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48)

* * *

“성주님, 왕후를 찾았습니다…….”

“걔가 아직 궁에 남아 있었어?”

기사의 말에 레너드가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칼이야 당연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왕궁을 떠났을 줄 알았다. 욕심 많고 성격 나쁜 그놈이 더 이상 제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왕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웬일이래? 레너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며 기사를 따라 지하로 발을 옮겼다.

“어, 그러고 보니까 여기는…….”

계단을 내려가던 레너드가 눈가를 찌푸렸다. 자신의 발길이 향하는 곳이 성의 지하에 위치한 왕가의 가묘(假墓:정식 묘를 쓰기 전에 임시로 쓰는 묘를 이르는 말)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잔뜩 구긴 레너드가 투덜대며 석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여간에 꼭 저 같은 곳에―”

레너드의 말소리마저 뚝 끊기자 지하 석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왕의 시신을 안치한 석실은 대낮처럼 밝았다. 망자가 길을 잃지 말라는 뜻에서 늘 불을 밝혀 놓는 것이 관례라지만 이는 정도가 과했다.

레너드는 왕의 시신이 놓여 있을 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터엉, 무언가가 발에 부딪혀서 보았더니 관을 덮고 있어야 할 뚜껑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레너드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구는 관 뚜껑을 지나쳐 피를 쏟은 채 쓰러진 남자에게 닿았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석실 바닥에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미친놈…….”

한숨을 내쉰 레너드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리카서스의 장자로 태어났으나, 성물의 선택을 받지 못하자 차라리 왕의 남편이 되어 페렌트에 군림하고자 했던 칼 리카서스의 시신이 그곳에 있었다.

마지막엔 남부 연합과 손을 잡았다기에 그 정도 판단을 할 정신머리는 남았나 보다 생각했더니. 아니, 어쩌면 칼이 자살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레너드가 아는 칼은 패배자로는 하루도 살지 못할 인간이었으니까.

그때, 레너드의 눈에 칼의 손에 잡힌 무언가가 보였다. 적갈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왕의 것이었다. 죽어서도 놔주지 않겠다는 듯 왕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칼의 모습에 레너드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따금 다그마르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그저 미친놈의 변덕으로만 여겼는데……. 칼이 보인 다그마르를 향한 집착에는 권력을 향한 탐욕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라는 말로 칼의 감정을 포장해 주고 싶진 않았다. 칼이 한 짓은 다그마르에게 있어 폭력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쓰러진 칼을 지나쳐 석관에 누운 다그마르를 향해 다가선 레너드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늦었습니다, 폐하.”

왕이되 일평생 왕으로 군림하지 못했던 케이루스 왕가의 마지막 왕.

레너드는 다그마르의 시신을 보며 비감에 잠겼다. 그것은 평생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며 죽음마저 아들에게 이용당한 그녀의 삶이 안쓰러워서이기도 했고, 한 시대가 저무는 것을 지켜보는 자의 필연적인 비애이기도 했다.

“……삶도 죽음도 속박하지 않는 땅에서 부디 평안하시길.”

그는 짧은 제문을 읊고는 발길을 돌렸다. 지하 석실을 빠져나온 레너드는 성 안으로 비쳐 드는 환한 빛을 마주했다. 그새 어둠이 물러가고 새로운 아침이 밝은 모양이었다.

“전 시대의 유물은 이만 퇴장할 시간이군.”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찡그린 레너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막 떠오른 태양이 그가 가는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길이었다.

* * *

휘이잉, 케이루스의 성물을 보관해 온 홀을 덮고 있던 유리가 깨지며 거센 바람이 들이닥쳤다. 홀 중앙에 선 아리아드네는 반파된 돔 모양의 유리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읽고, 그것을 권력의 수단으로 삼아 온 케이루스에게 이곳은 그들의 신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몰락한 케이루스와 운명을 함께하는 것처럼, 그들의 신전 또한 형편없이 망가졌다.

하지만 지상의 사정이 어떠하건 천체는 변함없이 움직였다. 여느 때처럼 태양이 떠오르자 깨진 유리 사이로 아침의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빛을 반사해, 홀 내부가 온통 빛으로 가득 찼다.

아리아드네의 옅은 금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성가시다는 듯 손차양을 만들어 사방에서 반사되는 빛을 가린 아리아드네가 시선을 내려 숨이 끊어진 시신을 확인했다.

케이루스의 마지막 제주였으나 끝내 왕이 되지 못한 왕자. 이것이 카이엔의 결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의 시신을 넘어, 그를 묶었던 기둥 앞에 섰다. 카이엔이 흘린 피로 바닥이 온통 붉은색인 와중에 그를 매다느라 생긴 흠집들이 난잡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끊길 것처럼 이어진 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주위가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졌다. 아리아드네는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돌렸다가 홀에 막 올라선 레너드를 발견했다.

