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비극과 희극 사이
‘미친, 저 산더미 같은 서류는 대체 뭐지?’
달로아 리뮈르는 제 집무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비볐다. 산처럼 쌓인 서류를 정리해 보낸 것이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 보람도 없이 다시 일거리가 쌓였단 말인가.
하루 정도는 좀 느긋하게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달로아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얼굴로 비척비척 걸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온몸을 축 늘어뜨린 그녀는 제일 위에 놓인 밀봉된 서류를 성의 없이 찢었다. 페렌트-브리아 회담이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연히 성공했겠지. 누가 갔는데.’
달로아는 자신에게 산더미 같은 서류를 넘겨주고 홀랑 브리아로 떠난 누군가를 생각하며 털썩 책상 위로 쓰러졌다. 차가운 원목 위에 달로아의 볼이 늘어진 치즈처럼 찰싹 들러붙었다.
때는 페렌트 내전이 메르디에스의 승리로 끝난 지 딱 반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강 급한 일이 끝나 이제 한숨 돌리겠다 싶었더니.
―나, 어디 좀 다녀오려고.
아리아드네가 별안간 불길한 말을 툭 내던졌다. 달로아는 그 순간 몹시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싱긋 웃는 국왕의 얼굴이 미심쩍어서만은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제 행적을 누군가에게 허락 맡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내가 곧 큰 거 하나 던질 텐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소리지, 뭐긴 뭐야.
―대체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브리아.
마치 브리아가 옆 동네라도 되는 것처럼 태평한 어조였다.
―브리아라면 제가 아는 그 브리아요? 서대륙의 그 브리아?
―거기 말고 다른 브리아도 있었어?
―아니, 거기가 어디라고! 뭣보다 거긴 왜? 아니, 가실 이유야 충분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브리아가 호시탐탐 페렌트를 집어삼킬 기회만 엿보고 있으니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건 맞지만, 이렇게 갑자기 터트리면 그 뒷감당은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나야. 나겠지. 저 말을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겠어.’
평생 애지중지한 배가 폭풍을 만나 난파된 선장의 마음이 이럴까. 달로아는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정은 이만하면 대강 정리된 것 같으니 다음 달에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줘.
―다음 달? 다음 달이라니요!
전 재산을 털린 도박꾼처럼 망연자실한 꼴로 널브러져 있던 달로아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 내 방문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브리아 국왕의 친서도 받았어.
아리아드네가 손가락 사이에 종이봉투를 끼운 채로 팔랑팔랑 흔들었다.
―폐하!
뒷골이 찡하고 울렸다. 다급해진 달로아가 유진을 붙들고 늘어졌다.
―아니, 그렇게 멀뚱히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댁이라도 폐하를 좀 말려야 할 거 아니야!
달로아의 외침에 아리아드네와 유진이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날?
―그럴 리가.
의아하다는 듯 아리아드네가 한쪽 고개를 기울이자, 유진이 피식 웃으며 부정했다.
―난 아리아드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말릴 생각이 없는데.
아, 달로아의 마지막 희망이 파스스 사그라들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녀가 어디를 가더라도 안전하게 지키는 거지, 그녀가 내 뜻에 따르도록 설득하는 게 아니니까.
아리아드네를 향한 유진의 열렬한 찬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달로아는 주섬주섬 제 몫의 서류를 챙겼다. 아무도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 주지 않을 테니 스스로 챙기는 수밖에.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리아드네와 생각이 다르지 않아. 그녀의 의지가 곧 내 의지니까.
알겠다고요, 그러시든가요. 달로아는 속으로 꿍얼대며 아리아드네에게 성의 없이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래, 아무리 급했어도 손을 벌릴 데가 따로 있지. 저 아리아드네한테만 미친놈이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일 리가. 달로아는 데친 야채처럼 풀이 죽어 터덜터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석 달째 서류의 산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아, 퇴직하고 싶다. 아버지 밑에서 밤마실이나 다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달로아는 광활한 책상에 제 얼굴을 좌우로 굴리며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네의 공백을 감당하는 것은 날이 갈수록 힘들었다.
사실, 봐야 하는 서류 몇 장이 느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날마다 한계에 부딪혀 조각조각 깨지는 제 정신머리가 문제였다.
달로아는 리뮈르의 이름을 달고, 리뮈르 영지에서 자라 온 제 일생이 얼마나 평온했나를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다.
내전을 치르며 제법 유대를 쌓았다고 생각한 상대들이 돌아가며 그녀의 뒤통수를 쳤다. 전시 상황일 때는 단단히 뭉쳐 있던 세력들이 전쟁이 끝나자 각자의 몫을 찾겠다고 날마다 혈투를 벌였다.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얻어터지다 보면 빡빡 고함을 내지르는 입들을 죄다 솜뭉치로 틀어막고 싶었다.
아리아드네가 있을 때는 그나마 얌전히 굴었다는 걸 미처 몰랐다.
누가 알았겠어. 이렇게 단체로 미쳐 버릴 줄은. 달로아는 어떻게든 브리아행에 따라갔어야 했다는 후회로 날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셨다.
‘아니, 그게 아니지. 애초에 이런 자리는 맡는 게 아니었다고!’
어쩌다 아리아드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왕도에 주저앉은 걸까. 달로아는 이따위 제안을 승낙한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얼마면 내 제안 받아들일 건데? 이 정도면 내 옆에 남을래?
아리아드네가 건넨 미끼는 너무 달콤해서 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폐하, 페렌트 방벽을 지켜 온 이 리뮈르, 앞으로는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제발 제게 그 기회를 주십시오.
그땐 정말 개가 된 것처럼 물었지. 지금도 당장이라도 튀고 싶은 걸 다달이 제 몫으로 떨어지는 돈을 보며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똑똑.”
“들어오지 마. 절대로 들어오지 마.”
노크 소리만 들어도 이제는 신경 쇠약에 걸릴 것 같았다. 달로아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똑똑.”
“그 손에 오늘도 누가 짖었다는 보고서 같은 거 들려 있으면 불태워 버릴 거니까 들어오지 마.”
끈질기게 이어지는 노크 소리에 달로아는 음산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똑똑.”
“들어오지 말랬! 어, 전하?”
벌떡 일어나 소리를 왁 내지르던 달로아는 제 앞에 선 사람을 발견하고는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똑똑.”
레너드가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제야 달로아는 조금 전까지 들리던 노크 소리가 조금 이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 정신을 빼놓고 있으면 사람이 들어온 줄도 몰라.”
아리아드네에게 메르디에스를 물려주고 현역에서 물러난 레너드는 일없이 여기저기 기웃대곤 했다.
“전하, 저, 정말…….”
레너드를 본 달로아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울먹였다. 당황스러워 두 눈만 끔벅이던 레너드가 달로아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더니 안쓰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새 얼굴이 또 반쪽이 됐구나. 이러다가 살가죽만 남겠다. 누가 너 굶기든?”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레너드의 얼굴에 달로아는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진짜, 진짜…….”
고개를 숙인 달로아의 입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다 죽여 버릴 거예요.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헛소리하는 새끼 있으면 감옥에서 평생 썩는 한이 있어도 다 죽여 버릴 거예요.”
별안간 살인을 예고하는 음산한 목소리에 레너드가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어, 누구를 말이냐?”
“회의실에서 날마다 짖어 대는 새끼들 전부 다요!”
울분에 찬 달로아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새끼들 전부 죽이면 네 일이 더 늘지 않겠니?”
진정하라는 듯 툭 책상을 두드린 레너드가 침착한 어조로 충고했다.
“반만 죽이거라. 그래야 남은 반이 겁먹고 열심히 일하지.”
생각지도 못한 노련한 충고에 달로아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전하께선 제 빛이고 우상이자, 꿈이고 희망이세요.”
양손을 모아 쥔 달로아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얼굴이었다.
“저 꼭 전하처럼 될 거예요.”
“나처럼? 나처럼 훌륭한 사람이 말이냐?”
달로아의 장래 희망을 들은 레너드가 뿌듯함을 숨기지 못하고 으쓱댔다.
“네! 돈 많은 한량이 되어서 날마다 돈 쓰는 게 일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너, 그거―”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가를 좁히며 달로아를 주시하던 레너드가 이내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원대한 포부로구나. 이루기 쉽지 않으니 정진해야 할 게다. 나 정도 부자는 하늘이 내리는 거라 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말이다.”
레너드의 재운은 가히 천운이라 할 만했다. 넘어지면 금을 줍고, 길을 잃어도 보물섬에 도착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어떤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전부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감동한 얼굴로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이던 달로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용건을 물었다.
“어쩐 일이냐니……. 너 그 손에 든 거 안 봤니?”
레너드가 달로아의 손에 들린 서류를 가리켰다. 브리아 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알리는 서신이었다.
“아뇨. 봤는데…….”
무슨 말인가 하여 서신을 뒤적이던 달로아는 뒤쪽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휘갈긴 아리아드네의 전언을 발견했다.
「2월이 가기 전 도착할 예정. 귀환식은 귀찮으니 따로 준비하지 말 것.」
2월이 가기 전이라니. 달로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만 뻐끔거렸다.
“어, 어? 그러니까 오늘, 오늘!”
간신히 뱉은 말도 갓 말을 배운 아이처럼 조각난 단어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 바로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말을 잊은 사람처럼 어버버하는 달로아를 보며 레너드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아리아드네가 왔다는구나.”
그때, 뿌우우― 우렁찬 나팔 소리가 왕궁 전체를 뒤덮었다. 왕궁의 주인이 귀환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아, 아버지.”
유진에게 안겨 말에서 내리던 아리아드네가 레너드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외숙부님, 아리아드네와 방문자님의 분위기가 그새 또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까?”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귓가에서 속닥이는 소리에 레너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브래들리 백작가의 차남이자 레너드의 조카인 레이먼드 브래들리였다.
살리바를 탈출한 베아트리스와 메르디에스까지 동행했다가, 베아트리스와 캐롤린의 시신이 사라진 일로 한동안 넋을 놓고 지내더니. 레이먼드는 그 일에 책임이라도 느끼는지 한동안 살리바에서 살다시피 했다.
오랜만에 페렌트에 돌아왔다 했더니 기껏 하는 소리가 저따위였다.
“다, 다르긴 뭐가 달라! 똑같은데!”
레너드는 벌컥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아리아드네와 유진이 세상에 저희 둘만 있는 것처럼 유난 떠는 것이 수상하던 차였다.
그런데 레이먼드까지 저렇게 말하니 더 불안했다. 말이란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힘을 가지는 법이니까.
‘아직은 안 될 말이지. 아직은.’
애써 마음을 다스린 레너드가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아리아드네를 슬쩍 흘겨보았다.
“너는, 말에서 내려오기 불편하면 아버지를 기다릴 것이지.”
말에서 내려와 셔츠와 바지를 가볍게 털던 아리아드네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마지막으로 아버지 손 붙잡고 말에서 내린 게 몇 년 전 이야긴데…….”
