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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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이이익, 끼익― 날카로운 것으로 단단한 무언가를 긁어내는 듯한 소리가 귓속을 찌르는 듯했다.

    “으윽…….”

    카이엔은 인상을 찌푸리며 힘겹게 눈을 떴다. 어두운 공간이었다. 널따란 홀 한쪽 기둥에 사지가 묶인 그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머리 위로는 달조차 뜨지 않은 새까만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정면에는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유리관이 보였다. 보물을 전시했을 법한 유리관은 텅 빈 채였다.

    그에겐 매우 익숙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카이엔이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갈망했던 곳이기도 했다.

    별의 그릇을 보관하는 케이루스의 성소이자, 그들이 왕궁 내에 은밀히 만들어 놓은 모라의 신전.

    왕궁 내부에 케이루스의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모라의 신전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이점이었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 왕궁 내부에 있는 모라의 신전을 이용해 위기를 넘겼고, 그것은 그들의 가장 은밀한 비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케이루스가 언제나 그 통로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관으로서의 능력이 출중했던 몇몇 제주들만이 모라의 신전을 이용해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역대 제주 가운데서도 그것을 가장 자유자재로 이용한 이가 바로 카이엔이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 그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그가 품에서 별의 그릇을 꺼내기 위해 팔을 당긴 그 순간이었다. 철컹, 팔은 지나치게 무거웠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왜, 내가…….”

    그는 그제야 자신의 사지가 결박된 채 기둥에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제롬! 제롬!”

    카이엔은 절박한 목소리로 제롬을 불렀다. 하지만 제롬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고, 그가 외친 소리만이 공허하게 되돌아왔다.

    ‘이상해.’

    허억, 헉헉,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어둠 속에 누군가 있었다. 벌써 남부 연합군에게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카이엔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어두운 탓에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더욱 초조해졌다.

    “내가 누군지 알고! 너흰 누구냐? 대체 누구냔 말이다!”

    그가 아무리 소리쳐도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당장 풀어라! 풀어! 제롬, 제롬! 어디 있느냐!”

    카이엔이 기둥에 묶인 팔을 마구잡이로 흔들며 소리치느라 목이 다 쉬었을 즈음이었다. 뚜벅뚜벅,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날 죽일 자인가, 날 구할 자인가.’

    카이엔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응시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행히도 제롬이었다. 카이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매달려 있었는지 팔이 끊어질 것 같았다.

    “제롬, 어서 내 팔부터―”

    제롬을 재촉하던 카이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하를 보며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대체 뭘 보고만 있는……. 설마, 네가?”

    그리고 그 순간, 카이엔은 약에 취한 자신을 향해 제롬이 지껄이던 말을 기억해 냈다.

    ―이제껏 전하를 모신 대가는 제 손으로 받아 가겠습니다. 병든 사슴이라도 비싸게 쳐줄 사람이 있어 다행이지 뭡니까.

    믿을 수가 없었다. 왕후나 레비에 후작은 그렇다 쳐도 검은 달은 아르체에서부터 대대로 자신들을 섬겨 온 이들이었다.

    “네가 미친 게로구나. 감히 검은 달이 케이루스의 제주를 팔아넘겨?”

    격분한 카이엔이 몸을 마구 뒤흔드는 통에 그의 몸을 결박한 쇠사슬이 절그렁절그렁 시끄럽게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신의를 먼저 저버린 것은 당신이 아니십니까?”

    온몸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카이엔과는 달리 제롬은 고요하리만치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런 제롬의 태도에 카이엔은 더욱 화가 끓어올랐다.

    “개도 주인은 알아보는 법이거늘! 감히, 감히! 너 따위가!”

    검은 달은 케이루스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손이 제 머리를 자르겠다 덤비는 꼴이 아닌가.

    “개도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꼬리를 흔드는 법입니다. 하물며 자신을 잡아먹으려 호시탐탐 노리는 주인을 지키려는 개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제껏 너희가 배불리 먹고, 안락한 곳에서 몸을 누일 수 있었던 것이 다 누구 덕이었더냐!”

    제물을 바쳐 가며 아르체의 풍요를 유지했던 것도, 페렌트에서 이만큼 자리를 잡은 것도 모두 케이루스의 희생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었다.

    “페루스의 신관인 나를 버리고도 네가 낙원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느냐!”

