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48)

* * *

그런 순간이 있다. 어떤 전조처럼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진득한 늪처럼 그를 잡아당기던 아리아드네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아니, 단순히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처럼 깨끗이 지워졌다.

뒤를 돌아본 그는 낡은 신전의 어디에서도 그녀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대체 어디에,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어떤 예감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바람에 나부끼는 색이 옅은 금색 머리카락과 펄럭이는 옷자락이 보였다. 그녀였다.

“아리아드네!”

그가 아리아드네를 부른 그 순간이었다.

[나는, 사냥이 끝나고 버려진 사냥개가 아니다.]

잔뜩 갈라지고 메마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생생히 되살아났다.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괴이한 풍경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높고 뾰족한 첨탑, 첨탑의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친 여자, 매서운 바람에 나부끼는 거칠고 푸석푸석한 여자의 머리카락까지. 나부끼는 머리카락 사이로 마치 푸른 불이 붙은 것 같은 여자의 새파란 눈이 보였다.

[내 피가 네 발을 적시면 나는 다시 삶을 얻으리라.]

아아, 그녀였다. 절망의 끝에서도 조금도 비굴하지 않았던, 그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지는 않으리라.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그것은 패배자의 자기변명도, 저주도 아니었다. 확신에 찬 예언이었다. 온 세상을 발아래에 둔 것처럼 오만한 모습 그대로, 그녀는 첨탑에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낙하했다. 마치 지금처럼.

“안 돼!”

또다시, 그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아리아드네를 받기 위해 다급히 팔을 뻗었다. 털썩, 그가 뻗은 팔 위로 아리아드네가 떨어졌다.

그때는 왕의 결혼 행렬을 위한 흰 비단 위로 떨어졌던 그녀가, 지금은 그의 품에 있었다. 그는 품 안의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꽉 안았다.

조금 전 자신이 듣고 본 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환청이고 환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실재했던 과거였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녀가 경험했던 언젠가의 과거이자 미래였던 그 시간들.

아리아드네의 죽음. 그것은 그가 끝까지 채우지 못했던 기억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끝까지 알 수 없었던 다른 마지막 조각의 행방 역시도.

[내 가족을 돌려줘. 내 삶을 돌려줘. 내 시간을 돌려줘. 나를, 나를 돌려줘.]

그때의 자신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당신의 목숨으로 그 바람을 이루리라.]

그녀의 후회를, 그녀의 삶을 되돌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라도 바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시간을 되돌렸건만 정작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은 것은 그였다.

그가 찾아 헤맨 것은 잃어버린 기억도, 셋으로 나뉜 육체도 아니었다. 전부, 전부 그녀였다.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맨 것이 전부.

“당신이었어, 당신이…….”

그의 입술이 아리아드네의 이마 위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눈물이 매달린 길게 뻗은 속눈썹에도 위로 같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내 곁에 있겠다고 했으면서…….”

아리아드네가 가쁜 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원망을 쏟아 냈다. 이런 그녀를 떠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런데…….

“……끝났다고.”

그때, 등 뒤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본 유진의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세운 채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아그네스가 보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품 안의 아리아드네를 밀어냈다.

“유예는 끝났다고 했잖아.”

아그네스는 직감했다. 이대로 두면 아리아드네가 자신에게서 죽음마저 빼앗아 갈 것이란 것을.

“디티, 난―”

유진이 무엇이라 말하기도 전에, 아그네스가 별의 그릇을 휘둘렀다.

“잘 가, 레오.”

이별의 인사와 함께 별의 그릇이 유진의 오른쪽 가슴에 박혔다. 권속이 심장이 자리한다는 바로 그 자리에.

“이제, 이제야 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을 마주했다는 희열에 별의 그릇을 쥔 아그네스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유진의 심장에서 황금색 빛이 흘러나오기를, 그래서 그것이 자신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별의 그릇에 찔린 유진의 가슴에서는 황금색 빛이 아닌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마치 인간처럼.

“이럴, 이럴 리가 없는데, 왜, 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권속에게 심장은 자신의 성력이 응집된 근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곳에 페루스의 심장이 있다면, 모라의 성물과 만난 페루스의 성력이 이렇게 조용할 리 없었다. 모라의 성물인 별의 그릇과 접촉한 것만으로도 미친 듯이 날뛰어야 정상이었다.

“네 기억에서 봤을 때는 이렇지 않았어. 이렇지 않았는데…….”

아그네스는 레오의 팔에 남은 기억에서, 그가 페루스의 심장을 찔렀던 순간을 목격했다. 별의 그릇이 페루스의 시간과 힘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던, 레오가 권속이 되었던 바로 그 순간을.

