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145/148)

외전 4. 해후

「리카서스는 여전히 본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예주의 딸이 최근 수적들과 여러 차례 만나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회동의 목적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아, 남쪽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살펴보던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뒷머리를 기댔다. 내전 직후 아리아드네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리카서스에 대한 처분이었다.

남부 연합군이 큰 피해 없이 내전을 종식할 수 있었던 것은 왕후이자 리카서스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군림했던 칼이 케이루스의 무력을 왕궁 밖으로 끌어내 준 덕분이었다. 상대의 주요 전력이었다지만 그만한 공을 세운 세력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굴 순 없었다.

그렇다고 리카서스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이 깊었다. 결국,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때를 봐 리카서스를 쳐 내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런데 리카서스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칼의 이복동생이자 현 예주인 알프레드 리카서스가 자신들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며 납작 엎드린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수십 년 전, 칼이 반정을 일으키며 선왕의 부군을 살해한 사실까지 밝혔다.

그 외에도 양민들을 수탈하여 수적으로 내몬 것을 사죄하며, 전체 영지의 절반에 달하는 땅과 리카서스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해머리 관문마저 왕가에 바쳤다. 자신들 때문에 수적으로 전락한 양민들을 위한 구제 자금으로 써 달라는 명목으로.

아리아드네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리카서스의 공작 위는 회수되었고, 작위는 후작으로 격하되었으며, 그들이 내놓은 재산은 모두 왕가로 귀속되었다.

그렇게 살려 뒀더니 리카서스는 돌연 철저한 은둔을 택했다. 건강을 핑계로 왕의 대관식조차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아리아드네의 정식 대관식이 치러진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체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더니, 기껏 올라온 소식이 이런 것이었다.

‘딸이 수적들을 만나고 다닌다니, 리카서스 예주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생각에 잠긴 듯 책상을 두드리던 아리아드네가 헛웃음을 지었다. 리카서스의 예주 알프레드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처음 자신들의 죄를 고하며 납작 엎드린 것부터가 그랬다. 시기도, 방법도, 치죄의 규모까지도 아리아드네가 용인할 수 있는 한계선에 교묘하게 닿아 있는 한 수였다.

절묘하고도 비굴한 결정이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영지와 그들이 가진 권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해머리 관문까지 바쳐 가며 목숨부터 구걸한 것은.

그리고, 보통의 귀족들이라면 결단코 실행하지 않을 처절한 전략이기도 했다.

알프레드는 이복형인 칼에 짓눌려 실권을 쥐지 못하고 평생을 허수아비로 산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라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수적이라,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읽을 수 없는 사람만큼 어려운 상대도 없었다. 어지러이 떠도는 상념들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고민거리라도 있어?”

그때, 낮고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가 그녀를 염려하듯 말을 건넸다. 아리아드네는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로 시선만 돌려 창틀에 걸터앉은 유진의 모습을 훑었다.

보통 사람의 허리 높이인 창틀에 걸터앉은 채로도 그의 다리는 여유 있게 바닥을 딛고 있었다. 시선을 조금 올리면 팽팽하게 당겨진 검은 천에 감싸인 그의 허벅지와 양옆으로 벌어진 채 페이지가 멈춘 책이 보였다.

살짝 열어 둔 창문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초가을의 햇살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 쭉 뻗은 곧은 콧날, 그녀를 걱정하듯 살짝 기울어진 얼굴.

그를 보는 것만으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머리를 짓누르던 고민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대답이 없는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그가 이내 책을 덮었다. 밀려난 책 표지에는 흰 뱀이 똬리를 튼 채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고민이 심각한 것이라 오해한 모양이다.

“미인에게 홀려 나라를 말아먹은 폭군의 심정을 헤아리는 중이야.”

그녀의 대답이 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은 그가 작게 웃고는 다시 책을 펼쳤다.

길고 가지런한 손가락이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수런거리고 목 안쪽이 간지러웠다. 그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좋았지만 그의 손을 보고 있으면 유독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봐?”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가 물었다.

“그냥…….”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저 단정한 얼굴을 난잡하게 만들고 싶기도, 평화롭고 포근한 지금 이 순간을 더 만끽하고 싶기도 했다.

깊게 묻었던 몸을 일으킨 아리아드네가 한 손에 턱을 괴고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 말이야.”

“응.”

그녀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유진은 일정한 속도로 책장을 넘겼다.

“나는 내가 욕망을 통제하는 데 능숙한 편이라고 생각했거든.”

좋아하는 거 많고 싫어하는 건 더 많았지만, 그것들을 다스리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때조차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뒤에 터트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이제까지는 통제 못 할 만큼 강렬한 욕망이 없었던 게 아닐까.”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추고 고개를 든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가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제 관자놀이를 짧게 두드렸다.

“그런데 요즘은 미친 것 같아. 당신이 내 머리에서 나가질 않잖아.”

서류를 뒤적이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그는 아무 전조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제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건 좀 억울한데.”

모든 게 그의 탓인 양 떠넘기는 아리아드네의 태도에 실소가 터졌다. 중요한 일이 있다며 번번이 그를 밀어내는 건 아리아드네였다.

읽던 페이지를 가름끈으로 표시한 뒤 책을 덮은 그가 창틀에서 내려와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갔다.

“당신 머릿속에서 내가 뭘 하고 있길래?”

아리아드네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붙잡은 그가 몸을 낮추었다. 해를 등진 탓에 그의 얼굴에 비스듬히 그림자가 걸렸다.

“정말 알고 싶어?”

아리아드네는 팔걸이를 짚은 그의 팔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되물었다. 그녀의 손길에 담긴 함의는 명백했다.

“여기서?”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붙인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무슨 상상을 한 줄 알고 장소를 가려?”

아리아드네가 뻔뻔하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치 그에게만 모든 걸 덮어씌우려는 것처럼.

“미친 생각.”

그가 손끝으로 아리아드네의 입가를 슬쩍 긁어내리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아드네가 입을 벌려 잇자국이 날 정도로 그의 손가락을 물었다.

“당신이 아무리 미쳤어도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아닐걸.”

그의 손가락을 놓아 준 그녀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잇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까?”

그가 한쪽 팔로 아리아드네의 엉덩이 아래를 받치고 가뿐히 안아 들었다. 아리아드네가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불안해?”

그의 남은 한 손이 그녀의 등을 감싸는가 싶더니 드레스의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어지럽게 교차된 끈이 순식간에 헐거워졌다. 아리아드네는 어쩌면 왕궁의 시녀들보다도 그가 의복 시중에 더 능숙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헐거워진 옷이 반쯤 흘러내렸다. 얼굴 곳곳에 가볍게 키스하던 그의 입술이 목에서 쇄골로 미끄러져 내렸다. 입술이 닿은 곳마다 깃털로 문지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를 헤집어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의 숨결 하나하나가 살갗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유영하듯 움직이는 혀의 궤적과 조금은 서늘한 타액의 온도가 한 덩어리 같기도, 수백 개의 조각 같기도 했다.

그가 아리아드네를 안은 채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그때마다 그의 입술이 살짝살짝 떨어졌다 다시 붙었다.

입술이 스친 자리에 실내의 공기가 닿으면 소름이 돋았다.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창틀에 앉혔다. 조금 전까지 그가 책을 보던 그 자리였다.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치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빛으로 일렁이는 호수 같았다.

이런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것이 아직도 거짓말 같아서. 내게 이런 행운이 일어날 리 없는데. 유진은 양손으로 창틀을 짚은 채로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맞물린 입술이 벌어지고 혀가 감겼다. 봄볕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서로의 몸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입술만 붙인 키스가 점점 깊어졌다. 젖은 살갗이 마찰하며 내는 질척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바람에 아리아드네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려 얼굴을 간질였다. 아, 성가셔. 아리아드네가 열이 오른 머리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가 팔을 뻗어 창문을 닫아걸었다.

바람 소리마저 사라진 실내에는 간간이 숨을 내뱉는 소리만 남았다. 제 숨소리에도 열이 올랐다.

입술만 붙인 간질간질한 키스도 좋았지만 그것으론 부족했다. 좀 더 닿고 싶었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고 싶었다. 둘 사이에 틈 하나 없이.

아리아드네가 그의 어깨를 잡으려 팔을 들었지만 슬쩍 피한 그가 웃으며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떼어 냈다. 이마, 볼, 턱, 코끝, 눈 아래까지 쉼 없이 쪼는 듯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가 실컷 제 욕망을 채우는 동안 아리아드네의 손은 번번이 허탕만 쳤다. 마치 연기를 움켜쥐려는 것처럼 눈앞에 있는 그를 도무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권능으로 장난질을 치는지, 그저 신체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난 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겨우 자신과 술래잡기나 하자고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어이없을 뿐.

“뭐 하는 짓이야?”

아리아드네의 힐난에 그가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 채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말해 줘. 그대로 할 테니까.”

이 상황이 즐거운 듯 얼굴 가득 걸린 장난스러운 미소가, 태연한 저 태도가 거슬렸다. 마치 저 혼자만 안달하는 것 같아서.

저 태연한 표정이 들끓는 흥분을 위장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상체를 뒤로 물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입술을 열었다.

“벗어.”

눈썹을 작게 까딱한 그가 말없이 몸을 일으켜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기다랗고 가지런한 손가락이 단추를 하나씩 푸를 때마다 셔츠가 옆으로 벌어지며 그의 맨가슴이 드러났다.

언젠가 그의 얼굴이 신전의 조각상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옷을 입었을 때보다 옷을 벗었을 때 훨씬 조각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공들여 빚은 듯한 어깨의 선이며, 가슴의 근육, 복부와 다리로 이어지는 선까지. 그의 육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집약체인 조각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또?”

셔츠를 벗어 바닥에 던진 그가 한쪽 입술만 올려 비스듬히 미소를 지었다.

“……이게 끝이야?”

눈썹을 까딱이며 되묻는 그를 보며 바닥에서 한참 떨어진 발끝을 달랑이던 아리아드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다 창틀을 짚고 있던 손을 떼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엉덩이가 창틀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달려와 그녀의 몸을 붙잡은 그가 무엇이라 말할 것처럼 입을 연 그 순간이었다. 유진의 머리채를 움켜쥔 아리아드네가 입술을 그대로 박았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가 채 놀라움을 갈무리하기도 전이었다. 벌어진 입 안으로 뜨거운 혀가 밀려들었다. 맞닿은 입술이 뭉그러지고, 이가 부딪히고, 서로의 혀가 난잡하게 얽히는 키스였다. 우둘투둘한 입천장을 긁고 지나간 혀가 목구멍을 틀어막을 것처럼 깊숙이 들어왔다. 더 깊이 닿고 싶다는 듯이.

색이 옅은 속눈썹이 들리더니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유진과 시선을 맞춘 그녀가 눈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쪽, 호선을 그린 입술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쯤에서 그만해야지 싶으면서도 배가 부른 듯 만족한 그녀의 얼굴에 어쩐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끝이야? 당신 상상이 이렇게 건전하면 기대한 내가 불쌍해지는―”

어느새 신발이 벗겨졌는지 스타킹만 신은 맨발이 그의 한쪽 허벅지를 꾹 눌렀다. 숨을 참느라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더는 여유를 부릴 정신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를 끌어안으려 뻗은 손이 멍하니 허공을 짚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몸을 물린 탓이었다.

