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화 (144/148)
  • 외전 3. 생의 무게

    리뮈르에 가까워질수록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 계절은 금세 겨울이 되었다. 왕도에는 벌써 봄꽃이 피었을 텐데, 이곳은 아직도 눈꽃이 가지 위를 무겁게 장식하고 있었다.

    “각오했던 것보다…….”

    시안은 말을 하다 말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내장이 꽁꽁 어는 기분이었다. 덥고 건조한 소르체에서 자란 시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추위였다.

    “추우시죠?”

    시안에게 가까이 말을 붙여 온 달미에르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네. 이런 건―”

    “학, 하악, 학학…….”

    “……처음입니다.”

    시안은 배경으로 깔리는 불쾌한 숨소리를 무시하며 말을 마쳤다.

    “나, 나 죽는, 하악, 다…….”

    달미에르 또한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외면한 채로 말을 이었다.

    “소르체도 꽤 더운 곳…….”

    “학, 추워, 하악, 죽을 것―”

    그때, 불쾌한 신음의 발원지에서 뻗어 나온 손이 달미에르의 어깨를 절박하게 감싸 쥐었다.

    “정말 이렇게 한결같기도 힘들 텐데…….”

    달미에르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에게 매달린 리카르도의 손을 매정하게 떨쳐 냈다.

    “죽, 엣취, 죽, 기 전엔, 으헷취, 못, 못 놓습니다.”

    그는 달미에르의 어깨가 무슨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붙들었다.

    “그런데 살리바도 추운 지역이지 않습니까? 리뮈르만은 못하겠지만.”

    시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성도 살리바는 페렌트의 왕도보다도 훨씬 북쪽에 치우친 지역이었다. 살리바에서 생활했을 리카르도가 이렇게까지 추위에 약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한심하다는 눈으로 리카르도를 돌아본 달미에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을 몰았다.

    “리카르도 경은 추위도, 더위도 참 많이 타시더라고요.”

    리카르도는 추위에만 약한 게 아니었다. 소르체를 방문했을 땐 덥다고 리뮈르 남매보다도 더 야단이었다.

    그냥 인내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 저런 인간이 어떻게 성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죽, 제가, 죽거든…….”

    유언 비슷한 것을 내뱉는 리카르도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발음은 엉망이었지만 눈빛만은 더없이 비장했다.

    “엄살 그만 부리십시오.”

    “엄, 살이라니요!”

    픽 하니 비웃는 듯한 달미에르의 태도에 발끈한 리카르도가 버럭 소리를 내지른 그 순간이었다.

    “다 왔으니 길 위에서 송장 치울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설원 위에 노란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저기가 바로 페렌트의 방벽 리뮈르입니다.”

    노란 불빛은 마치 띠처럼 디움 산맥을 등지고 있었다.

    “가실까요?”

    세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따스한 불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세 사람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리뮈르의 대주 달헤임이 공저의 입구에 나와 있었다. 보통 사람 키만 한 대검을 허리에 차고 디움 산맥을 등지고 선 달헤임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말에서 내린 시안이 마중을 나온 달헤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디움으로부터 페렌트를 지키는 리뮈르 대주님께 소르체의 기사 시안이 인사 올립니다.”

    시안의 진짜 신분은 소르체의 안위와 직결된 사항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을 소르체의 기사로만 소개했다.

    “편히 쉬다 가시게.”

    시안이 여느 기사들처럼 리뮈르 기사단을 동경하여 이곳을 방문한 것이라고만 여긴 달헤임이 웃으며 답했다.

    “대, 대주님.”

    구르듯이 말에서 내린 리카르도가 얼어붙은 입술을 간신히 달싹여 달헤임을 불렀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달헤임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아니, 자네는 꼴이 그게 무언가.”

    머리칼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이며 온 얼굴에 내린 서리까지. 디움 경계소에서 겨울을 보낸 기사들도 저런 꼴은 아니었다.

    “제 꼴이 어디가 어때서…….”

    존경해 마지않는 우상에게서 행색을 지적당한 리카르도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아버지, 거지꼴인 사람에게 꼴이 그게 무어냐고 하시면 어쩝니까.”

    도움인지 공격인지 애매한 달미에르의 첨언에 달헤임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 그때였다.

    “경, 리카르도 경!”

    “왜 이제야 오셨어요!”

    리뮈르 공저 뒤편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리카르도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아, 너희들…….”

    주렁주렁 매달린 아이들의 무게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가 아그네스를 저버린 일은 스스로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었다. 아그네스는 단순히 그가 몸담은 기사단의 주인이 아니었다. 고아였던 그에게 있을 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그네스를 배신한 일은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줄을 스스로 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고아가 되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있을 자리는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달미에르가 웬 서신 한 통을 건넸다. 삐뚤빼뚤 엉망인 글씨로 쓴 그 편지는 리뮈르에서 잠시 인연을 맺은 아이들이 그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그제야 자신을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페렌트 왕궁에 남으라는 아리아드네의 제안이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싶었다.

    “경, 저 횡 베기 하루도 안 빼먹고 매일 했어요!”

    “매일 하긴 했지. 어제는 백 번도 못 채워서 그렇지.”

    톰이 자랑하듯 가슴을 내밀자, 캐시가 기다렸다는 듯이 빈정거리며 톰을 놀려 댔다.

    “캐시, 너!”

    목이 벌겋게 달아오른 톰이 당황한 듯 발을 굴리더니 리카르도의 다리를 붙들고 있던 손을 풀어 냈다.

    “어제는, 경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래서…….”

