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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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신전에는 장미의 붉은 꽃잎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흩날리는 새빨간 꽃잎 사이로 아그네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끝까지 몰랐으면 좋았을걸. 일부러 그럴듯한 미끼까지 준비해 뒀는데.”

    그녀는 사라진 레오를 끌어내기 위해 베아트리스를 미끼로 이용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베아트리스는 존재 자체로 디티의 피와 페루스의 성력을 타고난 아이였으니까.

    ―어머니, 저 여기서 가만히 카푸트를 보고 있으면 소리가 들려요.

    ―…….

    ―이 땅에 카푸트의 참된 주인이 돌아올 거예요.

    아무리 애타게 찾아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레오의 귀환을 베아트리스만이 예감했던 그 순간, 아그네스는 몸의 반쪽이 잘려 나가는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삶을 살더라도 너는 내 영혼의 반쪽이니까.

    그렇게 말했던 자신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네, 꼭 돌아올 거예요. 우리는 서로의 반쪽이니까. 카푸트의 주인도 저를 기다리고 있겠죠. 빨리 보고 싶어요.

    자신이 주입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뇔 뿐인 딸조차 원망스러웠던,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조차 희미한 흔적일 뿐이었다.

    아그네스의 세상은 언제나 지옥의 다른 이름이었고, 지옥에서 되새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증오뿐이었으니까.

    “내가, 내가 어떻게…….”

    고개를 숙인 유진의 잇새로 고통스러운 듯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널, 몰라볼 수가 있겠어.”

    과거를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면 몰라도 레오의 기억을 되찾은 이상 디티의 영혼을 몰라볼 순 없었다.

    더구나 디티의 기억을 되찾은 아그네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이제는 자신과 한 몸이 된 페루스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것을 몰라보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몰라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끝까지 모른 척하지 그랬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그네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유진을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그녀의 걸음마다 시몬이 흘린 붉은 피가 자국처럼 찍혔다.

    “미안. 미안해, 디티.”

    유진은 점점 다가오는 아그네스를 보며 마치 죄인처럼 사과만을 되뇌었다. 그런 유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그네스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채 속삭이듯 물었다.

    “뭐가? 기억을 되찾고도 날 버려둬서?”

    그녀의 물음에 유진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이 막혀 왔다.

    “아니면, 내가 이 지옥에 있는 동안 너만 행복해서?”

    이어진 추궁에 그는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나는…….”

    그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그저 그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왜, 어떻게,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왜…….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기는 디티를 보고도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레오의 팔에 남은 참담한 기억이.

    ―레오, 또 여기 있었어?

    ―내일 신부의 의식이 끝나면 아르체를 떠나. 대사제님께서 네가 이곳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했어.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삶을 살더라도 너는 내 영혼의 반쪽이니까.

    하나뿐인 가족을 끝내 지키지 못했던 과거의 후회가.

    ―제발, 디티……. 우리 이대로 좀 더 살면 안 돼?

    모든 것을 기억해 내고도 디티를 외면하려 했던 제 이기심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그를 짓눌렀다.

    “괜찮아, 레오. 난 괜찮아.”

    다가온 아그네스가 무너진 유진을 일으키며 마치 위로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와 줬잖아, 그때처럼.”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의 가장 깊은 죄악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도, 망 가. 어서.’

    제물로 바쳐진 누이 앞에서 제 삶을 탐욕스럽게 갈구했던 바로 그 순간을.

    “레오, 넌 알고 있지?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오랜 시간 사막을 헤매다 물웅덩이를 발견한 사람처럼, 유진과 마주한 아그네스는 희열에 휩싸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디티가 다른 것을 바랄 리가 없는데.

    오직 죽음만을 바라던 자신이 아리아드네를 만나 생을 갈구하게 되었듯이, 어쩌면 디티에게도 아그네스로 사는 동안 다른 삶의 이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복수든 아이든 어떤 끈이라도 붙잡고 좀 더 살아 주었으면 했던 것은, 그저 자신이 이 삶을 조금이라도 더 연명하고 싶었기 때문에.

    “레오, 네가 가진 모든 시간을 내게 넘겨줘.”

    인간의 영혼은 불멸, 어떤 강대한 권능으로도 인간의 영혼은 멸할 수 없었다.

    “페루스의 시간을 넘겨받아 권속이 된 너처럼, 날 이 땅에 남은 마지막 권속으로 만들어 줘.”

    그렇기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완전한 죽음을 완성할 수 있게.”

    아그네스가 원하는 완전한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날 인간이 아닌, 진짜 괴물로 만들어 줘.”

    그녀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아그네스는 레오의 팔에 남은 기억 속에서 그 방법을 찾았다.

    ―드디어 방법을 알아냈군.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시간을 빼앗는 것도 가능하겠지.

    ―맞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려면 빼앗은 시간을 받을 그릇이 필요하지. 너는 내 시간을 가져간 것이다.

    페루스의 시간을 넘겨받아 권속이 된 레오처럼, 레오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며 소멸한 페루스처럼,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만 있다면…….

    “레오, 그렇게 해 줄 거지?”

    아그네스의 손에 들린 별의 그릇이 유진의 오른쪽 가슴에 닿았다. 권속의 심장이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 이대로 별의 그릇이 페루스의 심장을 찌르면, 그것에 고인 영원과도 같은 시간과 힘을 취할 수 있었다.