    낙원으로의 귀환, 그것은 아르체에서 쫓겨난 이들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염원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면 말을 채 깨우치기도 전에 머릿속에 못질을 하는 것처럼 그 염원을 새겨 넣었다. 그래야 세월이 지나도 낙원을 향한 그들의 염원이 흐려지지 않을 테니까.

    “케이루스를 배반한 너는, 낙원으로의 길이 열리고 모두가 낙원으로 떠난 그때, 홀로 이 지옥에 남을 것이다. 후생(後生), 그 후생에라도 너는 낙원을 허락받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것은 케이루스가 아르체를 떠나온 이주민들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이엔의 저주 같은 선언에도 제롬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동료들의 죽음조차 애도할 수도 없는 그런 낙원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다만 그는 오래도록 별러 온 것처럼 서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뭐라?”

    카이엔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진작, 버렸어야 했다.”

    제롬은 이제 공대조차 하지 않았다.

    “제프리가, 셀레나가, 옥토와 펜타스가, 콰투르가 죽기 전에.”

    그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죽어 간 동료들을 하나하나 불렀다. 지금 가장 후회되는 것은, 좀 더 일찍 케이루스를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사라진 낙원 따위, 지나간 풍요 따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의 부모는 언제나 아르체로의 귀환을 꿈꿨다. 그것은 고단한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제롬은 형이 그렇게 죽은 뒤로 그것이 정말 희망이었나 반문하곤 했다. 아니, 그건 과거의 망령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선택했다.

    “나는 실체도 없는 낙원을 바라느니, 내 부모가, 형이, 친구가, 동료들이 살았던 이 땅에서 살아가겠다.”

    언제나 황금빛이 넘실대는 풍요로운 땅, 굶주림도 괴로움도 존재하지 않는 지상 낙원 아르체.

    하지만 그런 낙원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있지도 않은 것을 갈구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그에게 간절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배를 곯아도, 얼어 죽어도 좋으니, 제롬은 더는 어둠 속에 숨어 살고 싶지 않았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지은 이름으로 불리고, 또 그렇게 제 아이들의 이름을 짓고, 태어난 얼굴 그대로,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었다.

    남은 동료들에게 그런 삶을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에게 바칠 제물이 필요했다.

    제롬은 조금 전까지 제 주인이었던 자에게 물건을 품평하는 상인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검은 달이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기 위해 바치는 영광된 제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저주도, 협박도 아니었다. 제롬이 새로이 품은 희망이었다.

    하, 하하, 카이엔은 미친 사람처럼 웃어 대기 시작했다.

    “설마 저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 발목이 잡힐 줄이야…….”

    지금 카이엔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평생 그를 옭아맸던 별의 예언이었다.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발버둥 쳤건만, 그는 별의 그릇이 예언한 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별의 그릇이 예언한 그의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예언이 가리킨 것이 있으니만큼, 그는 자신을 죽일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어디 있지?”

    카이엔이 그렇게 물은 순간이었다. 하늘과 그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 너머로 마치 사신의 방문을 예고하듯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와장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백 년도 넘는 시간 동안 별의 그릇을 품어 온 요람이 송두리째 깨어져 나갔다. 밤하늘이 수백 개로 갈라지더니 별이 부서지는 것처럼 조각난 유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비산하는 유리 조각 사이로 밤의 장막처럼 새까만 사내가 날아들었다. 자신을 죽일 여자를 품에 안은 채.

    “드디어 왔군.”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카이엔은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이 순간을 평생 기다려 오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그대가 드디어…….”

    공포와 흥분, 절망과 증오, 거기에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죽음의 순간을 비로소 마주했다는 후련함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져 카이엔의 몸속을 마구잡이로 내달리는 것만 같았다.

    처음 살인을 했을 때처럼, 처음으로 꾸민 음모가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도 더 빠르게 피가 돌았다. 공포는 극상의 쾌락과 닿아 있다 했던가. 온갖 것들로 들끓는 마음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카이엔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제 몸을 마구 흔들어 대자 그를 얽어맨 쇠사슬이 요란스레 흔들렸다.

    “드디어 미쳤나 보군.”

