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142/148)
  • 외전 1. 미궁의 붉은 실

    솨아아, 솨아아아―

    물살을 가르는 지긋지긋한 소리가 쉼 없이 귓전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망망대해에 띄운 부표처럼 하염없이 흔들렸다.

    선실에 누운 유진은 남은 일수를 수없이 헤아리고 또 헤아려 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가 탄 배는 세상을 둘로 가르는 레니아해(海)의 한복판을 지나는 중이었고, 목적지인 브리아에 도착하려면 이 끔찍한 고통을 사흘은 더 견뎌야 했다.

    “……그 사람은 좀 어때?”

    두꺼운 문 너머로 그를 염려하는 듯한 한숨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전에 든 의원의 말에 따르면 약을 먹고 주무신다고 합니다.”

    문 앞을 지키는 기사의 대답에 여자의 한숨이 깊어졌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여자는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로 아무 말이 없었다.

    “겨우 자는 사람을 내 염려나 덜자고 깨울 순 없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놓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잠은 무슨,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진단할 줄도 모르는 돌팔이 같으니.

    유진은 제정신이 아닌 머리로 아리아드네와의 대면을 방해한 의원의 자격을 검증했다. 결과는 당연히 부적격이었다. 저런 모자란 자가 그녀의 건강을 책임지게 둘 순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저 의원을 아리아드네 곁에서 떼어 놓아야 하는데.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그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의식을 붙잡으려 노력할수록 도리어 깊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지긋지긋한 파도 소리마저 점점 멀어지고, 지독한 수마(睡魔)가 그를 덮쳤다. 꼭 이틀 만의 수면이었다.

    * * *

    뺨을 스치는 바람은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든 칼날 같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 숨겨진 회색 눈동자가 초조한 빛으로 일렁였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폐가 찢어질 듯했고 목에서는 피가 넘어오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그는 목으로 넘어오는 피를 삼키며 또 한 번의 시간을 멈췄다.

    ‘왕이 새 왕비를 들인다지? 소르체 출신이라던데…….’

    ‘그 소르체? 수호의 소르체가 그들 영지를 벗어난 게 대체 얼마 만의 일인지…….’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아니, 그럼 원래 왕비님은 어떻게 되는 거래?’

    ‘원래 왕비님이라니! 메르디에스의 그 마녀 말이야? 당연히 불에 태워 죽여야지. 메르디에스 성이 불탔을 때 진작 죽었어야 했던 목숨 아닌가.’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와 카이엔의 결혼식에 메르디에스 측 하객으로 참석했다가 도망치듯 그곳을 떠난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 떠나기 전, 그는 카이엔과의 거래를 받아들였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당신이 찾아 헤맨 물건이 이것 맞습니까? 드리지요. 대신 저와 거래를 하나 해 준다면.

    케이루스의 성물을 받는 대신 카이엔에게 그의 힘을 빌려주는 것이 그들의 계약이었다.

    ―세 번. 원하는 순간에 이것을 쥐고 있으면 시간은 네 뜻대로 움직일 거야.

    그는 카푸트의 머리카락을 세 뭉텅이 잘라 카이엔에게 건넨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그녀의 행복을 바란다고 해서 자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 남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불길하고 불쾌한 인간이라고. 그렇게 지껄였던 모든 말들이 제 저열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만 같아서 구역질이 났다.

    그자를 향한 불쾌함이 커질수록 제가 품은 마음에 대한 혐오도 깊어져만 갔다. 카이엔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이 불쾌함이 정말 그자를 향한 것인지,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쏟아 내는 굴절된 증오인지도 이젠 알 수가 없었다.

    꼭 이루어야 하는 목표가 있다는 것은 그에겐 몹시 다행이었다. 그것을 핑계 삼아 떠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200년 전, 이 땅을 멸하러 나타났던 존재에게서 우리를 구한 것은 바로 당신이 손에 쥔 ‘그것’입니다.

    그는 소르체의 가주에게서 카푸트에 얽힌 내력을 들었다.

    ―그날, 찢어진 신의 유해를 찾아 헤맨 자들이 있지요. 엘바의 랭스턴 공가는 그중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디움 너머의 저주받은 죽음의 땅 아르체에서.

    그렇게 찾아간 죽음의 땅 아르체에서 그는 잃어버렸던 기억과 마주했다. 신의 권속을 잡아먹고 괴물이 되어 버린, 죽지도 못하는 육체가 버거워 모든 걸 내던지고 도망쳤던 ‘레오’의 기억을.

    레오의 기억을 되찾은 그는 비로소 카이엔을 향한 불쾌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이엔 그자가 아르체 신관들의 피와 힘을 이은 자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도 모자라 모라의 그릇을 훔쳐 자신들의 성물로 삼았으니, 레오의 영혼과 페루스의 시간을 이어받은 그로서는 본능적인 불쾌함을 느끼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그는 카이엔을 죽일 마땅한 명분이 생겼음에 환희했고, 그것이 그녀의 불행이 되리란 사실에 절망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카이엔을 죽인 자신을 증오할 그녀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들끓는 증오를 이기지 못해 왕도로 향했다가 다음 날이면 그녀를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디티가 죽고 죽음 같은 잠에 빠졌던 그때처럼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그가 카이엔에게 건넨 카푸트의 머리카락, 그것이 그의 영면을 방해했다. 카이엔이 그의 힘을 빌려 쓸 때마다 그는 강제로 깨어났다. 카이엔이 계약한 세 번의 힘을 모두 쓴 그날, 또다시 강제로 각성한 그는 다시 잠들지 않았다.

    아르체의 지하 신전에서 잠들지도, 그렇다고 무엇을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루 같기도, 일 년 같기도 한 낮과 밤이 지나고 마침내 아르체의 지하 신전에서 벗어난 그는 페렌트의 왕도로 향했다.

    이것이 아르체의 마지막 신관을 이 세상에서 지우기 위한 것인지,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핑계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 되더라도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디티…….’

    그의 목숨을 취해 영원한 안식에 들려는 누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네게 죽음을 선물할 여자를 찾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헤매리라.’

    그토록 기다리던 죽음의 순간을 이제야 목전에 두었는데, 그것이 왜 이토록 서글픈지.

    페루스의 시간을 이어받은 그에게 삶이란 끝나지 않는 형벌이고 저주였다. 출구 없는 미궁을 헤매며 오로지 죽음만을 바란 삶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빛도 들지 않는 어둑한 생에 꽃이 피고 말았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괴물에게 걸린 저주는 괴물이 죽어야 비로소 끝이 나는 법이니까.

    영웅의 칼에 죽어야만 미궁을 벗어날 수 있는 괴물처럼, 그의 생에 욕심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뿐이었다. 그의 기나긴 삶에서 그것만이 변하지 않는 명제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었다. 먼 옛날 아르체의 신관들이 레오가 거둬들인 풍요 뒤에 찾아온 빈곤을 피해 도망쳤던 그 길을 따라 그는 꽝꽝 얼어붙은 아르체를 건너고, 우거진 산림을 지나 케이루스의 땅에 도착했다. 그곳에 선 그의 귓가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섞여 흘러들어 왔다.

    폐비, 메르디에스의 멸문, 국혼, 소르체의 왕비, 아리아드네, 처형.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었다. 아리아드네와 메르디에스는 카이엔을 왕위에 올린 일등 공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난잡한 단어들이 그녀와 그녀의 가문을 수식한단 말인가.

    귀가 울릴 정도로 심장이 시끄럽게 뛰었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왕도를 향해 달렸다.

    ‘살아만, 부디 살아만 있어 줘. 그러면, 그러면 내가…….’

    아리아드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아득한 두려움은 모라가 사라진 세상에 홀로 남았던 페루스의 절망과 닮아 있었다.

    오른쪽 가슴 아래 페루스의 심장이 그 두려움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점점 거세게 날뛰었다. 마치 제 존재를 알리려는 것처럼.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세계의 시간을 되돌리려면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 그는 요동치는 오른쪽 가슴을 꾹 눌렀다.

    ‘이따위, 이따위 것으로 당신을 살릴 수 있다면…….’

    미친 듯이 달려 왕도에 도착한 그가 맞닥뜨린 것은 왕의 새로운 결혼 행렬 위로 아리아드네가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왕은 아리아드네가 남긴 저주에 몹시도 분노하여 그녀의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유진은 그 사실에 절망했다.

    한쪽 팔만 남은 채로 끝없이 되살아났던 디티처럼, 아리아드네의 육체 중 손가락 하나라도 남았다면 그것의 시간을 되돌려 그녀를 되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살아난 아리아드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저 빌어먹을 왕을 그녀 앞에서 몇 번이라도 다시 죽여 줄 수 있었다.

    좀 더 일찍 도착해 살아 있는 아리아드네의 손에 모라의 그릇을 쥐여 줄 수만 있었다면, 페루스의 심장에 고인 시간을 써 그녀를 둘러싼 이 세계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건만 지금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신은 뼈 한 조각 남지 않았으니 육체의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었고, 페루스의 심장을 대가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그녀의 미래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세계의 시간을 되돌리는 대가로 바쳐진 페루스의 심장은 시간을 거스른다고 다시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다. 페루스의 심장을 잃은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겠지.

    결국, ‘유진’만이 사라진 세계에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는 같은 선택과 삶을 반복하게 될 테니.

    원하기만 한다면 이 세계의 신으로 군림할 수도 있는 남자는 지난했던 생애에서 유일했던 사랑조차 지킬 수 없었다. 아니, 지키지 못했다는 말은 기만이었다.

    자신이 카이엔에게 빌려준 힘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는데, 몰랐다는 말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제 책임을 지울 순 없었다. 자신은 아리아드네를 죽인 카이엔의 공모자였다.

    제 감정이 두려워 도망치듯 이곳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카이엔을 향한 불쾌함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기억을 되찾자마자 카이엔을 죽이러 이곳으로 되돌아왔더라면, 조금만 일찍 그녀를 찾아갔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놓친 모든 순간이 후회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유진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밤바다의 파도처럼 검고 구불구불한 긴 머리카락이 그의 눈앞에 후두둑 떨어졌다.

    “당신이 올 줄 알았어요. 여긴 리아가 죽은 자리니까.”

    고개를 든 유진은 역광 속에 선 여자와 마주했다. 어둑한 빛 그림자 속에서 여자의 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제 앞에 선 여자의 정체를 깨달은 유진의 눈에서 분노가 불꽃처럼 튀었다.

    “당신도 저 왕을 죽일 건가요?”

    몇 날 며칠을 이 자리에서 기다렸는지, 그 말을 하는 여자의 입술은 하얗게 말라붙은 채였다.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다는 듯 그가 여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오는 도중에 너에 대한 말도 들었지.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 리스벨이 남부의 지배자를 무너트린 일등 공신이라고.”

    아리아드네의 죽음에 자신 외에 또 다른 공모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눈앞의 이 여자였다.

    “네 손으로 버린 주인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유진의 비아냥에 캐롤린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제껏 내 목숨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내 목숨이 그나마 값어치 있었던 건 그렇게 여겨 주는 사람이 있어서였는데…….”

    자조 섞인 그 웃음은 떨어질 때를 놓치고 나뭇가지에 홀로 남은 잎처럼 황량한 데가 있었다.