    톰은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물어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리카르도가 도토리 같은 폴의 동그란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었다.

    “쉬는 것도 연습의 일부이니 기죽을 것 없어.”

    그의 위로에 거짓말처럼 기가 살아난 톰이 실실 웃음을 흘리자, 옆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쳇, 이번에도 울릴 수 있었는데…….”

    “캐시, 잘 지냈니?”

    아쉽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캐시가 리카르도의 물음에 고양이처럼 새초롬한 눈을 빛냈다.

    “당연하죠. 여기는 리뮈르인걸요.”

    리뮈르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묻어나는 말이었다. 리카르도는 캐시 또한 리뮈르의 이름을 드높일 훌륭한 기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경, 이젠 안 떠나실 거죠? 계속, 계속 저랑 같이 있는 거죠?”

    “그럼.”

    “내일 일어나도 어디 안 가시는 거죠?”

    “당연하지.”

    “모레도, 그다음 날도요!”

    “응.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여기 쭉 있을 거야.”

    리카르도는 쉼 없이 재잘거리며 엉겨드는 톰에게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매번 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끄응차, 부러 소리를 내며 팔 하나에 아이를 한 명씩 안아 든 그가 달헤임을 돌아보았다.

    “대주님, 제대로 된 인사는 나중에 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네를 애타게 기다린 이들이 이리도 많은데 내 어찌 자네를 독점하겠나. 마음껏 회포를 풀게.”

    “감사합니다.”

    리카르도가 감사를 표하자 아이들이 보여 줄 것이 있다며 그를 잡아당겼다. 아이들에게 반쯤 끌려가던 그가 안아 든 아이들을 내려놓고는 갑자기 되돌아왔다.

    “……이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말할 때마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마치 얼음을 잘게 쪼갠 것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아이들을 안았던 그의 팔에는 아직도 뜨끈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모조리 눈에 덮인 새하얀 세상, 그가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곳이었다. 아직은 낯설지만 틀림없이 사랑하게 될.

    “노력도 하지 않고 공으로 좋은 기사를 얻었으니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일세.”

    달헤임은 웃는 낯으로 리카르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여 다시 인사하고는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달헤임은 멀어지는 리카르도를 잠시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추울 테니 이만 들어감세.”

    그 말에 가장 기뻐한 건 당연히 시안이었다. 달헤임은 어린 기사의 얼굴에 떠오른 반가움을 눈치채고는 가볍게 웃으며 앞서 걸었다.

    실내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따뜻해졌다.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벽을 이중으로 세우는 리뮈르의 건축 양식 덕분이었다.

    “그래, 소르체의 기사라고? 니케가 좋아하겠군.”

    리뮈르 공비 달리케는 병석에 누운 뒤로도 새로운 검술이나 뛰어난 기사를 보면 눈을 빛내곤 했다.

    소르체의 폐쇄성은 리뮈르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그런 소르체의 기사라니, 달리케가 기뻐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공비 저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내 신경 쓰고 있던 달리케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자, 시안은 순간 그것에 정신이 팔려 눈앞의 인기척을 놓치고 말았다.

    “앗, 아야…….”

    손에 든 짐을 신경 쓰느라 앞을 살피지 못한 하녀 한 명이 시안과 부딪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하녀는 대주가 직접 맞이하는 중요한 손님께 폐를 끼쳤단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으십니까?”

    평소라면 부딪히는 일도 없었을 텐데 다른 것에 신경이 쏠린 탓이라 생각한 시안이 고개를 저으며 하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네, 네, 저는 괜찮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녀가 다급히 떨어진 짐을 주우며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시안은 묵묵히 흩어진 짐을 모아 하녀의 손에 들려 주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시종일관 정중한 시안의 태도에 하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뮈르 공작가 사람들은 사소한 실수에 관대한 편이었다. 부딪힌 기사님만 괜찮다면 이번 일로 크게 혼날 것 같진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녀가 다시 한번 꾸벅 인사를 하고는 시안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서둘러 멀어졌다.

    “벨라, 본채에 들 때는 조심하라고 누누이 이르지 않았니?”

    다른 하녀 한 명이 더 있었는지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작게 이어졌다.

    “죄송해요, 엘가.”

    일주일 새 두 번이나 같은 지적을 받은 벨라가 풀 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조심하렴. 실수는 반복될수록 비싸지니까.”

    특별할 것 없는 충고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말을 한 여자를 찾았다.

    엘가라고 불린 여자는 색이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고동색 눈을 지니고 있었다. 시안과 눈이 마주친 여자가 표정 없는 얼굴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넘어졌던 하녀와 함께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조금 전 저분들은…….”

    시안은 무엇이라 물어야 할지 몰라 뒷말을 망설였다. 달미에르의 예민한 감각은 곧장 시안의 망설임과 혼란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조금 전 하녀들의 몸에서 나던 약초 냄새를 떠올리며 그녀의 질문에 순순히 답했다.

    “의약원 사람일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아는 분을 만난 것 같아서요.”

    “여기서 말씀입니까?”

    평생을 소르체 영지에서만 지낸 시안이 리뮈르에서 아는 사람은 만났다니,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잠시 말이 없던 시안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대주님, 잠깐 인사를 드리고 와도 될까요?”

    “……그렇게 하게.”

    달헤임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녀들 뒤를 쫓아 사라졌다. 손님들이 홀랑 내뺀 자리에는 오랜만에 만난 부자만이 남았다.

    “아무래도 저녁은 둘이서 먹어야겠구나.”

    “제가 지나치게 바쁜 손님들을 데려왔군요.”