    유진이 카이엔을 힐끗 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찌걱, 바닥에 착지한 유진의 발에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유리 조각이 짓이겨지며 소리를 냈다. 뒤이어 그가 바람이 지나갈 틈도 없이 온몸으로 감싸고 있던 여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반파된 유리 돔 사이로 사나운 바람이 들이쳤다. 색이 옅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카이엔.”

    여자가 그를 불렀다. 아니, 그것은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으니 불렀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아리아드네.”

    기둥에 묶여 있던 카이엔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여자와 마주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발아래 둔 것처럼 오만한, 한때는 그의 약혼자였으며, 그에게 세상을 안겨 줄 듯했던 그 여자를.

    어둠 속에서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풀어야 할 이야기들이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어둠 속을 수놓았다. 하지만 그중 무엇도 쉽사리 꺼낼 수가 없었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깨트린 것은 아리아드네도 카이엔도 아니었다.

    “아리아드네 님!”

    “그, 그렇게 가시면…….”

    부리나케 아리아드네를 쫓아온 메르디에스 측 수행원들이었다. 카이엔의 행방을 보고받자마자 하늘로 솟구쳐 사라진 아리아드네 뒤를 쫓느라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홀에 오른 시안 또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와 물었다.

    “지상 최강의 전력이 곁에 있는데 괜찮지 않을 리가.”

    아리아드네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옷에 붙은 유리 조각을 털고 있는 유진에게 닿았다. 마치 흙이나 풀 따위를 터는 것 같은 그의 태연함에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머쓱해졌다.

    “흠흠, 저희야 걱정하는 게 일이니…….”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무마해 보려던 그때였다.

    “제롬! 자네 도대체―”

    뒤늦게 도착한 레비에 후작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제롬을 향해 노성을 터트렸다. 카이엔의 최측근이었던 만큼 그에게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적이 필요했다.

    가문의 사병까지 동원하며 카이엔을 잡아 바치려 했던 시도가 제롬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자 적잖게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공은 빼앗기더라도 기세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레비에는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1왕자는 내가 잡겠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레비에 후작이 사납게 을러댔지만 상대는 케이루스의 가장 은밀한 칼로 살아온 검은 달의 수장이었다. 제롬은 레비에 후작의 겁박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더없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무언가 착각하신 듯한데 검은 달은 레비에의 사병이 아닙니다.”

    검은 달의 수장인 내가 네 명령대로 움직일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함의가 담긴 대답이었다. 제롬의 대꾸에 레비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 이름도 없는 천출 따위가 감히!”

    레비에는 기어이 상대의 신분을 물고 늘어졌다. 신분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갖지 못한 검은 달을 조롱하기 위한 말이었으나, 신분을 들먹인 시점에서 그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신분 말고는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무(全無)하다는 시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역량이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레비에 후작은 그 역량이 검은 달의 수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평한 아리아드네가 서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비에.”

    작위조차 붙이지 않은 부름은 명백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레비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논공부터 할 요량인가? 그리고, 네게 그럴 자격이 있던가?”

    지금은 공을 다툴 시기도 아닐뿐더러 남부 연합에서 네 위치를 자각하라는 지적이었다.

    “아, 아닙니다. 제롬의 불민한 판단으로 1왕자를 놓치게 될까 봐 염려가 되어 그만……. 마음이 급하여 실수를 범했습니다.”

    아리아드네의 질책에 레비에 후작은 서둘러 부인하고는 도망치듯 뒤로 물러났다.

    “네가 검은 달의 수장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공녀 저하.”

    아리아드네의 시선을 받은 제롬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조금 전 레비에 후작에게 대거리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것으로 검은 달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제롬이 말한 대로였다.

    아리아드네가 메르디에스 성을 탈환한 이후, 남부 연합에 투항한 그와 검은 달은 꽤 많은 일을 했다. 제롬이 아니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더 긴 시간을 인내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권력이나 부귀는 감히 탐하지도 않겠습니다. 이제껏 검은 달이 해 온 일을 부정하지도 않겠습니다. 누군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케이루스의 가장 깊은 어둠이었고, 그들을 완전히 지우지 않고는 새 왕조의 기틀을 단단히 하기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검은 달의 수장은 영리한 선택을 했다.

    “부디, 남은 이들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가 투항하며 내건 조건은 생존과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신분뿐이었으니.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공을 포기하는 대신 새 삶을 원했고 아리아드네는 검은 달을 정리해야 했다.