    “값을 치러 줄 사람이라곤 남지 않았으니, 이제 내 목숨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하등 다를 게 없죠. 그런데도 온전히 내게 남은 건 이 목숨뿐이라서.”

    스산한 낯을 한 여자가 성큼 다가와 그의 손을 쥐었다.

    “당신에게 리아의 복수를 할 기회를 줄게요. 그러니까 당신 손으로 저 왕을 죽이고…….”

    잡은 손을 천천히 끌어당긴 캐롤린이 제 목을 감싸며 겹쳐진 손에 힘을 주었다.

    “나도 죽여요.”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린 유진이 제 손을 거칠게 떼어 내며 말했다.

    “죽고 싶으면 네 손으로 죽어. 남의 손 빌려서 자살할 생각하지 말고.”

    그는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를 향해 캐롤린이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난 알아요. 당신이 리아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어떻게, 라는 생각은 할 것도 없었다. 애써 감춰 두었던 너절한 욕망이 발가벗겨진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캐롤린이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따위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당신은 카이엔이 리아를 배신할 줄 몰랐던 그때도 저 개자식을 죽이고 싶어 했잖아!”

    캐롤린은 스스로의 분기를 이기지 못해 숨을 헐떡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픽,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은 그가 캐롤린의 목깃을 거머쥐었다.

    “……그러니까, 그 기회를 주겠다는 거예요.”

    목이 졸려 얼굴이 붉어진 캐롤린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네가 기회를 주지 않으면 내가 저치를 못 죽일 것 같은가?”

    “네.”

    인간들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그가 카이엔을 죽이든 말든, 저 여자의 뜻대로 움직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무래도 널 너무 오래 살려 둔 모양이야.”

    그가 캐롤린의 목깃을 틀어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달랑 들린 캐롤린의 양발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폐주(廢主)의 손발을 자르고 목을 베어 내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제 도움 따윈 필요 없겠죠.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괜찮으신가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여자는 변함없이 지껄여 댔다. 카이엔을 이미 몰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폐주(廢主:쫓겨난 왕) 운운하면서.

    “그건 사고와 다를 바가 없잖아요. 폐주에게 그런 편한 죽음을 선물하실 건가요?”

    마치 카이엔을 향한 복수만이 제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듯이.

    “폐주가 있어야 할 자리는 지옥의 가장 낮고 깊은 곳이어야 해요. 높고 화려한 저 왕좌가 아니라.”

    메마른 눈동자는 왕의 죽음을 말할 때만 살아 있는 것처럼 빛이 났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단호하고 결의에 찬 여자의 눈은 그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 자리는 저자의 몫이 아니었어요.”

    그가 자신과 함께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이었다. 여자의 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여자의 광기 어린 눈은 마치 제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으니까.

    아리아드네의 죽음에 일조한 두 공모자는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캐롤린의 목깃을 틀어쥔 그의 두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의 손에서 풀려난 캐롤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것은 두 공모자에 의한 또 다른 공모의 시작이었다.

    페렌트의 왕궁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마지막까지 궁에 남았던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고자 지른 불이었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들고 나르고, 남은 것은 더러워진 천 조각이나 도무지 옮길 수 없는 문과 기둥 같은 거대한 것들뿐이었다.

    깨지고 부서진 잔해들로 가득한 왕궁은 도굴꾼이 휩쓸고 지나간 빈 무덤 같았다. 잘그락, 폐허가 된 왕궁을 가로지르는 남자의 발아래에서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스러졌다.

    남자는 회랑을 지나쳐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남자의 손짓에 지키는 이 하나 없이 외롭게 선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약! 약을 더 가져오래도!”

    높은 왕좌에 앉아 흐느적대던 카이엔이 문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들더니 악을 써 댔다. 힐긋 카이엔의 모습을 확인한 남자는 두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허억, 헉헉.”

    카이엔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손과 발의 감각이 선명해졌다. 되돌아온 것은 감각만이 아니었다. 약 기운에 그나마 희미해졌던 고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으악, 으아아아악!”

    카이엔은 괴로운 듯 몸부림을 치며 온몸을 뒤틀었다. 사지 중 멀쩡한 곳이 없었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온갖 원한들이 그의 몸 곳곳을 헤집고 지나갔다.

    아직 그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이따위 약에 취해 있으면―”

    남자가 카이엔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그를 끌어 올렸다. 머리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부터 겪을 고통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잖아.”

    퍼억, 남자의 무자비한 발길질이 카이엔의 복부에 꽂혔다.

    “커헉!”

    카이엔은 내장이 모조리 조각나는 듯한 고통에 격한 신음을 토해 냈다. 그는 남자의 발길질에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왕좌에 반쯤 걸쳐진 꼴이 되었다.

    그때였다. 타앙!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누군가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폐주의 고통은 누구도 독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여자의 불평에 카이엔의 머리를 찍어 내리려던 남자의 발이 멈칫하더니 이내 내려갔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잖아.”

    남자의 담담한 대답에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가물거리는 눈을 떠 뒤따라 들어온 여자를 확인한 카이엔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캐롤린 리스벨?”

    카이엔의 부름에 캐롤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 너도 짐의 목숨을 노린 반역도 중 하나였나?”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키득대며 웃었다. 조금 전 차인 배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카이엔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 옥좌에 기대어 앉았다.

    아직 카이엔이 살아 있는 이유는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였다.

    카이엔에게 침을 뱉고 온몸을 칼로 헤집으면서도 사람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것만은 다른 사람의 몫이라는 듯. 마지막에 오는 자가 누구인가 했더니, 그것이 캐롤린 리스벨일 줄이야.

    “배신자의 끝은 배신이라더니, 과연 배신자다운 행보야.”

    카이엔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삶에 대한 집착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젠 정말이지 살아 있는 게 지긋지긋했다.

    끝나지 않는 고통이, 홀로 남은 외로움이, 희망 없는 삶이 그에게 차라리 죽음을 바라게 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아리아드네가 죽은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저만한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의 고통도 곧 끝이 아니겠는가.

    “아아, 캐롤린 리스벨.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 리스벨의 주인.”

    카이엔은 소중한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사람처럼 히죽대며 말했다. 약 기운은 사라졌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그럴수록 최근의 일은 무엇 하나 기억나지 않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만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점점 생생해졌다.

    아리아드네와 함께 왕좌를 노리고, 왕좌에 오른 뒤에 아리아드네의 수족을 끊어 냈던 그 아름다웠던 시절들.

    “아, 그러고 보니 네 동료들은 알고 있나?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걸.”

    사람들은 캐롤린 리스벨이 메르디에스를 무너트리는 과정에서 대단한 활약을 한 줄 알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가 겹겹이 짠 그물에 걸린 캐롤린이 아리아드네에게서 등을 돌리긴 했다. 하지만 그뿐, 그녀는 카이엔의 진영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알게 된 카이엔의 민낯을 함구하고 메르디에스에 닥칠 위험을 알면서도 방관한 것, 그것이 전부라면 전부였다. 배신조차도 어중간했던 주제에 아리아드네가 죽은 뒤로 감쪽같이 사라졌길래 어디서 목이라도 매달았나 했더니…….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얼굴을 한 카이엔이 이번에는 자신을 걷어찬 남자를 가리켰다.

    “정말 도움이 된 건 여기 계신 방문자님이시지. ‘시간’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쉽게 메르디에스를 이길 수 없었을 테니.”

    유진이 카이엔에게 주고 떠난 황금빛 실타래야말로 그의 숨겨진 한 수였다. 메르디에스에 억류 중이던 2왕자 루안을 죽여 전쟁의 빌미를 만든 것도, 메르디에스의 성주 레너드를 암살한 것도 ‘시간’이 카이엔을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그래.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니 끝도 내가 내야지.”

    낮게 뇌까린 유진이 미친놈처럼 히죽대는 카이엔의 가슴팍을 거세게 걷어찼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군 카이엔의 입에서 한 움큼 피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끝이 나는가…….”

    끝을 예감한 카이엔이 유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을 뒤집어쓴 사내는 사신이라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형상이었다.

    드디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을 죽일 저 남자가 반갑기까지 했다. 하지만 카이엔은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제 죽음이 저 ‘남자’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한 여자가 죽을 너를 살릴 것이며, 한 여자가 너로 인해 죽을 것이며, 한 여자가 너를 죽일 것이다.’

    저주와도 같았던 별의 예언을 들은 이후로 그는 줄곧 예언에 등장하는 여자들을 강박적으로 찾으려 했다. 자신을 죽일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죽음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카이엔, 널 죽일 거야. 반드시 널 내 손으로 죽일 거야.

    그래서 아리아드네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이 제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죽여야 할 여자가 그가 만든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안전할 줄 알았다. 카이엔은 제 죽음마저 통제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었다.

    ―오늘, 내 죽음으로 네 삶을 앗으리라. 증오와 두려움 속에서 죽는 그 순간까지 너는 나를 기다리게 되리라.

    하지만 자신을 죽여야 할 그 여자는 저주만을 남긴 채 카이엔의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다. 그는 아직 이렇게 살아 있는데.

    별의 그릇이 내린 예언마저 이겨 냈다고 자신했던 카이엔의 삶은 아리아드네의 죽음과 함께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새로이 왕비가 된 소르체의 여자와는 식사조차 함께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궁인들의 시중조차 마음 편히 받을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죄 남자로 갈아치우고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여자를 죽이고 싶었다.

    그의 끝없는 의심과 강박은 그의 왕국을 빠르게 무너트렸다. 천 년을 이어 온 프레모 대륙의 패자 페렌트가 분열되고 찢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반년이었다. 카이엔은 그렇게 아리아드네가 죽은 지 반년 만에 가진 영토라곤 왕궁이 전부인 초라한 왕이 되었다.

    그리고 남은 반년 동안 카이엔은 왕궁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갔다. 왕궁을 드나드는 귀족들은 그를 멸시하고 짓밟았으며, 궁인들은 그가 아예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왕궁조차 야금야금 빼앗겨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이 방이 전부가 되었던 석 달 전, 마구간지기가 그에게 침을 뱉고 돌아선 이후로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홀로 남은 그에게 하루는 너무 길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그가 삶을 포기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사흘이었다.

    그는 차라리 죽고 싶었지만 죽을 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죽여 줄, 자신의 삶을 끝내 줄 누군가를.

    이젠 드디어 죽을 수 있었다. 카이엔은 더는 이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저 남자라는 것이 너무 의아했다.

    “날, 죽여야 하는 건 아리아드네인데……. 왜, 네가……. 아, 그녀는 죽었지. 아리아드네가 날 두고 죽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별의 그릇이 그녀가 날 죽일 거라고, 날 죽이는 건 그녀여야 하는데…….”

    아리아드네가 첨탑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은 정말 있었던 일인가? 아니면 나의 망상인가? 나를 죽이려 하는 저자가 정말 아리아드네가 아니란 말인가?

    카이엔의 정신은 현실과 망상, 그리고 희망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그중 무엇이 진실인지 더는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그따위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죽을 수만 있다면…….”

    얼빠진 얼굴로 웃으며 카이엔은 목을 길게 늘어트렸다.

    담담한 낯을 한 사신이 폐주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 그다음은 가슴이었다. 유진이 내리그은 칼의 궤적을 따라 카이엔의 몸 곳곳에서 피가 솟구쳤다.

    카이엔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비명은 마치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어떤 소리도 되지 못했다.