아리아드네의 몸을 붙드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녀의 허락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애타는 시선에 귓바퀴에 입술을 묻은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 상상은 어떤 거야? 이런 거?”

탁, 그의 몸에 걸쳐진 마지막 단추가 풀렸다. 한낮 왕의 집무실에 들기에는 지나치게 방종한 차림이었다.

아리아드네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아리아드네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닿은 가슴으로 기분 좋은 진동이 울렸다.

“나도, 나도―”

웃으며 그의 눈가를 쓸어내리던 아리아드네가 다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랑해.”

그가 쏟아 낸 난잡한 상상들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이란 말로 치환해 되돌려주었다.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언제나 기적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와 지낸 시간이 얼마이든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틈 하나 없이 맞물린 몸으로 서로의 체온이 전해졌다. 서로의 손가락이 얽혔다. 그가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넓게 쓸어내렸다. 미끈거리는 스타킹의 감촉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그는 손끝에 힘을 줘 그녀의 다리를 감싼 스타킹을 찢어 내렸다. 구멍이 난 스타킹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또 해 먹었어. 이게 몇 개째더라.’

아리아드네는 허전해진 다리의 감촉에 반사적으로 그가 못 쓰게 만든 스타킹들을 떠올렸다.

“딴 생각할 정신이 있어?”

불에 달군 쇳덩이를 삼킨 것처럼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눈만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스타킹이 벗겨져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에 입술을 붙였다.

그의 말대로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성은 모조리 날아가고 감각만 남았다. 한낮의 햇빛도, 조용한 가운데 들리는 젖은 소리도, 모두 촉감이 되어 피부에 달라붙었다.

눈을 감아도 몸 곳곳을 짚는 그의 손 모양이 그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남들보다 마디 하나는 큰 손인데도 손가락이 유난히도 길고 곧았다.

단정한 손톱, 툭 불거진 마디와 손목뼈, 손등의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치는 흰 피부. 단정하게 생긴 그 손이 단정치 못한 짓을 할 때면 뙤약볕 아래 몇 시간이고 선 것처럼 머리가 끓었다.

툭, 제 몸부림에 유진이 읽던 책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가름끈으로 표시해 둔 것이 무색하게 바닥을 나뒹군 책은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그와의 하루는 언제나 그녀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 *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주위가 어둑했다. 내가 언제 잠들었더라. 아리아드네는 잠들기 전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를 감싸듯 안은 등 뒤의 체온이 서늘해 기분 좋았다. 몸을 돌린 아리아드네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잠긴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자지.”

두어 번 눈을 깜박거려 남은 잠을 쫓아낸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살폈다. 좀 어둡긴 했지만 한밤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벌써 날이 바뀌지는 않았을 테고.

“저녁이야?”

“응.”

침전에서는 유독 소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의 짧은 대답조차도 여러 차례 음미하게 되는 걸 보면.

“뭐 좀 먹을래?”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가.”

아리아드네는 작게 하품을 하며 그의 품을 좀 더 파고들었다. 유진이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크고 서늘한 손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쪽, 불시에 이마 위로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뺨에도, 감은 눈 위로도.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간지러워.”

눈가를 찡그린 아리아드네가 그의 입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러라고 하는 거니까.”

그는 끝내 자신을 깨워 뭐라도 먹일 작정인 듯했다. 땀을 흘렸던 몸은 막 씻은 것처럼 개운했다. 그가 직접 씻겨 주는 일도 드물진 않았으나 오늘처럼 관계 중에 잠든 날이면 권능을 사용하는 일이 더 잦았다.

기껏 잠든 사람을 깨우기 싫다는 이유였다. 엉망이 된 집무실도 그가 손짓 한 번으로 정리했겠지. 지나치게 유용한 능력이었다. 가끔은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울 만큼.

아리아드네가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 우툴두툴한 흉터 자국이 걸렸다. 타우루스의 집게발에 찍힌 상처였다. 언젠가 유진은 그 상처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그 상처가 낫지 않았던 건 페루스의 심장을 잃어서 그랬던 것 같아.

신은 제 몸의 일부를 떼어 내 권속을 만든다. 신의 일부는 권속의 심장이 되고, 권속의 육체와 영혼은 심장으로부터 자라난다.

유진은 그녀의 시간을 돌리기 위해 페루스의 심장을 바쳤다. 시간을 되돌린 세계에서 유진에게 닥쳤던 모든 위기는 그가 더는 불사의 권능을 지니지 않은 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진에게 있어 불사의 몸은 형벌에 불과했고, 그가 지금 상황에 만족하고 있으니 아리아드네도 그것을 굳이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당신 능력은 권속의 심장이 없어도 사라지지 않아?”

가끔 이런 것이 궁금할 뿐.

“왜 없어지면 버리게?”

그가 장난기가 묻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와 이런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이제는 제법 오래되었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당신을 주워 와야지.”

아리아드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받아치자 그가 팔꿈치를 세워 모로 누우며 느릿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신의 권능은 존재로부터 기인하는 힘이야.”

페루스의 기억은 그에게 단번에 모든 것을 알려 주진 않았다. 다만, 어떤 계기로 무언가를 자각하게 되면 그제야 한쪽 귀퉁이가 완성되는 거대한 미완성 퍼즐이나 마찬가지였다.

“존재?”

“음, 그러니까 모라는 시간을 다스리는 신이지. 하지만 모라가 시간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 모라의 권능은 시간이 존재하기에 생겨난 것이니까.”

유진의 설명에 아리아드네가 눈가를 찡그렸다. 역시 자신은 저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와는 아무래도 상성이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간이 존재한 후에야 모라도, 모라의 권능도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인가?”

유진이 찡그린 아리아드네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야. 그리고 세상에 시간이 존재하는 한, 시간을 다스리는 권능은 여전히 유효해. 이 세상에 모라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권능이 유효하다고?”

“권능은 존재로부터 기인한 힘이니까. 시간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시간의 권능도 사라지지 않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면 권능이 사라지든 사라지지 않든 무슨 의미가 있어?”

원석이 굴러다녀도 그걸 보석으로 가공할 기술이 없다면 좀 예쁜 돌멩이인 거지, 뭐. 아리아드네가 불만스레 중얼거리자 유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없어. 유달리 꿈이 잘 맞는다거나, 직감이 뛰어나다거나 그런 사람들 있잖아.”

“그게 권능이라고? 뭐야, 내가 알던 거랑 너무 차이 나잖아.”

“신들은 태초의 존재니까. 가장 먼저 태어나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던 것뿐이야. 인간은 개체가 늘어나는 만큼 한 개체가 지닌 권능의 수준이 점점 줄어드는 거고.”

그 말은 인구가 늘어날수록 권능이 옅어진단 뜻이었다. 백 년, 혹은 천 년 뒤에는 정말 이 모든 것이 신화 속의 이야기로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든 예외는 있기 마련이니까. 가끔은 돌연변이처럼 강대한 권능을 타고나는 존재들도 있지.”

과거의 레오처럼, 혹은 지금의 베아트리스처럼, 시대의 미아 같은 존재들이.

“그리고 내게는 여전히 페루스의 일부가 남아 있으니까.”

그의 손끝에서 황금빛 광채와 함께 머리만 남은 남자의 얼굴을 둥실 떠올랐다. 한때는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이라 불렸던 카푸트였다.

권속의 심장을 잃고도 레오의 머리는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다. 썩지도 못하는 시체처럼.

“안녕, 레오.”

아리아드네가 마치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카푸트를 향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한량없는 그녀의 다정함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왼손을 휘둘러 그녀에게서 카푸트를 떨어트려 놓은 그가 남은 설명을 마쳤다.

“페루스의 심장을 잃기 전과 같을 순 없지. 하지만 좁은 공간의 시간을 왜곡하거나, 순간적으로 시간을 멈추는 정도의 일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서.”

드넓은 아르체의 계절을 통째로 뒤틀었던 페루스에 비하면 이런 것은 어린애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기어이 카푸트를 향해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응?”

“원래는 무슨 색이었어?”

되찾은 것이 퍽 만족스러운 양 아리아드네가 부드러운 손길로 카푸트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천 년도 전에 세상에서 지워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아리아드네는 태연히 ‘그것’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것’의 본래 생김새를 궁금해하곤 했다. 이유도 없이 머리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갈색.”

그가 손으로 얼굴을 반쯤 덮은 채로 짧게 답했다.

“눈은?”

“이거.”

손을 내려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본 그가 손가락으로 제 눈가를 두어 번 두드렸다. 카푸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어 그의 회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그때도 아름다운 얼굴이었겠네.”

천천히 왼손을 감아쥐어 카푸트를 갈무리한 그가 아리아드네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기분이 이상한데…….”

어떻게 당신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걸까, 더는 남은 심장도 없는데.

“질투해?”

그의 허리를 껴안은 채로 고개만 빼꼼 든 아리아드네가 눈가에 장난기를 가득 매달고는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말 한마디에 지옥에 떨어졌다가,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단번에 그곳에서 끌어 올려진다. 속절없이 무너졌다 다시 세워지고, 세운 보람도 없이 와르르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당신이랑 있으면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게 돼. 내 생각은 다 빗나가 버리니까.”

그녀 앞에서는 모든 방어가 무용했다. 애초에 그녀를 막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 몰랐어?”

눈가가 잔뜩 휘어지도록 웃는 얼굴은 언제나처럼 오만하고 당당했다. 처음 사랑을 고백하던 그날처럼.

“아니, 그건 알았어.”

사막에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처럼,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사람이라는 것은 처음 본 순간 직감했다.

“그럼?”

“당신을 사랑하고도 내가 살 수 있을지 몰랐지.”

과거의 ‘유진’은 아리아드네가 탑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세계의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을 깨달았다.

세계의 시간을 되돌리는 데 필요한 것은 세 가지였다. 매개체인 모라의 그릇, 신부들의 영혼에서 취한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고인 페루스의 심장, 그리고 시간을 되돌리는 축.

시간을 되돌리고자 하는 자가 모라의 그릇으로 페루스의 심장을 찌르면 시행자를 둘러싼 세계의 시간은 역행한다.

“과거로부터 흘러온 현재와 미래로부터 거슬러 온 현재가 충돌했던 그때를 기억해? 아니, 당신이 시간을 거스른 것을 자각했던 시점이라고 말하는 게 더 이해가 쉬우려나?”

그가 어떤 말로 설명하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날의 일이라면 공기의 냄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기억해. 란데르의 여름 별장에서 차를 마시다 혼절했지.”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고,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던 고통, 자신을 짓누르던 압도적인 어둠.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아팠어?”

그렇게 묻는 유진의 손가락이 아리아드네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가 겪었을 고통을 이미 짐작하는 얼굴이었다.

“……죽는 줄 알았어. 아니, 그것보단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감각에 가까웠지.”

아리아드네의 담담한 대답에도 그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세계의 시간은 당신을 축으로 거슬러 올라왔으니까. 그 충격을 당신이 고스란히 받은 거야.”

그것은 아리아드네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자, 그녀 홀로 겪은 상처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다.