그럼 방금 저놈은 뭐였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유쾌하지 않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제 딸은 꼭 맞는 말로 사람 입을 막곤 하니까.
레너드는 아리아드네의 신경이 다른 데에 쏠린 틈을 타 매서운 눈초리로 유진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재수 없는 말끔한 얼굴도, 만사에 무관심한 듯한 표정도 평소와 다름이 없는데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았다. 사람이 좀 물러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어딘가 풀어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는 아리아드네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서는 그저 말없이 제 손가락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웬 애들 장난감 같은 걸 손에 달고서.
‘저건 뭐야? 아리아드네 얘는 제 애인이 웬 허섭스레기를 주워서 하고 다니는 것도 모르고, 쯧.’
레너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유진에게 줄 만한 물건이 뭐가 있던가 헤아려 보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번듯한 저택 몇 채에 달하는 물건을 고른 레너드가 나무 쪼가리를 애틋하게 쓰다듬는 유진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레너드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유진이 장난감에 몰입했던 게 머쓱하다는 듯 제 손을 뒤로 감추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라지만 아리아드네가 섬세한 성격은 아니었다.
‘저놈 마음고생할 게 훤하다. 훤해.’
레너드가 혼자 소설을 써 내려가는 사이, 아리아드네에게 바짝 다가선 레이먼드가 소리 죽여 물었다.
“너, 방문자님이랑 무슨 일 있었지?”
둘 사이에 어떤 진전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확신을 갖고 물어보는 레이먼드를 보며 아리아드네가 싱긋이 웃음 지었다.
“무슨 일 있을 게 뭐 있어. 더 좋아진 거 빼면.”
아주 대놓고 자랑이었다.
“그래. 좋아 보인다.”
사촌 누이의 티 하나 없는 행복한 웃음에 레이먼드도 따라 웃었다. 온통 행복한 사람들 사이에서 달로아 혼자만 죽상이었다.
“……예정보다 일찍 오셨네요?”
“아, 모처럼 나간 김에 살리바에 들렀다 오는 길이야. 그 덕에 시간 좀 절약했지.”
본디 페렌트에서 브리아로 가는 길은 살리바를 거치는 것이 곱절은 빨랐다. 출발할 때는 혼란스러운 살리바 상황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다른 경로를 택했지만, 그새 살리바도 많이 안정된 모양이었다.
“아, 그러셨―”
영혼 없이 고개를 주억이던 달로아는 옆에서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귀를 막았다.
“살, 살리바? 살리바에 다녀왔다고?”
범인은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한 레이먼드였다. 언제나 여유만만하던 귀공자께서 웬일이람.
“응, 그랬지. 레이,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언가를 탐색하듯 묻는 아리아드네는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할 말이라니, 무슨 말인지 잘…….”
레이먼드는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아니면 묻고 싶은 거라도?”
“……아니, 아무것도.”
“그래? 그럼 됐고.”
재차 이어지는 추궁에도 변함없이 입을 다물자, 아리아드네가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렸다. 휴우, 긴장이 풀린 듯 레이먼드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온 그때였다.
“아, 맞다. 베아트리스가 네 안부 묻던데?”
“성녀님께서 내, 내 안부를 물으셔?”
레이먼드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펄쩍 뛰어올랐다.
저럴 거면 조금 전에 입은 왜 다문 거람? 달로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응. 네가 살리바에 있는 동안 도움 많이 받았다고 그러던데? 고맙단 말 전해 달래.”
“그 말 말고 다른 건?”
“다른 말은 없던데? 왜 기다리는 말이라도 있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뭘 기대했는지 레이먼드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변화무쌍한 레이먼드의 얼굴을 구경하듯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피식 웃으며 달로아에게 말했다.
“달로아, 열흘 뒤에 살리바에서 손님이 올 거야. 알고 있으라고.”
“네에. 열흘씩이나 뒤의 일을 이렇게 빨리 알려 주시다니, 감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달로아가 과장되게 굽실대며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브리아행의 앙금이 남은 탓이었다.
“엄살은. 캐롤린은?”
달로아의 빈정거림이야 간지럽다는 듯 웃어넘긴 아리아드네가 보이지 않는 캐롤린을 찾았다.
“메르디에스에 갔다. 작위 승계로 준비할 것도 있고, 성을 좀 돌아보고 온다고.”
“폐하께서 귀환하셨단 말을 들으면 득달같이 올라올 겁니다. 애초에 왕궁을 떠난 것도 폐하께서 부재하신 틈을 타 밀린 일 처리하는 거라고 했으니까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레너드와 달로아가 차례로 답했다.
“아, 할 말 있었는데…….”
어서 캐롤린을 만나 유진에게 청혼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아리아드네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냐는 듯 레이먼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됐어. 레이, 넌 파던 땅이나 마저 파.”
아리아드네가 다가온 레이먼드의 얼굴을 밀어내며 핀잔을 놓았다.
“땅? 무슨 땅? 내가 무슨 땅을 파?”
레이먼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저 바보가 다 눈치챘다는 걸 저 혼자만 모르는 걸까.’
레이먼드는 결코 눈치 없는 편이 아니었다. 메르디에스 상단에서 귀족들을 상대하는 게 그의 일이었으니까. 레이먼드에 대한 평은 웃는 낯에 사교적이고 매너는 좋지만, 속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 보통이었다.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바보가 됐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아리아드네는 레이먼드가 이제껏 교제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첫사랑이란 말이네.’
아리아드네는 사람이 변한 것처럼 삐걱대는 레이먼드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저 우렁찬 삽질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아 더 그랬다.
목각 인형처럼 삐걱대는 레이먼드를 뒤로한 아리아드네가 심통이 난 달로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지?”
“제 얼굴을 보면 그 말 못 하실 텐데요.”
달로아는 아리아드네가 페렌트를 비운 그 몇 달 새, 큰 병을 앓은 사람처럼 볼살이 쑥 빠지고 두 눈이 퀭해져 있었다.
“많이 힘들었나 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 저 미친 것들 사이에 저만 먹잇감처럼 던져두고 폐하는 홀랑 내빼셨잖아요!”
달로아가 콧바람을 뿜으며 열을 냈다. 정식 고용 관계가 되며 깍듯해졌던 말투도 점점 사나워졌다.
“귀족원에서 많이 괴롭혔어?”
“당연하죠! 폐하마저 없으니 단체로 광견병 걸린 개처럼 짖어 댔다고요. 날마다! 그것도 이놈, 저놈 돌아가면서!”
아리아드네가 있을 때야 그나마 눈치라도 봤지. 회의장에서 이놈, 저놈 짖어 댈 때면 아주 목줄 풀린 개가 따로 없었다.
“그럴 것 같았어.”
펄펄 뛰는 저와는 달리 아리아드네의 대답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럴 것 같았다니, 그걸 알고도…….”
“그러라고 간 거니까.”
달로아가 배신감에 치를 떠는데도 아리아드네는 빙긋 웃기만 했다. 그게 무슨, 무언가를 말하려던 달로아의 입이 닫혔다. 갑작스레 생각할 것이 늘어 머리가 복잡했다.
“귀족원에서 너보다 높은 사람이 있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귀족들의 반대에도 아리아드네는 달로아를 정무 대신에 앉혔다. 정무 대신 달로아 리뮈르는 귀족원의 수장이자 페렌트 역사상 최연소 재상이었다.
“아니면, 리뮈르의 공녀보다 더 대단한 혈통이 있던가?”
내전을 거치며 페렌트에 남은 공작가는 리뮈르와 소르체 단둘. 소르체는 앞으로도 독자 노선을 걷겠다 했으니, 왕도에 남은 귀족 중 혈통으로 보아도 그녀가 가장 윗줄이었다.
“그런 네가 왜 그들 성화에 시달렸지?”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달로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리뮈르는 왕도에 세력이 없으니까요.”
귀족원의 귀족들이 달로아에게 맞서는 이유는 그녀를 뒷받침해 줄 세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리뮈르는 달로아를 재상 자리에 앉혀 줄 배경은 되어도, 그녀가 휘두를 권력이 되어 주진 못했다.
“내가 왜 널 재상에 앉혔다고 생각해?”
이번에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제가 왕도에 세력이 없는 리뮈르의 핏줄이니까.”
내전 직후, 저마다 논공을 다투는 상황에서 리뮈르는 아리아드네가 내밀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패였다. 고귀한 혈통, 내전에서의 공적, 왕도의 어느 세력에도 끼지 못한 정치적 상황까지도.
“그것만은 아니야. 네가 그럴 만한 능력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리뮈르라는 이름값만은 아니었다. 달로아의 천부적인 균형 감각과 언제나 리뮈르 너머 세상을 궁금해한 그녀의 욕망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없는 사이에 이빨을 드러낸, 격리해야 할 미친개는 다 찾았고?”
아리아드네가 자리를 비운 것은 정국이 안정된 직후였다. 몇 주 정도라면 저들도 조심했겠지만 아리아드네가 페렌트를 비운 것은 자그마치 삼 개월이었다. 방심하고 제 이빨을 드러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저들은 제게 자신의 욕망을 너무 드러냈어요.”
욕망은 약점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래서?”
“곧 저 미친개들을 단단히 묶어 둘 목줄을 구해 바쳐 올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목줄을 구하러 가 봐도?”
내내 몰리다가 이제야 판을 뒤집을 패를 얻었다. 달로아 리뮈르는 게임에서만큼은 언제나 승리자였다. 마치 혼이 빠진 것처럼 퀭하던 두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어서 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젓던 아리아드네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아, 그런데 살리바에서 오는 손님이 누군지는 안 물어봐?”
“……누가 오는데요?”
달로아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눈가를 찌푸렸다. 집무실 책상에 놓인 높은 서류 위로 산더미 같은 서류가 더해지는 불길한 환상이 어른거렸다.
“살리바의 마지막 성녀, 베아트리스 상티모니아.”
아리아드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부패와 타락의 상징인 상티모니아라는 성(姓)을 짊어진 채 가지고 있던 권력과 이권을 모두 내려놓고 성 상티모니아가 행한 악업을 고발하는 데 가장 앞장선,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이자 살리바의 마지막 성녀라 불리는 자의 이름이었다.
하, 아무리 대단하다 칭송받는 사람이면 뭐 하나. 지금 달로아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일감에 불과했다.
“베, 베아트리스 님께서?”
그 일감이 누군가에겐 대단한 행운인 듯 레이먼드가 얼굴을 붉힌 채 되물었다.
“열흘 뒤에, 베아트리스 님이, 페렌트에…….”
레이먼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방금 얻은 정보를 중얼거렸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너무 이르잖, 아니, 열흘이면 늦나,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 아니, 이른 것 같기도…….”
정신 나간 듯한 헛소리는 덤이었다.
“레이, 너 고장 났어?”
이건 삐걱대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리아드네의 사촌은 어디 한 군데가 고장 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지나치게 늦게 찾아온 첫사랑은 딱 그만큼 지독했다.