    달미에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달헤임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부자가 나란히 복도를 걸어 오랜만의 상봉을 만끽하고 있던 그 순간, 시안은 반대쪽 복도를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조심하렴. 실수는 반복될수록 비싸지니까.

    실수는 반복될수록 비싸진다. 그 말은 소르체에서 상대의 실수를 지적할 때 흔히 사용하는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다. 고향을 떠나온 지가 오래되어 그리움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 말을 한 여자를 찾았다.

    모퉁이를 돈 순간, 고개를 숙인 여자의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마치 시안이 쫓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홀로 서 있던 여자가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마주한 여자의 서늘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알았다. 그녀가 그 말을 한 이유를.

    “날 찾았니?”

    시간에 깎이고 깎여 요철이 모두 마모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수분이랄 것은 모두 날아간 바짝 마른 목소리.

    “삶과 죽음의 조율사, 소르체의 진정한 주인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지?”

    엘가는 심드렁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말린 약초를 질겅질겅 씹었다. 약초에서는 낙엽을 태운 것 같은 냄새가 났다. 냄새로 그 약초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시안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불쾌한 냄새에 두어 걸음 물러선 채로 물었다.

    “그러는 대모님께서는 왜 여기에 계십니까?”

    시안의 불쾌함을 알아차린 여자가 픽 하니 웃으며 씹던 약초를 아무렇게나 뱉어 버렸다.

    “아무래도 너와 같은 이유는 아닌 것 같구나.”

    엘가는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약초를 발끝으로 툭툭 차며 빙긋이 웃었다. 그 약초는 현재까지 발견된 식물 중 가장 강력한 진통제라 불리는 마약성 독초 헤르바였다. 그리고 소르체의 치료사들만이 헤르바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았다.

    엘가는 어떤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마약성 독초를 태연하게 씹었다. 하지만 그녀도, 시안도 알고 있었다. 엘가가 헤르바 따위에 중독될 일은 없다는 것을.

    “조율사니, 수호자니 그렇게 불러 주니까 네가 정말 뭐라도 된 것 같으냐? 타인의 생을 대신 짊어질 각오도 없으면서 네 피를 뿌리고 다니는 짓 따윈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시안의 리뮈르 방문을 치기 어린 행동쯤으로 치부한 엘가가 풍화된 모래처럼 버석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그건, 대모님의 경험입니까?”

    삼백 년 전, 혹은 사백 년 전 소르체를 떠났다던 또 다른 검은 피의 소유자가 이곳 리뮈르에 있었다.

    * * *

    채앵! 날카로운 검 끝이 맞부딪치며 내는 예리한 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찢었다.

    ‘제대로 검을 들지 못한 시간이 짧지 않았을 텐데…….’

    시안은 달리케가 휘두르는 예리한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감탄했다. 리뮈르 최고의 검사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은 실력이었다.

    힘이나 체력이 전성기 같을 수 없으니 제대로 된 대련은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달리케는 부족한 힘을 변칙적인 기술로 보완했다.

    그녀의 검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휘어졌다. 겨우 뿌리쳤다 싶으면 착 달라붙은 것처럼 칼날을 타고 넘어와 시안의 손목이며 팔꿈치 따위를 노렸다.

    눈물이 날 정도로 대단한 재능이었다. 달리케의 몸놀림은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타악, 빈틈을 노려 날린 시안의 발차기를 달리케는 가볍게 흘려 막았다. 달리케는 시안의 공격을 절대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힘이 부족한 것도 그렇거니와 그녀로선 체력 안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이쯤 되면 상대는 팔 하나를 묶고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번번이 궁지에 몰리는 것은 시안이었다. 하지만 시안 또한 같은 나이대에서는 겨룰 상대를 찾기 어려운 천재였다.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달리케의 검 끝이 시안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는, 예리하고 깔끔한 검로였다. 수천 번, 어쩌면 수만 번 휘두른 끝에 겨우 완성되었을 검술이 달리케의 손끝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시안은 상체를 뒤로 젖혀 달리케의 공격을 피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칼날에 스쳐 후두둑 잘려 나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검 끝이 시안의 허리를 노렸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어.’

    승부는 언제나 종이 한 장 차이로 결정된다.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가 예상한 것보다 빨리 움직여야 하고, 상대가 막을 수 없는 힘으로 내리쳐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예상한 간격보다 딱 반걸음만 더 들어갈 수 있다면……. 허리를 비틀어 검을 피한 시안은 달리케의 검이 움직이는 궤적 안으로 뛰어들었다.

    검의 길이는 곧 상대와의 간격이다. 검을 피하려고만 하면 상대의 간격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조금 다치는 것은 상관없었다. 시안은 달리케의 실력을 믿었다. 공비의 실력이라면 서둘러 검을 회수해 끽해야 얕게 베이는 정도에서 끝날 테니까.

    마침내 달리케의 간격 안으로 들어선 시안이 칼을 휘두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뻐억! 생각지도 못한 타격음과 함께 옆구리에서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시안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다 이대로는 주저앉을 것 같아 검을 바닥에 꽂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생각보다 깊게 베인 것이라면 차라리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각오하고 있던 고통이니까. 하지만 검면으로 후려 맞다니.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한 고통에 숨이 턱 막혔다. 이 정도 힘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시종 힘으로는 부딪히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제 실수였다.

    검 하나에 지탱한 몸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고통을 참느라 턱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제가, 졌, 습니다.”

    시안이 패배를 시인하자 달리케가 싱긋 웃으며 검을 툭 떨어트렸다.