“……아버지.”

그녀의 부름에 잰걸음으로 다가오던 레너드가 카이엔의 시신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카이엔의 어깨, 목, 가슴을 차례대로 훑었다. 되는대로 마구 찌른 듯한 자상은 분명 검을 숙련하지 않은 이의 것이었다.

“아리아드네.”

피에 젖은 딸의 양손을 감싸 쥔 레너드가 다 짐작한다는 듯 아리아드네를 꼭 안아 주었다.

“고생 많았다. 이젠 다 끝났구나.”

그는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연신 쓸어내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에는 독살로 생을 마감했던 레너드였다. 그런 레너드의 품에 안겨 있으니, 정말 미래를 제 손으로 바꾸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레너드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아리아드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죠.”

케이루스를 무너트리고 페렌트의 새 주인이 되는 것. 자신이 바라던 세상에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깊고 쓸쓸한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응시하던 레너드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을 더듬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찰랑, 레너드의 손에 아무런 장식 없는 금줄이 딸려 나왔다. 금줄에는 두 개의 반지가 걸려 있었는데 아리아드네만이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아버지!”

아리아드네의 다급한 외침에도 레너드는 기어이 그것을 그녀의 목에 걸어 주었다.

“아리아드네.”

레너드가 금줄에 걸린 두 개의 반지 중 메르디에스 문장 위로 열쇠가 새겨진 첫 번째 것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프레모 대륙에 흩어진 메르디에스의 전(全) 영토와 그곳을 잇는 모든 배와 마차, 그것들이 실어 나르는 모든 것이 네 것이다.”

첫 번째 반지는 메르디에스의 이름으로 된 모든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인장이었다.

“지금부터 너는 전 대륙에서 가장 많은 황금을 지닌 무량의 소유자이며, 풍요로운 메르디에스 성의 성주이자, 가시나무가 시작된 녹색 평원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메르디에스의 작위를 가진 이에게만 계승되는 것이었다. 레너드가 메르디에스 공작 위를 증명하는 두 번째 반지를 아리아드네 손에 쥐여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아리아드네가 페렌트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메르디에스의 주인이 되는 것이 우선이긴 했으나, 그것이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 어떤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아버지의 퇴위를 최대한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다.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공작 위 계승을 마무리 짓자는 레너드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레너드 또한 아리아드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아리아드네, 다섯 가문이 페렌트를 다스리던 시대는 끝났다. 천공의 케이루스는 몰락했고, 창명의 리카서스는 바다의 패권을 잃을 것이며, 수호의 소르체는 닫혔던 문을 열고, 심판의 리뮈르는 더는 변방의 파수꾼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너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이 시작된 시대에서 자신의 역할이 물러나는 것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아리아드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메르디에스는 네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네 몇 마디 말만으로 메르디에스가 네 왕위를 위해 움직이진 않을 거다.

―그러니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의 힘이 필요하다면 날 설득해라. 케이루스가 네 공가의 멸문을 바라는 것도, 그들의 힘이 우리를 정말 위협할 정도라는 것도, 그리고 네가 새로운 왕조를 세울 만한 왕의 재목이라는 것도.

페렌트의 왕이 되겠노라 말하던 딸에게 그는 스스로를 증명하라 요구했다.

“제 설득은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나요?”

“물론.”

그녀가 설득한 것은 비단 레너드뿐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모두의 예상과 기대를 뛰어넘어 자신이 새로운 시대의 왕임을 증명했다.

“시대가 바뀌는 순간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서 영광스러웠고, 그것을 주도한 이가 내 딸이라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더 이상 품을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자란 자식에게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제 품을 떠나 훨훨 나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시대가 바뀌었으면 그것을 이끄는 이 또한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지.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유물이 얼쩡대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훌쩍 자라 버린 딸이 뿌듯하면서도 더는 해 줄 것이 없어 서운해진 레너드가 복잡한 심경을 숨기려는 듯 슬쩍 고개를 틀었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가 레너드의 얼굴에 떠오른 서운함을 몰라볼 리 없었다.

“빚쟁이처럼 굴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아직 아버지께 받아야 할 게 많으니까…….”

덜컥 서러워진 아리아드네가 레너드의 양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니, 돈이고 작위고 다 넘겼는데, 내가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남았다고?”

부러 투덜대며 한껏 불평을 늘어놓은 레너드가 다정한 얼굴로 서운해하는 딸을 달랬다.

“괜한 걱정할 것 없다. 나야 하루라도 빨리 편하게 놀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아리아드네가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망설이던 그때였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홀에 올랐다.

