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덜컥, 다그마르의 시신이 놓여 있던 관의 뚜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제 남자와 다그마르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칼은 푸른빛이 도는 다그마르의 피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굳은 밀랍을 만지는 것처럼 기묘한 감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의 여자는 박제된 인형이었으니까.
부패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비우고 방부 처리를 한 겉가죽만 남긴 시신이었다. 이것은 산 사람이라고도, 죽은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살아생전의 모습만을 유지하고 있는 인형에 불과했다.
칼은 다그마르의 머리카락을 쥐고는 그것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어차피 죽어서도 인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조금은 안타깝고,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그는 다그마르를 향해 속삭였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평생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 사람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제 나라와 사람들을 인질로 잡힌 아버지가 하는 사랑한다는 말이 진심인 줄 아셨습니까?
―아버지께 어머니는 제 모든 삶을 무너트린 약탈자에 불과합니다. 정말 모르셨습니까?
그녀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가려진 진실이 드러나고 거짓이 무너지면 죽음은 너를 찾으리라.’
별의 그릇이 남긴 예언대로 다그마르는 모습을 드러낸 잔인한 진실 앞에서 죽음을 택했다. 아니,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교활한 아들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었다.
칼은 그것에 분노했다. 다그마르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장식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에.
“애초에 당신 아들을 살려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리 그녀가 애원한다 해도 모두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그래도 바로 눈앞에서 왕좌를 빼앗겼으니, 당신 복수는 그럭저럭 한 셈이군.”
리뮈르의 장녀가 읽은 카이엔의 기억을 전해 들은 순간부터 그는 복수를 준비했다. 그의 충동질에 넘어간 카이엔은 왕도의 병력마저 줄여 가며 물새 협곡 총공격을 감행했다.
지키는 개들이 모두 떠난 왕궁은 텅 빈 상태였다. 적들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손쉽게 왕도를 접수할 테고, 물새 협곡으로 떠난 케이루스의 병사들은 내부의 리카서스와 외부의 리뮈르 협공에 시달릴 터, 어쩌면 이미 모두 죽었을지도 몰랐다.
감히 제 것을 좌지우지하려 한 카이엔에게 그는 마땅한 복수를 했고, 그것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왜…….”
그는 허전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졌는데,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남아 그를 괴롭혔다. 그는 욕망한 모든 것을 제 손아귀에 넣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다그마르가 죽음을 선택하며 기대한 것이 자유였다면, 그것은 실패한 시도였다. 그는 그녀를 놓아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는 검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로로 그었다. 목을 지나는 섬찟한 느낌과 함께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제야 갈증이 좀 채워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 그가 카이엔을 배신하고 메르디에스에 협력한 덕분에 리카서스는 멸문의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살려 준 은덕에 감사하며 발치에 엎드려 구명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는 왕보다 더한 권력을 지녔던 그 자리에서, 승리자로 남기를 원했다.
‘당신과 만나는 것은 지옥이 되겠군.’
쨍그랑, 칼의 손아귀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 * *
짤랑,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던 붉은색 장신구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당황한 베아트리스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자, 앞서 걷던 여자가 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녀님.”
여자의 무뚝뚝한 표정과 마주하자 베아트리스는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한껏 기가 죽은 베아트리스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린즈 부인. 그게…….”
린즈 부인이라 불린 여자는 글레나 린즈, 메르디에스 성의 내정을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메르디에스 일가가 성을 비운 지금 성의 주요 대소사가 그녀 손에 달려 있었다.
정식으로 초청을 받은 손님도 아닌 불청객처럼 메르디에스 성에 들이닥친 베아트리스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어렵고 불편한 상대였다.
베아트리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때, 뒤따라오던 레이먼드가 몸을 숙여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베아트리스 님, 이걸 찾으십니까?”
레이먼드의 손에는 베아트리스가 떨어트린 장신구가 들려 있었다.
“고마워요, 레이먼드.”
그에게서 장신구를 건네받은 베아트리스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숙였다. 낯설고 어려운 곳이지만 레이먼드가 함께라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그녀는 레이먼드의 온기가 남은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수리를 원하시면 세공사를 불러 드릴까요?”
그 모습을 오해했는지 글레나가 그렇게 물었다.
“아, 아니에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수리야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니까.”
