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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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아는, 모리아 백작에게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느냐!”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던 카이엔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모리아 백작이 물새 협곡을 치기로 한 것은 오늘 밤의 일이었다. 일이 잘 풀려 하룻밤 새 승리한다고 해도 벌써 연락이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이엔은 그런 판단도 하지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아니, 아니, 다 잘될 것이다. 나는 케이루스의 제주이고, 페렌트의 왕이며, 페루스의 신관이다. 나는 지지 않는다. 질 수가 없어! 나는, 나는…….”

    카이엔이 마치 주문을 외는 것처럼 그렇게 제 마음을 다스리던 그때였다.

    시작은 웅웅거리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진동이었다. 그 진동은 이윽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우레와 같은 함성이 되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마치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소리였다. 쿵쿵, 카이엔의 심장이 불안으로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롬, 제롬! 대체 무슨 일인지 어서 알아봐라.”

    “네, 전하.”

    카이엔의 닦달에 잽싸게 사라졌던 제롬이 곧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왔다.

    “전하……. 외궁이, 외궁이 뚫려 적들이 들이닥치고 있다고 합니다.”

    제롬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카이엔은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뭐? 뭐가 어째?”

    바랄이 리뮈르를 막지 못했다거나, 모리아가 물새 협곡에서 패배했다는 것도 아니고, 외궁의 경계가 뚫리다니. 대체 누가 외궁의 경계를 뚫고 들어왔단 말인가.

    “적들이 이미 외궁을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랄 남작께서 외궁을 나서자 열린 문으로 그대로 밀고 들어온 듯합니다.”

    “아니, 그럴 수는, 그럴 수는…….”

    카이엔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에 당황하여 부정했다. 하지만 그의 부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들의 함성은 점점 가까워졌다.

    ‘대체 누가…….’

    카이엔은 하나 남은 손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대체 누가 이따위 짓을!’

    이런 일이 그냥 일어날 리 없었다. 저들과 결탁한 내부의 배신자가 있지 않고서야…….

    ―전하, 바랄 남작만이 리뮈르를 막아 낼 수 있습니다. 란드를 지켜야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란드를 지키는 것은 전하를 지키는 일입니다. 부디…….

    카이엔의 귓가에서 조금 전까지 자신을 현혹하며 속살거리던 레비에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듯했다.

    “레비에!”

    카이엔이 끓어오르는 증오를 토해 내며 배신한 신하의 이름을 불렀다.

    “레비에, 내 너를 그렇게 믿었건만!”

    분노를 이기지 못한 카이엔이 탁자를 걷어차며 고함을 질렀다.

    “감히, 나를 배신해?”

    카이엔은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전쟁의 승기가 기울었던 그때부터였을까? 아니, 어쩌면 레비에는 처음부터 메르디에스가 붙인 세작일지도 몰랐다.

    ―우리 쪽 정보가 새고 있어. 그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 내가 제프리의 목을 자르지 않았다면 누구의 목이 잘렸을 것 같은가.

    그때, 자신이 잘랐어야 했던 건 제프리가 아니라 레비에의 목이었던가. 카이엔은 레비에의 목숨을 진작에 끊어 놓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후회 뒤에는 책임 전가였다. 카이엔은 당연한 수순으로 자신과 손을 잡고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이를 원망했다.

    “왕후는 대체 무얼 하기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외궁의 경비를 맡은 것은 리카서스였다. 카이엔은 발작하듯 고함을 지르며 물건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졌다.

    “내 앞에 왕후를 데려와! 지금 당장!”

    그 순간이었다. 터어엉― 기다렸다는 듯이 거칠게 열린 문 사이로 새까만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남자가 카이엔을 향해 다가왔다.

    “나를 찾았나? 왕자.”

    그 말을 하는 칼의 얼굴은 더없이 태연하고 몹시도 흡족해 보였다. 카이엔은 칼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설, 설마 왕후께서…….”

    예고 없이 들이닥친 적들을 맞이하는 것치곤 칼은 너무도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예상한 사람처럼.

    와아아아아― 카이엔이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 순간에도 천지가 울리는 듯한 함성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위협하는 듯한 함성 소리에 카이엔은 불길한 생각을 떨치려 안간힘을 썼다.

    ‘아니, 왕후가 그랬을 리 없어. 내전까지 일으킨 마당에 뒤늦게 메르디에스와 손을 잡아 무엇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지금은 왕후의 표정 같은 사소한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카이엔은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칼에게 다가갔다.

    “왕, 왕후……. 잘 오셨습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카이엔이 다급한 목소리로 칼을 재촉하던 그때였다. 투욱, 칼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리카서스의 기사가 검은 천에 둘둘 싸인 무언가를 거칠게 내던졌다.

    “왕자의 말은 이것부터 확인하고 듣도록 하지.”

    칼이 천에 둘러싸인 물체를 향해 까딱,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카이엔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처럼 위급한 상황에 저따위 물건이 대체 무엇이기에.

