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48)

* * *

케이루스-리카서스 연합이 물새 협곡에 자리한 메르디에스 본대를 총공격하기로 한 그믐날이 되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자들이 물새 협곡의 메르디에스 진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메르디에스 진영의 불이 유난히도 밝았다.

“진짜 돈으로 바를 수 있는 만큼 처발랐구만.”

케이루스 병사들이 호화스러운 메르디에스 진영의 모습에 배알이 꼴려 빈정거렸다.

메르디에스 진영은 병영의 막사조차 화려한 수로 뒤덮여 있었고, 등잔의 기름조차 아끼지 않고 태우는 통에 막사 안이 대낮처럼 밝았다. 그렇게 태운 불에 막사 안이 훤히 비쳐 메르디에스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게임을 하거나 늘어지게 잠을 자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의 전투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알겠나?”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의 말에 잔뜩 긴장한 병사들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야습의 지휘를 맡은 것은 케이루스의 충실한 가신인 모리아 백작이었다.

모리아 백작가는 케이루스가 아르체의 신관이었을 때부터 그들을 모셔 온 가문이었다. 검은 달을 지휘하는 제롬이 케이루스를 위해 음지에서 움직이는 자라면, 모리아 백작은 케이루스를 양지에서 보필하는 자였다.

‘반드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우리의 낙원으로 돌아가는 디딤돌이 되리라.’

그리고 그는 아직도 지상 낙원 아르체를 포기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케이루스의 영광을 가장 바라는 인사였으므로, 그는 오로지 케이루스의 승리만을 향해 달렸다.

‘반드시 승리하여 돌아가겠습니다.’

다시금 승리를 다짐한 모리아 백작이 신중한 눈빛으로 메르디에스 진영을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메르디에스 진영의 정예병들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그들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현재 메르디에스 진영의 병력은 평소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케이루스가 펼친 양동 작전에 꼼짝없이 걸려든 결과였다.

잎새 평원을 향한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자 메르디에스는 물새 협곡의 병력 일부를 잎새 평원으로 돌렸다. 당연한 결정이었다. 적진을 공격하자고 본진을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저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케이루스가 이번 습격에 사활을 걸었다는 점이었다.

서로의 전력이 뻔한 상태에서 케이루스가 잎새 평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메르디에스 측에서는 물새 협곡에서 얼마간 병력을 빼더라도 아무 문제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조금만 버티면 리뮈르 군사들이 합류할 테니까.

하지만 케이루스는 메르디에스가 병력을 줄인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리뮈르가 도착하기 전에 물새 협곡에 진을 친 메르디에스를 완전히 괴멸해야 했다.

카이엔은 그것을 위해서 왕도의 병력을 빼는 결단마저 감행했다. 위험한 결정이었지만 오늘 습격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대담한 전략이었다.

케이루스와 리카서스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긴 채로 물새 협곡에 모든 여력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병력은 자그마치 6만에 달했다. 물새 협곡에 남은 메르디에스 병력의 3배였다. 훨씬 적은 숫자로도 비등하게 치렀던 이전 전투를 생각하면 절대 질 리가 없었다.

‘오늘의 승리가 케이루스의 승리를 견인할 것이며, 케이루스의 수장이 페렌트의 가장 영광된 왕이 되리라.’

그렇게 되뇌는 모리아 백작의 눈에서 단호한 결의가 가득 흘러넘쳤다.

“앞서 말한 대로 커티스 리스벨부터 잡는다.”

물새 협곡을 지휘하고 있는 장수는 당연히 커티스 리스벨이었다. 커티스만 무너트린다면 승기를 단숨에 잡을 수 있었다.

“지금이다!”

모리아 백작의 수신호를 시작으로 어둠 속으로 녹아든 케이루스의 병사들이 메르디에스 진영에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가장 먼저 메르디에스 진영에 도착한 기사가 지휘관의 막사를 지키고 선 병사의 목을 가르기 위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검에는 빛이 반사되어 적의 눈에 띄는 것을 막기 위한 먹이 칠해져 있었다.

뎅그랑― 순식간에 잘려 나간 병사의 투구가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텅 빈 투구가.

“비, 비었습니다.”

자신이 자른 것이 사람의 목이 아니라 빈 갑옷임을 알게 된 기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막사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막사를 뒤지던 병사들도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럴 리가…….”