달로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집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휘적휘적 걸었다. 하루가 자신이 감당하기엔 지독하게 길고, 책상에 쌓인 서류를 처리하기엔 너무 짧았다.
* * *
탁탁, 서류를 정리하는 달로아의 손짓이 더없이 경쾌했다.
“나 폐하께 보고.”
보좌관에게 제 행선지를 알린 달로아가 가뿐한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나섰다. 며칠째 야근을 하는데도 서류에 빼곡히 적힌 이름들만 떠올리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젠 다 죽었어.’
달로아의 손에 들린 건 귀족원에 이름 올린 이들의 약점과 그것을 이용할 방법을 정리한 보고서였다. 보완할 것들이 좀 남긴 했지만 일주일 새 이만한 진전을 이룬 스스로가 몹시 자랑스러웠다.
‘난 천재 아닐까? 아무래도 천재 맞는 것 같아.’
콩콩, 춤을 추듯 걸어가 왕의 내실에 도착한 달로아가 활기차게 들어서며 말했다.
“폐하, 하명하신 목줄 대령입니다!”
척, 자랑스럽게 내민 보고서를 보며 내실에 있던 사람들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내실에 아리아드네 혼자가 아니었음을 안 달로아가 머쓱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 총 단장님도 계셨네요.”
내실에는 커티스 리스벨이 들어 있었다. 메르디에스 기사 단장이었던 커티스는 왕궁 기사단의 총 단장이 되었다.
달로아의 인사를 받은 커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정무 대신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커티스는 한참 어린 달로아에게도 늘 깍듯했다. 리스벨은 메르디에스가 가장 신뢰하는 가문이니 가진 권세가 적지 않은데도 그랬다.
“세상 사람들이 다 단장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직하고, 성실하고, 청렴하고, 무엇보다 조용했다. 달로아는 침묵의 가치를 나날이 깨닫는 중이었다.
“그거나 줘 봐.”
달로아의 방정을 구경하던 아리아드네가 손을 내밀었다. 달로아는 보고서를 내밀며 커티스가 신경 쓰이는 듯 힐끔 돌아보았다.
“단장님과 할 이야기는 다 끝나셨어요? 제가 기다려도 되는데…….”
“아, 백작님께선 여기서 아버지 기다리시는 거야. 같이 저녁 하기로 해서.”
보고서를 받아 든 아리아드네가 빠르게 훑어 내렸다. 내실에는 종이를 넘기는 팔락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곧 검토를 마친 아리아드네가 탁자 위에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진행이 빠르네?”
“제가 좀 유능하잖아요?”
달로아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도 무언가를 고민하듯 말없이 손끝으로 보고서를 두드리던 아리아드네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상대를 꺾을 생각만 해? 리뮈르 세력을 키워 볼 생각은 없어?”
달로아가 건넨 보고서에는 상대의 약점을 공략해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내용만 담겨 있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리뮈르의 세력을 키우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망설이듯 입술을 깨문 달로아가 이내 한숨처럼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허락 안 하실 거예요.”
리뮈르 또한 페렌트 내전의 승리자였다. 하지만 잠시의 승리가 그들의 오랜 상처마저 지울 순 없었다.
리뮈르는 자신들의 땅을 케이루스로부터 지켜 냈으니 이것으로 끝이라는 듯 다시 그들의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어떤 영광도, 이권도 자신들의 몫이 아니라는 듯.
“난 네 뜻을 묻는 거야.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여 중앙 정계에 남았을 때는 그만한 목표가 있었을 거잖아.”
무엇을 욕심내고 싶지 않은 달헤임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체념을 이대로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더 이상 메르디에스만의 주인이 아니었으니까. 리뮈르는 페렌트에 속한 땅이었고, 그녀는 페렌트의 왕이었다.
그러니.
“리뮈르가 누렸어야 마땅한 것들을 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 그건 탐욕도, 변절도 아니야. 빼앗긴 걸 되찾는 과정일 뿐이야.”
페렌트의 과오는 곧 자신의 잘못이고, 리뮈르의 부당함은 곧 자신의 억울함이어야 했다.
“저를 중용하신 건 리뮈르가 왕도에 세력이 없는 공작가라서가 아니었나요?”
실질적인 권력은 없으면서도 명성만은 넘쳐 허수아비로 내세우기 딱 좋은 이름. 달로아는 그 이름이 리뮈르의 가치가 아니냐고 물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네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지만, 네가 리뮈르의 혈통인 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순 없지. 나는 리뮈르에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달로아 리뮈르, 날 이용해. 날 이용해서 리뮈르의 권리를 되찾아.”
아리아드네는 답했다. 그 이름이 가졌어야 마땅한 권리를 되찾으라고.
“리뮈르를 향한 화살이 결국에는 폐하께 닿을지도 모르는데요.”
그것은 괜찮겠냐는 염려인 동시에 그래도 이 말을 거두지 않을 거냐는 탐색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때 많이 해 먹으라는 거잖아. 욕은 내가 대신 먹을 테니까.”
“……저, 진짜 많이 먹을 건데요?”
“그렇게 해. 내가 너 먹는 거 하나 감당 못 할까.”
그만한 각오도 없이 널 내 곁에 뒀겠어. 아리아드네의 말을 들으며 달로아는 제 앞의 서류를 챙겼다. 해야 할 일이 늘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하지만, 그것이 버겁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제부턴 정말 나를 위한 일이라 그런가.’
아무래도 자신은 아리아드네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캐롤린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보다 제 목숨이, 제 가족이, 제 욕망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같은 목표를 바라보되 아리아드네의 사고에 함몰되지 않는 것.
이런 걸 동지라고 하나. 서류를 다 챙긴 달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께선 내일 떠난다고?”
막 인사를 하고 내실을 떠나려던 달로아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대답했다.
“네, 아버지께서 혼자 고생하고 계시니까. 어머니 건강도 그렇고.”
혼자 왕도에 정착한 달로아를 걱정해 이곳에 남았던 달미에르가 리뮈르로 떠나는 것이 바로 내일이었다.
“그래, 내일은 나도 배웅 나갈게. 혹시라도 나 몰래 도망가지 말라고 전해 줘.”
“네, 뭐…….”
대답을 마친 달로아가 이젠 정말 내실을 벗어나려던 바로 그때였다. 콰앙! 마치 문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누군가 들이닥쳤다.
왕의 내실에 침입자처럼 방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 달로아는 ‘그럼, 그렇지.’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아버지?”
선대 메르디에스 공작이자 왕의 부친인 레너드 메르디에스였다.
“너,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면!”
“성, 성주님!”
마치 도적 떼에게 돈이라도 뜯긴 듯 노성을 터트리는 레너드 뒤로 캐롤린이 다급히 들어왔다.
“캐롤린? 언제 왔어? 왔으면 바로 나 보러 오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캐롤린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리아드네가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리아, 그게…….”
그에 비해 캐롤린의 얼굴엔 난감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딱 봐도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전 그럼 가 보겠습니다.”
어서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달로아는 냉큼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왜 저녁 같이 안 하고?”
“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할 게 있어서.”
“그래. 그럼.”
아리아드네의 선선한 대답에 그제야 달로아를 발견한 레너드가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탁, 내실이 외부와 단절되자 아리아드네가 흉흉한 기세로 콧김을 뿜어내는 레너드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정말, 내가 살다 살다―”
“성주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초조해하던 캐롤린이 레너드를 불렀다. 캐롤린은 레너드에게도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낮은 한숨을 흘린 레너드가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캐롤린, 난 네가 현명하고 강한 아이인 걸 안다. 하지만 네가 강한 사람이라고 해서 네게 일어난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할 이유가 있니? 네가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캐리, 이게 다 무슨 말이냐?”
커티스까지 가세하자 캐롤린은 더는 도망갈 구석이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캐롤린은 레너드가 이렇게 화가 난 이유를 망설이듯 풀어 놓아야 했다.
“하아, 그러니까, 레이놀즈 백작 부인이 추수제 전에 캐롤린을 찾아와 그 행패를 부렸다고요?”
가장 먼저 침묵을 깨트린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추수제 직전, 캐롤린 혼자 메르디에스 성에 남았던 그때, 캐롤린과 캐롤린의 생모 마거릿 레이놀즈가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한 하녀가 있었다.
이것이 메르디에스 성의 내정을 총괄하는 글레나의 귀에 들어가 레너드까지 알게 된 것이었다. 왕궁에 든 캐롤린과 만난 레너드가 글레나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곤 넌지시 물었다.
―캐롤린, 너, 그, 그해 추수제 직전에 말이다. 그때, 네 어머니가 널 찾아왔다면서?
마거릿 레이놀즈의 성품이라면 레너드도 익히 알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져야 하고, 마음에 품은 말은 무엇이든 뱉어야 하는 그런 여자였다.
내내 외면하긴 했지만 잘 자란 캐롤린을 보고 문득 욕심이 나기라도 한 걸까. 마거릿이 하는 양이 마뜩잖았으나 이건 캐롤린이 결정할 일이었다.
―성주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메르디에스 성에서 만났잖니. 내 집에서 일어난 일인데 내가 모를 순 없지.
레너드가 아는 건 마거릿이 캐롤린을 찾아와 둘이 만났다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레너드가 그날 나눈 대화까지 다 알고 있다고 오해한 캐롤린의 자백 아닌 자백으로 일의 전말이 밝혀진 것이었다.
“그걸 이제껏 말 안 하다가 아버지께서도 오늘 알게 되신 거고요?”
아리아드네가 재차 확인하자 레너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린 아리아드네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캐롤린, 왜 말 안 했어.”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인데. 오래전 일이라 그냥 잊었던 거야.”
캐롤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리스벨 영애, 혹여 내게 서운한 게 있다면 내가 사과할게요. 그러니 엘리는 미워하지 말아 줘요. 그 아이가 잘못한 건 없잖아요?
평생 남처럼 굴던 생모가 캐롤린이 이부동생을 괴롭히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며 그녀를 찾아왔던 일은 다시 생각해도 불쾌했다.
갓 성년이 된 영애를 괴롭히지 말라는 당부를 하다니. 캐롤린을 온전한 타인으로 여겼다면 그런 무례를 저질렀을 리 없었다.
결국, 마거릿은 캐롤린을 자신이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다고 믿은 거다. 캐롤린이 자신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쾌한 기억이긴 했지만 캐롤린에게 그 일은 되새길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별일도 아니잖아. 그냥 해프닝―”
“별일이 아니라니! 너 나한테 그런 일이 있었어도 별일 아니라고 그럴 거야?”
하지만 캐롤린의 해명이 눈이 반쯤 뒤집힌 사람들에게 순순히 통할 리가 없었다.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리아, 나 정말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캐롤린이 진땀을 흘리며 아리아드네를 달래던 그때였다.
“캐리, 나 때문이냐? 나 때문에 네가…….”
커티스의 침통한 목소리가 캐롤린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아, 아버지. 아니에요.”
차마 커티스를 마주 볼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은 캐롤린이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부정했다.
