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니, 이젠 페렌트의 국왕이라 불러 드려야 하나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음 짓는 교황의 얼굴은 소녀 같다가도, 꼭 내일이면 죽음을 맞이할 노파처럼 느껴졌다.
‘교황이 여기에는 왜…….’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아그네스와 마주한 아리아드네가 곧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성하께서 어려운 걸음을 하셨군요.”
교황은 성 상티모니아 모든 신도들의 정점이자 성도 살리바의 주인이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주요 신전을 돌며 순례 행사를 하는 것을 제외하면 교황이 살리바 밖으로 나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교황이 살리바 밖으로 나온 것도 모자라 내전 중인 페렌트에 직접 나타나다니.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드러난 의아함을 눈치챈 교황이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휘어지도록 웃으며 속삭였다.
“나를 그런 비대한 늙다리들과 같이 취급하면 곤란하답니다.”
성 상티모니아 신도들은 자신들의 교황이 살아서는 신의 대리자로 그 역할을 하며, 죽어서는 신의 반열에 오른다고 믿었다. 그러니 현재의 교황에게 이전의 교황들은 모시는 신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선대 교황들을 비대한 늙다리라며 신랄하게 비꼬다니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밤이네요. 새로운 왕이 탄생하기에는 더없이 흡족한.”
천천히 걸음을 옮긴 아그네스가 대낮처럼 불을 밝힌 페렌트 왕궁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페렌트를 지배해 온 케이루스가 마침내 무너지겠군요.”
불빛에 비친 교황의 얼굴이 기이했다. 음영이 도드라진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 같기도, 환희에 젖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1왕자의 원군 요청을 거절하시더라도 그것을 제게 알릴 이유는 없었을 텐데요.”
아리아드네의 말에 교황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리카르도를 통해 교황의 서신이 도착한 건, 물새 협곡의 후방 진지에서 케이루스 포로들을 사로잡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교황은 1왕자 카이엔이 성 상티모니아에 원군을 요청했음을 아리아드네에게 알려 왔다. 그녀는 카이엔의 요청대로 케이루스 영지를 통해 왕도 근처에 성 상티모니아의 병력을 배치할 예정이긴 하나, 페렌트 내전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끼는 수족이 곁에 없으니 서운해서 말이죠.”
교황이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손을 뻗자 그녀의 수행원이 은으로 된 파이프를 받쳐 들었다. 파이프를 물었다 떼어 낸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흰 연기가 흘러나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교황이 카이엔의 요청을 거절하는 대가로 아리아드네에게 요구한 것은 무기한 대여한 리카르도를 되돌려받는 것이었다.
성 상티모니아가 페렌트 내전에 끼어든다 한들, 이미 한참이나 기운 승기를 뒤집긴 어렵다는 것이 메르디에스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교황이 1왕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케이루스 진영에 합류한다 해도 승패 자체는 변함이 없을 거야. 다만 곧 끝날 싸움이 몇 달 더 걸릴 순 있겠지만.
달로아의 판단에 아리아드네도 동의했다. 내전이 길어지면 가장 고통받는 것은 힘없는 민중들이었다. 곧 끝날 싸움을 질질 끄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아리아드네는 아그네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교황의 손에 들린 파이프는 연초를 태우며 발간빛을 뿜어냈다. 그녀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빛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을 냈다. 깊은숨을 내쉬는 것처럼 가느다란 연기를 뱉어 낸 아그네스가 이윽고 파이프에서 입을 뗐다.
“리카르도를 데려간 건 공녀께는 작은 심술에 불과했겠지만, 그 심술이 내겐 꽤 뼈아팠답니다. 리카르도는 제법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어서요. 성 상티모니아에서도, 그리고, 내게도.”
