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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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꺄아아악! 날개가 잘린 자크루스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나무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숲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길고 가느다란 몸체에 두 쌍의 날개가 달린 형상이었다.

    거대 잠자리 네우라였다. 네우라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투명한 날개에서는 반짝이는 가루들이 떨어졌다.

    “네우라는 제가 막겠습니다.”

    쌔액― 시안이 냅다 던진 검에 눈이 꿰뚫린 네우라가 그대로 추락했다. 만 개의 겹눈 대신 사람의 눈동자가 달린 거대 잠자리는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이 둔했다.

    스스스스― 딱, 따닥, 딱딱. 그때, 주위를 새까맣게 채운 타우루스가 집게발을 부딪치며 일행을 점차 조여 왔다.

    “타우루스의 집게발을 조심하십시오. 드물게 독을 가진 개체가 있습니다.”

    소르체 출신인 시안이 막내 기사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타우루스를 상대할 때 가장 골치 아픈 것이 집게발이었다. 사람의 목을 단번에 자를 정도로 단단한 집게발에 독까지 있다니. 첩첩산중이었다.

    기사가 타우루스의 집게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빗맞은 검날은 타우루스 집게발에 잡혀 그대로 부러지고 말았다. 두 동강 나 쓸모없어진 검을 쥔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집게발을 보며 질끈 눈을 감았다.

    딱, 딱딱, 따아― 닥.

    타우루스의 집게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갑작스레 멎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마물들의 소음이 일시에 멈추며 주위가 고요해졌다.

    ‘갑자기 왜…….’

    조심스럽게 눈을 뜬 기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타우루스가 위협하듯 집게발을 치켜든 채로 멈춰 있었다. 불을 뿜어내던 자크루스도, 하늘을 날던 네우라도 마찬가지였다.

    마물들은 박제된 인형처럼 어느 순간에 멈춰 있었다. 그것들은 단지 움직임을 멈춘 것이 아니었다. 네우라는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하늘에서 추락하지 않았고, 자크루스가 뿜어낸 불은 더 커지지도 줄지도 않았다.

    오직 마물들의 시간만 멈춰 있었다. 이건 기적이나 이변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만한 이적(異跡)이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겠는가.

    막내 기사가 반사적으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정작 이 기적을 일으킨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마치 공기 중에 금가루를 흩뿌려 놓은 것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황금빛 입자들이 너울거렸다. 사람들은 유진을 보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의 앞에 펼쳐진 저 황금빛 장막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니, 관심을 두지 못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곳에서 그와 이 풍경을 공유하는 것은 자신뿐일 테니까.

    익숙한 감각이었다. 엘바에서도, 물새 협곡에서도 오직 자신만이 곧 나타날 그의 존재를 예감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의 등장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거세게 뛰는 심장이었다. 심장이 뛰고 온몸의 전율이 일면 직감했다. 그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그것이 어떤 운명처럼 느껴졌고, 나중에는 그를 사랑하는 제 마음이 만들어 낸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당신의 시간을 되돌렸다면, 그건 내 잘못을 갚기 위해서였어. 내가 빼앗은 당신 삶을 돌려주기 위해서.

    그가 자신의 시간을 돌려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의 시간 속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감각을 공유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아니라면 찡그린 눈매, 슬쩍 치켜세운 눈썹, 각진 턱의 작은 떨림만으로도 그의 감정을 낱낱이 이해하고 마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경악과 수군거림에도 황금빛 장막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유진이 고개를 돌려 아리아드네를 마주 보았다.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를 응시한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슬픔과 절망만은 손에 잡힐 듯 전해졌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검을 집어 든 그가 황금빛 장막을 내리그으려던 그때였다.

    꺄아아악, 따악, 딱딱, 스스스스슷. 멈췄던 마물들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물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로, 이전과 다름없이 공격을 이어 갔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자크루스가 빠르게 하강하며 불을 뿜었다.

    “피하십시오!”

    시안이 아리아드네를 안고 구르며 외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막내 기사가 자크루스가 뿜어내는 불과 반대 방향으로 달미에르를 잡아끌었다. 달미에르는 제 바로 옆을 스치는 열기를 느꼈다. 그들은 간발의 차로 자크루스가 뿜어낸 화염을 피했다.

    “저, 저것 좀 보십시오.”

    막내 기사가 더듬거리며 하늘을 가리켰다.

    “대체, 저건…….”

    마치 하늘을 그린 캔버스를 나이프로 찢은 것처럼, 숲의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금색 물감을 들이부은 것처럼, 찬란한 황금빛이 흘러내렸다.