“그럼 나 때문에 말 못 한 거야? 나랑 레이놀즈가 틀어지기라도 할까 봐?”
레이놀즈는 메르디에스의 기반인 남부의 고위 귀족이었으니 아리아드네에게도 주요한 인맥이었다.
“아니야, 그런 거 정말…….”
하지만 캐롤린이 구태여 그날의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런 계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 나 때문이냐! 내가 찾아가서 깽판이라도 칠까 봐?”
커티스, 아리아드네에 이어 레너드까지 자기 때문이냐며 캐롤린의 대답을 채근했다. 정말, 왜 그랬는지 몰라서 묻는 걸까. 캐롤린은 불과 십여 분 사이에 삼 일 밤을 샌 것처럼 피곤해졌다.
“……제가, 제가 다 잘못했어요.”
캐롤린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힘없이 중얼거리자.
“넌 아무 잘못 없어!”
아리아드네가 몹시 분개하여 외쳤다. 그 옆에서 레너드는 백번 옳은 소리라는 듯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고, 커티스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붉어진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이럴까 봐 말 못 한 거잖아요.’
세 사람의 성화에 영혼이 반쯤 나간 캐롤린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 * *
“하, 진짜 내가 진작 엎었어야 했는데. 하긴, 이제라도 안 늦었지. 넌 아무 걱정 하지 마.”
“진짜, 누구한테 그딴 헛소리를! 캐롤린, 걱정 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하마.”
메르디에스 부녀가 나란히 걱정 말라며, 다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캐롤린은 더는 말릴 힘도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캐리, 넌 정말 괜찮으냐?”
그때, 커티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펄펄 뛰는 메르디에스 부녀와 달리 커티스는 내내 침중한 낯이었다. 분노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커티스는 캐롤린을 잃었던 그 일 이후로, 딸을 대할 때면 몹시 조심스러워졌다. 마치 잘못 손대면 다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캐롤린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펄펄 날뛰는 아리아드네와 레너드부터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까지. 이것보다 더 따스한 풍경은 없을 것 같았다.
캐롤린은 커티스의 손을 잡았다. 두껍고 다부진 무인의 손. 언제나 그녀를 지켜 주었던 아버지의 손이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웃으며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왜 갑자기…….”
캐롤린은 갑자기 쏟아진 눈물이 당황스러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 미안하구나.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널 혼자 둬서…….”
커티스는 우는 딸을 차마 안아 주지도 못하고 캐롤린에게 잡힌 손만 움켜쥔 채로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냈다.
“저 슬퍼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
황급히 고개를 든 캐롤린이 남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정말 그 일은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 일에 다들 이렇게 마음 써 주시는 게 기뻐서, 그래서 눈물이 났어요. 저, 차라리 들키길 잘한 것 같아요.”
제 작은 상처에도 호들갑 떠는 주위 사람들의 애정이 기뻐서, 따스한 일상이 행복해서 흘린 눈물이었다.
“캐롤린, 그게 어떻게 아무 일도 아니야. 말만 해. 지금이라도 당장 법정에 세울게.”
아리아드네는 아직도 앙갚음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법정 운운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몇 마디 나눈 게 다인데, 무슨 명목으로 법정에 세우겠단 거야. 그러지 마. 난 네가 오래오래 이름이 남는 왕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네 이름에 흠이 남는 건 싫어.”
“널 위해서라면 한 번쯤 폭군으로 기록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네가 싫다고 하니 잘 엮어 볼게.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캐롤린의 만류에도 아리아드네는 좀처럼 포기를 몰랐다.
“캐롤린, 이번 기회에 메르디에스로 입적하는 게 어떻겠니.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너한테 다신 그런 헛소리 못 하도록 말이다.”
거기에 레너드는 한술 더 떠 입적을 들먹였다. 왕가의 일원이 되면 더는 그런 시비가 없을 거라며.
“제 딸을 뭐 어쩌시겠다고요?”
“캐롤린을 제 호적에 올리라는 말씀이세요? 그건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유진의 의사를 물어봐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발하는 커티스와 레너드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리아드네까지 뒤섞여 왕의 내실이 난장판이 되었다.
“캐롤린은 제 딸입니다! 리스벨이란 성과 어울리는 이름을 짓느라 제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한 줄 아는 분이 그런 말을 하십니까?”
난장판의 정점은 커티스가 메르디에스라는 성과 캐롤린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극구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헛소리의 향연에 정신이 든 캐롤린이 사람들을 말렸다.
“다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 나이가 몇인데요.”
당사자의 거절에 커티스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젠 일가를 이룰 나이잖아요.”
하지만 곧 이어진 말에 커티스는 어쩐지 시무룩한 기색이 되었다.
“자식 키우면 다 그런 거지, 뭐. 힘내게.”
“…….”
레너드가 커티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지만, 커티스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레너드의 손을 떼어 냈다.
캐롤린은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잠시 구경하다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아리아드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소한 걸로 시비 거는 레너드와 철저히 무시하는 커티스의 모습이야 두 사람에겐 새로울 것도 없었다.
“아, 저 그렇잖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어요, 폐하.”
캐롤린이 마지막 단어에 강세를 주며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나? 공식 석상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불러? 무섭게.”
아리아드네가 부러 엄살을 떨며 대꾸했다.
“저, 승작시켜 주세요.”
갑작스러운 캐롤린의 말에 레너드와 커티스마저 아웅다웅하던 것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제 입으로 말하긴 조금 쑥스럽지만 그 정도 공은 세운 것 같아서요.”
곰곰이 캐롤린을 들여다보던 아리아드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거고. 그거면 돼? 다른 건 필요 없어?”
뭐든 퍼 줄 기세라 캐롤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레너드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짝 다가왔다.
“그런데 누가 뭐라 하든? 메르디에스에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작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 않았니?”
논공을 하는 과정에서 시종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상을 내리지 말라 주장한 것은 바로 캐롤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입장을 바꾸니 그 이유가 궁금할 만도 했다.
“아, 알버트 일로 좀…….”
캐롤린이 뒷말을 망설이자 커티스가 냉큼 입을 열었다.
“내 눈치 볼 거 없다.”
커티스는 이미 알버트를 인정한 지 오래였다. 죽은 딸을 다시 만났는데, 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버트의 심성과 재능만큼은 캐롤린과의 관계를 알기 전에도 인정했던 것이고.
“누가 알버트더러 여자 하나 잘 물어서 그 자리에 앉은 거라고 하길래요.”
그 말을 다시 떠올리는 듯, 캐롤린의 목소리에서는 서늘한 예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차피 그런 말 들을 거라면 정말 그런 자리에 앉혀 주고 싶어서요. 무엇보다 공작의 부군 정도 되면 면전에선 그런 말 듣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알버트는 내전에서 바랄 남작을 죽인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 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알버트를 둘러싼 소문을 모두 막아 내긴 무리였다.
캐롤린은 자신의 연인을 지켜 줄 더 크고 튼튼한 울타리를 갖고 싶었다.
“너무 불순한가요?”
사람들의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캐롤린은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커티스는 정말 딸이 제 품을 벗어나 홀로 설 시기가 되었음을 깨닫고는 속이 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딸에게 해 준 게 없는 것 같아 더 그랬다.
어색한 분위기를 타개하려는 듯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의 두 손을 답삭 잡으며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권력을 쥐는데 순수하고 불순한 게 어딨어. 그렇게 잡아서 이상하게 휘두르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자신을 붙든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캐롤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리아, 너 그거!”
“아, 봤어?”
아리아드네가 뽐내듯 손가락을 쫙 펴 캐롤린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아리아드네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반짝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예쁘다. 드디어 말한 거야?”
캐롤린은 그것만으로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박에 알아냈다.
“응. 그런데 유진이 번거로운 거 싫다고 약혼식은 생략하자 그래서 조만간 정식 약혼자로 공표만 하려고.”
좋다고 자랑하는 아리아드네를 보니 레너드는 괜히 심통이 나 불퉁하게 말했다.
“너는 그런 걸 결정하면서 아비한테 말도 없이…….”
“유진이랑 결혼할 줄 모르셨던 것도 아니면서, 그만 툴툴거리세요. 그 사람이 불편해하잖아요.”
“그게, 그게 불편해하는 얼굴이냐? 석상도 그것보다 표정이 많겠다, 쯧.”
레너드가 본 유진의 표정은 단 셋뿐이었다. 평범한 무표정, 조금 찌푸린 거의 무표정, 한쪽 입꼬리를 올린 것 같은 비웃는 듯한 무표정.
“아버지, 눈썰미가 예전만 못하신 거 아니에요?”
“뭐? 넌 그게 아비한테 할 말이니?”
“못할 건 또 뭐예요.”
허, 한마디도 지지 않고, 그것도 제 남편 될 사람 편만 들다니. 레너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이 결혼 반대할 줄 알아!”
“아버지는 뭐 저한테 허락 맡고 결혼하셨어요?”
정말 이것이 페렌트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라기엔 믿기지 않는 수준이었다.
“너, 내가 그렇게 맞는 말만 하지 말라 그러지 않았니?”
하지만 저 헛소리조차 레너드에겐 그럴듯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아버지 딸인 걸 어쩌겠어요.”
그리고 그 유치한 말싸움은 서로를 칭찬하는 건지, 공격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로 끝이 났다.
언제나처럼 편하고, 유쾌하고, 즐거운 일상이었다. 캐롤린은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을 만끽하며 생각했다.
자신의 남은 인생에서 이보다 더 극적인 순간은 있을지라도, 이보다 더 충만한 순간은 흔치 않을 거라고. 기억에도 책갈피를 꽂을 수 있다면, 오늘이 적힌 페이지는 아마도 가장 자주 들여다보는 페이지가 될 거라고.
그녀가 다시 태어난 페렌트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 * *
봄이 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듯 때늦은 눈이 내렸다. 엷게 쌓인 눈 위로 푸릇푸릇한 새순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편지해.”
달로아가 말 안장을 정리하는 달미에르의 주위를 맴돌며 채근하자 달미에르가 달로아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리며 성의 없이 답했다.
“알았어.”
“아, 진짜 너 짜증 나.”
달로아가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달미에르를 향해 발길질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기민하게 움직여 달로아의 발길질을 족족 피했다.
“잘됐네. 이젠 짜증 나는 사람 안 봐도 돼서.”
달미에르는 끝까지 얄미운 말을 뱉으며 이별의 허전함을 털어 버렸다. 이별의 순간이 지나치게 진지한 건 싫었다. 이대로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그의 희끄무레한 눈동자가 누군가를 찾듯 좌우로 움직였다.
“살펴 가세요. 공작과 공비께 안부 전해 주시고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리아드네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신이 바라는 애정은 한 톨도 주지 않을 거면서, 꾸미지 않은 다정함은 넘치도록 퍼붓는 무자비한 폭군.
“그럼, 대관식 날 뵙겠습니다.”
달미에르가 천천히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페렌트의 왕에게, 그를 속박하였으나 소유하려 하지 않는 그녀에게.
