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148)
  • * * *

    숲에는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귀별 숲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둠이 내린 숲은 유난히도 고요했다.

    주위를 살펴보겠다며 몇 개의 조로 나뉜 기사들이 자리를 비워 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어둑해진 주위를 둘러보며 아리아드네가 혼자 이곳에 남은 막내 기사에게 물었다.

    “지금 신호탄 가진 거 있어?”

    “네, 다행히도 제가 가진 것이 있습니다.”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앳된 얼굴의 기사가 품을 뒤적거렸다. 남부 연합군이 사용하는 신호탄은 레너드가 서대륙 군부 인사를 통해 구입한 폭죽의 한 종류였다. 보통의 신호탄보다 훨씬 밝아 멀리서도 눈에 잘 띄는 것이 강점이었다.

    “지금 날릴까요?”

    신호탄을 손에 쥔 기사가 물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가 신호탄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퍼엉! 적색 불꽃이 하늘에서 터졌다. 위를 올려다보는 아리아드네의 얼굴도 밤하늘처럼 폭죽의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이 신호탄이 왕궁까지 닿지는 않겠지만 케이루스 영지에도 메르디에스의 눈은 존재했다. 신호탄을 본 누군가가 최대한 빨리 왕궁에 소식을 전하길 바랄 수밖에.

    불꽃이 모두 사그라진 다음에야 하늘에서 시선을 뗀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돌려 시몬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아리아드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시몬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얻어터졌더니 이젠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만 들어도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아리아드네가 손에서 굴리던 손톱만 한 투명한 보석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이 보석이 랭스턴에 대대로 내려온 모라의 성물이었단 말이지.”

    시몬은 팅팅 부은 눈으로 아리아드네의 손에 들린 보석을 억울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랭스턴의 혈통이 엘바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저 모라의 성물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 성물을 이토록 허무하게 뺏기고 말다니, 카이엔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던 건데. 얻어터지는 와중에 커프스로 위장한 성물을 과하게 감싼 것이 실수였다.

    ―잠깐, 대체 저 커프스가 뭐길래 제 몸보다 더 아끼는 거지?

    ―그거 아무래도 성물 같은데.

    그에게서 커프스를 뺏어 간 것은 눈치 빠른 여자와 눈이 밝은 이계의 방문자라는 환장할 조합이었다.

    ―성물?

    ―여러 축성을 겹겹이 덧씌우는 바람에 처음엔 치렁치렁 매단 축성물 중 하난 줄 알았더니.

    가까이 다가온 이계의 방문자가 시몬의 소매에 달린 커프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이건 그냥 흔한 축성물…….

    시몬은 애써 웃으며 아무것도 아닌 척해 보았지만, 몸을 굽힌 남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커프스를 잡아 뜯었다.

    ―아, 역시나. 모라의 성물이야. 랭스턴에 내려진 가호가 이것이었던 모양이군.

    남자가 아리아드네에게 커프스를 건네며 설명을 덧붙였다. 남자의 설명대로였다. 랭스턴 공작에게 대대로 대물림되는 이 보석은 엘바의 서쪽 숲에 내린 모라의 가호를 제 뜻대로 부릴 수 있는 성물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이 건네준 보석을 살펴보며 엘바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시몬이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소매에 달린 커프스를 만지작거렸던 것이 기억났다.

    ―엘바의 절벽에서 살아남은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그거지.

    가문의 비밀을 모조리 들킨 것도 모자라 가보마저 빼앗기다니, 시몬은 원통한 마음에 눈물이 울컥 솟아났다.

    ―왜 울어? 도망가려다가 못 가서 그래? 별의 홀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계속 꼼지락대던 게 튀려고 했던 것 맞지?

    시몬은 도망가려 했던 주제에 울었다는 이유로 또 한바탕 얻어터져야 했다. 그 뒤로는 아는 정보란 정보는 모두 불었는데, 왜 계속 때리는지 정말이지 분하고 원통했다.

