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48)

8. Never Say Never

아악, 악악악, 꺄아아악!

머리 위의 마물이 크게 활공하며 목청이 찢어질 듯 울어 젖혔다. 마물의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새빨간 불길이 치솟았다. 뱀의 얼굴을 한 날개 달린 비행형 마물 자크루스의 출현이었다.

“진짜, 저 울음소리…….”

자크루스가 내지르는 괴성에 사람들이 귀를 막았다. 인간의 비명과 흡사한 자크루스의 울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불쾌하고 찝찝했다.

꺄아악, 악! 아악! 자크루스가 크게 포효하며 불길을 뱉어 냈다. 자크루스가 뱉어 낸 불덩이는 삽시간에 근처 나무로 옮겨붙었다.

“전투 인원은 자크루스를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을 끈다.”

느닷없이 외딴 숲에 떨어진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마물의 공격에 직면했다. 몇몇 사람들이 나무에 붙은 불을 끄는 사이, 활을 든 기사들은 자크루스 사냥에 나섰다.

“날개부터 잘라!”

하지만 워낙 삼림이 우거진 곳이었기에 자크루스를 노린 화살은 번번이 빗나가 애먼 나무에 박혔다. 방해물처럼 늘어선 나무들 때문에 좀처럼 자크루스를 잡지 못하고 있던 그때였다.

“비켜.”

풀멘을 든 유진이 제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을 헤치고 자크루스를 향해 달려 나갔다. 타앙! 탕! 풀멘의 끝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쇳덩이 두 개가 자크루스의 아가리에 연이어 박혔다.

흐으, 흐어어어어―

머리가 반쯤 날아간 자크루스가 괴로운 듯 온몸을 뒤틀며 포효했다. 마물은 사력을 다하듯 불을 뿜어 냈지만 그 기세는 처음만 못했다. 자크루스는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휘청이다 끝내 불붙은 나무 위로 떨어졌다.

우지끈, 쿠웅! 아름드리나무가 부러지고 자크루스의 몸에 불이 붙었다. 자신이 뿜어낸 불길에 휩싸인 자크루스가 간간이 꿈틀대다 이윽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첫 사냥의 성공으로 고무된 기사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유진이 혼자 서너 마리를 해치울 때, 시안을 필두로 한 기사들도 협공하여 한두 마리 정도는 안정적으로 사냥할 수 있게 되자 자크루스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놈이 마지막입니다.”

꺄아아악! 양쪽 날개가 잘린 자크루스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귀별 숲에서의 첫 사냥이 마무리되었다. 기사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행여나 아직 죽지 않은 마물이 있는지 살폈다.

히익, 히이익! 저항할 힘도 없이 늘어진 마물들이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갔다.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죽을 마물들의 숨을 굳이 끊은 것은 한때는 인간이었을 존재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마지막 고통을 덜어 주는 것만이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삶도 죽음도 더는 속박하지 않는 땅에서.”

기사들은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은 마물 앞에서 짧은 제문을 읊조렸다. 자크루스가 사라진 숲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할 일을 마친 기사들이 다음 할 일을 알려 달라는 듯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의지가 되어야 하는 자리, 그것이 아리아드네가 선택한 자리의 무게였다.

당장 캐롤린을 찾겠다며 뛰쳐나가도, 아무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겠지만 그럴 순 없었다. 자신에겐 이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더구나 소중한 사람을 눈앞에서 놓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유진은 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나는 왜 아무도 지켜 주려 하지 않아?

피를 쏟으며 눈물을 흘리던 베아트리스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갑갑해졌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돌려 유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한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전투로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더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았던 그였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부터 잘게 떨리는 손까지, 늘 침착했던 그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레, 지나! 이거, 이거 놔!

베아트리스가 사람들 손에 억지로 끌려가는 것을 눈앞에서 봤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지금 위험한 건 자신들만이 아니었다. 이곳 어딘가에 베아트리스가 잡혀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일행을 지켜야 하는 것도, 베아트리스를 구해야 하는 것도 모두 아리아드네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캐롤린, 조금만 기다려 줘. 반드시 데리러 갈게.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주먹을 말아 쥔 아리아드네가 숨을 고르고 분노를 가라앉혔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리카르도는?”

그녀의 물음에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가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리아드네가 물을 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기사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답했다.

“그것이, 지금 당장은 찾기 힘들 듯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기사의 실수를 탓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리카르도는 자크루스의 공격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재빨리 몸을 피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 벌어진 일은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더구나 이곳에 떨어진 직후, 마물의 습격까지 있었으니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아니었다. 책임 소재도 불분명한 잘잘못을 가리느니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은 그것보다, 제롬, 내게 할 말이 있을 텐데.”

아리아드네가 제롬에게 다가가 물었다. 카이엔을 미끼로 자신들을 별의 홀로 끌어들인 것은 다름 아닌 검은 달의 수장 제롬이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제롬이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제롬, 넌 내게 생존을 요청했고, 난 그걸 수락했어. 그런데 네 목적은 생존이 아니라 날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었나?”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고개를 쳐든 제롬이 온몸으로 격하게 부정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거지?”