그런 제 모습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베아트리스는 장신구를 후다닥 숨기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언제든 필요하면 주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고개를 짧게 까딱한 글레나가 담백한 어조로 덧붙이듯 말했다. 베아트리스는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아마 이곳이 성 상티모니아였다면, 베아트리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흠집이 난 장신구는 그 즉시 세공사에게 맡겨졌을 것이 뻔했다. 성녀의 물건에 흠집이 있어서는 곤란하니까.
그런데 글레나는 달랐다. 그녀는 베아트리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을 뿐,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 품격이 떨어진다거나, 당장 수리가 필요하다는 등의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이곳에서 이것을 수리하느냐, 마느냐는 온전히 베아트리스가 결정할 사안이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생각하니 냉랭한 글레나의 표정도 조금은 다정하게 보였다.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혼자 오해하는 것이라 해도 좋았다. 혼자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건 자신에겐 퍽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베아트리스가 수줍은 듯 웃으며 글레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갔다.
“아닙니다. 성을 방문한 손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시는 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베아트리스가 의아하다는 듯 힐끗 바라본 글레나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글레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베아트리스가 혼인 전 키우던 강아지 같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풍성하고 구불구불한 금색 머리카락이 복슬복슬한 강아지 털 같기도 하고.
제 손으로 키우다시피 한 아리아드네나, 어릴 때부터 봐 온 캐롤린 모두 저런 성격은 아니라 베아트리스가 더 신기했다.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글레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괴로운 듯 눈가를 찌푸렸다.
―제게 협조해 주신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건 없잖아요?
캐롤린의 거짓말에 자신마저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글레나는 캐롤린 혼자 그 짐을 짊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이, 사과의 말이나 감사의 말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보낸 것이, 아직도 가슴에 돌덩이처럼 남았다.
성의 지하, 메르디에스 가문의 무덤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멈춰 선 글레나가 베아트리스를 돌아보며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리스벨 영애의 가는 길을 성녀님께서 친히 밝혀 주신다니 저야말로 어떤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베아트리스는 글레나의 얼굴에 드러난 괴로움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이곳에 안치된 분이 아리아드네와 특별한 사이라고 들었어요. 살리바에서 제가 아리아드네에게 받은 것에 비하면 몇 마디 말을 하는 것이야 어려운 일도 아닌데…….”
베아트리스는 손가락 끝을 반대쪽 손으로 잡아당기며 황금빛 눈동자를 쉴 새 없이 굴렸다.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망자를 이용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레이먼드의 도움으로 베아트리스가 메르디에스 성에 도착한 것은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베아트리스는 레이먼드의 소개와 아리아드네와의 친분을 앞세워 글레나와 대면할 수 있었다.
―린즈 부인, 성 상티모니아의 성녀이신 베아트리스 님과 수석 사제 레지나 님이십니다.
레이먼드의 소개에 꼿꼿한 자세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글레나가 베아트리스를 돌아보았다. 호의라고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쌀쌀맞은 얼굴이었다.
―그러시군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된 대접을 할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공녀 저하께 성녀님의 방문을 알릴 터이니, 답신이 오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말투도 표정과 판박이였다. 딱 자르는 듯한 어조에 기가 죽었지만 베아트리스는 용기를 끌어모아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유진과 아리아드네는 지금 어디에…….
―두 분의 위치를 성녀님께 알려 드리는 것은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그럼, 제가 갈게요. 두 사람을 만나서, 반드시 만나서 해야 할 말이…….
―성녀님을 그곳에 모시는 것 또한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매달려 보았지만 글레나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겨우 낸 용기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자 베아트리스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였다.
―…….
우는 모습을 들키긴 싫어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런 베아트리스가 안쓰러워서였을까? 내내 자리만 지키고 있던 레지나가 입을 열었다.
―소중한 분이, 멀리 떠나셨나 보군요.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멀리? 위로? 베아트리스는 눈에 고인 물기를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글레나가 입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검은 옷. 그것은 상복이었다.
아, 잘만 하면 유진과 아리아드네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베아트리스는 떨리는 손끝을 감추며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제가 그분이 가는 길을 밝혀 드리고 싶어요. 가는 길이 어두워 헤매지 않도록.
한 나라의 제후라 하더라도 망자의 여정에 성인의 인도를 받은 전례는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성 상티모니아 역사상 살아생전 성인으로 추대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을 빌미로 제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실 속셈이라면…….
글레나는 베아트리스의 의중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지만 단박에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메르디에스 성의 사람이라면, 아리아드네에게도 소중한 사람일 테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제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베아트리스는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으며 글레나의 눈치를 살폈다. 성력이나 성물을 빌린 후에는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했다.