    “손목 나가는 줄 알았네.”

    검을 들었던 손목이 경련하듯 잘게 떨렸다. 반대쪽 손으로 손목을 감싸 쥔 달리케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갈비뼈를 부순 것도 아닌데 겨우 이 정도 타격도 견디지 못하다니.

    “그래서 대련을 해 주는 대가로 내게 선물하고 싶다는 게 뭐지?”

    시안은 오만하게 웃는 리뮈르 공비에게 검을 쥘 체력조차 남지 않았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시안은 달리케의 기지나 노련함에 진 것이 아니었다. 판단력, 배포, 심지어 이기겠단 의지까지도, 모든 점에서 시안의 패배였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조율사니, 수호자니 그렇게 불러 주니까 네가 정말 뭐라도 된 것 같으냐?

    자신은 정말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전능감에 취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려는 걸까.

    ―타인의 생을 대신 짊어질 각오도 없으면서 네 피를 뿌리고 다니는 짓 따윈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아직 자신은 타인의 생을 대신 짊어진다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공비 저하를…….”

    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을 살리고 싶었다. 이토록 빛나는 재능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도 이 사람과 검을 나누고 싶었다.

    “살리고 싶습니다.”

    닥치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을 우려하기엔 시안은 펄펄 끓는 열정을 식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제가, 달리케 님을 살릴 수 있습니다.”

    * * *

    “들지.”

    달리케가 시안 앞으로 찻잔을 밀어 주며 말했다. 눈처럼 티 하나 없이 하얀 도기 잔에는 찻물을 머금은 동백꽃이 송이째 떨어져 있었다. 송이째 져 버린 동백꽃은 달리케의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붉디붉은 빛깔이었다.

    시안은 말없이 찻물을 삼켰다. 밖은 아직도 겨울인데 공비의 응접실에만 봄이 한창이었다. 겨울이 전부인 땅에서 봄을 선물한 마음은 어떠했을지.

    시안은 먹먹한 기분으로 남은 찻물을 비웠다. 빈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시안이 입을 열었다.

    “먼저 약속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비밀로 해 주시겠다고.”

    달리케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는 소르체의 백자(白者)입니다.”

    달리케의 눈썹이 작게 휘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놀라울 건 없었다. 살릴 수 있다, 비밀이다 운운하길래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다만 이제까지야 어린 기사라 생각해 편하게 말을 했던 거지만, 스스로 소르체의 백자임을 밝힌 지금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 했다.

    “……그렇군요.”

    “제 피로 달리케 님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어린 기사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는 달리케의 얼굴은 여상하기 짝이 없었다.

    “전설의 하얀 피……. 뭐, 그런 건가요?”

    “네, 비슷합니다.”

    “비슷하다라…….”

    말끝을 늘어뜨린 달리케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말을 멈춘 달리케의 손끝에서 말린 꽃송이가 툭 떨어졌다. 남은 물이 부족해 동백은 반쯤 피다 만 상태로 잔 속에 갇혀 있었다.

    달리케는 잠자코 물을 부었다. 붉은 꽃송이는 오래전에 져 버린 주제에 지치지도 않고 아름답게 피어났다.

    “시안, 내 남편은 내가 병상에 누운 지난 15년간 나를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들였어요. 아직, 내가 살아 있는 것도 그 덕이겠죠.”

    물처럼 잔잔한 달리케의 목소리가 응접실에 파동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의원을 만났어요. 물론 내가 만난 건 내 남편이 만난 것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겠지만. 일확천금을 얻겠다는 단꿈에 빠진 머저리들이 내 병을 고칠 약이라며 무엇을 내밀었는지 아나요?”

    달리케는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페렌트 최전선을 지켰던 전사입니다. 내 상대는 디움의 마물이었고, 그들은 인간을 죽일 때 무기를 쓰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마물들의 이빨과 손톱에 그녀의 전우들이 생명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을 물어뜯었던 괴물의 아가리에 달린 이빨이 몇 개였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웬만큼 잔인한 것이라면 눈 하나 깜짝 않을 자신 있는 나조차도 역겨운 것들을 약이랍시고 내밀었죠. 온갖 불법적인 경로로 얻어 낸 것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나는 것을 약이라며 들이미는 자들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그들은 불법을 저지르고도 거리끼는 기색 하나 없었다. 달리케가 그것들을 진실로 기꺼워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게 그런 것을 가져온 자들을 모조리 죽였어요.”

    처음 달리케가 죽인 상인은 생후 백일이 된 고아를 그녀 앞에 바쳤다.

    달리케는 그 꼴을 보고 생각했다. 제 병에 흔들리지 말자고. 송이째 지고 마는 동백처럼 고매한 끝을 맺자고. 비에 젖은 낱장의 꽃잎처럼 추저분해지지 말자고.

    “시안, 리뮈르에서는 산 사람에게서 약을 목적으로 체액을 포함한 신체 일부를 취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고 있어요. 산 사람의 타액, 혈액, 장기, 그 어떤 것도 매매 혹은 증여의 대상이 될 수 없죠. 그리고 그것을 명한 이는 바로 나예요.”

    달리케는 공비라는 제 지위를 경계했다. 가족들 중 누군가가 타인의 생명을 수탈해서라도 그녀의 생명을 연장하겠다는 광기에 사로잡히면 달헤임이 그것을 말릴 수 있을까?

    달리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달헤임은 구부러지느니 부러지고 말 곧은 사람이지만 평생의 동반자를 포기할 사람도 되지 못했다.