    “너도 기다렸잖아. 지긋지긋한 네 삶을 끝내 줄 존재를.”

    그것은 아그네스의 소망인 동시에 레오가 그토록 기다리던 저주의 끝이기도 했다.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하지만 누군가 그에게 사랑을 말하고.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그의 삶을 바라고.

    ―우리 그렇게 살아. 우리가 잃은 것들을 서로가 기억하면서 그렇게…….

    그의 과거와.

    ―서운하면 내 눈앞에서 털끝만큼도 다치지 마.

    고통마저 품어 줄 때마다 자꾸만 삶에 미련이 생겼다. 버려야 할 삶에.

    “디티, 나는…….”

    반짝이는 행복을 놓고 싶지 않아서, 또다시 디티를 외면했다. 디티의 손에 죽을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죽지 않을 방법을 궁리했다.

    이곳에 끌려오고도 디티와 마주하고 싶지 않아 내내 피하기만 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자꾸만 그를 망설이게 했다.

    “이젠 전부 끝내자. 너도, 나도 너무 오래 살았어.”

    그의 미련과 혼란을 모두 끝내 주겠다는 듯 아그네스가 별의 그릇을 높이 치켜든 순간이었다.

    “어머니!”

    새된 비명 소리와 함께 달려든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의 손을 붙들고 늘어졌다.

    “안 돼. 안 돼요, 어머니…….”

    아그네스의 몸이 베아트리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어도, 끝없는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며 스며든 성력을 각성했어도, 아그네스는 여전히 붉은 피를 흘리는 인간에 불과했다.

    인간의 몸뚱이를 벗어 버리지 않는 한 자신은 결코 불멸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시면 안 돼요. 제발, 다시, 다시 생각해 주세요.”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에게 절박하게 매달려 빌었다.

    “제발,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제발…….”

    이런 방식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아그네스가 죽으려 한다는 것은 베아트리스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 제발, 가지 마세요. 가시면 안 돼요. 이대로 가시면…….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출정하는 아그네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 나쁜 짓도, 할 수 있어. 어머니가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나는, 나는…….

    죽은 캐롤린을 이용하면서까지 아그네스의 행방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베아트리스는 아그네스를 막지 못했다. 막기는커녕 베아트리스가 살리바를 떠났던 것조차 아그네스의 계획일 뿐이었다.

    아그네스에게 베아트리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아그네스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는 사랑해 달라고 조르지 않을게요, 귀찮게 하지도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더군다나 어머니의 계획에 유진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니. 그런 것은 싫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도, 유진도 제발, 살아서, 살아만 주시면…….”

    베아트리스는 아그네스에게 매달린 채로 울고, 또 울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이런…….”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쉰 아그네스가 베아트리스의 눈물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베아트리스, 아직도 저이가 네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그게 무슨…….”

    베아트리스는 아그네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진이 자신과 하나의 영혼을 나눠 가진 반쪽이 아니라 해도, 어머니의 혈육이라면 가족인 것은 변함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네가 목만 남은 그를 보고도 사랑에 빠진 건, 그를 향한 애정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건―”

    다정하게 이어지는 말에 베아트리스는 처음 카푸트를 보았던 그날이 떠올랐다. 이유 없이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날 것 같았던, 숨을 쉬는 것조차 서러웠던 그날이.

    “그가 네 반쪽이어서도, 가족이어서도 아니야.”

    가족도, 반쪽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걸까. 혼란스러워하는 베아트리스를 보며 아그네스가 붉은 입술을 당겨 웃었다.

    “네가 그의 힘을 빌려 태어난, 그의 권속과 다름없는 존재라 그런 거란다. 자신을 만든 근원을 무한히 그리워하도록 만들어진 존재, 그것이 바로 권속이니까.”

    디티의 배 속에 있던 태아는 육체를 채 형성하기도 전에 모체와 함께 끝없는 죽음과 재생을 반복했다. 그것은 신들이 자신의 일부를 나누어 권속을 만드는 것과 유사한 데가 있었다.

    그렇게 디티의 아이는 사람도 권속도 아닌 그 무엇이었기에,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의 소망을 이뤄 줄 마지막 열쇠로써.

    “그런 것이 진짜 감정일 리 없잖니. 네가 그를 보며 느끼는 모든 것은 그럴듯하게 흉내 낸 모조품에 불과해.”

    권속이 자신을 만든 신에게 무한한 경외와 애정을 느끼듯, 베아트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진을 향한 베아트리스의 감정이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지, 아그네스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거짓, 말……. 그럴, 리가 없어.”

    그것을 부정당한 베아트리스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조차도.

    “어머니, 거짓말이죠?”

    눈물조차 말라 버린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에게 매달린 채 절규하듯 물었다.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외로운데, 이게, 이게 어떻게 거짓 감정이에요? 내가, 내가 이렇게 힘든데…….”

    마치 해일을 맨몸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베아트리스는 영혼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상하지 않았니?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그립고 가슴 저미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아그네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카푸트를 볼 때마다 느꼈던 가슴 벅찬 감동과 이해할 수 없었던 슬픔이 되살아나 베아트리스를 뒤덮었다.