    “제롬이라고 했던가?”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제롬의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는 목숨을 담보로 도박판에 뛰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부 연합군은 이미 왕성을 완벽히 제압하였으니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신들을 모조리 죽여 없앨지도 몰랐다.

    그렇더라도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다간 케이루스와 함께 자멸할 판이었으니까.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는 카이엔을 두고 레비에와 다투는 일마저 서슴지 않았다.

    “제롬, 네 선물은 고맙게 받도록 하지.”

    아리아드네가 버둥거리는 것도 힘든 듯 축 늘어진 카이엔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포장에 공을 많이 들였군.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너와 한 약속은 지켰을 텐데.”

    기둥에 묶인 채 한 손에서는 피를 뚝뚝 흘리는 카이엔은 제단에 바쳐진 제물 같은 모습이었다. 공들여 이런 장면을 연출한 제롬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케이루스에게서 등 돌린 자신들의 모습을 아리아드네에게 확실히 보여 주고 싶었을 터.

    “……검은 달은 내리신 명을 완벽히 수행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신의 행동이 배신자의 과한 충성으로 보일 것을 염려한 탓일까. 잠시 망설이던 제롬이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짧게 고개를 끄덕인 아리아드네가 손을 옆으로 뻗자, 그녀를 수행하던 기사 중 한 명이 검을 건넸다. 검을 들고 칼날을 이리저리 비춰 보던 아리아드네가 홀 구석을 크게 둘러보았다.

    검은 옷과 복면으로 온몸을 가린 채 그림자처럼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리아드네의 처분을 기다리는 검은 달의 일원인 듯했다.

    “이젠 계산을 끝낼 때가 됐지.”

    그리고, 예리한 칼날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냈다. 서걱, 아리아드네가 가볍게 휘두른 검은 제롬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그것에 담긴 시간을 끊어 낸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연인이나 가족 간에 잘린 머리카락을 건네는 것은 서로 간의 인연을 끊고 남이 되자는 의미였으며.

    “이 자리에서 검은 달 전원은 죽었다.”

    신분을 박탈하는 처벌에 앞서 사회적 죽음을 상징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아리아드네는 지금 이 자리에서 검은 달로 살아온 그들의 모든 것을 박탈한 것이었다.

    “모조리 죽었으니 그들의 공도 과도 더는 논할 필요가 없을 터.”

    그것은 동시에 그들이 앞으로 무엇으로든 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검은 달이 원하는 것이 새로운 왕조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면, 아리아드네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검은 달은 그저 생존만을 바랐기에 아리아드네는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았다.

    생존을 약속하고 그들을 이용했으니 마땅히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상황이 바뀌었으니 버리는 것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너와 네 동료들은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얻게 될 거다. 당분간은 너희를 지켜보는 눈이 따라붙겠지만.”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제롬이 바닥에 이마를 댄 채 극상의 예를 올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키득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넌 그 말을 믿느냐? 메르디에스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검은 달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흐느적대던 카이엔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뱉는 헛소리에 여기저기서 검을 뽑아 들었다.

    “되었다. 이만 물러나라.”

    한쪽 손을 들어 사람들을 물린 아리아드네가 카이엔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유리가 발밑에서 바스러졌다.

    아리아드네는 카이엔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이동한 거리는 불과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았다.

    “너무 길었어.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길은 왜 그렇게 멀었던 걸까. 아리아드네는 크게 숨을 삼켰다.

    이제껏 헤쳐 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캐롤린이 흘린 피로 흰 눈이 흠뻑 젖었던 부분에서는 다시금 숨을 멈추고 말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난다 해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고통을 읽었는지, 카이엔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있는 자리까지 올라오는 것이 너무 고되었나 보군.”

    그는 마치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던 그때처럼 다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할 것 없이 내 옆자리는 언제든 그대 것이었는데…….”

    카이엔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혹시 말이야. 아직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믿는 건 아니지?”

    “글쎄……. 그대 생각은 어떻지?”

    무언가를 살피려는 듯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카이엔이 느릿하게 말끝을 늘였다.

    “아니면, 내가 살아남을까 두렵나?”

    입만 열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아직도 헛소리할 기운이 남았나 보네.”

    정말 미친 건지, 아니면 약을 오래 해서 그런 건지. 아리아드네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작게 손짓을 했다.