“왕도에서 리뮈르를 다시 만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지요. 나와 페렌트는 리뮈르를 맞이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대관식만을 이르는 것이라기엔 묘한 말이었다. 그보다 더 먼 미래를 도모하는 것 같은.
어쩌면 그것은 리뮈르가 끝끝내 드러내지 못했던 욕망일지도 몰랐다. 희생하지 않아도, 웅크리지 않아도, 무언가를 욕심내도 비난받지 않는 것.
달미에르는 생각했다. 언젠가 일방적인 제 애정이 끝나는 날이 오더라도, 그것이 그리 슬플 것 같진 않다고.
아릿한 달콤함이 그의 혀끝에서 맴돌았다. 몸을 일으킨 그는 짧게 묵례하고 말 고삐를 쥔 채 뒤로 물러났다.
과거의 아리아드네에게 달미에르는 리뮈르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눈의 전사들’이란 연극의 등장인물로만 존재했던 사람이었다. 어떤 얼굴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던 사람.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몇 줄의 정보로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느슨하게 묶은 붉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 마른 듯 단단한 몸, 조금 느린 듯한 걸음. 그는 아리아드네의 세계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리아드네와 같은 적을 두고 싸운 우군이자, 달로아의 가족이고, 그녀에게 넘치는 호의를 보내 준 사람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곧 떠날 달미에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언제나처럼 말이 없는 소르체의 수호자 시안이 아리아드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 이대로 이별인가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시안은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공자님과 함께 리뮈르에 가 보려고 합니다.”
시안은 달미에르와 함께 리뮈르행을 결정했다. 그녀는 리뮈르 제일의 검사라는 공비의 명성에 흥미를 느꼈다고 했지만, 그 결정이 공비의 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었다.
“대관식에선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리아드네의 대관식은 가을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훌쩍 떠난 시안이 다시 돌아올까. 그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공국으로의 독립을 준비하는 소르체처럼 그들의 동행은 끝났고, 시안에게는 그녀가 가야 할 길이 있었다.
“약속은 드리지 못하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시안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걸렸다.
“그럼.”
짧게 묵례한 시안이 달로아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마다 마음 한쪽이 허전해졌다. 아리아드네는 마침내 마지막으로 미뤄 둔 사람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리카르도 경도 함께 떠나신다고요? 아쉽네요. 왕도에 남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말이죠.”
리카르도는 성 상티모니아에서 어떤 처분이 내려지기도 전에 스스로 성기사단 부단장직을 내려놓았다. 아리아드네는 소속이 불분명해진 리카르도에게 여러 가지 제안을 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귀별 숲에서 아그네스를 저버린 이후로 한동안 말조차 잃은 사람처럼 침잠했다. 그런 리카르도가 그나마 대화를 나누는 이가 달미에르였으니, 그가 리뮈르로 가는 것은 당연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폐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부르고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침묵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사이에 봄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바람이 두어 번 크게 스쳐 갔다.
“저는 폐하의 신하가 되고 싶습니다.”
오랜 망설임 끝에 그가 내놓은 말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떠나신다면서요? 리뮈르에 정착하신다고 들었는데…….”
리카르도는 리뮈르에서 만난 고아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인 달헤임이 그가 리뮈르에서 살 거처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제 신하가 되고 싶다니. 아리아드네가 의아해하자 리카르도가 단호한 목소리로 제 뜻을 밝혔다.
“페렌트에 뿌리내린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폐하의 신하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청컨대 불민한 저를 폐하의 신하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단호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겁내는 것처럼 꽉 쥔 주먹을 잘게 떨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그에게 했던 그 많은 제안들은 다 잊은 걸까.
“경의 말대로 페렌트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내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리카르도 경, 페렌트가 경에게 흡족한 땅이길 바랍니다.”
무기한 대여라는 과격한 방법으로 그를 끌고 다닐 때만 해도 생각지 못 한 일이었다. 그가 아리아드네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아리아드네는 그가 멀리 떠나는 것을 아쉬워할 줄은.
“제 남은 생은 폐하의 선정이 페렌트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까지 환히 비추길 기원하며 살겠습니다.”
“해이해지지 말란 뜻으로 새겨듣죠.”
아리아드네는 그의 덕담을 웃으며 받았다. 인사가 길어진 탓에 손끝이 시려 왔다.
“먼 길 갈 사람들이니, 아쉬워도 이만 보내 줘야 할 것 같네요.”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조급할 것 같아 아리아드네는 마지막 말을 골랐다.
“그대들이 보여 준 진심을 잊지 않겠습니다. 멀리 있어도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하겠습니다. 당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페렌트 내전은 끝났지만 아리아드네의 싸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러니 언제라도 날 보러 와 주면 좋겠네요.”
그리고, 동행은 끝났지만 그들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영원토록 바래지 않는 영광을 누리시길.”
세 사람은 아리아드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말에 올랐다. 아스라이 멀어진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도 아리아드네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엷게 쌓인 눈도, 눈 위로 고개를 내민 새순도 그대론데,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이들만이 없었다. 막이 내려간 연극 무대에 홀로 남아 텅 빈 관객석을 지켜보는 것처럼, 쓸쓸하고 고요한 날이었다.
* * *
엷게 쌓였던 눈은 세 사람이 리뮈르로 떠난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베아트리스가 페렌트 왕궁에 도착한 건 그다음 날이었다.
“아리아드네!”
베아트리스가 아리아드네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와 안겼다. 베아트리스의 구불구불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아, 이젠 막 이름 부르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베아트리스가 놀란 숨을 뱉어 내며 소리 죽여 물었다. 아리아드네는 미소 띤 얼굴로 베아트리스의 탐스러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어디서도 이름을 불리지 않는 쪽이 더 슬프지. 나는 여전히 나인데.”
아리아드네는 바라던 대로 페렌트의 왕위에 올랐고, 그것은 꽤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도 필요했다.
“어서 와, 베아트리스.”
아리아드네의 환영 인사에 베아트리스가 더없이 환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둘이서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는 동안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진이 물었다.
“별일은 없고?”
베아트리스가 안부를 묻는 유진을 새초롬한 얼굴로 흘겨보았다.
“그런 건 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을 수 없어?”
난데없는 비난에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아그네스는 베아트리스가 유진의 권속과 유사한 존재라고 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카나 여동생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어딘가 이상했다. 베아트리스는 그냥 베아트리스였다.
한 줌의 빛으로 사라진 디티이자 아그네스였던 존재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 그의 권능을 일부 공유하는 상대. 그리고, 아마도 그에게 유일할 혈육.
그런 베아트리스가 살리바에서 고군분투하며 애쓰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묻는 제 표정이 지나치게 무심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다만, 억울한 것은 베아트리스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제 마음이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유진 님. 무탈하신 모습을 뵈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에게 친근한 척 말을 붙이는 이 남자는 성 상티모니아에서 주교란 직함을 달고 있었던 안테로였다.
아그네스 사후, 성 상티모니아의 악행이 알려지며 프레모 대륙 일대는 혼란에 휩싸였다. 연일 성 상티모니아를 향한 비난이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했지만 예상외로 성 상티모니아가 지닌 영향력과 힘은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의 신전은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고, 각 신전은 그 지역의 유지와 밀접하게 결탁한 상태였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과 이권 때문에 믿음을 버릴 수 없는 이들이 뒤엉켜 혼란을 가중시켰다.
거기에 더해 아그네스의 추종자 일부가 귀별 숲에서의 일을 성 상티모니아를 박해하려는 페렌트의 음모라 주장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성도들은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했고, 혼란을 틈타 주도권을 쥐려는 세력들은 선동과 협잡질을 일삼았다. 성도 살리바는 날마다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고, 테러 또한 횡행했다.
그때, 전면에 나서 이가 바로 베아트리스였다. 베아트리스는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이자, 성 상티모니아의 마지막 교황 아그네스의 친딸로서 모든 비난을 감내하고 의무를 짊어졌다.
그녀는 성 상티모니아가 행한 악행들을 고발했으며, 이를 뒷받침할 증거와 증언들을 대중 앞에 명명백백하게 전시했다.
처음엔 베아트리스를 내세운 누군가가 아그네스의 명성을 깎아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며, 그런 것에 가담한 베아트리스를 비난하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귀별 숲에서 아그네스의 숨을 끊은 것이 베아트리스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여론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꼭두각시에서 어머니의 악행을 저지하기 위해 천륜마저 포기한 영웅이 되었다.
베아트리스의 주도로 종단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종단의 재산을 성도들에게 되돌려주자 그녀를 칭송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 기부 내역에는 교황의 친딸과 성녀라는 지위로 얻은 베아트리스의 사유 재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리바가 안정을 되찾은 뒤에도, 그녀는 자신이 가진 대중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베아트리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지역을 돌아다니며 마음이 다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그네스가 한 일이 성 상티모니아가 쌓아 온 악업을 최고조에서 터트린 것이라면, 베아트리스는 폐허가 된 땅을 갈아엎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싹이 자랄 수 있도록.
베아트리스가 대륙 곳곳에 퍼진 작은 신전을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한 이가 바로 성 상티모니아의 주교였던 안테로였다. 그가 베아트리스의 수행원 비슷한 역할을 시작하게 된 것은 ‘내 돈 먹고 싶으면 내 사람한테 붙어.’라는 아리아드네의 말 때문이었다.
안테로는 다음 추기경으로 가장 유력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인맥과 수완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권력을 탐하는 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는 금전에 몹시 취약했다.
안테로는 자신의 월급이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오는지,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심을 다해 베아트리스를 보필하면서도 유진을 만날 때마다 그를 치켜세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감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그를 유진이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도 보지 않았나?”
한결같은 냉대에도 안테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가 바란 것은 유진의 따스한 말이 아니라 든든한 지갑이었으니까.
“안테로, 자네가 이번에도 수고가 많았다지. 조금 전 내가 말한 건?”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폐하. 준비해 두었습니다. 안테로 님, 고단하실 테니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의 말에 안테로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아리아드네는 수고한 것을 말로만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페렌트의 앞날에 무한한 영광이 깃들길.”
안테로가 크게 몸을 굽혀 공손히 절하고는 시종을 따라 사라졌다.
“우리도 들어갈까?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아리아드네의 권유에도 베아트리스는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풍성한 금발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모아 쥔 두 손과 동그랗게 뜬 눈, 상기된 표정까지. 꼭 어미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노란 병아리 같았다. 아, 어쩌면 둘 다 이렇게도 뻔한지. 아리아드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
베아트리스가 화들짝 놀라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아리아드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베아트리스를 내실로 잡아끌었다. 베아트리스는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아리아드네를 따라 걸었다.
“본격적인 외부 정화 활동에 나선다고?”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옷에 반쯤 파묻혀 있던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베아트리스는 그 말이 내키지 않는지 작게 인상을 썼다.