    “상대는 널 귀찮은 짐 정도로 여기는데 너는 원망조차 할 수 없다는 것도.”

    홀로 저울에 올라간 것처럼 늘 한쪽으로 기울어진 애정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도.

    “그토록 일방적인 감정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니. 피조물을 만들며 거는 일종의 속박인 거지. 자신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지 못하도록.”

    그 모든 것이 아그네스의 말이 진실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그토록 외로웠던 거였다.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애초에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라서.

    버석하게 메마른 황금빛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그네스가 텅 비어 버린 베아트리스의 눈가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가 누누이 말했잖니. 네 세상에 사랑 같은 건 없다고. 그러니 아무도 사랑해선 안 된다고.”

    언제나처럼 저주와 같은 그 말이 베아트리스의 귓가에 마치 낙인처럼 스며들었다. 베아트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그네스의 붉은 눈동자에 황금빛을 띤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베아트리스는 깨달았다. 아그네스가 자신에게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탁한다, 내 딸아. 너만이 내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있으니.”

    아그네스의 손이 베아트리스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몸을 돌린 그녀가 유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진정한 끝을 향해서.

    아그네스의 창백한 손이 유진에게 닿으려는 찰나였다.

    “거기까지야.”

    유진의 몸이 뒤로 휙 당겨지며 옅은 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

    아그네스의 부름에 눈앞의 여자가 고개를 들어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쳐 왔다. 마치 푸른 불이 붙은 것 같은 눈이었다. 어떠한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당신이 누구이든,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든 이 사람은 내줄 수 없어.”

    아그네스에게서 지키려는 것처럼, 유진을 가리고 선 아리아드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간을 짓누르는 밀도 높은 공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입을 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거꾸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지켜야 했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디티.

    ‘디티’라는 존재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디티의 이야기를 하던 유진의 얼굴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에게 아그네스가 어떤 존재이든, 자신에겐 유진이 더 중요했다. 설사 그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 또 너군.”

    번번이 이렇게 거슬리기도 쉽지 않은데, 그렇게 중얼거린 교황의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나는 말이야. 네가 참 싫었어.”

    그토록 뜨거웠던 증오조차 이제는 희미한 흔적에 불과한데, 눈앞의 저 여자는 때때로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아그네스는 그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열기에 휩싸였다.

    “내게는 조금도 허락되지 않았던 모든 것이 네겐 너무 쉬워서. 내가 그토록 닿고 싶었던 곳에 넌 너무 쉽게 닿아서.”

    아그네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아름다운 세상이 누군가에겐 그토록 쉬웠다.

    ―내 희생으로 이곳을 지킬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

    그 작은 세상을 지키겠다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이 저주스러운 삶밖에 얻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자격을 잃은 것 아닙니까?

    누군가는 최소한의 희생조차 치르지 않고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하는데, 이 세상이 저 여자에게만은 그것을 용인해 줄 것 같아서, 그래서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왜 그랬을까. 너와 난 뭐가 달랐기에.”

    명망 높은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와 교황의 사생아라는 신분 차이 때문일까? 아니, 그것을 핑계로 삼기엔 아그네스는 명망 높은 가문의 후계자라며 으스대던 이들의 목을 베고 이 자리에 올랐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랑받으며 자란 것과 그렇지 못한 차이일까. 아니, 제 생부와 랭스턴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시몬의 꼬락서니를 보면 그것도 이유는 아닌 듯했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을 생각하다 보면 마치 제 것을 뺏긴 것 같은 분노가 밀려오곤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 네가 나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증오로 복수를 선택하고, 복수의 끝에서 소멸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고 지금 너처럼 희망과 행복을 말했을까?”

    아리아드네는 그랬을 거란 대답을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기엔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무너트려서라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았다.

    자신 또한 오로지 증오만으로 하루하루 버텼던 날들이 있었다. 단지 자신은 아그네스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자신에겐 사랑하는 사람들도, 지키고 싶은 것도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살고 싶습니까.]

    그때 자신을 찾아온 유진에게 살고 싶다고, 이곳에서 나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들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세상에서 왕이 된 카이엔을 죽이고, 케이루스를 무너트린 다음에도 더 나은 페렌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페렌트를 계속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니, 자신이 여전히 페렌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운이 좋아서였다.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겪고도, 그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을 다시 사는 건 분명 흔치 않은 행운이었으니까.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나도 모르지.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아그네스의 불행과 절망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에 잠식될 순 없었다. 아리아드네에겐 아리아드네의 삶이 있었으니까.

    “단지 내가 아는 건 당신에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뿐이야.”

    그리고, 교황의 뒤로 늘어선 저들에게도 저들의 삶이 존재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각자의 삶이.

    “저 사람들을 이 자리까지 데려왔으면, 남의 인생을 발판 삼아 그 자리에 올라갔으면, 저 사람들의 남은 삶을 책임져.”

    아리아드네의 말을 들은 교황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누구? 이 버러지들?”