    “그러니까, 엘바의 숲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이 커프스의 권능을 모두 발휘할 수 없단 말이지?”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정신이 퍼뜩 든 시몬은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네네, 그렇습니다.”

    모라의 돌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물은 엘바의 숲과 한 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엘바의 숲이 아닌 곳에서는 그 권능을 모두 발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별의 홀이나 이곳 귀별 숲처럼 모라의 성력이 충만한 곳이라면 공간을 자유로이 이동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엘바에서처럼 공간을 나누거나 교란하는 일은 어려울 겁니다. 아마도…….”

    “아마도? 아직도 나한테 뭘 감출 마음이 남았어?”

    시몬의 머뭇거림에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화들짝 놀란 시몬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숨기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엘바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권능을 최대한 자제한 터라 저도 아는 것이 많지 않을 뿐입니다. 권능을 사용하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계속 말해.”

    아리아드네가 손 안의 돌을 굴리며 시몬을 재촉했다. 축 늘어진 시몬이 힘없이 대답했다.

    “……황금의 가호를 부리는 것이 랭스턴의 혈통이 아니라 성물의 힘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엘바를 통치할 명분이 사라질 테니까요.”

    팅팅 부은 얼굴을 한 시몬이 제법 간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것은 교황도 모르는 랭스턴만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교황에게 숨긴 거야 조금 전 네 말대로 엘바의 통치권을 빼앗길까 봐 그런 거겠지.”

    시몬이야 교황도 모르는 고급 정보를 풀어놨으니 잘 봐 달라는 뜻으로 한 말이겠지만 아리아드네에게 그런 것이 통할 리 없었다. 냉랭하게 시몬의 말을 잘라 낸 아리아드네가 모라의 돌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 성물을 다루는 것이 혈통과 무관한 거면 나도 사용할 수 있겠네?”

    “그, 그건…….”

    그녀의 물음에 당황한 시몬이 말문이 막힌 듯 더듬거렸다.

    “뭐 해? 말해.”

    아리아드네가 시몬의 눈앞에서 모라의 돌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동시에 시몬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시안과 달미에르가 말없이 몸을 풀었다.

    윙윙,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몹시 위협적이었다. 바람만 스쳐도 저들에게 기술적으로 얻어맞은 곳들이 욱신거렸다. 시몬은 정말 심장을 토해 내는 기분으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것을 손에 감싸고 머릿속으로 원하는 바를 상상하시면 됩니다. 어딘가로 이동하고 싶다면, 그곳에 도착한 나를 상상하는 식으로.”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제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네 말대로 했는데 안 되면?”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리아드네는 되레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네?”

    시몬은 아리아드네의 반응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두 눈만 끔벅였다. 제 심장을 바치는 심정으로 한 말인데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니. 사람을 그렇게 쥐어 팰 땐 언제고.

    “그게 거짓말이면 어쩔 거냐고.”

    “정, 정말입니다! 엘바에 가서 확인해 보시면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제가 왜 하겠습니까!”

    의심하듯 거듭 추궁하는 말에 시몬은 억울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보며 아리아드네가 비웃듯 물었다.

    “그러니까 당장 확인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사실대로 말했어?”

    왜 사실대로 말했냐니 그거야 또 맞을까 봐……. 아, 그제야 시몬은 아리아드네가 사실 확인을 위해 자신을 떠본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시몬은 자신의 내부에 남아 있던 희미한 저항의 불씨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시몬 랭스턴, 이제 마지막 질문이야.”

    시몬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비밀이 털리더라도, 이 고된 문답을 어서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교황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해?”

    “성력입니다.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시몬도 꽤 오래 고심했던 부분이라 신속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별의 그릇은 성력을 담을 수 있는 성물입니다. 그것을 이용하면 다른 존재의 성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릇이란 본디 무언가를 옮기기 위한 것이니까요.”

    케이루스의 시작이 페루스의 사제였듯, 랭스턴의 시작은 모라의 사제였다. 그런 만큼 시몬은 모라의 힘과 그 성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살리바의 마녀가 별의 그릇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 고군분투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성력을 담는 그릇을 탐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누군가의 성력을 제 것으로 취하기 위하여. 그것밖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교황에게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있었다.