    “오다 뭘 좀 주웠는데…….”

    그녀의 손짓에 기사가 둘러메고 있던 무언가를 내던졌다. 쿠웅, 둔중한 소리가 나며 포박된 남자가 바닥을 굴렀다.

    빛나던 금빛 고수머리는 거칠고 탁해졌고, 귀공자 같던 외양도 몰라보게 추레해졌지만, 그는 분명 시몬이었다. 엘바의 절벽에서 해안 폭포로 떨어졌던, 교황 아그네스의 이복동생 시몬 랭스턴.

    “네 궁에 이런 게 있더라고.”

    “어떻게…….”

    카이엔이 별안간 나타난 시몬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야?

    주각궁 서쪽 계단 아래 숨겨진 비밀 공간에서 아리아드네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메르, 디에스 공녀?

    그곳에 숨어 있던 시몬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질겁하여 비명을 질러 댔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나타났으니 놀라야 하는 건 이쪽인데 왜 자기가 더 난리인지.

    ―귀 떨어지겠네. 누가 쟤 입 좀 막아.

    입에 재갈을 문 시몬이 괴롭다는 듯 끙끙대며 바닥을 기었다.

    “……어떻게 시몬을 찾았지?”

    카이엔은 섬뜩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와 시몬을 빼앗긴 것이 억울해서는 아니었다.

    시몬이 있던 서쪽 계단 아래는 자신과 죽은 제프리밖에 모르는 비밀 공간이었다. 제프리가 카이엔의 칼에 맞아 죽으며 제대로 된 인수인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새로이 검은 달의 수장이 된 제롬조차 정확히 모르던 정보였다.

    주각궁을 통째로 부수었다면 몰라도 이렇게 빨리 시몬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난데없는 시몬의 등장에 제롬조차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넘겨 버렸다.

    “이걸로 교황이라도 설득해 보지 그랬어.”

    그녀의 첨언에 카이엔이 분하다는 듯 빠드득 이를 갈았다. 엘바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시몬이야 우군인 카이엔밖에 기댈 데가 없으니 이곳에 있었겠지만, 카이엔이 시몬을 데리고 있었던 이유야 뻔했다.

    교황 아그네스와 거래하기 위한 수단. 살아남은 시몬이 반(反) 교황 세력의 구심점에 서기라도 하면 아그네스로서는 여러모로 귀찮을 게 자명했다. 그런데 시몬이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니 거래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왜 교황이 마음에 드는 가격을 부르지 않았나 보지?”

    교황이 페렌트에 나타났던 것도 시몬 때문일까. 아리아드네는 바닥에서 꿈틀대는 시몬을 보며 얼핏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나한테 파는 건 어때? 아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여기에 돈을 좀 걸었거든.”

    그녀가 시몬의 목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백만 골드.”

    백만 골드는 아리아드네가 엘바에서 시몬의 목에 걸었던 바로 그 액수였다.

    “시몬의 목만 찌르면 백만 골드가 네 몫이야.”

    카이엔이 이런 처지로 전락했다고 하나 그는 케이루스의 1왕자였다.

    패배한 장수의 목을 칠지언정 옷을 벗기지는 않는 법이었다. 하물며 아무리 몰락한 왕조라 해도 그는 케이루스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그런데 아리아드네는 지금 그에게 검투사에게나 할 법한 제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분노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내 눈요기가 되어 줄 마음이 있어?”

    찰박, 아리아드네는 카이엔의 손에서 흐른 피가 고인 자리에 섰다. 이제 그들 사이의 거리는 채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전부! 전부 내 것이었어!”

    카이엔이 몸부림치자 그를 구속한 쇠사슬도 거칠게 흔들렸다.

    “케이루스도, 왕좌도, 페렌트도, 그대도, 메르디에스가 가진 것들까지 전부! 전부 내 것이어야 했어!”

    그는 제가 끝내 갖지 못한 것들을 나열하며 울분을 토해 냈다.

    “나는 페렌트의 가장 적법한 왕위 계승자였고, 마땅히 내 것이어야 했던 것들을 되찾으려 했을 뿐인데!”

    분명 눈앞에 있었는데, 한 발짝만 더 가면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손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카이엔은 아직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풀어 줘.”

