 리카르도가 희희낙락 웃으며 마개를 열었다.

“언제는 식전에 술 같은 건 안 먹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턱 하니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린 달미에르가 이죽거렸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아, 이거 놓으십시오. 귀찮게 들러붙지 말고.”

어깨를 털어 그의 팔을 떨친 리카르도가 구시렁대며 잔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게 대체 뭐야.’

리에트는 편하다 못해 풀어질 대로 풀어진 연회의 분위기가 당황스러웠다. 오늘 열리는 신년회에 참석하겠다고 의사를 밝혔을 때, 그녀가 각오한 연회는 우아한 낯 아래 날 선 공방이 오가고, 고도의 수 싸움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그런 것이었다.

“마셔! 먹고 죽는 거야. 이대로 죽으면 더는 일 못 시키겠지.”

“달로아, 사람은 겨우 이런 걸로 죽지 않아.”

“아, 왜요. 저 오늘 마시고 죽을 거라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살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시안. 네가 있는 걸 잊었네. 죽을 날은 다음에 다시 받아야겠다.”

“아, 진짜! 이거 놓으시라니까요!”

“내가 경을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걸 제가 왜 알아야 합니까!”

그런데 지금 이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페렌트를 이끄는 최고 권력자들의 밀실 연회가 수적들이 배 위에서 벌이는 술판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니.

“저, 폐하……. 그러니까, 여기 이분들께서…….”

리에트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막 자리에 앉으려던 아리아드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처음이라 그랬지. 누가 누군지 소개해 줄까?”

리에트의 얼빠진 얼굴을 처음 본 사람들이 어려워서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난장판 속 사람들을 한 명씩 가리키며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음, 저기 술을 따르는 쪽이 리스벨 공작 캐롤린이고, 받는 쪽이 정무 대신 겸 재상 달로아 리뮈르, 그 옆에 앉아 홀짝홀짝 잔을 기울이는 기사님은 소르체 공국의 보주(寶珠) 그 자체인 사람이고.”

얼핏 보면 왁자지껄 유쾌한 술자리였다. 타고난 승부사로 정치 괴물이라는 평을 듣는 달로아 리뮈르의 머리카락이 술잔에 빠져 있다는 것만 빼면.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저 남자는 리뮈르 공작, 그리고 리뮈르 공작에게 뒷덜미 잡힌 쪽은 성 상티모니아 성기사단 부단장 출신이자 현재는 리뮈르 공작의 부관인 리카르도 경.”

저쪽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의 기사라 불리는 리뮈르 기사단의 주인이자, 페렌트를 지키는 방벽 그 자체라 불리는 리뮈르 대주는 마치 건달처럼 낄낄대고 있었고…….

“리카르도 경은 내가 호시탐탐 눈독 들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해. 왕궁 기사단에 들어와 주면 딱 좋을 텐데 말이야.”

페렌트 왕이 호시탐탐 노린다는 인재는 꼬리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리뮈르 대주를 피해 응접실을 뱅뱅 돌고 있었다.

“……다들 친분이 두터우신 것 같습니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겨우 쥐어 짜낸 말이 그것이었다.

“뭐, 오래 알았으니까.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 나가느라 별꼴 다 보기도 했고. 그나마 재상이랑 연락하고 지냈다 그랬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아리아드네가 손을 들어 달로아를 불렀다.

“달로아.”

“네네, 갑니다.”

아리아드네의 부름을 들은 달로아가 잔에 남은 술을 입 안으로 톡 털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리카서스 후작?”

성큼 다가온 달로아가 리에트의 머리카락을 빤히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

드디어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는가 싶었던 그때였다. 터엉! 문을 박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르네가 씩씩거리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저 음험한 놈은 대체 무엇이냐?”

“사람 보고 무엇이냐니…….”

뒤따라 들어온 유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흥, 사람이 사람 같아야―”

그가 르네의 뒷덜미를 잡아 달랑 들어 올렸다. 굳은 입매 사이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카서스에서는 후계 교육을 이따위로 하는 모양이지? 아, 리카서스 후작을 생각하면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자식이 모자라 제 자리를 탐낼까 걱정할 일은 없어서.”

“아니, 싸움 중에 가족을 끌어들이다니. 네놈은 전투 예절도 모르느냐?”

분기에 찬 르네가 붕붕 소리가 나도록 발길질했다. 물론 유진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허공만 갈랐지만.

“전투 예절 같은 소리 하네. 싸움에서 승패를 제외한 다른 건 전부 사족에 불과하지.”

“이런 게 페렌트 왕의 반려라니. 페렌트 앞날이 참으로 걱정이구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페렌트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모양인데, 리카서스는 페렌트 밖에 있나 보지?”

르네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와 진심으로 대거리하는 유진의 모습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다들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쟨 도대체 누구야…….”

“로아, 무슨 일이야?”

앞이 보이지 않는 달미에르가 쌍둥이 누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대여섯 살쯤 된 여자아이가 왕후랑 드잡이질하고 있는데?”

“뭐?”

달미에르가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도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달로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리카르도에게서는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왕후의 면전에서 조금도 기가 죽지 않다니. 저 아이의 용맹함이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분명 크게 될 인물입니다.”

이름난 기사였던 자신도 유진 앞에만 서면 오금이 저리는데, 저 어린아이가 기세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다니. 그는 왁왁 소리를 지르며 짧은 팔다리를 바동대는 정체 모를 꼬맹이를 두 손 모아 응원했다.

“…….”

그리고, 응접실 한가운데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리에트는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신년회를 두고 난장판이니, 수적들의 술판이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연회가 아무리 난장판이래도, 제 딸이 벌이는 개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리아,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아이는 누구고.”

이 상황이 당황스럽긴 캐롤린도 마찬가지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캐롤린이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갔다.

“여긴 내 대녀이자 리카서스 후작의 적녀인―”

“잠깐만.”

아리아드네가 르네의 신분을 밝히려는 찰나, 유진이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성의 없이 손길로 허공을 몇 번 휘적휘적 그었다. 심드렁한 그의 태도와는 달리 유진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빛은 찬란한 광휘를 내뿜으며 허공에 유려한 선을 그렸다.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허공에는 빛으로 그린 황금색 문이 나타났다. 이내 빛으로 만든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그 사이로 금발의 여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됐나?”

고개를 내민 여자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연회가 열리는 응접실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아리아드네에게서 멈추었다.

“아리아드네!”

냉큼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인 여자가 달려와 아리아드네 품에 안겼다.

“어서 와, 베아트리스.”

“난 아리아드네가 이렇게 반겨 주는 게 너무 좋더라. 꼭 집에 돌아온 것 같아.”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제 품에 안긴 베아트리스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금에서 뽑아낸 것처럼 선명한 황금색 머리카락은 구불구불하고 폭신해 꼭 양털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베아트리스도 아리아드네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잔뜩 풀어진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아, 맞다. 오늘 리카르도도 온다고…….”

아리아드네에게 폭 안겨 있던 베아트리스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베아트리스 님.”

그때, 뒤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베아트리스가 한때 성 상티모니아의 기사였던 이와 마주했다.

“안녕, 리카르도.”

천진하고 다정한 인사였다. 리카르도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리카르도가 교황의 종이었던 그 시절, 그에게 의미 있는 존재는 오직 아그네스뿐이었다.

교황의 친딸이자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로 추앙받는 베아트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베아트리스는 그가 모셔야 할 윗사람, 성 상티모니아의 살아 있는 성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베아트리스가 리카르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성 상티모니아를 저버린 후였다.

폐허가 된 성 상티모니아에 남아 모든 비난을 감내하며 짓지도 않은 죄를 홀로 짊어진 성녀의 행보에 그는 참담함을 느꼈다.

아그네스의 수족으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건 자신이 아닌가. 베아트리스에게 죄가 있다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뿐이었다.

가장 가벼운 죄를 진 이가 가장 무거운 형벌을 견디고 있었다.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이자 살리바의 마지막 성녀로서.

“잘 지내신단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듯 강건하신 모습을 뵈니…….”

성 상티모니아가 정리되자마자 홀연히 살리바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베아트리스의 뜻이란 말은 들었다. 잘 지내고 있단 소식도.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베아트리스의 모습이라고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아그네스의 뒷모습을 쫓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베아트리스 생각할 때면 언제나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 이렇게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맞닥뜨린 베아트리스는 그의 기억보다 훨씬 밝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분명 기쁜 일인데 그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먹먹하고 미안한 마음에 이 자리에서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지난 잘못을 참회하고 싶었다.

“리카르도, 너무 늦었지만 미안해.”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도리어 베아트리스가 먼저 사과해 왔다. 얼마나 더 자신을 염치없는 사람으로 만들 셈인지. 리카르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모두가 힘들 때 혼자만 편한 곳에 있어서…….”

“아니, 리카르도의 잘못이 아니야. 성 상티모니아의 악행으로 가장 많은 것을 누린 자의 잘못이지. 그러니까 내가 미안해. 힘든 일 겪게 해서.”

성 상티모니아도, 살리바도 떠나왔지만 베아트리스는 아직도 자신이 속했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그러니 그녀는 여전히 그 땅을, 그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베아트리스가 살리바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건 의무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어디에 있든 리카르도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기도할게.”

“네, 그러겠습니다.”

그 순간, 리카르도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살리바를 떠난 성녀 베아트리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하는 것.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만은 베아트리스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알아야 했다.

성 상티모니아가 사라진 뒤에야 성녀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고, 성 상티모니아를 떠나온 뒤에야 기사는 성녀를 알게 되었다. 서로 알고 지낸 것이 십수 년인데 리카르도는 이제야 베아트리스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그런데 혼인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아, 응. 그렇게 됐어.”

조금 전에 보여 준 성숙한 포용력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금세 수줍어진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귓가를 붉게 물들인 채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고아로 자라 한 번도 혈육을 가져 보지 못한 리카르도였지만, 어린 동생을 싸고돌던 다른 기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레이먼드 브래들리라고 아리아드네 사촌인데……. 아, 오늘도 같이 왔어. 어디, 레이?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베아트리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횡설수설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레이먼드가 로브를 뒤집어쓴 채로 구석에 콕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다들 잘 지냈어?”

로브의 모자를 벗은 레이먼드가 머뭇거리며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아리아드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했다. 묘하게 서늘한 어조였다.

“레이, 오랜만이야. 별일 없었지?”

“나야 뭐 늘 그렇지. 캐롤린, 너도 잘―”

“당연히 잘 지냈겠지. 얼굴 반질반질한 것 좀 봐.”

“그러게. 우린 별일 있는 줄 알았잖아.”

대놓고 구박하는 아리아드네와 웃으면서 은근히 지적하는 캐롤린의 태도에 레이먼드의 어깨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다시피한 셋이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훤히 알았다. 레이먼드는 지금이 납작 엎드려야 할 시기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왜들 그래. 난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가운데…….”

그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결혼하게 도와줬더니 홀랑 도망을 가? 연락도 끊고?”

“맞아. 그건 레이가 해도 너무했지.”

아리아드네가 공격해 몰아붙이면 캐롤린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레이먼드의 이마에서 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살리바를 떠난 베아트리스와 그가 혼인을 한 건 2년 전 겨울의 일이었다. 베아트리스가 앞으로 사용할 새로운 신분과 혼인 서약에 필요한 것들은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았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잠시 숨는다는 게 신혼의 단꿈을 즐기다 보니 어영부영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있었다. 브래들리 백작가에 들렀다가 아리아드네가 보낸 수십 통의 서신의 발견한 그는 생각했다. 그녀의 화가 풀릴 때까지 당분간은 몸을 사리자고.

“아, 니…….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연락했잖아. 오늘도 이렇게 왔고…….”

쳐다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아리아드네의 냉랭한 얼굴과 화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캐롤린의 웃는 얼굴이 마치 북풍한설처럼 그를 몰아쳤다. 따뜻한 실내인데도 자꾸만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는데 작고 보드라운 손이 그를 감쌌다. 사랑스러운 그의 아내, 베아트리스였다. 그녀가 레이먼드 앞을 가로막았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되게 걱정했단 말이야. 분명 뭐라고 할 거라고.”

레이먼드가 몸을 구겨 저보다 한참 작은 베아트리스 뒤에 숨었다.

“이게 베아트리스를 방패 삼아?”

그 꼴을 본 아리아드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레이먼드는 베아트리스가 자신을 막아 준 것이 그저 좋아 헤벌쭉 웃었다.

분위기가 좀 풀어지자 이때다 싶었는지 베아트리스가 냉큼 아리아드네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런데 아리아드네, 저 애는 누구야?”