흩어지는 연기처럼 희미하게 이어지던 아그네스의 목소리가 뚝 멎더니 이내 표정마저 사라졌다. 표정이 사라진 교황의 얼굴은 밀랍을 부어 굳힌 것처럼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밀랍에 금이 가듯 생긋 웃어 보인 아그네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부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을 언제까지나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둘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무심한 손길로 파이프를 툭툭 털던 교황이 아, 하는 작은 감탄사와 함께 유진을 돌아보았다.
“물론 방문자님께서야 어디를 가신다 한들, 그래서 베아트리스가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도 저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베아트리스를 걱정하는 척 꾸며 낸 말에는 유진을 향한 빈정거림이 잔뜩 묻어났다.
내내 무언가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있던 유진이 말없이 교황을 마주 보았다. 신의 현신이라 불리는 유진과 신의 대리자라 불리는 교황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유진은 무언가를 말할 듯이 입을 달싹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에 가려진 그의 옆얼굴은 언뜻 보기에도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이 갔다.
―유진이랑 아리아드네도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아리아드네조차 그렇게 말하던 베아트리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한데. 아리아드네는 슬며시 손을 뻗어 유진의 손을 잡았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베아트리스는 무탈한가요?”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손에 든 파이프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그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궁금한가요? 몸이야 성국의 보물인 성녀이니 당연히 무탈할 것이고, 마음이야 괜찮을 리가 있나요?”
잠시 말을 멈춘 교황이 파이프 끝을 깊게 빨아들였다가 비웃는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평생을 기다려 온 사람이 잡을 수 없이 멀어졌는데…….”
아그네스가 두 사람이 단단히 맞잡은 손을 바라보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가 끝없이 흘러나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궁금하지도 않으신가요? 그 아이가 지금 어떤 마음일지.”
바람에 날리는 아그네스의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유진을 바라보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유진 또한 서늘한 회색 눈동자로 눈앞의 교황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베아트리스가 기다린 사람이 나뿐이던가? 그 아이에게도, 네게도 정말 필요한 건 내가 아닐 텐데…….”
아무리 엉망으로 뒤틀린 관계라지만, 아그네스와 베아트리스는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이제 와 그것마저 빼앗을 순 없었다.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다. 너 같은 이는 꿈도 꿀 수 없는 높은 지위를 준대도.
―먹어. 그럼 다 편해져. 너도, 그리고 나도.
비록 그 시작은 다른 이의 욕망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태어난 것은 이제는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유진은 파이프를 쥔 아그네스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자가 원하는 삶을 살면 그만이야. 그렇다고 남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넌 네가 바라던 삶을, 난 내가 선택한 삶을 사는 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남이 되는 건 아니잖아.
언젠가 디티가 자신에게 바랐던 그 삶을.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삶을 살더라도.”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삶을 살더라도 너는 내 영혼의 반쪽이니까.
이제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그네스가 들고 있던 파이프를 옆의 수행원에게 넘기며 손가락을 가리듯 소매를 내렸다.
“난 베아트리스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무엇이든.”
그의 말에 아그네스가 정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그 아이가 진짜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해 줄 마음은 있으신가요?”
“……그래야겠지.”
전부는 아니라 해도, 베아트리스가 느끼는 외로움에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부분이 없진 않았다. 그것을 언제까지나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죽어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나요?”
아그네스가 그렇게 물었을 때는.
‘네게 죽음을 선물할 여자를 찾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헤매리라.’
“그것을 바란다면.”
유진은 차라리 이 모든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의 침묵 뒤에, 아그네스는 과장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요? 아시잖아요. 베아트리스에게 방문자님은 신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걸.”
이제까지 한 말이 모두 농담이었다는 듯, 그녀는 순식간에 태도를 달리했다. 아리아드네는 아그네스의 모든 행동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무슨 말로 상황을 정리할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와아아아아아― 아래에서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린 외성으로 남부 연합군이 물밀듯이 들어가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서서 말을 달리고 있는 이는 단연 커티스였다. 캐롤린의 마지막 소망을 이루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커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도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교황 성하.”
“메르디에스 공녀.”