“아마 시간을 돌린 게 나였다면 난 살지 못했을 거야. 페루스의 심장을 잃은 타격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대로 흩어졌겠지. 유해조차 남기지 못하고.”

어쩌면 그랬을지 모를 미래에 대한 확신이기도.

“시간을 돌린 게 당신이라서, 나는 권속의 심장을 잃고도 이렇게 살아 있는 거야. 내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혹은, 새로울 것 없는 고백이기도 했다.

“그 지긋지긋한 저주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이 된 거야.”

유진의 고해가 끝나자 아리아드네가 그를 잡아 아래로 끌어 내리며 물었다.

“신을 타락시켜 인간으로 끌어내린 게 아니고?”

애초에 그는 그런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지만.

“당신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어도, 무엇을 버려도…….”

그녀 곁에 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벗어날 수 없는 과거에 묶여 죽음만을 바라던 그에게 내일을, 삶을 준 존재였으니까.

“……있잖아.”

말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던 아리아드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당신이 읽던 책 말이야.”

예상하지 못한 화제였는지 그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소르체의 신화, 였던가?”

낮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그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표지에 그려진 똬리를 튼 흰 뱀은 소르체의 시조라 알려진 존재였다. 인간을 사랑하여 불사의 생을 포기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는, 이 땅에 남았던 최후의 신.

“어렸을 땐 이해 못 했거든. 그토록 위대한 존재가 어째서 사랑을 위해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지.”

페렌트 다섯 가문의 이야기는 페렌트 사람이라면 글을 배우기도 전에 지겹도록 듣는 가장 오래된 역사이자 아이들이 접하는 최초의 동화였다.

어린 아리아드네는 소르체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선택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나이이기도 했지만.

“나라면 절대로 사랑 때문에 불사의 생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때는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한 사랑보다는 강대한 권능을 가지고 불사의 생을 사는 존재가 훨씬 위대하게 느껴졌다.

“이젠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

어렸을 땐 그토록 위대하게 느껴졌던 영원이라는 삶이 더는 축복이 아님을 알았다.

“또다시 혼자 남고 싶지 않았을 거야. 모두가 떠난 자리에.”

그의 외로움과 상처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그래서 불사의 생을 버리고 인간을 택한 게 아닐까.”

자신을 선택하고도 그가 때때로 떠나보낸 누이를 향한 그리움과 죄책감에 밤잠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걸 이해하게 돼.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게 돼.”

원래라면 평생토록 알지 못했을 달의 뒷면을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그렇게 알게 된 세상은 때론 추악하지만,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내린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눈가에 잘게 키스했다.

유진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먼지 쌓인 유물처럼 묻혀 있던 페루스의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왜, 귀찮게. 이런 쓸데없는 일로 부르지 좀 마. 잘 거니까.

너무 게을러서 신들의 연회조차 거부하기 일쑤였던 거대한 흰 뱀의 모습을.

처음 그 책을 집어 든 것도 그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이 땅을 떠나지 못한 것도, 끝내 인간이 된 것도 그 게으른 성미 때문이 아닐까 싶었지만.

“……왜 웃어?”

끝이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꾹 누른 아리아드네가 불만스레 물었다.

“당신이 좋아서.”

그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찌푸려졌던 얼굴이 금세 화색을 띠었다. 쪽쪽,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붓는 아리아드네와 뒤엉켜 침대 위를 반쯤 굴러다녔다. 물고 물리는 키스 세례가 한바탕 지나가고, 그에게 안긴 채로 멍하니 천장을 보던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아, 그런데 신은 인간이 될 수 있잖아. 인간은 신이 못 돼?”

가끔 아리아드네는 그를 신학 백과사전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황당하다가도 이내 무엇이라 대답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 보면 답도 없는 건 제 쪽이었다.

“신을 먹어 치우면 가능하겠지. 내가 페루스의 힘을 흡수해 권속이 되었던 것처럼.”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이나 권속의 힘을 흡수할 만한 그릇을 갖춘 인간은 몹시 드물었으니까.

“그럼, 신이 인간이 되는 것도 인간을 먹어 치워서 그런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머릿속을 떠도는 추상적인 개념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망설이자 아리아드네가 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사람이 소나 돼지를 먹는다고 소나 돼지가 되진 않잖아. 그런 거지.”

그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리아드네의 미간이 구겨졌다.

“인간의 정체성은 불멸의 영혼이니까. 인간이 되기 위해선 영혼을 취해야 하는데, 그건 신이나 권속의 힘처럼 그저 흡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

“그러면?”

“상대의 영혼과 동화되어야 해. 인간의 영혼이 소멸을 감수하고 상대를 받아들이면 불멸의 영혼을 나눌 수 있어. 그렇다고 해도 불멸과 소멸 중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소르체의 흰 뱀은 여러모로 운이 좋았지.”

영혼을 나눠 주겠다는 상대가 있었던 것도, 그 도박이 성공으로 끝이 난 것도. 그가 덧붙인 말에 아리아드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아, 운 말이지. 운…….”

궁금하다며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걸 보니 다시 졸린 듯했다.

“있잖아. 만약 당신이 신이고, 그래서 인간이 되고, 되고 싶다면, 내가, 내 영혼을…… 나눠 줄게.”

점점 느려지는 목소리, 불분명한 발음, 반쯤 감은 눈까지. 이 대화를 그녀가 기억이나 할까 싶었지만 어쩐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당신까지 소멸하면 어쩌려고?”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다는 핑계로 얼굴을 건드리자 잠에 취한 그녀가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아버지보단, 못하지만……. 나도, 꽤 운이, 좋은…… 편이거든.”

그렇지 않아도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유진의 몸에 막혀 더 알아듣기 힘들게 뭉개졌지만, 그가 아리아드네의 말을 놓칠 리 없었다.

“뭐 좀 먹고 자. 응? 점심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

그가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아리아드네를 슬쩍 떨어트리며 깨워 보려 했지만.

“조금만,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그렇게 말하며 가슴께에 바짝 붙어 오는 그녀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오늘도 지고 만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등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리아드네가 일어나는 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나 일어나면……. 나랑, 어디 좀, 같이…… 가.”

“어디?”

“리, 카서스에……. 서류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게, 아무래도,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어쩌니 하더니, 결국은 또 일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사랑에 빠진 여자는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그렇게 해.”

그가 아리아드네의 이마 위로 가볍게 입술을 누르며 대답했다.

“……같이, 갈 거지?”

“물론.”

“오랜, 만……. 우리 같이, 여행……하는 거.”

좋은 꿈을 꾸는지 아리아드네가 기분 좋게 웃으며 색색 고른 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네가 궁을 비운단 소식을 들으면 달로아 리뮈르가 좀 싫어하겠지만. 그거야 어차피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유진의 손끝에서 퍼져 나온 어둠이 아리아드네의 눈가를 덮었다. 그녀의 밤이 평온하기를.

* * *

마차 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가을이 세상을 온통 감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탄 마차는 라이덴 백작령을 지나는 중이었다. 이 경계만 넘으면 목적지인 리카서스였다. 서늘한 바람이 창문을 넘어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폐하, 바람이 차진 않으신가요? 창문을 좀 닫을까요?”

창문의 손잡이를 야무지게 움켜쥔 여자가 높고 발랄한 목소리로 물었다. 위버 자작가의 차녀이자 아리아드네가 메르디에스 공녀였던 시절, 측근 시녀로서 그녀의 곁을 지켰던 줄리였다.

원래라면 아리아드네와 함께 왕도로 갈 예정이었으나, 장녀였던 언니가 위버 자작가의 후계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줄리는 후계 수업을 위해 위버 자작가로 급히 돌아가야 했다.

떠나는 날까지 자신은 아리아드네 곁에 남을 거라며 펑펑 울던 줄리는 결국 위버로 돌아갔고, 한 달 전 무사히 자작 위를 계승했다.

작위 계승을 위해 왕도를 찾았던 줄리가 아리아드네의 리카서스행 소식을 듣고는 동행을 자청한 것이었다.

“아니, 기분 좋은데? 왜 추워?”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저으며 되묻자 줄리가 손잡이를 놓고는 냉큼 자리에 앉았다.

“아니요, 저도 너무 좋아요!”

발랄하게 외치는 줄리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폐하, 폐하,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호칭이나 아이 같이 들뜬 줄리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피식 웃음을 흘리는 아리아드네 어깨 위를 부드러운 옷감이 스쳤다. 고개를 들자 숄을 여며 주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감기 걸리시면 안 되니까.”

눈을 접어 곱게 웃던 이블린이 숄을 마저 정리해 주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참 다들 한결같기도 하지, 아리아드네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과보호가 지나친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잔병치레한 적도 없고, 체력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주위 사람들은 언제나 그녀를 챙기지 못해서 안달복달이었다. 제 위치가 있으니 극성스러운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어 그러려니 받아 주다가도 가끔은 어이가 없었다.

“폐하께서 이번 여정 중에 혹 편찮으시기라도 하면 저희가 린즈 부인을 뵐 낯이 없는걸요.”

이블린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줄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글레나를 들먹이는 건 좀 반칙 아닌가? 왕궁의 내정을 담당하는 궁내부장이 되며 곱절은 더 깐깐해진 글레나를 떠올린 아리아드네가 얌전히 숄을 여몄다.

한시도 쉬지 않고 조잘대는 줄리와 달리, 이블린은 시종 차분했다. 원래도 그런 성품인 거야 알고 있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줄리야 그렇다 쳐도 이블린, 넌 큰일을 겪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좀 쉬어야 했던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절 불러 주시지 않았으면 그게 더 서운했을 거예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무슨 말이냐는 듯 이블린이 단박에 부정했다.

“맞아요. 이블린이 이번 동행을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옆에서 신이 난 줄리가 거드는 건 덤이었다.

“줄리, 넌 아니고?”

“물, 물론 저도…….”

붉어진 줄리의 얼굴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한동안 근황이며, 사교계 화제 등을 두서없이 나누던 중에 이블린이 침잠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신 것 알고 있습니다. 이블린 리스터,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블린이 가슴에 손을 얹고는 깊게 몸을 숙이자, 아리아드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일으켰다.

“됐어, 그런 인사치레.”

이블린과 줄리는 아리아드네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었다. 사소한 일로 일일이 감사 인사를 받고 싶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이제 파혼 동지네.”

아리아드네가 픽 웃으며 가볍게 덧붙였다.

반년 전, 이블린은 결혼을 불과 열흘 앞두고 파혼했다. 파혼 사유는 약혼자의 도박 빚이었다. 이블린의 약혼자는 점점 늘어나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이블린의 서명을 위조하기에 이르렀고, 채권자들이 빚을 갚으라며 그녀를 찾아와서야 모든 사실이 밝혀졌다.

이블린은 약혼자와 채권자를 상대로 지겨운 싸움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메르디에스의 도움이 있었다. 파혼과 연이은 소송까지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그 일을 겪으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전 약혼자는 구제할 길 없는 인간 말종이었지만 파혼은 그녀 인생에서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네요. 비록 전 목은 못 잘랐지만.”

이블린이 담담히 웃으며 대꾸하자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스쳤다.

