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48)
  • * * *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빛도,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무(無)의 세계. 그리고 어떤 존재가 공기처럼 그 공간을 표류하고 있었다.

    가끔은 생전의 기억이나 감정 비슷한 것이 떠오르기도 하고, 또 가끔은 그것이 그립기도 했지만, 그녀는 생전의 삶과 착실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표류하는 그녀를 인도한 것은 허공에 드문드문 띄워진 자수정 꽃등이었다. 보랏빛으로 발광하는 꽃등을 보며 그녀는 때때로 이제껏 온 길을 되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이 무엇을 욕망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느릿느릿하게, 표류하듯 움직이는 그녀 주위를 크고 작은 반딧불이가 맴돌기 시작했다. 길을 잃지 말라는 듯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지 않기를.’

    반딧불이의 작고 환한 빛처럼 따스하고 위로가 되는 기도였다. 이대로면, 곧 이 길을 걷는 것도 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의 끝에 거의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발밑이 검은 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가 서 있는 곳은 검은 물이 흐르는 강이 되었다.

    한 발만 더 내디디면 고통스러웠던 이 길이 끝나는데, 채 버리지 못한 미련이 자꾸만 망설이게 했다. 정말 이대로 모든 것을 잊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아무리 그리워해도 돌아가지 못할 길이란 것을 알았다.

    찰박, 겨우 발목에나 찰까 싶은 강에 발을 디딘 그녀가 한 발짝 나아간 그 순간이었다. 허억, 마치 단단한 무언가가 목에 감긴 듯한 기분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조여 매는 무언가가 불쾌하고 낯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묶여선 안 될 것이 묶인 속박감에 그녀가 허우적거렸다.

    조금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사지가 납덩이가 매달린 것처럼 무거워졌다. 허공을 부유하며 자유로웠던 존재가 말뚝에 묶인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빛과 어둠이 생겨났다.

    “……살아, 날…… 까, 요?”

    다음으로 적막뿐이던 세상에 소리가 생겨났다.

    “아직……은, 알, 수 없지…….”

    의식은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나야 캐롤린 리스벨이 되살아나기를 바라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굵은 밧줄에 묶인 듯했던 사지가 일시에 풀렸다. 그것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이름이었다.

    캐롤린 리스벨은 깨달았다.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지상으로 끌려왔음을.

    그녀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굳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손가락 마디를 간신히 구부릴 수 있었다.

    ‘정말, 살았어?’

    기쁘다는 생각보다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누가 자신을 살렸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이계의 방문자 유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유진이 자신을 살렸다면 그것은 분명 아리아드네 때문이었을 텐데, 지금 이곳엔 리아가 없었으니까.

    “성하께서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이 세상의 모든 우매한 자들이 성하를 따를 것입니다.”

    성하? 캐롤린은 그 호칭에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저 호칭으로 불리는 이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아그네스. 자신을 되살린 것이 교황이란 말인가? 대체 왜…….

    “아무나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영혼에 모라의 힘이 닿은 자여야 가능하지.”

    성하라 불린 여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캐롤린의 의식을 깨운 바로 그 목소리였다.

    “모라의 첫 번째 권속이 죽은 캐롤린 리스벨의 시간을 멈추며 그 영혼에 흔적을 남겼으니,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

    사락, 어딘가로 이동하는 듯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시도가 성공한 것 같네요, 그렇죠? 리스벨 영애.”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캐롤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교황이…….”

    눈앞의 여자가 정말 교황인지 확신할 순 없어 반신반의하는 캐롤린을 보는 붉은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때, 여자가 캐롤린의 얼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정말 성공하다니, 정말…….”

    아무리 모라의 그릇을 손에 넣었다 한들, 사람을 되살리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캐롤린 리스벨을 되살리는 일은 아그네스로서도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한 일이었다.

    이것으로 아그네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모라의 그릇만 있으면 ‘유진’의 힘을 제 것으로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만 되면…….

    “대체, 왜……. 무슨 짓을 하려고, 절, 살려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캐롤린이 아그네스의 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며 말했다. 사력을 다한 캐롤린의 몸부림에 아그네스의 흥분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래, 아직은 끝난 게 아니었다. 벌써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들떠서는 곤란했다.