    그 빛은 의지를 가진 무엇처럼 일행을 향해 스멀스멀 다가왔다. 그것이 아리아드네를 덮치려던 그 순간이었다. 서늘한 체온이 아리아드네를 감쌌다. 눈을 찌를 듯했던 빛도 아리아드네를 감싼 어둠에 흐려졌다.

    “……미안해. 당신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유진은 아리아드네를 꽉 안았다 풀어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눈을 뜬 아리아드네의 시선에 자신을 지키듯 가리고 선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진.”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달콤하게 파고들었다.

    어쩌면, 하는 기대를 했다. 천 년이라는 세월을 버텨 온 자신에게도 잠시의 행복쯤은 누릴 권리가 있지 않느냐고. 모르는 척 외면하면 이 행복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곳으로 끌려온 다음에야 알았다. 자신에겐 찰나의 행복조차 과분했다는 것을.

    이곳은 귀별 숲.

    인간에게 패배한 신들이 차원을 가르고 떠난 자리,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권속이 홀로 남아 이 땅을 떠난 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자리. 외로움에 미친 페루스가 끝내 괴물이 되고 만 바로 그 자리였다.

    ―그 아이가 진짜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해 줄 마음은 있으신가요?

    ―죽어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나요?

    그리고 자신이 외면하고 버렸던 존재가 지금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모라로부터 버림받았던 그 자리에서.

    하늘이 찢어진 캔버스처럼 흘러내리고 그 틈으로 새어든 황금빛이 아래로 쏟아졌다. 밑그림을 덮고 있던 검은 물감을 긁어낸 것처럼, 빛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풍경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잎이 뾰족한 침엽수가 전부이던 숲에 때를 잊고 이르게 피어난 붉은 장미들이었다.

    쏴아아아― 바람에 실려 오는 장미 향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붉은 장미를 품에 안은 여자가 반쯤 부서진 난간에 걸터앉은 채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셨네요.”

    여자가 그들을 환대하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여자의 뒤로 피처럼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너무 늦으시니 마중을 나갈 수밖에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아리아드네가 이를 악물었다.

    “아그네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바로 교황 아그네스였다.

    “이제야 좀 조용히 대화할 수 있겠네요. 성가신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계셔서 적당한 때를 기다리느라 어찌나 지루하던지.”

    아그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곁에 있던 여자가 재빨리 다가와 늘어진 치맛단이 발에 걸리지 않도록 정리해 주었다.

    ―전부 나 때문이야. 내가 메르디에스 성에 가는 바람에, 그래서 레지나가…….

    ―잘하셨습니다, 성녀님.

    ―……레, 지나! 이거, 이거 놔!

    ―잠시 쉬고 계세요. 다시 일어나실 때쯤에 모든 것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그 여자였다. 베아트리스의 훈육 담당이라던 성 상티모니아의 수석 사제 레지나.

    “소란스러운 것은 딱 질색이라.”

    조용히 대화하고 싶었다는 교황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교황을 지키는 이는 레지나라는 저 사제를 제외하면 고작 셋이 전부였다.

    “또 뵙네요. 페렌트의 새로운 왕이시여.”

    아리아드네에게 인사를 건넨 아그네스의 붉은 눈동자가 비웃듯이 가늘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그네스의 품에서 떨어진 장미들이 후드득 바닥에 쏟아졌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탐스럽게 피어난 장미들이 송이째로 짓이겨졌다.

    “그것 아시나요? 교황의 관에는 장미가 놓인답니다.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기원하면서요.”

    그 말을 하는 아그네스는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고, 관에 놓는다는 붉은 장미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이 어떤 형벌인지도 모르고.”

    교황은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키득거리며 덧붙였다.

    교황이 내뱉는 말 중에서 몇몇 단어들만이 귀에 들어왔다. 관, 생명, 부활, 형벌. 그러한 것들이 아리아드네에게 연상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리아, 나 네가 다스리는 페렌트가 보고 싶었어. 네가 다스리는 나라라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았어.

    교황이 고른 단어들이 일부러 의도한 것이든, 우연이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따위 단어를 들을 때마다 차오르는 분노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리카르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그네스의 삶도 순탄치 않았을 거라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얼마나 불행했든 그것이 타인의 존엄을 훼손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할 거면 닥쳐!”

    교황의 말을 단박에 자른 아리아드네가 그대로 신전을 가로질렀다.

    “캐롤린 어딨어, 내놔.”

    ―리아, 잘 다녀와.