모리아 백작은 병사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저렇듯 환한 등불 아래 꺼떡꺼떡 움직이는 메르디에스 병사들이…….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후미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모리아 백작이 가까이 있는 아무 막사로 뛰어들었다. 펄럭, 천을 들추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짚단으로 만든 인형과 고가의 미술품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백작님, 메르디에스 진영이 통째로 비었습니다.”

그들이 사활을 걸고 습격한 메르디에스 병영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그들이 전부였다.

“이럴, 이럴 수는 없어.”

모리아 백작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다 문득 든 어떤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커티스가 지휘하는 메르디에스 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 *

그 시각, 페렌트의 왕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외성 밖 언덕에서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이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곧게 뻗은 우아한 손가락이 머리끝까지 쓰고 있던 로브를 천천히 내렸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리아드네가 왕궁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왕궁이 마치 제 손아귀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졌다.

아직도 가끔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손에 잡힐 듯한데, 오직 캐롤린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안녕, 나의 왕.

밤바다의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제비꽃처럼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눈에 잡힐 듯 이리도 선한데.

[리아, 우리 공주님. 네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때에도 캐롤린만은 곁에 있었는데.

―리아, 나, 네가 다, 스리는 페렌트가 보고 싶었어……. 네가, 다스리는 나라라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살, 아도 좋을 것 같았어.

지금 이 세상에는 캐롤린만이 없어서.

“……캐롤린, 오늘이야.”

아리아드네가 듣지 못할 이에게 말을 걸자, 서늘한 손바닥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이런 얼굴 하지 마.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날이잖아.”

경계를 서던 케이루스 기사들을 간단히 해치우고 돌아온 유진이 아리아드네 귓가에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아리아드네는 제 눈을 가린 유진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치며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내가 어떤 얼굴이길래?”

“……울 것 같은 얼굴.”

작게 웃음을 터트린 아리아드네가 제 눈을 덮은 그의 손을 끌어 내리며 그와 마주 보고 섰다.

“걱정 마. 안 울어.”

눈물을 흘리기엔 아직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가 이마를 맞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얼굴을 할 거라면 차라리 울었으면 좋겠어.”

이번에는 어떤 얼굴이냐고 묻지 못했다. 그것을 묻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아리아드네의 입술을 덮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감겨든 그의 혀가 입 안 곳곳을 위로하듯 쓸어내렸다. 상처를 핥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서로의 숨과 혀가 엉기며 슬픔과 서러움이 잠시나마 녹아내렸다.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조금 전 그가 말한 ‘이런 얼굴’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순간을 그리워하고, 슬퍼하지만, 끝내 체념하고 만 얼굴.

아리아드네는 그의 슬픔을 모두 받아 낼 듯이 더 깊이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그의 서러움과 외로움들이 더운 숨과 함께 밀려들었다.

아마도 우리는 평생 메울 수 없는 상실을 안고 살아가겠지. 우리가 지키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하며.

그의 존재가 제 안에서 더 커지는 날이 온다 해도, 제가 아무리 그를 위로한다고 해도 잃은 것들을 대신할 순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잃어버린 것들을 대신할 순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 줄 순 있었다.

“내가 당신 곁에 있을게. 그러니까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 줘.”

“당신이 원한다면.”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은 그가 그녀의 손등에 천천히 제 입술을 내렸다. 새까만 그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손등을 간질였다.

“날 지켜봐 줘. 내가 어디까지 해내는지.”

“그것 역시 당신이 원하는 대로.”

고개를 든 그가 아리아드네를 뒤에서 감싼 채로 페렌트의 왕궁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둠 속에 잠겼던 페렌트의 왕궁이 갑자기 대낮처럼 불을 밝혔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만큼 왕궁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쿵쿵, 쿵쿵쿵!

그믐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굳게 닫힌 내성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어림잡아 수천은 족히 넘는 병력이 왕궁의 내성을 지나 외성을 향해 달렸다.

“이 밤에 어디를 가는 걸까.”

“그곳이 어디든―”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어내리던 유진이 뒷말을 속삭였다.

“죽을 자리가 되겠지.”

외성의 문 앞에 다다른 병사가 위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문을 열어라!”

끼리리리릭, 터엉, 탕! 어두운 밤 적막을 깨트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르래가 돌아가며 외성의 문이 열렸다.