    자신을 꼼짝도 못 하게 얽어매고 있던 쇠사슬이 아리아드네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순간, 그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고, 자신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는 걸.

    바닥에 내팽개쳐진 카이엔이 숨을 몰아쉬며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아리아드네가 바닥을 기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아직도 뭐가 잘못됐는지 몰라.”

    카이엔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사랑했지만,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저 눈빛만은 끔찍하게 싫었다.

    굴종 따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을 저 오만한 눈빛은 왕후의 압도적인 위력과는 또 달랐다. 카이엔에게 왕후의 위력이 닮고 싶은 이상이었다면, 그녀의 당당함은 짓밟고 싶은 무엇이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어.”

    카이엔의 멱살을 거머쥔 아리아드네가 울분을 쏟아 내듯 말했다.

    “케이루스가 네 것이었으면 지켰어야지.”

    지키는 것은 가지고 휘두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왕좌가 네 것이었으면 우리를 품었어야지.”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싶었다면 가장 많은 것을 품었어야 했다.

    “내가 네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날 배신하지 말았어야 했어!”

    사람을 가지고 싶었다면 신의를 지켰어야 했다.

    “너는 네게 충성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고, 왕좌를 지탱하는 네 공가를 품지 않았고, 날 배신했어.”

    카이엔은 그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거야. 그게 왕후가, 레비에가, 검은 달이, 그리고 내가 널 떠난 이유야.”

    그것이 지금 그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유였다.

    카이엔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아리아드네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녀를 짓밟고 싶어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고.

    그녀를 살려 두고 제 발치에 엎드려 무너진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것이 제 실패의 시작이었다. 애초에 살려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리고 동시에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져, 아리아드네와 자신의 처지가 뒤바뀌었더라도 그녀는 제 긍지를 꺾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리아드네.”

    자신은 내내 그런 그녀를 질투했노라고.

    “사랑스러운―”

    그래서 그녀가 그토록 사랑스럽고, 증오스러웠음을.

    “나의 연인.”

    카이엔이 아리아드네를 만지려는 듯 손을 든 순간이었다.

    “치워.”

    순식간에 다가온 유진이 그의 몸을 들어 내던졌다. 커헉, 카이엔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피를 한 움큼 쏟아 냈다.

    아리아드네가 괜찮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진이 뒤로 물러났다. 저만한 힘을 가지고도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다니, 카이엔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에게 해 줄 말이 있어. 이 말을 하지 못하고 죽을까 봐 얼마나 두려웠던지.”

    하지만 그 덕에 그는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를 뒤흔들고, 그녀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낼 기회를.

    “사랑이었다 했지. 나도 그대를 사랑했어. 사랑이었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 버림받은 왕자를 도와준 유일한 사람이 그대였는데…….”

    버림받은 왕자에게 미궁의 비밀을 알려 주었다는 신화 속의 공주처럼, 아리아드네는 헝클어진 그의 인생을 헤쳐 나갈 실마리를 쥐여 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가 건넨 실타래로 어둠 같은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고, 왕좌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어둠 속을 헤매다 빛을 만나면 처음에는 그 빛에 눈이 멀지만 결국엔 적응하기 마련이지. 밝은 곳으로 나오면 그 빛은 예전 같은 광휘를 내뿜지도, 어둠 속을 헤맬 때처럼 절실하지도 않아.”

    미로 속에 있을 때야 그 실타래가 간절했지만, 미로를 탈출한 왕자에게 실타래는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했다.

    “다 그런 거야. 아무리 빛나는 사랑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바래기 마련이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신화 속의 버림받은 왕자가 그러했고, 아리아드네와 자신의 사랑이 그러했듯.

    “아리아드네, 지금 네 옆에 있는 그 남자도 마찬가지야.”

    지금은 영원할 것만 같은 그들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 뻔했다.

    “지금이야 그대를 사랑하는 것 같겠지. 언젠가의 나도 그렇게 보였던 것처럼.”

    자신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는 그녀를 알았다. 그녀는 결코 자신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이름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좋았다. 증오나 경멸이면 어떤가. 그녀에게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하지만 일 년 뒤에도 그럴까? 그대가 지금처럼 아름답지 않아도,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저 남자가 그대를 사랑할까? 아니, 저토록 강한 힘을 가진 이가 당신의 왕좌를 탐내지는 않을까? 그가 당신의 왕위를 빼앗으려 들면 당신이 막아 낼 수 있을까?”