    온몸을 조각내는 듯한 고통은 선명한데, 그의 의식은 좀처럼 흐려지지 않았다.

    유진의 칼이 그의 몸을 가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 속에 놓인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수십 번, 수백 번 죽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죽을 수가 없었다. 고통은 점점 생생해졌다.

    ‘어, 어째서…….’

    카이엔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 핏줄이 모두 터져 그의 흰자위는 마치 물감을 쏟은 것처럼 붉었다.

    그때, 기계적으로 카이엔의 몸을 헤집던 유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말로 뱉지 못한 카이엔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한쪽 입가를 비틀어 웃은 그가 말했다.

    “그렇게 쉽게 죽여 줄 줄 알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카이엔의 눈에 마지막 남은 희망의 빛마저 사라졌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 그곳이 바로 너를 위해 준비한 자리니까.”

    카이엔은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유진의 발을 붙잡고 매달렸다.

    ‘제발, 제발 나를 죽여 줘…….’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의 간절한 기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카이엔의 절망은 한 끼 양식에 불과했다.

    “그런데 내가 아직 지옥에 가 보질 못해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혹 그곳이 너무 자비로워 네 고통이 그녀만 못하면 어쩌나.”

    카이엔의 머릿속으로 지난 1년간 겪은 지옥 같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손수 너를 위한 지옥을 만들어 주기로 했지. 어떻게, 내가 선사한 지옥이 그럭저럭 쓸 만했나?”

    그제야 그는 남자가 자신에게 선사한 지옥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홀로 버려진 하루가 일 년 같았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영원 같았나? 살아 있는 것이 지옥 같았나?”

    고통스러운 순간에 박제되어 그곳에서 영원토록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남자가 그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온몸이 조각나고 부러지는 고통 위로 영원토록 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절망이 더해졌다.

    아아아, 카이엔은 짐승처럼 바닥을 기었다. 그의 몸에 있는 구멍이란 모든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마치 온몸의 내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때였다. 대리석 바닥을 디디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왕의 목은 제 몫입니다.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습니다.”

    새로이 나타난 누군가도 카이엔의 목을 노리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는 반쯤 뒤집힌 눈을 치떠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을 확인했다. 높이 올려 묶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말총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소르…… 체?”

    그의 부름에 시안 소르체가 고개를 내렸다. 순간 여자의 붉은 눈동자에 검은 연기가 일렁이듯 스쳐 지나갔다. 시안은 카이엔이 쏟아 낸 검붉은 피를 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출혈은 검은 피 중독의 마지막 증상입니다. 출혈이 시작되었으니 왕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검은 피 중독?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카이엔은 자신이 흘린 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는 소르체의 백자 중 가장 귀하다는 검은 피의 소유자입니다. 검은 피는 모든 질병과 상처를 낫게 합니다. 제 피를 드릴 테니 소르체의 아이들을 돌려주십시오.

    유진이 넘겨준 시간의 힘으로 소르체의 영토에서 아이 몇을 납치했더니, 시안이 제 발로 그를 찾아왔다. 검증도 몇 번이나 거쳤다.

    검은 피는 시안이 말한 대로 어떤 병이나 상처도 낫게 했다. 그것을 보았기에 그는 시안의 검은 피를 제 몸에 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함정이었다니.

    ―내가 그러했듯이 네 끝도 그러하리라. 네 부인이 될 그 여자가 네 목을 잘라 성벽에 걸 터이니 밤마다 목을 감싸고 자는 게 좋겠구나.

    아리아드네의 저주가 마음에 걸려 시안과는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릴 때마다 시안이 보내 준 검은 피를 마시며 두려움을 달랬다. 그것이 제 몸을 죽이는 독인지도 모르고.

    “그것만은 확실히 해 두지. 애초에 왕의 목을 네 몫으로 남겨 둔 건…….”

    스릉, 카이엔의 몸에서 칼을 거둔 유진이 서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것이 그녀의 뜻이기 때문이야.”

    아리아드네가 말한 카이엔의 끝이 그러했기에.

    유진은 더는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선고하듯 낮게 읊조리는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르체는 혈족의 원한을 잊지 않습니다. 백자의 피를 탐내 혈족의 안위를 해하려 한 죗값을 받겠습니다.”

    시안이 카이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쇳덩이가 너덜너덜해진 살갗을 파고들었다. 자신이 토한 피로 범벅이 된 카이엔이 힘없이 늘어진 채 두 눈만 깜박였다.

    홀로 우뚝하게 선 왕, 누구에게도 숙이지 않아도 되는 권력이 갖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었다. 그것만을 바라고 달려왔는데 이렇게 끝이 나다니…….

    페렌트 마지막 왕의 죽음은 집행자 외에는 그것을 지켜보는 이조차 없이 그렇게 끝이 났다.

    폐주(廢主) 카이엔의 목이 성벽에 걸렸다.

    왕이 죽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성문을 부수고 왕궁으로 밀려들었다. 성난 군중들은 불타는 왕궁에 기름과 불을 더했다. 왕궁은 금세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화염의 열기가 성곽에 위에 선 두 사람에게까지 닿았다. 천년 왕국의 몰락을 지켜보는 두 사람 위로 피처럼 붉은 석양이 드리웠다.

    “지옥에 갔을까요?”

    성벽에 걸린 카이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캐롤린이 입을 열었다.

    “지옥이 있다면 그렇겠지.”

    저 건조한 대답도 이젠 끝이었다. 캐롤린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폐주가 부럽다면 미친 걸까요?”

    “죽어서?”

    그의 물음에 캐롤린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돌벽 위에 꿇어앉은 몸이 바닥에 엎어졌다.

    “……리아가 이 세상에 없는데, 리아가 없는 세상에, 나만 살아 있다는 걸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어요.”

    둘 중 하나가 먼저 죽는다면 그것은 자신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리아가 죽고 자신이 산 것인지.

    캐롤린은 살아 있는 자신도, 리아가 없는 세상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죽고 싶나?”

    유진이 형편없이 무너진 캐롤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사는 것이 지옥인 삶을 알았다. 죽음만이 유일한 구원인 삶을 알았다. 저 여자의 남은 삶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을 알았다.

    죽음을 바라는 눈으로 모든 것이 끝나면 제 목을 취하라 그리 말하던 여자를 기억했다. 캐롤린이 고개를 들었다.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얼굴은 물기 하나 없이 버석했다.

    “죽고 싶다면 죽여 주시게요?”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의 손 빌려 자살할 생각 말라며 냉랭하게 돌아서던 남자였다. 이제 와 온정을 베푼다면, 그것은 자신을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죽고 싶은 건 저만이 아니었네요.”

    남의 손을 빌려 자살하고 싶었던 자신처럼, 죽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거다. 저 남자도.

    “역시 널 너무 오래 살려 뒀어.”

    조소를 머금은 유진이 캐롤린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자의 보랏빛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타고 남은 재처럼 황폐하고 메마른 눈동자.

    죽여 줄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오래오래 살아. 이 지옥에서.”

    이 지옥에서 저 여자를 구해 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너마저 죽으면 그녀를 기억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으니까.”

    그에겐 누군가의 기억 속에 박제된 아리아드네라도 필요했다.

    “나는 죽을 수도 없나요, 사는 게 내겐 형벌이니까?”

    캐롤린의 눈가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게 일그러졌다.

    “남은 삶이라도 착하게 살아 봐. 그럼 다음 생에는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실없는 소리를 하며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꺼져 가듯 희미한 말소리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내게 다음 생이 있다면, 내게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 같은 희망을 속삭이는 저 마음을 알았다.

    “……나는, 리아를 위해 죽고 싶어요.”

    그에게도 두 번째 기회가 있다면, 그렇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을 하며 그는 서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제는 마물들이 집어삼켜 버려진 땅. 한때는 성도 살리바라 불렸던 그곳에 그의 심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 * *

    “……말, 괜찮, 사람…… 이…….”

    다신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두 번째 기회 따위 있을 리가 없다고, 그것은 제 망상일 뿐이라고.

    “사흘째 잠만 자는데 아무 문제가 없―”

    이것이 환상인지, 꿈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그는 절박하게 손을 뻗었다. 툭, 붙잡은 무언가가 그의 품으로 떨어졌다.

    “폐, 폐하!”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배경으로 그녀의 놀란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유진?”

    그의 품에 안긴 아리아드네가 놀란 듯 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아, 살아 있었어.”

    그는 품 안의 아리아드네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힌 듯 아리아드네가 그를 슬쩍 밀어냈다.

    “나 죽었어? 언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땀에 흠뻑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지독한 악몽이라도 꿨나 봐. 그러길래 왜 그렇게 오래 잤어. 혼자 심심해 죽는 줄 알았네.”

    초조한 목소리로 그를 걱정했던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아리아드네는 불평 섞인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그녀의 배려였다. 그제야 그는 이것이 현실이고, 조금 전까지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젠 곧 정박할 거야. 조금만 참아.”

    사람들이 나가고 둘만 남자 아리아드네가 그를 다시 눕히며 달래듯 말했다. 아리아드네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던 그가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생각해 본 적 없어?”

    “뭘?”

    침대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쓰다듬던 아리아드네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당신이 죽었던 과거가 그대로 흘러갔다면, 그 시간의 미래는 어떠했을지…….”

    사흘 내리 잠만 자던 사람이 꺼낼 법한 질문은 아니었다. 아리아드네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산뜻한 목소리로 답했다.

    “음,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스치듯 생각해 본 적이야 없진 않지만. 그도 그럴 것이 아리아드네는 당장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가 차고 넘쳤다. 지금 그녀에겐 일어나지도 않은 어느 시간의 무언가를 곱씹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아, 유진이 잇새로 한숨을 흘렸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실망한 그를 달래려는 것인지, 그의 팔을 들어 유진의 품에 안긴 아리아드네가 침대로 꾸물꾸물 올라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생각해 보지, 뭐. 보자.”

    언제나 명료한 그녀다웠다.

    “우선 카이엔은 얼마 가지 못하고 죽었을 거야.”

    사심 섞인 판단은 아니었다. 공포를 기반으로 한 정치를 지속하려면 반발을 누를 힘이 있어야 한다.

    “페렌트는 다섯 가문의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서 발전한 나란데, 정당한 명분도 없이 죄 쓸어버리고 뭐가 남았겠어. 머리를 자르면 남은 몸통이 자기 것이 될 줄 알았겠지만,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지.”

    그런데 카이엔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다른 가문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것은 마물을 이용한 급습과 카푸트를 이용해 결정적인 순간 시간을 제 뜻대로 부릴 수 있어서였다.

    마물을 만들어 낸 것은 시몬이고, 시간은 유진의 힘을 한시적으로 빌린 것이었으니, 둘 중 무엇도 카이엔의 온전한 힘이 아니었다. 약해진 카이엔에게는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적들만이 남았을 거다.

    시안이 가진 힘을 생각해 보면, 그는 정말 아리아드네의 저주대로 제 부인에게 목이 잘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페렌트는 갈가리 찢어졌을 거야. 분열된 페렌트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겠지.”

    천 년 동안 프레모 대륙의 절대 강자로 군림해 온 페렌트. 페렌트 아래 숨죽이고 있던 중소 왕국들이 저희끼리 힘을 합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대륙 삼국을 통일한 브리아에 대항도 제대로 못 했을 거야.”