    “고작 그게 궁금한가요? 살아난 걸 좀 더 기뻐해도 될 텐데…….”

    캐롤린의 얼굴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그네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아니면 내게 고마워하든가.”

    고마워하라니, 교황이 자신을 살린 것이 선의일 리가 없었다. 캐롤린이 교황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런 캐롤린의 태도에 아그네스가 픽 웃고 말았다.

    “죽은 사람을 살려 놨는데 고맙단 소리는 고사하고 이런 취급이라니.”

    “제가 왜 감사해야 하나요? 내 왕의 앞날에 살아 있는 내가 어떤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 말을 하는 캐롤린의 손에 끝이 날카로운 머리 장식이 들려 있었다.

    “왜 저를 살리셨나요?”

    캐롤린은 자신의 목에 머리 장식을 겨눈 채로 아그네스를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이런, 내가 영애의 목숨을 아까워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캐롤린의 협박 따위 가소롭다는 듯 아그네스가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최소한 날 살려 이루려던 뜻은 어그러지겠죠.”

    캐롤린은 머리 장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머리 장식에 찔린 목에서는 핏방울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캐롤린은 자신이 죽은 시점으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교황이 자신을 살려 무엇을 하려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재가 아리아드네의 걸림돌이 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캐롤린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핏방울이 떨어진 바닥을 물끄러미 보던 교황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사라진 교황의 얼굴은 마치 인형이나 조각상에 달려 있어야 할 무엇 같았다. 도무지 산 사람의 얼굴 같지가 않았다.

    “대단한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내게 필요한 건 모라의 첫 번째 권속이지, 네 목숨 따위가 아니야.”

    꾸며 낸 표정도, 과장된 말투도 벗어던진 교황이 한 걸음 만에 캐롤린 앞에 당도했다. 교황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건만 캐롤린은 그녀의 움직임을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다.

    “널 살린 건 모라의 그릇이 가진 권능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으니, 살아난 것으로 네 가치는 끝이야. 이 자리에서 네가 죽든 말든 나완 아무 상관 없어.”

    이번에는 손에 든 머리 장식을 빼앗겼다. 차랑, 머리 장식에 달린 구슬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아그네스의 손이 캐롤린의 목을 천천히 조여 왔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네 주인도―”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자격을 잃은 것 아닙니까?

    캐롤린의 목을 조르던 아그네스의 손에서 순간 힘이 빠졌다. 캐롤린은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눈물이 맺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너도…….”

    ―제가 왜 감사해야 하나요? 내 왕의 앞날에 살아 있는 내가 어떤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데.

    아그네스는 밭은 숨을 몰아쉬는 캐롤린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목을 감싼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너희들의 세상만 너무 평화로운 것 같아서 말이지. 내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지옥이었는데.”

    캐롤린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아그네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기껏 살아났는데 그리운 얼굴은 봐야지. 지옥에서 보는 그리운 얼굴은 반가울까, 증오스러울까.”

    지옥이 지옥인 이유는……. 아그네스의 마지막 중얼거림은 깊은 어둠 속으로 묻혔다.

    * * *

    흰 막을 씌운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아직 시력이 온전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이었던 걸까. 그런데 죽은 사람도 꿈을 꿀 수 있나?

    캐롤린 리스벨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다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슴팍에 방울방울 떨어진 핏자국이 보였다.

    ―왜 저를 살리셨나요?

    ―최소한 날 살려 이루려던 뜻은 어그러지겠죠.

    분명, 그때 머리 장식으로 목을 찌르며 흘린 피였다.

    ‘정말 살아났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죽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리아는 어디까지 갔을까, 아버지는 건강하실까, 알버트는…….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쳤지만 그중 아무것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불투명한 흰 막이 점점 옅어졌다. 시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상황을 파악하려면 무엇이라도 알아 둬야 할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무심코 뒤를 돌아본 캐롤린의 눈에, 바람에 날리는 옅은 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새파란 하늘을 그대로 담은 푸른 눈동자도.

    캐롤린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리아.”

