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48)
  • * * *

    “……제롬, 제롬!”

    1왕자 카이엔이 다급한 목소리로 제롬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죽은 제프리의 뒤를 이어 새로이 검은 달의 수장이 된 제롬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진통, 제가…… 진통제가 떨어졌지 않느냐!”

    까랑! 카이엔이 집어 던진 주석 잔이 제롬의 어깨를 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가져오겠습니다.”

    카이엔의 분노를 온몸으로 얻어맞은 제롬은 잰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카이엔은 어둠 속에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에 신음했다. 포로 송환을 위해 제법 먼 거리를 이동한 후유증이었다. 내장이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가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그는 혼몽한 정신으로 제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서쪽 관문 전투에서 메르디에스 공작이 왕후와 나눴다는 이야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혹 아리아드네가 루안의 죽음과 관련된 어떤 단서를 얻은 것은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니지.’

    ―거짓말, 그것도 당신이 꾸민 짓이 분명해! 달리오스를 이용해서 리뮈르를 함정에 빠뜨렸던 것처럼!

    어떤 증거가 있다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었다. 리뮈르 공녀의 그 말은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는 자백과도 다르지 않았다.

    루안이 죽은 그날의 진실을 아는 것은 자신과 죽은 제프리뿐.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터엉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거세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병력 1만을 되찾은 대가가 꽤 혹독하군그래.”

    왕후 칼이었다.

    “…….”

    카이엔은 가물거리는 눈을 간신히 떠 칼의 표정을 확인했다.

    “전하, 진통제입니다.”

    뒤늦게 나타난 제롬이 카이엔에게 잔에 담긴 진통제를 바쳤다. 카이엔은 잔에 가득 담긴 진통제를 그대로 들이켰다.

    “저런, 그렇게 남용하면 안 되는 약일 텐데.”

    칼이 혀끝을 차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겨우 정신이 든 카이엔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카이엔 자신이었다. 약이 점점 듣지 않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작은 잔으로 충분했는데, 지금은 큰 잔으로 가득 먹어도 효과는 그 순간뿐이었다. 날마다 먹어야 하는 양이 늘어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이 약조차 듣지 않는 순간이 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에서 이겨야 했다. 모든 것을 갖게 되면 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흐음,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카이엔을 내려다보던 칼이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왕자가 그렇게 말했다지. 내 아우를 죽인 자들과 싸우는 중이라고. 왕자가 내 아들을 위해 싸우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

    느릿하고 담담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 속에 숨긴 칼날까지 무딘 것은 아니었다. 카이엔은 얇은 얼음 위를 디디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할 말을 골랐다.

    “루안은 왕후의 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루안의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케이루스 왕가의 것입니다. 저는 왕가를 향해 칼을 들이미는 것만큼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칼의 눈동자가 카이엔을 살피는 것처럼 가늘어지더니 이내 픽, 비웃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하긴, 왕자는 그런 사람이지. 왕족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깊은 바다처럼 짙은 남색 눈동자가 카이엔을 응시했다. 순간 카이엔은 왕후의 손에 끌려가 그대로 바다 깊이 잠길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지. 이 나라에서 감히 왕족을 죽인 자들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되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왕후의 얼굴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전, 자신을 바다로 끌고 들어갈 것 같다고 느낀 건 제 착각이었나? 카이엔은 가쁜 숨을 내쉬며 칼의 얼굴을 살폈다.

    “내 아들의 심장에 구멍을 낸 자를 잡아다 산 채로 그 심장을 뜯어내 까마귀 밥으로 던져 줘야지. 그렇지 않은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상황이 그리 좋지 않네.”

    케이루스와 리카서스의 영지에서, 심지어는 왕도 내에서까지 산발적인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메르디에스와 계약한 용병단이 벌이는 짓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공격에 왕도를 지키는 병사들은 점점 지쳐 갔다.

    “가라앉는 배에서 탈주하겠다는 쥐를 무슨 수로 막겠나.”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탈하는 병사들이었다. 메르디에스에 사로잡혔다 귀환한 포로들은 양 진영의 차이를 몸으로 실감했다. 보급품의 질, 병사들의 사기, 조직력 등 모든 면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전쟁의 승기를 잡은 것은 누가 봐도 메르디에스였다. 낮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직급이 낮은 병사들부터 목숨을 걸고 병영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전쟁에서 메르디에스가 이겼으면 좋겠어. 메르디에스가 이기고 있어서가 아니야. 아무래도 메르디에스가 다스리는 땅이 더 살 만할 것 같아.’