    시안과 대면한 것이 자신이라 다행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풍랑을 일으키지 않고.

    “그러니 나는 그것을 받지 않겠습니다.”

    제 선에서 아무도 모르게 정리할 수 있어서.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달리케를 살리지 못하게 된 것이 분한 듯 시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젖은 손끝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시안, 울지 말 거라. 나는 살 만큼 살았다.

    ―스승님, 제가, 제가 스승님을 살릴…….

    ―아니, 그건 안 될 말이다. 내가 네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건 네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사람이라 그랬다.

    그런 일은 그때가 마지막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은 어째서 죽음 앞에서 이토록 초연할 걸까. 자신만이 떼쟁이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죽어 가는 스승님을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던 아홉 살짜리 어린애.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토록 빛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또다시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하다니.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리던 손은 이젠 해소할 길 없는 감정들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린 기사가 안쓰러웠던 걸까. 달리케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왜 살고 싶지 않겠어요. 내가 삶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나요?”

    석양에 물들어 가는 공비의 붉은 머리카락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스러져 가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내 목숨을 하루라도 더 연장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하루라도 더 볼 수 있다면, 나는 내가 가진 것의 무엇이라도 지불할 의사가 있어요. 그것이 누군가의 피와 살만 아니라면요.”

    시안은 자신이 달리케의 결심을 돌릴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검을 부딪치다 보면 피를 흘리는 것은 예사로운 일입니다. 날붙이에 손을 베는 것, 딱 그 정도입니다. 누군가 피해를 보는 일도, 이것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거절하실 겁니까?”

    시안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부탁해야 하는 사람이 뒤바뀐 꼴이었다.

    “물론이죠. 그것이 나를 이제껏 지탱해 온 신념이니까요.”

    때때로 흔들릴 때면 달리케는 생각했다. 처음 자신을 찾아온 상인이 그따위라 다행이었다고. 시체가 된 상인의 꼴을 보고도 아무 미련도 남지 않아서.

    그렇게 15년을 스스로 정한 기준 위에서 버텨 왔다. 그것이 그녀가 병마에 지지 않는 법이었다.

    “시안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피를 내놓겠다고 한 것이고, 어쩌면 소르체에서 사람의 혈액을 주고받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죠.”

    소르체는 의술이 발달한 곳이니 그곳의 윤리는 리뮈르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페렌트의 최전선 리뮈르였다. 마물과 싸우느라 언제나 사람이 부족한 곳. 그래서 사람이 가장 귀한 곳.

    리뮈르 기사단이 지켜야 하는 것은 기사들의 기사라는 명예도, 프레모 대륙 최강이라는 실력도 아니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리뮈르 기사단이 지키는 것은 이 땅의 미래이자 희망이었다.

    리뮈르 기사단이 존재하기에 이 땅의 사람들은 술과 도박으로 밤을 지새우면서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생명을 수호하는 검, 그것이 리뮈르가 지닌 최후의 긍지였다. 그리고 그녀는 리뮈르 최강의 기사이자 공비였다.

    “설사 내가 리뮈르의 금기를 어기더라도 이것을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시안이 알고, 내가 알잖아요.”

    양심은 속일 수 없다. 양심을 버리고 얻은 삶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녀가 힘들게 버텨 온 지난 시간조차 모두 시궁창에 버리는 선택이었다.

    “나는 기사로 살고자 태어난 가문과 이름을 버린 사람입니다. 내 팔이 더는 검을 들지 못해도, 내 다리가 더는 움직이지 못해도 나는 기사로 남을 겁니다.”

    기사란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든 자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팔다리가 좀 삐걱대더라도 스스로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한, 그녀는 기사로 남을 수 있었다.

    “…….”

    시안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기사였다. 그것이 달리케의 신념이라면 마땅히 존중해야 했다.

    “달리케 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해 질 무렵, 두 사람이 마주 앉은 공비의 응접실은 석양빛으로 물들어 온통 주황색이었다. 마치 꺼지기 직전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꽃처럼.

    어린 기사의 눈에서 애상을 발견한 달리케가 물었다.

    “내가 죽어 간다고 생각해요? 왜요? 난 아직 이렇게 살아 있는데.”

    15년 전, 처음 그녀를 진찰한 의사는 앞으로 5년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 말했다. 하지만 그 세 배의 세월이 지나고도 달리케 리뮈르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 * *

    하아, 공비의 응접실을 빠져나온 시안이 문에 기대 한숨을 토해 냈다. 이틀 밤은 꼬박 새운 것처럼 피로가 몰려 왔다.

    “……리뮈르 공자님.”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달미에르가 그곳에 있었다. 시안이 달리케의 응접실에 들었단 것을 듣고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달미에르는 시안의 한숨 소리만으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했다.

    “어머니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실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것은 제 욕심이겠지요.”

    달로아가 달미에르의 눈을 포기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미련을 가졌던 것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로 기적을 꿈꿨다. 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어려운 결심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달미에르는 몸을 숙여 인사하고는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멀어졌다.

    어째서, 다들, 이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시안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분하고 억울했다. 그날의 기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아무렇게나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칼바람이 얼굴을 찢어 놓을 것처럼 매섭게 불어 댔다. 인적이 드문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불쑥 나타난 손이 시안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시안은 속이 빈 나무토막처럼 자신을 잡아당기는 손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정신을 반쯤 빼놓은 탓이었다. 가슴께에서 까딱이는 갈색 머리통이 내려다보였다.

    “추워, 문이나 닫아.”