“자르고 싶었어? 도와줄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이블린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리아드네와의 인연은 그 자체로 이블린의 보물이었다. 아무런 흠집 없이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아뇨, 전 그 사람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해서요. 그래서 채권도 사들인 거니까요.”

주위 사람들은 이블린에게 전 약혼자와 깔끔하게 정리하고 더는 엮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이블린은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제 잘못을 오래도록 잊지 않기를 바랐다. 매달 자신에게 원금과 이자를 갚으면서.

“그래, 너라면 그럴 것 같았어.”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주억이며 의자 깊이 몸을 묻었다. 제 주위 사람들에게만은 불행이 얼씬도 하지 말았으면 하지만, 그 바람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불행을 겪고도 꺾이지 않도록 받쳐 주는 디딤돌 노릇이나 할 수밖에.

가끔은 눈이 뒤집혀 폭군 짓거리가 하고 싶을 때도 종종 있었지만, 아리아드네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너무 이성적이었다. 아마도 얌전히 선정을 베풀라는 하늘의 뜻인 듯했다.

“저, 저는요?”

별안간 들려오는 뜬금없는 소리에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었다. 줄리가 초조한 얼굴로 아리아드네와 이블린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저도 파혼하고 올까요?”

줄리도 파혼 행렬에 동참하고 싶다면 굳이 말릴 이유야 없지만.

“약혼도 하기 전에? 누구랑?”

문제는 줄리가 파혼할 약혼자는커녕 혼담을 주고받는 상대조차 아직이라는 거였다.

“그렇지만 저만…….”

파혼 동지에서 저만 빠진 게 서운했는지 줄리가 기가 죽은 얼굴로 뒷말을 흐렸다. 후계 수업을 받고, 작위를 승계하고도, 줄리는 여전히 어린 동생 같은 데가 있었다. 그게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지만.

“좀, 쉬었다 가는 게 어때?”

그때였다. 내내 아무 말이 없던 유진이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세 사람의 대화에 넋이 반쯤 빠진 얼굴이었다.

“그럴까?”

아리아드네가 구겨진 유진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며 싱긋 웃었다. 유진의 표정이 겨우 펴지는가 했더니.

“와아― 폐하, 보셨어요?”

줄리의 우렁찬 감탄 소리에 그가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창밖으로는 거대한 푸른 물길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저게 바로 크레즈 운하인가요?”

이블린의 물음에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카서스의 푸른 핏줄.”

포에스해(海)와 해머리 강을 잇는 크레즈 운하는 남서부 물류의 중요한 통로로, 해머리 관문이 리카서스의 심장이라면 크레즈 운하는 리카서스의 핏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한적하네.’

아리아드네에게 리카서스를 위시한 서남부는 손톱 밑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리카서스를 주축으로 한 서남부와 메르디에스를 주축으로 한 동남부는 본디부터 사이가 나빴다. 영지 간의 경계가 닿아 있어 분쟁거리가 끊이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던 것이 메르디에스가 서대륙의 중립 무역 지대인 카타라 상행을 독점하며 해상 무역의 판도가 바뀌자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서남부 세력은 메르디에스의 카타라 상행이 자신들의 영역인 ‘해상’을 침해한 것이라 여겼다. 그들끼리는 카타라 해전이라 부를 만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사건이었다.

메르디에스의 주요 수원인 보우 강을 두고 갖은 패악을 부리며 화풀이하곤 했지만, 그것으로 상처 입은 자존심을 모두 회복하긴 무리였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칼의 반정은 곧 서남부의 승리였다.

그런데 결국 메르디에스가 왕조마저 뒤집었으니 그들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었다. 지금이야 눈치를 보느라 엎드려 있지만, 이것이 얼마 가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아리아드네는 리카서스를 잃은 서남부가 새로운 구심점을 찾아 똘똘 뭉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서남부의 새로운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디아즈 후작가라 더 그랬다.

‘그 영감이야 칼보다 더 까다로우면 까다로웠지, 결코 그보다 못한 작자가 아니니.’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외조부이자 디아즈 후작가의 주인인 대런 디아즈를 경계했다. 성품이나 능력도 그렇지만, 대런 디아즈가 메르디에스에 가진 반감은 쉬이 넘길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리카서스의 세력이 남아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물고 뜯으며 서로의 힘을 빼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리카서스를 살린 것에는 그런 계산이 있었다.

그런데 서남부 패권을 되찾으려 하기는커녕 내도록 숨죽이고 있던 리카서스가 돌연 수적과 회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쪽에서는 그 속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으니.

“폐하, 여기서 쉬신다고요?”

마차가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가까이 있던 이블린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앞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아리아드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바람 좀 쐴까 하고.”

“마침 제가 페레즈 운하를 내려다보기에 딱 좋은 장소를 알고 있답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장난스레 눈을 찡긋하는 여자는 바로 메르디에스 상단주인 신시아 버넷이었다.

“그럴까?”

마차에서 내려 굳은 몸을 가볍게 푼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마차 타느라 피곤했을 텐데 좀 쉬고 있어.”

이블린과 줄리도 좀 쉬게 해 줄 겸, 아리아드네가 기사 두어 명만 대동한 채 신시아를 따라 걸었다. 유진이 있으니 따로 호위는 필요 없었지만 그래도 왕이라는 제 위치가 있으니.

“길 안내나 시키기엔 메르디에스 상단주는 너무 거물급 인사 아니야? 그러게 다른 사람 보내라니까.”

신시아의 뒷모습을 보며 부지런히 걷다 보니 괜스레 투덜대고 싶어졌다.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페렌트에 폐하보다 더 거물이 존재할 수 있나요? 메르디에스 상단주야 폐하 앞에선 이름도 못 꺼낼 미천한 존재이지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가벼운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야트막한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거기, 발밑을 조심하세요.”

마치 뒤에 눈이 달린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길 안내를 하던 신시아의 걸음이 우뚝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여기가 바로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명당이랍니다.”

신시아가 가리킨 자리에 서자 물기를 머금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언덕 아래로 검푸른 물결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포에스해(海)와 해머리 강을 잇는 크레즈 운하였다.

운하의 양옆으로는 잘 닦인 도로와 건물들이 다닥다닥 밀집해 있었다.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싶었는데 마침 유진이 들고 있던 로브를 아리아드네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강물 위로 한낮의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비쳤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는 물비늘은 마치 툭툭 베어 낸 빛 조각 같았다.

그 위를 작은 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분명 아름다운 풍경인데 어쩐지 오래된 그림처럼 낡은 느낌이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신시아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예상은 했지만 페레즈도 예전만 못한 것 같네요. 한때는 저기에 내 건물 하나를 가지는 게 꿈인 적도 있었는데 말이죠.”

신시아의 손가락이 페레즈 운하 근처를 빙 맴돌다 이내 떨어졌다.

한낮인데도 페레즈 운하 위를 운행하는 배들은 자그마한 배 몇 척이 전부였다. 운하를 따라 난 대로와 갑문 근처 선착장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도시 전체가 침묵에 잠긴 것처럼 고요했다.

페레즈 운하의 가치는 아로스 왕국, 성도 살리바와 가까운 포에스해(海)와 리카서스 전체를 관통하는 해머리 강을 잇는다는 것에 있었다.

페레즈 운하의 운행권을 리카서스가 독점하고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쨌든 리카서스에 운행료를 내기만 하면 페레즈 운하를 문제없이 이용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리카서스가 서남부에서 지배력을 잃으면서부터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페레즈 운하의 운행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것은 물론, 운하가 자신의 영지를 지나니 우리도 통행료를 받아야겠다는 자들이 나타났다.

페레즈 운하를 지나는 데 드는 통행료가 열 배 가까이 뛰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운하를 지나 해머리 강에 진입하면 또다시 통행료를 내야 했다.

통행료 장사에 눈이 먼 영주들은 날마다 새로운 관문을 세웠다. 통행료를 모두 내고 나면 적자라는 말이 파다하게 퍼지며 수로를 이용한 수송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결국, 페레즈 운하에는 각 영지에서 세운 관문과 관문 사이의 짧은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조각배만 남게 되었다. 물자와 사람이 돌지 않는 도시는 빠르게 쇠락했다. 번성했던 흔적만 유적처럼 남긴 채로.

“신시아가 원래 이쪽 출신이라고 했던가?”

아리아드네가 심란한 얼굴로 페레즈 운하를 내려다보는 신시아에게 물었다.

“네. 그래서 한때는 상단의 서부 지부를 맡기도 했었죠.”

보수적인 가문이 싫어 무작정 뛰쳐나와 취직한 곳이 메르디에스 상단이었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한 지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원래라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명망 높은 가문의 귀족들이 그녀를 만나고 싶어 안달했다.

“저도 이렇게 있으려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그땐 열정만 있으면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성공은 그녀에게 뭐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이곳도 달라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녀의 고향은 각오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견고하고 고루한 곳이었다. 변화의 바람은 사그라들었고,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들은 체념하거나 변절하거나 잊혔다.

신시아의 시선이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닿았다. 사는 것이 바빠 잊고 지냈던 어떤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외면했는지도 몰랐다. 거대한 벽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때의 무력함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메르디에스 상단주가 되어 돌아왔으니, 그녀를 핍박하던 이들에게 몇 배로 갚아 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잠깐 기분 좋자고 별 이득도 되지 않을 일에 기력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무모한 열정뿐이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그녀는 가진 게 너무 많았으니까.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순간의 씁쓸함 따윈, 이대로 지나가게 두는 것이 옳았다.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었으니 두 번째는 좀 더 쉬우리라.

그렇게 얼마쯤 운하를 바라보며 있었을까.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아리아드네와 눈이 마주쳤다. 내내 그녀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신시아, 난 아무것도 몰라. 과거의 신시아가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지, 지금 그런 얼굴을 하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신시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지.”

음절 하나하나가 확신에 찬 단호한 목소리였다. 한 번도 길을 잃지 않은 사람처럼.

“역사는 반드시 흔적을 남겨.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그때의 기억이, 경험이, 반드시 싹 틔울 날이 올 거야.”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신시아를 응시했다. 들이마시는 숨이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여름은 이미 지난 지 한참인데도.

“신시아가 하려던 일이 뭔지는 몰라도.”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털어 버린 아리아드네가 언덕 아래 운하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 거대한 운하도 한 자루의 삽으로부터 시작되었을 테니까.”

그때,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잊고 있었다. 바람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언제고 다시 불어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신시아는 비죽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려 입술 끝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투쟁심으로 들끓었다.

“이곳을 떠날 땐 정말 지긋지긋하기만 했는데, 고꾸라진 꼬락서니를 보니 마음이 좋진 않네요. 망할, 망하지나 말 것이지.”

탁탁, 신시아가 빳빳한 치맛단을 세차게 털었다. 전투 의식까지 마치고 났더니 괜스레 마음이 조급했다.

“저는 몇 가지 점검할 것이 있어서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럼 천천히 둘러보고 오세요.”

싱긋 웃으며 몸을 숙인 신시아가 바쁘게 걸어 내려갔다. 손을 흔들어 가볍게 신시아를 배웅한 아리아드네가 눈짓으로 기사들을 물렸다.

아리아드네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면을 벗겨 낸 듯, 아무런 표정도 남지 않은 얼굴이었다.