    아그네스가 제 뒤에 선 사람들을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성하, 그게 무슨…….”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황한 성기사 하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싸늘한 얼굴로 성 상티모니아 사람들을 한 차례 훑은 아그네스가 다시금 아리아드네를 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작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성 상티모니아를 잘 이끌어 보려 이 자리에 나선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교황의 대답에 성기사들은 사형 선고라도 들은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놀란 것은 그들뿐, 아리아드네는 이미 짐작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당신 죽는 자리에 끌고 왔단 거야? 함께 죽으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교황의 행보에 ‘증오’라는 감정을 넣으면 명쾌한 답이 나왔다.

    “네 목적이 페렌트의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이었다면, 내 목적은 성 상티모니아의 마지막 교황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목적은 성 상티모니아의 부흥이 아니라 파멸이라는 답이.

    “이곳은 성 상티모니아의 무덤이 될 거야.”

    만족스럽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띤 아그네스가 노래하듯 말했다.

    “지금 이 숲 어딘가에서 페렌트의 기사들과 마물을 앞세운 성 상티모니아 사이의 전투가 한창이겠지.”

    개미굴에 펄펄 끓는 물을 붓고 개미 떼가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이처럼.

    “페렌트 기사 중 누군가 살아남아 증언을 해 줘도 좋고, 이 자리에서 모두 죽어 시체만 남는대도 상관없어. 어떻게 되든 성 상티모니아가 한 짓들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혹은 인간에게 신벌을 내리는 신화 속의 신처럼.

    “이왕이면 페렌트의 왕이 이 자리에서 죽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면 더욱 좋고.”

    천진난만하며 잔혹한 얼굴을 한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은 무자비한 선고를 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결집된 페렌트가 성 상티모니아를 철저히 무너트리겠지. 다시는 어떤 세력도 형성하지 못하도록.”

    수습 사제가 가진 성력을 탐냈던 역겨운 교황도, 탐욕으로 괴물을 불러낸 루이제 랭스턴도, 멍청한 이복동생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신을 빙자해 역겨운 짓을 일삼는 자들이 남아 있었다.

    아그네스는 그들을 지옥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밀어 넣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설사 자신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젠, 성 상티모니아가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가 될 거라고, 그 말씀만 믿고 성하를 따랐는데, 어째서…….”

    “이럴, 수는,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어찌하여 신의 대리자인 성하께서 성 상티모니아를 무너트리겠다 하십니까! 성하께서 누리는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진대.”

    교황에게 버림받은 신도들이 애통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들의 절망을 밟고 선 교황은 배부른 얼굴로 그들을 비웃었다.

    “신의 대리자라니, 우습기도 하지. 이 땅에서 신을 가장 증오하는 인간을 꼽으라면 바로 내가 될 텐데 말이야.”

    아그네스는 교황의 성좌에 앉은 자신도, 그런 자신을 우러르는 이들도 모두 우스꽝스러운 극에 오른 광대가 된 것만 같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 따위에 매달려 자신의 인생을 걸고, 남의 인생마저 짓밟고, 나를 제물로 바친 저 역겨운 자들을 나더러 책임지라고?”

    비웃듯 가늘어진 붉은 눈동자에 경멸과 증오가 짙게 떠올랐다. 디티를 제물로 바친 것은 성 상티모니아가 아니라 케이루스의 선조들이란 것은 아그네스에게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신을 믿는 자들이란 어차피 한 덩어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럼, 저 머저리 같은 기사는?”

    한숨을 내쉰 아리아드네가 바닥에 엎어진 리카르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을 언급할 줄은 몰랐는지 리카르도의 몸이 작게 움찔댔다. 그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리카르도는 당신이 자기 세상의 기준이자 정의라고 했어.”

    ―제 세상의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저를 구원하신 그분뿐입니다. 저는 그분이 베라 하면 베고, 그분이 지키라 하면 지킬 것입니다.

    아리아드네는 그 말을 하던 리카르도의 눈빛과 어조를 기억했다.

    “지금 이 숲 어딘가에서 내 기사들과 싸우는 성 상티모니아 기사들 중엔 있는지도 모르는 신은 안 믿어도, 당신을 신처럼 믿고 따른 자들이 있겠지. 그때의 리카르도처럼.”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다 희망을 좇은 것을 두고 잘못이랄 수는 없었다.

    “성 상티모니아도, 신도 아니라 당신을 믿고 따른 자들마저 저버릴 생각이야? 그렇게 버릴 거면 애초에 거두지도 말았어야지. 거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 그게 당신이 져야 할 무게야.”

    아그네스를 세상의 정의라고 믿고 따른 이들은 그녀가 복수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이 믿은 것은 신이 아니었으니까.

    “…….”

    아그네스는 새파랗게 빛나는 아리아드네의 눈을 보다 습관처럼 손끝을 입술에 대었다. 두고 온 연초가 생각나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저 파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자꾸만 기분이 더러워졌다.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은 언젠가의 열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아서. 이젠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부러 태연한 척, 혼란을 잠재운 아그네스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문에 달린 문고리가 낡아 떨어졌다고 마음 쓰는 사람은 없지. 책임져야 할 이유도 없고.”

    그녀의 대답이 불쾌한 듯 아리아드네의 미간이 구겨졌다.

    “사람은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야.”

    “네 세상은 그랬겠지.”

    아그네스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허전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릴, 물건이.”

    그때, 누군가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꽉 막힌 듯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쓰고 버릴 물건이 필요하셨던 거라면, 왜 하필 저처럼 더럽혀진 물건을 주우셨던 겁니까.”

