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148)

* * *

“1왕자 카이엔을 찾아라!”

몰이를 하는 사냥꾼처럼, 적들이 카이엔을 찾고 있었다. 남부 연합군의 병사들이 어느새 카이엔이 있는 주각궁 코앞까지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그를 찾느라 혈안이 된 병사 중에는 레비에의 사병으로 보이는 자들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틈에 제 사병들마저 궁에 들였단 말인가.’

레비에 같은 배신자를 끼고돌았다니, 눈먼 장님이 따로 없었다. 카이엔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아직은, 아직은 안 돼…….’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카이엔은 피가 흐르는 왼손을 움켜쥔 채로 죽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주각궁만은 사수해라!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바랄이 남겨 둔 친위대원을 중심으로 한 몇몇이 그나마 버티고 있었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주각궁이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제, 제롬! 무얼 하느냐! 어서 진통제를!”

카이엔이 고통스러운 듯 온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내장은 조각조각 끊어지는 것만 같았고 손이 잘린 자리는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남은 손마저 검에 꿰뚫렸다. 무렉스가, 소르체의 여자가, 왕후가 차례로 그를 짓밟고 지나갔다.

그는 두 발로 서는 것조차 제 뜻대로 할 수 없었다. 허우적거리며 비틀대는 카이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롬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전하, 여기 있습니다.”

카이엔은 제롬이 가져온 진통제를 허겁지겁 들이켰다. 큰 잔에 가득한 약을 순식간에 비우자 고통이 겨우 사그라들었다. 약에 취한 카이엔의 눈동자가 혼몽하게 풀렸다. 우레 같던 함성도,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도, 꿈결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별의 그릇을 놓아두었던 그 자리까지만 가면…….”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엔이 한쪽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린 채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어.”

별의 그릇을 보관해 온 별의 홀은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케이루스의 혈통들이 제 피를 먹여 가며 유지해 온 왕궁 내 신전이었다. 그곳까지만 가면 저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그 자리에서, 우리의 영광을 재현할 그날을 기다려야지.”

지상 낙원 아르체를 빼앗기고도 페렌트의 주인이 되었던 케이루스였다.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쫓겨 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그들이었다. 그에게는 아직 질긴 생명력과 권력에 대한 집념, 오랜 인내가 남아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가야 해.”

그것들이 있는 한, 그는 어디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가서…….”

카이엔은 꿈을 꾸는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비틀비틀 걸었다. 제롬이 말없이 그를 부축했다. 카이엔은 제롬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로 반쯤 끌려가다시피 했다. 그는 약에 취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날이 되면 제롬 너도, 끝까지 나를 모신 충심을 보상받을 것이다.”

카이엔이 제게 남은 마지막 신도일지도 모를 수하에게 퍽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영광입니다.”

제롬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대꾸했다.

그들이 주각궁 동쪽 끝에 다다랐을 때였다. 새까만 옷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그들이었다. 성 상티모니아에 청한 원군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온 교황의 전령.

그들은 원군을 보내겠다면서도 투입 시기에 대해서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것을 보니 드디어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일 모양이었다.

교황이 그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지. 카이엔은 반갑게 두 팔을 벌리며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오, 그 교활한 호랑이가 나를 구하러 왔구나! 어서 나를 이곳에서 데려가 다오.”

약에 취한 그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휘청거렸다. 무리 중 한 명이 나서 검집째로 카이엔 어깨를 밀어 흔들리는 몸을 고정했다.

“물에 빠진 생쥐를 데리고 있다 하셨습니까? 그것부터 돌려주십시오.”

카이엔은 제 몸을 밀어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히죽대며 웃었다.

“아, 그래, 그랬지. 그 생쥐가…….”

그는 당장이라도 무엇인가 말할 것처럼 손가락을 치켜들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날 먼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면…….”

거래는 언제나 원하는 것을 먼저 얻어 내야 했다. 그는 이런 순간에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상대에게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검에 꿰뚫린 손에서 적지 않은 피를 쏟은 데다가, 약에 취한 탓에 자꾸만 혀가 씹혔다. 카이엔은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으나 의식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그때, 그때 쥐새끼가, 있는 곳을…….”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 카이엔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흘린 핏자국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롬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껏 전하를 모신 대가는 제 손으로 받아 가겠습니다. 병든 사슴이라도 비싸게 쳐줄 사람이 있어 다행이지 뭡니까.”