아그네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유진의 오른쪽 가슴을 더듬거렸다. 성물이 아닌 별의 그릇은 흉기도, 무기도 아니었다. 유진이 입은 상처는 끝이 뭉툭한 둔기에 얕게 찔린 것이 전부였다.

“디티…….”

아그네스의 양 손목을 감아쥔 유진이 괴로운 듯 한숨을 토해 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지금의 내겐, 권속의 심장이 없어.”

그 말을 들은 아그네스는 온몸의 힘이 빠진 듯 휘청거렸다. 데구르르, 아그네스의 손에서 떨어진 별의 그릇이 바닥을 굴렀다. 그것은 유진의 발치에 이르러서야 멈추었다. 그가 제 발치에 떨어진 흰 뼈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한숨처럼 덧붙였다.

“날 죽여도, 네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그네스는 마치 듣지 못할 말을 들었다는 듯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거, 짓말,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권속의 심장을 지닌 존재가 그것을 잃는 방법은 힘이 다해 소멸하거나 그것을 다른 이에게 넘기는 것뿐이었다. 심장을 넘기면 소멸하게 되니 결국, 심장이 사라진 권속이 맞이하게 되는 결말은 하나였다. 그런데 권속의 심장을 잃고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이야. 나도 조금 전에야 알았어.”

[나는, 사냥이 끝나고 버려진 사냥개가 아니다.]

잃어버렸던 기억의 마지막 조각에 이르러서야 그는 깨달았다.

[내 가족을 돌려줘. 내 삶을 돌려줘. 내 시간을 돌려줘. 나를, 나를 돌려줘.]

아리아드네의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 과거의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셋으로 나뉜 레오의 육체 중 ‘페루스의 심장’만은 왜 끝까지 그 행방을 찾지 못했는지도.

“페루스의 심장은, 그것에 고인 시간은 이미 모두 써 버렸어. 내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자신이 빼앗은 아리아드네의 삶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의 환한 웃음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때의 ‘그’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바칠 수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 권속의 심장을 갈라 바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기꺼워했다. 저주스러운 자신의 육체가 그녀의 쓰임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레오, 아니지? 권속의 심장을 잃고도 네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시간을 거슬러 온 것도 아닐…….”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그네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심장을 잃은 권속은 반드시 소멸한다.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 권속이 된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권속이 소멸할 만큼의 큰 충격을 인간의 몸이 버텨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권속의 심장을 잃은 채 시간을 거스른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권속의 심장을 잃고도, 인간의 심장에 기생해 인간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 살아가는 것이.

그렇다면, 그 시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쓰인 걸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저 여자야?”

아리아드네를 가리킨 아그네스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저 여자에게 네 심장을 바친 거야?”

아그네스의 물음에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답이나 마찬가지였다.

“하, 그래서, 그래서…….”

아그네스는 미친 사람처럼 웃어 댔다. 아리아드네를 볼 때마다 느꼈던 불안함은 자신에게서 죽음을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죽음을 빼앗겼음을 알아차린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미친 듯이 웃어 대던 아그네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치렁치렁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왜, 도대체 왜.”

낮게 중얼거리던 아그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에서는 눈물이 피처럼 흘렀다.

“왜! 내가 그걸 위해서 이제껏 무슨 짓을 했는데!”

아그네스가 비통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죽고 싶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이용당하는 삶도, 이용하는 삶도 지긋지긋했다.

오로지 죽음 하나만을 바라고 버텨 온 삶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아그네스는 도덕도, 이상도, 최소한의 양심과 애정마저 거리낌 없이 이용했다.

버릴 수 없게 될까 봐 소중한 것은 아예 만들지도 않았다. 그랬는데, 그렇게 살았는데, 권속의 심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완전한 죽음을 이루겠다는 아그네스의 소망은 더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살고 싶지 않아, 난 정말 단 한 순간도 더 살고 싶지 않아.”

아그네스는 헤아릴 수 없는 절망에 잠긴 채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제발, 누가 나를…….’

그토록 바라던 완전한 죽음이 아니라도 좋았다. 아무라도 좋으니 저주스러운 이 삶을 끝내 주기를, 그래서 고통스러운 모든 기억을 잊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아그네스는 알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을 이 절망에서 꺼내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아그네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감쌌다. 아무도 자신을 죽여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으면 그만이었다. 목을 감싼 양손에 힘을 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푸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가슴께에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그네스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을 관통한 칼날이 손가락 길이만큼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흐윽, 엄, 엄마…….”