    리카르도였다.

    마지막 순간, 아그네스의 뜻을 거스르고 캐롤린을 구하긴 했지만 리카르도의 인생 전반을 지배한 것은 분명 아그네스였다. 아그네스를 믿고 따랐던 세월을 모조리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버려진 물건엔…….”

    아그네스는 마치 손에 파이프가 들린 것처럼 손가락 사이로 공기를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독한 연초를 피운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버려진 물건엔, 아무도 눈독 들이지 않는 법이니까.”

    아그네스의 세상에선 그것이면 충분했다. 모든 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신의도, 애정도,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아그네스의 말에 마지막 믿음을 놓은 듯 리카르도의 눈이 허망한 빛으로 물들었다. 버린 사람도, 버려진 사람도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

    말로 채 뱉지 못한 의문들이 아리아드네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엉켰다. 아그네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따른 사람들도, 자신이 다스리던 성 상티모니아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단지 도구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뿐이었을까. 아그네스의 진심이 무엇인지 아리아드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 사람의 마음이란 결국에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교황 아그네스가 해 온 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그네스 성하께서 교황으로 즉위하신 후, 성 상티모니아 정화 사업이 있었습니다. 지위를 이용하여 사제를 겁박하고 그 몸을 취한 자, 금품을 받고 그것을 묵인한 자들의 목이 날아갔습니다.

    ―아그네스 교황이 즉위하고 마물의 발생 빈도가 이전의 삼분의 일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성물의 적극적인 회수, 성물의 엄격한 관리, 마물 진압에 힘쓴 결과입니다.

    아그네스에게 이 세상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반쯤 실신할 지경인 유진을 힐끗 돌아본 아리아드네가 입을 달싹인 그 순간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르겠군.”

    냉랭한 얼굴로 아리아드네의 말을 막은 아그네스가 손을 들어 그녀의 뒤쪽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지금 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닐 텐데.”

    아그네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아리아드네의 눈에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고 있는 캐롤린의 모습이 보였다.

    “캐롤린!”

    서둘러 달려간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을 품에 안았다. 캐롤린의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리, 아, 나 괜찮, 괜찮, 아.”

    겨우 눈을 뜬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안심시키려는 듯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다쳤으면 말을 해야지, 왜 아무 말도 안 해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자신을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인 캐롤린의 모습이 속상했다. 이렇게 다쳐 놓고 이 바보가. 아리아드네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캐롤린이 불안해할까 봐 서둘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마, 캐롤린.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잘 버텨야 해. 알겠지?”

    캐롤린은 대답할 힘도 없는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을 안은 손에 힘을 주려다 미끈거리는 감촉에 자신의 손이 피로 흠뻑 젖었음을 알았다. 캐롤린의 등에서 묻어난 것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시안과 함께 피가 흐르는 캐롤린의 등을 살폈다. 무언가에 걸린 듯 찢어진 드레스 너머로 톱니에 찍힌 듯한 상처가 보였다.

    “시안, 이거…….”

    아리아드네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타우루스의 독에 중독된 것 같습니다.”

    시안의 대답에 아리아드네는 안개 속에서 타우루스가 공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리아, 뒤쪽에!

    캐롤린이 그렇게 외치며 자신을 안고 굴렀던 것도.

    간발의 차로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사했던 건 자신뿐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희생으로 혼자만 안전한 곳에 남는 건 이젠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딴 짓을 반복해야 해. 대체 왜……. 질끈 깨문 입술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아리아드네는 당장이라도 모조리 뒤엎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

    “당장 위험한 건 아니겠지? 유진도 그때 중독됐지만 괜찮았잖아.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 치료만 잘 받으면…….”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머뭇거리던 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독은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빨리 반응한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신호입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쇠약해진 몸으로는 오래 버티기 힘드실 겁니다.”

    캐롤린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하얗게 질린 캐롤린의 얼굴을 쓸어내리던 아리아드네가 어떤 결정을 내린 듯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시안, 어려운 부탁인 줄 알지만…….”

    꺼낸 말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안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귀별 숲에 갇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지금, 어떤 상처든 치유할 수 있는 검은 피의 소유자가 함께 있는 것은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괜찮냐니 대체 뭐가…….

    그 순간, 아리아드네 머릿속으로 언젠가 시안과 나눴던 대화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검은 피가 부작용 없이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최초의 한 번뿐입니다. 두 번째부터는 독이 될지, 약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시안은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캐롤린은 시안의 피를 받아들여 몸의 상처를 치유한 적이 있었다. 캐롤린의 시신에 남은 상처를 없앤 것이 바로 시안의 검은 피였으니까.

    “리스벨 영애께는 제 피가 타우루스의 독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아리아드네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캐롤린의 목숨을 두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아리아드네가 떨리는 손으로 캐롤린의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또다시 캐롤린을 잃게 될까 봐, 머릿속이 공포에 갉아 먹히는 기분이었다.

    “피가 독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보니 그 드물다는 검은 피의 소유자이신 모양인데…….”

    아그네스가 흥미롭다는 듯 시안을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검은 피는 그 존재조차 모르는 이가 부지기수였지만, 아그네스는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이라는 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 죽을 방법만을 찾아 헤맨 사람이었다.