    아리아드네였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길잡이 등대를 마주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네 걸림돌은 될 수 없다고, 네 걸림돌이 되느니 다시 죽는 게 낫다고, 분명 그랬으면서. 다시 보게 된 얼굴이 너무 반가워서,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

    안개에 막힌 탓인지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아리아드네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리아!”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으려, 캐롤린 또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캐롤린의 손이 잡은 것은 주위를 채운 뿌연 공기뿐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손은 캐롤린에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닿을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캐롤린을 향해 손을 뻗고, 다리를 움직였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캐롤린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아리아드네가 다시금 캐롤린을 향해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만!”

    유진이 땀으로 범벅이 된 아리아드네의 몸을 붙들었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만해, 제발…….”

    품 안의 아리아드네를 꽉 붙든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유진이 고개를 들어 아그네스를 보며 괴로운 듯 눈을 찡그렸다.

    “그만…….”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였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대변자라는 교황만이 오열하고, 절망하고, 애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침잠했다. 아그네스가 손에 쥔 별의 그릇을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문자님이라면 살릴 수 있겠죠. 아무리 별의 그릇을 사용했다 한들 페루스의 권능을 이길 정도는 아니니까.”

    아그네스는 별의 그릇을 사용하여 나누어진 공간을 겹겹이 쌓고, 또 나누었다. 눈앞의 베아트리스와 캐롤린은 실제 그들이 있는 공간을 수없이 반사하고 반사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라도 살릴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야.”

    모라의 첫 번째 권속 페루스의 권능을 이은 유진이라 해도 두 개의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순 없었다.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쪽은 죽어.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죽을 정도론 다치겠지.”

    그가 한쪽을 선택한다면 나머지 한쪽은 필연적으로 버려진다.

    “사랑하는 연인이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친우와 평생을 당신만 기다려 온 불쌍한 반쪽, 둘 중 어느 쪽을 죽이실 건가요?”

    아리아드네를 감싼 유진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교황의 질문은 아리아드네에게로 향했다.

    “저런, 힘들어하는 연인을 위해서 페렌트의 왕께서 선택하시는 건 어떤가요?”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 인간은 가장 내밀한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저열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날것의 욕망. 그 욕망과 마주하는 순간이 바로 지옥의 시작이었다.

    “개소리 작작 해.”

    자신을 붙든 유진을 떨치고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교황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의 눈동자에 새파란 불이 붙었다.

    “당신은 차라리 나를 인질로 삼았어야 했어. 내 목숨을 쥐고 나와 흥정했어야 했어. 그랬으면 비싼 값을 쳐줬을 텐데.”

    미친 듯이 끓어올랐던 분노로 머릿속이 죄다 타 버린 기분이었다. 분노가 한 차례 폭발한 머릿속은 도리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아 쥔 주먹 안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절대 용서 못 해. 당신이 누구든, 무엇이든 절대 용서 안 해.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대도,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당신은 내 손에 죽을 거야.”

    교황은 여전히 이 모든 것이 지루하다는 얼굴이었다.

    혼자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힘주어 이를 악문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돌아보며 주먹을 펴 손바닥을 내보였다. 아리아드네의 손바닥에서 커프스 모양의 돌이 반짝 빛을 냈다.

    “나는 맹세했어. 두 번 다시 누구도 잃지 않겠다고. 당신도 당신이 지켜야 할 사람을 지켜.”

    다시 주먹을 말아 쥔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을 향해 뛰었다.

    “아리―”

    유진은 멀어지는 아리아드네를 반사적으로 잡으려다 고개를 돌려 뿌연 안개 너머 베아트리스를 응시했다.

    ―유진은 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체념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울고 있는 베아트리스를.

    ―유진, 나 있잖아. 나 죽기, 싫어. 나, 살고 싶어.

    세상에 혼자 남은 것처럼 울고 있는 저 존재를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유진은 안개 너머 베아트리스를 향해 움직였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달렸다. 그 소리가 아리아드네 안에 남은 마지막 불안을 씻어 주었다. 그와 함께하는 한 도무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이든 어떤 상황이든 간에.

    ‘리아, 오지 마.’

    안개 너머 캐롤린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환상이나 가짜가 아니라 진짜 캐롤린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지금도 저런 소리나 하고 있다니.

    아리아드네는 시몬에게 빼앗은 모라의 돌을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귀별 숲 또한 모라의 힘이 서린 공간. 모라의 돌을 가진 이상, 아리아드네는 귀별 숲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었다.