    울화가 치민 카이엔은 천에 둘러싸인 물체를 퍽 소리가 나도록 걷어찼다. 그의 발길질에 천이 흘러내리며 꽁꽁 감춰진 물체의 일부가 드러났다.

    둘둘 말린 검은 천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것은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카이엔의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제롬, 왕후께서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봐라.”

    제롬 또한 심상치 않은 것임을 눈치챘는지 떨리는 손길로 천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 뻣뻣하게 굳은 사지, 검은 천을 흥건하게 적신 피. 천에 싸인 물체의 정체는 카이엔의 짐작대로 사람의 시체였다. 고개를 숙여 사체의 얼굴을 확인한 제롬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콰투르입니다.”

    리카서스의 기사가 던진 시체는 검은 달의 일원인 콰투르였다. 그리고 콰투르는…….

    ―사막 거머리를 준비해 둬라.

    ―네. 콰투르에게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카이엔의 명으로 사막 거머리를 수급한 자였다.

    “이자가 재미있는 것을 가지고 있더군. 그래서 무엇인지 확인을 좀 해 봤는데…….”

    칼이 뒷말을 끌듯 멈추자, 리카서스의 기사가 콰투르의 가슴팍에 덮인 천을 걷어 냈다.

    그 또한 예상한 그대로였다. 콰투르의 가슴팍에는 마치 심장이 뜯겨 나간 듯 참혹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유진이 사용하는 풀멘의 흔적처럼, 혹은 사막 거머리에게 심장을 파먹힌 루안의 사체처럼.

    콰투르의 가슴에 남은 흔적을 확인한 카이엔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초조한 듯 혀로 마른 입술을 핥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유진, 그자의 짓입니까?”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저따위 소리를 내뱉는 카이엔이 우스운 듯, 칼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하지만 카이엔은 포기하지 않았다. 친위대마저 곁에 없는 지금, 왕후는 카이엔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런 카이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그 재미있는 것을 자네에게도 보여 줘야지.”

    품에서 목함을 꺼낸 칼이 그것의 뚜껑을 열고 카이엔을 향해 거칠게 휘둘렀다. 그러자 목함 속에 있던 모래가 공중에 흩날렸다.

    카이엔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두 개만 한 붉은 거머리가 그의 가슴팍 위에서 꾸물대고 있었다. 놀란 카이엔이 다급히 거머리를 떼어 내 마구 짓밟았다.

    조금 전 가슴팍에서 거머리가 꿈틀대던 촉감이 불쾌하고 끔찍해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제 발밑에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진 사막 거머리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허억, 헉헉―”

    이 넓은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카이엔이 내뱉는 거친 숨소리만이 유일했다.

    “…….”

    그 침묵 속에서 그는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이 구제할 길 없는 머저리 같은 짓이었음을 깨달았다.

    “왕자는 조금 전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나 보군. 나는 며칠 전에야 처음 본 물건이었는데 말이야.”

    칼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카이엔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그것은…….”

    당황한 카이엔이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몇 가지 변명이 빠르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으나, 칼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그 모든 것이 무용함을 알았다. 페렌트의 왕을 갈아치웠던 사내가 얼음처럼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거머리가 사람의 심장을 파먹는 서대륙의 마물이라지. 내 아들을 죽인 게 이계의 방문자가 아니라 카이엔, 너였나?”

    심장이 파먹힌 콰투르의 시체를 넘어 카이엔에게 가까이 다가온 칼이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카이엔을 보며 칼이 안타깝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게 흔적은 잘 치웠어야지.”

    칼의 비아냥에 모멸감을 느낀 카이엔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 순간, 칼이 카이엔의 멱살을 거칠게 낚아챘다. 카이엔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한 번 써먹었으면 그걸로 끝냈어야지. 그렇게 날 죽이고 싶었으면 좀 더 공을 들이던가.”

    칼의 짙은 남색 눈동자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제 속을 낱낱이 들킬 것만 같았다. 그것이 불쾌해 카이엔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찡그렸다가 불현듯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나라고 내 아우가 어찌 귀하지 않았겠나. 이 세상에 나와 피를 나눈 이라곤 그 아이 하나였는데. 그래서 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아우를 죽인 자들과.

    페르메 유리를 사이에 두고 리뮈르의 딸과 눈을 마주쳤던 그때가.

    자신만 말하지 않는다면 루안이 죽은 그날의 진실은 영원히 묻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루안이 죽은 그날의 진실을 자신만은 알고 있었으니까.

    ―거짓말! 그것도 당신이 꾸민 짓이 분명해! 달리오스를 이용해서 리뮈르를 함정에 빠뜨렸던 것처럼!

    리뮈르 계집의 그 말마저도 자신을 방심하게 하려는 수작질에 불과했던가.

    “심연의 눈…….”

    카이엔의 잇새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이번 대 리뮈르 대주의 딸이 그 눈을 가졌다더군. 그 덕에 나는 내 아들을 죽인 진범을 찾았고.”