    끝내 지키지 못했던 그 약속이 아직도 이렇게 아픈데.

    “지금 당장.”

    ―저는 이제 아무도 잃지 않을 겁니다.

    캐롤린의 목숨을 건 맹세마저 깨트릴 순 없었다.

    아그네스와의 거리를 한 발짝 남겨 놓은 그때, 곧게 뻗은 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가로막은 남자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리카르도.”

    그녀의 부름에 리카르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비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

    아리아드네가 그렇게 되묻는 것과 동시에 스릉, 칼을 빼 든 시안이 리카르도를 향해 겨누었다.

    “페렌트의 왕께서 가고자 하는 길을 막는 겁니까?”

    “그 길 끝에 제 주인이 계시니.”

    리카르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완강하게 버텼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대치하자 메르디에스와 성 상티모니아 양 진영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지금 당장 전투를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때, 메르디에스 측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가 칼을 겨눈 시안에게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리카르도 경, 이게 경의 선택입니까?”

    “…….”

    달미에르의 물음에 리카르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리카르도는 아리아드네 일행과 지낸 시간이 겨우 반년 남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 어떻게 그게 반년밖에 안 되었다는 건지.

    “경, 후회할 일은 이쯤에서 그만하십시오.”

    달미에르가 재차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 얄밉기만 했던 그 목소리조차도 울컥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공자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저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달미에르와 달리 좋은 부모도, 괜찮은 환경도 타고나지 못한 리카르도가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교황의 비호 덕분이었다. 수도원의 고아 중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준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리카르도의 세상은 달라졌다. 그는 이제 와 그것을 외면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벌써 후회하고 있잖습니까.”

    안타까워하는 달미에르의 목소리가 리카르도를 재차 흔들었다. 성 상티모니아 바깥의 세상을 몰랐다면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 텐데. 아리아드네를 막아선 리카르도의 팔이 조금씩 흔들렸다.

    “…….”

    그때,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틀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경이 내 신뢰를 저버리고 날 배신한 일을 후회하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지금 내 앞을 가로막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애초에 그에겐 기대한 적도 없다는 듯 차가운 얼굴이었다. 정작 신뢰를 깨트린 건 자신이면서, 리카르도는 믿었던 상대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속이 쓰라렸다.

    “그러니까 비켜.”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아리아드네가 리카르도를 밀어내려 손을 든 순간이었다.

    “이런, 다들 혈기 왕성하기도 하지.”

    내내 관망하듯 지켜보고 있던 교황이 드디어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요?”

    그렇게 묻는 교황의 얼굴은 마치 흥미로운 극이라도 관람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사람들을 지옥에 몰아넣고 혼자만 평온한 저 얼굴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아리아드네가 서릿발같이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캐롤린을 건드린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리아드네에게 아그네스는 언제나 그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안개 같은 상대였다. 적으로 돌리자니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한편이 되기에도 어딘가 찜찜한.

    하지만 마주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그 찜찜함의 정체 또한 선명해졌다. 아그네스는 이끄는 자리에 있기엔 지나치게 비틀려 있었다. 이대로 두면 모든 것을 파멸로 몰고 갈 사람이었다.

    “반드시.”

    그것이 언제가 되느냐 하는 시기의 문제일 뿐,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상대였다.

    “역시. 이 땅의 새로운 희망이 될 페렌트의 왕다운 말씀이네요.”

    교황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쩌죠? 아직은 내 운이 썩 괜찮은 것 같은데…….”

    교황이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포기했던 사냥감마저 운 좋게 덫에 걸린 꼴을 보니.”

    그녀가 지목한 것은 자신의 이복동생인 시몬 랭스턴이었다. 페렌트 왕궁에 숨어든 것을 알고도 끝내 찾지 못해 포기했던 시몬이 귀별 숲에 함께 끌려왔을 줄이야.

    “성하.”

    앞으로 나온 시몬이 아그네스를 향해 과장된 예를 올리며 말했다.

    “누님을 이리 부를 날도 머지않은 것 같군요.”

    “그래?”

    시몬의 도발에도 아그네스는 가소롭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런 아그네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몬은 재차 비아냥거렸다.

    “누님, 페렌트를 위협하고도 교황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엘바에서는 쥐새끼처럼 잘도 빠져나갔더구나.”

    서로를 모욕하는 말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아그네스가 교황이 된 뒤로 납작 엎드렸던 시몬이 다시 기세등등해졌다는 점이었다.

    “쥐새끼라니요, 누님. 쥐새끼에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잖습니까.”