화제를 전환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아리아드네는 베아트리스가 귀여워 적당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차피 레이먼드야 언제든 따로 불러낼 수 있으니.

“아, 르네?”

르네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입술을 쪼뼛 내민 채로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저 애 이름이 르네야? 성력이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충만하고…….”

베아트리스의 눈에 비친 아이는 마치 검푸른 연기 같은 거대한 성력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제 겨우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진짜 귀엽다.”

베아트리스는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윤기가 흐르는 검푸른 머리카락과 통통한 흰 뺨은 마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자기 인형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눈길을 끄는 건 아이의 불퉁한 태도였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과 불량한 자세가 인형 같은 외모와 기묘한 조화를 이뤄 자꾸만 눈이 갔다.

베아트리스의 말에 용기를 얻은 리에트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나섰다. 그래, 지금 어서 해치워야 했다. 내면이야 어떻든 르네의 귀여운 외모만큼은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게, 저 아이는 제 딸입니다.”

리에트의 고백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아아, 리카서스 후작의 딸이라면 폐하의 대녀라던…….”

달로아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파격적인 등장에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뿐, 어느 모로 보나 리카서스 직계의 외형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나 했던 그때였다.

“오늘 네놈을 결딴내겠다!”

우렁찬 선전포고와 함께 거대한 물줄기가 유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투명한 막에 부딪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끝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유진이 가소롭다는 듯 물었다.

“이쯤이면 내 상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깨달을 때도 됐을 텐데.”

유진의 도발에 매섭게 눈을 치뜬 르네가 다시금 거대한 물방울을 공중에 띄웠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달로아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대녀면 왕후의 대녀이기도 하지 않아?”

대녀가 비록 정식으로 입양한 자식은 아니라도, 부모와 자식에 준하는 인연을 맺는 일이었다. 르네가 아리아드네의 대녀라면, 지금 저렇게 죽어라 싸우는 유진의 대녀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펑펑 요란한 소리가 성가신지 달미에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청력이 예민한 그로서는 도무지 참기 힘든 수준의 소음이었다.

“자식이라고 부모랑 꼭 사이가 좋진 않잖아.”

“하긴 그거야 그렇지.”

달로아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리뮈르 남매의 말 같지도 않은 결론을 들으며 리에트는 생각했다. 정말 연기가 되어 이 자리에서 꺼지고 싶다고.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펑펑! 딸아이의 요란한 신고식만 계속될 뿐이었다.

* * *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유진과 르네에게서도 오늘만큼은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날이 바뀌려면 얼마나 남았지?”

“글쎄, 두 시간쯤?”

유진의 대답을 들으며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두 시간 뒤면 올해도 끝이었다. 시간에 금이 그어진 것도 아닌데, 뚝 잘라 지나간 해와 새로운 해로 구분 짓는 것이 부질없이 느껴지다가도 또 어쩔 수 없이 새해가 기대되었다.

캐롤린을 상대하느라 제법 취했는지 달로아는 반쯤 드러누워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달미에르는 그런 누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옆에 붙어 달로아를 챙기고 있었다. 틈틈이 리카르도의 속을 긁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물론 캐롤린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꼿꼿한 자세로 술을 물처럼 들이켜고 있었고,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시안마저 그런 캐롤린을 감탄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술을 못하는 베아트리스는 레이먼드와 뱅쇼를 홀짝거리며 담요에 파묻혀 있었다.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그저 휴식 같은 연회였다. 편안한 분위기에 리에트의 긴장도 풀어졌다. 리에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를 홀짝거리다 어두워진 밖을 보고는 딸아이에게 물었다.

“르네, 이만 자러 갈까?”

“또 날 아이 취급하는 것이냐? 이 몸으로 벌써 여섯 해나 살았다.”

르네가 어림도 없다는 듯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 말대로 눈이 심하게 초롱초롱하긴 했다.

“그러면 뭘 해야 좋을까?”

모녀의 이야기를 들은 아리아드네가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 르네가 지루하지 않을까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이럴 때 다 같이 할 만한 게임이 뭐가 있을까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담요에 푹 파묻혀 있던 베아트리스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예전부터 궁금한 거 있었는데, 그 이야기 해 주면 안 돼?”

“이야기? 어떤 이야기?”

“페렌트 다섯 가문의 이야기 말이야.”

가장 오래된 역사이자 최초의 동화라 불리는 페렌트 다섯 가문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 페렌트 다섯 가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니. 베아트리스의 뜻 모를 제안에 레이먼드가 고개를 느슨히 기울이며 물었다.

“레나, 그 이야기라면 굳이 여기서 들을 것도 없이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레나는 베아트리스가 새롭게 얻은 이름인 ‘로레나’의 애칭이었다. 베아트리스는 레이먼드가 자신을 ‘레나’라고 부를 때마다 손발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워지곤 했다. 지를 수 없는 비명을 속으로 삼킨 베아트리스가 괜스레 눈을 흘겼다.

“아니, 그러니까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 말고 가문에만 내려오는 비밀 이야기 같은 거 말이야.”

“비밀 이야기?”

르네도 흥미가 동한 듯 귀를 쫑긋 세웠다.

“저도 궁금합니다.”

“그러게. 재미있을 것 같아.”

시안과 캐롤린까지 줄줄이 관심을 보였다.

“아니, 페렌트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고작―”

“로아, 너 아직도 안 취했어?”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던 달로아가 벌떡 일어나 훼방을 놓자, 달미에르가 그 입에 다급히 술병을 물렸다. 술이 들어간 달로아는 금세 얌전해졌다.

그 꼴을 본 아리아드네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구부터 시작할까?”

아리아드네가 모인 사람들을 쭉 훑어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지워진 케이루스를 제외한 네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리뮈르는 저 꼴이라 좀 나중에 해야 할 것 같고, 그렇다고 내가 먼저 나서기는 좀 이르고…….”

리뮈르와 메르디에스가 뒤로 빠지니 남은 것은 소르체와 리카서스 둘뿐이었다. 리에트는 눈을 굴려 시안을 슬쩍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멀뚱멀뚱 자신만 바라보는 것을 보니 먼저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자신뿐이었다.

“그럼, 저부터…….”

리에트가 입을 열자 사람들이 잔뜩 기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시다시피 리카서스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별다른 게 없습니다.”

리에트는 느릿느릿 이야기를 시작했다.

“리카서스의 시작은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천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아주 먼 옛날의 일이라고 합니다.”

페렌트 다섯 가문의 이야기들이 모두 그러하듯, 리카서스 시조의 이야기 또한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신들이 이 땅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풍랑을 일으키는 고약한 바다뱀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공을 현혹하는 세이렌이 드물지 않게 존재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인간에게 검푸른 바다는 풍요의 보고이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무덤이었다.

리카서스의 시조가 태어난 곳은 바닷가 마을의 작은 항구 ‘안테돈’이었다. 안테돈의 바다에는 시시때때로 풍랑을 일으키고, 심심풀이로 인간을 잡아먹는 고약한 바다뱀이 살았다.

그 바다뱀에 의해 가족을 잃은 한 고아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가족을 집어삼킨 바다와 바다뱀을 증오하면서도, 그 시퍼런 바다를 떠나지 못했다. 소년은 결심했다. 저 바다와 싸워 이기겠노라고.

소년은 자라 청년이 되었다. 돈을 모아 작은 조각배를 장만한 그는 바다로 나아갔다. 그는 가족을 죽인 바다뱀을 찾아 망망대해를 표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먼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난 그는 바다 안개와 함께 떠다니는 정체 모를 섬에 도착한다. 그곳은 바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공들을 현혹하는 세이렌의 본거지였다.

그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려 죽을 뻔하나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고, 그 과정에서 세이렌의 성물 호른을 얻게 된다. 허겁지겁 안개 섬에서 탈출한 그는 대양 한가운데서 가족을 죽인 원수 바다뱀과 마주친다.

그는 거대한 바다뱀과 7일 밤낮을 싸웠다. 7일째 밤, 그는 안개 섬에서 얻은 호른을 불어 바다뱀의 주의를 흩트리고, 그 틈을 타 뱀의 비늘 사이에 있는 급소를 공격했다. 거대한 바다뱀은 검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그 피가 호른에 스며들었다.

바다뱀을 죽였으나 그 또한 모든 기운을 소진해 도무지 노를 저을 수가 없었다. 쓰러진 그는 죽음을 예감하며 호른을 불었다. 그런데 그가 호른을 불자 거짓말처럼 배가 저절로 움직여 그를 안테돈으로 인도했다.

귀환한 그는 안테돈을 시작으로 거대한 항구를 소유한 주인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리카서스의 문을 연 에녹이다.

“바다뱀의 검은 피가 스며든 그 호른이 바로 리카서스의 성물인 무렉스의 호른이라고 합니다. 바다를 조종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지녔다고 하지요.”

간단히 이야기를 마친 리에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떤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잔뜩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게 뭐야. 알려진 것과 다른 게 하나도 없잖아. 그건 우리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아직 술이 덜 깼는지 달로아가 어눌한 발음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리에트가 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기존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꼭 어떤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부터가…….”

리에트는 어물어물 뒷말을 흐리며 모르는 척 시침을 뗐다. 선조가 불공정 계약에 묶여 자손들을 노예로 바친 멍청이라는 걸 차마 제 입으로 밝힐 순 없었다.

“그러니까 리카서스의 시조가 거대한 바다뱀을 해치운 영웅이란 말이냐?”

뭐가 또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줄곧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르네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물, 물론이지.”

대답을 하는 리에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아니, 무엇보다 르네가 리카서스의 비밀을 알 리가 없는데. 리에트는 본능적으로 르네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흥, 그 머저리가 잘도 그랬겠다.”

어림도 없다는 듯 콧방귀를 낀 르네가 고개를 한껏 쳐들었다.

“어미야, 넌 그 이야기를 진짜 믿느냐?”

“…….”

“쯧, 순진하긴. 아마도 시작은 이랬을 게다.”

가문에만 내려오는 비밀 이야기보다 더 은밀한, 리카서스 후작인 리에트조차 알지 못했던 진짜 비밀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오래전, 프레모 대륙의 서쪽 해안에는 ‘안테돈’이라 불리는 작은 항구가 있었다.

안테돈을 다스리는 이노에게는 세 명의 부인과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다섯 번째 아들의 이름이 아펠이었다.

아펠은 교활하고 야심이 가득한 자였으나, 시비에게서 태어난 그에게 돌아갈 재산은 없었다. 더구나 아펠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안테돈을 물려받기로 결정된 큰형은 그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장성한 사내였다.

아펠은 생각했다. 이대로 주저앉아 모든 것을 빼앗기느니 악마와 계약해서라도 안테돈을 차지해야겠다고.

“안 돼요, 가지 마세요.”

그는 자신을 붙잡는 아내를 밀치고 조각배 하나를 바다를 향해 밀었다.

“으아아앙!”

아내의 품에 안긴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펠은 아내의 품에 안긴 아이를 휙 빼앗아 제 몸에 묶었다.

“그래, 이왕이면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무슨 미친 짓이에요! 죽으려면 당신 혼자 죽어요!”

“이것 놔.”

그는 만류하는 아내를 뿌리치고 조각배에 올라 바다로 나갔다.

안테돈 해협의 골짜기에는 고약한 성격의 바다 마녀가 살고 있었다. 심사가 뒤틀리면 풍랑을 일으키고, 바다뱀을 조종해 화물을 탈취했다가, 또 어떤 날에는 난파된 배의 선원들을 구해 주기도 하는 변덕스럽고도 전능한 괴물이.

‘그 바다 마녀만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흐린 하늘이 기어코 비를 뿌리더니 집채만 한 파도가 뱃머리를 집어삼켰다.

“으아아아앙! 으앙!”

저도 생명에 위협을 느꼈는지 등에 묶인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어 댔다.

“이대로 죽을 수는―”

그는 배의 가장자리를 꽉 쥐고 버텼으나, 다시금 덮쳐 온 파도에 뱃전이 산산이 부서졌다. 퍼억! 아펠은 배가 부서지며 떨어져 나온 나무판자에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했다. 차라리 그대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으으, 으아, 으아앙…….”

힘에 부친 듯 할딱거리며 점점 잦아드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동굴 벽에 부딪혀 울리는 파도 소리,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사이에서 아펠은 의식을 차렸다.

“정신 차렸으면 눈을 뜨거라.”