    아리아드네는 레너드가 보여 주었던 서대륙 무기를 떠올렸다. 온전한 페렌트라도 상대하기 힘든 힘이었다.

    생각해 본 적 없다더니. 막상 생각하기 시작하니, 생각의 줄기가 맹렬히 뻗어 나가는 모양이었다. 페렌트 정세를 분석하는 아리아드네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유진이 툭 던지듯 물었다.

    “난, 내 생각은 안 해?”

    아, 맞다. 아리아드네가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실망한 유진을 달래 주려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올 기미가 없었으니.

    “당신은, 음, 내가 없어서 슬펐…… 나?”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고민하던 아리아드네가 자신 없다는 듯 말꼬리를 늘였다.

    “그걸 말이라고…….”

    유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당신이 날 구하러 왔잖아.”

    웃는 유진을 끌어안으며 아리아드네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왜 슬퍼해. 내가 이렇게 당신 옆에 살아 있는데.”

    아리아드네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라고 했지만 그는 어쩌면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이건 어쩌면 시간이 그에게 보여 준, 이루어졌어야 하는 미래일지도 몰랐다.

    “아, 도착했나 봐. 내리자.”

    부쩍 시끄러워진 바깥의 소음에 침대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우리 또 다른 미래를 바꾸러 가 볼까? 이번에 이기는 건 브리아가 아닌 페렌트가 될 거야.”

    손을 맞잡자 따스한 온기가 그의 손을 감쌌다.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가 있다면, 그렇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녀 곁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죽음이 아닌 삶을 바랐던, 이루어질 리 없었던 그의 망상을 이루어 준 그녀가 너무도 애틋해서.

    “모든 것은 당신 뜻대로.”

    그는 신 앞에 고개 숙인 성자처럼 그녀의 손에 이마를 붙였다. 그를 구원한 신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녀일 테니까.

    * * *

    브리아의 항구 도시 토프는 삼국 전쟁의 최대 요충지 중 하나였다.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삼국 전쟁이 브리아의 승리로 끝난 지금도 왕실 직할령으로 관리되는 곳이었다.

    토프의 총독 호라티우스는 항구에 정박한 배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렸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선박은 그 크기만으로도 질릴 정도였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선박의 화려한 외관이었다.

    장인의 솜씨일 것이 분명한 외관 전체를 감싼 예술적인 조각과 돛을 장식한 화려한 수, 보란 듯이 돛대에 박힌 커다란 보석까지.

    ‘미친, 이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돈지랄이야.’

    대형 선박은 그것을 건조하는 데만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었다. 의장용 배가 아닌 먼바다를 항해하는 외항선에 저런 장식이라니.

    ‘미쳤나? 미치지 않고서야…….’

    호라티우스가 어안이 벙벙해 입만 뻐끔거리던 그때였다.

    뿌우우― 우렁찬 뿔피리 소리가 토프 항구 전체를 뒤덮을 듯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항구와 페렌트 선박을 잇는 계단이 내려왔다.

    페렌트 선박에서 쏟아져 나온 기사들이 토프 항구를 빙 감싸듯이 도열했다. 예장한 기사들의 청록빛 망토가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메르디에스 왕가의 문장인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가 항구의 하늘을 수놓았다.

    탁, 작은 돌멩이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것처럼 사소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토프 항구를 꽉 메운 페렌트 기사들이 일시에 움직였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계단 위에 선 한 여자를 향했다.

    “페렌트 단 하나의 기둥.”

    첫 번째 열에 선 기사 하나가 왼쪽 가슴에 주먹을 갖다 댄 채로 고개를 조아렸다.

    “가장 찬란한 영광.”

    그 뒤를 이은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폐하, 영원토록 바래지 않는 영광을 누리소서.”

    기사들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페렌트 국왕의 홍복(洪福)을 빌었다.

    “영광을 누리소서.”

    남은 자들이 메아리처럼 외치는 소리가 토프 항구를 뒤흔들 것처럼 거세게 터져 나왔다.

    도열한 기사들 사이를 걷는 페렌트 국왕의 머리카락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눈부신 빛깔이었다.

    “아, 그대가 토프의 충독?”

    계단을 내려온 여자가 호라티우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자의 고압적인 어조는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웠다.

    “토프의 총독 호라티우스가 페렌트 국왕 폐하께―”

    호라티우스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마치려던 그 순간이었다. 타다닥, 마치 거센 소낙비가 내리꽂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날도 맑은데, 왜 갑자기…….’

    고개를 든 호라티우스는 금화가 비처럼 내리는 광경을 마주했다. 금화 비 가운데에 선 페렌트의 국왕이 작게 미소하며 그를 지나쳤다.

    “이건 날 환영해 준 토프의 총독에게 내리는 상.”

    그날 하루 동안 토프 항구에 쏟아진 금화의 양은 토프의 3년 치 세수(稅收)를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 * *

    탁, 아리아드네 뒤를 이어 마차에 오른 유진이 마차 문을 닫아걸었다. 아리아드네는 마차의 덧창을 연 채로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가 아리아드네 맞은편에 앉자 메르디에스 왕가의 문장을 단 마차가 브리아 왕성을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두 사람을 실은 마차는 토프 항구를 가득 채운 시민들 사이를 달렸다. 누가 가져갈세라 금화를 꽉 쥐고 있던 토프의 시민이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보고는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저, 저분이, 이 금화를 내려 준 바로 그…….”

    아리아드네는 싱긋 웃으며 토프의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페렌트, 국왕 폐하…….”

    거리를 꽉 메운 시민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임이 들불처럼 번지더니 그것은 이내 땅을 울릴 듯한 함성이 되었다.

    “페렌트 국왕 폐하 만세! 페렌트 만세!”

    “와아아아아!”

    토프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브리아에 입성한 아리아드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시작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돈은 제법 들었지만 그것이 가져올 이익을 생각하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이던 아리아드네의 시선에 유진의 얼굴이 들어왔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무심한 듯 턱을 괸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창백해 보였다. 아직 뱃멀미가 가라앉지 않은 걸까.

    “몸은 괜찮아?”

    염려 가득한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흐음, 정말이지?”

    타우루스 독에 중독되고도 오랫동안 속인 전적이 있었던 터라 괜찮다는 그의 말을 쉽사리 믿기 어려웠다. 의심스럽다는 듯 흘겨보는 그녀의 시선에 그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사람이 몸을 펴니, 좁은 마차 안이 그로 가득 찼다. 유진이 손을 뻗어 벽을 짚고 아리아드네를 향해 몸을 숙였다.

    아리아드네는 생각했다. 손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그에게 안긴 것 같다고.

    “잊었어? 물 위만 아니라면―”

    그의 말이 잠시 멎었다. 멈춘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차 안을 흐르던 공기가 모조리 사라진 것처럼 세상이 고요해졌다. 진공으로 된 세상 속에 그와 단둘이 남은 것 같았다.

    “날 막을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아리아드네의 어깨에 공기처럼 얹어졌다. 아리아드네가 그 손을 잡아 내리며 작게 웃었다.

    “오는 내내 뱃멀미로 죽은 듯이 누워 있었던 사람이 이제 와서 무게 잡아 봤자―”

    채 뱉지 못한 뒷말이 그의 입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가 제 숨을 모조리 앗아 가는 듯했다. 공기마저 사라진 세상에서 숨을 받아먹을 곳이라곤 그가 유일했다. 서로가 서로의 숨인 것처럼 이어지던 키스가 끝나고, 그가 아리아드네의 둥그런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조르듯 속삭였다.

    “그러니까 가엽게 여겨 줘.”

    아리아드네의 머릿속에서 ‘무엇을’이란 의문이 채 완성되기도 전이었다. 드러난 어깨 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끝난 줄 알았던 키스는 진득하게 이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아리아드네의 등골을 훑어 내렸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만큼 서로를 탐닉하는 방식에 익숙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때론 감각보다 기대가 앞서기도 했다. 이어질 감각에 생각이 닿은 아리아드네가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지금은…….”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평소보다 조금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언제나 그를 목마르게 하는 그 목소리였다.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는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고개를 들어 제 주인의 눈을 살폈다.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파란 눈동자는 조금 전보다 훨씬 명료한 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은 안 돼. 페렌트의 명운을 건 전투가 코앞인걸.”

    그녀가 젖은 어깨를 쓸어내리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주인의 허락이 없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에 얕게 키스하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유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결 좋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아리아드네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얌전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렇게 그가 순순히 굴 때면 묘한 충족감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약점을 보이지 않는 남자가……. 문득 든 어떤 생각에 아리아드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애초에 왜 그렇게 물에 약한 거야?”

    난데없이 날아든 물음에 유진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가 제 의문을 차근히 풀어놓았다. 처음엔 뱃멀미하는 그를 보고 자연스럽게 디움 산맥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유난히도 물에 약했으니까.

    후에 기억을 떠올린 그로부터 ‘레오’가 디움 너머 아르체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래서 물에 약했던 거라 생각하고 넘겨 버렸다.

    “지금 이 몸은 새로 얻은 거잖아. 그런데 배 못 타는 것까지 그대로일 필요가 있어? 물을 꺼리는 디움 너머 사람들의 습성이 영혼에 새겨진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그녀의 의문에 유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곧 결론을 내렸다.

    “이 몸도 뱃멀미가 심했나 보지.”

    방주에서 얻은 이 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고. 그의 명쾌한 결론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평하듯 말했다.

    “그러게 따로 오자니까. 당신 혼자 움직이면 그 고생할 필요 없었잖아.”

    브리아행을 결정하고 아리아드네가 가장 걱정한 것은 바로 유진의 지독한 뱃멀미였다. 모라의 권능을 사용해 먼저 브리아에 가 있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그는 단박에 거절했다.

    “내가 당신 혼자 두고 어떻게 그래.”

    바로 이 이유로.

    “미안하니까 그렇지.”

    안쓰럽다는 듯 그녀가 유진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무슨 이유이건 그녀의 관심은 언제나 달았다. 그는 그녀의 연민을 양식 삼아 지금 이 순간을 만끽했다. 그가 온전히 그녀를 독점할 수 있는 순간은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미안할 거 없어. 그러겠다고 한 건 나였잖아. 당신과 떨어지느니 평생 배를 타는 게 나아.”

    “만용 부리지 마.”

    그의 중얼거림에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대꾸했다. 만용 같은 게 아니라는 걸 그녀는 정말 모르는 걸까.

    “보름도 넘게 당신을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두라니. 그랬다면 아마 나는 말라 죽었을 거야. 그런 거에 비하면 뱃멀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미안해. 내 욕심 때문에 당신까지 고생시켜서.”

    염려와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사과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지. 당신에게 아직 내 쓸모가 남아서.”

    그는 그녀의 무릎에 이마를 기댄 채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리아드네가 그의 머리카락을 넘기는 사락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마차 안을 채웠다.

    * * *

    ‘아직 안 좋은 건가…….’

    아리아드네는 제 무릎에 기댄 채로 기절하듯 잠이 든 유진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지만 브리아행을 너무 서둘렀나 조금 후회가 되었다.

    ‘더 미룰 순 없었지만.’