울먹이는 목소리에 아그네스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비틀대더니 이내 고꾸라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황금을 그대로 녹인 것처럼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바닥에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베아, 트리스…….”

아그네스는 자신의 가슴에 꽂힌 칼날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딸의 이름을 불렀다. 어쩌면 마지막 교황의 등에 칼을 꽂은 성녀로 기록될지도 모를 그 이름을.

아그네스의 부름에 베아트리스가 눈물범벅인 얼굴을 들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 이젠 알아요. 어머니가 자신을 죽여 줄 사람이 필요해서 나를 키웠다는 걸…….”

베아트리스는 아그네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아그네스가 그토록 자신을 몰아붙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위대한 성물의, 진정한 주인이 되라는 그 말도, 이런 뜻이었다는 걸…….”

위대한 성물의 진정한 주인, 그것은 ‘별의 그릇’을 통해 페루스의 힘을 가지라는 말이었다.

“그래. 내 계획, 대로라면……. 넌, 권속이 된 나를 죽여 줘야 했어.”

아그네스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린 채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로부터 모든 힘과 시간을 넘겨받아 권속이 된다고 해서 그녀가 바라는 완전한 죽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권속이 된 아그네스를 소멸시켜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끝없는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며 권속과 유사한 존재가 된 베아트리스는 페루스의 힘을 담기에 아주 적합한 그릇이었다. 그래서 베아트리스는 아그네스의 죽음을 완성할 마지막 열쇠가 되어야 했다.

그녀가 원한 완전한 죽음이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비록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으나.

“……아무,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너만은 내 뜻대로 움직여 주었구나.”

아그네스는 베아트리스의 행동에 작은 위안을 받았다. 공들여 준비한 마지막 희망만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쁜 듯 웃는 아그네스의 입가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눈동자에서도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엄마, 엄만 내가 엄마를 미워해서 칼을 들었다고 생각해요?”

베아트리스의 물음에 아그네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가슴에 꽂힌 칼을 내려다보았다.

베아트리스가 자신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키우고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베아트리스가 자신을 찌른 것이 증오 때문이 아니라니,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그랬다면, 내가 엄마를 미워하길 바랐다면,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베아트리스가 가쁜 숨이 버거운지 가슴을 움켜쥔 채로 비통하게 외쳤다.

“잠든 내 얼굴을 보며 자장가를 불러 주는 일 따위 하지 말았어야 해요. 악몽을 꾸는 내 얼굴을 그렇게 쓰다듬지도 말았어야 해요.”

아그네스의 자장가는 베아트리스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노래였다. 악몽 속을 헤맬 때면 언제나 자신을 인도하듯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안심하곤 했다. 노래를 부르는 아그네스의 목소리는 너무도 다정해서, 베아트리스는 이따금 이대로 악몽에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게, 하지 말았어야…….”

어쩌면 자장가는 아그네스를 계속 사랑하기 위한 핑계일지도 몰랐다. 베아트리스는 아그네스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엄마, 엄마 계획은 전부 실패했어요. 난 엄마를 증오하지 않아요. 내가 엄마를 찌른 건, 그건…….”

억지로 울음을 삼킨 베아트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엄마가 그걸 원하니까, 엄마 소원이 그거니까, 나는 엄마의 삶이 되어 주지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베아트리스는 되도록이면 아그네스와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혼자만의 바람인 걸 알았다.

“엄마가 바라는 것이 정말 그것뿐이라면, 엄마, 이젠 그만 살아요.”

아그네스에게 삶이 고통일 뿐이라면, 그 삶을 누군가가 끝내 줘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아그네스의 삶이 외로운 자살로 막을 내리도록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베아, 트리스, 넌, 정말…….”

아그네스의 눈이 놀라움으로 순간 크게 벌어졌다가 잇새로 어이없다는 듯 한숨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그녀가 예상한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맹목적인 감정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겨우 지탱하고 있던 아그네스의 몸이 마침내 힘이 빠진 듯 천천히 무너졌다.

“엄, 마!”

베아트리스의 외침과 함께 바닥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아, 부딪힌다. 아그네스가 추락을 예감하고 눈을 감은 그때, 다급히 다가온 유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아그네스를 받아 냈다.

“엄마, 엄마…….”

유진의 품에 안긴 채 색색, 숨을 몰아쉬는 아그네스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힘겹게 눈을 뜨자 온통 눈물로 젖은 베아트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아그네스는 아직도 자신에게 어떤 애정이 남은 베아트리스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베아트리스의 눈에 담긴 절망은 쉽게 헤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쯤이면 미움이 애정을 죄 덮어야 하는데…….