“늦지 않았습니까?”

여기까지 달려온 듯 땀으로 뒤범벅된 달미에르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모리아 백작이 이끄는 케이루스 주 병력을 상대하기 위해 물새 협곡에 남았던 달미에르였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람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졌다. 놀란 사람들 사이에서 레너드만이 모든 것을 짐작했다는 듯 침착한 얼굴이었다.

“새 무대에 오를 배우들이 얼추 도착한 것 같으니, 나는 이젠 정말 내려가 봐야겠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레너드가 아리아드네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럼, 우리는 집에서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레너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제 할 일이 모두 끝났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레너드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고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달미에르에게 물었다.

“리뮈르 공자께서는 물새 협곡에 남으시는 것 아니었나요?”

“그러려고 했는데, 메르디에스 선 공작께서 갑작스레 연락을 주셔서요.”

선 공작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달미에르를 불러들인 것은 레너드가 벌인 일인 듯했다.

“왕궁에서 케이루스 세력을 몰아내는 즉시, 메르디에스 공작 위를 승계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서둘러 오느라 죽는 줄 알았다며 앓는 소리를 한 달미에르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연유로 물새 협곡 전투에서 가장 쓸모없는 제가 차출되었습니다.”

리뮈르의 병력을 이끄는 것은 대주인 달헤임이고, 물새 협곡의 마지막 전투에서 전략을 담당하는 것은 달로아일 테니 그곳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달미에르뿐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리뮈르 중 누군가는 반드시 왕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결정이었다. 리뮈르가 왕궁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이라면…….

“리뮈르의 달미에르, 리뮈르 대주의 권한을 위임받아 이 자리에 섰습니다.”

품에서 리뮈르 공작의 인장을 꺼내 든 달미에르가 짧게 숨을 멈췄다가 뒷말을 이었다.

“눈과 얼음의 기사단을 이끄는 부러진 검, 심연의 대주이자 디움의 파수꾼인 리뮈르는 지금 이 자리에서 페렌트 다섯 가문에게 주어진 가장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고자 하는 바―”

페렌트 다섯 가문에게 주어진 가장 신성한 의무, 그것이 뜻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리뮈르는 메르디에스 공작을 페렌트의 다음 왕으로 추대한다.”

달미에르의 말이 끝나자 숨 쉬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주위가 고요해졌다. 레너드가 메르디에스 공작 위를 넘기고, 때맞춰 달미에르가 나타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으나, 그것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감정은 또 달랐다.

모두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칼을 든 시안이 자신의 손바닥을 가볍게 그었다. 날붙이에 베인 그녀의 손에서 핏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지금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시안에게 소르체 가주의 인장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가주의 인장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전하는 소르체 가주의 뜻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임을 이 몸에 흐르는 백자(白者)의 피를 걸고 맹세하는 바―”

다섯 가문의 성물은 유사시 가문의 인장을 대신할 수 있고, 시안은 곧 소르체의 성물이었으니까.

“삶과 죽음의 조율사, 수호의 가주, 흰 뱀과 검은 뱀의 숲지기 소르체, 우리는 메르디에스 공작을 페렌트의 다음 왕으로 추대한다.”

시안이 자신이 ‘백자’임을 밝힌 상황이었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왕.”

신의 현신이라 불리는 이계의 방문자가 아리아드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기에.

반쯤 부서진 유리 지붕과 그 사이로 아찔할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받은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부디 내게도 당신을 섬길 권리를 주겠어?”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무리 그가 이 세계의 정세에 무지한 편이라지만 성 상티모니아 내에서 제 위치가 어떠한 것인지 모르진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그가 자신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주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나는 성 상티모니아를 발아래 둔 최초의 왕이 되겠군.”

아리아드네가 무릎 꿇은 유진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대답하자, 그가 긍정하듯 느리게 눈을 감았다.

“내가 가진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당신을 위한 것이 될 테니.”

읊조리듯 말한 그가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자신을 바라보는 서늘한 회색 눈동자, 든든한 그 시선을 뒤로하고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는 리뮈르와 소르체의 뜻을 받아들여 페렌트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이 자리에서 선언하노라.”

그녀의 말에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등 뒤의 남자였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첫 번째 신하라는 듯이.

다음으로 예를 표한 것은 소르체와 리뮈르의 대리자들이었다.

“풍요를 누리는 메르디에스의 성주(城主), 페렌트 다섯 기둥의 수장, 가장 찬란한 영광 국왕 폐하께―”

두 개의 목소리는 하나의 말로 합쳐졌다가.

“소르체의 딸 시안 소르체가 인사 올립니다.”

“리뮈르의 아들 달미에르 리뮈르가 인사 올립니다.”