위쪽에서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아펠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성대를 통해 울리는 사람의 목소리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마치 다른 존재가 인간의 언어를 정교하게 흉내 낸 듯한 조금의 온기도 없는 무기질의 소리.

아펠은 불쾌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눈을 꼭 감았다.

“영원히 감고 있게 해 주랴?”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가를 것 같은 기세에 아펠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아, 아닙니다.”

눈을 뜬 아펠이 가장 먼저 본 것은 깊고 깊은 바다를 뚝 떼어 낸 듯한 검고 푸른 머리카락이었다. 사람의 키 수배는 될 듯한 긴 머리카락 타래가 동굴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인간아. 너, 일부러 나를 찾아온 것이 맞느냐?”

얼핏 검은색으로 착각할 만큼 짙은 남색의 눈동자가 무감하게 그를 훑었다.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지독히도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이렇게 끔찍한 것이 인간일 리 없었다.

하지만 이 끔찍한 것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다면, 아펠은 저 마귀의 발이라도 핥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아펠은 바다 마녀의 발치에 엎드렸다.

“지금부터 네 혓바닥을 잘 놀려야 할 게다. 나는 지금 기분이 아주 별로이니 말이다.”

쐐애액, 별안간 공중에 나타난 물줄기가 아펠의 주위를 위협하듯 맴돌았다. 화살 모양을 한 물줄기가 당장이라도 그의 피부를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질린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렸다.

겁에 질린 멍청한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무렉스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를 감싼 바다의 물결에 다시 울컥 울고 싶어졌다. 그녀를 만든 신은 바다의 수많은 물결 중 하나에 불과한 존재였으나, 무렉스에게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다.

자신의 모든 것, 제 영혼의 시작, 제 슬픔의 근원.

―너는 여기 남아야겠다. 내겐 널 데려갈 여력이 없구나.

담담하게 이별을 말하던, 원망조차 할 수 없었던 마지막 통보.

홀로 남은 무렉스는 생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매일같이 울부짖었다. 아무리 울어도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더 견뎌야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무렉스는 때때로 누군가 자신을 죽여 주길 기대하며 바다로 나갔으나, 신이 사라진 세상에선 영웅 또한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무렉스는 오로지 고통뿐인 세상을 견뎌야 했다. 얼마일지도 모를 남은 시간이 벌써 지겨웠다.

“왜 나를 찾았지?”

이 멍청한 사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잔뜩 겁을 먹어 바들바들 떨면서도 사내의 눈동자는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누구에게 요구를 한단 말인가.

“겨우 그딴 이유로 날 찾았단 말이냐? 네 놈의 너저분한 욕망이 무엇이든 넌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거다.”

무렉스는 무심한 얼굴로 손을 휘둘렀다. 파앗, 날카로운 물줄기가 아펠의 뺨과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며 피가 튀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펠은 손을 더듬어 색색, 힘겨운 숨을 내쉬는 아이를 붙잡았다.

“대신 이 아이를 바치겠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갓난아이가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로 간신히 눈을 떴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무렉스는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 달랑 들었다.

아이, 이것이 기나긴 생애에 어떤 대안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아이는 공중에서 몇 번 바둥거리다 이내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졌다.

“……네 자식이냐?”

“그렇습니다.”

아펠의 대답에 무렉스의 입가가 비틀렸다.

“버러지 같은 놈. 내가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겁도 없이 네 새끼를 바치겠단 말을 하지?”

무렉스는 손톱 끝으로 정신을 잃은 아이의 볼을 슬슬 쓸어내렸다.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위협하는 것 같기도 한 의중을 알 수 없는 손짓이었다.

“큰 소원을 이루려면 귀한 것을 바쳐야 한다 했습니다. 부모에게 자식만큼 귀한 것은 없으니 제 소원을 들어주실 거라 믿습니다.”

정말 저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식일까. 적어도 제 소원보단 아니겠지. 무렉스는 아이를 한쪽 팔에 안은 채로 까딱 고갯짓을 했다.

“그래, 그 대단한 소원이 무엇이냐?”

“제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제가 가지고 싶습니다.”

“재물을 주는 건 내 능력 밖인데? 그런 것을 원하는 거라면 금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는 것이 빠를 게다. 유언은 이게 끝이냐?”

무렉스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쐐애액, 물줄기가 단번에 날카로운 창으로 변했다.

“재물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형을…….”

아펠은 초조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죽여 주십시오. 그들만 죽여 주시면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뚝, 아펠의 얼굴에서 흐른 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친족 살해는 어느 시대, 어느 곳이건 인간이 해선 안 될 짓이었다. 이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 인간의 도리마저 버린 일이니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제 새끼를 제물로 바칠 때는 의기양양하더니.”

무렉스는 남자의 얼굴에 서린 결연함 비슷한 것이 같잖기 그지없었다.

저 남자가 친족 살해에 최소한의 가책을 느끼는 자였다면 자식을 바칠 때도 그랬겠지. 아비를 죽이는 것에만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저 남자가 무서워하는 건 아비가 가진 힘이지 인간의 도리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 대가만 충분하다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하지만 저 남자의 심성이 어떻든 그것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 하나론 좀 부족한 듯싶구나. 더 줄 것은 없느냐?”

무렉스는 산뜻하게 웃으며 조금은 느슨해진 말투로 물었다. 저것의 이질적이고 불쾌한 존재감은 여전한데, 아펠의 눈으로 보는 마녀의 웃는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마치 마녀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아이 하나를 더 낳아서…….”

하나로 부족하다면, 아펠은 몽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넌 나를 조금도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지옥의 악귀도 너보다는 자식을 아끼겠다.”

무렉스는 손가락 끝으로 아이의 볼을 문질렀다. 열이 나는 듯하여 이마를 물로 쓸어내렸다.

“네가 아이 하나를 더 낳는다 한들 그 아이가 얼마나 살겠느냐. 인간은 수명은 너무 짧아서 내겐 조금의 위안도 되지 않으니.”

인간은 너무 약하고 또 일찍 죽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길고 아득한데.

아펠은 무렉스의 얼굴에 떠오른 찰나의 아쉬움을 놓치지 않았다.

“제 피를 이은 아들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이 아이의 아이도, 그 아이가 낳을 아이까지도 모두 다.”

인간의 시간이 너무 짧아 대가로 부족하다면 대를 이어 그것을 채우면 된다. 어차피 자신이 이 자리에서 죽으면 태어나지도 못할 목숨들 아닌가. 그는 확신했다. 마녀가 만족할 만한 대가는 이것뿐이라고.

“정말이냐? 그 정도라면 네 소원을 들어줄 만하지.”

그의 예상대로 무렉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펠을 내려다보았다.

“맹세하겠느냐? 네 피를 이은 아들을 모두 내게 바치겠노라고. 그것을 맹세하면 네 피를 이은 아들에게 대대손손 내 힘을 빌려주마.”

가까이 다가온 바다 마녀가 그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됐다. 아펠은 환희에 차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맹세합니다. 제 피를 이은 아들은 모두 위대한 존재에게 종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거래를―”

“거래?”

냉담한 어조로 그의 말을 자른 무렉스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어리석은 인간아. 누가 너 따위와 거래를 한다더냐.”

콰득, 무렉스는 아펠의 목을 깨물어 피를 마셨다. 뜯어져 상처 난 그의 피부 사이로 얼음장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괴로움에 몸을 뒤틀었다.

끝없이 쏟아져 들어온 물줄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혈관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제 몸속의 피가 얼음 사슬에 꽁꽁 묶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멍청하고 아둔한 너 같은 것은 그저 종으로 부리면 족한 것을.”

그제야 아펠은 제 손으로 마녀의 손에 목줄을 걸어 주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괴로움에 동굴 바닥을 손톱으로 박박 긁었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다. 마녀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었다.

“네 아비와 형들을 죽여 달라 했더냐? 어려울 것 없지.”

마녀는 웃으며 그의 머리채를 잡고 동굴을 나섰다. 무렉스는 바다뱀을 불러 그것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안테돈 항구로 향했다.

거대한 뱀의 출현에 항구는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뒤엉켜 도망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구경하던 무렉스가 손을 들어 언덕 위의 저택을 가리켰다.

“저기, 가장 높은 건물이 네 집이겠구나.”

무렉스는 빙긋 웃으며 허공에 큰 원을 그렸다. 그녀가 그린 대로 생겨난 거대한 물방울이 그대로 저택을 집어삼켰다.

아펠은 직감했다. 저택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살지 못할 것이란 걸. 순간 그는 제 선택이 옳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토록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제 편이 되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퍼엉! 거대한 물방울이 연거푸 저택 위로 떨어졌다. 그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모든 것이 거센 물줄기에 휩쓸려 부서지고 망가졌다.

아아, 그는 무너진 저택을 보며 절망에 휩싸였다. 저 불길한 존재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둥이나 벼락,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자고 저것을 끌어들였던가.

“만족하느냐? 네가 원하던 대로 모두 죽지 않았느냐?”

무렉스는 넋이 나간 아펠의 얼굴을 보며 흡족한 듯 웃었다. 아, 조금 유쾌한 것도 같았다. 이 놀이는 얼마나 갈까.

“아이야, 알아 두렴. 이래서 소원은 정확히 빌어야 하는 법이란다.”

그녀는 제 품에 안긴 아이의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였다.

“넌 무슨 소원을 빌 테냐. 네 아비는 제 아비를 죽여 달라 했는데, 너도 그것을 빌고 싶으니?”

초점이 나가 멍하던 아펠의 눈동자에 경악과 공포가 서서히 차올랐다. 제 소유물로만 여겼던 아이가 언젠가 자라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네 아비는 참으로 멍청하구나. 자식이란 애초에 부모를 양분 삼아 자라는 괴물인 것을.”

이 아이가 커서 처음으로 비는 소원이 무엇이 될까. 무렉스는 그것이 기다려졌다.

“아이야, 난 네가 어서 자랐으면 좋겠구나. 네 아비를 훌쩍 내려다볼 만큼.”

이 천사 같은 아이가 커서 어떤 추악한 소원을 빌지, 그 소원의 끝에서 무엇을 후회할지. 무렉스는 기원하는 심정으로 잠든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아이야, 부디 날 즐겁게 해 주렴. 내게 남은 아득한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무렉스의 품에 안긴 그 아이가 후에 리카서스의 문을 연 시조라 불리는 에녹 리카서스였다.

* * *

리카서스의 이야기가 끝난 응접실은 애매한 침묵에 잠겼다. 신나는 모험 이야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예상보다도 훨씬 과격한 진실 앞에 할 말을 잃었다.

부담스러운 침묵이 이어지자 달미에르가 무슨 말이든 해 보라는 듯 팔꿈치로 달로아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아니, 멀쩡한 입에 술병 물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달로아가 속닥거리며 항의하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흠흠,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음, 어쨌든 이제 그 계약은 끝난 거 아니야? 계약의 주체가 소멸했으니까.”

르네의 이야기를 들은 달로아는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오래전 카이엔의 기억에서 본, 2왕자 루안을 지키려다 물거품처럼 흩어져 버리고 만 여자아이. 아마도 그 아이가 리카서스의 선조와 피로 이어진 계약을 했다던 무렉스이겠지. 한낱 종으로 부리면 족했을 이를 왜 소멸까지 감수하며 지키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제 짐작대로라면 리카서스 혈족을 족쇄처럼 얽어맨 계약도 끝이었다. 계약의 두 주체 중 한쪽이 소멸해 버렸으니까.

“그렇다. 그 계약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그나마 다행, 다행인가? 아무튼…….”

선조의 과욕으로 줄줄이 엮인 후손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그 오랜 고통을 다행이라 말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달로아는 슬그머니 뒷말을 삼켰다.

“그, 후작님께서 잘못하신 일이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주변머리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시안마저 리에트에게 위로를 건넸다.

“……네, 감사, 합니다.”

연민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리에트가 빠득, 이를 갈며 겨우 인사를 했다. ‘아마도 시작은 이랬을 게다.’로 시작한 르네의 이야기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진실처럼 믿는 분위기를 지적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르네가 나불댄 이야기는 리에트가 아버지인 알프레드로부터 전해 들은 것보다도 훨씬 구체적이었다. 자신조차 르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실은 저러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 이제 와서 어쭙잖게 변명해 봤자 먹힐 것 같지도 않았다. 저 재앙의 주둥아리 같으니.

그 말을 한 것이 금쪽같은 제 딸이니 원망을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리카서스 후작이 고생 많겠어.”

“애 키우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래도 같이 애 키우는 처지라 그런지 캐롤린과 아리아드네가 그나마 제 고생을 알아주었다.