    페렌트의 왕가가 바뀌는 동안, 서대륙 정세 또한 급변했다. 수백 년에 걸친 서대륙 삼국 전쟁의 승자는 레너드의 예상대로 브리아였다. 브리아는 압도적인 승리로 서대륙 삼국을 통일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아리아드네는 페렌트 왕위에 오른 즉시, 브리아에 축하 사절을 보냈다. 브리아 정탐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사절단의 결론은 그녀의 우려와 같았다.

    ‘3년 이내로 페렌트 침공을 결행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음.’

    브리아는 전에 없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나라였지만 내부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오랜 전쟁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국토의 1/4은 잦은 벌목과 전투로 사막화가 진행 중이었고, 전쟁을 치르느라 빈곤해진 국민들의 불만은 한계치에 다다랐다. 전공(戰功)을 세운 자들은 보상을 원했고, 그들에게 나눠 줄 전리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브리아가 바다 너머로 눈을 돌린 것은 당연한 수순인지도 몰랐다. 그곳에는 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프레모 대륙의 유일한 패자로 군림하며 먹음직스럽게 몸집을 부풀려 온 상대가 있었으니까. 카타라를 통해 흘러들어 온 교역 물품들이 그들의 욕망을 더욱 부채질했을 터.

    오랜 전투로 담금질 된 브리아와 전쟁을 치러 페렌트가 승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페렌트로선 승리한다고 해도 얻을 것이 없는 싸움이었다. 페렌트가 절실한 브리아와 달리, 페렌트에게 브리아는 가져 봤자 골치 아픈 땅에 불과했으니까.

    그렇다면 이 전쟁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아리아드네가 내린 결론이었다.

    어떻게 해야 저들의 야욕을 꺾을 수 있을까? 페렌트를 삼킬 생각에 혈안이 된 자들에게 화친을 맺자고 한들 그것이 통할까?

    그럴 리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폐하, 브리아 왕성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잠에 들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말끔하게 의복을 정리한 유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긴 하루가 되겠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의 전투에 머릿속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 *

    브리아 왕성은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앞으로는 저 멀리 페렌트 배가 정박한 토프 항이 보이고, 뒤로는 경사진 구릉이 왕성을 감싸듯이 안고 있는 형태였다.

    오랜 전쟁은 왕성조차 피해 갈 수 없었는지 왕성 곳곳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페렌트 국왕께서 예까지 직접 걸음 하여 주다니, 이것 참 영광일세.”

    가장 앞줄에 선 남자가 웃으며 아리아드네를 향해 다가왔다. 삼국 전쟁의 승리자, 브리아의 국왕 티모테우스였다.

    짧게 쳐 낸 머리카락, 각진 턱, 체구는 작지만 단단한 몸, 망토 아래 경장 갑옷을 입고 나타난 티모테우스는 전형적인 군인의 모습을 한 사람이었다.

    “토프 항에서는 금화를 비처럼 뿌렸다지? 호라티우스 그 친구가 놀라 1급 전령을 보냈더군.”

    우호적인 어조와 목소리였다. 브리아 국왕의 태도만 보면 이 회담은 꽤 순탄할 것도 같았다. 지금 말을 거는 상대가 페렌트 국왕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너.”

    아리아드네가 턱짓으로 티모테우스의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남자를 가리켰다. 살짝 고개를 든 남자가 아리아드네와 눈을 마주쳤다. 남자는 탐색하듯 아리아드네를 빤히 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네 주인께 전해라. 피곤하니 지금은 쉬고 싶다고.”

    “…….”

    아리아드네의 발언에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시종을 통한 대화는 신분 차이가 너무 나 직접 대화를 할 수 없을 때나 사용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국왕을 아랫사람 부리듯 대하는 아리아드네의 태도에 브리아 기사들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조금 전 아리아드네가 말을 건 남자가 기사들을 달래듯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저는 브리아의 정무 대신을 맡고 있는 카스토르라고 합니다.”

    카스토르라면 삼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 중 하나로 브리아 왕국의 명백한 2인자였다. 아리아드네는 지금 브리아의 재상을 시종 취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할지 궁금하다는 듯 카스토르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의 싸늘한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제 주인이 지껄인 무례는 들리지도 않는 선택적 귀머거리인가.

    “내가, 네 이름을 물었던가?”

    명백한 무시였다. 그제야 카스토르는 조금 전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가리킨 것이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임을 깨달았다. 브리아 왕이 아랫사람을 대하듯 지나치게 격의 없는 말투를 사용한 것에 항의하고 있다는 것도.

    아리아드네는 제 불쾌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는지 카스토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회담을 먼저 제안한 것이 페렌트였으니 사소한 무례는 참고 넘어갈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리아드네도 시작부터 이런 일로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저들의 무례에 관용을 베풀 순 없었다. 자신은 이 자리에 페렌트 국왕으로 서 있는 것이었으니까.

    나라 간의 관계에서 신의, 도리, 도덕 같은 추상적인 것들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 사이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영토, 돈, 군사력 같은 명명백백한 것들이다.

    외교적 결례는 결코 실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조차 고도의 계산일 뿐이다. 아니면, 그래도 괜찮은 상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거나.

    티모테우스의 무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실수였다면 카스토르가 아리아드네를 시험하듯 지켜보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브리아 국왕은 페렌트 국왕을 상대로 은근슬쩍 우월적 지위를 선점하려 시도한 것이다.

    티모테우스의 무례를 적당히 참고 넘어간다면, 저들은 페렌트가 회담을 성사시키려 몸이 달았다고 판단했겠지. 아리아드네가 토프 항구에 뿌린 금화조차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뇌물이라고 여길지도 몰랐다.

    예의는 약자의 포장이고, 무례는 강자의 권한이다. 그렇게 믿는 이들에겐 더 큰 무례를 저지르면 그만이다. 저들은 페렌트가 저만한 무례를 감당할 힘이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할 테니까.

    슬슬 브리아 측의 논의도 끝나 가는 분위기였다.

    “그게…….”

    카스토르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주억이던 티모테우스가 옆머리를 긁적거리며 침묵을 깨트렸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야.”

    티모테우스의 장점은 참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것인 듯했다. 그는 카스토르가 읊어 줬을 것으로 예상되는 말을 잘 따라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페렌트 국왕을 만난 반가움에 격의 없음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먼 길 오느라 피곤한 분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명시적인 ‘사과’는 싫었는지 얼렁뚱땅 넘기려 말끝을 흐리는 것을 아리아드네가 잽싸게 낚아채 마무리했다. 티모테우스의 얼굴이 순간 와작 일그러졌다.

    ‘속마음이 겉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이라더니.’

    미리 알아본 그대로였다. 티모테우스는 솔직하고 대범한 성품으로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흠흠, 피곤하시다는 말은 들었지만…….”

    헛기침을 하며 일그러진 얼굴을 간신히 편 티모테우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처음 맞이하는 손님이라 환영 행사를 좀 준비했습니다. 제법 볼만할 겁니다.”

    반드시 회담을 성사시켜야 하는 목적이 있는 듯 티모테우스의 낯빛에 초조함이 엿보였다.

    “나를 위해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치 않으셨다니…….”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대답을 마쳤다.

    “물론, 참석해야지요.”

    회담을 성사시켜야 하는 건 브리아만이 아니었으니까.

    * * *

    브리아 측에서 페렌트 국왕을 위해 마련한 자리는 단상 위, 브리아 국왕의 옆자리였다. 자리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페렌트 귀빈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하나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어수선한 페렌트의 반응에 그제야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카스토르가 유진을 힐긋 보더니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분명, 페렌트 국왕 폐하께서는 아직 미혼이시고 따로 약혼을 하신 것도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그제야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카스토르의 말대로 아리아드네와 유진이 공인된 연인 사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뿐이었다.

    결혼을 한 것도, 심지어 약혼을 한 것도 아니니 페렌트 내에서 유진의 공식적인 위치는 여전히 ‘손님’이었다. 그의 지위를 보장해 주던 성 상티모니아마저 붕괴했으니, 브리아 측에서는 유진을 그저 페렌트 국왕의 연인 정도로만 여긴 것이었다.

    “됐어. 어차피 나는 저런 의자는 좋아하지도 않아.”

    유진이 갖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한테는 거기 앉아 있으나 여기 서 있으나 다를 것도 없어. 어차피 당신 곁에 있는 건 똑같잖아.”

    어깨를 끌어당겨 아리아드네를 의자에 앉힌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그녀 뒤에 섰다.

    “그럼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카스토르의 물음에 유진이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리아드네는 브리아 국왕이 자신을 향해 다짜고짜 하대로 지껄였던 조금 전과는 또 다르게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국왕의 결혼식쯤 되면 연 단위로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약식으로 넘긴 정식 대관식 준비도 함께 해야 하니 시간은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시간에 쫓겨 해치우듯 치르고 싶진 않았다. 최대한 화려하고 성대하고 치르고 싶었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겠노라 큰소리친 것도 그렇지만.

    ‘유진은 내 결혼식에 왔었잖아.’

    카이엔과의 결혼식에 유진이 참석했었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유진이 그런 것에 무심한 사람이라지만, 자신의 결혼식이 그때보다 못하단 생각이 들면 서운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에 미친 듯이 규모를 키우고 예산을 퍼붓다 보니 아직 못 한 것뿐인데.

    아리아드네의 심란함을 눈치챘는지 유진이 몸을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괜찮아. 어떤 이름이든 그런 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당신 수행원이면 어떻고, 호위면 어때. 나더러 당신 하인으로 살라고 해도 난 괜찮아. 당신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언뜻 들으면 로맨틱한 고백으로 여길 법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아리아드네는 모서리가 어긋난 상자를 억지로 닫는 것처럼 위화감이 들었다.

    “잠깐, 그게 무슨―”

    “지금은 앞을 봐. 페렌트의 명운을 건 전투가 코앞이잖아.”

    유진이 만류하듯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으며 다시 멀어졌다. 아무래도 간단히 끝날 이야기가 아닌 듯해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삼키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집중하려 애썼다.

    브리아에서 준비한 춤과 노래, 연주, 무예, 그런 것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그중 몇몇은 지나치게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중 몇몇은 제법 볼만했다.

    마지막으로 의장대가 오와 열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퍼레이드가 진행되었다. 반듯한 제복을 갖춰 입은 수천의 군인들이 현란하게 무기를 다루고 그림처럼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퍼레이드의 음악이 점점 고조되고 의장대의 움직임도 그에 맞춰 점점 빨라졌다. 의장대의 움직임이 최고조에 이른 그때였다.

    두웅!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의장대가 순식간에 좌우로 갈라졌다.

    “페렌트 국왕께서는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티모테우스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경고하듯 낮게 속삭였다.

    갈라진 의장대 사이로 줄에 매인 오십여 마리의 황소와 족히 이삼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거대한 무언가를 끌면서 나타났다. 붉은 천에 씌워진 그것은 작은 집을 통째로 떼어다 얹은 듯한 크기였다. 무게 또한 만만찮은지 수많은 인력이 붙었는데도 굼벵이가 기는 속도로밖에 끌지 못했다.

    “정지!”

    선두에 선 기사의 외침에 수백여 명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기사의 손에 들린 깃발이 크게 펄럭이자 그것을 가리고 있던 붉은 천이 벗겨졌다.

    붉은 천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쇠로 만든 둥근 원통 모양의 거대한 무기였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돌아보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이 바로 브리아의 자랑인 사석포(射石砲)입니다.”