    얼굴에 비열한 미소를 한껏 띤 시몬이 속살거리듯 말했다.

    “누우면 나무 침대 밖으로 발이 삐져나오고, 손바닥만 한 창문이 전부이던, 쥐구멍 같은 그 방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루이제 랭스턴이 안주인으로 군림한 살리바에서 아그네스의 처지가 어땠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시몬의 말대로 어린 아그네스가 학대를 받았다면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아그네스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이런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유쾌하진 않았다.

    “―그만.”

    그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제 말에 도취된 시몬은 주위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살리바의 검은 쥐.”

    찍찍, 시몬은 쥐 소리까지 흉내 내가며 키득거렸다.

    “역병을 옮기는 시궁쥐처럼 가는 데마다 죽음을 몰고 다닌다 하여 누이를 그리 부르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낄낄대며 저열하게 웃던 시몬이 별안간 웃음을 뚝 멈추었다. 고개를 한껏 쳐든 그가 아그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누님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게 다 누구 덕이었습니까. 그 성력을 얻은 것이 누구 덕이었냔 말입니다.”

    그는 멸시에 찬 어투로 한껏 비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시몬의 수족이 되기 위해 길러진 이였다.

    운 좋게 교황이 되었으면 랭스턴에 감사해야 마땅하거늘, 주제도 모르고 엘바까지 탐내다니. 역시 천한 핏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만 좀.”

    유진이 다시 한번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시몬은 이번에도 멈추지 않았다.

    “폐하, 저 간악한 마녀는 태생부터가―”

    “닥치란 내 말 안 들려?”

    시몬이 아그네스를 손가락질하며 아리아드네에게 무엇이라 말하려던 순간, 유진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저, 저는…….”

    당황하여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시몬이 무엇이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 망설이던 그때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시몬 앞으로 날아든 목함이 바닥을 굴렀다.

    “얻어터진 네 낯짝을 구경하느라 네게 줄 선물을 잊고 있었구나.”

    아그네스가 비뚜름한 미소를 얼굴에 건 채 어서 열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유진의 눈치를 보던 시몬이 내키지 않는 듯 발끝으로 목함의 뚜껑을 건드렸다. 툭, 성의 없이 닫혀 있던 뚜껑이 열리며 속에 있던 물건이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목함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바로 사람의 손이었다.

    “이, 이, 이게…….”

    허겁지겁 바닥에 무릎을 꿇은 시몬이 잘린 손을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손톱이 죄다 부러진 주름진 손은 낯설기 짝이 없었으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에메랄드 반지만큼은 몰라볼 수 없었다.

    “어머, 어머니…….”

    그 반지는 전대 교황인 테오도로가 그의 어머니 루이제 랭스턴에게 선물한 것이었으니까.

    “어머니 어디 있어? 내 어머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잘린 손을 들고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대던 시몬이 아그네스를 보며 절규하듯 외쳤다.

    “멍청하긴, 목을 잘라 줬어야 했나. 당연히 죽었지. 알아내야 할 건 다 알아냈으니까.”

    아그네스가 루이제를 잠시나마 살려 둔 것은 엘바에서 시몬이 만들어 낸 마물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루이제에게서 카이엔이 마물의 보관 장소로 선택한 것이 귀별 숲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환희로 가슴이 들끓는 것 같았다.

    이곳은 아그네스를 위해 준비된 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일을 치르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었으니까.

    ―아그네스, 네가 어떻게 내게…….

    그것이 루이제 랭스턴이 지상에서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어떻게, 네가! 어머니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넌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어!”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시몬이 왁왁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게 애달프면 따라 죽지 그러나? 지옥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싱긋 웃은 아그네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죽일 거야. 넌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이 거지 같은―”

    악에 받친 시몬이 아그네스를 향해 달려들던 그 순간이었다. 파앗, 시몬의 얼굴로 장미 한 송이가 날아들었다. 끝이 뾰족한 쇠꼬챙이가 머리에 꽂히는 듯한 고통에 그는 숨이 턱 막혔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

    서늘한 얼굴을 한 유진이 시몬을 힐긋 보고는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시몬은 장미에 얻어맞은 자리를 손으로 더듬거렸다. 새빨간 피가 손에 흠뻑 묻어 나왔다.

    ‘어머니, 굶주린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것이 아니었…….’

    시몬은 제 어머니의 잘린 손을 붙든 채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평생을 살리바의 귀공자로 모두의 주목 속에서 살아왔건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시몬을 치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마침내 아그네스와 마주한 유진이 깊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몇 차례나 숨을 고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괜히 다른 사람들 괴롭힐 거 없잖아.”