이곳이 정말 귀별 숲이라면 케이루스 영지의 북쪽 끝이란 뜻이었다. 자신을 비롯한 남부 연합의 핵심 인물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니 왕궁의 상황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다. 내전의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사라진 사람들을 찾느라 한바탕 뒤집혔을 왕궁의 상황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리아드네의 서슬에 제롬이 덜덜 떨며 변명을 쏟아 냈다.

“성 상티모니아는 케이루스가 아닌 메르디에스의 우군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 말만 믿고 왕궁에 든 교황의 전령에게 협력했던 것뿐입니다.”

제롬이 메르디에스에 투항 의사를 밝힌 직후, 정보 누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일부러 그런 말을 흘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역으로 그것을 이용할 줄이야.

“……교황의 전령이라고?”

아리아드네는 별의 홀에서 마주쳤던 리카르도의 얼굴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리카르도가 교황의 세작이었다니.

―설사 성물에 대한 반발력을 가진 인간이 성물에 노출되어 마물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왜 성 상티모니아의 잘못입니까?

―대주님, 이자는 제 제자들을 인질로 삼아 저를 제압했습니다. 제가 이자의 목숨을 거둘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공녀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어쩌면 제법 괜찮은 동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을까.

“조금 전 폐왕자의 품에서 별의 그릇을 빼 든 그자 말입니다. 그자가 바로 교황의 전령입니다.”

말이 없는 아리아드네를 오해했는지 제롬이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들이 하는 말과 폐하께서 보내 주신 말에 어긋남이 없어 저로서는 교황의 전령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리카르도가 교황의 전령이었다면 제롬을 속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겠지.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교황의 전령이, 왕궁에 도착한 것이 언제였지?”

“그전에도 서신을 통한 왕래는 있었으나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열흘 전이었습니다.”

시기도 리카르도가 물새 협곡을 떠난 때와 딱 맞아떨어졌다.

“폐왕자를 별의 홀에 매단 것도 교황의 전령이 시킨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폐하의 뜻이라 했습니다. 폐하께서 폐왕자의 비참한 굴복을 원하신다고. 저는 그것이 폐하를 위험에 빠뜨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 알고 한 짓이 아닙니다.”

제롬이 읍소하며 아리아드네에게 매달렸다.

“저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제발 다른 동료들만은…….”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아리아드네의 마음도 절로 심란해졌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교황의 수를 읽지 못한 내 실수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닌데.’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지적할 것 같진 않았다.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처벌과 감시는 결코 건강한 것이 아니다. 결국 스스로를 다잡는 수밖에는 없나. 아리아드네가 제롬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제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레비에 후작이 냉큼 나서서 소리를 질러 댔다.

“네놈이 기어이 거사를 그르치는구나! 네놈의 알량한 욕심 때문에 지금 얼마나 많은 일이 어그러졌는지 아느냐?”

레비에의 방만한 언행에 아리아드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카이엔을 빼앗긴 것과 별의 홀에서 있었던 아리아드네의 질책까지, 권력의 중추에서 멀어질 거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해 연이은 실책을 범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그것을 용인해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레비에, 지금부터 한 번만 더 내 말에 끼어들면 이곳의 누구도 널 보호하지 않을 거야. 자력으로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면 계속 떠들어.”

아리아드네가 무너진 신전 근처에서 어슬렁대는 마물을 가리키자, 레비에의 입술이 조개처럼 꽉 다물렸다. 왁왁 내지르던 소음이 사라지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제롬, 네 처분은 왕궁으로 돌아가 결정하겠다.”

바닥에 엎어진 제롬을 일으켜 준 아리아드네가 그대로 걸어가 시몬 앞에서 멈추었다. 팔이 뒤로 묶인 채로 꼼지락대던 시몬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아리아드네가 시몬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우리 아까 못다 한 대화가 남았지, 아마?”

“네? 어떤…….”

시몬이 좌우로 눈알을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이곳에 떨어진 직후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별이 떠나간 자리, 귀별 숲.

시몬은 분명 그렇게 대답했다.

아리아드네도 귀별 숲이란 지명과 대략적인 위치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귀별 숲은 케이루스가 페렌트에 처음 정착한 곳이었으니. 하지만 귀별 숲이 어떠한 모습인지 실상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케이루스가 자신들의 성지나 마찬가지인 귀별 숲으로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한 탓이었다.

그런데 숲의 풍경만 보고 ‘귀별 숲’이란 지명이 바로 나오다니. 시몬을 족치면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듯했다.

“지금 내 기분이 아주 엿 같으니까 네가 대답을 잘해 줬으면 좋겠어. 잘할 수 있지?”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잘하게 만들어 주면 되니까. 귀별 숲에서의 하루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귀별 숲의 북쪽 끄트머리, 세월이 흔적이 역력한 오래된 신전에 성 상티모니아의 사제들이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줄에 선 이는 성기사단 부단장 리카르도였다. 그가 손에 든 별의 그릇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 너무 쉽게 죽어 버렸군. 이렇게 편히 보내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새까만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나타난 아그네스가 수도원장을 죽인 그 순간부터, 평생 그녀를 따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왜 자꾸만…….