성채(聖債)를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또한 성채는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처음 요구한 성채를 치르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다행히도 글레나는 성채에 관해 잘 모르는 듯했다.
하, 피로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쉰 글레나가 눈가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캐롤린 리스벨. 리스벨의 후계자이자, 공녀께는 가족 같은 분이셨습니다.
―…….
하지만 망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 리스벨. 아리아드네가 리스벨을 잃었구나, 그 마음을 짐작도 할 수 없어 숨이 턱 막혔다.
―리스벨 영애를 위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채, 한쪽 치마 끝을 잡은 글레나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냉랭하고 싸늘하게만 보였던 글레나의 슬픔을 목격한 순간, 베아트리스는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끝끝내 제 목적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공녀께서도 고맙게 여기실 겁니다. 리스벨 영애는 아리아드네 님께는 친자매나 다름없는 분이셨으니…….”
계단을 모두 내려온 글레나가 안쪽으로 베아트리스를 이끌었다. 자수정으로 만든 보라색 꽃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방이었다.
벽을 장식한 꽃들은 모두 조금씩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캐롤린 리스벨이란 사람이 아리아드네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일지 짐작이 갔다.
베아트리스는 투명한 수정 안에 놓인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여자는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여자의 시신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시신이 이토록 생생한 것은 방부 처리를 도맡은 자의 솜씨가 뛰어나서는 아니었다. 망자의 시간이 죽은 순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하게 하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유진의 힘이 닿은 시신은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나 움직일 것만 같았다.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는 어떤 곳이야?
베아트리스가 언젠가 그렇게 물었을 때.
―겨울에도 녹음이 찬란한 곳이지. 다음에 초청할게.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아리아드네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쁜 듯 애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답했다.
아리아드네는 그때, 메르디에스라는 특정 공간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렸음이 분명했다. 아마도 캐롤린 리스벨이나, 글레나 린즈 같은.
베아트리스는 차가운 수정 위를 쓰다듬으며 성호를 긋고, 눈을 감았다. 부디 제 인도가 그녀에게 닿기를. 그리하여 그녀가 헤매지 않고 무사히 길 끝에 다다르기를.
짧은 기도를 마친 베아트리스가 느리게 눈을 떴다. 망자의 인도를 기원하는 주제에 정작 자신이 걷는 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살리바는 네가 지켜야 할 땅이니까. 의무만으로는 너무 버겁잖아.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그때부터는 의무가 아니지.
아리아드네는 자신에게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라고 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사랑하는 방법도,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삶도 죽음도 더는 속박하지 않는 땅에서.”
제문을 읊조린 베아트리스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금빛이 관을 부드럽게 감쌌다가 이내 안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이런 것들뿐이었다.
‘내 힘이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지 않기를.’
베아트리스는 잠든 것 같은 캐롤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걷다 이상한 점을 느낀 베아트리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제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레지나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레지나는 베아트리스가 훌쩍 멀어진 것도 모르고 수정 관 안에 누운 캐롤린만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레지나?”
베아트리스가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레지나가 서둘러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왜?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지나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베아트리스 뒤를 따랐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베아트리스는 문득 용기를 내 보고 싶어졌다.
“레지나, 나 그 말 못 한 거 같아.”
타박타박, 베아트리스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모래 위를 스치는 것처럼 사박거리는 레지나의 단정한 발걸음 소리가 교차되어 울렸다.
“고마워. 날 키워 준 것도, 살리바에서 떠나는 날 도와준 것도.”
짐마차 뒤에 웅크린 자신의 손을 쓸어 주던, 그 어색하던 손길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난, 레지나가 평생 내 편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레지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그래도 괜찮았다. 그렇다고 레지나에게 자신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닐 테니까.
“레지나, 나는 레지나 정말 좋아해. 알지?”
오늘따라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자꾸만 눈가가 시큰거렸다.
“어머니도……. 어머니가 아무리 날 싫어하셔도 난, 어머니를 포기할 수가 없어.”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 나쁜 짓도, 할 수 있어. 어머니가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나는,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그네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사랑하는 것마저 멈출 수는 없었다. 자신마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까 봐.
“교황 성하를 포기하시다니요.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잖습니까.”
가까이 다가온 레지나가 베아트리스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젖은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만은 변함없이 다정하여, 베아트리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레지나의 얼굴이 기이하게 뒤틀려 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