    타박하듯 쏘아붙이는 말에 시안은 등 뒤의 문을 닫았다. 윙윙, 거센 바람이 문에 가로막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해 넘어갔으니까 커튼도 내리고.”

    엘가가 화로를 뒤적이며 말했다. 지시하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저 성격에 얌전히 하녀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의문이었다. 시안은 까마득한 선조의 명령대로 두꺼운 커튼을 내려 창을 가렸다.

    본채는 물론 별채와도 뚝 떨어진 외진 정원에 홀로 지어진 집은 지나치게 고요해 아무 소리도 숨길 수가 없었다. 벽난로의 나무가 타닥타닥 불씨를 튀며 타들어 가는 소리,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그리고 아직도 씨근대는 제 숨소리까지.

    “이리될 줄 알았다. 리뮈르 공비의 성정에 그런 것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탁, 불퉁한 목소리와 함께 볼품없는 나무 탁자 위로 올려진 이 빠진 잔에서는 따끈한 김이 올라왔다. 곡물을 우린 차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자그마한 집을 가득 채웠다.

    시안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었다. 뜨끈한 차를 넘기자 쇳물을 삼긴 것처럼 펄펄 끓던 속이 도리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달리케 님을, 살, 리고 싶었습니다. 이대로 죽기엔 할 일이 많이 남으신 분이라 생각해서…….”

    뭉쳐 두었던 말들이 두서없이 쏟아졌다.

    “살아서, 살아서…….”

    “시안이라고 했던가? 올해 네 나이가 몇이지?”

    엘가는 주절주절 이어지던 시안의 말을 뚝 자르며 대뜸 나이를 물었다.

    “열아홉…….”

    “이번 가주는 정신이 나갔구나. 겨우 열아홉 살짜리를 밖으로 보내다니.”

    쯧, 혀를 찬 엘가가 두 손으로 모아 쥔 잔에 입을 가져다 대고 찻물을 들이켰다.

    “그러는 대모님께서는 몇 살에 소르체를 떠나셨―”

    “열아홉이면 충분히 세상이 궁금할 나이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 엘가가 화제를 돌렸다.

    “네 피로 사람을 살린 적은 있고?”

    “……없습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의 상처를 치유한 적은 있지만.”

    죽은 캐롤린의 사체에 남은 상처를 치유한 적은 있지만, 그녀의 생을 되돌린 것은 시안의 피가 아니었다.

    “당연히 검은 피로 사람을 죽여 본 적도 없겠군.”

    하, 터지는 한숨 사이로 욕설로 추정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

    시안은 어쩐지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천운을 타고났군.”

    저 천지 분간 못 하는 까마득한 후손이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 아무도 죽이지 않은 주제에 자신을 만나다니.

    자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엘가는 이제는 기억조차 아득한 시간을 떠올렸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사람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고.”

    소르체의 백자들이 지닌 힘을 신의 축복이라 여기는 머저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백자의 힘이 아닌, 백자의 인생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니까.

    “검은 피를 독으로 써서 타인을 죽이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있니?”

    권력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영생에 가까운 삶, 검은 피를 지닌 자들은 그 삶이 숙명이라 했다.

    “죽은 자의 남은 생을 네가 살아야 해.”

    검은 피의 진정한 권능은 숙주의 수명을 제 것으로 흡수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검은 피의 수명은 천형이었다.

    “나는 600년 전 소르체를 떠났지. 그리고 그동안 일곱 명의 사람을 살렸고, 그들 모두 내 피를 먹여 죽였다.”

    연인이었던 사내는 그녀를 감금하고 피만을 취하려 했고, 친구라고 믿었던 이는 악마의 권능이라며 그녀를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역시 엘가에게 가장 큰 회의를 안겨 준 것은 일곱 번째로 살린 생명이었다. 배신당하는 것이 지긋지긋해 인연조차 만들지 않고 떠돌다 얻게 된 귀하디귀한 아들이었다.

    살을 떼 줘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돌림병에 걸렸을 때 그녀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아들을 살렸다. 그렇게 살아난 아들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아들이 검붉은 피를 토하며 죽었던 그날, 엘가는 결심했다. 앞으로 남은 날은 모두 살인자인 아들의 생을 대신 사는 것이라고.

    “그 죄로 아직도 죽지 못하고 살고 있지. 그들의 수명이 얼마였는지 모르니 언제쯤 죽을지도 알 수 없고.”

    수형자(受刑者)의 삶은 그녀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험난했다.

    “일곱의 수명이…….”

    일곱 명의 남은 생을 대신 사는 것이라 해도 60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시안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엘가가 고개를 기울이며 옅게 웃었다.

    “아, 하나 더 죽였거든. 죽여 달라고 애걸하는 우리 같은 사람을 만나서. 19년쯤 전에.”

    일곱만의 수명이었다면 이 수형 생활도 진작 끝났겠지만, 19년 전 다른 자매를 죽인 덕에 그녀가 지고 있던 수명까지 모두 짊어지고 말았다.

    “그거, 우연입니까?”

    무결한 후손은 머리가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19년 전이라는 단서를 놓치지 않은 거 보면.

    “아닐걸?”

    엘가가 다른 검은 피의 소유자를 죽인 그해, 새로운 검은 피의 소유자가 태어났다. 그것이 우연일 리가 없었다.

    “우리는 하얀 피가 만들어 낸 변종이잖아. 언제 사냥 당해 죽을지 모른다는 극한의 위기감이 자신의 개체를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 낸 돌연변이.”

    생존과 개체의 보존은 생명체가 가진 가장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욕망이었다.