―리카르도……

복면이 벗겨진 자신의 얼굴을 보던 아리아드네의 허탈한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의 오랜 기다림이 보상을 받는가.”

“쓴 인내가 다디단 과실을 가져다주는군.”

주위의 사제들이 잔뜩 고무되어 지껄이는 소리도 거슬리기만 했다. 그때, 신전의 한가운데가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밝아지더니 그곳에서 터져 나온 광휘가 사방으로 뻗쳤다.

산란하는 빛의 폭풍 속에서 사람들의 술렁임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광휘를 바라보는 사제들의 간절한 눈동자엔 흡사 광기가 어린 듯했다.

리카르도는 그들의 비이성적인 집념이 마치 제 목을 졸라 오는 것만 같았다. 숨이 멎을 듯한 광기로 가득한 이곳에선 어디를 보아도 눈을 찌르는 듯한 저 광휘를 피할 수 없었다.

주위를 밝히던 빛이 잦아들고 소란스럽던 주위가 일시에 잠잠해졌다. 그리고, 광휘가 뻗쳐 나오던 그 자리에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아그네스가 고요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오오, 오오오―”

“드디어, 드디어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가!”

마치 이 땅을 떠난 신들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 사제들은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앞다퉈 소리를 질렀다.

“성하!”

“성 상티모니아에 영광을!”

“이 땅에 축복을!”

아그네스가 열광하는 사제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흥분한 사람들 사이에서 리카르도는 홀로 이곳에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

찰나 간에 떠올랐다 사라진 아그네스의 표정을 그 혼자만 목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고 있는 그 표정을.

자신을 살피는 시선을 느꼈는지 아그네스의 붉은 눈동자가 리카르도를 곧게 응시했다. 이 자리에서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로서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그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리카르도.”

아그네스의 부름에 리카르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그네스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

리카르도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멍하니 보고만 있자 아그네스가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무얼 하느냐?”

아그네스의 시선이 리카르도가 들고 있는 별의 그릇을 가리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가 허겁지겁 그것을 바쳤다.

“성 상티모니아를 떠나 있는 동안 정신도 빼놓고 다닌 모양이구나.”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아그네스가 별의 그릇을 손에 쥐었다. 페루스의 뿔을 쥔 아그네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아아, 마침내, 이제야, 이것을.

빠듯하게 잡히는 뼈의 감촉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뼈를 쥔 아그네스의 손이 잘게 떨렸다. 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 언제였더라. 멈춘 줄 알았던 심장마저 거세게 뛰었다.

고개를 든 아그네스가 리카르도를 향해 흡족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잘했다.”

별의 그릇을 갈무리한 아그네스가 리카르도를 스쳐 지나가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잠시 흔들린 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자연스레 잦아들 일. 잊어라.”

역시나. 흔들리는 마음을 낱낱이 들킨 모양이었다. 리카르도가 고개를 돌려,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그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의 힘이 깃든 물건이 성하의 품에 돌아왔으니, 이것이야말로 전(全) 대륙을 성지로 만들라는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위대함을 오만한 저들에게 보여 줘야 합니다.”

별의 그릇마저 교황의 수중에 들어오자 이곳에 모인 성 상티모니아 세력들은 당장이라도 전투를 벌일 기세였다.

“적들은 이제 막 내전을 끝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신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절호의 기회. 이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라면 저 페렌트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겨우 이만한 병력으로.

하지만 리카르도의 눈에는 그들이 성 상티모니아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머저리들 같았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남부 연합군은 내전을 치르는 동안 전력의 손실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내전을 거치며 예민하게 갈린 전투 감각이 그들을 위협할 것을 걱정해야 했다.

지금이야 소수의 병력만이 귀별 숲에 떨어졌지만 곧 연락이 닿아 지원 병력이 들이닥칠 터. 그렇게 되면 몇 배나 되는 병력에 둘러싸이는 것은 페렌트가 아닌 성 상티모니아였다.

별의 그릇이 아무리 위대한 성물이라 하더라도 수천― 아니, 수만의 병력 차이를 메꿔 줄 순 없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몇 달 전의 자신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은 아그네스의 가장 가까운 충복들이었고, 그들에게 아그네스의 말이란 진리와 다름없으니.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하라면 아실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성하께 말씀을 드려야…….’

리카르도가 막 걸음을 떼려는 그때, 아그네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리카르도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것은 명백한 조소였다.

‘이미 알고 계신다면, 정녕 성하께서 모든 것을 알고도 이를 부추긴 것이라면……’

리카르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채로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성하께선 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리카르도와 마주한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피의 학살자, 살리바의 마녀. 아그네스의 이명은 그녀가 쌓아 올린 학살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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