    유진의 말을 들은 아그네스가 의아하다는 듯 모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원한다면 주실 건가요? 그것이 무엇이라도.”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유진의 대답에 아그네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모라의 첫 번째 권속이 가진 모든 것.”

    아그네스는 말이 없는 유진을 곧게 응시한 채 덧붙였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인데.”

    마치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주먹을 쥔 그의 양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때,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을 감싸 왔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왜 계속 듣고 있어.”

    아리아드네였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교황이 베아트리스의 혈연이라고 해서 당신이 부당한 것까지 감내해야 할 필요는 없어.”

    유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베아트리스의 생모인 아그네스를 쉽게 어쩌지 못하는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베아트리스에게 가진 부채감은 둘 사이의 문제였다. 그것을 타인이 쥐고 흔드는 꼴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말에 후회로 뒤범벅된 유진의 눈동자가 거세게 일렁였다.

    “이런, 어쩜 이렇게도 올곧으신지…….”

    감탄을 가장한 조롱에 아리아드네가 교황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것을 묻는 교황의 얼굴에 거짓으로 만들어 낸 미소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야 교황의 진짜 얼굴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저 닳고 닳은 노파의 것처럼 지치고 피로한 얼굴을.

    “당신은 그 자리를 그렇게 지켰나 보지?”

    반쯤 확신하며 물은 질문에 교황은 그저 말없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을 가르는 그녀의 손에는 익숙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페루스의 한쪽 뿔로 만들었다는 모라의 성물이었다. 언젠가 탑에 갇힌 아리아드네를 찾아온 유진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던.

    별의 그릇이 가르고 지나간 자리에 엷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공기가 서렸다. 그리고, 엷은 안개 너머로 흐릿한 형상이 보였다. 웅크린 채 겁에 질려 있는 베아트리스의 모습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것을 묻는 아그네스의 어조는 더없이 건조했다. 겁에 질린 딸을 눈앞에 둔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안개가 점점 옅어지며 베아트리스의 모습이 한층 또렷해졌다. 피에 젖은 옷,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창백한 안색이며 겁에 질린 표정까지.

    그 순간, 고개를 든 베아트리스가 이쪽을 보며 무엇이라 소리쳤다.

    ‘―――!’

    하지만 소리까지는 전달되지 않는 듯 베아트리스가 하는 말은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 베아트리스 뒤쪽에서 나타난 머리 아홉 달린 뱀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다가왔다.

    “위험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인 아리아드네가 베아트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그뿐이었다. 엷은 안개를 그대로 통과한 아리아드네의 손은 베아트리스에게 조금도 닿지 못했다. 당황한 아리아드네가 뒤를 돌아보았다.

    베아트리스에게 닿지 못한 것은 아리아드네만이 아니었다. 마물 히드라 또한 뻔히 보이는 눈앞의 인간을 그대로 통과한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베아트리스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아리아드네가 아그네스를 향해 비난을 쏟아 내려는 찰나였다. 교황의 손에 들린 별의 그릇이 또다시 허공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새롭게 나타난 엷은 안개 사이로 검은 폭포가 물결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소리를 전달하는 공기가 모두 사라진 것처럼 교황의 목소리조차 멀게만 느껴졌다.

    안개 너머 검게 흔들리는 그것이 폭포가 아니라 누군가의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보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떠난 사람이 새 육체를 입을 수 있다고 다들 말했으니까.

    잊지는 못해도 꾸역꾸역 살다 보면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날이 더 늘게 될 거라고, 그런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행복한 날에도 화석처럼 남은 슬픔이 가슴을 두드렸다. 기쁜 날이면 그림자처럼 슬픔이 따라붙었다. 기뻐할수록 슬픔이 짙어졌다.

    나는 앞으로 그늘 없는 행복은 누릴 수 없을 거라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너를 지키지 못한 내가 짊어져야 할 벌이었으니까.

    밤바다의 파도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린 아름답고 슬픈 그 형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단 하나의 별처럼, 그곳에 네가 있었다.

    “……린.”

    놀란 눈이 크게 벌어지더니 이윽고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

    여전히 그곳에서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리아.’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날 부르는 너의 절규가 내게 닿지 않을 리 없었다.

    “캐롤린!”

    사라졌던 공기가 일시에 돌아온 것처럼, 아리아드네의 절규가 적막을 깨트렸다.

    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독한 미련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 해도, 어쩌면 닿는 순간 사라질 꿈이라 해도.

    두 번 다시는 널 잃지 않을 거야.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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