“전군! 눈의 관문으로 향하라! 리뮈르의 관문이 열렸다!”

성문을 막 빠져나온 왕궁의 병사들이 외성 밖으로 발을 디딘 그 순간이었다.

파아앗!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한 빛이 그들을 덮쳤다.

* * *

카이엔은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믐날이기도 했고, 오늘따라 몸 상태도 썩 괜찮은 까닭이었다. 그 때문에 그가 지내는 주각궁의 분위기 또한 오랜만에 부드럽게 풀렸다.

주각궁을 걷던 레비에 후작이 말없이 걸음을 멈춘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비에 후작은 궁인들의 표정을 보며 카이엔의 상태를 짐작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생각을 마친 레비에 후작이 카이엔의 처소 앞에서 표정을 갈무리한 뒤 제 도착을 알렸다.

“아, 레비에. 어서 오게.”

카이엔이 웃는 얼굴로 그를 반겼다.

“전하, 오늘은 날이 아주 좋은 듯합니다.”

자리에 앉은 레비에 후작의 말에 카이엔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선 카이엔이 고요한 어둠에 잠긴 왕궁을 내려다보았다. 케이루스의 가장 참된 신하 중 하나인 모리아 백작이 왕도의 지원군을 이끌고 물새 협곡으로 떠난 지도 오늘로 닷새째였다.

그믐인 오늘 밤, 모리아 백작이 합세한 케이루스가 물새 협곡의 메르디에스 본대를 괴멸할 예정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카이엔은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종일 미친 사람처럼 실실거렸다.

“오늘이 지나면 페렌트가 전하의 수중에 떨어질 것입니다.”

레비에 후작의 아첨에 기분이 좋아진 카이엔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만 되면 내 후작을 공작으로 올려 주지. 레비에는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

카이엔이 남은 한 손으로 레비에 후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에 레비에 후작은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깊게 숙이며 답했다.

“부족한 신에게는 분수에 넘치는 자리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카이엔의 한쪽 눈썹이 치켜들렸다.

‘저치가 저런 인사던가?’

오로지 제 가문의 권세를 위해 케이루스의 오른팔이 되기를 자처한 자였다. 야망이나 욕망을 줄줄 흘리고 다니지는 않아도 굳이 숨기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카이엔이 어딘가 미심쩍다는 듯 레비에 후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부러 상냥한 어조를 꾸며 냈다.

“내 앞에서까지 겸양을 차릴 필욘 없네. 자네가 무엇을 바라는지 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고개를 든 레비에 후작이 유순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이 바라는 것은 전하와 케이루스가 페렌트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전하께서 이루신 것인데 제 공을 바라는 것이 과욕처럼 느껴졌을 뿐입니다.”

기름이라도 칠한 듯 매끄러운 아첨은 언제나 카이엔의 귀를 즐겁게 하였다. 잠시 불씨를 피웠던 의심은 물에 닿은 소금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자네의 충성이야 내 익히 아는 바이니―”

그때였다.

“전하!”

카이엔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검은 달의 수장 제롬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수하의 수선에 불쾌해진 카이엔이 낯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호들갑이냐.”

“저, 그것이…….”

방 안에 자리한 레비에를 힐끗 본 제롬이 머뭇거리며 뒷말을 주저했다. 레비에 후작이 있는 데서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인 듯했지만, 그의 아첨에 몹시 흡족했던 카이엔은 개의치 않았다.

“말하라.”

“그것이, 눈의 관문이 뚫렸다고 합니다.”

보고를 마친 제롬이 두렵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푹 처박았다.

왕도로 통하는 관문은 모두 다섯 개였다. 케이루스가 지키는 하늘 관문과 리카서스가 지키는 서쪽 관문, 메르디에스와 통하는 남쪽 관문과 소르체의 동쪽 관문, 리뮈르로 연결되는 눈의 관문이 그것이었다.

다른 관문은 모두 방향을 딴 이름으로 불렸으나, 북을 둘로 나누는 케이루스와 리뮈르의 관문만큼은 이름을 달리했다.

그런 다섯 개의 관문 중 유명무실해진 것이 둘 있었으니, 리뮈르의 눈의 관문과 소르체의 동쪽 관문이 그것이었다.