“애라고 다 같은 애는 아니지.”

뒤이어 날아든 왕후의 첨언에는 할 말이 없었지만.

리에트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휘적대자 베아트리스가 눈을 굴리며 주위 눈치를 살폈다.

“……이거, 계속해?”

처음 이 화제를 꺼낸 것에 책임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럼 남의 비밀만 털어먹고 끝내려 했느냐?”

르네가 눈을 희번덕이며 어림도 없다는 양 말했다. 털릴 대로 털린 리카서스에서 저렇게 나오니 싫다고 내뺄 수도 없었다.

“다음은 소르체가 좋겠다. 나는 그쪽 이야기가 늘 궁금했느니.”

야무지게 다음 차례까지 지정해 준 르네가 눈을 빛내며 소르체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은 시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르체를 둘러싼 숲이 ‘흰 뱀의 숲’이라 불리는 것은 그곳이 이 땅에 남았던 최후의 신이자 거대한 흰 뱀의 형상을 한 테리게나의 권역이었기 때문입니다.”

* * *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숲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소르체, 그 숲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흰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흰 뱀은 소르체와 시작을 함께했고, 언제나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늘 감은 채로 변함없던 흰 뱀의 눈동자가 열리더니, 뱀의 몸체가 요동치듯 크게 흔들렸다.

“아, 뭐야.”

오랜 잠에서 깨어난 테리게나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가장 오래된 숲의 숲지기, 땅과 용으로부터 기인한 존재, 흰 뱀의 형상을 한 질병을 다스리는 신 테리게나.

테리게나는 평소처럼 좀 오랜 잠을 잤을 뿐이었다. 불사의 생을 사는 자신에게는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테리게나의 기준이었지만.

“미친, 다 소멸했어? 어쩌다가?”

테리게나는 이 땅에 신이라 불리던 존재가 더는 아무도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하늘과 땅, 강과 바다, 숲과 들, 산과 계곡, 그 어디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테리게나는 소르체의 숲을 휘도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공기의 밀도가, 바람의 소리가 달랐다. 공기에서는 누구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고, 바람에서는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혼자였다. 부모와 자매와 형제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홀로 남은 테리게나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신들의 전쟁이 일어나 모두 소멸했을까, 영웅으로 각성한 인간들에게 밀려 도망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더 좋은 세계를 찾아 떠났을까. 저만 남겨 두고.

이 땅에 남은 최후의 신은 감았던 눈을 떠 무성한 숲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때, 이 세계는 신들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테리게나는 자신이 동족을 잃은 낙오자에 불과함을 알았다.

흰 뱀은 입을 쩍 벌려 주위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새벽 숲의 공기는 상쾌하고 축축했다. 제 기억과 변함없이.

변하지 않은 것이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흰 뱀은 벌렸던 입을 다물고는 다시 몸을 말아 그 사이로 고개를 처박았다.

‘어쩔 수 없지, 뭐. 운이 나빴어. 하필 자는 동안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테리게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달리 좋은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좀 더 자고 일어나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

흰 뱀은 다시 입을 벌려 크게 하품을 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그런가. 테리게나는 일어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다시 잠에 빠졌다.

한 번 잠들면 짧아도 수십 년이 보통인 테리게나였으나, 이번만은 다시 잠든 지 수십 분 만에 깨어나고 말았다. 끼잉, 낑, 잠이 들 만하면 어디선가 자꾸 강아지 우는 소리가 들려와 테리게나의 잠을 깨웠다.

테리게나는 의아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르체에 웬 강아지? 테리게나의 권역인 이 숲에는 독물이 가득해 여린 짐승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종(種)이 아니라면 웬만한 맹수조차 피해 다니는 곳이었다.

길 잃은 짐승일까? 어느 멍청한 짐승이 황량한 대지 위에 외따로 떨어진 소르체의 숲에 기어들어 온단 말인가.

테리게나는 감고 있던 몸을 풀어 스르륵, 땅 위를 기었다. 끼잉, 낑, 끊길 듯 이어지는 높고 가느다란 울음소리.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연약하고 애처로운 생명이 내는 소리가 분명했다.

동족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은 것을 알게 된 날이라서일까. 테리게나는 어쩐지 오늘따라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건 뭐지…….’

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비쩍 말라 피부가 허옇게 일어난 아이가 배를 둥글고 말고는 낑낑, 앓고 있었다.

‘강아지가 아니었네.’

테리게나의 잠을 방해한 존재는 강아지가 아니라 어린 인간이었다.

툭, 흰 뱀은 제 머리로 아이의 이마를 건드렸다. 서늘하고 미끈거리는 감촉에 아이가 눈을 치떴다.

테리게나는 자신을 본 아이가 기절하거나 울거나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울지도 도망치지도 기절하지도 않았다. 물기 어린 검은 눈망울로 테리게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연약하고 애처롭긴 하네.’

외면할 수 없었던 그 울음소리를 그대로 담아 눈동자로 만들면 딱 저런 빛깔이 될 것 같았다.

아이는 죽어 가고 있었다. 아이의 곁에는 씹다 뱉은 것으로 보이는 붉은 열매가 떨어져 있었다. 뱀딸기는 흔한 식용 열매 중 하나였으나, 소르체의 숲에서 나는 뱀딸기에는 독이 있었다.

아이의 팔다리는 마치 고목의 잔가지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진 상태였고, 크다 만 몸통은 제 머리를 받치기도 버거워 보였다.

저 아이는 뱀딸기를 먹지 않았어도 곧 죽었을 것이다. 테리게나는 아이의 사정을 짐작했다. 아이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이곳에 버려진 것 역시도.

아이의 부모는 제 자식을 버리며 무엇이라 말했을까. 어쩔 수 없다고 되뇌었을까, 미안하다고 울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왜 태어났냐고 원망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테리게나를 두고 떠난 이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처럼.

‘죽지 마라, 죽지 말아라.’

아이는 제 부모가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했다. 정말 자신이 죽지 않기를 바란다면 왜 버리고 떠나는 걸까.

어제 감자를 하나 다 먹지 말았어야 했을까. 반만 먹을걸. 그러면 이곳에 혼자 남진 않았을 텐데…….

빨간 열매를 두 손 가득 딴 아이는 생각했다. 다 먹으면 안 돼. 이번엔 조금만 먹는 거야.

예쁘고 맛있는 열매였지만, 더러운 것이 묻었는지 먹을수록 배가 아팠다. 반도 먹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는데, 미끈한 것이 제 머리를 쳤다.

겨우 눈을 떴더니 조금 전 먹었던 열매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몸통은 눈처럼 새하얗고, 눈동자는 피처럼 새빨간 거대한 뱀이었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걸까. 저 뱀은 워낙 크니 자신처럼 작은 아이는 한입에 꿀떡 삼키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어쩐지 뱀이 두렵지 않았다.

빛을 받은 뱀의 붉은 눈동자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

저 눈을 한 번만 만져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알 수 없는 열망이 아이의 가슴에 피어올랐다. 아이는 홀린 듯이 뱀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아래 닿아 온 뱀의 미끈한 피부는 서늘해 기분이 좋았다.

“살려 줄까?”

별안간 들려온 소리에 놀란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살려 줄까?”

휘휘 주위를 살피는데, 다시 한번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아, 뱀, 뱀이…….”

그제야 아이는 제게 말을 건 존재가 이 거대한 흰 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이한 목소리였다. 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 꽝꽝 얼어붙은 호수처럼 미끄럽고 서늘하면서도, 호수 위를 비추는 아침 햇살처럼 반짝거렸다.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러면 살려 주고 잡아먹지도 않을 테니.”

테리게나는 재차 아이를 채근했다. 아이의 생명이 시시각각 꺼져 가고 있었다. 이 아이 하나가 죽든 살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잠에서 깨어 처음 보는 것이 죽어 가는 아이라니. 그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약속해, 어서.”

테리게나의 재촉에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흰 뱀은 갈라진 혀를 내밀어 아이의 얼굴 구석구석을 핥았다. 두려울 법도 한데 아이는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뱀의 혀가 얼굴을 스칠 때마다 배배 꼬인 것처럼 아팠던 배 속이 편해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넘어져 긁히고 까진 상처도, 삐끗해 퉁퉁 부어올랐던 발목도, 어쩌면 아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여러 아픔들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

아이는 아프지 않은 제 몸이 낯설었다. 언제나 어디 한 군데는 아파서 끙끙 앓아야 했는데.

“넌, 내가 무섭지 않니?”

뱀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건 이 넓은 숲에 혼자 남겨졌던 일이지, 제 얼굴을 다정하게 핥아 준 뱀이 아니었다.

아이의 대답에도 뱀은 마치 고민이라도 하는 양 고개를 기울였다.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뱀을 휘감더니, 거대한 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이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이러면 좀 더 낫나? 어때?”

뱀이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사람이 양팔을 벌린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낯선 사람의 눈동자는 아이가 본 붉은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색이었다. 조금 전 아이의 얼굴을 핥아 주었던 뱀처럼.

“이게 나으려나?”

테리게나는 적당한 외형을 고르느라 제 모습을 쉴 새 없이 바꾸었다. 성별도, 나이대도, 키도, 체형도, 무엇 하나 고정된 것이 없었지만 저 붉은 눈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다 좋아요.”

아이는 테리게나의 소매를 붙잡고 배시시 웃었다. 붙잡은 것을 잘게 흔들던 아이가 빼꼼 눈을 들어 눈치를 보았다.

“저, 있잖아요. 아까 떠나지 말라고…….”

성별도 나이도 짐작하기 힘든 애매한 외형에서 멈춘 테리게나가 계속 말하라는 듯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계속 제 곁에 있어 주실 거예요?”

간절한 염원을 담은 순수한 검은 눈동자. 테리게나는 그 연약한 것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귀찮은 것을 떠맡았어.”

테리게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으름뱅이의 신이 있다면, 딱 네 자리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던 테리게나였다.

아이란 햇볕을 쬐는 것만으로 저절로 자라는 존재가 아니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웃고 우는 것. 그 외에도 말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 두는 것까지 모두 챙겨야 하는 존재였다. 생각만으로도 아득했다.

“어쩔 수 없지. 죽어 가는 것을 살렸으니.”

끝까지 책임지지 않을 거라면 애당초 죽어 가는 것을 살리지 말았어야 했다. 테리게나의 권능으로 살아난 아이였다. 그러니 앞으로 이 아이의 생은 제 책임이었다.

“우선 뭘 좀 먹어야겠구나.”

혼잣말처럼 읊조린 테리게나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성큼 높아진 시야에 아이가 테리게나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저도, 절대로 떠나지 않을게요. 계속 저랑 같이 있어요.”

아이의 뜨끈한 숨이 서늘한 테리게나의 피부 위로 흩어졌다.

“그래, 어차피 내겐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니.”

여러모로 운이 나쁜 하루였다. 이 땅에 남은 최후의 신이 되어 버린 것도, 귀찮은 것을 주운 것도, 또 아무리 찰나에 불과하다지만 제 시간을 어린 인간에게 쥐여 줘 버린 것도.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아이는 테리게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속삭였다.

믿기지 않을 만큼 운이 좋은 하루였다. 흰 뱀은 부모조차 버린 자신을 주워 살린 것도 모자라 가장 바라 마지않던 것을 약속했다. 계속 같이 있어 주겠다고. 널 버리지 않겠다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게 되더라도, 이 포근한 품을 잃고 싶지 않았다.

흰 뱀이 지키는 숲에서 부는 바람이 아이의 볼을 쓸고 지나갔다. 나를 주운 것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고, 아주 나중에라도 이 아름다운 뱀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 * *

“그 뒤는 아시는 대로입니다. 테리게나는 자신의 권능으로 살린 아이를 사랑하게 되어 불사의 생을 포기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하얀 피를 타고난 최초의 인간, 소르체의 시조이고요.”

이야기를 끝낸 시안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고요히 내리는 눈 사이로 어린아이의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는 약속대로 제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구나.”

시안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카서스 후작의 딸이라던 그 아이였다. 이상한 말투를 쓰는 조금 특이한 아이.

그런데 누가 소중한 뭘 바쳤다고?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멀뚱멀뚱 바라보자 아이가 눈가를 찌푸리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영혼 말이다. 인간이 지닌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불멸의 영혼이지 않느냐?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이 되기 위해선 불멸의 영혼을 얻어야 하고, 그것을 줄 수 있는 건 인간뿐이다. 테리게나가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아이가 소멸을 감수하고서라도 제 불멸의 영혼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소르체의 신화를 해석한 후대의 인간들은 테리게나가 사랑에 빠져 불사의 생을 포기했다고 하고, 신에 가까운 존재들은 한결같이 인간이 불멸의 영혼을 나눠 준 것이라 했다.

