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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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탁탁탁, 다급한 발소리가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난잡하게 울려 퍼졌다. 왕궁의 친위대장 바랄 남작은 요란한 소리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 이어질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탓이었다.

    “무슨 일이― 레비에 후작님?”

    당연히 전령이나 시종일 줄 알았는데, 소식을 들고 나타난 이는 놀랍게도 카이엔의 오른팔인 레비에 후작이었다.

    “왜 사람을 시키시지 않고, 직접…….”

    레비에 후작은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땀에 흠뻑 젖은 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바랄 남작은 레비에 후작의 행색을 보며 점점 더 불안해졌다. 말조차 잇지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던 레비에 후작이 봉인된 서신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그와 동시에 겨우 호흡을 가다듬은 레비에 후작이 다급히 말을 쏟아 냈다.

    “바랄 남작, 리뮈르가 눈의 관문으로 내려오는 중이니 란드에서 이를 막으라는 전하의 명이다.”

    바랄 남작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어 제 손에 들린 카이엔의 칙서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카이엔의 필체와 인장이 확실한 칙서는 레비에 후작이 하는 것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리뮈르가 눈의 관문으로 내려오고 있다니요?”

    그는 손 안의 칙서가 구겨진 것도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물새 협곡으로 가야 할 리뮈르가 왜 왕궁으로 온단 말인가.’

    하지만 제법 노련한 장수인 바랄 남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침통한 듯 눈을 감은 바랄 남작이 이윽고 참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물새 협곡은 우리 시선을 잡아 두기 위한 가림막이었던 겁니까?”

    물새 협곡에 대규모의 본대를 주둔해 놓고, 정작 왕궁을 치는 것은 내내 잠잠했던 리뮈르라니. 바랄 남작이 허탈한 듯 중얼거리자 레비에 후작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난 건 아니네. 저들도 오늘 우리가 물새 협곡을 습격하는 건 모르고 있지 않나. 모리아 백작이 승리하여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이 전쟁의 승리자는 우리가 될 걸세.”

    “우리가 물새 협곡에서 이긴다면…….”

    레비에 후작의 말대로였다. 리뮈르의 행보를 자신들이 예측하지 못했듯, 오늘 물새 협곡의 습격 또한 적들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물새 협곡의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 자네가 란드에서 저들을 막아 주게.”

    레비에 후작의 비장한 요청에도 그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니, 레비에 후작님. 저는 전하의 친위대장입니다. 저는 최후의 순간까지 전하의 곁을 지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친위대장이란 최후의 순간이 닥쳤을 때, 왕의 대역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더러 곁을 비우라니. 바랄 남작은 아무리 카이엔의 명령이라도 이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답답하다는 듯 레비에 후작이 고함을 질렀다.

    “란드가 뚫리면 왕궁도 끝이네. 왜 그걸 몰라! 란드를 지키는 것이 곧 전하를 지키는 것 아닌가!”

    레비에 후작은 카이엔의 칙서를 낚아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카이엔의 필체는 막 글자를 배운 어린아이처럼 삐뚤빼뚤 엉망이었다. 바랄 남작은 오른손을 잃고 왼손으로 이것을 써야 했을 주인의 고통이 떠올라 눈을 돌리고 말았다. 레비에 후작은 그의 충정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바랄 남작, 정녕 전하의 뜻을 모르겠나? 지금 전하께서 믿을 사람은 자네뿐이네. 자네가 아니라면 누가 5천의 군사로 리뮈르를 막아 낼 수 있겠나.”

    지금 궁에 남은 병력은 케이루스 1만과 리카서스 5천에 불과했다. 그들 중 리뮈르를 막아 낼 만한 조직력을 갖춘 집단은 바랄 남작이 다스리는 친위대가 유일했다.

    “부디, 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말게나.”

    친위대는 왕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이자 왕이 직접 휘두르는 검. 바랄 남작은 카이엔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란드를 지켜 주게. 전하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켜 내겠네.”

    깊은 탄식과 함께 몸을 돌린 바랄 남작이 마침내 카이엔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숙였다. 휘하의 친위대와 방어 병력 일부까지 끌어모은 그가 내성을 막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낯선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궁 안을 배회하는 것이 바랄 남작의 눈에 띄었다. 레비에 후작가의 문장을 단 사병들이었다. 의아한 그의 시선을 눈치챈 듯 레비에 후작이 설명했다.

    “아, 부족한 힘이나마 도움이 될까 전하께 청해 입궁을 허가받은 자들이네. 레비에의 사병들이야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아 무슨 도움이 될까 싶네만.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전하께서 몸을 피할 시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테지.”

    궁내에 사병 출입을 허가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나빴던가. 레비에 후작의 침통한 표정에 바랄 남작은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럼 잘 가게나. 바랄 남작.”

    레비에 후작이 바랄 남작을 배웅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대로 말을 달려 내성을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성의 성문 앞에 다다른 그가 위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문을 열어라!”

    끼리리리릭, 터엉, 탕! 미리 연락을 받은 병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힌 외성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전군! 눈의 관문으로 향하라! 리뮈르의 관문이 열렸다!”