    카이엔은 저주를 거는 마법사처럼, 혹은 미래를 예언하는 점술사처럼.

    “아리아드네, 저 남자는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당신이 가진 것들을 사랑하는 거지.”

    아리아드네에게 고요히 속삭이며 불안을 심었다. 그것들은 모두 아리아드네가 겪은 과거였기에, 그녀는 그것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나처럼.”

    자신이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녀의 과거에 존재했던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카이엔은 자신이 건 저주를 확인하려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표정이 없던 얼굴에 균열이 가는가 싶더니, 양 입술이 휘어지며 오만한 웃음이 떠올랐다. 호선을 그린 입술이 벌어지며 속삭이듯 말했다.

    “다 짖었어?”

    조금도 흔들림 없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카이엔은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음을 알았다.

    “겨우 그딴 개소리나 하자고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거야?”

    아리아드네가 쓰러진 카이엔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왔다.

    “내 무엇을 사랑하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가진 권력도, 돈도, 얼굴도 전부 난데.”

    수만 번 담금질을 한 쇠처럼, 그녀는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요새 같았다.

    “걱정해 준 것은 고맙지만, 난 내 것을 탐하는 이들에게 그리 자비롭지 않아서.”

    다가온 그녀가 카이엔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었다.

    “그것이 왕좌든, 사람이든, 사랑이든 난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을 거야.”

    아리아드네의 한 손에는 제롬의 머리카락을 잘랐던 칼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 칼을 휘둘러 자신이 잡고 있던 카이엔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베었다. 잘려 나간 것은 그의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와 했던 시간들을 지우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정말 그녀의 인생에서 그를 완전히 지울 작정인 듯했다. 쿵, 그녀의 손에 잡힌 머리카락이 다 잘려 나가자 카이엔은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니까 이만 죽어. 당신은 여기까지야.”

    피범벅이 된 채로 바닥을 기는 카이엔을 내려다본 아리아드네가 그에게 끝을 선고했다.

    “결국―”

    카이엔은 울컥 피를 토하며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힘없이 눈을 감았다.

    “별의 예언대로 끝이 나는가.”

    평생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으나, 그의 인생은 별의 그릇이 예언한 끝을 향해 달리는 여정에 지나지 않았다.

    “한 여자가 죽을 너를 살릴 것이며―”

    어둠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낮은 목소리가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한 여자가 너로 인해 죽을 것이며―”

    카이엔은 눈을 떠 그 말을 하는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았다.

    “한 여자가 너를 죽일 것이다.”

    그를 죽일 여자가, 그의 죽음을 말한 예언을 읊고 있었다. 카이엔은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내가 들은 예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군.”

    리뮈르의 여자가 자신의 기억을 읽었다면, 아리아드네가 그 예언을 모를 리 없으니까.

    ‘한 여자가 죽을 너를 살릴 것이며, 한 여자가 너로 인해 죽을 것이며, 한 여자가 너를 죽일 것이다.’

    별의 그릇이 그에게 내린 예언은 평생 그를 속박했다. 그는 실체 없는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때때로 자신을 살리고, 자신에 의해 죽고, 자신을 죽일 여자들이 누구일지 궁금했다.

    죽을 자신을 살린 것은 누구일까. 죽음으로 어머니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의무를 행한 다그마르일까.

    그렇다면 자신으로 인해 죽은 여자는 누구인가. 카이엔은 자신 때문에 죽은 여자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내 계약자를 해하려 한 것이 너냐?

    사람은 아니었지만, 2왕자 루안을 지키려다 소멸한 리카서스의 성물 무렉스는 여성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는 약혼자가 아니게 된다 해도 전하께서 리아를 아끼시는 마음이야 변함이 있겠습니까. 제가 리아 곁에 있으니 전하께서는 안심하셔도 될 듯합니다.

    캐롤린 리스벨,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건방진 소리를 내뱉다 죽은 그 여자도 있었다.

    ―정말 저희를 버리신 겁니까? 제발, 저희에게 길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메르디에스 성에서 죽은 검의 달의 일원이었던 셀레나란 여자도 있었지.

    카이엔은 그들 중 누가 예언에서 말한 ‘자신으로 인해 죽는 한 여자’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모두일지도 몰랐다. 그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구절은 따로 있었으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날 죽일 여자가 그대인 것은 알겠어.”