    “동시대에 그 탐욕스러운 마녀가 제 것으로 취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성력을 지닌 존재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둘이나.”

    아리아드네가 반사적으로 유진을 돌아보자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성녀 베아트리스와 이계의 방문자님 말입니다.”

    ―잘하셨습니다, 성녀님.

    ―……레, 지나! 이거, 이거 놔!

    ―잠시 쉬고 계세요. 다시 일어나실 때쯤에 모든 것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시몬의 말대로 교황의 목적이 정말 그것이라면 베아트리스의 목숨이 위험했다.

    “그 마녀가 성녀의 성력을 흡수하여 제 것으로 만들기 전에 어서 교황을 찾아야 합니다. 교황에겐 제 딸조차 성력을 담은 성물에 불과하니까요.”

    시몬의 이야기를 들은 유진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교황이, 지금 당장 베아트리스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 말인가? 성력을 얻자고?”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별의 홀에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교활한 호랑이가 꾸미는 음모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라고. 교황에게 별의 그릇을 빼앗기기 전에 이것을 말씀드릴 수 있었다면 일이 좀 더 쉬웠겠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그때 자신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은 것이 퍽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방문자님의 성력마저 교황의 차지가 된다면 프레모 대륙의 패권이 바뀌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물론, 방문자님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요.”

    지닌 정보로 위기감을 조성하는 한편 중간중간 적당한 아첨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눈물겨웠다.

    하지만 유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곳에 떨어진 이후로 유진은 계속 저런 상태였다. 위로조차 그에겐 짐이 될 것 같아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말이 없는 유진을 대신해 시몬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네 생각엔 교황의 목적이 두 사람의 성력을 취해 대륙의 패권을 잡는 거란 말이지. 정말 그 이유뿐일까?”

    “이만한 일을 벌였으면 그것 말고 다른 목적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시몬은 두 눈을 끔벅이며, 다른 가능성을 의심하는 아리아드네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심지어 교황을 부러워하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시몬의 저 확고한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 만했다. 지금 주절대는 말들은 별의 그릇을 손에 넣으면 이루고 싶었던 시몬의 희망 사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진실이 무엇인지는 교황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올린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휘 둘러보며 말했다.

    “우선은 여기서 빠져나간 다음에.”

    바스락, 불꽃을 보고 모여든 마물들이 일행을 빼곡히 감싸고 있었다.

    * * *

    검은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베아트리스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꿈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걷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이곳에 홀로 남게 될까 봐. 언제나 그녀를 가장 두렵게 하는 건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지나온 자리마다 그녀가 흘린 피와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다. 질척해진 땅이 그녀의 발을 끌어당겼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걸 놓아 버리면 편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베아트리스는 어떤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건 꿈일 뿐인데, 푹푹 빠져드는 수렁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딸아, 그러니까 아무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거란다.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 수렁의 이름은 절망이었다. 살아온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절망이 깊고 깊은 수렁이 되어 베아트리스를 끌어당겼다.

    ―성하를 지키고 싶다고 하셨지요? 아그네스 님께서 간절히 바라고 계세요. 그를 이곳으로 부르세요.

    ―베아트리스, 잊지는 않았겠지? 성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레지나나 어머니에게 자신은 언제나 유용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차마 그들을 놓을 수가 없었다.

    ―베아트리스, 사랑을 하게 되면 다들 그래. 내가, 내가 아니게 되니까. 내가 싫어져. 그런데도 멈출 수 없는 게 사랑이잖아.

    본디 사랑이란 의지와는 무관하게 밀려드는 것이며, 베아트리스의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라곤 오직 그들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스스로를 미워하지 마. 나까지 나를 미워하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런데 있잖아, 아리아드네. 나는 도무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겠어.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으니까.

    베아트리스에게 사랑이란 이 땅을 떠났다는 신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수히 많은 흔적들이 그 존재를 증명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실재하지 않는.