유진이 뒤에서 아리아드네를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넓은 품이 그녀를 지탱했다.

그의 손가락이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피곤하고, 쓸쓸하고, 또 조금은 외로운 듯한 그 얼굴을.

“무슨 생각해?”

유진의 물음에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궁에 남은 달로아가 이번에는 어떤 욕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

아리아드네의 리카서스행 소식을 들은 달로아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차주에는 저랑 내년 상반기 귀족원 예산 검토하기로 하셨잖아요. 폐하께서 이렇게 홀랑 내빼시면 그건 누가 합니까!

―누가 할지 정말 몰라? 알려 줘?

―아악! 악! 거리에는 폐하의 덕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날마다 높아지는데, 왜, 저는, 저만, 이렇게 괴롭히세요?

―알잖아. 내가 정무 대신을 너무 신임해서 그런 거.

더 말을 섞어 봤자 제 속만 터질 거라는 걸 알았는지 달로아의 포기가 빨라졌다.

―가실 거면 빨리 가세요.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시게.

―우리 재상은 날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단 말이지. 노력은 해 볼게.

―으스 그스르그요.

악다문 잇새로 출발을 종용하는 말이 뭉개졌다.

―그래, 나 없는 동안 궁 잘 지키고 있어.

팔랑팔랑 흔드는 손을 불손하게 꼬나보던 달로아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아, 하고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이전에 카이엔의 기억을 읽었을 때 제가 좀 이상한 걸 봤었는데요.

듣지 않는 게 좋았을까. 아리아드네는 손목에 걸린 벨벳 주머니를 열어 깨진 구슬 조각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 위에 구슬 조각을 쏟아 낸 아리아드네가 물결무늬를 이어 가며 깨진 구슬을 하나하나 맞추었다. 얼추 모양을 잡아 가던 구슬 조각이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알고 있었다. 깨진 구슬을 다시 붙인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걸.

“유진, 어쩌면 말이야. 어쩌면…….”

구슬의 조각난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검푸른 물결을 보면 언제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 몸은 바다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 테티스의 마지막 권속 무렉스이니라.

새끼손톱만 한 해마의 형상을 한 주제에 오만하기 그지없었던 괴상한 여자아이와.

―다른 욕심은 다 버렸는데, 렉사만은 제가 없어도 계속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별처럼 빛나던 눈으로 자신과 꼭 닮은 여자아이를 바라보던 왕자의 얼굴이.

―렉사, 지금처럼 좋은 환경이 아니라도 나와 함께 갈래?

―물어 뭣 하느냐. 계약은 내게도 유효하다. 계약자를 버리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행복할 줄 알았던 둘의 마지막 모습이 망막에 붙은 것처럼 따라다녔다.

서느런 바람이 가슴을 지나다니는 것 같았다. 슬픔에 잣대를 대는 것도 우습지만, 렉사를 향한 그리움이야 그가 저보다 덜하지 않을 텐데.

아리아드네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운이 좋았으면 좋겠어.”

누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도 설명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기적이―”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높고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비명은 언덕 아래 운하 쪽에서 들려왔다.

첨벙, 소리와 함께 운하 중앙의 조각배 근처에서 물보라가 일었다. 아무래도 배에서 사람이 빠진 것 같았다.

유진과 눈이 마주친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리아드네를 안아 들자 뒤로 물러나 있던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사람들 불러와. 먼저 갈 테니까.”

그가 아리아드네를 안은 채 미끄러지듯 아래로 달렸다. 주위 풍경이 삽시간에 휙휙 지나갔다.

비명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며 운하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배 위에서는 공기를 넣은 짐승의 내장 따위를 밧줄에 묶기 시작했다. 선원이 그것을 매듭지어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촤악! 물보라를 일으키며 검은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러곤 깡마른 팔다리가 촤악촤악 거침없이 물살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선착장에 도착한 깡마른 인영이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난간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이곳에선 물에 빠져도 자력 구제가 당연한 걸까? 메르디에스에서 태어난 아리아드네가 굴러다니는 보석을 공깃돌 취급하며 자란 것처럼, 여기는 수영이 걷는 것보다 당연하다거나 뭐…….

그를 재촉해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 구경만 해야 했던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반쯤 얼이 빠진 꼴을 보니 제 생각 같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서, 끌어 올려! 뭐 하는 거야!”

그때, 조각배 위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허겁지겁 난간에 매달린 사람을 끌어 올렸다.

“허억, 헉헉…….”

비명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물에 빠졌던 것은 애처로울 정도로 깡마른 여자였다. 흠뻑 젖은 검푸른 머리카락이 얼굴이며 목에 달라붙은 채로 여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자는 새파랗게 질린 채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딱딱, 이를 부딪치는 소리가 딱할 지경이었다.

여자가 떨어진 조각배도 그새 선착장에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여자와는 불편한 사이인 듯 좀처럼 다가가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였다.

“아니, 그러게 대체 왜, 아니, 참, 어휴…….”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는 듯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 여자를 원망하는 듯한 단어들. 물에 빠졌던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기엔 지나치게 야멸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서 한 남자가 마른 천을 내밀었다.

“그러게 몇 번이나 돌아가시라니까 왜 그렇게 버티셔서는 이런 일을 겪으십니까.”

덜덜 떨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보게 된 여자의 눈동자는 깊은 바다처럼 어두운 남색이었다. 앙상한 얼굴에서 유난히 크고 검은 눈동자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쩔렁쩔렁 쇳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군중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라이덴 백작가의 문장을 단 치안대였다. 치안대의 기사는 여자를 보고는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었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레이디, 신고하시겠습니까?”

어투는 그럭저럭 정중한 척하고 있었지만, 기사라는 것들이 물에 빠진 사람을 두고 최소한의 구호 조치도 하지 않았다. 여자 또한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말없이 젖은 옷과 머리에서 물기를 짜냈다.

“됐어요. 어차피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물에 빠진 것도, 내가 억지를 부리다 그렇, 게 된 거니까…….”

말을 잇기가 힘든 듯 여자는 중간중간 두어 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여자의 복잡한 심경이 내쉬는 숨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수치심, 비참함, 체념, 그런 이름으로 불릴 법한 것들이.

“나중에 딴말하시면 안 됩니다.”

라이덴의 기사는 여자에게서 기어이 신고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 내고는 동료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렇게 치안대는 왔을 때처럼 쩔렁쩔렁 소리를 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하아, 사람들이 한꺼번에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꼼짝없이 치안대에 끌려가는 줄 알고 하얗게 질렸던 몇몇 선원들이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쯧, 여자에게 마른 천을 내밀었던 남자가 바닥에 널브러진 선원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는 좀처럼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여자의 손에 마른 천을 직접 쥐여 주고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찾아오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수적 출신이랑 리카서스 혈족이 손을 잡는다 그러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겁니다. 제발, 이젠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여자는 두 손에 마른 천을 꼭 쥔 채로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흐느적대는 선원들의 엉덩이를 마구 차 일으키고는 그들을 이끌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떠나는 선원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자가 비척비척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음마다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모였던 사람들이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힐끗대며 저희끼리 소리를 낮춰 떠들기 시작했다.

“어휴, 웬 고집이 고래 힘줄보다도 질기니 원…….”

“리카서스가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

여자의 신분은 저 검푸른 머리카락을 보았을 때부터 예상했던 것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여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아무리 이곳이 리카서스와 페레즈 운하를 두고 다투는 라이덴의 영지라지만, 그래도 그 리카서스의 혈족이었다.

“쓸 만한 남자라고는 죄다 죽어 나갔으니 제아무리 리카서스인들 별수 있어?”

“육촌 조카 하나 남았다고 하지 않았어? 왜 해자가 마르고 닳도록 드나들던.”

“어휴, 그쪽 끈 떨어진 게 언젠데. 벌써 배 건너갔대. 콧대가 하늘 끝에 달렸으니 어느 남자가 그 꼴을 봐. 작년 가을에 다른 여자랑 결혼했다지, 아마.”

“다른 여자랑 결혼했어도 뭐, 지금 예주만 죽으면 어차피 작위야 그 조카 차지 아니야?”

“하늘도 무심하시지. 가문도 잇지 못할 딸만 남겨 두시다니.”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아리아드네의 입가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리카서스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치달은 것이 고작 남자가 없어서란 말인가? 이곳 사람들은 예주의 딸이, 육촌 조카보다도 권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리카서스가 디아즈나 라이덴 같은 남서부 귀족들을 견제해 주리란 것은 아리아드네의 오판이었다. 리카서스는 지금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도 버거운 듯했다.

어느새 여자는 점처럼 멀어져 있었다. 마른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져 얼룩진 물 자국만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아, 일이 또 커지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아리아드네가 성큼성큼 걸어 여자에게 다가갔다.

“잠깐.”

가까이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어깨를 짚어 여자를 돌려세웠다.

“이게 뭐―”

“우선 몸부터 좀 닦아. 여기가 리뮈르도 아니고 남쪽에서 얼어 죽으면 무슨 망신이야.”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여자의 몸에 걸쳐 준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숙여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여자의 눈은 얼핏 검은색으로 착각할 만큼 짙은 남색이었다.

경계하듯 주춤 물러선 여자가 아리아드네를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너 이름이 뭐지?”

이름이야 이미 알고 있지만 직접 듣는 건 또 다르니까. 아리아드네가 손을 뻗으며 이름을 물은 그 순간이었다.

탁, 여자가 아리아드네의 손을 쳐 내며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았다. 일렁이는 남색 눈동자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희망이 있었다. 변화는 분노와 저항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 이름을 맞혀 볼래?”

“처음 보는 사람 이름을 무슨 수로…….”

싱글거리며 웃는 아리아드네를 천천히 살피던 여자의 얼굴에서 차츰 표정이 사라졌다. 색이 옅은 금색의 머리카락,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 서늘하리만치 정교한 이목구비.

“설, 마…….”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리는 것처럼 그 이름 말고 다른 것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정답.”

여자의 맞은편에 선 이는 듣지 않고도 안다는 듯이 입술 끝을 당겨 웃음을 지었다. 여자의 귓가에 바짝 붙인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 그게 내 이름이야.”

놀란 여자가 숨이 멎은 듯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올려 보았다.

“어때? 이제 네 이름을 알려 줄 마음이 들어?”

재차 이름을 묻는 얼굴이 더없이 오만했다. 온 세상을 발아래 둔 것처럼.

미소 짓는 얼굴 너머로 여자가 지겹도록 보고 자란 운하의 푸른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제 일상을 태연히 침범하고도 상대는 이곳이 제 영역이라는 듯 자연스러웠다.

“저, 저는…….”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물에서 막 나왔을 때보다도 더.

“리, 에트, 리에트 리카서스입니다, 폐하.”

* * *

“리카서스의 알프레드가 페렌트 단 하나의 기둥, 가장 찬란한 영광, 국왕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영원토록 바래지 않는 영광을 누리소서.”

아리아드네를 맞이한 깡마른 중년 남자가 힘겹게 몸을 숙였다. 현 리카서스 예주인 알프레드였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죽은 칼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내였다.

“일어나라.”

아리아드네의 말에 알프레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 감사합니다, 폐하.”