“정화, 라고 말하고 싶진 않은데…….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베아트리스가 곳곳에 흩어진 신전을 방문하여 갈등을 조율하고 사나워진 신심을 달래는 것을 사람들은 ‘정화’라고 불렀다. 그런 거창한 활동이 아닌데. 베아트리스는 뒷말을 웅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살리바 마지막 성녀님의 발걸음이 페렌트까지 닿다니, 이거 영광인걸?”
“그런 말 하지 마.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다들 떠받들어 줘서 너무 부끄럽단 말이야.”
아리아드네의 찬사에 베아트리스는 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처 가리지 못한 귀가 연분홍색이었다. 얼굴을 가린 베아트리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린 아리아드네가 다정한 얼굴로 마주 보았다.
“왜 한 게 없어.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
아리아드네는 언제나 베아트리스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곤 했다.
저 울타리에 속해 있으면 아무 근심 없이 행복할 것을 알았다. 자신에게 어떤 속박도,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을 알아 이대로 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더는 타인에게 제 삶을 의탁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갑갑하기만 했던 신전의 보호에서 벗어나 마주한 현실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험난했다.
“나, 이제야 알았는데, 열심히 하는 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아. 잘하는 게 중요하지.”
그때, 풀이 죽은 듯 고개를 떨군 베아트리스 위로 무뚝뚝한 위로가 툭 떨어졌다.
“잘하고 있어.”
그 말을 한 유진은 별일 없었냐고 안부를 묻던 얼굴 그대로였다.
“정말?”
베아트리스는 눈을 반짝 빛내며 되물었다.
“그래.”
재차 이어진 긍정에 기분이 좋아진 베아트리스가 입매가 잔뜩 휘어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유진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 이상해. 아리아드네가 사람 만들었나 봐. 저런 말도 할 줄 알고.”
사람 만들었다니. 예상치 못한 단어 선택에 아리아드네의 웃음이 터졌다.
“뭐? 베아트리스,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나도 요즘엔 듣는 게 좀 많아.”
베아트리스가 뻐기는 것처럼 가슴을 쭉 내밀었다.
“그래서 또 뭘 들었는데?”
“나, 욕도 많이 들었어.”
순간 걱정으로 일그러지는 둘의 얼굴을 보며 베아트리스는 푸스스 옅게 웃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서 밤에 잠도 안 오고 계속 생각나는 거 있지. 그런데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아.”
정말인데……. 두 번째 들었을 땐 좀 더 익숙해졌고, 열 번쯤 들었을 땐 더는 곱씹지 않았다.
“전에 아리아드네가 그랬잖아. 의무만으로 지키는 건 너무 버겁다고.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면 그때부터는 의무가 아니라고.”
적의에 반응하는 것은 본능일 텐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생겨서.
“나 이제야 살리바를 진짜 사랑하게 됐나 봐.”
사랑에 빠진 제 마음엔 미움을 둘 자리가 없어서. 그들의 미움조차 사랑했던 흔적임을 알게 되니 정말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내가 자란 살리바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
괜찮다는 말이 안심시키기 위한 위장이 아님을 알았는지 베아트리스를 보는 둘의 얼굴에서 근심이 가셨다.
아리아드네가 몸을 당겨 베아트리스와 눈높이를 맞춘 채 물었다.
“뭘 하고 싶은데?”
흔들림 없는 새파란 눈동자, 아리아드네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어.”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아리아드네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었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서, 늘 누군가가 필요했어. 혼자 꿋꿋이 바람을 견딜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까.”
제일 앞에서 거센 바람과 맞서는 것은 자신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 지나갈 거라고, 내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말하며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필요했어.”
누군가의 뒤에 숨어 거친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도, 그것도 모자라 불안한 자신을 달래 주길 바랐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지쳐서 위로와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지만 그런 자신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세상에는 나처럼 약한 사람도 많을 테니까.”
자신처럼 약한 사람들을 보듬어 안는 일.
속엣말을 모두 꺼내 놓고 나니 어쩐지 쑥스러워 아리아드네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겸연쩍어하며 손가락을 잡아당기는 베아트리스의 머리 위로 아리아드네의 손이 닿았다. 가볍게 내려앉은 손은 스치는 것처럼 닿았다 떨어졌다.
“베아트리스, 넌 약하지 않아. 그리고 설사 약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건 잘못이 아니야.”
차분하게 이어진 아리아드네의 말에 베아트리스가 잠시 할 말을 잃고 두 눈만 깜박였다.
“이런 거, 이런 걸 해야 하는데!”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게 이런 거라며 방방 뛰는 베아트리스를 보면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베아트리스를 볼 때면 솜털로 온몸을 뒤덮은 강아지나 갓 태어난 어린 새 따위가 자꾸만 생각났다.
아리아드네가 허물어진 얼굴로 편하게 웃으며 베아트리스의 일정을 물었다.
“이다음은 어딜 갈 건데?”
“음, 나 메르디에스도 다시 갈 거야. 이번엔 정말 제대로 보고 싶어.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아리아드네가 자랑했던 풍경을 제대로 못 봤거든.”
“그리고?”
쉼 없이 종알대던 베아트리스가 갑자기 입을 닫고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로튼?”
눈치 보듯 한참 후에야 꺼낸 지명에 아리아드네에게서 뜻 모를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하, 그 로튼?”
“안테로가 로튼에 있는 신전에 가 보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로튼에 갈 거면 레이에게 부탁해야겠네.”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덧붙인 말에 둘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진이 물었다.
“레이?”
“레이먼드 브래들리. 내 사촌 말이야. 로튼은 브래들리 백작의 영지거든.”
이어진 설명에 유진의 눈이 그제야 베아트리스를 향했다. 그의 눈이 무언가를 짐작한 것처럼 가늘어졌다. 유진이 평소 주위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렇지,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묘한 침묵이 어색한지 베아트리스가 제 손가락만 쥐어뜯던 그때였다.
“그렇지 않아도 곧 레이가 올―”
“아리아드네!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레이먼드가 곧 올 거라는 아리아드네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레이먼드가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왔네. 아리아드네가 문가에 선 레이먼드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레이먼드는 베아트리스를 발견하고는 돌처럼 굳어 문을 장식하는 조각이 되어 있었다.
“왔으면 들어와.”
아리아드네의 부름에 겨우 사람으로 돌아온 레이먼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깜박였다.
“성, 성녀님?”
말을 더듬는 꼴을 보니 아직 완전한 사람이 되진 못한 것 같지만. 마찬가지로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베아트리스가 이내 수줍은 얼굴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네, 네!”
저 의례적인 인사의 어느 부분에서 감격한 건지……. 상기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먼드를 보고 있노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내저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서서 목 아프게 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
아리아드네의 말에 레이먼드의 시선이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베아트리스를 향했다. 그는 매우 중요한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 허겁지겁 자리에 앉았다.
“아, 아프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레이먼드는 자리에 앉은 뒤에도 안절부절못하며 한참을 산만하게 굴었다.
“저는 내일 오시는 줄 알고, 그래서, 마중도 못 나간 건 정말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베아트리스를 마중하지 못한 것이 큰 죄인 것처럼 절절매며 변명을 늘어놓다가도.
“괜찮아요. 예정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건 전데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네, 신경, 신경 쓰지 않아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는 금세 기가 죽어 말이 없어졌다. 친절하지만 벽을 두른 것 같아 다가가기 어렵단 평을 듣던 레이먼드가 짝사랑 때문에 저런 꼴이 되다니.
아리아드네는 사촌의 삽질을 더는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수치를 느껴야 할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지켜보는 사람만 괴로웠다.
아리아드네는 레이먼드에게서 반쯤 몸을 돌려 그를 제 시야에서 차단했다.
“베아트리스, 살리바 대신전에서 나오는 건 언제야?”
“음, 연말쯤일까? 그 전에 나올 수 있으면 나오고 싶은데 아직 정리할 게 남았다고 해서…….”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영향력이 살리바 내에서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혹 이를 빌미로 성 상티모니아의 부흥을 꿈꾸는 이들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성 상티모니아는 이 땅에 남겨진 성물을 도구로 연명해 온 종교였다. 이미 끝난 수명을 억지로 연장하느라 성 상티모니아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너무 많이 했다.
그러니 자신은 살리바의 마지막 성녀여야 했고, 성 상티모니아는 그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잘못을 꾸짖는 목소리 또한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제 사욕을 채우기 위해 성 상티모니아의 이름을 끄집어내는 사람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래서는 또 같은 잘못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것을 막으려면 성 상티모니아의 행적을 낱낱이 전시할 역사관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베아트리스는 살리바 대신전을 내놓았다.
베아트리스는 이를 핑계로 적당한 시기에 살리바를 떠날 생각이었다. 제 이름이 누구의 무기도 되지 못하도록.
“빨리 나오고 싶다.”
베아트리스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을 지켜본 유진이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지금 당장이라도 너 하나 살 곳이야 내가 마련해 줄 수 있어.”
“정말? 그럼 나 유진만 믿고 내일 당장 나온다?”
베아트리스가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러든지.”
유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심드렁한 말투였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베아트리스가 자꾸 올라가는 양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눈을 반달로 접어 웃었다.
“베아트리스, 더 믿음직한 사람이 따로 있는데, 왜 유진을 믿어? 서운하게.”
샘이라도 내는 것처럼 아리아드네가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응?”
베아트리스는 무슨 뜻인지 몰라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레이먼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화들짝 놀란 레이먼드가 펄쩍 뛰어올랐다.
“아, 아리아드네!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이야!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응당 돕겠지만, 난 이런 일로 서운하다거나…….”
당황하여 아무 말이나 쏟아 내던 그가 자신을 보는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위화감을 느끼곤 하던 말을 멈추었다.
“……아, 니야?”
“유진이 아니라 날 의지하란 말이었는데……. 레이 너, 대체 무슨 오해를…….”
세상이 베아트리스를 중심으로 돌다 보니,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혼자 거한 삽질을 한 모양이었다.
레이먼드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상대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공략하여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는, 그런 연애를 할 줄 알았다. 난생처음 겪는 감정에 좌충우돌 온갖 곳을 들이받는 사고 같은 사랑을 할 줄이야.
아리아드네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레이먼드의 얼굴이 활활 불타는 것처럼 새빨개졌다.
“저, 제가, 그러니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구르는 레이먼드의 모습을 보며 베아트리스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청명한 웃음소리에 레이먼드의 얼굴은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잠시 뒤, 겨우 웃음을 그친 베아트리스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훔쳐 내며 말했다.
“나 언제 이렇게 믿을 사람이 많아졌지? 고마워, 아리아드네.”
채 지우지 못한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레이먼드도요.”
베아트리스가 덧붙인 말에 레이먼드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가 손을 들어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지금 이 순간 다시 사랑에 빠진, 제 얼굴을 누구에게도 차마 보일 수가 없어서.
레이먼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든 베아트리스의 얼굴에는 근심 한 점 없이 기쁨만이 가득했다.
“이번엔 마음만 받을게. 너무 냉큼 떠나 버리면 도와주기로 하신 분들이 서운해할 것 같아.”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
아리아드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드네는 다음에 크게 도와주면 되잖아.”