소르체는 200년 전, 모종의 이유로 영지에 틀어박히더니 동쪽 관문마저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온갖 나무와 풀들을 심어 버렸다. 그들이 틀어박힌 세월만큼 무성하게 자란 숲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리고 눈의 관문 또한 리뮈르의 의도적인 방치 아래 관문의 역할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차츰 통행량이 줄자 리뮈르는 마물을 이유로 눈의 관문을 아예 막아 버렸고, 리뮈르로 가는 사람들은 관문이 아니라 에움 산맥을 넘어가야 했다.

메르디에스가 소르체나 리뮈르와 함께하면서도 눈의 관문이나 동쪽 관문이 아닌 물새 협곡을 통해 왕도로 진입하려 했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의 관문이 뚫렸다니.

더구나 리뮈르는 겨우내 디움을 넘어오는 마물들과 싸워야 해서 눈의 관문을 다시 열 여유 따윈 없었을 텐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리뮈르는, 물새 협곡으로 이동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카이엔이 받은 보고에 따르면 리뮈르가 물새 협곡에 도착하는 것은 일주일 뒤의 일.

그때면 이미 모리아 백작이 합류한 케이루스가 메르디에스 본대를 철저하게 괴멸하고 철수했을 시간이었다. 리뮈르는 그렇게 남부 연합군의 시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물새 협곡에 도착해야 했다.

메르디에스 본대의 병력 대부분을 잃은 이상, 리뮈르가 왕도까지 밀고 내려올 일은 없었다. 그들은 아무 소득 없이 리뮈르의 땅으로 돌아갈 테고, 케이루스와 리카서스는 잎새 평원에 자리한 메르디에스 잔병들을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카이엔은 제 손에 떨어진 페렌트를 만끽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물새 협곡으로 이동 중이라던 리뮈르가 대체 왜…….

카이엔이 탁자를 짚으려다 손이 미끄러져 휘청댔다. 제롬이 서둘러 달려와 카이엔을 부축했다.

“전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어서 눈의 관문으로 병사를 보내셔야 합니다.”

레비에 후작이 초조한 목소리로 카이엔을 다그치듯 말했다.

“리뮈르가 왕도로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잎새 평원의 메르디에스 군사들과 협공하여 우리가 왕도에 갇히는 형국이 될지도 모릅니다.”

퍼뜩 고개를 든 카이엔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는 레비에의 말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거부하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눈의 관문은 오래도록 통행이 끊겨 대규모 병력이 다닐 만한 길이 아니다. 아무리 리뮈르라 한들 눈의 관문을 통해서 왕도를 접수하는 건 불가능해!”

그래, 어차피 리뮈르가 눈의 관문으로 내려온다 해도 오래도록 방치된 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카이엔은 그것이 어떤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보통 때라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왕도는―”

레비에 후작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토해 내듯 말을 이었다.

“빈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카이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문제이지 않나! 지금 왕도는 빈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또 병력을 내보내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들킨 카이엔은 거침없이 제 속내를 까발렸다.

“왕도는, 나는! 대체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물새 협곡으로 대부분의 병력을 보낸 탓에 왕도를 지키는 병력이 심히 부족했다. 현재 왕궁을 지키는 병력은 케이루스 1만과 리카서스 5천에 불과했다.

이것도 수성(守城)을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그런데 여기서 또 병사들을 내보내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이대로 왕도를 수성해야 해. 기다리면 물새 협곡으로 떠났던 모리아 백작이 승리하여 돌아올 걸세. 그럼 그때 왕도 안팎의 병력이 협공하여 리뮈르를 물리치면 돼.”

카이엔은 가장 희망적인 상황만을 상상하며 눈앞의 위기를 회피하려 했다.

“리뮈르가 눈의 관문을 뚫고 내려오는 것이 독단적인 행동일 리 없습니다.”

그런 카이엔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삼킨 레비에 후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우리가 물새 협곡의 습격을 계획했듯이 저들은 리뮈르와 잎새 평원의 메르디에스가 합심하여 왕도를 협공할 생각이었던 겁니다.”

하, 답답한 듯 얼굴을 쓸어내린 카이엔이 맥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잎새 평원으로 대거 병력을 옮긴 것도 그것 때문이었던가…….”

카이엔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축 늘어졌다.

“전하, 아직 승부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시기에는 이릅니다.”