    이 싸움의 결과로 페렌트의 왕이 결정된다. 누가 왕이 되어야 더욱 배불리 먹고살 수 있을까. 그것을 깨닫자 병사가 아닌 영지민들 중에도 영지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대로는 자네나 나나 가라앉는 배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생겼어.”

    “…….”

    “방법이 있나? 이대로 성을 지키기만 해서는 곤란하네.”

    칼이 채근하듯 물었다. 확실히 그들에겐 고착된 상황을 타개할 돌파구가 필요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이 성사되었습니다.”

    카이엔은 칼에게 지금 이것을 말해도 좋을지 잠시 고민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전에 말했던 것이라면…….”

    무언가가 떠오른 듯 칼의 눈동자가 가늘게 접혔다. 긍정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이엔이 말했다.

    “교황이 원군을 이끌고 페렌트 국경으로 오는 중입니다.”

    “성 상티모니아의 마녀가 말인가?”

    칼은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왕자의 수완이 내 생각 이상이었군.”

    교황 아그네스가 피의 마녀라 불리는 것은 그녀가 이끄는 성 상티모니아의 전력이 무시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황이 케이루스에 가세한다면 이탈하는 민심을 붙잡아 둘 수 있었다.

    “교황의 원군과 물새 협곡의 승리만 우리 것이 된다면 전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두 세력이 가장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곳에서 승리한다면 전체 싸움에서 지지는 않으리란 계산이었다.

    “물새 협곡의 메르디에스 본대를 물리치기만 한다면 저쪽도 타격이 작지 않을 테지.”

    “패배는 반드시 분열을 일으키지요.”

    남부 귀족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이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만 돌아서도 내부는 와르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이길 수 있겠나?”

    “반드시 이길 겁니다.”

    카이엔의 눈동자가 집념과 분노로 이글거렸다. 물러설 곳이 없는 것은 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나도 이번 전투에 모든 것을 걸어 보지.”

    카이엔과 칼은 물새 협곡을 기습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으고, 전략과 병력 배치 등을 상의했다.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칼의 의견에 카이엔도 동의했다.

    그리하여 케이루스와 리카서스는 다가오는 그믐밤, 물새 협곡에 자리한 메르디에스 본대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둘의 이야기는 하룻밤을 꼬박 새운 다음에야 끝이 났다.

    “벌써 날이 밝았군.”

    창가로 다가간 칼이 커튼을 걷어 밖을 바라보았다. 새벽의 푸른 빛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케이루스의 성물이 하는 예언 말일세. 어쩌면 말이야. 제 죽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축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해 봤나?”

    푸른 빛에 잠긴 칼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가장 깊은 바다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끝을 알면 사는 것이 덜 지루할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

    칼은 그따위 시답잖은 소리를 하더니 카이엔의 방을 떠났다. 떠나는 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이엔이 중얼거렸다.

    “왕후도 죽을 때가 다 됐나 보군.”

    언제나 태산처럼 무겁게 그를 짓누르던 사내가 오늘따라 유독 초라해 보였다.

    “제롬, 아그네스 교황에게 이것을 전해라.”

    종이를 끌어다 몇 자 쓴 카이엔이 서신을 봉해 제롬에게 건넸다. 왕후에게는 교황이 페렌트로 오는 중이라고 말해 뒀지만 아그네스는 벌써 페렌트 경계에 도착해 있었다.

    성 상티모니아가 어떤 자들인가. 성물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성물 중 신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것이 바로 별의 그릇이었다.

    ‘그것을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지.’

    카이엔이 교황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끼로 내건 것은 바로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이었다. 별의 그릇을 정말 넘길 생각은 아니었다.

    페렌트의 왕위만 차지한다면 성 상티모니아 따위는 제 상대가 아니었다. 그때는 페렌트의 국력을 앞세워 상대를 눌러 버리면 그만이었다.

    “아, 그리고…….”

    카이엔이 물러나려는 제롬을 붙잡았다.

    ―내 아들의 심장에 구멍을 낸 자를 잡아다 산 채로 그 심장을 뜯어내 까마귀 밥으로 던져 줘야지. 그렇지 않은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을 계속 품에 안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메르디에스와의 전투가 끝나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인물이기도 하고.

    “사막 거머리를 준비해 둬라.”

    리카서스까지 일시에 쓸어버리는 것은 어려울 테니 이 정도 대비는 해 두는 게 좋겠지.

    “네. 콰투르에게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제롬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서두르도록.”

    “네, 명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제롬의 어깨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카이엔이 던진 주석 잔에 맞은 상처였다.

    제롬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제 핏자국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이 마치 죽은 형의 얼굴 같았다.

    * * *

    “빨리빨리 정리해. 해가 떠 있을 때 출발해야 하니까.”