더듬더듬 감사 인사를 한 알프레드가 리에트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볼품없이 마른 남자는 겁먹은 얼굴로 바짝 마른 입술에 연신 침을 축였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잔을 든 손이 지나치게 떨린다 했더니 기어이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덜그럭거리며 간신히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알프레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유약한 성정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예상한 것보다 훨씬 심약한 사내였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할 리 없었다.

“이런, 후작이 몸도 성치 않은데 기별도 없이 들이닥친 나 때문에 무리했나 봐. 이야기는 리에트와 나눌 테니 후작은 나가서 편히 쉬는 게 어때?”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건넨 제안에 알프레드의 얼굴이 협박이라도 받은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제가 리카서스의…….”

리에트와 대화 좀 나눈다는 게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일인가?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에 아리아드네의 눈초리가 가늘어진 그때였다.

“괜찮아요, 아버지.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리에트가 재빠르게 일어나 제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그래,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내 약속하지.”

아리아드네까지 재차 약속한 끝에야 알프레드를 응접실에서 겨우 내보낼 수 있었다.

달칵, 찻잔을 내려 둔 아리아드네가 응접실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왕궁에 있는 청석궁의 응접실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벽 하나가 통째로 수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찰랑이는 바닷물과 화려한 색깔의 희귀 물고기로 가득했던 청석궁과 달리, 이곳의 수조는 겨우 구색을 맞춘 몇 개의 화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수조를 관리할 인력이 부족한 탓인 듯했다. 리카서스 성 내부를 얼핏 둘러보며 생각한 것이지만 성의 크기에 비해 관리하는 인력이 지나치게 적었다.

예전만은 못해도 영지나 사업체에서 나오는 돈이 있으니, 성을 관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텐데. 뭐, 리카서스 재정이야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고 당장은 이것부터.

“리에트, 네 생각이었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앞뒤 없이 던지는 아리아드네의 질문에 리에트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물거렸다.

“자복을 대가로 생존을 도모한 것 말이야.”

페레즈 운하에서 리에트를 만났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지만, 알프레드를 만나니 확신이 생겼다.

아리아드네의 발치에 넙죽 엎드려 목숨을 구명한 계책은 알프레드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을 생각해 내고 실행한 자는 리에트가 분명했다.

“……그건, 아버지께서 결정하신 일이에요. 전 잘 몰라요.”

예상대로였다. 입술을 질끈 깨문 리에트가 제가 한 일이 아니라며 부정했다.

“네 아버지는 여리고 착한 사람 같더군. 위기의 순간에 어쩔 줄 몰라 허둥댈 사람이지, 악착같이 살아남을 사람은 못 되는 것 같던데. 내 눈이 틀렸어?”

아무리 생각해도 알프레드는 그만한 결단을 내릴 판단력도, 담력도, 독기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네 도박은 성공했어. 리카서스가 스스로 몸을 낮춘 덕분에 살려 둬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거니까.”

리에트의 도박은 실로 절묘한 한 수였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얼굴을 마주한 리에트는 도통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유도했지만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만 할 뿐, 대화 같은 대화는 좀처럼 이어지지 못했다. 이대로는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돌 뿐이었다.

아리아드네가 함께 자리한 신시아에게 슬쩍 눈짓하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아리아드네가 들으라는 듯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살아남았으면 그 몫을 해야 하지 않겠어? 그저 목숨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좀 곤란해. 난 그걸 기대하고 리카서스를 그냥 둔 게 아니거든.”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린 아리아드네가 손가락으로 리에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제야 겨우 눈이 마주쳤다.

“살려 준 값을 해. 난 네게 빚을 받으러 온 거야.”

겁을 먹어도 좋고, 화를 내면 더 좋았다. 뭐든 반응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리, 카서스가 부족하여 심려를 끼쳐 드렸다면―”

“폐하, 그만 괴롭히세요. 영애께서 곤란해하시잖아요.”

리에트가 끝끝내 모르쇠로 일관하는 와중에 신시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두둔했다.

“아, 정말. 내가 졌어. 아무래도 내 속내를 내보이기 전엔 네 이야기를 듣기 어려울 것 같네.”

두 손을 든 아리아드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제야 리에트의 얼굴에서도 긴장한 기색이 좀 가셨다. 아주 까다롭기가 막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 같았다.

“좋아. 내 목적부터 말하지. 난 리카서스가 디아즈를 견제해 주길 바랐어. 아무리 힘을 잃는대도 독수리는 독수리니까. 뭐, 리카서스 쪽에서 내놓은 협상안이 꽤 인상적이기도 했고.”

리에트가 공작 위와 영지를 바치며 납작 엎드렸던 그때, 디아즈 후작가를 이끌던 것은 아리아드네의 외조부인 대런 디아즈였다.

혈연관계이긴 했지만, 디아즈와 메르디에스 사이가 좋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더구나 메르디에스의 압박에 짓눌려 원치 않는 후계를 세워야 했던 뒤로는 앙심이 대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디아즈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던 아리아드네에게 리카서스는 꽤 그럴싸한 패였다. 이만한 판단력을 갖춘 이가 남았으면 알아서 잘 굴러가겠거니 기대했는데.

“그런데 도통 리카서스가 움직일 생각을 안 하잖아. 아프다는 핑계로 대관식조차 불참하질 않나.”

“그, 그땐 정말 제가 도저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아, 아픈 게 후작이 아니라 네 쪽이었어? 그럼 참석 못 할 만했네.”

그 알프레드를 혼자 보낼 순 없었겠지.

“그, 그건, 그러니까…….”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리에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대다 고개를 푹 숙였다.

“리에트, 두려운 마음은 이해해. 쉽사리 날 믿을 수 없는 것도.”

리에트가 좀처럼 경계를 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약자의 선택은 생존과 직결되기 마련이니까.

“날 믿지 않아도 좋아. 신뢰란 시간을 들여 쌓는 거니까. 다만 리카서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 나보다 더 나은 건 없어. 알고 있잖아. 이대로는 더 나빠지기만 할 거란 걸.”

리카서스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해머리 관문은 왕가로 귀속되었고, 페레즈 운하는 갖은 세력들이 이권을 두고 다투느라 정상적인 운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지는 기존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이것조차 각다귀 같은 이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이었다.

“…….”

지금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건 그녀일 터. 리에트의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설마, 이대로 주저앉을 셈이야? 네 몫이어야 마땅한 것들을 다 뺏기고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해?”

직계 혈족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육촌 조카라니. 그쯤 되면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꼴을 보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그게, 그게 뭐 어때서요.”

주먹 쥔 손이 떨리더니 리에트에게서 억눌린 듯한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

“제 목표는 언제나 살아남는 거였어요!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그것 말고 어떻게 다른 것을 바랄 수 있었겠어요!”

고개를 든 남색 눈동자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리에트에게 오늘 하루는 너무 길었다. 선원들과 실랑이하다 운하에 빠지고, 헤엄을 치느라 걸을 힘도 없는 상태에서 치안대를 상대해야 했다.

페렌트의 국왕을 만나 집에 데려오고, 아리아드네를 상대로 내내 익숙지도 않은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줄이 어느 순간 헐거워지더니 뚝 끊겼다.

“우리 가족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왕후와 그 수족들이 밤낮으로 감시하는 이 집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난 벅차서…….”

미치도록 외로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정하지만 조금도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누구도 리에트가 짊어진 짐을 덜어 주지 않았다.

“그 바다 괴물은 왜 내 아버지를 선택해서, 차라리, 차라리…….”

리에트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가족을 위협한 적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왕녀의 부군조차 서슴없이 죽인 사람이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무렉스가 칼을 선택했더라면, 그녀의 가족은 오늘까지 살 수도 없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너무 버거운 날이면 그 선택이 원망스러워지곤 했다.

“차라리 아등바등할 기회조차 없었으면 했어? 원망해? 네 아버지를 선택한 무렉스의 호른을?”

새파란 눈동자가 리에트를 내려다보았다. 저 사람도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았겠지.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고.

“내 아버지를 선택했으면, 그랬으면, 날 선택했어야 해요! 사람 좋은 척, 혼자만 착한 척, 이 진흙탕에서 구르는 날 불쌍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그 고결한 사촌이 아니라, 나를, 날 선택했어야…….”

예주라는 허울만 쓰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불쌍했다. 하지만 리에트는 그 허울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 기회가 절실한 건 나였는데, 내겐 목숨이 달린 일이었는데…….”

루안에게 리카서스의 후계는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자리였다. 어차피 리카서스의 힘이란 힘은 칼이 모두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리에트를 볼 때면 미안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는 그 위선이 너무 싫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면서.

“정말 그렇게 절실했어? 그러면 왜 욕심내지 않아? 리카서스를 속박하던 성물도 사라졌는데.”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리에트는 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작 ‘그거’ 하나 사라졌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무렉스가 소멸했으니 리카서스의 핏줄을 타고 흐르던 저주 또한 사라진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아니요. 리카서스를 속박하던 성물은 사라졌는지 몰라도, 내가 사는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아픈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 평생토록 살아온 집에서 쫓겨나야 하는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저는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살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니까.”

이루지도 못할 꿈을 욕심낼 여유 따윈 없었다. 리에트에겐 내일, 그 내일을 살 수 있는 기반이 필요했다.

“리에트, 그럼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해야 한다면요. 하지만 뭘 할지 결정하는 건 저예요. 그 누구도 저만큼 제 목숨을 생각해 주지 않을 테니까.”

결연한 남색 눈동자는 지쳤을지언정 흔들리지 않았다. 리에트는 오늘 쥘 권력을 위해서라면 내일 따윈 염두에 두지 않았던 칼이나, 다가올 운명을 초연하게 받아들였던 루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잘 생각해.”

아리아드네는 리에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녀에겐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가장 편한 방법은 리카서스 후작이 살아 있을 때 적당한 남자와 결혼하는 거야. 최소한 네게 지참금은 남을 테니까.”

“……그 돈이 제 것으로 남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멈칫 굳었던 리에트가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네 돈을 탐내지 않을 만한 사람이 있어. 아니, 혼적만 빌려주고 네 삶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 널려 있는 곳을 알아. 원한다면 평생 만나지 않아도 될걸?”

“그런 일이…….”

“내가 소르체랑 인연이 좀 있어서.”

소르체가 공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리아드네의 적극적인 지원 덕택이었다. 그 후로도 소르체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 중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평생 혼인도 하지 않을 남자 중에서 신원을 빌려 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

리에트는 어딘가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 싫어할 것 같았어.”

아리아드네도 리에트가 혼인을 선택할 거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딱 봐도 어려운 길만 고르고 골라 고생을 자처할 것 같은 인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리카서스의 주인이 돼, 리에트. 그게 너와 네 가족의 목숨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놀란 듯 눈을 치뜬 리에트가 입만 뻐끔대다 간신히 말을 뱉었다.

“이곳은 메르디에스도, 소르체도 아니에요. 그런 일은―”

“리에트, 리카서스의 작위 계승에 성별을 제한하는 조항이 있어?”