레비에 후작이 바짝 다가와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리아의 싸움에 우리의 승리가 달려 있습니다. 모리아가 승리할 동안 우리는 왕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둘 중 어느 것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레비에 후작이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왕도를 잃는다면, 물새 협곡에서 승리한다 한들 모리아는 결국 패전한 장수가 될 겁니다.”

충신의 간언(諫言)이 카이엔의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그래서, 대체 어찌하잔 말이냐.”

“모리아가 승리할 동안 리뮈르를 막아 내야 합니다.”

그때, 마치 부싯돌을 부딪친 것처럼 카이엔의 머릿속이 밝아졌다.

“……란드.”

카이엔의 중얼거림에 레비에 후작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희망의 불씨는 거대한 불이 되어 카이엔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희망과 확신으로 가득 찬 카이엔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눈의 관문을 통해 내려온다면 란드를 반드시 지날 테지. 란드에서라면 저들을 막아 낼 수 있어.”

란드는 눈의 관문이 막히며 마찬가지로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역이었지만,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천혜의 요새라 할 만한 곳이었다. 레비에 후작이 바로 그것이라는 듯 카이엔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란드에 리뮈르가 발이 묶인 동안 모리아 백작은 승리하여 돌아올 겁니다.”

“대체 누구를 보내야 한단 말인가.”

하나가 해결되니 또 다른 것이 문제였다. 카이엔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곁눈질로 카이엔을 살피던 레비에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작게 달싹이던 레비에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지금 우리에게 란드를 지킬 장수라면 한 사람뿐입니다.”

레비에는 장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카이엔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바랄은 안 돼. 그가 없다면 누가 나를 지키나!”

카이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모리아가 자리를 비운 지금, 카이엔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곤 친위대장인 바랄 정도였다. 하지만 레비에는 포기하지 않고 카이엔의 발치에 매달렸다.

“전하, 바랄 남작만이 리뮈르를 막아 낼 수 있습니다. 란드를 지켜야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란드를 지키는 것은 전하를 지키는 일입니다. 부디…….”

엎드려 읍소하는 레비에의 꼴을 보자니 카이엔의 마음 또한 초조해졌다. 하지만 바랄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카이엔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으려 고개를 외로 튼 순간이었다.

“전하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내내 조용히 카이엔의 곁에 서 있던 제롬이 그의 발치에 엎드렸다.

“네가 말이냐?”

카이엔은 제롬의 머리채를 잡아 그의 고개를 젖혔다.

제롬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페루스를 모시는 신관처럼, 케이루스를 모시는 검은 달처럼, 신을 경애하는 인간처럼 맹목적인 눈이었다. 카이엔에게 머리를 잡힌 채로 제롬은 다시 한번 제 각오를 말했다.

“전하께서 바라시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날까지 제가 반드시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이번 수장은 그럭저럭 쓸 만하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카이엔이 제롬의 머리채를 놓아주며 중얼거렸다. 자리에 앉은 카이엔이 펜을 들어 몇 자 적더니 인장을 찍은 뒤 레비에 후작에게 건넸다.

“바랄에게 5천의 병력을 주어 란드에서 리뮈르를 상대하게 하라.”

눈의 관문을 통과한 리뮈르의 군사가 얼마인지는 모르나 막 겨울이 끝난 리뮈르였다. 움직일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이쪽이 선택한 전장은 란드였다. 지나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만이라면 저들의 1/10이라 해도 충분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칙서를 손에 든 레비에 후작이 다급하게 카이엔의 방을 빠져나갔다. 레비에가 사라지자 방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바랄을 보내는 것이 맞겠지.’

속살거리던 레비에가 사라지고 홀로 남자 카이엔은 다시금 초조해졌다.

‘아니, 이게 맞아. 리뮈르가 이곳에 당도하면 그때는 끝이야.’

탁탁탁, 의자의 팔걸이를 두들기는 카이엔의 손가락이 갈수록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그러다 혹시 바랄이 막아 내지 못하기라도 하면…….’

카이엔은 제 속을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마지막에 이기는 건 나야. 페렌트의 왕위는, 홀로 우뚝 선 왕이 되어 케이루스의 영광을 실현하는 건 나여야 해!’

그는 초조하게 되뇌었으나 마음속 불안함은 가시질 않았다. 달조차 뜨지 않는 밤이 유난히도 길고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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