카이엔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치고도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형처럼 되고 싶진 않았다.

“레비에의 사병은 검은 달이 막고 있으니 경께서는 저를 엄호해 주시면 됩니다.”

제롬이 쓰러진 카이엔을 둘러업으며 말했다. 지금도 레비에의 사병들이 시시각각 포위망을 조여 오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카이엔을 빼앗길 순 없었다. 카이엔을 메르디에스에게 바치는 것은 자신이 이끄는 검은 달이어야 했다.

하지만 소르체의 침입과 메르디에스의 점령이 실패로 끝나며 주요 전력을 잃은 검은 달만으로는 카이엔을 확보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이곳만 빠져나가면 ‘생쥐’에 대해 제가 아는 정보를 모두 드리겠습니다. 그가 숨어 있는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의심 가는 곳들이 몇 있으니 그곳을 위주로 수색하면 원하는 것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다행히도 그에겐 제법 비싼 정보들이 남아 있었다. 제롬은 그것을 이용해 교황의 전령을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십시오.”

제롬이 카이엔을 업은 채로 미로 같은 탈출로에 들어섰다. 검은 달의 마지막 수장이기를 선택한 남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베아트리스는 유독 어두운 것이 싫었다.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그랬다.

‘나, 무서워…….’

잎이 뾰족한 나무들로 빽빽하게 우거진 숲은 하늘조차 보이지 않아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반쯤 무너진 신전의 기둥들 사이로 눈이 먼 것 같은 마물들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한 뱀이며, 앞발이 꼭 사람의 손처럼 생긴 집채만 한 토끼, 희번덕이는 거대 잠자리의 눈은 마치 사람의 눈동자 같아 소름이 돋았다.

살리바 대신전에서 세상과 유리(遊離)된 채 자란 베아트리스로서는 차마 감당하기 힘든 기괴한 광경이었다. 차라리 기절하여 정신을 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제가 지키듯 가린 시신을 힐끗 돌아보았다가 괴로운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안해요, 나는…….’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끼에에에엑, 구에에엑, 키키키키키킥, 스르르르르, 온갖 마물들이 내는 기괴한 소리가 끊이질 않고 숲속에 울려 퍼졌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마물들이 내는 소리는 바로 옆에서 우는 것처럼 선명하기만 했다.

“성녀님.”

그때, 다가온 누군가가 베아트리스를 불렀다. 베아트리스는 자신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경련을 일으키듯 움찔했다가 더욱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또 식사를 거르셨습니까?”

소리도 없이 다가온 여자가 식은 음식을 따뜻한 것으로 교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베아트리스는 얼굴을 파묻은 채 제법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안 먹어. 안 먹을 거야. 절대 안 먹을 거야.”

“그러면 몸이 상하십니다.”

여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베아트리스를 달래며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고개를 든 베아트리스가 여자에게 매달리며 애원했다.

“레지나, 날 여기서 보내 줘.”

베아트리스와 마주한 사람은 평생 그녀를 키우고 돌봐 준, 성 상티모니아의 수석 사제 레지나였다.

“그게 어려우면 리스벨 영애라도 있어야 할 곳에 돌려보내 줘.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베아트리스의 애원에 레지나가 곤란하다는 듯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레지나의 시선이 베아트리스가 지키듯 가린 캐롤린의 시신에 닿았다. 베아트리스는 며칠째 먹는 것도, 잠조차 마다하며 캐롤린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이건 정말 아니잖아.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두 팔을 잡고 매달리는 베아트리스를 내려다본 레지나가 더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성녀님께서도 리스벨 영애를 이용하려 하셨잖습니까?”

책망하듯 되묻는 말에 베아트리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난, 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나는 유진이 있는 곳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정말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정말,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살리바를 탈출해 메르디에스 성에 가신 것도, 리스벨 영애를 도구로 삼은 것도 모두 성녀님께서 시작하신 일입니다.”

레지나를 붙잡고 있던 베아트리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레지나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나 때문에, 전부 나 때문이야…….”

베아트리스는 텅 빈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캐롤린을 위한 기도를 했던 첫날은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지나갔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 건 메르디에스 성에 도착한 지 엿새째 되던 날이었다.

―오늘도 리스벨 영애를 위한 기도를 진행하실 겁니까?