    짐을 정리하는 병사들이 소리 높여 서로를 재촉했다. 각지에서 몰려든 용병들과 떠날 준비를 하는 병사들이 뒤섞인 병영은 시장통이나 다름없었다. 유진이 바쁘게 돌아가는 병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동안 썰렁하겠군.”

    “뭐, 당분간 이곳에선 큰 전투도 없을 테고. 스타드 백작의 지원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잎새 평원에서 케이루스-리카서스 연합과 대치 중인 스타드 백작에게서 지원 요청이 도착했다. 수성만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여겼는지, 케이루스-리카서스 연합은 남부로 통하는 길목인 잎새 평원을 집요하게 노리기 시작했다.

    높고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북부에 비해 평야와 들판이 대부분인 남부는 수성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지형이었다. 남부로 향하는 길목인 잎새 평원만큼은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다.

    잎새 평원이 뚫리면 적군이 남부 연합의 중추 세력인 스타드 백작의 영지에 도달한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남부 연합은 전 전선의 병력을 급히 잎새 평원으로 이동시켰다. 물새 협곡도 예외는 아니었다. 후방과 전방 모두, 잎새 평원에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전방의 병력 중 5천이 벌써 나흘 전 물새 협곡을 떠났다. 어쩔 수 없는 공백이 생겼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보름만 기다리면 겨울의 전사들이 이 땅에 도착할 테니까.”

    날이 풀리면서 디움의 마물들이 수그러든 틈을 타 리뮈르가 병력을 움직였다. 단 보름만 버티면, 페렌트 최강의 전력이 물새 협곡에 당도한다.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겠군.”

    그러면 이 지루한 싸움도 끝이었다.

    “정말 끝이 오긴 오는구나.”

    아리아드네가 썰렁해진 병영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유진이 생각에 잠긴 아리아드네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저기.”

    유진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용병들 틈바구니에 끼어 아리아드네를 힐긋대는 리카르도가 보였다.

    “리카르도 경? 벌써 떠나신 줄 알았는데요. 제게 할 말이라도?”

    병력을 이끌고 떠나는 사람 중에는 성기사단 부단장인 리카르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게 할 말이 남았던가?’

    고개를 갸웃하는 아리아드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닙니다. 그럼 부디 무탈하시길.”

    “리카르도 경.”

    아리아드네가 돌아서는 그를 붙잡았다.

    “그동안 끌려다니느라 고생 많았어요.”

    “…….”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리카르도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그가 정말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설사 성물에 대한 반발력을 가진 인간이 성물에 노출되어 마물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왜 성 상티모니아의 잘못입니까? 성물에 대한 친화력이 신의 은총이듯, 반발력 또한 신이 내린…….

    리카르도의 맹목적인 믿음을 부수고 싶었다. 그가 믿고 있던 것들을 산산이 깨뜨려 그가 자신의 잘못과 마주하기를 바랐다.

    ―다시 묻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잡아먹고 태어난 제가 정말 더럽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지금도 경의 신념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그것을 차마 부정하지는 못하겠네요.”

    ―저는 그분이 베라 하면 베고, 그분이 지키라 하면 지킬 것입니다.

    그의 맹목적인 믿음은…….

    “경의 말대로 경을 구원한 것은 내가 아니니까.”

    ―당신에겐 제 세상이 옳다 그르다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원장을 죽인 건 당신이 아니니까요.

    그에게는 세상 전부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하지만 경, 나와 본 세계도 잊지 않아 주었으면 해요.”

    ―경, 경! 오늘도 연습 봐 주세요.

    ―오늘은 제 차롄데! 어제 내일은 저 봐 주신다 그랬잖아요.

    ―모두 다 봐 줄 테니까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기사를 꿈꾸는 아이들을 돌보는 그의 얼굴을 알았다.

    ―대주님, 이자는 제 제자들을 인질로 삼아 저를 제압했습니다. 제가 이자의 목숨을 거둘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불의에 분노하는 그의 얼굴을 알았다.

    “내게 끌려다녔던 시간이 경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된 시간은 아니었기를 바라요.”

    그러니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더 넓은 세계로 나왔으면 했다. 어쩌면 그와 자신은 제법 괜찮은 동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경의 무운을 빌어요.”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리카르도는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리아드네가 내민 손을 차마 잡지 못했다.

    “공녀께서는 왜…….”

    고개를 숙인 리카르도의 입에서는 억눌린 소리가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리카르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리카르도가 우뚝 멈춰 서서는 숨을 골랐다. 더운 숨을 몰아쉬던 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 아니야. 나는 오직 그분의 뜻에 따라…….’