    ‘……찬란한 저 하늘의 태양은 달을 그리고, 영광된 저 하늘의 달은 사라진 태양을 그리네. 하지만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은 별의 숙명. 하지만 달이 뜨고, 해가 지는 것은 별의 숙명.’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맴도는 저 노래처럼, 보답받지 못할 사랑에 매달리는 것이 자신의 숙명처럼 느껴졌다.

    ‘잠든 네 곁을 지키는 별이 되리라. 찬란한 금빛이 너를 비추는 동안, 널 찾아온 악몽을 피해 꼭꼭 숨어라. 해가 악몽을 살라 버릴 때까지 꼭꼭 숨어라.’

    깨고 나면 사라져 버릴 악몽처럼, 언젠가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베아트리스는 제 머릿속에서 울리는 노래가 인도하는 대로 길을 걸었다.

    제 소망이 만들어 낸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저 노래가 들리는 동안에는 혼자가 아닌 것만 같아서. 따뜻한 물에 잠긴 것처럼 부드러운 온기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어쩐지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베아트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이 길의 끝이 보일 것도 같아 손을 뻗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아, 아흑, 베아트리스는 헐떡이며 신음을 내뱉었다. 마치 갈고리로 속을 온통 할퀴는 것만 같았다.

    “제발, 제발 누가 나 좀―”

    자신이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서야 베아트리스는 악몽에서 깨어났음을 알아차렸다.

    눈을 떠도 눈앞은 온통 새까만 어둠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손에 잡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쥐어뜯었다. 그녀를 덮고 있던 천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일어났니?”

    더없이 평온하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베아트리스는 힘겹게 눈을 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빛 한 점 없는 새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그보다 더 까만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여자가 반쯤 부서진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머, 니.”

    아그네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베아트리스를 관망하듯 응시하며 난간에 조각된 덩굴장미 따위를 덧그렸다.

    “어, 어머니……. 저 너무, 너무 아파요.”

    베아트리스가 고통으로 온몸을 뒤틀며 아그네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아그네스가 베아트리스를 향해 다가왔다.

    채 갈무리되지 않은 성력이 내부에서 날뛰느라 속이 끊어지고 뒤틀리는 것 같았다. 다시금 피를 토한 베아트리스가 생리적으로 솟아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베아트리스의 고통을 가늠하려는 듯, 그녀를 훑어본 아그네스가 곁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성력이란 자신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서 사용할수록 더 많은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란다. 그래서 무엇보다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이 중요하지.”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길은 퍽 다정했으나, 하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칼처럼 날카로웠다.

    “고통이 클수록 너에게 더 큰 성력을 안겨 줄 테니 잘된 일이지.”

    베아트리스의 고통 따위 아그네스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녀에겐 이 모든 것이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 불과했다.

    베아트리스가 이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한대도 아그네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베아트리스를 더욱 절망케 했다.

    아그네스가 절망에 물든 베아트리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아무도 사랑하지 말았어야지.”

    안타깝다는 얼굴을 한 아그네스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아이란 어쩜 이렇게도 맹목적인지. 아그네스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맹목적으로 매달렸던 때가 있었다.

    ―어, 머니?

    ―아니야, 난, 난 아니야. 나는 변절하지 않, 았어.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나는, 나는……. 나는 몰라. 나는 저런 괴물을 낳지 않았어.

    아이에게 ‘어머니’란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세상이 자신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에겐 무엇이 남을까.

    세상에 거부당한 아그네스의 첫 번째 선택은 착해지는 것이었다. 착한 아이가 되면, 영리한 아이가 되면, 자랑스러워할 만한 사람이 되면, 그때는 어머니도 나를 봐 주시겠지.

    하지만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교황의 사생아는 모두의 눈엣가시였다. 교황이 사랑하는 금빛 머리카락도, 에메랄드 같은 녹빛의 눈동자도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저 칙칙한 검은 머리카락 좀 보라지. 꼭 시궁쥐 같아.