    죽음을 향한 그녀의 집념은 ‘검은 피’에까지 닿았었다. 그것도 결국 육체의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관심을 끊긴 했지만.

    “소르체의 성물조차 살릴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아그네스가 손에 든 별의 그릇을 흔들며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도와줄까? 네 입으로 레오를 버리겠다고 말해. 그럼 캐롤린 리스벨을 살려 주지.”

    이번에야말로 저 꼿꼿한 성정이 꺾이지 않을까, 아그네스는 죽기 전에 작은 여흥을 즐기는 기분으로 아리아드네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서 선택해. 독이 될지도 모를 검은 피를 받아들일 것인지, 레오를 네 손으로 넘겨줄 것인지.”

    마치 극의 결말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아리아드네의 결정을 재촉하는 아그네스의 목소리는 흥미와 기대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 이렇게 망설일 시간이 없을 텐데. 네 친구는 지금도 죽어 가고 있잖아.”

    연거푸 이어지는 아그네스의 재촉에 아리아드네도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무어라 중얼거렸다.

    “……쳐.”

    얼핏 들리는 말에 아그네스가 작게 미간을 찌푸린 그때였다.

    “시끄러우니까 그 입 닥치라고.”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는 듯, 다시 한번 일갈한 아리아드네가 곧장 상태 파악에 나섰다.

    “시안, 지금 캐롤린 상태면 얼마나 버틸 수 있어?”

    “늦어도 이틀 안에는 해독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숲에 독을 중화할 만한 약초가 있다면 좀 더 버텨 볼 수도 있습니다.”

    이틀, 가장 가까이 있는 도시에 사람을 보내 의원을 데려온다 치면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디까지나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왜 어렵고 불확실한 길을 가려 하지? 쉽고 확실한 방법이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닥치란 말 이후로 잠시 잠잠했던 교황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하,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아리아드네가 눈을 치켜떠 아그네스를 노려보았다.

    “모든 타우루스가 집게발에 독을 가진 건 아니야. 타우루스 중 집게발에 독을 가진 개체는 소수에 불과해.”

    살라도, 시안도 분명 그렇게 말했다. 타우루스 중 집게발에 독을 가진 개체가 ‘드물게’ 존재한다고.

    “그런데, 성 상티모니아에서 만들어 낸 타우루스의 집게발에 찍힌 사람들은 하나같이 독에 중독됐어. 그건 우연이 아니야. 그렇지?”

    그것은 시몬이 마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졌다는 뜻이었다. 사람을 마물로 만들고, 그 마물들로 사람을 공격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공격력을 높이기 위해 독을 가진 개체를 늘렸다니. 저들은 세상을 정말 지옥으로 만들 생각이었던가.

    “마물을 만들어 낸 건 당신이 아니라 시몬이라는 변명을 할 거면 집어치워. 그 마물을 이용하고 있는 건 지금 당신도 마찬가지니까. 성 상티모니아를 무너트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계략이었다는 말도 변명이 되지 않아. 왜 당신 복수에 아무 잘못도 없는 캐롤린이 희생되어야 해?”

    아그네스가 감당하기 힘든 불행과 절망을 겪었다는 것은 안다. 복수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그 마음도 이해했다.

    “당신이 겪은 불행을 동정해. 하지만 그게 내 사람들을 건드리는 당신의 행동을 참아 줘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해.”

    하지만 아그네스의 불행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에 동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당신 불행 때문에 나까지 불행해지진 않을 거야.”

    어떤 불행도 죄 없는 타인을 공격하는 일에 면죄부가 되어 줄 순 없었다. 아리아드네에게 아그네스는 독을 가진 마물을 이용해 캐롤린을 해친 적에 불과했다. 그것은 아그네스와 적이 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아그네스를 등진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진, 나가자. 우리 이 진창에서 나가.”

    유진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면 교황이 만든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를 이곳에서 데려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든 유진이 아리아드네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회색빛 눈동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돌아가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는 알았다. 아그네스는 바다 한복판의 소용돌이처럼, 사막 한가운데의 유사(流沙)처럼, 모든 것을 절망으로 끌어당기는 존재였다. 그녀의 불행에 유진을 던져둘 순 없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과거에도, 지금도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 살고 싶어 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압도하는 공포 앞에서 겁을 먹은 것도, 자신의 생명을 원하는 혈육으로부터 도망친 것도 잘못이랄 순 없었다. 그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었을 뿐. 불행은 잘못이 아니다.

    “내가 지나온 모든 여정엔 당신이 함께였어.”

    캐롤린을 둘러업은 시안과 멍하니 앉아 있는 리카르도, 그런 리카르도를 퍽퍽 발로 차 일으키는 달미에르, 비틀거리는 베아트리스와 그녀를 챙긴 막내 기사까지, 사람들이 차례로 다가와 아리아드네 뒤에 섰다.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아리아드네가 저 사람들과 함께하게 된 모든 여정에 그가 있었다. 그녀의 여정은 언제나 디움 산맥 너머를 꿈꿨던 그의 여정이기도 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유진은 자신을 향해 뻗은 아리아드네의 손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와 함께하는 매 순간은 언제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그런 날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니. 그것은 지나치게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그녀가 석상처럼 굳은 유진을 향해 한 발 다가간 그때였다.