    “사람이 참 그래. 정말 죽고 싶어서 내 피를 요구해 놓고는 정작 피를 토하며 죽는 순간에는 살고 싶어진 거지. 내가 죽인 그 애가 죽음의 순간 느낀 공포와 살고자 하는 욕망이 너를 깨운 거야.”

    19년 전, 죽고 싶다며 울부짖었던 그 애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숨이 막히면 입을 벌리고, 연기를 쐬면 눈물이 나는 것처럼, 죽음의 순간 그 애가 느낀 본능적인 공포와 욕망이 소르체의 혈통에 흐르는 검은 피의 인자를 깨웠을 뿐.

    “그러니까,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살다가 평온하게 죽어. 또 다른 검은 피를 깨우지 않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삶과 죽음의 조율사니, 소르체의 진정한 지배자니 그따위 것들은 모두 허명에 불과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검은 피 또한 살아남고자 몸부림친 결과에 불과했다.

    “누구의 삶도, 누구의 죽음도 네 몫이 아니야. 타인을 살릴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고, 타인을 죽일 수 있다는 교만을 버려.”

    그러니 그들의 의무는 본디 목적대로 그저 사는 것이면 충분했다. 제 힘을 과신해 타인의 생을 좌지우지하려는 순간, 생은 지옥이 된다.

    “그렇게 이 땅의 검은 피를 잠재우고, 우리의 자매들을 지켜. 더는 그녀들이 사냥감이 되지 않도록.”

    소르체를 떠나온 그녀가 그곳에 남은 자매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제 행동이, 제 무지가 우리 자매들을 위험하게 만들었을까요?”

    고개를 숙인 시안의 눈에서 억지로 참았던 눈물이 터지며 탁자를 흥건하게 적셨다.

    “하, 미치겠네. 정말…….”

    우는 아이는 정말 딱 질색이었다. 눈물만 보면 뭐든 다 해 주고 싶어지니.

    “네가 무슨 죄겠니, 미쳐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우리가 문제지. 응? 그러니 그만 울어라.”

    평소엔 쓰지도 않는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까지 써 가며 달래 보았지만 까마득한 어린 후손은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살, 살리고…….”

    겨우 울음을 그치는가 싶더니 서러운 생각이 났는지 시안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반드시 살, 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리지 못했습니다.”

    ―시안 님, 검은 피를 사용해 누군가를 살리는 것은 소르체에서는 금기입니다. 약속해 주십시오. 제가 죽어도 그 힘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어머니가 자신에게서 그 약속을 받아 낸 것은 스승님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그때 시안의 나이는 불과 아홉이었다.

    푸른 손의 살라도, 붉은 눈의 코라도 거리낌 없이 제 능력을 사용하는데, 시안만이 자신의 힘을 감추어야 했다.

    ―아니, 그건 안 될 말이다. 내가 네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건 네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사람이라 그랬다.

    스승님은 자신에게 검 잡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알려 준 사람이었다.

    ―어머니, 그렇다면 제 힘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요?

    ―그건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이 아닌 것 같군요. 언젠가 그 답을 알게 된다면 제게도 알려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시안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답을 알지 못했다.

    “아무도 살리지 말아야 한다면, 그렇다면, 이 피는 저주일 뿐입니까?”

    사람을 살리면 그 답을 알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검은 피로 누군가를 살려서는 안 된다는 금기는 소르체를 벗어난 지금도 유효했다. 이대로라면 평생토록 그날의 답을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저주라…….”

    엘가는 시안의 절망에서 어린 날의 자신을 보았다. 누군가를 살리고 싶어 서슴없이 제 팔을 찔렀던 그때의 자신을. 살리고 싶었지만 끝내 살리지 않고 떠나보낸,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해진 옛사랑들을.

    “한땐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제 배로 낳고, 제 피를 먹여 되살린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도 살아야 했던 그때는 이 피가 신을 탐한 인간에게 내려진 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것조차 제 나약함이 만들어 낸 변명이라는 것을.

    “말했잖아. 우리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만들어 낸 돌연변이라고.”

    그저 이 몸뚱이 또한 살고자 했을 뿐인데.

    “그러니까, 아가야.”

    그녀는 손을 들어 시안의 얼굴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느새 바람마저 숨을 죽인 듯 사방이 고요했다.

    “살아. 네게 주어진 생을.”

    낮과 밤이 반복되고, 계절이 바뀌고, 꽃은 피고 지는 것처럼 그렇게.

    “그것을 위해 네 피는 흐르는 거야. 널 살리기 위해서.”

    열매의 달콤함과 새의 지저귐이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듯, 백자의 피에 흐르는 능력은 무언가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생을 사는 거야. 그들의 생은 그들의 몫이야. 우리의 생이 우리의 것이듯이.”

    엘가는 여덟의 목숨을 등에 지고야 이것을 알았다.

    “리뮈르 공비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아 그 사람이 가여우니?”

    시안은 눈물이 젖어 엉망이 된 채로 고개를 저었다. 누가 감히 그 사람을 가엽다 할 수 있을까. 그토록 눈부신 삶을 살고 있는데.

    “네가 살리지 못한 그 사람은 자신을 살리지 않은 널 원망했니?”

    ―울지 마라, 시안.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다. 네가 보기에는 내 삶이 부족했더냐?

    시안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원망한 건 자신이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서, 돌아보지 않는 매정함이 서러워서 내내 원망했다.

    “그래, 우리 삶에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겠지. 내게도 끝은 있을 테니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죽는다. 그것만이 엘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젠 보내 주렴. 네가 마음에 담아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웠을 그 사람도, 그리고 그 사람을 살리지 못해 괴로웠던 그 시절의 너도.”