“그래 뭐, 기회는 많을 테니까. 너 결혼할 때라던가.”
“그, 렇지.”
아리아드네가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베아트리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평소 종종 나누던 화제를 대화에 올린 것뿐이었지만, 그것이 아닌 사람도 있었다.
“결, 결혼이요? 그러니까…….”
레이먼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통에 그의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가 반쯤 영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남은 말을 마쳤다.
“성녀님께서요?”
베아트리스가 내일 당장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레이먼드의 격렬한 반응에 베아트리스도 덩달아 어색해졌다. 베아트리스가 드레스 봉제선을 만지작거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왜, 나는 결혼하면 안 돼요?”
“당연히, 그런 건…….”
바보가 되어 버린 레이먼드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의미 없는 말만 중얼거렸다.
“당연, 당연히…….”
베아트리스는 그 말만 되뇌다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머뭇대는 레이먼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억지로 웃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행복했는데, 순식간에 발밑이 푹 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렇구나. 안 되는 거였구나…….”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아니, 너무 많이 들어 지겨운 말이었다. 레이먼드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레이먼드……. 그거 알아요? 성 상티모니아에 내 혼인을 제약하는 규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사제가 되고자 정절을 맹세한 이들과 베아트리스는 달랐다. 그녀는 넘치는 성력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성녀의 지위를 얻은 것이었고, 성 상티모니아 내 어떤 규율도 그녀의 혼인을 제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으레 그녀가 성혼(成婚)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베아트리스의 실체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각자가 생각하는 환상 속 성녀의 모습을 그녀에게 투사할 뿐이었으니까.
“어, 몰랐, 몰랐습니다.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아서…….”
몰랐다라……. 그것이 레이먼드의 잘못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서러운 걸까. 베아트리스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 안쪽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런데 왜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성녀’여서요?”
눈물을 억지로 참아 눈가가 뜨거워졌다. 열이 올라 마음에 품은 말들이 두서없이 쏟아져 내렸다.
“아, 혹시 레이먼드도 내가 성녀여서 친절했던 거예요? 나, 이젠 성녀 안 할 건데, 그럼 친절할 필요도 없는데…….”
“…….”
레이먼드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닫고 말았다. 좋아해서 그랬다고, 여기서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백이라니. 아무리 자신이 연애에 무지하다지만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고백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 주지. 그러면, 그러면…….”
베아트리스는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깨물어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또 착각했다. 웃으며 다정하게 대해 준 것이, 살리바에서 자신을 도와준 것이, ‘베아트리스’인 자신을 좋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앞으론 마음에도 없으면서 친절하게 굴지 마세요. 괜히 헷갈리니까.”
꾹 참았던 눈물이 끝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짜 울기 싫었는데……. 베아트리스는 붉어진 눈가를 마구 문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문질러도 눈물을 그칠 줄은 몰랐다.
“진짜, 진짜 싫어…….”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그 말만을 남기고 그대로 내실을 뛰쳐나갔다.
“…….”
베아트리스의 눈물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레이먼드는 베아트리스를 따라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신이 서투름이 다시 그녀를 상처입힐 것만 같았다.
경악으로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는 찰나의 침묵이 지나고, 아리아드네가 사람을 불러 베아트리스의 위치를 파악했다.
“레이, 너…….”
사촌 누이의 한숨 소리가 아니라도 그는 자괴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도 날 죽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니까.”
그때였다. 끼릭,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불길한 소음이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레이먼드는 이 불길한 소리를 내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레이먼드가 풀멘을 만지작거리는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당신 사촌이 저렇게 죽고 싶다는데, 내가 좀 도와줘도 돼?”
그를 바라보는 섬뜩한 회색빛 눈동자에는 그저 한심해하는 기색만이 가득했다. 저 서늘한 얼굴만큼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 아리아드네…….”
“언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간절한 그의 부름에 아리아드네가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말, 취소할게…….”
고백도 하기 전에 차인 것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찬 상대의 혈육에게 죽는다면 그건 너무 비참했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죽이면 안 돼.”
그녀의 만류에 유진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리아드네가 레이먼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쟤가 울린 건 베아트리스인데, 죽여도 베아트리스가 죽여야지.”
너, 정말 내 편이었구나. 레이먼드는 제 처분을 베아트리스에게 맡긴다는 아리아드네의 자비로운 판단에 감동했다.
“레이, 너 정말 성녀라는 후광 때문에 베아트리스에게 친절을 베푼 거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물끄러미 보던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당연히, 당연히…….”
뒷말이 목에 걸린 것처럼 도무지 뱉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하지만, 제 사촌 누이는 언제나 도망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좋아하니까…….”
타인에게 제 마음을 토로한 순간, 그가 품은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그 부피를 키웠다. 이대로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베아트리스를 만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레이먼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진짜 싫어…….
그 말을 하던 베아트리스의 우는 얼굴이 족쇄처럼 그를 붙들었다. 베아트리스도 자신을 보고 싶어 할까, 자신의 애정이 그녀에게는 달갑지 않은 폭력일까 두려웠다.
“그런데 안 쫓아가고 뭐 해? 이대로 놓치면 영영 못 잡을걸.”
“베아트리스가 싫어하면?”
“싫어하면 그때 그만두면 되잖아. 거절이 두려워 시작도 안 하겠단 말이야?”
“아니, 그럴 리가.”
거절은 두렵지 않았다. 백 번, 천 번이라도.
“사과를 드려야겠어.”
이제야 무엇을 해야 할지 흐려졌던 눈앞이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고백이니, 거절이니 그런 것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제 부주의로 베아트리스가 입은 상처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당신은 성녀가 아니어도 내 세상의 전부라고.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원하는 것을 할 권리가 있다고, 그것을 위해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든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 말을 해야 했다.
레이먼드는 나가려다 되돌아와 유진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무섭다고 언제까지나 도망칠 수만은 없는 상대였다. 저 남자는 베아트리스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니까.
“안 갈 거면 여기서 내 손에 죽든가.”
유진의 말에 레이먼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내실을 떠났다.
“저 바보가……. 어디로 갔는지나 물어보고 갈 것이지.”
아리아드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유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레이가 마음에 안 들어?”
어느새 풀멘을 갈무리한 그가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무슨 상관이야. 베아트리스가 좋다는데.”
베아트리스의 연인이 그의 마음에 들 필요는 없었다. 조금 전에는 레이먼드가 뻔한 답을 두고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망설이길래 등을 떠밀어 준 것뿐이었다.
“그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이 그의 이마와 콧날, 입술과 턱을 쓸어내렸다.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냥, 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더는 해 줄 게 없을 것 같아서.”
베아트리스에겐 늘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어떻게 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마음에 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바로 자식을 키우는 부모 마음일까?”
유진이 하는 말이 꼭 언젠가 레너드에게 들었던 말 같았다. 아리아드네의 엉뚱한 대꾸에 유진의 웃음이 터졌다.
“그게 대체 무슨…….”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벌렸다.
“당신에겐 내가 있으니까 쓸쓸해하지 말란 말.”
가느다란 손가락이 뭉개듯 짓이기고 지나간 자리에 그녀의 입술이 닿았다.
덜컹, 열린 창문 사이로 봄 마중을 떠난 바람이 돌아왔다. 바람에 고정해 두었던 끈이 풀리며 위쪽의 커튼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페렌트의 왕궁에 또 한 번의 겨울이 막을 내리고 봄이 열렸다.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이자 살리바의 마지막 성녀라 불리는 베아트리스 상티모니아는 살리바 대신전이 성 상티모니아 역사관으로 개관한 이듬해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그녀의 행적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전무(全無)하다.
혹자는 이것이 베아트리스 상티모니아가 당시 페렌트의 국왕이었던 아리아드네에게 제 기록을 말소해 달라고 요청한 결과가 아니겠냐고 추측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망상에 가까운 추측일 뿐, 어떠한 사료도 남지 않아 둘 사이에 정말 그런 거래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아그네스 교황 사후, 활발히 활동하다 갑자기 모습을 감춘 베아트리스 상티모니아의 선택은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야사를 낳기에 이른다.
살리바의 풍등 축제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목격담은 야사의 단골 소재 중 하나이다.
레이먼드 브래들리 일가족을 그린 초상화에 등장하는 금발의 여성이 베아트리스 상티모니아라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때 이것은 제법 그럴듯한 주장으로 여겨졌으나, 초상화에 등장하는 여성이 레이먼드 브래들리의 부인이자 구빈 구제 정책의 기틀을 세운 로레나와 동일 인물임이 밝혀지며 이 주장 역시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결국, 베아트리스는 살리바의 마지막 성녀라는 그 이름대로 성 상티모니아의 몰락과 함께 역사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추었다.
-발트 저, 프레모 신화의 종말 중에서.』
* * *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엔 어느새 봄의 기운이 완연했다. 날씨가 좋아 정원에 자리를 마련한 채 서류를 뒤적이던 아리아드네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몇 가지 서류만 처리하면 당분간 바쁜 일은 끝이었다.
‘서류에 파묻혀 죽을 순 없지.’
아리아드네는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수도 없고. 왕이 갖추어야 할 미덕은 부지런한 것이 아니다. 부지런한 사람을 잘 부리는 것이지.
아리아드네가 집권 초기 가장 몰두한 건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에 걸맞은 권한을 주는 일이었다. 그동안 고생하며 일한 것이 이제야 빛을 발했다.
유능한 인재들이 열심히 일해 준 덕분에 정국은 빠르게 안정됐다. 이대로라면 가을 대관식까진 좀 느긋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베아트리스와 레이는 잘 도착했으려나.’
한바탕 난리 끝에 마음이 통했나 했더니, 둘은 그길로 나란히 브래들리 백작의 영지인 로튼으로 떠났다.
베아트리스는 로튼의 신전에, 레이먼드는 본가에 볼일이 있다고 했지만 과연 그 이유만으로 로튼행을 결정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심약하고 여린 고모가 아들이 데려온 사람을 보고 놀라지는 않을까 잠깐 걱정되었지만,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니 베아트리스에게도 좋은 가족이 되어 줄 것 같았다.
베아트리스와 레이먼드라니. 과거에는 서로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갔던 인연이 우연한 계기로 단단히 엮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묘한 감회가 느껴졌다.
함께 자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촌이 사랑에 빠져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여 준 것도 그렇고.
두 번째 삶을 사는데도 처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인생은 언제나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실수는 반복되고, 슬픔은 불청객처럼 찾아오곤 했다.
해피 엔딩인 줄 알았던 연극이 비극으로 끝나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던 열 살 이후로 비극은 보지 않는데도 그랬다. 이상한 날이었다. 날씨도 좋고 모든 것이 순탄한데, 불현듯 슬퍼지는 게.
더는 침잠하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감겨 있는 아리아드네의 눈꺼풀 위로 솜털이 간질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자수정 빛 눈동자가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의 감촉에 눈을 가늘게 좁히자, 캐롤린이 제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여기서 주무시면 감기 들어요, 폐하.”