    ―그것을 손에 감싸고 머릿속으로 원하는 바를 상상하시면 됩니다. 그곳에 도착한 나를 상상하는 식으로.

    아리아드네는 캐롤린 곁에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수천, 수만 번 있었던 일이고, 캐롤린이 죽은 뒤로도 수천, 수만 번 상상했던 장면이니까.

    모라의 돌을 쥔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 같더니 이내 눈앞의 풍경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리아드네는 뿌연 안갯속에 있었다.

    “리아, 왜 그랬어? 어쩌려고 이런 무모한 일을 해!”

    봄볕처럼 따스하고 다정한 목소리. 노래처럼 자신을 부르던, 꿈에서도 잊지 못한 바로 그 목소리였다.

    “캐롤린.”

    살아 있는 캐롤린이 지금 이곳에 있었다.

    말을 하고 움직이는 캐롤린을 마주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처럼 울컥하다가도, 캐롤린이 죽고 없었던 시간들이 모두 꿈처럼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애초에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향해 종알종알 재잘대는 캐롤린을 보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넌, 지금 날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기껏 잔소리야?”

    “아니, 네가 걱정되는 일을 하니―”

    “보고 싶었어, 캐롤린.”

    보고 싶었단 아리아드네의 말에, 무엇이라 항변하려던 캐롤린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 냈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정말…….”

    아리아드네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캐롤린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수십 번은 족히 반복되었을 둘의 역사 위에 또 한 번의 역사가 쌓였다. 어쩌면 영원히 멈추었을지도 모를 역사 위로.

    “리아…….”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친 캐롤린이 조심스럽게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교황이야?”

    앞뒤를 모조리 잘라먹은 물음에도 캐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상대로 모라의 그릇이 가진 권능을 시험해 본 거라고 말했어. 교황의 목표는 모라의 첫 번째 권속이야.”

    대답을 마친 캐롤린이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리아, 모라의 첫 번째 권속이라는 게…….”

    그제야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이 망설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교황이 노리는 모라의 첫 번째 권속이 유진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자신을 걱정한 모양이었다.

    “원수인지 은인인지. 끝까지 헷갈리게 하네.”

    아리아드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한 짓을 생각하면 죽여도 시원찮은데, 그 결과가 살아 있는 캐롤린이라니.

    “리아, 뒤쪽에!”

    하지만 고민에 잠길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안은 채 바닥을 굴렀다. 간발의 차로 머리 바로 위에서 부웅, 묵직한 몽둥이로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스스스스슷, 딱, 따닥, 따다닥, 지난 밤사이 지나치게 익숙해진 소리였다. 아리아드네가 위를 바라보자 타우루스가 집게발을 치켜들고 있었다.

    “캐롤린, 나 잡아.”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널 내가 다스리는 페렌트로 데려가 줄게.”

    “어, 그게, 그러니까―”

    캐롤린은 넋이라도 빠진 사람처럼 멍하게 두 눈만 깜박이며 더듬거렸다.

    “나, 이번엔 너와 한 약속 지켰어.”

    아리아드네가 넋이 빠진 캐롤린의 손을 낚아채며 덧붙였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땐 그곳은 내가 다스리는 페렌트일 거라고, 네가 그랬잖아.”

    모라의 돌을 사이에 두고 맞잡은 손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흐려지는 풍경 사이로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는 캐롤린의 얼굴이 보였다.

    딱딱, 딱― 그사이 타우루스의 집게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리아드네는 집게발 소리를 듣지 않으려 노력하며 오로지 혼자만의 상상에 집중했다.

    장미꽃이 만발한 신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칠흑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교황과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시안과 달미에르, 아직 이름을 듣지 못한 막내 기사도.

    심지어 기절한 시몬과 리카르도의 얼굴까지 빠짐없이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자신과 캐롤린의 얼굴을 채워 넣었다. 이미 그곳에 함께인 것처럼.

    그 순간, 모라의 돌을 쥔 손바닥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워지더니 위아래가 뒤집히는 것처럼 멀미가 났다.

    “메르디에스 공녀!”

    “저하― 아니, 폐하!”

    “단, 단장님, 단장님께 알려야…….”