짧은 인사와 함께 돌아서는 아리아드네를 아그네스가 불렀다.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손안에 움켜쥔 왕위를 지킬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교황 아그네스는 성도 살리바 주인이자, 성 상티모니아 모든 신도들의 정점에 자리한 이였다. 오래도록 통치하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니만큼, 그 세월 동안 쌓인 나름의 고뇌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 그 질문은 이미 오래전 결론이 난 것이었다.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자격을 잃은 것 아닙니까?”
아리아드네가 왕위에 오르고자 한 것부터가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므로. 그런 아리아드네를 보는 아그네스의 얼굴에는 그것을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가요? 부디 그 뜻을 오래도록 간직하시길. 페렌트의 새로운 왕이시여.”
오늘이 저 이가 메르디에스 공녀로 사는 마지막 날이겠구나, 아그네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한 아리아드네가 유진에게 반쯤 안긴 채로 빠르게 멀어졌다. 아그네스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케이루스 왕가의 몰락을 지켜보며 읊조렸다.
“신실한 사제의 희생이 별이 돌아올 자리로 그들을 이끄는 길이 되리라.”
오래도록 품어 온 그녀의 은밀한 소망이 이제야 겨우 손에 잡힐 듯했다.
* * *
“진격! 진격하라!”
페렌트 왕성을 뒤덮은 남부 연합군의 기세에 천지가 진동하듯 웅웅 울렸다.
쿠웅! 쿵! 쿵!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성 외곽을 빽빽하게 둘러싼 남부 연합군이 밀물처럼 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와아, 와아아아아―
왕궁을 지키던 병사들마저 속속 남부 연합군에 투항하자 메르디에스를 저지하는 병력은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했다. 이미 어떻게 해도 이 싸움의 승패는 돌이킬 수 없었다.
성 안으로 진입한 남부 연합군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사냥을 시작했다.
“1왕자 카이엔을 찾아라!”
적의 수장인 카이엔만 사로잡는다면 페렌트 내전은 이대로 종결이었다. 그러니 카이엔이 지내는 거처인 주각궁 앞에서 두 병력이 대치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각궁만은 사수해라!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주각궁을 빙 둘러싼 케이루스의 병사들 중 가장 선두에 선 자가 두려움을 이기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남자의 이름은 칼슨, 그는 왕궁의 친위대장인 바랄 남작이 두고 간 친위대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주각궁을 지키는 이들은 겨우 백여 명에 불과했고, 케이루스 병사들을 둘러싼 남부 연합군은 그 수십 배에 달했다.
전력의 차이는 확연했다. 케이루스 병사들은 카이엔이 도망갈 시간을 버는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일방적인 학살만이 예정된 그때, 케이루스 병사들과 대치 중인 남부 연합군에서 기사 한 명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가 케이루스 병사들을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투항하는 자들은 살려 주겠다. 이미 끝난 싸움에 아까운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알버트가 케이루스 병사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개소리로 우리를 모욕하지 마라! 이곳을 지나려면 우리 시체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칼슨은 알버트를 향해 사납게 고함을 내질렀다. 어딘가에 속한 기사인 것은 알버트도 마찬가지이니, 끝까지 충성을 바치겠다는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짧게 고개를 끄덕인 알버트가 당장이라도 공격할 태세로 검을 고쳐 잡았다. 두 세력이 맞부딪치려는 그 순간이었다.
퍼엉, 펑! 펑! 그때,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밤하늘에 화려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뭐, 뭐야?”
“……유성?”
케이루스 병사들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을 둘러싼 수십 배에 달하는 적들보다 하늘에서 터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꽃이 더욱 두려웠다.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시선을 분산하려는 적의 농간에 놀아나지 마!”
칼슨이 우왕좌왕하는 케이루스 병사들을 다잡으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따위 장난질에―”
놀아날 것 같으냐고 칼슨은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상대도 정신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깃발이…….”
하지만 메르디에스 병사들이 정신이 나간 것은 하늘을 수놓은 폭죽 때문이 아니라, 한층 더 밝아진 하늘을 배경으로 힘차게 날리고 있는 깃발 때문이었다.