중간에 말을 뚝 자른 아리아드네가 태연히 물었다. 당연히 그런 조항은 없었다. 리카서스의 후계와 관련된 내용은 무렉스의 의지에 따른다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것, 이 가능할 리 없어요. 그건 바다 괴물이 날 지명하는 것보다도 더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이 땅에는 법보다도 더 완고한 관습이 존재했다. 무렉스가 사라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아니, 선례가 있어. 이 땅에서 성별과 무관하게 작위 후계자가 되었던 사람이.”

리에트는 무슨 말인가 하여 멍청히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가 불현듯 떠오른 이름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디, 아즈…….”

전대 디아즈 후작이었던 대런 디아즈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후계 자리를 탐내 메르디에스를 끌어들이고 제 아비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그때 디아즈의 후계가 된 내 어머니가 끌어들인 건 메르디에스 공작이었지. 지금 네 뒷배가 되어 줄 수 있는 건 페렌트의 왕이야. 그래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리에트는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턱 하니 막혔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평생을 자라 온 이 집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곳에서, 계속 살 수 있다.

“……제가, 제가 뭘 해야 하나요?”

리에트는 기껏 잡은 기회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초조해졌다. 바쁘게 쏟아지는 말에 아리아드네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네가 하려던 것.”

아리아드네는 대범하게 영지의 절반을 뚝 떼어 바쳤던 리에트가 꾸미는 일이 만만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수적을 만나 뭘 하려 했지?”

“운송 길드를 설립하려고…….”

리에트는 홀린 듯한 얼굴로 술술 제 계획을 털어놓았다. 운송 길드? 그것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 아리아드네가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옆에서 먼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 그런 방법이!”

신시아였다. 금맥을 발견한 것처럼 상기된 얼굴을 한 신시아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가쁘게 숨을 쉬었다. 설명하라는 말은 굳이 할 것도 없이 신시아가 이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들 페레즈 운하의 운행권에만 신경 쓰고 있지만, 결국 배를 움직이는 건 선원이니까요. 숙련된 선원을 보유하고 있다면 향후 물류 싸움에서 유용한 자원이 되겠죠.”

운하를 두고 지지부진한 이권 다툼이 계속되고 있지만, 언젠가는 정리되기 마련이었다. 운하가 길이라면 배는 이동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배를 움직이는 건 사람이었다.

“어디든 마찬가지이지만 정말 유능한 선원은 그리 흔치 않죠.”

상단을 운영할수록 인력난에 시달리게 된다. 신시아는 이젠 일 좀 하나 싶었던 직원이 쭈뼛대며 ‘저, 드릴 말씀이…….’ 하고 서두를 뗄 때면 소름부터 끼쳤다. 사람을 뽑는 건 어렵고, 가르치는 건 더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지금 서남부엔 품기에는 좀 골치 아프지만 대단히 숙련된 선원들이 무더기로 돌아왔지.”

수적이라 불렸던 이들은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도 리카서스의 정예군을 번번이 물 먹일 정도로 배를 다루는 기술과 수전(水戰)에 능했다.

페렌트 내전이 끝나고 수적으로 내몰렸던 이들은 각자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리카서스를 상대할 때 메르디에스와 협정을 맺은 것도 있고, 리에트가 내놓은 돈도 있어서 초기 정착금은 모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페레즈 운하의 운행이 멈추다시피 하면서 있던 선원도 내보낼 판국이었다. 당연히 새로이 정착한 수적 출신들도 실직자 비슷한 신세가 되어 한량처럼 지내고 있었다. 마침 3년이 지났으니 슬슬 정착금도 떨어질 시기였다.

“돌아온 수적 출신들을 주축으로 길드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만 있다면, 이건 돈이 됩니다.”

유능한 직원들이 따개비처럼 널려 있다니. 줍는 족족 돈이다. 이것이 신시아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돈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신시아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구제 자금을 내놓은 건가?”

리에트는 리카서스의 재산을 내놓으며 수적으로 전락한 양민들을 위한 구제 자금으로 써 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이 그림을 그렸다고?

위기에 몰린 귀족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도움을 줄 가문이 어딘가 하는 것이었다. 보통의 귀족이라도 그런데 리카서스 정도 되는 대귀족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양민을, 그것도 숙적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끌어들일 생각을 하다니.

범상치 않은 발상이었다. 리에트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기득권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사람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열화와 같은 신시아의 반응이 머쓱했는지 리에트가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꼭 수적 출신만 끌어들일 생각은 아니었어요. 어떻게든 길드를 만들고 싶은데, 지금 길드에 합류해 줄 만한 사람은 그들뿐이라고 생각해서…….”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나타났담. 환희에 찬 얼굴을 한 신시아가 리에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당연하죠. 선원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에요. 단체가 생기면 개개인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니까. 노동 환경도 훨씬 좋아질 테고.”

운송 길드가 선원의 권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 그때부턴 길드원을 모집하는 것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다. 운송 길드의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레 영향력도 커질 테고, 어쩌면 운송 길드원이 아니고선 배를 몰 사람이 없어질지도.

“그만큼 돈도 되겠지.”

아리아드네는 바쁘게 계산을 돌리는 신시아를 보며 픽 하니 웃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까진 물밑에서 움직였던 것 같은데, 갑자기 조급해진 이유가 뭐야?”

그동안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리에트가 수적 출신들을 만나고 다닌 것이 알려진 건 최근의 일이었다. 지금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말이겠지.

“디아즈 후작이 바뀐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하긴, 외조부보다야 외숙이 여러모로 만만한 사람이지.”

올봄, 대런 디아즈가 죽고 아들인 크리스가 디아즈 후작 위를 이었다. 크리스는 디아즈 후작가에 남은 유일한 직계였으나 죽은 아버지나 누이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었다. 평탄한 시기에 작위를 계승했다 해도 유지나 하면 다행일 인물이었으니.

“그럼, 서로 이야기도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오늘은 이만할까?”

대략적인 계획은 세워졌으니 자세한 것이야 차차 조율하면 될 일이었다. 종일 고생한 리에트도 이만 쉬어야 할 테고.

“정말,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리에트가 떠나려는 아리아드네를 붙잡고 물었다. 누군가 확신을 주길 바라는 모양이지. 하지만 저조차도 없는 확신을 누구에게 줄 수 있단 말인가.

아리아드네의 시선이 텅 빈 수조에 닿았다. 텅 빈 수조에 물이 차오르고, 물풀이 흔들리고, 희귀한 물고기들이 노니는 광경이 보였다.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제 기억 속의 풍경이라는 것을.

―살고 싶으시잖아요.

―렉사와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전하께 가장 중요한 건 그것 아닌가요?

아리아드네는 아직도 삶을 욕심내라는 제 말이 그들의 끝을 앞당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때, 괜한 참견을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렉사, 지금처럼 좋은 환경이 아니라도 나와 함께 갈래?

―물어 뭣 하느냐. 계약은 내게도 유효하다. 계약자를 버리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며 꼭 닮은 얼굴로 행복하게 웃던 둘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지. 하지만 꿈조차 꾸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꿈을 꾸는 동안만큼은 부디 행복했길.

* * *

푸른 달빛이 창을 넘어 파도처럼 쏟아져 내렸다. 새벽이라고 착각할 만큼 온통 푸른빛으로 물든 실내는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겸 창가에 다가선 아리아드네가 손으로 창을 짚었다. 할 일이 많았다. 리에트를 리카서스의 후계로 앉히는 것부터 서남부에서 리카서스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까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이었는데 의외의 곳에 돌파구가 있었다.

―폐하, 리카서스 영애가 자리를 잡으려면 사교계 여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리에트와 대화를 마치고 응접실을 막 나섰을 때, 뒤따라오던 신시아가 아리아드네를 붙잡더니 그런 말을 꺼냈다.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니 방법이 이미 있는 모양이네.

―오래전에 이곳을 바꿔 보겠다고 설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맺은 인연들이 잘 자랐더라고요. 한 번 좌절했다고 도망친 제가 부끄러울 만큼.

퍽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페레즈 운하가 내려다보이던 언덕 위에서 절망조차 사치라는 듯 씁쓸하게 웃던 것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잘됐네. 오랜만에 돌아온 땅이 황량하지 않아서.

신시아의 시도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지지 않아, 싹을 틔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떠나 있을 땐 그렇게 보기 싫더니 돌아오니 생각만큼 나쁘지 않네요.

발걸음 소리가 멎어 뒤를 돌아보니, 신시아가 저 멀리 성벽을 휘감아 도는 해머리 강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리웠나 봐요.

신시아는 케케묵은 비밀을 실토한 것처럼 어딘가 후련한 얼굴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미래를 기대하며 사는 게 아니라 과거를 추억하며 사는 것 같아요. 시간은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는데, 저만 한 지점에 고여 있는 거죠.

신시아의 시선이 닿은 어디쯤, 작은 조각배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망각의 샘물이라도 마셨는지 증오도, 미움도, 서러움도 모두 잊고 그리움만 남아서, 자꾸 돌아보게 돼요.

고요히 흐르는 강 위로 황혼의 빛이 어스름 비추었다.

―전 평생 앞만 보고 달렸는데, 요 며칠은 뒤로 걷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도 그때로 돌아갈 순 없는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낙조의 붉은빛도, 점점 잦아드는 신시아의 목소리도 어쩐지 서러워 부러 밝게 대꾸했다.

―맞아요, 사는 게 정말 그래요.

신시아가 쾌활히 웃으며 맞장구쳤지만 아교처럼 달라붙은 슬픔을 좀처럼 떨치기 어려웠다.

어둠에 물든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손바닥에 이어 한쪽 뺨을 창에 붙였다. 가을밤, 부쩍 추워진 날씨에 유리창은 얼음처럼 식어 있었다.

“추운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고개를 돌리니 물컵과 물 주전자를 쟁반에 받쳐 든 유진이 문가에 서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빤히 그것을 바라보자 그가 침대 옆 협탁 위에 쟁반을 올려 두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사람이 안 보여서. 안 보이는 사람 굳이 찾아서 기다리는 것도 귀찮고.”

여전히 그는 제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사람을 부리는 걸 더 귀찮아했다. 그가 컵에 1/3쯤 물을 따라 건넸다. 아리아드네가 컵을 받아 물을 마시며 대꾸했다.

“사람이 지나치게 없긴 해. 이유가 있긴 있을 텐데.”

“보물이라도 숨겨 뒀나 보지.”

빈 컵을 받아 정리한 그가 아리아드네를 끌어당겨 침대에 누였다.

“피곤할 텐데 그만 자.”

그의 손길이 아리아드네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종일 우울했던 기분이 그의 손길 몇 번에 느슨하게 풀렸다.

“너무 마음 쓰지 말고.”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마 그도 비슷한 마음일 테니까.

“응.”

아리아드네가 그의 품을 파고들며 응석을 부리듯 말끝을 늘였다. 그가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내일은 강에서 배라도 탈까?”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당황한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배만 타면 죽다 살아나는 사람치곤 더없이 태연한 표정이었다.

“진심이야? 뱃멀미는 어쩌고.”

“그새 괜찮아졌을지도 모르지.”

그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진의 입술이 웃음기가 매달린 그녀의 눈가에, 허물어지듯 벌어진 입가에, 뺨과 턱에 차례로 닿았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자. 내일은 좋은 일만 있을 테니까.”