    그 말을 하는 칼은 만족스럽다는 듯 옅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카이엔은 칼의 얼굴에서 아들을 잃은 비통함보다 자신을 속이려 한 자의 거짓을 밝혀낸 만족스러움을 먼저 읽었다.

    하긴, 칼은 그런 인간이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카이엔 자신과 닮은. 그런 인간에게 제 안위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죽은 루안이 왕후의 목숨보다 귀합니까? 지금 저와 함께 궁을 나가시면 모든 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대로는 왕후께서도 위험하십니다.”

    카이엔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칼에게 매달렸다. 지금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가 칼이라 해도 그가 아니고서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왕자의 효심이 이토록 깊은 줄은 미처 몰랐군.”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카이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이 물었다.

    “……왜 죽였나?”

    그것을 묻는 칼의 얼굴에 미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수면 아래 거대한 소용돌이를 숨긴 바다처럼 느껴졌다. 칼이 루안의 죽음 따위에 정말 분노라도 했단 말인가? 카이엔은 믿을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떠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루안의, 일은 오해이십니다. 루안이 그렇게 된 것은―”

    하지만 카이엔의 변명은 끝을 맺지 못했다. 칼이 카이엔의 멱살을 틀어쥔 채 벽에 처박은 탓이었다. 크헉, 목이 졸린 카이엔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내뱉었다.

    칼은 카이엔의 멱살을 쥔 그대로 서서히 그를 밀어 올렸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지자 카이엔의 얼굴은 벌겋다 못해 보라색으로 물들어 갔다. 물에 빠진 개미처럼 허우적대는 카이엔을 구경하듯 지켜보던 칼이 다시금 물었다.

    “널 낳아 준 그 여자를, 대체 왜 죽였나?”

    칼의 남색 눈동자가 마치 해일이 뒤덮은 밤바다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아, 역시 그쪽이 아니었군.’

    그 격렬한 분노에 카이엔은 제 상황마저 잊고 비웃듯이 물었다.

    “……제 어머니를 사랑하셨습니까?”

    자신이 묻고도 너무 어이가 없어 카이엔은 킥킥대며 웃었다.

    “당신 같은 사람도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었습니까?”

    카이엔의 조롱에 칼은 멱살을 틀어쥔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내 것이었으니까.”

    카이엔은 분노로 일렁이는 칼의 눈동자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내쉬는 숨 한 자락까지 전부 내 것이었으니까.”

    분노와 소유욕이 뒤섞여 한 덩어리가 된 칼의 눈동자를 보며 카이엔은 다시금 물었다.

    “그저 어머니가 필요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유약한 다그마르는 칼이 실권을 장악하기에 가장 적당한 왕족이었다. 그래서 다그마르를 선택한 줄 알았더니 그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던가? 카이엔의 물음에 칼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필요와 사랑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나? 내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내 것이어야 마땅한 것을.”

    카이엔은 필요해서 곁에 두려는 것인지, 곁에 두고 싶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칼의 마음을 마치 제 것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꼭 그러했으니까.

    역시 그와 자신은 한 틀에서 찍어 낸 영혼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카이엔만은 아닌 듯했다.

    “그건 왕자도 마찬가지일 테지. 필요한 것은 모두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이니.”

    칼이 품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카이엔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몸을 뒤틀었다.

    콰직, 칼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단검이 카이엔의 왼손을 뚫고 벽에 박혔다. 카이엔은 전신을 관통하는 극렬한 고통에 온몸을 경련하듯 떨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찢어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카이엔의 손에 박힌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 죽음은 이보다 좀 더 비참해야지. 네게 그런 죽음을 선사해 줄 사람은 따로 있으니.”

    그가 제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듯 천천히 검에서 손을 떼어 냈다. 카이엔을 뒤로한 채 문을 향해 걸어가던 남자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것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아, 별의 그릇이 자네에겐 뭐라 지껄였나. 설마 오래오래 천수를 누리고 살 거란 말을 하진 않았을 테고.”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벽에 걸린 카이엔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분노로 이를 꽉 악물었다. 그따위 예언이 이루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쩌면 머지않아 왕자와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천국에 갈 것 같진 않으니.”

    칼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몇 마디 더 지껄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제, 제롬, 어서 이것을…….”

    그의 부름에 서둘러 달려온 제롬이 카이엔의 손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손에서 시작된 고통이 팔을 타고 올라와 뇌까지 삼켜 버리는 것만 같았다. 카이엔은 바닥을 기며 지금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떠올렸다.

    “성, 상티모니아는 대체……. 왜, 아직도 연락이 없어!”

    교황의 군대가 지척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언제인데 아직도 꾸물거리는 건지. 그 교활한 호랑이가 아직도 무언가를 재고 있는 것이 뻔했다.

    별의 그릇으로도 부족하다면…….

    “제롬, 교황의 전령이 아직 궁에 있느냐.”

    그의 물음에 제롬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전해라.”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변할 줄 알았더라면, 교황의 전령이 그것을 요구했을 때 두말하지 않고 내어 줄 것을.

    “물에 빠진 생쥐를 성하의 품으로 돌려보내려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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