왕궁의 가장 높은 성벽에서 나부끼고 있는 것은 바로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가 그려진 녹색 깃발이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걸린 깃발이 바뀌었음은 메르디에스가 왕궁을 완전히 점령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왕궁의 주인이 바뀌었다!”
메르디에스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마침내 단장님께서…….’
알버트는 휘날리는 메르디에스 깃발 아래 우뚝 선 사내의 그림자를 보며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삼켰다. 이번 내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은 단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커티스의 역할이었다.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 리스벨 백작가의 가주로, 메르디에스 기사단의 단장으로, 메르디에스 본성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죽음을 맞이한 캐롤린의 아버지로, 그는 페렌트 왕궁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메르디에스 깃발을 꽂는 역할을 맡았다.
이번 내전에서 커티스가 잃어야 했던 것과 리스벨이 한 일이 무엇인지 지켜본 사람들은 저마다 눈을 돌리거나 얼굴을 가리고 복잡한 심경을 다스렸다.
페렌트 왕궁 가장 높은 곳에서 메르디에스의 깃발이 휘날리는 이 순간이, 더없이 영광스럽고 참을 수 없이 비통했다.
메르디에스 진영의 사람들이 비감에 젖은 것과는 다른 이유로 주각궁을 감싼 마지막 저지선 또한 거세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키는 것이 더 이상 페렌트 왕궁의 주인이 아닌, 도망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효과는 대단했다.
“이, 이대로는…….”
칼슨은 술렁이는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이를 꽉 악물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그래야 전하께서 몸을 피하실 수가…….’
그가 남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려 머릿속을 바쁘게 굴리던 그때였다. 케이루스 병사들을 빽빽하게 감싸고 있던 메르디에스 군사들이 순식간에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이 생겨났다.
퍼엉, 때를 놓치고 늦게 터진 폭죽 하나가 다시금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새로 생겨난 길 위에는 옅은 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자가 홀로 서 있었다. 여자의 등 뒤로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메르디에스 공녀.”
아리아드네를 발견한 칼슨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순 없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발아래 둔 것처럼 오연한 눈빛으로 케이루스 병사들을 훑어본 여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무는 하늘을 등지고 새로운 대지 위에서 살고 싶은 자, 누구인가.”
저무는 하늘과 새로운 대지.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무는 하늘로 전락한 케이루스를 버리면, 메르디에스가 세울 새로운 대지 위에서 살게 해 주겠다는 아리아드네의 제안은 알버트의 것과는 그 무게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약속을 한 이는 왕국의 새 주인이 될 아리아드네였으니까.
케이루스 병사들은 직감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살, 살고 싶습니다.”
가장 어린 병사가 칼을 놓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시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살려 달라 애원하는 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
칼슨은 적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곳에 남은 병사들만큼은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충성스러운 이들이라 믿었으나, 그것은 혼자만의 바람에 불과했다.
도망갈 때를 놓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이들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카이엔의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다.
“……메르디에스를 새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쨍그랑, 칼슨의 손에 들린 칼마저 대지 위에 떨어지고 그는 아리아드네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칼슨마저 굴복하자 끝까지 머뭇거리던 병사들도 따라 무기를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칼슨을 향해 물었다.
“이곳의 지휘관이 경인가?”
보통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투항한 적에게 ‘경’이라 불러 준 것에 감격하기 바빴겠지만, 칼슨은 오로지 자신과 아리아드네 사이의 간격을 재는 것에 골몰하고 있었다.
“경?”
반 발짝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재차 그를 부른 그 순간.
“오늘 이 자리에서 고꾸라져 죽는다 할지라도 내 영혼은 케이루스의 하늘 아래 영원히 살지어다!”
칼슨이 비장하게 외치며 아리아드네를 향해 소매 아래 숨겨 둔 단검을 날렸다. 쐐액! 날카로운 물체가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는 소리가 제법 위협적이었다.