상냥한 주문처럼, 그가 아리아드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손이 눈을 덮자 아늑한 어둠이 덮쳐 왔다. 그제야 아리아드네는 탁자 위에 올려 둔 렉사의 구슬을 잊을 수 있었다.

쏴아아아, 비가 내리나? 희미한 의식 너머로 어디선가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 잠을 깨웠다.

쏴아아아아, 잠이 들 만하면 다시 물소리가 이어져 결국은 일어나야 했다. 창을 닫아야겠단 생각에 아리아드네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한밤중인지 주위가 어두웠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려 슬리퍼를 신었다. 사락, 천과 살갗이 스치는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적막한 밤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창문을 닫으려다 문득 이상한 점을 느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을 깨우던 물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어 있었다.

‘비가 오는 게 아니었나?’

창문 가까이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지만 마른 창에는 비가 내린 흔적조차 없었다.

‘그럼 그 물소린 뭐였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침대로 돌아가려다 테이블에 무릎을 부딪치고 말았다. 달그락,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위에 놓아둔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날이 밝으면 누가 치워도 치우겠지.’

아리아드네는 낮게 탄식하며 바닥에 널린 물건을 피해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살금살금 걸어 침대까지 딱 세 걸음 남았을 때였다.

악, 아리아드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침대까지 굴러온 물건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체중을 실어 제대로 밟은 탓이었다.

바닥을 더듬어 물건을 집어 들었다. 벨벳 감촉의 작은 주머니가 손끝에 걸렸다. 주머니의 입구를 열자 조각조각 깨진 렉사의 구슬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 너였구나.’

이곳이 고향인 건 신시아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렉사에게도 이곳은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 반가웠던 거니?’

아리아드네는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주머니를 여며 손목에 걸었다. 숄을 챙겨 대강 옷 위에 두르고 혹여 유진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아리아드네는 묵고 있던 건물 뒤쪽 후원을 돌아 나왔다. 리카서스의 본성에서는 어디를 가나 못과 작은 개울 따위를 볼 수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에 젖은 옷이 살갗에 질척하게 들러붙었다.

쏴아아아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것도 같고, 물이 휘감아 도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아리아드네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날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의 푸르름이 어둠을 차츰차츰 몰아내고 제 영토를 시시각각 넓히고 있었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물안개 사이로 다시금 쏴아아아아, 익숙한 물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자욱한 물안개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물기 가득한 풍경은 마치 번진 수채화 같았다.

수채화 속 풍경으로 발을 내디딘 그 순간, 아리아드네는 마침내 끈질기게 그녀를 잡아끈 소리의 정체와 마주했다.

쏴아아아아, 소리의 정체는 폭포였다. 그것도 거꾸로 흐르는.

연못의 물이 하늘로 솟구쳤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푸른 물줄기는 거꾸로 흐르는 것도 모자라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휘휘 소용돌이 모양으로 휘감겼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가운데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한밤과 새벽 경계의 하늘처럼, 심해와 천해가 뒤섞인 것처럼, 오묘한 검푸른 빛깔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어찌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거친 물살에 휩쓸린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이전에 카이엔의 기억을 읽었을 때 제가 좀 이상한 걸 봤었는데요. 2왕자 루안과 함께 있었던 여자아이가 물거품처럼 흩어지고 그 자리에 검푸른 결정체 같은 것만 남았는데, 그게 2왕자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갔어요.

왕궁을 떠나는 아리아드네에게 달로아가 지나가듯 그날의 광경을 알려 주었다.

―인간의 영혼이 소멸을 감수하고 상대를 받아들이면 불멸의 영혼을 나눌 수 있어.

어쩌면 하는 기대를 품었다. 루안이라면 틀림없이 렉사의 영혼을 받아들였을 테니까. 하지만 과욕이 화근을 부를까 두려워 마음껏 욕심내지도 못했다.

“렉, 사…….”

아리아드네의 입술 사이로 오래도록 품어 온 이름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거꾸로 흐르던 물이 일시에 힘을 잃고 연못으로 곤두박질쳤다.

투웅, 마지막 물줄기가 연못으로 떨어지고 주위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아이가 아리아드네를 응시했다. 가장 깊은 바다의 물을 담아낸 것 같은 눈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몸을 숙여 무언가를 주웠다. 아이의 손에 들린 것은 느슨해진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렉사의 구슬이었다.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듯 깨진 구슬 조각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아이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네 것이냐? 제법 괜찮은 물건이구나.”

아이는 끽해야 서너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린 외모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괴이한 말투였지만 눈물이 날 만큼 익숙한 말투이기도 했다.

“고마워. 이거 내겐 아주 소중한 물건이거든.”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아리아드네가 구슬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보답을 하고 싶은―”

아리아드네가 제대로 된 문장조차 채 끝맺지 못했을 때였다.

“아가, 아가!”

아이를 찾는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이른 새벽의 공기를 찢어 놓았다.

“여기, 나 여기 있다!”

“손님들이 가실 때까진 꼭꼭 숨어 있어야 한대도.”

천진난만한 대꾸에 아이를 발견한 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그런데 이 사람도 손님이냐?”

그제야 아리아드네를 발견한 리에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

리에트의 입술에서는 말이 되지 못한 소리만 흘러나왔다.

이제야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귀가 맞았다. 3년 전 리에트가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도, 숨겨야 할 비밀이 있는 것처럼 사용인이 지나치게 적었던 것도 모두.

“리에트 아이였어?”

제 말을 하는 것을 알았는지 리에트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눈매와 입매가 리에트 판박이였다.

“아니, 아닙니다. 이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라…….”

허겁지겁 아이를 제 뒤로 숨긴 리에트가 아무도 믿지 않을 변명을 쏟아 냈다. 하지만 언제나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어미야, 너 지금 나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냐?”

고개를 치켜든 아이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잔뜩 내밀고는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하얗게 질렸던 리에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변했다.

하지만 리에트도 만만치 않았다.

“이, 이거 보십시오. 원래 이 아이가 엉뚱해서 아무 말이나…….”

끝까지 잡아떼기로 작정했는지 리에트가 아이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는 발뺌을 이어 갔다.

“이 아이가 내게 아주 소중한 걸 찾아 줬어. 그래서 내가 보답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아리아드네가 손에 들고 있던 구슬을 리에트에게 보이며 싱긋 웃었다. 이 구슬로 유진의 목숨을 구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지 않은가.

“리에트, 이 아이를 내 대녀로 삼겠다.”

왕의 대녀, 대자라 하면 귀족 자제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명예 중 하나였다.

“폐하…….”

리에트의 눈이 일순 크게 벌어졌다가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껏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 버티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 더는 숨길 필요 없어. 네 아이는 누구에게도 핍박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모두 누리며 살게 될 테니까.”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리에트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아이를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혼한 적이 없었으니까.

“적당한 혼적도 필요하겠군. 평생 너희 모녀 앞에 얼씬도 하지 않을 이름뿐인 남자를 구해 주지.”

리에트는 제 아이가 세 살이 다 되도록 이름 뒤에 성조차 붙여 줄 수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가능해졌다. 불과 하룻밤 새에.

아이의 입을 틀어막은 리에트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비집고 리에트의 손을 떼어 낸 아이가 푸하, 요란스레 숨을 내쉬었다.

“이것 좀 놔 보거라. 내 숨이 막혀 하늘나라 구경을 할 뻔하였느니.”

답답하다는 듯 바둥거리던 아이는 리에트의 젖은 얼굴을 보고는 당황하여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어미야, 왜 우느냐? 울지 마라. 내가 또 몰래 방을 빠져나와 그런 게지. 잘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러마.”

“너,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엄마가 몇 번이나…….”

리에트가 제 눈물을 닦아 주는 아이에게 평소처럼 잔소리하다 꽉 끌어안고는 그대로 흐느꼈다.

“잘, 잘못했다. 아니, 잘못했어, ……요, 엄마.”

마지막 엄마 소리에 리에트는 아이를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이는 조막만 한 손으로 우는 엄마의 등을 어색하게 도닥였다. 아마도 아이가 울 때면 리에트가 저렇게 달래 주었겠지.

아아, 사랑받고 있구나. 포근하고 따스한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 아리아드네는 안도하면서도 가슴 한쪽이 시려 왔다.

“폐하, 정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겨우 눈물을 그친 리에트가 젖은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 대녀와 인사를 나누고 싶은데.”

아리아드네의 요구에 리에트가 아이를 제 앞에 세우고는 슬쩍 물러났다. 다시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아리아드네가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뚱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멀거니 바라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넌 이전부터 날 알았느냐?”

허억, 딸아이의 당돌한 말투에 놀란 리에트가 기괴한 소리를 내다 숨이 막혔는지 가슴을 두드렸다. 아리아드네가 괜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글쎄…….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고.”

아리아드네는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모녀의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이 아이와 렉사는 별개의 존재라는 걸. 설사 이 아이가 렉사의 영혼을 가진 존재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 몸은 바다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 테티스의 마지막 권속 무렉스이니라.

테티스의 권속임을 자랑스러워하던.

-루안, 넌 내게 하나뿐인 계약자다.

어린 계약자를 싸고돌던, 렉사는 이젠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아이를 보고 치미는 그리움과 애정은 전부 거짓인 걸까. 이 모든 것이 버리지 못하는 집착과 미련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면 넌 아느냐? 내가 기다려야 하는 이가 누군지.”

아이의 질문에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아리아드네는 무언가의 흔적을 찾으려는 것처럼 초조하게 아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얼뜨기 같은 게 내 주위를 맴돌아야 할 것 같은데…….”

아이는 답답하다는 듯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고개를 들어 리에트에게 칭얼거렸다.

“어미야, 난 정말 동생이 없느냐? 작고 꼬물거리면서도 귀엽지만 좀 바보 같은 그런 거 말이다.”

리에트는 이런 실랑이가 익숙한 듯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딸을 기이한 요구를 외면했다. 모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리아드네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 아이는 렉사가 아니었다. 아리아드네가 알던 렉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이에게서 남은 렉사의 흔적에서 잠시나마 그리움을 잊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의 흔적을 더듬는 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부지런히 노를 저으면서도 지나온 풍경을 잊지 못해 뒤돌아보던 어느 뱃사공처럼.

그때였다.

“너 어디가 안 좋으냐?”

밤톨만 한 손이 불쑥 들어와 아리아드네의 이마를 짚었다. 체온이 높은 어린아이의 손은 유달리 따뜻했다.

“아니, 좋아.”

그럼에도, 삶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맞닥뜨리는 보석 같은 순간들이 존재함을 알기에.

“네 이름은 뭐야?”

“무례하구나. 이름을 물을 요량이라면 네 이름부터 밝혀야지.”

“내 이름은 아리아드네, 아리아드네라고 해.”

“아리아드네? 흥, 쓸데없이 길기만 길고 번잡스러운 이름이구나.”

우리의 새로운 인연 또한 삶의 고단함을 위로해 줄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기를.

“난 르네라고 한다. 더없이 명료하고 효율적인 이름이지.”

길고 긴 시간을 건너 다시 만나게 된 너에게.

“우리 다시 인사할까?”

길고 긴 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떠나보내는 너에게.

“안녕, 르네.”

안녕, 그리고 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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