“엄마, 내가 누군가의 권속이라면, 권속이 보답받지 못할 일방적인 애정에 매달리는 거라면, 그렇다면 난 엄마의 권속일 거예요.”

아, 아그네스의 실수였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지 못한 아이에게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 아이가 얼마나 맹목적일 수 있는지 그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내가 제일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은, 유진이 아니라 엄마였으니까.”

베아트리스가 축 늘어진 아그네스의 손을 감싸, 그것에 이마를 비비며 울먹였다.

“엄마의 그 모든 죽음을 함께한 것은 나였는데, 나는 언제나 엄마에게 속해 있었는데…….”

그 끔찍했던 죽음의 순간에 혼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것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래서, 내가 엄마의 권속이라서, 나는 엄마를 그렇게 사랑했나 봐요.”

아그네스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채 아이처럼 엉엉 우는 베아트리스를 달래 줄 수도, 다그칠 수도 없었다. 도구가 아닌 베아트리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그네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잔뜩 일그러진 유진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기운이 쭉 빠졌다.

“역시, 넌 좀 모자라. 지금 화내야 할 사람은 넌데…….”

디티의 기억에서 쌍둥이 오빠는 언제나 큰 근심거리였다. 요령 피울 줄도 모르고, 눈치도 없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약해져서 언제나 손해만 보는.

“그런데, 왜 네가 그러고 있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널 내내 원망한 것은 나였는데.”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감당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

페루스에게 먹히는 자신을 보고 머뭇거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레오는 원망을 쏟아 내기에 아주 적합한 상대였다. 그래서 레오가 모든 것을 잊고 ‘유진’이 되어 돌아왔을 때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레오가 더는 자신의 원망과 고통을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이 지옥에 자신만 남겨 두고 혼자만 행복해질까 봐.

“진짜, 어디서 저런 여자를 만나서…….”

아그네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는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잿더미만 남은 자신에게조차 불씨를 불러일으키는.

질투였다.

자신이 꿈꾸던 이상도, 그것을 실현할 힘도, 그것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도 모두 갖춘 아리아드네를 질투했다. 하지만 아그네스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희망.

어이없게도 희망을 품게 되는 자신이었다. 지옥이 지옥인 이유는 더는 희망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인데.

모든 것을 잊고 아리아드네 곁에서 행복해진 ‘유진’을 보면 참을 수 없이 부러워지곤 했다.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다, 행이야, 너라도 행복해져서.”

하지만 이제 와 행복을 꿈꾸기에는 죽음만을 바라고 그것을 향해 달려왔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녀가 품은 희망은 너무도 미약해 죽음을 향한 관성을 이기지 못했다.

“나, 피곤해. 너무 지쳤어. 이젠 정말 쉬고 싶어.”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달리기엔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아그네스의 시야가 점멸하는 것처럼 까맣게 변했다 다시 하얗게 돌아왔다. 이제 정말 끝인 듯했다.

“엄마, 엄마…….”

아그네스의 얼굴을 쓰다듬는 베아트리스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로 울먹이는 베아트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리, 우리 꼭 다시 만나요.”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의 귓가에 자신의 남은 희망을 토해 냈다. 아그네스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완전한 죽음을 원했지만, 베아트리스는 마지막 소망만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나, 다음엔 엄마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세계의 전부인, 그래서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딸로 태어나서.

“그래서 그땐 날 아주 많이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아그네스는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바람에 흩날린 장미의 붉은 꽃잎 하나가 나풀나풀 날리다 아그네스의 눈을 덮었다. 천천히 눈을 감은 아그네스의 세상이 그대로 암전했다.

“엄마, 엄마, 잘 가요.”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의 이마에 이별의 키스를 남기며 속삭였다.

“…….”

유진은 자신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그네스를 말없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반듯이 눕힌 아그네스의 시신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길이 아그네스의 시신에 닿을 때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빛들이 그녀의 시신 주위로 모여들었다.

빛이 닿은 곳 주위로 아그네스의 시신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빠르게 삭아 내렸다. 이내 한 줌의 먼지로 남은 그녀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그대로 흩어졌다.

―레오, 또 여기 있었어?

흩어지는 가루 사이로 들꽃을 한 아름 품은 채 환하게 웃던 디티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삶을 살더라도 너는 내 영혼의 반쪽이니까.

“잘 가.”

유진은 반짝이는 빛들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녀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디티가 죽은 지 꼭 천 년 만의 인사였다.

* * *

아그네스의 시신마저 한 줌의 가루로 흩어져 버린 낡은 신전에는 무거운 적막과 저마다의 고뇌가 짙게 깔렸다.