아리아드네는 그 해석의 간극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진실은 무엇일까. 그 모든 게 진실일 수도 있고, 어느 쪽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모든 이야기란 것이 그럴지도 모른다. 결국, 이야기란 것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며 원형과는 점점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인간들은 연약한 주제에 어쩌면 그렇게도 무모한지.”

창밖을 물끄러미 보던 르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베아트리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인간이잖아. 왜 넌 아닌 것처럼 말해.”

“그, 그렇지. 나도 인간이지. 불멸의 영혼을 가진.”

르네가 당황한 듯 두 눈을 깜박이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드디어 제 차례인가요?”

달미에르가 나섰다.

“미에르, 근데 우린 별거 없지 않아?”

“잊었나 본데, 난 리뮈르의 주인이야. 가문의 일원에 불과한 너랑은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수준이 다르지.”

“뭐야? 리뮈르에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었어?”

“나도 이번에야 알았어. 대주에게는 달의 수옥에서도 좀 더 넓은 공간이 허락되더라고.”

대주의 자리를 물려받은 달미에르가 달의 수옥을 찾았을 때, 그는 성물이 있던 작은 방에서 서재로 이어지는 문을 찾았다.

“대주에게만 허락된 그곳에는 달의 수옥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하는 달의 마법사가 남긴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달의 마법사가 남긴 일기를 발견했다. 그저 종이의 표면을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달의 마법사가 남긴 기억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자신이 남긴 말을 전해 줄 사람만을 기다린 기이하고 외로운 그 기억을.

“어쩌면 조금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 * *

보름달이 뜬 겨울밤이었다. 갑작스레 불어난 마물들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밤의 디움을 한 여자가 헤매고 있었다. 숲속의 공기는 음산하고, 눅눅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에 처박힌 것처럼.

“하, 내 무덤이 이딴 곳일 줄이야.”

여자는 피가 흐르는 왼쪽 눈을 감싸 쥔 채로 숲길을 걸었다. 어떻게 해도 출혈이 멎지 않아 머리가 핑 돌았다.

“안테노르, 개새끼.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아? 제깐 놈이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올랐는데.”

그녀는 농노의 딸이었다. 영주의 재산이나 다름없는 신분인 그녀가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힘이 장사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기술도, 천재적인 재능도 그녀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좀 더 옛날에 태어났다면 용을 잡았다는 신화 속의 용사가 되었을 거라 말하곤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힘 덕분에 농노라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이가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주군이었던 안테노르였다. 안테노르는 농노인 그녀를 사들여 기사로 만들었다. 기사가 된 그녀는 안테노르에게 승리를 바쳤고, 안테노르는 그녀에게 글로리아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어느 순간, 안테노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보다 글로리아를 외치는 소리가 더 커졌음을 알았다. 농노의 딸을 기사로 삼은 것은 쓸 만한 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글로리아의 쓰임새는 손쉽게 다룰 칼이지 머리에 얹을 관이 아니었다.

처분은 간단했다. 글로리아의 명성을 고까워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으니.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자 안테노르는 아끼는 기사에게 술을 내렸다. 의심 없이 주군이 내려 준 술을 마신 글로리아는 온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자들이 그녀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글로리아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검으로 제 손바닥을 그어 가며 악착같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렇게 죽더라도 안테노르에게 엿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그의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물도 훔쳤다. 그러다 한쪽 눈을 잃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글로리아, 네게 이 이름을 주마. 네 앞날엔 영광만이 있을 것이다.

“영광은 염병. 내가 살아남으면 이 이름부터 간다.”

글로리아는 이틀 전까지 동료였던 추격자들을 피해 마물들의 소굴로 뛰어들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마물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하나 남은 검도 부러지고 말았다. 피 냄새를 맡은 마물들이 몰이하듯 그녀를 쫓고 있었다. 이대로는 오늘 밤도 넘기지 못할 것이 뻔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름은 바꾸고 죽어야 하는데…….”

부러진 검에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지탱한 글로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피가 흐르는 눈을 부릅뜨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때, 어두운 숲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어둠에서 뚝 떨어져 나온 덩어리 같은 것이 슬금슬금 가까워졌다.

“너도 마물이냐?”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그녀가 이제껏 상대했던 곰의 대가리에 사람의 귀가 달린 마물도, 북쪽 땅의 오랜 지배자인 ‘겨울 늑대’도 아닌 깡마른 남자였다. 한 대치면 픽 쓰러질 것 같은.

밤의 디움을 혼자 돌아다니다간 죽기 딱 좋은 조건인데도, 남자는 불안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언뜻 봐서는 정신 나간 놈 같았지만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몰랐다.

“오늘은 봐줄 테니까 그냥…….”

글로리아가 귀찮다는 얼굴로 한쪽 손을 휘휘 내저은 순간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해지더니 빙그르르 세상이 돌았다. 그것을 끝으로 글로리아의 시야는 까맣게 암전되었다.

타닥타닥, 모닥불의 불티가 어두운 숲속을 날아다녔다. 모닥불 앞에 앉은 남자가 나뭇가지로 불을 헤집자 사그라들었던 불길이 화르륵 되살아났다. 불빛에 비친 남자의 머리카락은 마치 모닥불을 그대로 얹어 놓은 듯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하는 풍요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선택은 또 다른 파멸을 불러왔으니, 나는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겠다.

아르체를 떠나온 달의 마법사는 디움으로 흘러들어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체가 붕괴하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땅이 바로 여기였으니까.

아르체의 하늘이 잿빛으로 뒤덮였던 날, 마물이 된 자들이 디움 산맥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르체에서 흘러나오는 레오의 힘이 사람들을 마물로 만들고 있었다.

디움의 불행을 외면할 순 없었다. 제가 갇혀 지내야 할 감옥이 있다면 이곳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겠다고 다짐한 그가 치러야 할 몫이었으니까.

자신은 아르체의 추악한 진실을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방관자였다. 아니,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 이룩한 아르체의 풍요를 누렸으니 공범자라 해야 더 옳았다.

그런 주제에 아르체의 비밀을 끝까지 숨기지도 못했다. 페루스의 신부로 바쳐지는 이가 디티였기에.

그가 이번의 신부가 디티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다른 고아를 대신 밀어 넣을 수도 없었다. 왜 하필이면 디티가, 아르체의 신전에서 키워 낸 다른 고아가 없는 것도 아닌데, 디티만은…….

그리고 동시에 그는 이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디티만 아니라면 다른 고아는 제물로 바쳐도 좋단 말인가?

그러니 이 모든 건 그의 죄였다. 아르체의 부패를 알고도 외면한, 그런 주제에 끝까지 숨기지도 못하여 이 비극을 초래한 그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그가 자란 고향이 지옥으로 변해 버린 것도, 마물이 되어 디움으로 숨은 고향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것도, 홀로 남아 이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는 것도 그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런데……. 그가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여자를 돌아보았다. 왜 여기서 잠든 여자의 곁이나 지키고 있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저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겨울 늑대의 눈’이라 불리는 투명한 회색 눈동자.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겨울 늑대의 눈을 하고 있었다.

―팀, 같이 놀자.

열병 같았던 첫사랑도.

―떠날 건가? 내게도 네가 가는 길 정도는 방해하지 않을 의리가 남아 있지.

처음 그에게 사람의 온기를 알려 주었던 친구도. 하지만 그가 소중하게 여긴 것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고아 주제에 무언가를 욕심낸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시작부터 버려진 삶이었다. 부모도 원하지 않는 자신을 누군가가 받아들여 줄 리 없는데. 고아는 어디에서도 고아였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평생토록 이 지긋지긋한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란 걸.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외롭고, 비참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을 현실이.

그가 헤어 나올 수 없는 고독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때였다. 퍽! 방심한 그의 등으로 거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놀란 그가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 널브러져 자고 있던 여자가 검을 든 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그럼 그렇지. 뭘 기대했단 말인가. 기껏 목숨을 구해 놨더니 강도질이나 하는 인간 말종일 줄이야. 그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여자가 뒤쪽을 가리키며 턱짓했다.

“신호하면 도망쳐.”

“뭐?”

“도망치라고. 저것들은 내가 최대한 막아 볼 테니.”

이건 또 뭔 개소리야. 그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여자가 다시 한번 그의 등을 가볍게 찼다.

“마물이 이 주위를 둘러쌌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도망가. 곧 따라갈 테니까.”

그제야 그의 눈에도 붉은 눈을 빛내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마물들이 보였다.

그는 여자의 꼬락서니를 말없이 훑었다. 바짝 깎은 여자의 은빛 머리카락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한쪽 눈은 아예 뜨지도 못했고, 검이라고 쥔 것도 이가 나가고 부러져 반만 남아 있었다. 지금 저 상태로 마물을 상대하겠다는 건가. 그는 기가 차 실소를 흘렸다.

“아까 넘어지다 머리가 어떻게 됐어?”

“아니, 멀쩡한데?”

“아, 그럼 원래부터 좀 모자랐나 보군.”

그의 지적에 얼이 빠진 여자가 멍청한 얼굴로 굳어 버렸다. 그는 한심한 꼴을 더는 마주하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

뭐지, 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것 같은 주둥아리는. 글로리아는 남자의 말본새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정신을 차린 글로리아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모닥불 앞에서 훌쩍이는 남자와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마물들이었다.

겁에 질린 남자를 도와주려 했을 뿐인데 돌아온 건 비난과 무시였다. 글로리아가 말없이 서 있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보면 모르겠어? 저것들은 우리를 인식하지 못해.”

그러고 보니 마물들은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도 이쪽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왜?”

“설명하면 이해할 지능은 되고?”

글로리아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미 저 불같은 주둥아리를 한 번 참아 주었다. 더 참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 바르르 떨리던 검신이 글로리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마른 나뭇가지처럼 뚝뚝 부러졌다.

“…….”

이번에는 그의 말문이 막혔다. 인간이 아닌가? 사람이 철검을 맨손으로 부러트린다는 게 말이 돼?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너, 마법사냐?”

글로리아가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물었다.

“비, 비슷해.”

“너도 마법 쓰려면 주문인가 뭔가 하는 거 중얼중얼 외고 바닥에 뭐 직직 긋고 그래야 해?”

“……종류에 따라선.”

“아, 그래.”

여자는 그저 발을 앞으로 뻗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여자가 자신의 양손을 결박한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정말 인간이 아니기라도 한 걸까.

당황한 그의 귓가로 나지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마법사를 상대할 땐 손부터 잘라. 다음은 어디게?”

글로리아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마법사를 제압하는 요령을 익혔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실행할 때 손을 사용하는 일이 잦았다. 손을 날리면 십중팔구는 무력해진다.

하지만 그중 한둘은 손이 날아가고도 끝까지 주문을 외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글로리아의 시선이 남자의 목으로 향했다. 그는 잔뜩 긴장하여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넌 내 은인이니 굳이 알 필요 없겠지?”

글로리아가 싱긋 웃으며 단단히 붙잡았던 손을 풀어 주었다.

“좋게 말하면 서로 좋잖아. 왜 잘해 주려는 사람 심기를 건드리고 그래. 응?”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의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너 이름이 뭐야?”

“……티, 모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래, 티미. 도와줘서 고맙다.”

멀쩡한 이름을 가르쳐 줬더니 여자는 허락도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줄여 불렀다. 생긴 것처럼 무례하고 거친 여자였다.

“티미, 넌 뭐 한다고 이 밤중에 디움을 어슬렁거려? 처음엔 웬 미친놈인가 했잖아.”

글로리아가 팔꿈치로 티모시의 옆구리를 툭 치며 친근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는 너는……. 너 같은 사람이 제물로 바쳐졌을 리도 없고.”

“제물? 그게 무슨 말이야?”

“디움의 마물을 잠재우기 위한 제물.”

디움 산맥은 수년 전부터 갑작스레 나타난 마물들로 골치를 앓았다. 디움의 주민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재앙 앞에서 초월적인 무언가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물을 물리쳐 달라며 곡식이나 특이한 원석, 혹은 살아 있는 사람을 디움에 바치곤 했다.

“미친놈들. 정말 그걸로 마물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제 육신을 바쳐야지. 왜 생때같은 남의 목숨으로 그 짓을 해. 버러지 같은 것들. 제 목숨이 귀하면 남의 목숨 귀한 것도 알아야지.”