눈가를 곱게 접으며 장난스레 말을 하기에 아리아드네도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이게 누구야, 리스벨 공작이 아니신가.”
아리아드네의 대꾸에 캐롤린이 얼굴을 붉혔다.
“아, 왜 그래……. 정식 승작은 네 대관식 이후에나 진행될 텐데…….”
페렌트 내전에서 캐롤린과 리스벨이 세운 공을 인정받아 승작이 결정되었지만, 정식 승작은 아리아드네 대관식 이후로 미뤄졌다. 후작 이상의 작위 수여는 왕의 대관식이 예정된 해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법규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 잠든 거 아니었어. 잠깐 눈만 감은 거야.”
아리아드네가 느슨히 풀어진 몸을 당겨 앉아 탁자 위에 어지럽게 늘어진 서류를 정리해 한쪽으로 치웠다.
“봄이래도 아직 날이 차니까 조심해. 그리고 왕도는 메르디에스보다 더 춥잖아.”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아리아드네가 찻잔을 들었다. 막 뜨거운 물을 부은 찻잔에서는 김이 올라왔다.
“그런데 넌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리아드네가 차를 한 모금 삼키며 물었다. 따라 차를 마시려던 캐롤린이 찻잔을 도로 내려놓고는 제 얼굴을 더듬거렸다.
“티 나?”
“응. 눈 감고도 네 웃는 얼굴만 보일 만큼.”
그렇지 않아도 내내 웃는 얼굴이던 캐롤린이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 이번에 메르디에스에 내려갔을 때 스타드 백작님을 만났거든.”
저토록 기분 좋은 이유를 말해 줄 줄 알았더니. 아리아드네는 의아해하면서도 캐롤린과의 대화를 잠자코 이어 나갔다.
“잘 지내시고?”
“응, 요즘 페렌트 내전의 일을 회고록으로 남길까 하고 그때 기억을 정리하고 계신대.”
스타드는 페렌트 내전에서 남부 연합의 핵심 세력 중 하나였으니, 승리의 기록을 따로 남기고 싶을 만도 했다.
“그래? 좋은 일 하시네.”
“곧 궁으로 돌아간다니까 너한테 이것 좀 검토해 달라고 하시던데…….”
캐롤린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종이 뭉치를 건넸다.
“그래? 이게 뭐길…….”
아리아드네는 그것을 받아 뒤적이다 귀퉁이를 접어놓은 페이지에서 손이 멈추었다.
「곧은 등이 산 아랫마을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페렌트를 맡길 만큼 든든하면서도 홀로 이 모든 것을 버티는 것처럼 외롭게 보였다.
나는 그 등을 보며 물었다.
‘공녀께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 질문을 들은 폐하께서는…….」
아, 감탄사인지 한탄인지 모를 애매한 한숨을 흘린 아리아드네가 종이 뭉치를 덮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 정말 이렇게 말했어?”
캐롤린은 포장된 생일 선물을 앞에 둔 사람처럼 기대감으로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캐롤린이 내민 종이 뭉치는 스타드 백작이 쓰는 회고록의 초고인 듯했다. 그리고, 표시된 페이지의 원고는 남부 연합군의 진군 경로를 회의하던 날의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유월의 폭설로 캐롤린을 영영 잃었다고 생각했다. 눈(雪)이 또 자신에게서 누군가를 데려갔다고.
그날, 스타드 백작은 황금 대로를 따라 북상하여 잎새 평원에 진지(陣地)를 차리자고 주장했고, 아리아드네는 에움 산맥으로 우회하여 물새 협곡을 지날 것을 주장했다. 물새 협곡을 통과하기로 결정하고 전략 회의가 파한 직후, 자리를 떠나려는 아리아드네를 스타드 백작이 붙잡았다.
―공녀 저하, 저하께선 조금 전 내전 이후의 통치를 말씀하셨지요?
그날, 아리아드네가 물새 협곡을 통과하는 진군 경로를 주장한 것은 내전 이후 페렌트의 식량난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네, 내전의 승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니까요.
―혹, 무례하다 여기실지 모르겠으나…….
스타드 백작이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리아드네는 전략 회의 때 서로의 의견이 갈렸던 것을 떠올리고는 그녀가 제게 할 말이 남은 줄 알았다.
―저는 이 내전이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하께서 승리 이후의 페렌트를 생각하듯, 저 또한 승리 이후의 스타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스타드 백작이 꺼낸 이야기는 내전 이후 스타드가 무엇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다소 민감한 화제였다.
―스타드는 남부 연합군의 주축이니 승리에 걸맞은 영광을 누릴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약속을 할 수 없지만, 스타드는 물자 보급에 큰 역할을 맡은 주요 전력이었다. 당연히 적지 않은 보상이 따를 터였다.
―스타드는 지금 가진 것보다 더 큰 땅이나 더 많은 재물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충분하고, 더 필요하다면 응당 스타드의 힘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스타드의 이름이 저하께서 다스리는 페렌트에 오래도록 남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스타드의 충심을 대가로 저하께서 주실 수 있는 가장 영광된 것을 원합니다.
신하의 충심에 주군이 답할 수 있는 가장 영광된 것은 ‘신뢰’였다. 그리고 그것은 첫 번째 손을 이르는 다른 말이었다.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 그 자리는 언제나 리스벨의 것이었다. 하지만 리스벨은 후계자를 잃었다. 스타드는 그 공백을 자신들로 채우라 말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내전이 끝난 뒤에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덜컥, 스타드 백작이 그 자리를 떠나려는 아리아드네를 다급히 붙잡았다.
―저하, 그 자리를 바라는 것은 제 욕심이나 어서 그 자리를 채우시길 바라는 것은 순수한 충정에서 올리는 말씀입니다. 군주를 잃은 신하는 무너질 수 있으나, 신하를 잃은 군주는 무너져선 안 됩니다.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는 스타드 백작의 얼굴이 더없이 절실했다. 그 눈에 담긴 것이 욕심만은 아님을 아리아드네도 알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자신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나선 것이라는 것도.
―백작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상실에 무너지는 군주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말로 듣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진심 어린 충고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붙든 스타드 백작의 손을 떼어 냈다.
―저하, 붕괴는 작은 균열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균열을 제때 막지 못하면 제아무리 튼튼한 성벽이라도 무너지고 맙니다.
새로운 페렌트를 꿈꾸는 것은 이젠 아리아드네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무너질까 염려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백작께서 날 염려하는 마음을 알겠으나 그것은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그냥 그렇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들.
―내가 글레나를 의지한다고 해서 그녀의 딸이 될 순 없지요. 세상에 날 낳은 부모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애정이나 친밀감과는 별개의 일입니다.
낮이 되면 해가 뜨고, 밤이 되면 달이 뜨는 것처럼 부모나 자식을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캐롤린은 내게 그런 존재입니다. 내 어머니의 자리가 비어 있듯, 캐롤린의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뿐입니다.
의지나 노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저 제게 주어진 것을 삼킬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
―성벽을 보수할 때 처음 쌓을 때와 똑같은 돌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적당한 돌을 구해 자리를 채우고 진흙을 덧발라 남은 틈을 메우면 저희끼리 한 몸처럼 붙지요. 충분한 시간만…….
아, 그제야 스타드 백작은 제 실책을 깨달았다. 제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상대를 몰아붙인 꼴이었다.
―제가 너무 이른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닌데……. 그럼, 쉬십시오.
스타드 백작은 사과하듯 깊게 절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돌아서는 그녀의 등을 보며 한숨처럼 터져 나온 말이 흘러내렸다.
―백작님, 캐롤린이 죽은 그날, 내 일부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라면 그 끝은 비극이다. 어떤 말로도 이어 붙일 수 없는.
―너무 믿고 싶어서 내 목숨을 미끼로 삼아도 좋았던,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는 건 그 마음이 더는 내게 없기 때문입니다.
버릇처럼 날 지키겠노라던 네 약속, 고인 수프 위로 떨어지던 네 눈물, 날 안고 구르던 네 뜨거운 체온, 나를 부르며 죽어 가던 네 목소리.
―그 마음은 캐롤린과 함께 죽었으니까요.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이 건넨 종이 뭉치 속에서 그날의 대화를 발견했다.
「‘어찌하여 가장 신뢰하는 자와 그다음 신뢰하는 자가 같을 수 있습니까?’
‘내 신뢰는 모두 캐롤린에게 주어 남은 것이 없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더는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이 활자 위를 더듬는 것처럼 움직였다. 몇 줄의 활자로 그날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리아?”
자신을 부르는 캐롤린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었다. 캐롤린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아리아드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말했지.”
실제 나눴던 대화와 차이가 있었지만, 아리아드네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스타드 백작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것을 제게 보낸 것일 테고.
“그랬구나.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왜 좋지?”
캐롤린은 종이 위를 힐끔거리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캐롤린이 좋다면 그걸로 됐다. 아리아드네는 스타드 백작이 고심하여 보냈을 사과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널 위해 죽는 게 내 꿈이었는데, 그 꿈을 이루고도 살아 있다니……. 좀 이상한 기분이야.”
종이에서 시선을 뗀 캐롤린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끔, 선물처럼 받은 이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어.”
캐롤린에게 삶이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유월의 폭설’ 이후 그녀는 때때로 제 이름값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죽음으로 얻은 명예는 산 사람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위대했다.
“죽은 채로 끝났으면 비장하고 아름다운 순간에 박제된 채로 오래오래 이름이 남았을 텐데……. 내 남은 삶이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한 번씩 도망치고 싶어져.”
그래도 안 갈 거지만. 작게 덧붙인 캐롤린이 소리 없이 웃었다. 봄바람에 캐롤린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종이 뭉치를 덮으며 담담히 대꾸했다.
“캐롤린, 한 번은 배신해도 봐줄게. 그러니까 앞으로도 살아만 있어.”
“또 그 소리야? 그거 대체 무슨 말이야?”
캐롤린이 미간을 작게 찌푸리더니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어떤 아름다운 순간도 네가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만 못하다는 말이야.”
어떤 아름다운 기억도 눈앞의 캐롤린 같을 순 없었다.
“왕을 배신하고도 죽지 못하다니. 그거 너무 불명예스러운 삶인데?”
캐롤린의 불평에 아리아드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삶이 좀 구질구질하잖아.”
삶은 너저분한 조각을 얼기설기 엮은 천에 지나지 않는다.
비극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막이 내리지만, 우리의 삶은 정점이 지났다고 해서 끝이 나지 않는다. 때론 내리막길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의미 없는 하루를, 지겨운 일상을 살아야만 한다.
“나는 우리의 남은 삶이 아름다운 비극이기보다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희극이기를 바라니까.”
인생에서 기쁜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불행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지만, 그래도 오늘의 이 슬픔을 버티면 행복이 기다리는 것을 알기에.
“나랑 같이 오래오래 살아.”
삶은 내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