    아직 익숙지 않아 마구잡이로 섞인 호칭들 사이에는 커티스를 부르는 소리도 있었다. 막내 기사의 목소리였다. 살아 돌아온 캐롤린을 보고 커티스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섬찟한 기운이 느껴졌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불길한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리아드네가 허공에 걸린 집게발과 마주했다. 공간의 틈에 끼인 타우루스의 집게발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아리아드네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까앙!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타우루스의 집게발이 그대로 뭉개졌다. 아리아드네의 머리 위에서, 색이 옅은 금발 몇 가닥이 집게발에 잘려 후드득 떨어졌다.

    “……리카르도.”

    검집째 타우루스의 집게발을 후려친 사람은 바로 성기사단 부단장 리카르도였다. 아리아드네의 부름에 리카르도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우는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저는, 전…….”

    별의 홀에서 모두를 속인 것도, 별의 그릇을 빼돌린 것도 사실이니 어떤 말로도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이 말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집을 지키는 개인 줄 알고 키웠더니…….”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린 아그네스의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저, 배은망덕한!”

    레지나가 리카르도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피가 묻은 아그네스의 입가를 정성스럽게 닦아 냈다. 죄를 고하는 죄인처럼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리카르도가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성하께선 제 세상의 유일한 빛이셨습니다. 성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면 지옥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젠 성하의 세상을 더는 지키지 못하겠습니다.”

    안에 있을 때는 그저 빛나기만 했던 세상이 밖에서 보니 추악한 그림자를 매달고 있었다.

    ―설사 성물에 대한 반발력을 가진 인간이 성물에 노출되어 마물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왜 성 상티모니아의 잘못입니까? 성물에 대한 친화력이 신의 은총이듯, 반발력 또한 신이 내린…….

    마물이 된 사람더러 신벌을 받은 것이라 지껄였던 과거의 자신을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성 상티모니아는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마물을 이용했다.

    자신은 그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외면했다. 마물이 된 그들 또한 성 상티모니아가 보호해야 할 신도들이었는데.

    비정하고 냉철한 아그네스의 성정을 지도자의 덕목이라 여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 비인간성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왜 내가 경의 혼란을 잠재워 주기를 바라나요? 그건 경의 몫이 아닙니까? 제자에게 부끄러운 스승이 되기 싫은 건 경이지 제가 아닌걸요.

    ―내게 끌려다녔던 시간이 경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된 시간은 아니었기를 바라요.

    그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 주었던 누군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그를 과거와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세상을 본 그는 더는 과거처럼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껏 자신을 지탱해 온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버릴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남은 선택이란 하나뿐이었다.

    “성기사가 되며 했던 맹세대로 성하를 배신한 죄,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검집을 빠져나온 칼날이 그의 심장을 향해 쇄도한 그 순간이었다. 퍼억! 어디선가 날아온 검집이 리카르도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 목숨, 이 목숨으로 갚아, 갚아야 하는…….”

    불시에 머리를 맞은 리카르도가 뭐라고 중얼대더니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바닥에 떨어진 검집을 주워 리카르도의 머리를 있는 힘껏 후려친 아리아드네가 서늘하게 뇌까렸다.

    “또 내 앞에서 죽는다고 나서는 사람 있으면 진짜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캐롤린이 정신을 잃고 기절한 리카르도를 안쓰러운 듯이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아, 사람 머리를 그렇게 후려치면 진짜로 죽어.”

    “그래서, 쟤가 죽었어?”

    아리아드네가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기절한 리카르도를 슬쩍 들여다본 캐롤린이 뒷말을 흐렸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봐서 아직 죽은 것 같진 않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아리아드네가 담담하게 덧붙인 말에 당황한 캐롤린이 고개를 들었다.

    “리아, 난―”

    “나를 네 희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지 마.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한 거지, 네 희생이 필요한 게 아니야.”

    아리아드네의 담담한 말 사이사이에는 자책과 짙은 후회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미안해.”

    혼자 남은 아리아드네가 겪었을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 캐롤린은 그저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아리아드네를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인 것 같아서, 죽는 순간까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던 그때의 선택이 이제 와 새삼 후회스러웠다.

    “캐롤린.”

    가까이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난 네가 필요해. 십 년 뒤에도, 그 십 년 뒤에도.”

    다정하게 이어진 말에 캐롤린은 눈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났다. 서느런 바람이 불어와 등을 훑고 지나갔다. 서늘한 등의 감촉과는 달리 온몸은 열이 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얼굴도, 목도, 귀도, 손발까지도.