    ―피처럼 붉은 눈은 어떻고.

    ―쟤 눈 한번 찔러 볼까? 붉은 눈에서도 피가 흐를까?

    온갖 멸시와 괴롭힘 속에서도 아그네스는 처음의 결심을 제법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아그네스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 따위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그네스, 오늘은 무얼 배웠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유년을 지탱해 준 것은 루이제 랭스턴, 그 악마 같은 여자였다. 생모조차 거부한 아그네스를 거둔 루이제는 그녀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벌써 수석 사제의 자리에 올랐다지? 네가 명석하니 내 기대가 크구나. 네 쓸모는 시몬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 잊지 말고.

    물론 그 모든 것은 제 아들에게 쓸 만한 수족을 선물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지만.

    ―성력의 발현이 더디구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그네스의 생모는 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성력만으로 사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교황이 한낱 수습 사제를 취한 이유가 성력을 탐내서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돌았을 정도로.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되었다. 루이제가 대사제의 관문을 앞둔 아그네스를 은밀히 불러들였다.

    ―아그네스.

    ―네, 랭스턴 대부인.

    ―네가 이번 대사제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조금 곤란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때의 아그네스는 자신이 바라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을 꿈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르체, 그곳에 가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게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네 어머니는 내가 잘 보살펴 주마.

    아그네스는 반쯤은 떠밀려, 또 반쯤은 힘에 대한 갈망으로 아르체로 떠났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얻으면 정의롭지 못한 것들과 맞설 수 있을 줄 알았다. 더러운 것을 물로 씻어 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아르체에서 돌아온 아그네스는 더는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더 평화로운 세상, 더 아름다운 세상,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했다. 세상은 언제나 지옥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그네스는 힘을 얻은 대신 꿈꾸는 법을 잃어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잔혹한 현실뿐이었다.

    그때는 세상을 증오했었다. 증오하는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지우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아그네스는 자신을 낳은 생모를 죽이고, 자신을 만든 생부를 죽였다.

    그녀에게 피를 나눈 혈육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존재.

    하지만 그녀를 움직이게 했던 가장 큰 동력인 증오조차 영원하지 않았다.

    수습 사제가 가진 성력을 탐냈던 역겨운 교황도, 그녀의 유년을 지배했던 악마 같은 루이제도, 눈에 박힌 가시 같았던 이복동생도, 증오하던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소망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고통과 절망으로 헐떡이는 이 아이만이 그녀의 바람을 이뤄 줄 수 있었다.

    “베아트리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니?”

    아그네스의 물음에 베아트리스가 텅 빈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성물의, 진정한 주인이 되라고.”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새겨진 말이었다. 몇백 번, 몇천 번, 어쩌면 몇만 번일지도 모를 횟수만큼 더해지고 또 더해진.

    베아트리스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은 아그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너는 위대한 성물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해.”

    난간에 다가선 아그네스가 어둠 손으로 손을 뻗어 툭, 나뭇가지를 꺾었다. 그녀가 뾰족한 잎사귀를 쓰다듬으며 낮게 속삭였다.

    “너만이 내 유일한 희망이니까.”

    그 순간, 아그네스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에서 새빨간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났다.

    가지 채 꺾인 것은 물론이고, 봉오리조차 맺지 못한 상태였는데 대체 어떻게……. 베아트리스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모라의 그릇은 시간을 담는 성물. 이것에 담긴 시간만큼 무엇이든 되돌릴 수 있지. 죽은 장미도―”

    그때, 아그네스 뒤로 펼쳐진 새까만 어둠 속에서 수백 송이의 붉은 장미가 삽시간에 활짝 피어났다.

    “그리고 죽은 사람도.”

    흐드러지게 피어난 장미보다도 더욱 붉은 아그네스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자격을 잃은 것 아닙니까?

    페렌트의 새로운 왕은 언제까지 그 고결한 이상을 지킬 수 있을까. 무너지지 않는 이상이란 없다. 그것만이 아그네스가 경험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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