    왕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가 왕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외성 밖으로 발을 디딘 그 순간이었다.

    파아앗!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한 빛이 그들을 덮쳤다. 빛이 천천히 잦아들자 외성을 빼곡히 둘러싼 병사들이 보였다. 막 외성을 빠져나온 케이루스 병사들의 열 배는 됨직한 대군이었다.

    “대, 대장님…….”

    압도적인 적군 앞에 겁을 먹은 부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바랄 남작을 불렀다. 바랄 남작은 이를 악물고 적들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살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외성을 둘러싼 이들이 용병 차림이라는 것이었다. 난전이라면 모를까, 집단 전투에서는 아무래도 체계적인 조직력이 빛을 발하기 마련이었다.

    ‘이 정도 전력 차이라면 전하께서 몸을 피하실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겠지만.’

    바랄 남작은 허리춤에 달린 검을 빼 들었다. 스릉, 검집을 빠져나온 칼날에 적들이 든 횃불이 비쳤다.

    “돈에 눈이 먼 도적들이 왕도며, 케이루스의 땅을 헤집더니 그것도 모자라 왕성까지 넘보려 드는구나.”

    메르디에스에 고용된 용병들이 산발적으로 소동을 일으키더니 이런 속셈이 있었을 줄이야.

    “돈에 검을 판 무뢰배와 검에 명예를 싣는 자들의 수준 차이가 어떤 것인지 알려 주마.”

    그의 도발에도 성을 에워싼 용병들 사이에서는 흐트러진 숨소리조차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이건 마치…….’

    어떤 불길한 예감이 바랄 남작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켜야 할 주인이 뒤에 있는데 성을 떠나는 것은 주인을 버리기 위함인가, 주인이 내린 명이 그릇되었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모실 주인을 잘못 선택한 탓인가.”

    용병들이나 쓸 법한 맹수의 가죽을 뒤집어쓴 적군의 장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낮고 위압적인 장수의 목소리에 바랄 남작은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 성을 에워싼 적들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느꼈던 위화감이 점점 짙어졌다는 것이 옳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 또한 검에 명예를 싣는 자로서 이 싸움에 임하겠다.”

    펄럭, 적군의 장수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죽을 벗어 내림과 동시에 어디선가 깃발이 올라왔다.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 메르디에스의 문장이었다. 메르디에스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들 수 있는 자는 메르디에스 혈족을 수행하는 병사들이나, 메르디에스에 충성을 맹세하고 작위를 부여받은 가문의 기사들뿐이었다.

    바랄 남작은 메르디에스 깃발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맹수의 가죽을 벗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 단단한 몸과 위압적인 기도. 남자는 바랄 남작 또한 잘 아는 이였다. 아니, 페렌트에서 검을 든 자 중에 남자의 위명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커티스 리스벨…….”

    메르디에스 기사단장이자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이라 불리는 리스벨 백작가의 가주, 커티스 리스벨이었다.

    “커티스 리스벨이 왜 여기에…….”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케이루스 병사들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메르디에스 본대의 선봉장을 맡은 커티스는 지금쯤 물새 협곡을 기습한 케이루스 군사들과 대치 중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어째서 이곳에…….

    ‘왕도와 케이루스 영지 곳곳을 공격한 것이 용병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메르디에스가 고용한 수천, 수만의 용병들이 이합집산하며 어지러이 움직인 것은 모두 병력의 이동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수천, 수백으로 나뉜 남부 연합 병사들이 왕궁 지척에 도달하는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바랄 남작은 물새 협곡을 습격한 모리아 백작이 승리한다 한들 지는 싸움이 되리란 것을 깨달았다.

    “페렌트의 왕궁에 영광된 메르디에스의 깃발을 올려라.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살려 두지 마라.”

    낮고 싸늘한 커티스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외성을 둘러싼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러나지 마라! 물러나면 케이루스는 이대로 끝이다! 전군, 적을 물리쳐라!”

    케이루스 군의 지휘를 맡은 바랄 남작이 사력을 다해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이미 전의를 잃은 케이루스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다.

    “이건 개죽음이야. 내가 왜 케이루스를 위해 싸워야 해!”

    패배를 직감한 것은 바랄 남작만이 아니었다. 말단 병사들부터 앞다퉈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난, 난 애초부터 이런 싸움 따위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케이루스가 다스리는 땅에서 살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오히려 적진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메르디에스의 군사들이 노도처럼 외성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들을 막아선 몇몇 케이루스 병사들은 낙엽처럼 힘없이 흩어졌다.

    “이, 이대로 메르디에스를 들여보내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점은 높이 살 만하지만,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지휘관의 능력 부족이지.”

    커티스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로 자신을 가로막는 케이루스 병사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서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 때마다 커티스의 대검이 케이루스 병사들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의 압도적인 무력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물처럼 느껴졌다.

    태산을 마주한 것처럼, 해일에 휩쓸린 것처럼, 그 앞에 선 케이루스 병사들은 검조차 맞대지 못하고 쓸려 나갔다.