―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해 주고 싶어. 미안하기도 하고…….

한 번으로 끝내도 될 기도를 몇 번이나 반복한 것은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였다.

―이쪽에서 베푼 것이 많을수록, 저쪽에서는 거절하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

레지나는 그것을 보다 확실히 성채를 받아 내려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도 은연중에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럼 가시죠.

―레지나는 쉬어도 되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성녀님의 수행원이라고는 저 하나인데.

레지나는 그렇게 말하며 평소처럼 베아트리스 곁을 지켰다.

―삶도 죽음도 더는 속박하지 않는 땅에서.

리스벨 영애의 영혼이 새로운 육체를 얻어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오기를, 평소처럼 기도에 열중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손목을 강하게 틀어쥐는 감촉에 놀라 눈을 떴다.

―이게, 레지나?

눈을 뜬 베아트리스가 목격한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제 손목을 틀어쥔 레지나가 캐롤린의 시신 위로 몸을 날렸다.

―레지나,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놀란 베아트리스가 고함을 질렀지만 그 소리는 다음 순간 주위를 감싼 아찔한 금빛에 묻히고 말았다. 눈이 멀 정도로 짙은 황금빛 사이로 검은 실로 만든 술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광경을 본 것도 같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빛이 잦아들고 겨우 눈을 뜬 베아트리스는 자신이 생전 처음 보는 숲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반쯤 부서진 신전의 기둥, 마물로 가득한 숲, 아찔할 정도로 짙은 성력의 농도, 모든 것이 낯선 공간이었다.

오래되거나 버려진 신전 주위에서 마물이 생겨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이 정도로 많은 마물이 모여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숲 곳곳에서 나타난 성 상티모니아의 세력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방금 그건 뭐였고. 레지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수석 사제에 불과한 레지나가 어떻게 공간을 넘을 수 있었는지, 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베아트리스가 아무리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린 베아트리스가 비틀대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리스벨 영애는, 영애는…….

베아트리스의 발에 걸린 것은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캐롤린 리스벨의 시신이었다.

―성녀님, 좀 더 편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싫어. 난 아무 데도 안 가.

베아트리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캐롤린의 시신을 꽉 붙들었다. 그녀의 시신마저 지켜 내지 못하면 평생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았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필사적이었던 이유를.

모든 게 다 제 이기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다음 식사는 좀 더 좋아하실 만한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벌벌 떨며 다시금 몸을 웅크린 베아트리스를 보니 오늘도 먹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레지나가 능숙한 손길로 식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베아트리스의 가냘픈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레지나.”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떨리는 베아트리스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살리바를 떠나는 나를 도운 것도 그래서였어? 날 이용하려고?”

고개를 든 베아트리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살리바에서 떠나던 날, 마차 짐칸에 숨은 자신을 쓸어내리던 레지나의 손길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아니, 나와 함께한 그 시간들이 전부, 전부 다 거짓이었던 거야?”

평생을 함께한 사람이었는데.

“레지나에게 나는 아무 의미가 없었어?”

나름 소중하다고 여겼던 시간들이 모두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작은 희망에도 다시 기대를 걸었다가.

“성녀님께서는 성국의 가장 귀한 보물이십니다. 비천한 종에게는 더없이 귀한 존재이시고요.”

이어지는 대답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소리 더는 듣기 싫어!”

성녀, 성녀, 성녀.

성녀가 아닌 자신에겐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나는 성물도, 보물도 아니야. 나도 사람이야! 사람이라고!”

베아트리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새된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성녀님께서 널리고 널린 그런 인간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보통 사람이라고.”

레지나가 절규하듯 외치는 베아트리스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인간이라는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듯한 레지나의 말에 베아트리스는 다시금 절망했다.

경외하는 존재 앞에서는 응당 그러해야 한다는 듯, 베아트리스 앞에 무릎을 꿇은 사제가 잔뜩 고무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 어떤 위대한 존재인지 아직도 떠올리지 못하셨습니까?”

또 저 소리였다. 이곳에 온 후로 레지나는 자꾸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것처럼.

“성녀님께선 시간을 다스리는 신 모라의 첫 번째 권속과 하나의 영혼을 나누어 가진 존재.”

레지나는 어떤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신의 권속과 하나의 영혼을 나누어 가진 존재라니. 정말 살아 있는 성물이 될 것만 같아서, 더는 사람이 아니게 될 것 같아서, 그런 건 싫었다.