    “아니, 아무도 여기서 못 나가.”

    아그네스가 음산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낮게 뇌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그네스의 손에 들린 별의 그릇에서 눈이 멀 정도로 환한 빛이 뻗쳐 나왔다.

    별의 그릇으로부터 시작된 빛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신전을 휘감았다. 위잉, 위잉, 윙윙윙, 낡은 신전을 휘감은 빛의 고리가 점점 빨라지더니 이윽고 금빛으로 물든 공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끼이익, 수만 갈래로 찢어진 공기가 마치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일행을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옭아맸다. 아리아드네가 수백 개로 조각난 무지개가 하나의 띠를 이룬 것 같은 빛의 고리 속에 갇힌 그때였다.

    “리스벨 영애!”

    캐롤린을 부르는 시안의 외침에 아리아드네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쿨럭, 캐롤린이 토한 검붉은 피가 공중에 흩뿌려졌다.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진 피가 신전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캐롤린!”

    아리아드네가 애타게 캐롤린을 부르는 것을 지켜보던 아그네스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이곳의 시간을 지배하는 건 나야. 네 소중한 친구가 지금 당장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너야말로 닥쳐.”

    페루스는 시간을 관장하는 모라의 첫 번째 권속. 그런 페루스의 권능을 일부 가진 아그네스는 시간을 다룰 수 있었다. 더구나 지금 이 공간은 아그네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시간을 빠르게 감아 캐롤린 리스벨의 중독을 가속시키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그네스는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채 삼키지 못한 피가 흘러내렸다. 감당하지 못할 성력을 연이어 쓴 탓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몸뚱어리 같으니.

    잇따라 흘린 피로 이제 그녀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푸른 기가 돌 정도였다. 독한 연초를 다발로 피운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극심한 현기증을 느낀 아그네스가 비틀댔다.

    “디티!”

    유진의 부름에 아그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그녀의 옷자락은 자신이 흘린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레오, 넌 알고 있지? 네 힘으로 이곳을 깨트리는 순간, 난 죽어.”

    앞선 두 차례의 균열로 이미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아그네스였다. 지금 그녀는 날붙이만 스쳐도 삶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거기에 다른 충격이 더해진다면 그녀는 반드시 죽을 터였다.

    “또다시 날 외면할 거야? 아니지? 그렇게 하진 않을 거지?”

    피 묻은 입가를 손으로 문지른 아그네스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네 연인까지 죽이고 싶어지기 전에 내 손을 잡아. 내 인내심은 그리 깊지 않아.”

    유진은 빛의 폭풍 속에 갇힌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를 토하고 늘어진 캐롤린 리스벨에게 다가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피를 흘린 채 웃고 있는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디티의 죽음을 외면해야 했다.

    자신의 손 안에서 늘어지던, 디티의 목숨이 꺼져 가던 그 순간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또다시 그럴 수 있을까.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금빛 폭풍 속에 갇힌 연인을 응시했다. 색이 옅은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구 휘날려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런 순간이 있다.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현듯 예감처럼 찾아오는 어떤 순간들이.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을 향해 다가가려 몸부림을 치다 서늘한 감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금빛 폭풍 너머에서 유진이 자신을 보며 아스라이 웃고 있었다. 바람결에 그대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은 희미한 얼굴이었다. 심장이 뛰었다. 손끝이 떨리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아리아드네는 불길한 예감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디, 티, 잠깐만, 시간을 줘.”

    “아까, 도…… 내, 인, 내심은, 그리 길, 지 않아…….”

    유진과 교황의 대화는 바람 소리에 막혀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끼이익,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다. 손톱 끝으로 쇠를 긁는 것처럼 높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리아드네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그 순간이었다. 귀를 덮는 서늘한 감촉과 함께 신전을 찢어발길 듯했던 돌풍이 멈췄다.

    유진이었다. 그가 아리아드네의 귀를 막은 채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거세게 불던 바람은 멈췄지만, 불안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얼굴을 만질 것처럼 손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리고 말았다. 물에 비친 상(像)처럼 손이 닿으면 그대로 흩어져 버리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디티,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이젠 그만해.”

    유진의 목소리가 손에 가로막혀 어쩐지 그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게 필요한 건 나 하나잖아.”

    아리아드네의 눈에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너만 내 뜻대로 움직여 준다면. 네 말대로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레오 너니까.”

    어느 순간부터 아그네스에게 ‘죽음’과 ‘레오’는 같은 말이나 다름없었다. 레오는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죽음, 그 자체였다.

    “있잖아, 레오. 난 계속 생각했어. 성물이 정말 이 땅을 떠난 신들이 남긴 축복일까 하고.”

    아그네스가 손에 쥔 별의 그릇을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 이런 게 어떻게 성물이고, 축복이 될 수 있겠어.”

    끊길 듯 이어지는 교황의 목소리조차 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했다. 아리아드네는 아득한 둘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분명 그와 닿아 있는 것은 자신인데, 혼자만 따로 떨어진 것 같다고.