    티모테우스의 자랑이 끝나기가 무섭게 끼기기긱, 사석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전!”

    기수의 명령에 따라 공병들이 화약과 둥근 돌을 차례대로 사석포의 원통 속으로 집어넣었다.

    “조준!”

    공병들이 달라붙어 미리 준비된 두꺼운 석벽 과녁을 향해 사석포의 방향을 틀었다.

    “발사!”

    타닥타닥, 심지에 붙은 불이 사석포에 쑤셔 넣은 화약과 만난 그 순간이었다. 콰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날아간 석탄(石彈:사석포의 포탄으로 쓰이는 둥글게 깎은 돌)이 두꺼운 석벽에 박혔다.

    “하하하! 이것이 브리아가 리가와 티오그라드를 꺾고 서대륙의 유일한 승자로 남은 저력이지요.”

    사석포를 선보인 티모테우스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아리아드네가 놀라 어찌 된 일이냐는 듯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사석포라는 저것이 돌을 쏘는 무기인가요?”

    “투석기 같은 거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방금도 보셨잖습니까! 그냥 돌을 던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저 어마어마한 위력을!”

    놀란 듯한 아리아드네의 반응이 흡족했는지 티모테우스는 연신 껄껄대며 웃었다. 티모테우스의 말대로 화약의 힘으로 쏘아져 나간 사석포의 석탄은 투석기에서 떨어지는 돌과 비교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석포의 위력은 아리아드네의 예상과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이거,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너무 약하잖아.’

    아리아드네가 입을 가린 채로 유진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저게 서대륙 삼국 전쟁의 승기를 좌우했다길래 화약 포탄 정도는 쓰는 줄 알았지.’

    아리아드네는 석탄이 박힌 석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유진의 대답을 들었다. 페렌트로 망명을 요청한 티오그라드 군부 인사는 브리아의 사석포가 삼국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아리아드네도 브리아가 유진이 말한 수준의 화약 무기를 갖췄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건 지금 이 세계에서는 도무지 이룩할 수 없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사석포는 화약과 석탄을 장전하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고, 지나치게 거대했다. 수백여 명이 달라붙어 이동해도 하루 동안 토프 항까지 가기도 어려워 보였다.

    무엇보다도 브리아의 사석포는 포탄으로 둥글게 깎은 돌을 사용하고 있었다. 브리아의 사석포는 공성전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방비만 잘한다면 아예 못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포탄에 화약을 넣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무기라는 분야에선 분명 페렌트가 브리아보다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그것을 위해 아리아드네가 해야 할 일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좋은 구경을 했으니 페렌트에서도 마땅한 보답이 있어야겠군요.”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어둑해진 저녁 어스름을 배경으로 옅은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때였다. 퍼엉! 펑펑펑!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토프 항구의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폭죽의 등장에 티모테우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카스토르를 돌아보았다.

    “페렌트의 선물입니다. 축하 자리에 폭죽 정도는 있어야 할 듯하여.”

    아리아드네가 폭죽이 물들인 하늘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퍼어엉! 때맞춰 다시 터진 폭죽이 하늘을 온갖 색깔로 물들였다.

    그것을 본 티모테우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약을 사용한 일체의 물건은 그것이 무엇이든 서대륙 바깥으로 반출할 수 없습니다! 페렌트에서는 저 폭죽을 어떠한 경위로 획득했는지 밝히셔야 할 겁니다.”

    삼국을 통일한 게 요행은 아니었다는 건가. 브리아 측 인사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티모테우스가 시퍼렇게 날이 선 어조로 아리아드네를 추궁했다.

    “페렌트에 스스로 화약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아리아드네가 곁에 선 유진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기다랗고 까만 물체를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당연한 소릴! 페렌트가 화약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잖습―”

    끼릭, 아리아드네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그림처럼 움직여 갈고리 모양의 걸쇠를 뒤로 젖혔다.

    “그럼 보세요. 페렌트의 화약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타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음과 함께 그녀의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리아드네가 쥔 총신에서 발사된 탄환이 조금 전 사석포가 쏘아 낸 석탄에 정확하게 박혔다.

    “저, 저것 좀 보십시오!”

    쩌적, 쩌저적, 탄환이 박힌 석탄이 균열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이윽고 둘로 갈라졌다. 저 조그마한 물체가 거대한 석탄을 둘로 쪼개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인간, 인간이 만든 물건일 리 없습니다. 저건 분, 명―”

    카스토르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더듬거렸다. 그런 카스토르를 만류하듯 티모테우스가 아리아드네 손에 들린 물체를 가리켰다.

    “모르겠나? 화약 냄새야. 페렌트에 정말 저런, 저런 무기가…….”

    풀멘의 총구에서 피어오른 연기에서는 조금 전 사석포를 쏘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가진 것을 보여 드리는 것은 이쯤 하면 된 것 같군요.”

    저 무식한 석탄을 쪼갠 것은 풀멘만의 힘은 아니었다. 유진이 곁에서 시간을 움직여 풀멘의 파괴력을 몇 배로 강화한 덕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저들 눈에 더는 페렌트가 만만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 아까 뭐라고 하셨죠? 페렌트가 화약을 만들 수 있을 리가, 그 뒤에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티모테우스의 얼굴이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비장해졌다. 그 뒤의 브리아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리아드네가 작게 웃음을 흘리자 티모테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건 흡사 왕국을 침략하러 온 악당 취급이었다.

    “서신으로 말씀드렸듯이, 페렌트는 브리아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브리아의 생각은 어떤지 몹시 궁금하군요.”

    브리아와 전쟁을 하지 않을 방법은 페렌트가 더 강한 나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약자가 말하는 평화는 굴종이 되고, 강자가 말하는 평화는 아량이 되는 법이니까.

    “물론, 브리아도 페렌트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진행될 회담이 몹시 기대되네요.”

    티모테우스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들은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페렌트-브리아 양국의 운명을 뒤흔든 술푸르 회담이 성사된 순간이었다.

    『……역사에서 ‘그랬더라면’과 같은 가정만큼 무의미한 논쟁은 없을 것이다. 역사는 ‘과거에 벌어진 일’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의 의의는 과거를 반추하여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탐구하는 것에 있다.

    일어난 과거의 사실로써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앞날을 추론하는 것이 역사의 사명이라면, ‘일어나지 않은 과거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역사’를 주제로 한 논쟁이라 하면 역시 술푸르 회담을 빼놓을 수 없다.

    술푸르 회담 직전, 브리아의 페렌트 침공 계획은 꽤 구체적인 것까지 진행된 상황이었다. 브리아는 삼국 전쟁으로 누적된 문제들이 한계에 다다라 있었고, 새로운 전쟁은 이를 타개할 아주 괜찮은 방법이었다.

    페렌트-브리아 전쟁은 일어났어야 했던 일이다. 이는 당위의 의미가 아니라 당시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그럴 가능성이 몹시 높았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술푸르 회담이 성사되며 페렌트-브리아 간의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지만, 양 국가 간의 전쟁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과연 누가 승리했을지는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브리아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들은 수백 년에 걸쳐 전쟁을 치른 그들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수백 년에 걸친 세월 동안, 브리아는 실전을 통해 전술과 무기를 발전시키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이는 분명 페렌트가 가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페렌트도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페렌트 내전을 치르며 다져진 결속력, 남겨진 기록이 과장되었음을 감안해도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유진이라는 존재, 무엇보다 페렌트가 지닌 풍부한 재화를 생각하면 이기진 못해도 제법 오래 버텼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역시 이 모든 논쟁은 무의미하다. 메르디에스 왕조를 연 아리아드네가 술푸르 회담을 극적으로 성사시키며 양 국가 간의 전쟁은 역사에서 없는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혹자는 술푸르 회담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기극이라 평한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술푸르 회담을 성공시킨 것은 페렌트 내전으로 막 왕위에 오른 풋내기 왕이었다.

    객관적인 전력은 브리아가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드네의 교묘한 전략에 휘말린 브리아는 페렌트에 유리한 조약을 스스로 체결하고 만다.

    더구나 술푸르 회담에서 가장 핵심이랄 수 있는 상호불가침 조약이 브리아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조급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술푸르 회담으로 시간을 번 페렌트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티오그라드 출신들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무기 개발에 힘써 불과 수십 년 만에 브리아가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군사력을 뛰어넘는다.

    술푸르 회담이 사기극에 가까웠음을 브리아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페렌트가 그들이 속았던 대로 범접할 수 없는 상대가 된 뒤였다.

    브리아라는 나라가 사라질 때까지 양 국가 간의 전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아 술푸르 회담의 상호불가침 조약은 영원토록 깨어지지 않는 약속으로 남았다.

    혹자는 페렌트-브리아 전쟁이 실제로 발발했을지라도 페렌트가 승리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페렌트에서 가장 핵심 전력은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유진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재위 기간 동안 어떤 싸움에서도 패하지 않은 아리아드네라고 말한다.

    하나 확실한 것은 아리아드네는 술푸르 회담을 통해 전쟁을 치른 것 이상의 승리를 얻었다는 점이다.

    -발트 저, 페렌트 전쟁사 중에서.』

    * * *

    팔각형 모양으로 난 창은 양팔을 벌린 채로 서면 딱 맞는 크기였다.

    “좀 답답한데?”

    아리아드네가 창으로 정원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브리아 건축 양식은 전시 상황에 맞게 발전했으니까요. 아무래도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 편이 방어에 유리하죠.”

    산처럼 쌓인 편지를 정리하던 힐다가 고개만 빼꼼 들어 대답했다. 힐다는 메르디에스 상단주인 신시아의 수족으로 서대륙 정세에 밝은 인물이었다.

    “이 건축 양식이 언제까지 갈 것 같아?”

    “네?”

    힐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아리아드네가 손톱으로 팔각형 창을 톡톡 두드렸다.

    “이젠 이렇게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볼 필요가 없지. 전쟁은 끝났으니까.”

    창의 크기는 일조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일조량은 삶의 질에 몹시 중요한 요소였다.

    “곧 브리아에도 유리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 거야. 미리 준비해 둬.”

    그리고 통창을 만들 만한 큰 유리를 제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만큼 비싼 건 당연하고.

    이번 회담으로 페렌트는 브리아와의 무역이라는 부수적인 소득을 얻었다. 수백 년간 한 뼘 틈이 전부였던 문이 이제야 활짝 열린 셈이었다. 앞으로 브리아와의 무역으로 페렌트가 벌어들일 돈은 얼마나 될까. 그 생각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아리아드네의 얼굴에서는 흡족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 아리아드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진이 물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됐거든.”

    회담 내내 브리아는 페렌트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 심지어 아리아드네가 토프 항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뿌렸다는 소식에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밀려들어 힐다는 종일 편지만 정리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쯤 되자 브리아 측에서도 아리아드네가 토프 항에서 뿌렸던 돈이 단순한 과시가 아님을 눈치챘다. 페렌트의 재력은 그 자체로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아리아드네는 브리아에 도착한 순간부터 가장 메르디에스다운 방식으로 전투를 개시한 것이었다. 브리아는 싸울 대상을 잘못 택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이젠 바쁜 건 끝났어?”

    제 팔에 반쯤 매달린 아리아드네를 끌어당긴 유진이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물었다.