“크헉―”
하지만 칼슨이 날린 단검은 도리어 자신의 목을 꿰뚫었다.
‘대체, 어떻게…….’
칼슨은 페렌트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는 아니지만, 바랄이 그를 남기고 떠날 정도로 유능한 기사는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뛰어난 기사인 그가 자신이 날린 단검이 되돌아올 때까지 어떤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이, 계의 방, 문자…….”
“알아주니 고맙군.”
탁, 소리와 함께 가볍게 착지한 유진이 칼슨을 힐끗 보더니 손을 털었다.
“이쪽도 정리했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틀어 묶은 여자가 무감한 얼굴로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와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리아드네의 인사에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 차를 두고 왕궁에 진입한 시안은 투항한 척 공격할 기회만을 노리던 이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에 손을 보탰다.
무릎을 꿇은 채 목숨을 구걸하던 케이루스 병사들은 제 옆에 있던 동료 중에 몇몇이 목이 꺾이거나 칼을 맞은 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실감한 것은 상대의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적의 숫자가 더 많은 것은 조금도 문제가 아니었다. 케이루스가 메르디에스보다 더 많은 병력을 확보했다 한들 이것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 죽은 동료와 다른 선택을 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리하진 마. 이곳에 날 지킬 사람이 당신 혼자인 것도 아니니까.”
아리아드네가 제 곁으로 돌아온 유진을 올려다보며 당부하듯 말했다. 그가 다쳤던 것이 못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로 무리라고 말하면 그게 더 서운한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유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페루스가 다루었던 시간의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죽은 사람의 시간을 몇 번이고 되돌리는 것은 물론, 드넓은 아르체의 시간을 왜곡한 채로 그토록 오래 유지했었으니까.
그것은 페루스의 힘을 이은 레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손짓 한 번에 아르체가 검게 물들었던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기억을 잃은 그가 자신의 일부인 모라의 그릇에 손조차 댈 수 없었던 것이나, 생명을 가진 것의 시간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흩어진 내 유해를 탐내지 마라. 내가 다시 이 땅에 나타나면 그때야말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제 몸을 셋으로 갈라 나누면서까지 페루스의 힘을 봉인한 과거의 자신이 스스로에게 남긴 금제(禁制)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들이 전부 거짓이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는 과거의 자신이 가졌던 힘을 조금씩 되찾는 중이었다.
“서운하면 내 눈앞에서 털끝만큼도 다치지 마.”
아리아드네가 그의 목깃을 틀어쥐며 속삭였다.
“노력은 하겠지만, 검은 피의 소유자께서도 여기 계시니 걱정은 좀 덜어도 되지 않을까.”
아리아드네의 손을 감싼 유진이 시안을 향해 까딱 고갯짓하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유진이야 아리아드네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애초에 눈치라고는 전무한 시안을 끌어들인 것이 실수였다. 예기치 못하게 화제에 오른 시안이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몹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피는 만능이 아닙니다.”
시안의 능력인 검은 피는 치유의 힘만을 지닌 하얀 피와는 달랐다.
“검은 피가 부작용 없이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최초의 한 번뿐입니다. 두 번째부터는 독이 될지, 약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검은 피가 타인의 체내에 일정량 이상 쌓이면 그때는 무엇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극독이 되는데, 얼마나 쌓여야 독이 되는지는 힘의 소유자인 시안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니 검은 피로 상대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처음 한 번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안전했다.
“그럼, 한 번까지만 마음을 놓는 걸로…….”
지나치게 진지한 시안의 태도에 머쓱해진 유진이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식으로 가볍게 넘기지 마.”
그런 유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리아드네가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다시는 당신이 다치는 것 보고 싶지 않아.”
그가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리아드네가 그를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알아.”
“알면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마.”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보고를 받았다. 전장을 지휘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과거의 기억을 대부분 떠올린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그때의 나는 무엇을 대가로 세계의 시간을 되돌렸는가.’
