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막사 입구를 가린 천 사이로 주황색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불빛에 비친 유진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졌다.
그림자가 드리운 그의 얼굴은 명화 같기도, 공들여 빚은 조각상 같기도 했다. 그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의 외모 탓도 있었다.
“……왜?”
아리아드네의 집요한 시선에 유진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냥, 좋아서.”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양 무릎을 끌어안은 아리아드네가 설핏 웃으며 답했다. 짧게 떠올랐다 사라진 그녀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던 유진이 멋쩍은 듯 시선을 피했다.
“포로들을 돌려보내려는 건 역시 그때 말한 그것 때문인가?”
머쓱한 분위기에 화제를 전환하려는 생각이었는지 유진이 낮에 있었던 포로 송환 이야기를 꺼냈다.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카이엔을 직접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리아드네는 마음이 복잡한 듯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루안의 죽음. 카이엔은 그 값을 치러야 해.
그것을 위해 레너드가 직접 왕후를 끌어내 의심의 씨앗을 심었다.
―나는 오늘 자식을 둔 아버지로 이 자리에 섰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자네의 아들을 죽인 진짜 범인은 따로 있어.
그리고 그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하겠노라 나선 건.
―아리아드네, 우리가 1왕자와 대면하겠어.
―달로아, 넌 지금도 충분히 네 역할을 하고 있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다른 방법을 찾는 중이니까…….
―아니, 다른 방법은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달로아 남매였다. 아리아드네는 제 욕심으로 달로아에게 내키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가 연거푸 한숨을 내쉬는 아리아드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어서 잡으라는 듯 손을 더 뻗어 왔다.
“밤이 늦었으니까 이만―”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잡아 일으키려는 유진의 손을 슬쩍 피하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어떤 거?”
짚이는 것이 없지는 않은지, 유진이 아리아드네와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미련하게 참는 짓.”
탁 소리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유진에게 다가가 양손을 꼭 쥐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 나 이렇게 아프니까 봐 달라고 떼쓰란 말이야.”
작년 가을에 다친 상처를 이제껏 그 혼자 감당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 속상했다.
“애초에 그렇게 대단한 상처도 아니었는데.”
그는 조금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말하는 투를 보니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겨도 또 이럴 것 같았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
바짝 다가선 아리아드네가 그의 목깃을 쥐고 끌어 내리며 말했다.
“앞으로는 털끝만큼이라도 다치면 전부 다 말해. 알았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단호한 어조로 그를 몰아붙였다.
“……그래, 그럴게.”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쥐고 있던 목깃을 놓은 아리아드네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냥, 아프지 마.”
“그래.”
그는 아리아드네의 억지에도 마찬가지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파?”
아리아드네가 그의 가슴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으며 물었다. 행여라도 상처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었는지 그녀의 손길은 신중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유진이 제 가슴에 닿은 아리아드네의 손을 단단히 쥐었다. 그가 손에 큰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아리아드네는 어쩐지 그에게 잡힌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린 그가 아리아드네의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왜, 직접 확인이라도 해야 믿겠어?”
유진이 잡고 있던 손을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리아드네의 손 아래로는 그의 가슴이 딱 붙어 있었고, 위로는 그의 손이 움켜쥐듯 덮고 있었다. 그저 손 하나가 그에게 붙들린 것뿐인데, 온몸을 꼼짝할 수 없도록 묶인 기분이었다.
희미한 빛이 새어 드는 병영의 막사, 그 근처를 지나는 병사들의 말소리가 훅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지금 좀 이상한 거 알지?”
아리아드네는 반대쪽 손을 들어 그의 턱을 가볍게 두드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가 일순 느슨해졌다. 그 틈을 타 아리아드네가 제 손을 확 잡아 뺐다.
“봐 달라니 보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리고 그대로 그의 상의를 들어 올려 가슴에 남은 상처를 확인했다. 아리아드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단단하고 매끄러운 피부 위를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자리한 왼쪽 가슴 조금 아래, 타우루스의 집게발에 찍힌 상처가 남아 있었다. 톱니에 찢긴 듯한 상처 주위는 타우루스의 독 때문에 보라색으로 변색된 채였다. 상처를 확인한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대체 뭐가 불안한 건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내내 눈을 피하고, 심란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가 평소에는 안 하던 유혹 비슷한 것을 해 오는데.