다시 둘로 나뉘어 끝이 났다. 소르체와 리뮈르의 대리자들이 국왕에게 표하는 예를 마치자 남은 자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영원토록 바래지 않는 영광을 누리소서.”

그리고 그들에게서 거대한 진동과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영광을 누리소서.”

메아리처럼 뒤따르는 소리에 홀 전체가 울렸다. 왕의 관도, 보주(寶珠)도 갖추지 못한 그저 몇 마디 말뿐인 선언에 불과했지만, 그 누구도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왕의 대관식이 거행되었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사슴의 붉은 피 위에서 피어난 푸른 가시나무라 불리는 메르디에스 왕조의 시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든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끝내 왕이 되지 못하고 왕자로 남은 남자의 피였다.

―내 피가 네 발을 적시면 나는 다시 삶을 얻으리라.

아리아드네는 언젠가 자신이 퍼부었던 저주와도 같았던 그 말을 기억했다. 왕이 된 카이엔의 발치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가던 자신의 모습도.

이제 모든 것은 뒤바뀌었다. 왕이 된 건 자신이고, 제 발치에서 피를 쏟으며 죽은 건 카이엔이었다.

아리아드네는 피로 흠뻑 젖은 카이엔의 붉은 망토를 밟고 지나갔다. 한때는 왕가의 문장이었던 외뿔의 사슴이 그녀의 발밑에서 짓이겨졌다.

페렌트 다섯 가문 중 하나였으며, 200년을 왕가로 군림해 온 케이루스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다스릴 페렌트에는 더는 다섯 가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천 년과는 완전히 다른 페렌트가 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녀는 성 상티모니아 내의 누군가에게서 충성을 맹세 받은 유일한 지상의 왕이기도 했다. 하긴 신의 말씀을 전해야 할 자가 인간을 섬기다니, 평범한 성직자라면 진작 파문당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쩌면 유진이 평범한 성직자가 아니라서 더 문제일지도.’

그것을 어떻게 수습할지는 차차 생각할 문제였고, 지금은 눈앞의 쥐새끼를 요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아리아드네가 기사들이 감시하듯 지키고 있는 시몬을 향해 다가가 그의 등을 꾹 밟으며 말했다.

“일어나. 죽은 척하지 말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꼼짝 않고 있던 시몬의 몸이 움찔 움직였다. 그 꼴을 본 아리아드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죽은 척하고 싶었으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끝까지 아리아드네의 말을 무시할 순 없었는지 시몬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지저분하고 초췌한 몰골 가운데서도 에메랄드 같은 선명한 녹빛의 눈동자만은 변함이 없었다.

으읍, 읍읍, 그가 답답하다는 듯 끙끙대며 고개를 앞뒤로 꺼떡이며 움직였다. 아, 그제야 시몬의 입을 틀어막은 재갈을 발견했다는 듯 아리아드네가 작게 고갯짓을 했다.

“풀어 줘.”

퍽, 다가온 기사 하나가 시몬의 몸을 거세게 차 기선제압을 한 뒤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 주었다. 시몬이 한껏 겁먹은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았다. 미친놈처럼 굴던 엘바에서와는 영 딴판이었다.

“시몬 랭스턴, 지금부터 나와 대화를 할 텐데…….”

아리아드네가 부러 말끝을 늘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부디 진솔한 대화가 되었으면 해. 그럴 수 있지?”

제 목숨줄을 이쪽에서 쥐고 있으니 겉으로는 얌전한 척 굴지만 조금도 믿을 수 없는 작자였다.

“메, 메르디에스 공녀님…….”

잔뜩 움츠러든 시몬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음, 막혀 있었던 건 입이지 귀가 아닐 텐데?”

“폐, 폐하, 부디 자비를―”

아리아드네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묻자 시몬이 제 실수를 깨달은 듯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시끄럽게 굴었다.

아리아드네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눈가를 찌푸리자 곁에 있던 기사들이 다가와 시몬의 목덜미를 잡고 그를 꿇어 앉혔다.

“엘바에서는 어떻게 살아남았지?”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시몬이 가슴을 들썩이며 빠른 어조로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카이엔이 절 살려 둔 건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그네스 그 교활한 호랑이가 꾸미는 음모를 막을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

이대로 놔두면 자신을 살려야 할 이유를 백 가지는 너끈히 만들 기세였다. 그냥 죽일까, 아리아드네는 미간을 문지르며 시몬의 말을 끊어 냈다.

“아니, 방금 내가 그것을 물었던가?”

“아그네스를, 그 미친 호랑이를 막지 못하면―”

시몬이 필사적으로 자력 구명을 이어 나가려던 그때였다.

파아아앗!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 어디선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박에 빛이 나는 쪽으로 쏠렸다.