말하다 보니 열이 뻗치는지 씨근덕대는 글로리아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생명이 소중하다고? 아니, 약한 자의 생명처럼 하찮은 것은 없어. 어디든 마찬가지야.”

아르체의 죄를 갚고자 디움으로 걸어 들어왔다. 하지만 디움에서 꽁꽁 묶여 공물로 바쳐진 사람을 보고서야 그는 깨달았다.

이곳은 또 다른 아르체일 뿐이었다. 그가 지켜야 하는 무고한 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또 다른 디티는 지금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긋지긋해.”

속죄니 뭐니, 그딴 거창한 소리는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그날 아르체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더는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았을 텐데.

“야, 세상 사람들이 나쁜 짓 하는 게 다 네 잘못이냐? 땅 그만 파. 생긴 건 쌀쌀맞게 생겨서 왜 이렇게 물러?”

글로리아가 고개를 숙인 티모시의 뒷덜미를 잡아 쭉 뽑아 올리더니 퍽퍽, 두어 차례 등을 두드렸다.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조금 전까지 푹 빠져 있던 무력감을 단숨에 날릴 만한 강렬한 통증이었다. 티모시는 찔끔 새어 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원래 어디든 나쁜 짓 하는 새끼들은 있어. 그런 것들은 보이는 족족 잡아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뒈질 때까지 패야 하는데.”

평생 농노로 살았던 글로리아의 모친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썩은 감자를 제때 버리지 않으면 같은 상자에 담긴 멀쩡한 감자까지 죄 썩어 버린다고.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그렇다고 복잡한 문제도 아니지 않아?”

나쁜 짓을 한 놈은 붙잡아 벌을 준다. 이처럼 명쾌한 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글로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팔을 붕붕 휘둘렀다. 윙윙,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불었다. 마치 거대한 풍차가 공기를 후려치는 듯했다.

“어, 어쩌면 그럴지도…….”

그녀의 기백에 압도당한 티모시는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티모시의 동의가 기뻤는지 글로리아가 히죽 웃으며 궁둥이를 가까이 붙였다. 타인의 신체와 이렇게 밀접히 닿은 것은 신전의 고아원에서 지냈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뜨끈한 체온이 불편했다. 그는 티 나지 않게 꾸물꾸물 움직여 거리를 벌렸다.

“야, 그런데 이런 거 물어봐도 되냐?”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티모시는 여자의 질문이 반갑지 않았으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조금 궁금하기도 해서 굳이 막진 않았다.

“아까 너 왜 울었어?”

“누, 누가 울어!”

당황한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흐음…….”

글로리아는 붉게 달아오른 남자의 눈가를 보며 조금 엉뚱한 생각을 했다. 정면에서 깨어났다면 우는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얼굴은 울고 난 얼굴만큼이나 애잔할까. 뭐, 그런.

하지만 이 말을 하면 또 화를 내겠지. 글로리아는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내 몸도 네가 치료해 줬어?”

“내가 무슨 수로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치료해? 난 그냥 붕대만 좀 감았어. 네 몸이 알아서 자연 치유한 거야. 나는 치유에 필요한 시간을 좀 줬을 뿐이야.”

기가 차다는 듯 빠르게 대답을 마친 그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팩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과한 힘을 쓰느라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

그가 극구 부인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글로리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네가 도와준 거 맞잖아.”

“그러니까, 그게……. 됐다. 말을 말자.”

그가 뭐라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이내 분한 얼굴로 입술을 꽉 다물었다. 도와주고도, 도와줬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고집부리는 꼴이라니. 그녀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글로리아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다시 본체만체하며 그녀가 내민 손가락 끝을 툭 치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내가 지금 가진 게 없어서 줄 건 없……. 아, 맞다. 혹시, 나 주울 때 근처에 칼 말고 다른 건 없었어?”

그제야 안테노르가 목숨처럼 아끼던 가문의 성물 ‘키에레의 거울’을 떠올린 글로리아가 등을 더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등에 잘 메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중간에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마물이랑 싸울 때였나?

“이거 찾아?”

티모시가 천에 둘둘 싸인 물체를 발로 쓱 밀며 물었다. 그녀의 한쪽 눈과 맞바꾼 안테노르의 보물이 땅 위에 곱게 놓여 있었다.

“어, 그래, 그거. 보답으로 너 줄게. 너 가져.”

이딴 거울 쪼가리가 무슨 쓸모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아낀 걸 보면 제법 비싼 거겠지? 글로리아가 내심 뿌듯한 얼굴로 그것을 내밀자, 티모시가 한쪽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말아 올렸다.

“고맙다면서 엿을 주는 건 무슨 심보야?”

“왜, 이거 비싼 거야. 키에레 가문 대대로 아주 애지중지하던 물건인데?”

“이게 뭐 하는 물건인지는 알고?”

티모시가 한껏 빈정대며 천에 둘둘 싸인 물건을 툭툭 건드렸다.

“그거야…….”

글로리아는 안테노르가 이 거울을 처음 보여 주며 했던 헛소리를 떠올렸다.

―글로리아, 키에레의 거울은 키에레의 피를 이은 자들에게 타인의 마음을 보여 줘.

안테노르는 청동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거울을 쓰다듬으며 뻐기듯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대단하네요.

글로리아가 심드렁한 얼굴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이라는 것 자체가 퍽 귀한 물건이긴 했으나, 그래도 그렇지 마음을 보여 준다니. 열 살배기 아이도 믿지 않을 허황된 소리였다.

―믿지 않는군.

―뭐, 제가 믿으나 마나 변하는 건 없잖습니까. 제 것도 아닌데요.

―하하하, 그래, 그렇지. 하지만 날 배신할 마음을 먹은 이들에겐 그렇지 않겠지. 이 보물이 있는 한, 그 누구도 날 속일 수 없어.

―참으로 좋으시겠습니다.

―글로리아, 이제 알겠어? 사람들이 날 배신할 수 없는 이유를. 아니, 배신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어디서 사기당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지난번 급습은 왜 모르셨던 겁니까? 그때도 적군 장수의 마음을 미리 읽으셨으면 괜한 고생은 안 했을 텐데요.

―……피곤할 텐데 그만 쉬게.

이제 와 생각하니 그녀를 불러 거울을 보여 주며 그런 잡소리를 했던 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할 것이지. 꼭 그렇게 척을 한다니까.

“뭐,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그러던데…….”

글로리아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천하의 머저리를 발견했다는 양 저를 보는 티모시를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내가 그 말을 정말 믿는 건 아니고……. 이게 귀한 보물이라니까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지.”

심지어 남자는 한심하다는 듯 혀까지 끌끌 찼다.

‘아오, 그 머저리랑 같은 취급을 받을 줄이야.’

글로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천을 풀어내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직접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울이 있어야 할 자리엔 그것을 감싸고 있던 밋밋한 청동 조각만 남아 있었다.

“왜, 없지? 분명, 내가 그 벽에서 뗄 때까지만 해도 거울이, 여기 진짜 거울이 있었거든?”

글로리아가 억울해하며 방방 뛰는 동안에 그가 거울과 그녀를 유심히 번갈아 보았다.

“그거 들고 다니는 동안 다른 이상한 일은 없었어?”

“글쎄……. 그땐 추격자들을 따돌리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벽에 걸린 거울이 글로리아가 손대기도 전에 그녀의 품으로 스르르 떨어졌던 것 같기도 하고, 왼쪽 눈에 칼을 맞는 순간 거울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경황이 없어서 정말 있었던 일인지, 자신의 착각이었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아, 다친 왼쪽 눈이 유독 지혈이 안 된다 싶었던 거?”

“눈 좀 보자.”

글로리아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그녀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사선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난 왼쪽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리자, 마치 뿌연 막에 씐 듯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왼쪽 눈의 동공과 홍채가 구분되지 않아. 마치 뿌연 막에 싸인 것처럼. 원래도 그랬어?”

“아니, 안 그랬는데?”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티모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냉큼 고개를 저었다.

“저 거울은 성력을 품고 있었던 성물이고 아마도 널 주인으로 삼은 모양인데. 출혈이 멎지 않았던 것도 저 성물이 네 피를 가져가서 그랬을 거야. 문제는 네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느냐 하는 건데, 눈과 관련된 거니 아마도…….”

빠르게 설명을 쏟아 내던 그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글로리아를 발견하곤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왜?”

“아니, 그게, 그러니까…….”

답지 않게 말을 고르는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얼마 있지도 않은 그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뭐? 어물대지 말고 제대로 말해.”

그가 사납게 채근하는데도 여자는 퍽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의 인자한 미소가 묘하게 불쾌했다.

“너, 아픔이 많은 애였구나.”

뭐야?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그 순간, 글로리아가 중얼거렸던 말이 섬광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그러던데…….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그가 고함을 꽥 내질렀다.

“읽지 마! 남의 마음을 왜 함부로!”

그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글로리아의 눈을 가렸다. 손바닥 아래에서 글로리아의 속눈썹이 옴짝거려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마음? 마음은 아닌 것 같은데? 네 마음을 읽었다면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야 하잖아.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

글로리아는 자신이 본 광경이 누군가의 마음이라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자신이 티미의 마음을 읽었다면…….

―팀, 너 정말 똑똑하구나.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을 궁금해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마치 타인의 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던 빛과 소리로 이루어진 광경들. 글로리아는 그 광경의 이름을 짐작했다.

“내가 본 건 네 기억 같아.”

그녀의 자백에 마침내 손을 떼어 낸 그가 후다닥 멀어지며 단단히 을러댔다.

“그래도 앞으로는 마음이고, 기억이고 아무것도 읽지 마!”

“누군 보고 싶어서 본 줄 아나?”

네놈이 눈을 까뒤집으니까 보였지. 글로리아는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며 망토의 천을 북 찢어 왼쪽 눈에 감았다.

“이러면 됐냐?”

멀쩡한 한쪽 눈을 찡긋하며 묻자, 그가 머뭇대며 다가와 눈앞에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이젠 아무것도 안 읽혀?”

“음, 그런 것 같아. 양쪽 눈을 다 뜨고 있어야 눈을 마주친 상대의 기억을 읽을 수 있나 봐.”

신기한 일이었다. 천으로 가린 왼쪽 눈은 칼에 맞아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는데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이.

“이거 어떻게 예전처럼 못 되돌리나?”

글로리아가 왼쪽 눈을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남들은 가지지 못해서 안달인 능력일 텐데.”

상대의 기억을 읽는 능력은 이용하기에 따라서 무궁무진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저 여자의 무시무시한 무력과 합쳐진다면 더 그렇겠지.

“방금 너도 그랬잖아. 아무것도 읽지 말라고. 누가 좋아하겠어? 생판 남이 내 기억을 헤집는 일 따위.”

“그래서 없애고 싶다고?”

“그럴 수만 있으면.”

“……몰라. 난 모르는 일이야.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이고.”

그는 모닥불을 밟아 끄고, 마물들의 눈을 가렸던 돌무더기도 흩트렸다. 이젠 날도 밝았고,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가야 할 때였다. 정리를 끝낸 그가 서둘러 짐을 둘러맸다.

“그럼 이만.”

“야, 잠깐…….”

여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부른다고 멈출 줄 알고? 제 마음을 거울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상대와는 조금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거기 서. 서라니까!”

그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의 사각에서 검은 물체가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목덜미를 강하게 잡아챈 힘이 티모시를 반쯤 던지다시피 했다. 컥, 목이 졸린 그는 괴상한 신음을 내며 팔랑팔랑 날아가 흙바닥 위에 처박혔다.

‘겨울 늑대?’

보통의 늑대들보다 배는 큰 몸집에 투명한 회색 눈동자를 지닌 겨울 늑대가 그들을 위협하듯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것도 마물이야? 왜 이렇게 커.”

글로리아는 회색 털로 뒤덮인 늑대를 보고는 진절머리를 쳤다. 크르릉, 늑대는 침을 뚝뚝 흘리며 이를 한껏 드러냈다.

저런 맹수와 맨몸으로 싸울 순 없었다. 그나마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인 부러진 검조차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겨울 늑대가 웅크렸던 몸을 펴며 펄쩍 뛰어올랐다. 몸을 낮춰 첫 번째 공격을 피한 글로리아가 손을 뻗어 청동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손을 휘둘러 정확히 늑대의 머리를 타격했다.

쩌엉! 쩡! 쩡! 마치 묵직한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사정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겨울 늑대가 꼬리를 말고는 냅다 도망쳤다.