“나는, 그런 거 몰라. 나는―”

주춤거리며 물러난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멀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가까이 다가온 레지나가 베아트리스의 양팔을 꽉 쥐었다. 광기에 젖은 얼굴을 한 레지나가 베아트리스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성녀님의 카푸트에 대한 열망도, 가공할 성력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도―”

레지나의 말이 이어질수록 베아트리스는 숨이 가빠졌다. 그녀의 말은 언제나처럼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카푸트를 볼 때마다 느꼈던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 공허함이 생생하게 떠올라 마치 해일처럼 베아트리스를 뒤덮었다.

―어머니, 카푸트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막 뛰어요.

―저건 네 반쪽이니까.

―제 반쪽이요? 아, 그래서 이렇게 가슴이 뛰었던 거구나.

그래, 그때도 그랬다. 반쪽이라는 아그네스의 말을 듣는 순간, 베아트리스는 ‘아, 그래서였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납득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제 반쪽을 잃어서, 그래서 이렇게 외롭고 공허했던 거였다.

그리고 기뻤다. 마침내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것 같아서. 카푸트가 돌아오면, 그러면 이 외로움도 끝이 날 것 같았다.

“모두가 다 성녀님의 반쪽인 페루스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괴로운 것도, 외로운 것도, 전부 온전한 영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숨이 가빠서인지, 아니면 심장이 아파서인지, 베아트리스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을 감싼 뼈가 우그러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온몸의 혈관이 찢어지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런데, 그런데 왜…….

“하지만 그는―”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눈동자를 직시한 레지나가 인을 찍듯 단호하게 말했다.

“또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해? 문득 든 생각에 베아트리스는 세차게 고개를 털었다. 아니, 아니, 이건 아니었다. 유진도 아프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아니야. 유진은, 나를 버린 게, 버린 게 아니야! 그저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야…….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그래서, 그래서…….”

기다리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을 해야 하는데, 어쩐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을 겁니다. 그는 한 번도 당신을 선택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왜냐면 유진은 오지 않을 테니까. 베아트리스가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 몇 번이나 지나갔지만, 유진을 부르는 목소리는 번번이 닿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앞으로도 그럴 거란 걸. 그런데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가여운 우리 성녀님.”

베아트리스의 머리를 감싸 안은 레지나가 깃털처럼 포근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곁에 있을 테니까.”

레지나의 다정함은 베아트리스를 향한 것이 아니라, 성 상티모니아의 성녀를 향한 것이었다.

“성녀님, 성녀님께선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과업을 완수할 존재이십니다. 성녀님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성물의 진정한 주인이 되실 분이니까요.”

―베아트리스, 잊지는 않았겠지? 성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지겹게 들어온 말이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무엇인지도 모를 그따위 것에 한 번도 욕심낸 적 없었다.

“그런 거 나는 몰라. 나는, 내가, 내가 바란 건, 그냥 행복해지는 거였는데…….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고 싶었을 뿐인데…….”

사랑하는 사람도, 행복도, 베아트리스에겐 허락되지 않는 과분한 것들이었다.

“신들이 떠난 이 자리에서, 인간들은 새 시대의 위대한 별을 목격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일까.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 그것만이 자신의 가치일까.

“그것만이 성녀님의 유일한 가족인 교황 성하의 뜻이고, 성 상티모니아가 기다려 온 미래입니다. 성하를 지키고 싶다고 하셨지요?”

―베아트리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누구인지 이젠 알겠니?

주문처럼 이어지는 레지나의 말과 저주 같았던 아그네스의 말이 교차되어 귓가에서 울렸다.

―딸아, 그러니까 아무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거란다.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으니까.

끝나지 않는 절망이 베아트리스를 점점 수렁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번 일만 잘 해내면 아그네스 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어머니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

“아그네스 님께서 간절히 바라고 계세요. 그를 이곳으로 부르세요.”

유진이 이곳에 오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이젠 더는 기다리지 마세요.”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건 정말 지긋지긋했지만.

“보고 싶으시지요? 그러면 부르세요.”

그렇다고 자신의 이기심으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성녀님의 바람이, 그를 귀별 숲으로 이끌 겁니다.”

빽빽한 나무로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이곳은 너무 어둡고 무서워서.

“신들이 떠나간 바로 이 자리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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