“……유진?”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마치 황금빛 실에 휘감긴 것 같은 유진을 발견했다. 그를 감싼 황금빛은 유진의 손바닥에 놓인 반지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눈에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언젠가 베아트리스가 조셉을 통해 보냈던 그 반지였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이내 그것을 손가락에 끼웠다. 반지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한층 거세지며 유진을 감쌌다. 너울대는 빛의 폭풍이 마치 해안가로 밀려드는 파도 같았다.

사람들이 홀린 듯이 그 빛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억지로 울음을 참아 가며 노래를 부르는 듯, 흐느끼는 목소리에는 낯선 음률이 섞여 있었다.

“……잠든, 히끅, 네 곁을 지키는 별이 되리라. 찬란한 금빛이 너를 비추는 동안, 널 찾아온, 악몽을 피해 꼭꼭, 흑, 흐윽, 숨어라…….”

울음소리가 커질 때마다 공기 중에 떠도는 황금빛이 그것과 공명하는 것처럼 모였다 흐트러지곤 했다.

“해가, 악몽을 살라 버릴 때까지, 꼭꼭…… 흡, 숨어…….”

이윽고 희미하게 이어지던 노랫소리가 멈추고, 흐느끼는 울음소리만이 점점 커졌다. 울음소리에 공명한 빛의 폭풍이 점점 거세지며 그 사이로 낯선 풍경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페렌트 최북단에서나 볼 수 있는 침엽수림이었다. 다음으로는 뾰족하고 가는 잎이 달린 나무들을 배경으로 오래된 기둥들이 드문드문 자리한 신전과 같은 건축물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쯤 부서진 기둥에 몸을 기댄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보였다. 이 울음소리의 주인공인 듯, 그녀는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지며 훌쩍이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을 확인한 아리아드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베아트리스?”

구불구불한 검은 실타래가 마구잡이로 늘어진 신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은 분명 베아트리스였다.

지금은 보름도, 해 질 녘도 아닌데 어떻게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이 연결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살리바에 있어야 할 베아트리스가 외딴 숲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베아트리스! 무슨 일이야? 거긴 대체 어디고?”

아리아드네가 울고 있는 베아트리스를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고 있었다.

“……베아트리스? 그게 누구야?”

“몰라, 그런데 머리카락이 되게 특이한 금빛인데. 마치 황금―”

“그거 설마…….”

“성 상티모니아 성녀, 그 베아트리스?”

느닷없이 공중에 나타난 풍경에 놀란 사람들이 웅성대다 베아트리스의 정체를 눈치채고는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웅성대는 소리에 위화감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든 베아트리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로 이곳을 바라보았다.

“……유, 진?”

이곳의 풍경 속에서 유진을 발견했는지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느리게 깜빡이던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더니 베아트리스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더듬거렸다.

“나, 나는 유진을 부르려던 게 아니고, 너무 무서워서……. 여기가 너무 무서워서…….”

아무래도 두 공간을 연결한 것이 베아트리스의 의지는 아닌 듯했다.

“나는 너무 무섭고 외로워서, 그래서, 노래를 부른 거였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베아트리스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자인 것이 무섭고 외로워서 그것을 잊으려 가장 익숙한 노래를 불렀던 것뿐인데…….

―아그네스 님께서 간절히 바라고 계세요. 그를 이곳으로 부르세요.

레지나나, 어머니의 뜻대로 유진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건 정말 아니었다. 결국, 또 미움 받을 짓을 해 버리고 말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베아트리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전부, 전부 나 때문이야.”

아리아드네가 서럽게 우는 베아트리스를 달래 보았지만, 베아트리스는 온몸을 떨며 눈물을 펑펑 쏟아 내기만 했다.

“베아―”

“아리아드네,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리아드네는 재차 베아트리스를 부르려다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베아트리스 뒤쪽으로 언뜻 보이는 무언가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전 바닥에 늘어진 저것이 검은 실타래가 아니라 사람의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머릿속이 쿵쾅쿵쾅 울렸다. 아니, 아니어야 했다. 제 짐작이 틀려야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베아트리스, 저기, 네 뒤쪽에…….”

손을 들어 그쪽을 가리키려다, 아리아드네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도로 내리고 말았다.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 정말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아니, 아니야. 전부 변명이야. 내가, 내가 그랬어. 나만 아니었어도 리스벨 영애가…….”

횡설수설하는 베아트리스의 말 가운데 이상한 것이 끼어 있었다. 리스벨 영애? 베아트리스의 입에서 왜 저 이름이 불리는 거지? 그러면, 그러면 지금 저기 있는 사람이, 정말…….

“……캐롤, 린?”