“휴, 뒈질 뻔했네.”

손에 든 청동 조각을 아무렇게나 던진 글로리아가 티모시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며 으스대듯 말했다.

“나도 네 목숨 한 번 구해 줬다. 어? 이걸로 빚은 갚은…….”

돌아보니 티미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 앓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글로리아는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고는 침을 꼴깍 삼키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 망했다.’

글로리아가 대중없이 던진 청동 조각이 티모시의 곁에서 데구루루 구르고 있었다.

“야, 미안하다. 내가 한쪽 눈을 잃은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거리감이 좀……. 고의는 아니야, 정말. 많이 아프냐?”

머리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티모시가 그녀를 밀어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야, 이러지 말고 우리 같이 다니자.”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는 흩어진 짐을 모아 다시 어깨에 메고는 터덜터덜 걸었다.

“오늘처럼 위험한 일 있으면 내가 지켜 줄게.”

“필요 없어.”

오늘처럼 지켜 주다가는 저 손에 명이 다할 것 같았다. 그의 거절은 들리지도 않는지 그녀는 뒤를 졸졸 쫓아오며 시끄럽게 나불댔다.

“너, 내가 장담하는데 그 입 때문에 큰 화근이 생길걸? 그렇지만 나랑 있으면 네 말본새 따윈 걱정거리도 아니지.”

“……필요 없다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 말투를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 때문에 곤란한 일을 몇 번 겪은 뒤였다. 잠시 혹할 뻔했으나 티모시는 꿋꿋이 거절의 입장을 고수했다.

“혼자 다니면 심심하잖아.”

하지만 그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어깨에 팔을 걸고는 싱긋 웃었다.

“아, 그리고 너 내 이름 좀 지어 주라. 오늘부터 이 더러운 이름 버리고 새로 태어나게.”

“싫어. 무슨 사이라고 내가 네 이름을 지어.”

그는 어깨를 들썩여 그녀의 팔을 털어 내고는 산 아래로 거침없이 내려갔다.

“그럼 무슨 사이가 되면 지어 줄 거냐?”

너랑 무슨 사이가 되느니 마물이랑 한 이불을 덮고 말지. 티모시는 진저리를 치며 귀를 막았다. 그래도 저 여자랑 같이 있으면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았다.

* * *

“이후에 두 사람은 함께 다니며 디움 산맥의 마물을 소탕하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 보이면 보이는 대로 때려잡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3년쯤 지내고 나니 일대에 대적할 만한 세력이라곤 씨가 마르고, 따르는 사람들은 잔뜩 늘어 터를 잡고 산 것이 리뮈르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그랬어?”

달로아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전대 공작이었던 아버지도 모르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달헤임은 본디부터 달의 저택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달의 마법사가 남겼다는 기록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일전에 리뮈르에 갔을 때, 개개인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는 법과 집행이 유난히 엄격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안은 몇 년 전, 리뮈르 공비 달리케에게 제 피를 건네려 하였다가 거절당한 일을 떠올렸다.

달리케의 선택을 이해하고 돌아서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리뮈르의 규제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달미에르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리뮈르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마물로부터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인간들이 있었던 거다.

―그러는 너는……. 너 같은 사람이 제물로 바쳐졌을 리도 없고.

―제물? 그게 무슨 말이야?

―디움의 마물을 잠재우기 위한 제물.

설사 타인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리고 리뮈르에서는 여전히 마물과의 사투가 진행 중이었다. 어쩌면 아직도 마물을 핑계 삼아 잔악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제 무지가 부끄럽습니다.”

리뮈르에게는 리뮈르가 쌓아 온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어째서 존중하지 못했던 것일까. 시안이 끝내 고개를 떨구자 달로아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부러 웃으며 대꾸했다.

“뭐, 법이란 발생하는 범죄를 단죄하기 위한 거니까. 역으로 말하면 리뮈르에선 그만큼 강력한 법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인간이란 위기 상황에서 놀라우리만치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굴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것을 막는 것은 개개인의 양심이 아니었다. 강력한 제도와 사회적 인식, 타인의 시선이었지. 어떤 자들에겐 디움의 마물보다 내 곁의 이웃이 훨씬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으니.

“리뮈르가 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막아 낸 건 디움의 마물만이 아니었네요.”

평소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캐롤린마저 진심으로 감탄한 듯 찬사를 더했다. 그녀 또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로서, 리뮈르가 해 온 일이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잘 알았다.

“……그렇죠, 뭐.”

“각자가 맡은 역할이 다르니까요.”

연이은 찬사가 쑥스러웠는지 리뮈르 남매가 나란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이왕 뭐라도 남기실 거면 후손의 생활에 두고두고 보탬이 되는 걸 남기실 일이지.”

달로아가 괜스레 투덜거렸다.

“사실 달의 마법사께서 따로 남기신 말씀이 있긴 한데…….”

달미에르가 뒷말을 끌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쩐지 장난기가 배인 미소였다.

“어떤 거? 설마, 너 혼자만 꿀꺽한 건 아니지?”

“그분께서 기록의 말미에 이르시길…….”

작게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달미에르가 달의 마법사가 남겼다는 말을 전했다.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단 이유로 글로리아와의 동행을 선택한 건 정말 철없는 생각이었다. 이후 글로리아와 함께한 시간은 평생 심심한 게 백 번, 천 번 나았을 만큼 위험한 나날이었고, 생존에 있어서 유희란 하등 필요 없는 요소라는 것만 깨달았다. 다만, 그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이미 어떻게도 발을 뺄 수 없는 지경이었을 뿐이다. 이 기록을 볼 자에게 충고하노니, 가장 성공한 삶은 가장 무료한 삶이다. 부디 쓸데없는 흥미에 네 삶을 던지지 말라, 라고 하셨지.”

귀중한 충고이긴 했으나, 어느 모로 보아도 달로아가 기대한 후손의 생활에 두고두고 보탬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괜한 말을 해서 다른 분들의 환상을 깨트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달미에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리뮈르가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것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가끔은 기대에 찬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자신은 아버지처럼 우직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그럴 때면 꼭 비뚠 말이 튀어나오곤 했다.

“환상이 깨질 게 있나? 말만 그렇게 하고 그 검사가 죽은 뒤에도 끝까지 리뮈르에 남았잖아.”

내내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유진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의 말대로 둘 중 리뮈르에 더 오래 남은 쪽은 달의 마법사였다.

티모시는 글로리아가 죽은 뒤에도 리뮈르에 끝까지 남았다. 달의 수옥이라 이름 지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제 공을 자랑하는 성격이 못 되는 거지. 고생은 혼자 다 하면서 매번 손해만 보고.”

바보 같은 게.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어조가 묘하게 친근했다. 마치 잘 아는 이를 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를 들은 달미에르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분이 남긴 기록을 직접 읽은 저보다도 이야기만 전해 들은 왕후의 통찰력이 나으시군요.”

유진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어 달미에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자신을 떠보는 것 같은 어조였다.

티모시가 남긴 기록에 자신과의 관계를 짐작할 만한 다른 단서가 더 있었던 걸까. 아무려면 어떤가. 제 과거가 알려진다고 세상이 뒤집힐 것도 아닌데.

유진은 새삼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는 없다고, 늘 이방인처럼 떠돌던 그였지만, 더는 불안해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가 뿌리내린 세계의 이름은 아리아드네였고, 그 세계는 언제까지고 굳건히 그를 지탱해 줄 것을 알기에.

“그 사람이 한 일을 보면 뻔하지 않나? 제 안위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면 말년을 그런 곳에 처박혀 있을 이유가 없지.”

내부로 향했던 연민을 외부로 돌릴 수 있게 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모라와 페루스의 석상이 있는 저택을 짓고, 대단한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초라한 방에서 여생을 보내다,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오래된 친구의 마음 같은 것들이.

“그런가요?”

그 말을 끝으로 달미에르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유진은 달미에르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에 있어야 할 구름이 몽땅 지상으로 내려온 것처럼.

눈 내린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아니, 이건 그가 알던 풍경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랑에 빠진 것뿐인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뀐 것 같았다.

어쩌면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몰랐다. 지겹도록 경험한 눈 내린 풍경이 더없이 특별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제게 기댄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습관처럼 쓸어내렸다. 익숙한 감각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뎅, 데엥―

그때, 자정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해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 종소리다.”

이제나저제나 새해가 밝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베아트리스가 눈을 반짝 빛냈다.

“레나,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베아트리스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얼굴을 한 레이먼드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응, 나도 잘 부탁해.”

고개를 숙인 베아트리스가 붉어진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웅얼거렸다. 유진에게 베아트리스는 손톱 밑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였다. 때때로 떠올라 어딘가 불편하게 하는.

하지만 더는 베아트리스를 떠올려도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행복해하는 베아트리스의 얼굴을 눈에 새겼다. 언제나 이 얼굴로 그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어딜 봐, 이런 순간에.”

아리아드네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웃었다.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했던가?”

하루에도 몇 번씩, 차오르는 마음을 꺼내 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안 했어. 그러니까 어서 해.”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당당했다.

“사랑해.”

켜켜이 쌓인 눈 위로 또 한 번의 고백이 더해졌다.

“나도.”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그를 안았다. 모든 것이 충만한 밤이었다.

응접실을 채운 사람들 또한 저마다 새해 인사를 나누느라 분주했다.

“알지? 행복해라. 이왕이면 결혼도 하고.”

“로아, 걱정하지 마. 조카도 자식인걸. 이 자린 내가 잘 맡아 뒀다가 네 아이에게 꼭 물려줄게.”

“진짜, 한마디도 안 지지.”

리뮈르 남매는 여전히 다정한지, 살벌한지 알 수 없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시안과 가볍게 새해 인사를 한 캐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아.”

곧장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온 캐롤린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굳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둘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웃음이 터졌다.

“이러다가 눈에 파묻힐 것 같아.”

창가에 선 베아트리스가 바깥을 보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날부터 내린 눈은 해가 바뀌고도 멈추지 않고 지상으로 끝없이 굵은 눈송이를 쏟아 냈다.

“올해도 눈과 함께 시작이네.”

“그러게. 예전엔 눈이 오면 그렇게 신기했었는데 말이야.”

캐롤린의 시야에도 눈 내리는 겨울밤의 풍경이 걸렸다. 그렇게 신기했던 눈인데, 왕도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지나치게 익숙해졌다. 가끔은 지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지금이 좋아. 눈 오는 날이 더는 특별하지 않아서.”

아리아드네가 희미하게 웃으며 눈 내리는 풍경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눈 오는 날이면 누군가 제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아리아드네에게 눈은 이별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 더 이상 눈은 무언가의 다른 이름이 아닌, 그저 눈일 뿐이었다. 이별의 기억 위로 일일이 헤아리지도 못할 많은 기억들이 쌓였다.

이제 자신에게 눈 내리는 날은 바람 좋은 날이나 비 오는 날, 혹은 구름이 잔뜩 낀 날처럼 스쳐 지나가는 하루에 불과했다.

“네가 좋다면.”

캐롤린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내는 여전히 시끌벅적 시끄러웠다.

“시안, 아까 그 숙취 약으로 우리 같이 장사하지 않을래?”

“……그런 건 저한테 이야기하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이래, 알 만한 사람이.”

한쪽에서는 캐롤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달로아가 시안을 붙잡고 시답잖은 장난을 걸고 있었고, 매사 진지한 시안은 그것이 장난인지도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다.

“대주께선 정말 그만한 재능을 물려주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올해는 좀 더 검술에 정진하는 것이―”

“그거 내 칭찬입니까?”

“누, 누가 칭찬을 했다는 겁니까! 전 단지 재능이 아까워서―”

“그러니까 경의 말은 내가 보기 드문 재능의 소유자란 말 아닙니까?”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다른 쪽에서는 모처럼 달미에르에게 딴지를 걸었다가 되레 역공을 당한 리카르도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르네, 올해는 제발 사고 그만치, 아가, 졸려?”

“……엄마, 는, 너무, ……걱정이, 많느, 많느니…….”

리에트는 모처럼 작정하고 잔소리를 쏟아 냈지만, 르네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자정이 넘었으니 여섯 살 아이가 깨어 있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긴 했다.

리에트는 꾸벅꾸벅 조는 딸아이의 코끝을 작게 튕기며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고 말았다.

“사고뭉치 딸을 키우니 걱정이 많을 수밖에.”

“……나, 졸려.”

르네가 잠투정하며 입을 삐죽거리자 리에트가 아이의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 넘겨주었다.