떠올리지 못한 기억 가운데 그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을 것만 같아 때때로 불안해지곤 했다.
“알버트, 투항한 포로들은 후발대에 인계하고, 우리는 곧장 주각궁으로 진입한다.”
상황을 정리한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돌아보았다. 카이엔이 궁을 빠져나가기 전에 그를 붙잡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사전에 당부했듯이 궁의 지하 1층 서쪽 계단 아래, 2층 동쪽 복도 끝, 꼭대기 층 손잡이가 없는 방을 중심으로 수색해.”
과거, 카이엔은 메르디에스를 공격하기 직전 그녀를 왕비의 처소에 두는 것도 불안해하며 주각궁에 감금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알게 된 것들이 제법 유용하게 쓰일 듯했다.
“달로아가 아침이 밝기 전에 모리아 백작을 사로잡겠다고 했으니까…….”
카이엔은 리뮈르가 물새 협곡에 도착하는 것이 일주일 뒤의 일이라고 알고 있으나, 그것은 레비에 후작이 남부 연합에 투항하는 대가로 교란한 가짜 정보였다.
모리아 백작이 텅 빈 메르디에스 진영을 발견하고 돌아 나오는 순간, 페렌트 최강의 전력 리뮈르 기사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더구나 모리아 백작이 이끄는 군사 중 절반은 이미 케이루스를 등진 리카서스의 세력이었다.
―길게 끌진 않을 거야. 산악 전투라면 페렌트에서 리뮈르 기사단을 상대할 전력이 없을뿐더러, 내가 그동안 협곡 곳곳에 야금야금 함정을 좀 파 놨거든. 새 아침이 밝기 전에는 적군 대장의 목을 바칠게.
달로아가 그렇게 자신했으니, 모리아 백작이 이끄는 케이루스 병사들은 날이 밝기도 전에 전멸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날이 바뀌기 전에 1왕자를 잡아야지. 명색이 본대가 별동대보다 늦어서야 면이 안 서잖아?”
아리아드네의 말은 수색을 준비하던 메르디에스 병사들의 승부욕에 불을 질렀다.
“반드시 오늘 안에 1왕자를 잡아다 바치겠습니다!”
“1왕자를 찾아라! 왕궁 주위를 물샐틈없이 둘러싸라.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서는 안 돼!”
의욕이 솟아난 남부 연합군의 병사들이 거센 환호성과 함께 주각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익! 이대로는―”
“1왕자 전하를 지켜…….”
마지막까지 케이루스를 등지지 못한 몇몇 병사들이 그들을 막아섰으나 그것은 파도에 쓸려 가는 모래에 지나지 않았다.
“……다들 못 죽어서 안달이군.”
유진이 시안의 검에 쓰러진 병사들을 힐끗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승패가 결정된 싸움에 목숨을 거는 이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진은 눈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조리 해치우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곳이 당신이 말한 서쪽 계단 아래 비밀 공간인가?”
입구를 지나 성의 지하로 내려온 그가 단단한 돌벽을 두드리며 물었다.
“내려 줘.”
유진의 품에서 내려온 아리아드네가 돌벽 앞에 섰다.
“탈출구가 아니라 이곳에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아리아드네는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벽을 쓰다듬었다.
[카이엔,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가슴을 쥐어뜯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벽을 쓰다듬는 손길에 되살아났다. 그녀의 손이 돌벽 앞에 놓인 촛대를 왼쪽으로 돌리자 벽이 열리며 호화롭게 단장한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이곳에서 조금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어. 당신이 다시 빛을 볼 때면 꽤 많은 것이 달라져 있겠지만.]
여기 갇힌 것이 한 달 정도였던가,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심코 그곳에 발을 들이려던 아리아드네가 시궁쥐처럼 어둠 속에서 기어 다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서고야 말았다
“이건 또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어?”
세상에서 사라졌어야 할 무언가가 그곳에 웅크린 채 몸을 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