머릿속으로만 되뇌던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빛이 번진 것처럼 희미하던 귀퉁이의 물체가 확 눈에 들어왔다.

밤바다의 파도처럼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카락, 눈처럼 창백한 피부, 잠을 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까지.

“캐롤린!”

정말 캐롤린이었다.

―리아, 이제는 내가 지켜 줄게. 파시파에 님 대신 내가 지켜 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그날, 펑펑 울면서 그렇게 말하던 캐롤린이.

―리아, 난 후회 안 해. 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자신을 지키겠다며 메르디에스 성에 남았던 캐롤린이.

―안녕, 나의 왕.

끝내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캐롤린이, 지금 저곳에 있었다.

“캐롤린이 왜!”

아리아드네가 황금빛 폭풍 속으로 당장 뛰어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가 소리를 질렀다. 메르디에스 성의 지하 묘에 안장되어 있어야 할 캐롤린의 시신이, 왜 저곳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는 이제 아무도 잃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캐롤린의 시신조차 지켜 내지 못하다니, 머릿속이 끓어 넘치는 것처럼 뜨거웠다.

“전부 나 때문이야. 내가 메르디에스 성에 가는 바람에, 그래서 레지나가…….”

베아트리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아리아드네가 분노로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다. 자신이 성을 비운 사이에 레지나라는 자가 베아트리스를 앞세워 캐롤린의 시신을 빼돌렸다는 말이었다.

레지나라면 아리아드네도 살리바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베아트리스의 훈육 담당인 수석 사제라고 했던가.

“이게, 레지나라는 그 수석 사제 혼자 벌인 짓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메르디에스의 성에서 장례가 진행 중인 리스벨 후계의 시신을 탈취하다니. 수석 사제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성 상티모니아의 수석 사제를 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 성녀 베아트리스를 이용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람.

그것이 모두 가능한 사람이 있었다. 베아트리스의 생모이자,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아그네스.

―메르디에스 공녀,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손안에 움켜쥔 왕위를 지킬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외성 밖에서 만난 교황이 왜 그따위 말을 했는지, 캐롤린의 시신으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직접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그곳이 어디라고?”

아그네스의 목적이 자신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 해도 기꺼이 어울려 줄 수 있었다.

“아니, 아니야. 여긴 오면 안 돼.”

베아트리스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베아트리스, 잊지는 않았겠지? 성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모든 것이 어머니의 뜻대로 이루어질까 봐.

―신들이 떠나간 이 자리에서, 인간들은 새 시대의 위대한 별을 목격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봐.

―그를 이곳으로 부르세요.

유진을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이곳에 온다면 유진이 그녀를 혼자 보낼 리 없으니까.

“아니, 난 갈 거야. 교황이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했는지 난 알아야겠어.”

캐롤린 리스벨을 보는 아리아드네의 눈동자는 새파란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조금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끼어들 새도 없는 걸까.

키이익, 마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베아트리스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저 소리가 무섭다기보다 서러웠다.

“이곳에 와야겠다는 건 리스벨 영애가 여기 있기 때문이야?”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아리아드네의 애정이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을 원망하는 건 아니었다. 평생을 친자매처럼 자란 친구와 얼마 전 알게 된 자신이 같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왜, 왜 이런 순간에도…….

“유진은, 유진은…….”

눈물이 가득 고인 베아트리스의 눈동자가 유진을 향했다. 자신이 나타난 이후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제 반쪽을.

“유진은 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그는 자신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걸까. 어머니와 레지나가 아무리 나쁜 말을 해도 유진을 믿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자꾸만 그 믿음이 무너졌다.

“나는 있잖아. 나, 노력했어. 레지나가 유진을 불러들이라고 했을 때도, 그러지 않으려고, 진짜 노력했어.”

유진에게 자신이 첫 번째가 아닌 것도 견딜 수 있었다.

“나는 유진을 지키고 싶어서, 정말 노력했는데, 그런데, 나는 왜 아무도 지켜 주려 하지 않아?”

그런데, 주저 없이 캐롤린을 구하겠노라 나서는 아리아드네의 모습을 보니 혼자만의 애정이 서러워졌다.

“…….”

아무런 대답 없는 유진의 반응에 베아트리스가 허탈한 얼굴로 웃었다.

“알고 있었어. 기다린 것도, 가족이라 여긴 것도 나뿐이었다는 걸.”

언제나 혼자였는데,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인데, 왜 이토록 서러운지, 베아트리스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거면서 왜 기다리게 했어?”

차라리 이곳에 나타나지 말지. 기대하게 하지 말지.

“왜, 나만 혼자 둔 거야?”