    “이 꼴을…….”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 불쾌한 듯 낮게 뇌까리는 교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꼴을 보자고 내가…….”

    짓씹듯 말을 뱉던 교황이 울컥, 치미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피를 한 움큼 쏟아 냈다.

    “성하, 괜찮으십니까?”

    “귀찮게 굴지 마라.”

    놀란 레지나가 교황을 부축하려 했지만 아그네스가 차갑게 밀어냈다. 교황은 자신이 만든 공간에 균열이 갈 때마다 타격을 입는 듯했다.

    “대체…….”

    교황이 피 묻은 입가를 닦으며 뿌연 안개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때, 안개가 칼로 자른 것처럼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눈부신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유진이야.”

    아리아드네가 점점 거세게 뛰는 가슴을 누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예감대로 유진과 베아트리스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모라의 돌을 이용해 공간을 이동한 것이 전부인 아리아드네와는 달리 유진은 그 공간 자체를 베어 버린 듯했다. 유진이 나타남과 동시에 뿌연 안개로 넘실거리던 공간이 주위 풍경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베아트리스.”

    긴장이 풀린 듯 베아트리스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는 것을 유진이 잡아 지탱했다.

    “베아트리스는 괜찮아?”

    서둘러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베아트리스를 살피며 물었다. 베아트리스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유진을 붙든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베아트리스, 이젠 괜찮으니까…….”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에 움찔한 베아트리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들었다.

    “나는, 나는 정말……. 미안해, 미안해. 전부 나 때문에…….”

    아리아드네 곁에 있는 캐롤린을 발견한 베아트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다시금 눈물을 쏟아 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레지나가 베아트리스를 다그치듯 말했다.

    “성녀님, 성녀님의 자리는 이곳입니다. 성녀님은 교황 성하의 유일한 따님이시지 않습니까! 성녀님께서 괴로운 것은 모두 그자 때문이라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레지나의 윽박에 겁을 먹은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힐끔 들었다가 피를 토하는 아그네스를 발견했다. 교황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한 베아트리스가 하얗게 질려 털썩 주저앉았다.

    “아, 어머, 어머니께서…….”

    베아트리스는 교황의 피를 보자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 틈을 타 레지나가 한껏 꾸며 낸 다정한 목소리로 속살거리듯 말했다.

    “성녀님, 어서 이리로 오세요. 성하께서 성녀님을 부르고 계세요. 그러니 어서…….”

    “아, 어떻게 해야, 어떻게…….”

    베아트리스는 이 지경이 되어서도 아그네스를 외면하지 못했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피를 흘리는 아그네스가 걱정되는지, 베아트리스의 몸이 점차 그쪽으로 기울던 그때였다.

    “아니, 여기 있어.”

    유진이 베아트리스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렸다. 베아트리스는 유진에게 붙들린 제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왜?”

    이제 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필요할 땐, 한 번도 곁에 있어 주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내가 필요해졌어? 내가 어머니께 가면 유진이 곤란해지니까?”

    베아트리스는 유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울컥 서러워져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

    유진이 잔뜩 쉰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해, 베아트리스. 이제껏 널 혼자 둬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그가 사과의 말을 반복했다. 유진의 사과에 더 서러워진 베아트리스는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쏟아 냈다.

    “왜, 왜, 왜 그랬어……. 내가 얼마나, 얼마나…….”

    베아트리스의 눈물과 함께 흘러내린 깊게 고인 슬픔이.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무치는 외로움이, 마치 제 것처럼 생생했다.

    이곳은 귀별 숲, 페루스가 자신을 만든 근원으로부터 버림받은 장소.

    ―페루스, 너는 내가 처음으로 만든 권속이다. 내 자매와 형제들이 차원의 문을 모두 지날 때까지 네가 이곳을 지켜야 한다.

    건널 수 없는 차원의 문 앞에서 페루스가 느꼈던 절망과 상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제 안에 남은 페루스의 기억이 있는 한, 그는 베아트리스의 슬픔을 외면할 수 없었다.

    “외로웠는데, 힘들었는데, 그런데 내 곁엔 아무도 없었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그 외로움을 그만은 이해해야 했다.