    ‘이, 이대로는……. 이렇게 죽을 목숨이라면!’

    바랄 남작은 마지막으로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티스가 끈질기게 달려드는 병사들을 처리하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그는 말을 몰아 달려갔다.

    뒤의 소란을 감지한 듯 커티스가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그가 말 등을 박차고 날아올라 검을 치켜든 상태였다.

    “내 마지막 길동무로 당신을 데려가야겠소!”

    사악! 종잇장을 가르는 것처럼 예리한 칼날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랄 남작은 그제야 커티스가 바라본 것이 자신이 아니라, 제 뒤에 있는 다른 남자였음을 알아차렸다.

    “……단장님, 무사하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바랄 남작의 목을 가른 것은 밀빛 머리카락을 가진 기사였다.

    “…….”

    커티스는 말없이 알버트를 바라보다 몸을 돌려 묵묵히 전투를 지휘했다.

    ―백작님, 이번 선봉에는 알버트가 포함되었으면 합니다. 없는 공을 만들어 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공을 세울 기회 정도는 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아리아드네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마음의 매듭을 풀지 못한 채 캐롤린이 죽어 버리자 알버트에게 가진 복잡한 마음 또한 저 아래로 묻어 버렸다. 기대와 배신감, 원망과 연민이 뒤범벅된 감정은 정리되지 못한 채 뒤죽박죽이 되어 집요하게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전장에 선 알버트를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찌꺼기처럼 남은 제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알버트의 재능을 사랑했다. 그가 뛰어난 기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캐롤린과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분노한 것은 소중한 딸아이의 평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끼던 어린 기사의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질 뻔했다는 두려움 또한 분명 존재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건 마찬가지인데, 난 대체 누구를 원망하고 있었던가.’

    커티스는 남은 원망을 검에 실어 털어 냈다. 바랄 남작이 자신을 노리도록 틈을 보인 것도, 그것을 처리할 기회를 알버트에게 미룬 것도, 머리로 무언가를 계산하고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능이 뛰어난 기사의 앞날을 열어 주려는 배려일 수도 있고, 딸아이가 사랑했던 연인을 밀어주고 싶은 부정(父情)일 수도 있었다.

    둘 중 무엇이면 어떠한가. 사랑이 죄도 아닐진대.

    “이, 이대로는…….”

    쉭쉭, 피가 끓는 듯한 거친 숨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말소리가 이어졌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피가 터진 목을 움켜쥔 바랄 남작이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인가.”

    커티스는 바랄 남작의 집념만은 높이 샀다.

    “나는 친, 친위―”

    친위대장은 왕을 지키는 마지막 사람이어야 했다. 바랄 남작은 휘청이다가 다시금 다리가 꺾여 바닥을 굴렀다. 아래에서 본 전장의 모습은 더욱 엉망이었다.

    케이루스는 속절없이 밀렸다. 이대로면 외성을 저지하는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는 데도 수분의 시간밖에는 걸리지 않을 듯했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바랄 남작은 교묘하게 설계된 체스판 위에서 조종당한 것처럼 움직인 기분이었다. 울컥 피를 토한 그가 커티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나.”

    “그렇다. 오늘 야습을 계획한 것은 케이루스가 아닌 메르디에스이다.”

    커티스의 담담한 인정에 바랄 남작은 비틀거리다 다시 흙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자신이 쏟아 낸 피가 머리카락에 엉겨 붙었다.

    “그, 렇다면, 물새 협곡을 공격하는 메르디에스 병력이 줄어든 것도 모두…….”

    “왕궁에 틀어박힌 케이루스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바랄 남작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적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물새 협곡에 주둔하는 메르디에스 병력이 눈에 띄게 줄자 그들은 잎새 평원을 공격한 케이루스의 전략이 먹힌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것이 왕도에 남은 병사들을 물새 협곡으로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었다니. 그것도 모르고 왕궁을 수비하는 병력마저 줄여 가며 물새 협곡을 친 것이 카이엔의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적진을 공격하자고 본진을 비워서는 안 된다. 그 당연한 원칙조차 잊고 상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진 것은 모든 것이 제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믿은 오만함 때문이었다.

    “바랄 남작을 친 것은 네 칼이니, 마지막도 네가 정리해라.”

    커티스의 명령에 알버트가 바랄 남작의 마지막 목숨줄을 끊었다.

    지휘관마저 잃은 케이루스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바랄 남작과 친위대를 중심으로 한 케이루스 병력이 외성 밖으로 나온 지 불과 두어 시간 만의 일이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어리석은지.”

    언덕 위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초조함에 눈앞이 흐려져 어리석은 판단을 한 카이엔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저 사랑에 취해 아무것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었던 언젠가의 자신이.

    “이젠 정말 끝내야지. 이 질긴 악연을.”

    아리아드네가 깊게 숨을 내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과거의 약혼자도, 끈적끈적한 아교처럼 들러붙는 과거의 자신도, 이젠 정말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메르디에스 공녀.”

    그때, 어둠 속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두운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가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아니, 이젠 페렌트의 국왕이라 불러 드려야 하나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아그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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