    자신만은 시안의 마음에 남은 죄책감의 이름을 알았다. 후회라는 이름의 족쇄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저 어린아이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날을 갈림길에 서서 괴로워할지 알면서도 고작 이런 위로밖에는 할 수 없었다.

    “생이란 본디 죽음을 향한 여정인 것을.”

    그러니 죽음을 과히 슬퍼하지 말라고.

    “부디 너만은 아무도 죽이지 않아, 네 어깨에 온전히 네 생만 지고 가거라.”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면서도 엘가는 기대를 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엘가가 텅 빈 잔에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주었다.

    이 집은 원래 약초를 재배하는 일꾼들이 쉬는 곳이었다. 일꾼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떠나는 게 좋을 텐데. 엘가는 바깥 동향을 살필 작정으로 문을 살짝 열었다.

    끼이익, 기분 나쁜 마찰음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잠깐 바람을 맞은 게 다인데 추워 뒈질 것 같았다.

    리뮈르 기후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망할 추위에 문득 소스라치곤 했다. 그럴 때면 모래가 섞인 건조한 바람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니, 아닙니다.”

    엘가가 이곳을 떠나려는 줄 알았는지 다급히 다가온 시안이 그녀의 소맷부리를 붙잡았다. 시안을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는 듯 호흡을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은 죽음을 위한 여정이 아닙니다.”

    ―내가 죽어 간다고 생각해요? 왜요?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죽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삶이 죽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그들은 모두 살아 있잖습니까?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는 겁니다.”

    ―난 아직 이렇게 살아 있는데.

    그 말을 하던 달리케의 얼굴을 기억했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빛나는 남색 눈동자,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그 표정까지도.

    후두둑,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다시 차올라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살아 있기에 죽음도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은 누군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 어찌하누. 나는 널 만나 즐거웠다. 늙은이에게 내 모든 것을 남길 수 있는 제자만큼 소중한 존재가 또 있으랴.

    고집스레 외면해 왔던 스승님의 죽음을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래 묵은 서러움이 눈물과 함께 녹아내렸다.

    “그래, 나보다 네가 낫구나.”

    엘가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에 마모된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희망이었다. 그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시안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공비 걱정은 너무 하지 말려무나. 그 사람은 내게도 은인이니까.”

    사는 게 너무 지긋지긋하고 환멸이 나서 반쯤 정신을 놓고 지냈던 때가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디움의 산맥이었고, 이름 모를 마물이 집채만 한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처가 나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사망에 이를 수 있다면, 순간 그런 기대를 했다.

    ―비켜!

    웬 붉은 머리의 여자가 그 마물을 둘로 토막 내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지키는 땅에서 마물이 설치는 꼴은 못 보지.

    여자는 온몸에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고도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싱긋 웃었다.

    ―괜찮아?

    피 묻은 손을 옷에 슥슥 닦고는 잡으라는 듯 내밀었다. 여자는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엘가의 말에 단박에 그녀가 지낼 곳을 마련해 주었다.

    매일 올리는 약에 제 피를 섞어 그녀를 살려 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엘가는 제 삶이 살인자의 것임을 상기했다. 공비의 삶을 제 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너무 오래 산 탓인지 몰라도 내 의술은 검은 피보다 못하지 않으니.”

    길어야 5년이라는 그녀의 생을 15년간 붙들어 두었다. 엘가의 의술이 얼마나 더 달리케의 생을 연장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남은 삶이 얼마일지 모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다행, 입니다.”

    시안은 엘가의 말에 안심한 듯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니 소르체에서 저 아이를 얼마나 귀하게 키웠는지 알 만했다.

    “검은 피의 아이는 소르체를 떠난다지. 그거 그냥 해 본 말이야. 바깥세상이 너무 궁금했거든.”

    열여섯, 좁은 세상이 지긋지긋해 집을 떠나기 위해 적당히 꾸며 낸 말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600년을 홀로 떠돌 줄 알았다면 그렇게 일찍 집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

    “그러니 적당히 놀다가 집에 돌아가거라. 보아하니 곱게 키운 것 같은데 기다리는 사람 애태우지 말고.”

    ―시안 님께서는 제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분입니다. 그러니 부디 무사하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 생각에 소르체가 막 그리워진 참이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 천이 걸린 듯 다채롭게 물드는 하늘. 시안은 소르체의 풍경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젠 그만 가. 일꾼들 일어날 시간이니.”

    “네, 정말 감사했습니다.”

    성의 없이 내모는 손짓에도 시안은 공손히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대로 훌쩍 멀어지던 시안이 황급히 되돌아와 말했다.

    “대모님, 언제든 소르체로 돌아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 어머니는, 내가 아는 자매들은 모두 한 줌의 가루로 사라진 그곳에 말이냐?”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고향이지만, 그곳에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곳에는 엘가 소르체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차라리 언제든 웃으며 저를 반기는 어머니와 자매들이 있는 꿈속의 공간으로 남겨 두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이제는 저도 있고……. 무엇보다 대모님께도 그곳은 집이지 않습니까?”

    집. 고향을 떠나온 방랑자에게 그것만큼 그리운 단어가 또 있을까.

    “숲의 바람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한다면…….”

    엘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새벽바람이 문을 흔들고 지나갔다. 나무 틈새로 새어 든 바람이 희미하게 울었다.

    그것은 꼭 봄이 되면 소르체의 분지를 둘러싼 흰 뱀의 숲에서 불어오던 바람 소리를 닮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