    그의 내부가 더운 기운으로 자글자글 끓었다. 머릿속과 가슴속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경, 우리 아버지 천국에 가셨겠죠? 사람들을 위해서 마물을 해치우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왜 내가 경의 혼란을 잠재워 주기를 바라나요? 그건 경의 몫이 아닙니까? 제자에게 부끄러운 스승이 되기 싫은 건 경이지 제가 아닌걸요.

    그때, 머리를 감싸 쥔 리카르도의 위에서 무심하고 건조한 어조의 말이 툭 떨어졌다.

    “아직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고개를 들어 보니, 한쪽 입술을 슬쩍 들어 올린 얄미운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미에르였다. 리뮈르 대주처럼 훌륭한 분 밑에서 어떻게 저런 아들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리카르도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하지 마십시오.”

    귀를 만지작거리던 달미에르가 아리아드네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더니 흐음, 의미심장한 감탄사를 흘렸다.

    “멋대로 짐작하지도 마시고요.”

    짓씹듯 말하며 성큼성큼 멀어지는 리카르도를 보며 달미에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울며불며 매달릴 때는 언제고.”

    “제가 언제 울며불며 매달렸습니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리카르도가 달미에르의 멱살을 거머쥔 채 씩씩거렸다.

    “눈물이 조금 맺힌 정도로 누구도 울며불며 매달렸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지 말고 저랑 술 한잔하시지요. 경께서 그토록 존경하는 달헤임 전하의 이야기도 들려 드릴 겸.

    그딴 감언이설에 넘어가 술잔을 잡은 게 실수였다. 결국 저 혼자만 인사불성이 되어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다.

    “이대로 떠나면 한동안 못 볼 텐데 이렇게 야멸차게 구실 것까지야.”

    달미에르가 얄미운 얼굴로 놀리듯 말하자, 리카르도가 쥐고 있던 멱살을 거칠게 놓으며 홱 돌아섰다.

    “그거야말로 바라는 바입니다!”

    매어 둔 말에 다가간 리카르도가 등자에 발을 걸고 말 등에 오르려던 순간이었다.

    “리카르도 경, 메르디에스 공녀는 대단히 눈치가 빠른 편입니다. 이성 관계라면 특히나 더.”

    멈칫한 리카르도가 달미에르를 돌아보았다. 달미에르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 시선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닐 테니.”

    달미에르가 제 마음을 자각하고 다가선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공자께서 관심이 생겼다는 메르디에스에 저도 포함인가요? 그렇지만 지금 제 네 번째 손가락이 다른 곳에 매여 있어서요.

    아리아드네는 더없이 단호한 태도로 선을 그었다. 그런데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내내 그녀 주위를 맴도는 리카르도에게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 공녀가 왜 경의 마음만은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그게 공자와 무슨 상관입니까!”

    “제 짐작으로는 공녀를 보는 경의 눈이 익숙해서 그랬을 겁니다. 그녀에게 매혹되어 제 신의와 충절을 바치기로 맹세한 이들과 비슷한 눈을 하고 있어서.”

    다시금 가까워진 리카르도가 달미에르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그 입! 닥치십시오. 그 이상 저를 모욕하면―”

    동공과 홍채가 구분되지 않는 희뿌연 눈동자가 그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리카르도 경, 경은 메르디에스 공녀를 주군으로 삼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제 속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듯한 시선에 달미에르의 멱살을 쥔 리카르도의 손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메르디에스 공녀 곁에 있으면 굳건하던 제 세계가 자꾸 흔들립니다. 제가 평생을 바쳐 지켜 온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과 마음은 이미 성하께 모두 바쳤는데, 그런데 왜 자꾸…….

    달미에르는 그날, 자신에게 주절주절 털어놓았던 리카르도의 진심이 ‘연정’이 아니라 ‘흔들리는 충정’처럼 느껴졌다.

    멍한 얼굴로 달미에르의 옷깃을 놓아 준 리카르도가 비틀대며 말을 향해 걸어갔다. 훌쩍 말 위로 오른 그가 흔들리는 제 마음을 다잡듯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날의 제 결론도 기억하고 계시겠군요.”

    ―저는 이 손으로 제 세상의 신을 버리지는 못할 겁니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저는 지금 이 마음을 버릴 겁니다.

    “리카르도 경,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고삐를 잡은 리카르도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달미에르는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된 공기를 느꼈다. 리카르도의 번민과 고민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끝내, 리카르도는 냉랭한 어조로 마지막 말만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아니, 처음부터 이런 마음은 품지 말았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달미에르는 그 말을 하는 리카르도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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