교황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자들은 아득한 혼란 속을 헤매는 중이었고, 엄마가 세상의 전부이던 소녀는 스스로 그 세상을 부순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아그네스를 찔렀던 검을 품에 안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검의 주인인 막내 기사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베아트리스 곁을 맴돌았다.

유진은 베아트리스를 달래 볼까, 잠깐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지금은 혼자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몸을 굽혀 바닥에 굴러다니는 별의 그릇을 주워 든 유진이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갔다. 아리아드네는 그가 다급하게 밀어낸 그대로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저, 아리―”

그가 조심스럽게 아리아드네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때였다.

“……감히.”

그의 멱살을 움켜쥔 아리아드네에게서는 등골이 쭈뼛 설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나를 두고 죽으려고 했어?”

숨 쉴 틈도 없이 단단히 멱살을 거머쥔 아리아드네의 손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유진이 힘이 잔뜩 들어간 아리아드네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거친 것에 익숙하지 않은 여린 손에 상처라도 남을까 걱정이었다.

“용서 안 한다고 했어. 그런데, 그런데도―”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운지 아리아드네가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다면…….”

아리아드네의 손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화풀이용으로라도 당신 곁에 두면 안 될까?”

입가에 난처한 웃음을 매단 채 애원했다.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듯 유진의 손을 털어 낸 아리아드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의기양양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다 평생 안 풀리면 어쩌려고?”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야. 평생 당신 곁에 남을 수 있을 테니까.”

사랑스럽고 다정한 나의 폭군, 그녀의 지배가 부디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당신 입으로 말했어. 후회해도 소용없어. 절대 안 놔줄 거야.”

유진을 잡아당긴 아리아드네가 푸른 눈을 빛내며 말했다.

“기꺼이.”

짧은 대답을 마친 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드리우는 햇살이 유난히도 눈이 부셨다.

―외로움에 미친 추악한 짐승, 실패한 염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퉁이, 제 반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장님, 심장이 파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머저리. 왜 더 말해 주랴?

자신을 비웃던 무렉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그때는 몰랐다. 심장이 파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머저리, 그 말이 이토록 달콤한 줄은.

천천히 눈을 뜨면 그를 바라보는 맑은 하늘 같은 눈동자가 있었다.

“내가 기다리던, 내가 찾아 헤맨 모든 것이 당신이었어.”

어떻게 몰랐을까,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네게 죽음을 선물할 여자를 찾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헤매리라.’

그는 이미 죽음을 선물받았는데. 아리아드네의 시간을 되돌리며 권속의 심장을 바친 그는 더 이상 불사의 몸이 아니었다. 이 몸에 남은 수명이 다하는 날, 그는 죽을 수 있었다.

‘사랑과 죽음이 함께 오나니 사랑도 죽음도 피할 수 없으리라.’

두 번째 예언을 듣고도 몰랐다. 첫 번째 예언이 완성되었으니 새로운 예언을 받은 것일 텐데.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영원과도 같은 기다림 끝에, 죽음과 사랑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사랑이 노도(怒濤)처럼 그를 덮쳤다.

“전부, 전부 당신이었어. 내가 기다리던 것도, 내가 찾아 헤맨 것도 전부.”

그의 심장을 가져간 그의 주인.

“사랑해.”

그의 고백과 동시에 유진의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던 별의 그릇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파삭,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별의 그릇에서 마지막인 것처럼 빛이 뻗쳐 나왔다. 신의 성물이라 한들 영원할 순 없었다. 세계의 시간을 되돌리며 한계에 다다른 성물이 조각조각 깨지기 시작했다.

“이걸로 정말 끝이야.”

아리아드네는 반짝이는 금빛으로 흩어지는 별의 그릇을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머지않아 진정한 끝이 오리니 네 죽음이 그 시작을 알리리라.’

어쩌면 루안의 예언에서 말한 진정한 끝이 이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의 그릇에 찌꺼기처럼 남은 영혼의 조각들에게 이보다 더한 끝은 없을 테니.

“그러고 보니까 나도 별의 그릇이 말하는 예언을 들었던 것 같아.”

탑에 갇혀 처음 별의 그릇을 손에 쥐었던 그때, 아리아드네는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네 죽음이 모두를 구원하리라.’

그 예언대로 정말 모두를 구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는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들이 남아 있었다.

“나도 사랑해.”

그의 눈을 보며 작게 속삭이는 아리아드네 머리 위로 별처럼 빛나는 가루들이 내려앉았다.

돌이켜보면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절망한 순간도, 소중한 것들을 지켜 내지 못하고 무너진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곁에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와 함께하는 한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Never Say Never :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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