    “내가 할 일은.”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올려다보며 눈가를 접어 웃었다. 실무진 선에서 조율할 자잘한 것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수뇌부들이 직접 나서야 하는 큰 건들은 어제부로 모두 마무리되었다. 만족스러운 회담의 결과에 하루 정도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그동안 심심했지. 뭐 하고 싶어? 말만 해. 전부 다 해 줄게.”

    배부른 고양이처럼 한껏 늘어진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팔에 얼굴을 괸 채 종알거렸다.

    “당신이 하고 싶은 거.”

    유진의 대답에 아리아드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그게 아니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유진의 표정에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당신 공이 엄청나게 컸잖아. 이럴 때 확실히 챙겨야지. 이것뿐이냐, 더 내놔라, 이걸로는 어림도 없다, 오늘까지만 하고 내일은 장사 안 할 거냐. 당신은 지금 이래야 한다고.”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양손을 붙든 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를 쏟아 냈다.

    “누구한테?”

    “나?”

    태연히 자신을 가리키는 아리아드네의 행동에 유진의 웃음이 터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겨우 이따위 것으로 아리아드네에게 생색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됐어. 당신에게 도움이 됐다면 정말 그걸로 됐어.”

    마치 도돌이표 같은 그의 대답에 아리아드네의 한숨이 깊어졌다.

    “아, 정말 당신은 왜 이렇게 욕심이 없을까. 이럴 때마다 불안하다니까. 어떻게 꾀어도 넘어올 것 같지가 않아서.”

    불만이라는 듯 투덜대는 아리아드네를 보며 겨우 웃음을 그친 유진이 물었다.

    “아직도 당신에겐 내가 필요해?”

    너무 당연한 것을 물으면 도리어 의심이 드는 법이다.

    “음? 필요하지?”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다행이야. 내 쓸모가 남아서.”

    유진이 ‘쓸모’ 운운했을 때야 아리아드네는 이 위화감을 정체를 깨달았다.

    ―정말 괜찮아. 어떤 이름이든 그런 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당신 수행원이면 어떻고, 호위면 어때. 나더러 당신 하인으로 살라고 해도 난 괜찮아. 당신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모서리가 어긋난 상자를 억지로 닫는 것 같았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요즘엔 당신 도울 일이 없었잖아. 오랜만에 당신에게 도움이 되어서, 그게 기뻐서 한 말이야.”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아리아드네는 직감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가 불안해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아리아드네는 내전 이후 페렌트 정비 과정에서 그의 힘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유진에게 기대지 않겠다거나, 온전히 제힘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특출한 힘에 자꾸 의지하면 필연적인 공백이 생긴다.

    아리아드네는 페렌트가 누구 한 사람의 부재 때문에 휘청이는 나라가 아니기를 바랐다. 비범한 영웅 따윈 필요 없는, 단단한 기틀이 떠받치는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영웅이 이끄는 나라는 영웅이 죽으면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반석이 튼튼한 나라는 잠시 휘청이더라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아리아드네가 새로운 페렌트를 꿈꾸며 바빴던 동안 그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던 걸까. 더는 당신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은 거냐고.

    “……있잖아. 물론 우리가 시작은 그랬지만, 지금 우리 관계에서 쓸모니, 필요니 하는 말은 별 의미 없지 않아?”

    거래 운운했던 첫 시작이 그에게 어떤 강박처럼 남았던 걸까.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머뭇거리던 그가 읊조리듯 말했다.

    “그래도 난 당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마음이 통한 뒤로, 제 의사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언제나 아리아드네에게 맞춰 주던 그로서는 퍽 드문 반응이었다.

    “아, 물론 당신은 언제나 내게 큰 힘이었고, 그 점은 정말 고마운데, 난 당신이 내게 필요한 사람이라서 함께하는 게 아니야.”

    아리아드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유진이라는 사람 그 자체이지,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

    “알아.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

    유진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도 모르지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그의 불안은 아리아드네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원인은 바닥이 없는 제 마음에 있었으니까.

    “힐다.”

    아리아드네가 낮은 목소리로 힐다를 불렀다. 무거운 분위기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힐다가 냉큼 다가왔다.

    “네, 폐하.”

    “오늘 남은 일정 전부 취소해.”

    아리아드네의 갑작스러운 명에 화들짝 놀란 힐다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네? 곧 브리아 국왕과 만찬 약속이―”

    “그러니까 그거 취소해 줘. 그리고 내일까지 내 방에 아무도 들지 말라고 해.”

    여지라고는 조금도 없는 단호한 어조에 힐다는 아리아드네를 설득할 생각 따윈 저 멀리 치워 버렸다.

    “브리아 국왕에겐 뭐라 말할까요?”

    그래도 변명할 거리 정도는 만들어 둬야 했다.

    “페렌트 왕이 연인과의 정이 너무 깊어 낮과 밤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해.”

    아, 저 말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는 게 낫겠다. 힐다는 서둘러 문을 닫고는 도망치듯 물러났다.

    탁, 둔탁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창밖의 해는 아직도 하늘 한가운데 있었고, 브리아에서 내 준 방은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목깃을 쥐고는 끌어당겼다. 서로의 코끝이 스쳤다. 낯선 환경 때문일까, 그는 제법 긴장한 얼굴이었다.

    “지금?”

    주춤 물러선 그가 당황스럽다는 어조로 물었다.

    “당신이 언제 밤낮 가렸던가?”

    “그땐…….”

    힐난 아닌 힐난에 그가 무엇이라 변명하려는 찰나였다.

    “뭐, 그것도 좋겠지만, 지금은 다른 거 할 거야.”

    아리아드네가 그에게서 손을 떼고는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적당히 편한 옷을 찾아낸 그녀가 거침없이 단추를 풀어 내렸다.

    별안간 옷을 갈아입는 그녀 때문에 유진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옷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칠 때마다 움켜쥔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그에게 옷가지를 내밀며 말했다.

    “뭐 해? 당신도 어서 갈아입어.”

    빤히 바라보며 채근하는 통에 그는 이유도 모른 채 그녀가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뭘 입어도 참…….”

    브리아 의복으로 갈아입은 유진을 보며 아리아드네가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낯선 옷이 불편했던 것도 잠시, 그는 아리아드네의 반응에 지금 옷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제 또 브리아에 와 보겠어. 구경할 수 있을 때 해 둬야지.”

    매무새를 다듬는 그를 향해 아리아드네가 손을 내밀었다.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가자, 놀러.”

    그녀가 저렇게 손을 내밀면 그는 매번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급하게 손을 뻗어 잡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자 아리아드네가 그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금가루를 뿌린 듯한 환한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아무도 남지 않은 빈 방에는 마구잡이로 뒤진 듯한 옷가지 몇 개만이 흐트러진 채로 남았다.

    * * *

    유진의 손을 잡고 토프 거리 곳곳을 누비던 아리아드네가 하역장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하역장은 바쁘게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했다.

    “다르다면 다른데…….”

    건축 양식이나 의복, 난전에 널린 생선까지. 무엇 하나 낯설지 않은 것이 없었다.

    “뭐, 거기서 거기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바람에 묻어나는 소금기와 생선의 비린내, 왁왁 내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 곳곳에 널린 그물과 크고 작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까지. 온갖 냄새와 소리가 한데 뒤섞여 아리아드네가 익히 아는 항구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거기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던 란데르.”

    아리아드네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천천히 옮겼다.

    “나 여름마다 란데르에서 보냈거든. 그곳도 항구로 나가면 꼭 이런 냄새가 났어. 캐롤린이 아주 질색했지.”

    한 걸음, 두 걸음, 활기찬 항구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녀가 빙글 몸을 돌렸다. 한 발짝 뒤에서 아리아드네를 따라 걷던 유진의 걸음도 덩달아 멈추었다.

    아리아드네가 손가락을 들어 그의 미간을 꾹 누르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지금 당신처럼.”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던가. 그는 그녀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문질렀다.

    “……싫지 않아.”

    유진의 대답에 아리아드네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정말? 그럼 종일 사람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건? 그것도 싫지 않아?”

    별안간 쏟아진 질문 세례에 그가 멈칫 굳고 말았다.

    “그건! 조금, 불편할 뿐이야.”

    시인이나 마찬가지인 대답이었지만 차마 괜찮다는 변명은 나오지 않았다.

    날 때부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라 온 아리아드네 같을 순 없었다. 어디를 가든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지만, 그것을 불평할 순 없었다. 그건 아리아드네 곁에 있으려면 그가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몫이었으니까.

    “그게 싫은 거지. 무리하지 않아도 돼.”

    아리아드네가 작게 웃으며 바짝 붙였던 제 얼굴을 물렸다.

    물론 자신의 기호보다 아리아드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는 그의 마음은 고마웠다. 하지만 한쪽이 무리하는 관계는 언젠가 무너진다. 아리아드네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정말 무리하는 게 아니야. 그것보다 아까 했던―”

    그가 다급히 항변하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토프 항구로 나오기 직전, 필요니 쓸모니 하며 나눴던 대화를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싶었다. 괜한 고집을 부려 아리아드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그의 손끝에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이 스쳤다가 거짓말처럼 빠져나갔다.

    “그 이야긴 나중에 해.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으니까.”

    화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평이하고 담담한 말투였다. 하지만 담담하다고 해서 그것이 거부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담담한 거부가 도리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유진은 제 속의 초조함을 누르지 못해 손을 말아 쥐었다. 그녀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가 유난히도 차가웠다.

    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어 성급하게 군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렇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그 혼자인 듯, 아리아드네는 근심 없는 얼굴로 토프 항구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아, 저건 뭐지?”

    아리아드네가 좌판에 널린 것 중 수염이 삐쭉 난 못생긴 생선을 가리켰다.

    “메기? 이렇게 작은 메기도 있어?”

    아리아드네가 가리킨 생선은 겨우 한 뼘이나 될까 한 크기였다. 항구에서 민물 생선을 같이 파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인접한 강에서 잡은 생선은 더 큰 시장인 항구로 흘러들어 오기 마련이었으니까.

    다만 이렇게 작은 메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생선을 살피는 아리아드네를 보며 유진이 입을 열었다.

    “바쉬, 바쉬라고 해.”

    “바쉬? 얘 말이야?”

    아리아드네가 생선을 가리키며 되묻자 기회를 포착한 상인이 냉큼 다가왔다.

    “고놈은 바셰라고 합니다. 아주 담백하니 맛있습니다. 몇 마리나 담아 드릴까요?”

    “처음 보는 어종인데 브리아에서만 나는 건가?”

    아리아드네의 이질적인 억양을 들은 상인은 그녀가 브리아 귀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이번 사절단에 포함된 페렌트 사람인가 보지. 그렇게 짐작한 상인이 바셰 한 마리를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다만 동대륙에서는 잘 먹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드릴까요?”

    내내 말이 없던 유진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애초에 아리아드네도 생선 같은 걸 사 들고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더군다나 민물 생선이라면 특유의 냄새 때문에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드릴까요?”

    “아니, 됐어. 바쁜 사람 귀찮게 했으니 값은 지불하지.”

    재차 권유하는 상인의 상술에 아리아드네가 동화 하나를 건네고 그 자리를 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인이 연신 허리를 굽히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데 왜 사지 말라고 그랬어?”

    좌판에서 적당히 멀어지자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염된 물에서도 잘 사는 어종이라 어디서 잡은 건지 모르면 안 먹는 게 좋아. 더러운 강에서 잡은 거면 탈 나기 십상이니까.”