“엄마가 우리 딸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리에트는 잠든 딸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제 새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 같은 그 헌신적이고 맹목적인 얼굴을 보며 아리아드네는 생각했다. 품 안의 아이가 어떤 영혼을 가졌다 하더라도 리에트는 조금도 개의치 않을 거라고.

―그 바다 괴물은 왜 내 아버지를 선택해서, 차라리, 차라리…….

리에트가 자신이 낳은 아이의 영혼이 무렉스라 불렸던 존재임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레짐작했다. 둘 모두에게 좋을 것이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리에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르네의 기이한 행동과 물을 다루는 능력, 간간이 내뱉는 이상한 말들.

어쩌면 모르기가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란 자식의 얼굴에 생긴 티끌만 한 상처도 태산처럼 느끼는 존재였으니까.

“……으응. 알, 아. 나도, 나, 도……. 사, 랑해…….”

르네가 리에트의 품을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리에트가 제 옷깃을 꽉 움켜쥔 르네의 앙증맞은 손에 쪽, 입을 맞추었다. 알고도, 모든 것을 알고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품에 안은 아이가 행여나 깨기라도 할까 봐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난 리에트가 속삭이듯 고했다.

“폐하, 아이가 잠들어서 저는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푹 쉬도록 해. 내일 봐.”

“네, 그럼 이만.”

르네를 품에 안은 리에트가 시녀의 안내를 받아 배정된 처소로 돌아갔다. 리카서스 모녀가 자리를 비우자 실내는 한층 더 어수선해졌다.

오늘 연회는 이쯤에서 마쳐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 이야기는 안 해 줘?”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웠는지 아리아드네 옆에 털썩 주저앉은 베아트리스가 물었다.

“음, 올해는 이쯤에서 아쉬움을 남겨 둬야 하지 않을까?”

파장 뒤의 장터처럼, 어수선해진 주위는 이야기를 이어 나갈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신년회 담소의 최대 피해자이자 공로자였던 리카서스 모녀도 자리를 비웠고.

“그런가? 그럼 내년엔 꼭 들려줘야 해.”

“내년 신년회에도 반드시 참석해야겠습니다. 메르디에스의 비밀을 들으려면요.”

“저도 꼭 참석하겠습니다.”

“리카르도 경이 참석한다니, 나도 꼭 해야겠네요.”

“그거 반가운 말이네요.”

시안, 리카르도에 이어 달미에르까지 줄줄이 참석 의사를 밝히자 아리아드네가 기쁜 얼굴로 화답했다.

“좀, 이상해.”

피곤한 듯 레이먼드의 어깨에 기댄 베아트리스가 웅얼거렸다.

“뭐가요?”

“그냥……. 오늘 우리가 천 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듯이, 천 년 뒤의 사람들도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좀 이상해.”

레이먼드가 응접실 안을 휘휘 둘러보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어디를 보나 범상치 않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이 이룬 행적은 더 대단했고. 길이길이 회자되고도 남음 직했다.

“설마 나까지 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진 않겠죠? 그건 좀 부담스러운데…….”

레이먼드는 스스로가 평범한 사람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비록 페렌트 국왕을 사촌으로 두고,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이자 살리바의 마지막 성녀라 불린 이와 혼인했지만, 그건 주위 사람들이 특출난 것뿐이었다. 본인이야 작위도 이어받지 못할 백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다.

“레이는 예전부터 꼭 결정적인 순간에 내빼더니,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캐롤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금치 못했다.

레이먼드 브래들리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건 본인뿐이었다. 혈통도, 외모도, 지닌 능력까지도, 평균치를 훨씬 웃돌면서도 본인만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좀 봐줘. 난 너나 아리아드네처럼 그릇이 큰 사람이 못 되니까.”

레이먼드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리아드네는 같이 자라다시피 한 사촌이 앓는 소리를 하는 이유를 알았다.

작위를 이어받지 못할 차남이라는 이유로, 철이 들기도 전부터 외숙의 손에서 자란 성장 환경 때문일까. 레이는 정도 이상으로 주목받는 일을 유독 꺼렸다.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는 마땅히 해야 할 싸움을 하는 것뿐이니 부디 너만은 무사하길.]

그랬던 레이가 수장을 잃은 메르디에스에 남아 끝까지 케이루스와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레이, 넌 그렇게 그릇이 작으면서 어떻게 성녀님과 혼인할 생각을 한 거야?”

캐롤린의 웃는 얼굴 위로, 수프를 뒤집어쓴 채 눈물을 흘리던 과거의 그녀 모습이 떠올랐다.

[비 전하,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전하께서 보셔야 할 게 아직도 많이 남았으니까요.]

“미에르, 난 너한테 큰 거 안 바란다. 성녀님처럼 대단한 사람 데려오라는 것도 아니고.”

“나야말로 널 데려간다는 사람만 있으면 작위도 넘겨줄 수 있어.”

[미에르는 이미 죽었으니까. 내가 광장으로 달려간다고 그 애가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니잖아.]

죽은 뒤에도 편히 쉬지 못하고, 사촌의 손에 끌려 나와 광장에 매달려야 했던 달미에르도.

[좀 더 일찍, 우리, 가 서로를…… 알았더라면……. 우리는…… 분명 같, 은 생각을 했을 텐데…….]

카이엔을 지척에 두고도 원통하게 죽어야 했던 달로아도.

“두 분은 우애가 참 좋으신 것 같습니다.”

“시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지만 달로아 님은 대주님과 대화할 때 제일 즐거워하시잖습니까.”

[내 피가 네 발을 적시면 나는 다시 삶을 얻으리라. 오늘, 내 죽음으로 네 삶을 앗으리라. 증오와 두려움 속에서 죽는 그 순간까지 너는 나를 기다리게 되리라.]

첨탑 위에 선 아리아드네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시안의 얼굴도.

“재상께서 성격 나쁜 동생을 잘 받아 주시는 거겠죠.”

과거에는 아예 알지 못했던 리카르도까지.

이 모든 것은 분명 존재하였으되,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일들이었다. 사라진 시간들은 어디로 흐르는 걸까.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응?”

아리아드네의 혼잣말에 유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애정이 가득한 다정한 눈길에 공연히 가슴이 설렜다.

“먼 훗날, 우리의 이야기가 어떻게 어떻게 남을지.”

세상에 남은 것은 두 번째 삶의 기록뿐, 첫 번째 삶의 시간은 오직 아리아드네의 기억에만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어차피 다 그런 것이 아니던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을 온전히 박제해 남길 수 없는 것처럼.

삶이란 결국 각자의 기억에 저마다 느낀 대로 새겨지는 것이다.

기억이란 것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이며 교묘한 것이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고 비틀리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삶의 순간들은 그 자체로 소중했다. 지나간 순간은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고, 머리에 새겨진 기억조차 온전한 것은 아니기에.

먼 훗날의 누군가가 아리아드네의 삶을 들여다본다 해도,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느낀 행복을 결코 실감할 수 없으리라.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품에 기댄 채로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새벽녘, 문득 잠에서 깬 아리아드네는 옆자리가 빈 것을 알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것으로 보아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된 것 같진 않았다.

간단히 가운을 걸친 아리아드네가 내실과 연결된 문을 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리시테아의 침대 맡에 앉아 있던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왜 안 자고.”

“그냥, 잠이 안 와서…….”

엷게 웃는 그의 얼굴이 새벽빛을 받아 어슴푸레했다. 문가에 기댄 아리아드네가 소리를 낮춰 물었다.

“리시한테 잡힌 건 아니고?”

“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그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보였다. 리시테아의 앙증맞은 손이 유진의 손가락을 꼭 붙들고 있었다.

“너무 작아. 이렇게 작은 손이 나를 잡고 있잖아.”

이렇게 작은 생명체라니. 유진은 리시테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경이로웠다.

그의 세상을 지배하는 작은 폭군. 리시테아는 유진의 손가락을 붙든 것만으로, 이 땅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그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했다.

“그런데 리시 말이야. 아귀힘이 대단한 것 같아. 한 번 잡히면 꼼짝할 수가 없어.”

이어지는 그의 경탄에 아리아드네에게서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요즘의 그는 리시테아가 잠에서 깨어 눈만 떠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숨을 쉬거나, 입술을 오물거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아드네가 또 저런다는 눈으로 그를 보자 유진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정말이라니까.”

그가 리시테아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정말, 이 시간에 뭘 하는 건지.”

아리아드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연신 웃음을 흘리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잠자코 옆에 앉았다. 유진이 리시테아가 꽉 붙든 제 손가락을 아리아드네에게 내밀었다.

“어때?”

꽉 붙든 모양새가 제법 야무지긴 했다. 아리아드네가 슬며시 떼어 내려 시도해 보았지만, 자면서도 어찌나 단단히 붙잡고 있는지 어림도 없었다.

“음, 우리 딸은 기사가 되려는 걸까?”

아리아드네가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나이에 이런 강건함이라니. 어쩌면 리시테아가 레너드의 숙원을 이루는 날이 오게 될지도.

“내 말이 맞지?”

“이번엔.”

뿌듯해하며 묻는 말에 아리아드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리아드네는 유진더러 유난스럽다고 했지만, 남들이 보기엔 아리아드네나 유진이나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잠든 리시테아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아리아드네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 최대한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리뮈르 대주와는 무슨 이야기 했어?”

이 밤, 그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티모시, 그러니까 달의 마법사가…….”

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선선한 대답이 이어졌다. 리시테아의 침대 맡에 머리를 기댄 그가 느릿느릿한 손길로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왕후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년회가 모두 파하고 응접실에서 막 나오려는데, 달미에르가 그를 붙잡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달의 마법사를 아십니까?

―그 이야기를 모르는 페렌트 사람도 있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유진은 적당히 응수했다.

―로아가 왕후와 달의 저택에 들었을 때, 그전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저택의 중앙 홀이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시간을 다루는 왕후의 능력은 달의 마법사가 다뤘던 힘과 궤를 같이하지요.

하기야 그렇게 단서가 널려 있는데 아무 눈치도 못 채는 게 더 이상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달의 마법사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겨울 늑대의 눈을 한 방문자가 나를 찾으면 그에게 길을 열어 주어라, 그것이 달의 수옥에서 목숨을 거둔 티모시가 남긴 유언이었다.

이제는 알았다. 모라와 페루스의 석상이 있는 저택을 짓고, 참회하는 죄인이나 쓸 법한 초라한 방에서 그가 누구를 기다렸는지.

―그분이 마지막까지 기다렸던 사람이, ……왕후가, 맞습니까?

―아니.

끝내 부정한 유진이 몸을 돌리며 그곳을 떠나려는 순간, 달미에르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분께서 남기신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전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알아.

충동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네?

달미에르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안다고. 그 성격에 무슨 말을 남겼을지.

아는 척해 봐야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을 기다리던 티모시는 천 년도 전에 죽은 사람이니까.

―고맙다, 미안하다 뭐 그런 거겠지. 평소에는 온갖 것에 날을 세우는 주제에 결정적인 순간엔 무른 녀석이었으니까. 담담한 유진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달미에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정말, 알고 계셨군요.

하지만 티모시가 했을 생각들이 손에 잡힐 듯 훤히 짐작되자 기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마치 천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티모시의 마음이 그에게 닿은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는 모르는 척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내 말도 전해 줄 텐가?

이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티모시에게 닿을 리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말씀하십시오.

유진은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 무엇도 미안해하지 말라고.

죄인처럼,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티모시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었다.

“그게 다야.”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아리아드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을 끌어안았다.

“당신 마음도 그 사람에게 닿을 거야. 그 사람의 마음이 기적처럼 당신에게 닿았듯이.”

천 년도 전에 죽은 이에게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 리 없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어쩌면 하는 희망이 생겼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겐 당신과 함께 하는 매 순간이 더할 나위 없는 기적이니까.”

이미 그의 시간은 기적에 속해 있으니, 이제 와 작은 기적을 탐한다고 해서 그것이 대수겠는가.

그가 아리아드네의 눈가에 입술을 내렸다. 그의 세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대지 위에 입을 맞추는 구도자처럼, 그의 입술이 제 세상과 맞닿았다.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 아득한 시간을 건너 마침내 닿은 세계의 이름이었다.

그가 속한 세계는 이토록 완전했다. 모든 것이 시간 속에 흘러 모래처럼 부스러진대도, 이 세계만은 흔적처럼 남으리라. 사막을 헤매다 마주한 그 무엇처럼.

끝나지 않는 이야기,

<더 퀸(The Queen) 외전> 마침.

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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