    자신을 죽일 한 여자. 그것은 아리아드네였고 아리아드네여야 했다.

    “아니.”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확신에 찬 그의 말을 단박에 부정했다.

    “죽을 널 살린 것도―”

    푹, 그녀의 눈동자처럼 새파란 칼날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네가 죽인 것도―”

    이번에는 목이었다. 파앗, 목을 지나는 혈관에서 솟구친 피가 그녀의 뺨에 튀었다.

    “널 죽이는 것도 전부 나야.”

    그녀는 양손으로 칼자루를 쥔 채 체중을 실어 그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다. 끼기기긱, 가슴뼈에 걸린 칼날이 기이한 소리를 냈다.

    힘에 부친 듯 그녀의 팔이 떨렸으나 아리아드네는 기어이 그의 가슴팍에 칼을 꽂았다. 수직으로 꽂힌 칼에 몸을 지탱한 채 그녀가 카이엔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카이엔, 넌 나를 죽였어. 나는 널 죽이기 위해 돌아온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카이엔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내내 마음에 걸렸던 무언가의 단서를 찾은 기분이었다.

    ―일레체에서 실패한 것도 모자라 아리아드네에게 모조리 들켜 버렸다, 지금 그 말인가?

    ―분명 계획에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는데, 메르디에스 공녀가 마치 우리의 의도를 죄다 꿰뚫어 본 것처럼 움직…….

    그녀의 운이 좋았다고 치부하기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

    ―세 번, 아니, 아리아드네의 시녀까지 치면 이것으로 네 번이군.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아리아드네가 혹 앞날을 꿈에서 보았을까? 그래서 내가 어찌 나올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막아서는 걸까?

    반복되는 실패에 그는 정보의 누설을 의심했고, 검은 달의 수장인 제프리를 죽였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어떻게 그 모든 일을 알았을까.

    “시몬을 어떻게 찾았냐고 물었지?”

    그리고 그 대답은 그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당사자에게서 나왔다.

    “나도 그곳에 갇힌 적이 있었으니까.”

    그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을, 그녀는 마치 존재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았어? 마치 미래를 본 것 같은 내 행동들이.”

    마치 미래를 경험한 사람처럼.

    “설, 마…….”

    카이엔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죽음 앞에서 겨우 진정했던 마음이 다시금 들끓었다. 절망과 분노가 온몸에서 쏟아지는 피처럼 부글부글 넘쳐흘렀다.

    “맞아. 난 시간을 거슬러 왔어. 나에게 네 배신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였어.”

    그녀가 그의 가슴에 박힌 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왜, 내가 아니라…….”

    시간을 다스리는 모라의 권속 페루스를 모셔 온 것은 케이루스였다. 그런 기회가 존재한다면 그녀가 아니라 응당 그에게 주어졌어야 했다.

    “어째서, 케, 이루스를 버렸…….”

    카이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눈에 그림자 같은 사내가 담겼다.

    카이엔은 이제야 남자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저자는 아르체에 종말을 불러온 더러운 씨앗이 남긴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들의 낙원을 무너트린 더러운 씨앗, 그 자체가 분명했다. 신을 잡아먹고 신이 되어 버린 괴물.

    “너, 만, 너만 아니었어도…….”

    그것은 그의 낙원을 무너트리고, 그의 연인을 빼앗아 갔으며, 새로이 이룩한 왕국마저 부수었다. 그가 이룩한 모든 것들은 그것이 되돌린 시간 앞에서 무(無)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지지, 않, 았어……. 성공, 성공, 했단 말이야…….”

    그녀가 카이엔의 배신을 경험했다는 미래에서는 자신이 바라던 모든 것이 이뤄졌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카이엔은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승리한 미래를 그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리고 한 번 승리한 싸움이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도.

    “이, 이대로는, 죽을, 수, 없…….”

    카이엔은 눈을 부릅뜬 채 허공을 노려보던 그대로 숨이 멎었다. 신에게 버림받은 신관은 헤아릴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리아드네…….”

    유진이었다.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를 지켜보고 있던 그가 다가와 그녀를 감싸 안았다.

    “다 끝났어.”

    아리아드네는 제 손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며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기나긴 복수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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