    막힘없는 그의 설명에 아리아드네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당신도 쭉 동대륙에서만 지냈잖아.”

    “……예전에, 먹은 적이 있어.”

    그 순간, 유진의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바쉬, 외곽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생선이지. 대신 먹기 전에 내장을 꼭 확인해야 해. 내장이 이렇게 검붉은 빛을 띠면 썩을 대로 썩은 거야. 먹으면 구토와 뭐, 다른 건 말 안 해도 알지?

    그와 동시에 낯설기만 했던 브리아의 풍경이 달리 보였다. 몇몇 음식점에서 흘러나오는 독특한 향신료의 향기, 사람들의 말에서 언뜻 들리는 몇몇 단어들. 브리아는 그가 아는 어딘가의 풍경을 닮아 있었다.

    “그래? 언제?”

    “……좀 오래전에.”

    ―괴물……. 넌 괴물이야! 나만 그렇게 생각한 줄 알아? 다들 널 두려워했어. 5년 동안 머리카락조차 자라지 않는 널.

    엄청난 재앙이 휩쓸고 지나가 폐허로 남았던, 유진이 깨어났던 세상. 그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이제까지 그는 페루스의 힘으로 차원을 넘어 다른 세상 어딘가에 떨어졌던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유진은 묘한 기시감이 드는 브리아를 눈에 담았다.

    이곳의 문명이 고도로 발전했다가 한꺼번에 무너진다면 그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유진이 깨어났던 그곳은 정말 미래의 브리아였을까.

    반드시 답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왜 이제야 이런 실마리가 그 앞에 툭 떨어졌는지, 그는 제 앞에 놓인 단서가 행운인지 불운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 * *

    쏴아아아, 파도가 밀려들었다 물러나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됐다. 사박사박, 아리아드네가 맨발로 백사장 모래를 밟는 소리가 바람과 섞여 그의 귓가를 스쳤다.

    따사로운 햇볕, 적당히 뜨거운 모래,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 하늘을 닮은 바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아리아드네의 하얗고 가느다란 발목이 치맛단 아래로 슬쩍슬쩍 드러났다.

    아리아드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얀 발이 모래 속으로 푹푹 빠졌다. 치맛단은 모래가 붙어 금세 더러워졌다. 말없이 아리아드네를 지켜보던 유진이 무릎을 꿇고 그녀의 치맛단에 붙은 모래를 털어 냈다.

    “괜찮아. 어차피 다시 입을 옷도 아닌걸.”

    아리아드네가 피식 웃으며 옷을 잡아당겼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옷감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녀와 연결되었던 부분이 제 손에서 사라지자 조금 전까지 따사롭다고 생각했던 햇볕이 불처럼 느껴졌다. 적당히 뜨거웠던 모래도 한낮의 사막처럼 지글지글 끓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구멍 난 항아리에는 물을 채우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마음에는 바닥이 없었다. 아무리 그녀의 애정을 받아 마셔도 목이 몰랐다.

    그런데 그녀가 자꾸만 멀어지기까지 하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아야 할지, 이대로 개처럼 주저앉아 그녀의 부름을 기다려야 할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무엇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앞서 걷던 아리아드네가 모래사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웠다. 자그마한 장난감을 주워 든 그녀가 그것을 손가락에 걸고는 빙빙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아이 몇이 아리아드네에게 우르르 달려갔다. 짧은 대화 끝에 아리아드네는 아이들에게 동화 몇 개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이 잃어버린 물건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운 김에 값을 치른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뒤를 돌아보더니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조금 전 주운 물건이 들려 있었다.

    ‘기다려.’

    입 모양만으로 그를 묶어 놓은 그녀가 치마를 말아 쥐고는 그를 향해 달려왔다. 옅은 레몬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부서지는 햇빛처럼 반짝였다.

    “하아, 내가, 하, 뭐 주웠는지 알면…….”

    숨이 차 그를 붙잡고 밭은 숨을 뱉어 내던 그녀가 빙긋 웃으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바퀴 모양의 장난감이 놓여 있었다.

    “이게 포르투나의 수레바퀴래.”

    아리아드네가 손바닥 위에 놓인 바퀴 모양의 장난감을 데구르르 굴렸다. 바퀴는 손가락이 굴리는 대로 돌아갔다.

    “포르투나?”

    그것 또한 들은 적 있는 이름이었다.

    -포르투나의 룰렛이라고 해. 누가 ‘행운의 신’의 선택을 받았나, 그 행운을 시험하는 거지.

    -목숨을 가지고 하는 도박이라니. 다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가 보군. 그렇게 죽고 싶으면 그냥 죽지 그래?

    리볼버의 약실에 하나의 탄환 장전하고 제 관자놀이에 겨누는 그 미친 짓거리를 가르쳐 준 이는 그것을 포르투나의 룰렛이라 불렀다.

    “응. 행운을 관장한다는 서대륙의 신이야.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에 난폭한 신이지.”

    물처럼 잔잔한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유진은 생각했다. 포르투나의 이름은 먼 미래에도 목숨을 건 도박 앞에 붙어 살아남았으니, 난폭하다는 명성이 헛되진 않은 모양이라고.

    “행운은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수레바퀴처럼 변덕스럽고, 깨진 항아리처럼 탐욕스럽고, 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 주지 않으려 뒷머리조차 남겨 두지 않는 야멸찬 구석이 있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제 손에서 뱅글뱅글 도는 수레바퀴를 반대쪽 손으로 들어 올렸다. 수레바퀴는 이내 속도를 잃고 천천히 멈추었다. 아리아드네가 동그란 나무 조각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포르투나는 거친 풍랑으로부터 바다 사람들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기도 해.”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온한 그녀의 눈동자. 하지만 그는 저 눈을 마주할 때면 풍랑이라도 맞은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내가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 것 알아.”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는 그의 불안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의 분주함이 그를 외롭게 했나 보다고.

    “그런데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아무렇게나 놓을 수가 없어. 지금 내가 누리는 일상은 내 부모님과 부모님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거니까. 내게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내일을 물려줄 책임이 있어.”

    아리아드네에게는 그와 지내는 일상이 소중한 만큼, 이제껏 그녀가 쌓아 올린 성과 또한 중요했다.

    “나는 페렌트의 내일을 책임져야 해. 내가 알지 못하는, 먼 미래의 페렌트라도 나는 그곳의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세상을 살기를 원해.”

    그녀는 타인의 일상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자리의 무게였다.

    “미안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거면서 당신의 상냥함에 기대기만 해서.”

    자신이 선택한 길이 그를 외롭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알면서도, 아리아드네는 무엇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시선을 마주친 그녀가 싱긋 웃으며 거리낌 없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종일 그에게 절망을 안겨 준 손이 금세 그를 환희로 물들였다.

    맞닿은 손끝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녀가 그의 손을 파고들어 손가락을 차례로 얽었다.

    “우리, 결혼할까?”

    그녀가 툭 떨어트린 말과 함께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두 번째 마디도 채 지나치지 못하고 달랑이듯 매달린 바퀴 모양의 장난감이 걸려 있었다.

    “내가 당신의 행운이 되고 싶어. 당신에게 닥칠 풍랑을 막아 주고 싶어. 내 묘비에 당신 이름이 남았으면 좋겠어.”

    어린아이 장난감을 주며 청혼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거절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처럼 깨끗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환희와 열망만이 있을 뿐, 초조함이나 불안함 같은 것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언제 빠질지 모르는 늪 위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그의 사랑이라면, 아리아드네의 사랑은 단단한 땅에 두 발을 딛고 선 채로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으니까.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의 형태마저 같을 순 없었다.

    바닥이 없어 아무리 부어도 채우지 못하는 제 마음은 평생 탐욕과 불안에 시달릴 터였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그의 사랑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제대로 준비해서 말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더는 못 참을―”

    시간을 들여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말 같지도 않은 오해도 풀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석을 준비하고 싶었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비루한 것이 내가 될까 봐,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 흠으로 남게 될까 봐 두려웠어.”

    결혼 같은 제도로 그녀와 묶일 욕심은 차마 내지도 못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것이지만, 그녀는 그만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제 흠이 그녀를 상처 입힐까 두려웠다.

    “아니, 당신이 잘못 생각하는 게 있어.”

    그의 품에 안긴 아리아드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그 무엇도 내 흠이 되지 못해. 잊었어? 내가 누군지.”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를 선택한 그녀는. 그 무엇도 그녀의 불운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사랑한 그녀는 스스로 가장 찬란한 행운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자신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 답은 이미 그에게 있었다.

    “어쩌면 말이야. 나 페렌트의 미래를 봤던 것 같아.”

    그녀는 더 나은 페렌트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없는 페렌트를 알았다. 그가 꿈에서 본 조각조각 찢어져 무너져 가던 페렌트, 그 페렌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무너진 페렌트의 미래를 알았다. 아니, 그곳에서 살았다.

    폐허가 되어 버린 유진의 세상. 페렌트의 왕궁에서 제 육신을 셋으로 가르고 떠난 레오의 영혼이 도착한 곳은 모래사막이 되어 버린, 아득히 먼 옛날 페렌트의 왕궁이 있었던 자리.

    레오의 영혼이 건넌 것은 얼마인지도 모를 아득한 시간이었다.

    페렌트였던 그 땅에 브리아의 흔적만이 남은 것은 브리아가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것이니까.

    “그래? 페렌트의 미래는 어땠어?”

    재앙이 되어 버린 세계, 죽음만이 구원인 삶, 배를 채우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

    “평화롭고, 아름다웠어. 당신이 바라던 그대로.”

    그것은 기만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세상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였으니까.

    그녀의 페렌트가 브리아에 패배할 리 없었다. 그녀의 왕궁이 모래사막으로 남을 일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게 그 미래를 선물한 건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내게 준 기회가 내 미래를, 페렌트의 미래를 바꾼 거야.”

    그녀는 마치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말했다. 당신이 선물한 그 시간 덕에 나는 그 지옥 같은 미궁을 탈출했노라고.

    “그러니까 내 미래에는 당신이 있어야 해.”

    그녀가 바라던 미래가 그에게 있다면, 그 또한 그녀의 행운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로 영원히 남을 수 있었다.

    “대답해.”

    그녀의 채근에 그는 천천히 몸을 굽혀 모래사장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네 번째 손가락에 우스꽝스러운 장난감을 매단 채 막 돋아난 새순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아리아드네와 닿은 이 순간에도 그녀를 향한 목마름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이것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하지만 제 탐욕은 고통마저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녀의 곁에 있는 한 제 목마름이 끝이 나지 않는다 해도, 제 불안이 영혼마저 갉아먹는다 해도. 그는 채워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바닥이 없는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말했지? 이곳에서 약지는 영혼과 사랑을 품고 있다고.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언젠가 페렌트 왕궁 어느 정원에서 사랑을 말한 아리아드네에게, 그날의 대답을 할 수 있다면…….

    그의 입술이 아리아드네의 네 번째 손가락에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이것은,

    미궁 속을 헤매는 괴물을 구원한 당신에게 바치는 헌사.

    갈증을 이기지 못해 죽을 때까지 바닷물을 마셨다는 어느 멍청한 여행자처럼, 그녀의 사랑 속에서 죽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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