오래된 서러움을 토해 내듯, 가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

그랬으면 유진이 곤란해할 일도 없었을 텐데, 베아트리스는 이런 순간에도 마음껏 상대를 원망할 수 없었다. 마치 그렇게 태어난 사람처럼.

무언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유진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홀에는 베아트리스의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성녀 베아트리스는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이며, 캐롤린 리스벨의 이야기는 무엇인지. 눈으로 보고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다들 웅성거리던 그때였다.

앞을 볼 수 없어 더 강박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달미에르의 곁을 누군가 스쳐 지나갔다.

“……르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달미에르가 다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한 달미에르는 제 예민함이 지나친 탓이려니 생각하고 넘겨 버렸다.

그렇게 간발의 차로 달미에르의 경계를 피한 사내가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쏠린 틈을 타 바닥에 널브러진 카이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검은 달의 일원인 듯 새까만 옷으로 무장한 사내였다.

“거기, 지금 대체 뭐 하는―”

사내의 행동을 가장 먼저 발견한 누군가 그렇게 외쳤으나, 그의 행동을 막진 못했다.

죽은 카이엔의 품에서 한 뼘만 한 길이의 흰 뼈를 꺼내 든 사내가 그것을 홀 중앙에 박아 넣듯 꽂았다. 그 순간, 카이엔이 흘린 피를 흠뻑 머금은 홀이 무너질 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이엔을 기둥에 매다느라 생긴 흠집 가운데, 하나로 이어진 선 하나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홀 바닥에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누군가 흠집으로 교묘히 위장해 놓은 선을 따라 케이루스 제주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페루스 마지막 사제의 피를 머금은 붉은 선이 홀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돌풍이 불었다. 거센 바람에 얼마 남지 않은 유리창들이 터져 나갔다. 쩌적, 쨍그랑! 돌풍에 깨진 유리 조각들이 섞여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망토나 옷 따위로 몸을 감쌌다.

그런데 바람은 이곳에만 부는 게 아니었다. 베아트리스가 있는 너머에도 거센 돌풍이 일어나 아름드리나무들이 뿌리가 뽑힐 듯이 흔들렸다. 바람을 버티지 못한 베아트리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베아트리스!”

유진의 부름에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나…….”

베아트리스가 괴로운 듯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바람이 공기를 모조리 앗아 가는 것처럼 숨이 가빠 왔다. 아니, 바람이 그녀 내부의 무언가를 뽑아 가는 것 같았다.

홀에서 시작된 핏빛과 베아트리스의 성력에서 비롯된 황금빛이 바람에 뒤섞이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스는 뒤섞이는 두 빛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안, 안 돼…….”

이대로면 두 공간이 온전히 이어지고 만다. 어머니의 뜻대로 유진을 이곳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유진, 여기 오면, 오면 안 돼…….”

베아트리스가 자신의 내부에서 성력을 긁어내는 듯한 돌풍에 저항하려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바람은 방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점점 거세졌다.

바람에 갇힌 베아트리스는 숨 쉴 공기조차 부족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넘어오는 듯하여 다급히 입을 막은 베아트리스가 제 손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양손을 흠뻑 적신 피를 보며 베아트리스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그 순간, 다시금 거세게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입을 거쳐 내부를 한바탕 휘젓고 지나갔다. 온몸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정신이 점점 흐려지는가 싶더니 베아트리스는 또다시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이대로 힘이 뽑히다간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낫겠다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베아트리스가 토해 내는 피의 양이 늘어날수록, 황금빛 너머의 울창한 숲이 핏빛 홀 전체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치 숲이 홀을 통째로 잡아먹는 듯한 광경이었다.

오래된 신전, 무너진 기둥들, 저 멀리 언뜻 보이는 괴이한 모습의 마물들. 숲의 풍경이 점점 선명해질수록 아리아드네는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이전에 비슷한 것을 본 것만 같은.

베아트리스 뒤쪽으로 보이는 무너진 신전의 형태가 엘바에서 본 모라의 신전과 흡사했다. 눈이 먼 것처럼 신전 주위를 어슬렁대기만 하는 마물들의 모습까지도.

“시몬! 시몬을 잡아!”

베아트리스가 있는 숲의 풍경이 엘바에서 본 모라의 신전과 유사하다는 것을 눈치챈 아리아드네가 시몬을 가리키며 다급히 소리쳤다.

서둘러 달려온 기사들이 시몬을 제압했다. 손이 뒤로 묶인 상태에서도 소매에 달린 커프스를 문지르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몬이 등이 밟힌 채 버둥거렸다.

“저, 저 검은 옷 입은 새끼! 내가 봤어! 저 새끼 짓이야!”

시몬의 외침에 아리아드네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세게 불어닥친 돌풍에 복면이 날아가며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치곤 선이 고운 얼굴, 턱 끝에서 달랑이는 옅은 금색 머리카락, 울 것처럼 잔뜩 일그러진 푸른 눈동자.