    “성물은 신들이 이 땅에 남긴 축복이 아니야, 저주지. 쫓겨난 자들이 이 땅에 분란의 씨앗을 뿌리고 간 거야. 남은 자들끼리 행복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그것이 오래도록 신을 저주하고 원망한 끝에 찾은 아그네스의 해답이었다.

    “그런 자들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구원하는 수밖에.”

    신의 대리자라는 교황의 자리를 차지한 아그네스였지만 그녀는 신의 구원을 믿지 않았다. 쫓겨나듯 이 땅에서 도망친 신들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의 불행은 모두 인간의 손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 또한 스스로 쟁취한 것이었다.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유진을 향해 손을 내민 아그네스가 느리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레오, 유예는 이제 끝났어. 네 것이 아닌 것에 미련 갖지 마. 알고 있잖아. 지금 죽지 못하면 넌 또 혼자 남게 될 거야.”

    아그네스의 손을 보는 유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리아드네가 내민 손은 그토록 달콤했는데 디티가 내민 손은 이토록 아팠다.

    알고 있었다. 그토록 달콤한 제안은 제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그가 아리아드네의 귀에서 손을 떼려 힘을 뺀 순간이었다.

    “싫어.”

    아리아드네가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꽉 붙든 채 고개를 저었다.

    “난, 싫다고 했어.”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했다.

    “싫, 다고…….”

    그가 손가락을 얽어 양손을 단단히 맞잡은 채로 천천히 내렸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서글퍼서, 가슴이 시렸다. 가까이서 눈을 마주친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미안해, 아무래도 당신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이런 순간에도 자신을 보는 그의 눈동자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따스해서,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싫어, 가지 마.”

    당신을 아프게 하는 저 사람이 아니라 날 선택하라고, 왜 그러지 못하느냐고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었다.

    “그래도 당신 덕에 잠시나마 행복했어.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었을 만큼.”

    그의 손가락이 흘린 줄도 몰랐던 눈물을 닦았다.

    “약속했잖아. 다시는 날 떠나지 않겠다고, 내 곁에 있겠다고.”

    오열하듯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 앞에서 그는 더 이상 뻔한 사과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임을 알기에.

    그는 정신을 잃은 채 겨우 숨만 붙은 캐롤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모라의 그릇은 시간을 담는 성물, 그것만 있다면 생명을 가진 것의 시간도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라의 그릇을 만든 재료가 바로 페루스의 한쪽 뿔이었다. 그것은 페루스의 권능만으로 시간을 가둘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시간을 캐롤린의 몸에 천천히 흘려보냈다.

    그릇에 담기지 못한 대부분의 시간들은 그대로 흘러내려 마지막 빛을 내며 흩어졌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용케 길을 잃지 않은 시간들이 캐롤린에게 흘러 들어가 그녀의 시간을 움직였다.

    유진의 남은 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캐롤린의 시계가 조금씩 거꾸로 움직였다. 캐롤린이 타우루스의 집게발에 찍혀 독에 중독된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는 겨우 그만큼의 시간을 돌리기 위해 그 몇백 배에 해당하는 자신의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마치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모라의 힘이 깃든 성물이 없다지만 이 정도로 무능하다니. 그는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억지로 눌러 삼켰다.

    마침내, 혈색이 돌아온 캐롤린 리스벨의 속눈썹이 잘게 떨리더니 이윽고 그녀가 눈을 떴다.

    “……방문, 자님?”

    유진을 부른 캐롤린이 힘겹게 눈을 깜박였다. 육체는 중독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지만 그녀가 경험한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리아, 리아를, 부탁…….”

    정신적인 피곤이 몰려온 듯 캐롤린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 이내 기절하고 말았다.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의 상처가 아무는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미안해.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가진 사람 중에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했어. 그러고 싶었어.”

    그녀 곁에 있으면 때때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가진 것 중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그녀에게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곁에 남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런 것을 꿈꿨던 날도 있었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꿈이지만.

    “안, 돼. 가지 마. 이대로 날 떠나면 용서 안 할 거야.”

    입술을 질끈 깨문 아리아드네의 잇새로 낮고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절대, 절대 용서 안 해.”

    꽉 움켜쥔 주먹 위로 아리아드네의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다.

    “부디…….”

    그는 용서하지 말라는 말도,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도 차마 붙일 수가 없었다.

    “용서 안 한다고 했어.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자꾸만 눈앞이 흐려져,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마저 점점 멀어졌다.

    “난, 이대로 당신을 보내지 않을 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을 굴리고 팔을 뻗어도 그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그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데도 못 가. 당신 자리는 내 옆이야.”

    아리아드네가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애타게 울부짖었다. 그녀의 눈물은 얼굴을 흠뻑 적신 것으로도 모자라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눈물에 젖은 모라의 돌이 불에 달군 것처럼 뜨거워지더니 눈앞의 풍경이 열기를 머금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아른거렸다. 그 순간, 아리아드네는 직감했다. 모라의 돌이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란 걸.

    ‘날, 그 사람에게로 데려다줘.’

    그 생각과 동시에 발밑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세상이 뒤집혔다. 곧이어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고 푸른 하늘은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낡은 신전과 높이 솟은 아름드리나무를 보며,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허공을 날고 있음을 알았다. 아니, 날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허공에서 아래로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

    저 멀리에서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의 목소리였다. 모라의 돌이 그녀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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