    “내가 이렇게 외로운 건 전부 유진 때문이라고 했어.”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채우지 못할 상실을 그만은 알아줘야 했다.

    “내가 온전한 영혼이 아니라서, 하나의 영혼을 나눠 가진 유진이 곁에 없어서, 그래서라고…….”

    그저 모든 슬픔을 껴안을 듯 듣고만 있던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베아트리스. 우리가 이렇게 외로운 건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것은 존재의 숙명이었다.

    “우리의 슬픔은…….”

    유진이 베아트리스에게 무엇이라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살리바의 마녀.”

    기절해 바닥에 엎어져 있던 시몬이 제가 흘린 피 웅덩이 위에서 낄낄대며 웃었다. 죽음을 예감했는지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쓸모없는 것일수록 목숨이 질기다더니 네가 딱 그 짝이구나.”

    고통을 참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던 아그네스가 피 묻은 입가를 닦으며 빈정거렸다.

    “……누님을 두고 가려니 눈에 밟혀 떠날 수가 있어야지요. 이렇게 된 거 저와 같이 저승길이나 오르시지요.”

    시몬은 피범벅이 된 제 머리를 문지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죽는 것도 혼자선 못 하겠다 울부짖는 천치로구나. 그래서 내가 네 어미를 먼저 보내 주지 않았더냐. 그렇게 애달픈 네 어미가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왜 어서 죽지 않고.”

    아그네스의 신랄한 독설을 들은 시몬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너를 죽여 내 어머니의 영혼을 위로해야겠다.”

    죽기 직전의 괴력을 발휘한 듯, 시몬은 다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몸놀림으로 아그네스의 머리채를 쥐었다.

    “저 거지 같은 걸 살려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죽어! 넌 죽는 거야. 이 자리에서 내 손으로―”

    교황의 곁에 있던 성기사가 검을 빼어 든 그 순간이었다.

    타앙!

    굉음과 함께 발사된 쇳덩이가 시몬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시몬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다들 놀라 얼어붙은 채 침묵을 지켰다.

    놀란 것은 성 상티모니아의 성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다 아그네스의 손짓에 뒤로 물러났다.

    “이젠 그만, 그만하자. 제발…….”

    유진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가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싼 채 중얼거렸다.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이젠 그만해.”

    지친 얼굴을 한 그가 연민과 죄책감이 서린 눈으로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말했잖아. 그것이 무엇이든, 네가 바라는 대로 하겠다고.”

    큰 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던 베아트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몹시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이 보였다. 유진과 마주 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러고 보니 둘은 한자리에 있어도 좀처럼 시선을 마주치는 법이 없었다. 아그네스는 유진과 말을 할 때면 유독 시선을 반쯤 비낀 채로 그를 대하곤 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싶은 사람처럼.

    “……미안, 미안해.”

    유진은 숨을 내쉬면서도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죽어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나요?

    아그네스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것을 바란다면.

    그는 차라리 이 모든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네게 죽음을 선물할 여자를 찾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헤매리라.’

    그에게 죽음을 선물할 여자가 있다면.

    “미안해, 디티.”

    그것은 디티여야 했으니까.

    ―레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어.

    “네 안식을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해서, 널 다시 살게 해서.”

    ―네 무지 또한 네 선택의 결과. 굳이 기억을 되찾으려 할 필요가 있나?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 기억이 버거워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다.

    자신은 그저 버림받은 외로움에 미친 추악한 짐승이었고, 실패한 염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퉁이였으며.

    “그리고 널 몰라봐서.”

    제 반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장님이었다.

    “그러니, 제발 그만해. 모두 네가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적막한 고요만이 휩싸인 오래된 신전에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달빛 한 점 없는 어둠보다도 더욱 새까만 아그네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희미한 웃음을 지은 그녀가 별의 그릇을 허공에 내리긋자 신전 가득 피어난 붉은 장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레오, 내 희생으로 이곳을 지킬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

    제 희생으로 모두의 풍요를 지키고 싶다던 그의 고결한 누이는…….

    “오랜만이야, 레오.”

    흩날리는 새빨간 꽃잎 사이로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반달을 그리며 휘어졌다.

    “혼자만 행복해져 버린 내 반쪽.”

    모두를 죽이고 싶어 하는 지옥의 사자가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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