“리카르도…….”

지나치게 익숙한 얼굴에 아리아드네가 한숨처럼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다시금 불어닥친 돌풍에 사람들이 넘어지고 쓰러졌다.

“……베아트리스.”

바람 속으로 뛰어든 유진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베아트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베아트리스가 눈을 깜박이며 제게로 뻗어진 유진의 손을 응시했다.

“유진, 나 있잖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한 주제에, 마지막 순간 자신을 향해 다가온 손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나 죽기, 싫어. 나, 살고 싶어.”

베아트리스가 울 것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힘겹게 손을 뻗었다. 유진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아 가며 닿을 듯이 닿지 않는 손을 향해 다가갔다.

―레오, 내 희생으로 이곳을 지킬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

제 희생으로 모두의 풍요를 지키고 싶다던 그의 고결한 누이는.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어.

더는 생을 이어 나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네 무지 또한 네 선택의 결과. 굳이 기억을 되찾으려 할 필요가 있나?

지난 죄악이 버거웠던 그는 기억조차 버린 채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다.

유진은 피범벅이 된 베아트리스의 손을 보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안에 고인 슬픔이, 사무친 외로움이 마치 제 것처럼 생생했다.

자신의 일부조차 버리고 도망쳤던 그의 죄를 알라는 듯, 제 안에 남은 페루스의 고독과 외로움이 그를 마구 난도질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존재인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버리고 떠난 존재였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라면…….

‘그렇다면 디티, 나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유진이 뻗은 손이, 빛의 폭풍 너머 베아트리스에게 닿으려는 찰나였다.

“잘하셨습니다, 성녀님.”

무너진 신전 뒤에서 나타난 여자가 베아트리스를 확 끌어당겼다. 성 상티모니아의 수석 사제라던 레지나, 바로 그 여자였다.

“……레, 지나! 이거, 이거 놔!”

“잠시 쉬고 계세요. 다시 일어나실 때쯤에 모든 것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베아트리스를 제압한 여자가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베아트리스의 코와 입을 막았다. 그렇지 않아도 적지 않은 피를 흘렸던 베아트리스는 알싸한 냄새를 맡는 순간 빠르게 의식이 멀어졌다.

“유진, 나…….”

그 말을 끝으로 베아트리스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레지나와 함께 나타난 사람들이 기절한 베아트리스와 캐롤린의 시신을 들고 빠르게 사라졌다.

“베아트리스!”

“캐롤린!”

유진과 아리아드네가 사람들의 손에 들려 멀어지는 베아트리스와 캐롤린을 불렀다.

하지만 점점 거세지는 돌풍에 그 소리마저 바람에 먹히고 말았다. 깨지고 부서진 물건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나뭇조각을 발견하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그때였다.

쿵! 쿵! 쿠구궁! 마치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처럼 거대한 굉음이 홀 전체를 뒤덮었다. 숲 전체가 마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비 없이 페렌트 왕궁의 홀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지끈, 홀을 지지하고 있던 기둥과 철사들이 무언가에 잡아먹힌 것처럼 순식간에 우그러지며 부서지더니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족히 수백 년은 됐음 직한 나무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아니,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다는 것이 옳았다.

휘이잉, 조금 전까지 그렇게 거세게 불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하늘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깨진 유리 사이로 눈이 부시게 쏟아지던 햇빛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빽빽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숲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땅거미가 진 저녁 어스름처럼 어두컴컴했다.

조금 전 일어난 일을 모두 이해할 순 없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곳은 페렌트 왕궁이 아니었다.

돔 형의 유리 천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군데군데 천장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들은 울창한 아름드리나무가 되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누군가 그렇게 물은 순간 시몬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별이 떠나간 자리, 귀별 숲.”

오래전, 이 땅을 지배했던 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매우 강대하였으나, 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패배한 신들이 차원을 가르고 떠난 자리.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떠나간 신들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그곳을 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자리라 하여 ‘귀별 숲’이라 불렀다.

‘신실한 사제의 희생이 별이 돌아올 자리로 그들을 이끄는 길이 되리라.’

케이루스의 영지 북쪽 끝, 아르체에서 쫓겨난 그들이 재기할 수 있었던 축복의 땅.

페렌트 왕궁에 있던 이들을 귀별 숲으로 이끈 것은 홀 바닥에 새겨진 별자리와 그것을 물들인 케이루스 마지막 제주인 카이엔의 피,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 베아트리스의 힘이었다.

페렌트의 왕이 된 아리아드네의 첫 번째 적은 이 땅에 남은 신들의 망령이었다.

Ephphatha :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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