“…….”
“흐음, 말 안 할 거야?”
하지만 유진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발끝을 들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떼어 낸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물었다.
“정말?”
그가 망설이듯 입을 살짝 벌렸다 다시 다물었다.
아리아드네는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키스했다.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이 끝을 혀로 두드렸다. 그의 혀와 스치는가 싶던 그때, 고개를 슬쩍 뒤로 물렸다.
“정말 나한테 비밀 만들 거야?”
유진은 대답 없이 끊긴 키스를 이어 갈 것처럼 고개를 붙여 왔다.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어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막았다.
“말해. 그게 무엇이든.”
열기와 머뭇거림이 뒤섞인 그의 눈이 일렁였다. 마침내, 깊게 숨을 내쉰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처럼 담담할 수 없었을 거 같아서.”
갑자기 이게 무슨……. 아, 그제야 아리아드네는 유진이 내내 이상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게 신경 쓰였어?”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시선을 마주친 아리아드네가 그의 상처를 쓸어내렸다. 푸른 손의 살라, 그녀의 손이 닿았던 바로 그 자리에.
“다른 이유로 다른 사람 손이 당신에게 닿았다면―”
손끝에 채 낫지 않은 상처가 걸렸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상처를 만지던 손끝에 조금 힘을 주며 낮게 속삭였다.
“담담하지 못한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을 거야.”
낫지 않은 상처가 눌리자 그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부디 앞으로도 내가 담담하지 못할 일은 없길 바라.”
아리아드네는 마지막으로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쓸어내리고는 손을 뗐다.
“…….”
유진은 여전히 인상을 조금 찡그린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은?”
그가 멍한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유진을 꽉 안았다 놓아 준 아리아드네가 근처 탁자에서 작은 통 하나를 집어 들었다.
“늦었으니까 어서 약 바르고 자.”
살라가 주고 간 연고였다. 그가 제게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연고를 손에 든 채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내가 발라 줄 건데?”
몹시 당황한 듯 유진이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연고를 향해 재차 손을 뻗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아리아드네가 냉큼 연고를 뒤로 감췄다. 그가 마음먹고 뺏고자 하면 못 뺏을 리 없지만.
“싫어?”
뻗은 손에 그대로 깍지를 건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물었다.
“……아니.”
그가 자신을 거절할 리 없으니까.
* * *
메르디에스는 후방 진지에서 사로잡은 케이루스 병력 1만을 조건 없이 송환하겠노라고 공포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케이루스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1만이나 되는 포로를 아무런 조건 없이 송환하겠노라는 메르디에스의 내심이 무엇인지, 포로 중 메르디에스에 회유된 세작은 몇이나 될지 걱정되는 것이 한둘이 아녔다.
하지만 송환하겠다는 포로를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후방 진지 급습과 서쪽 관문 전투의 연이은 패배로 적지 않은 손실을 본 이때, 정예 병력 1만은 포기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케이루스 쪽에서 송환을 거부하면, 남은 병사들이 급속히 이탈할 것이 뻔했다.
결국 포로였던 자들을 받아들여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문제였지, 그들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물새 협곡 전선에는 포로 송환을 위한 중립 지대가 설정되고, 닷새간의 휴전이 선포되었다. 최전선에서 살짝 옆으로 비켜난 야트막한 평지에 임시 막사가 들어서고, 양쪽 병사들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케이루스 진영에는 한쪽 뿔이 잘린 사슴과 차오르는 달이 그려진 붉은 깃발이, 메르디에스 진영에는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가 새겨진 녹색 깃발이 올라왔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케이루스 진영의 선두에는 케이루스의 수장 1왕자 카이엔이 자리했다. 돌아오는 포로를 맞이하는 것은 주인된 자의 의무였다.
포로의 수가 적거나 송환이 급격하게 이루어졌다면 변명할 거리라도 있겠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메르디에스 측에서 포로 송환을 두고 어찌나 요란하게 구는지 도무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이엔은 뙤약볕 아래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병째로 들이켜고, 잘린 오른손을 감추기 위해 소매가 긴 옷을 입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치욕스러웠다. 그런데 상대는 그것도 모자란 듯 약속한 시각이 한참 지나서야 나타났다. 땅거미가 내린 양쪽 진영에는 어둠을 밝히기 위한 횃불이 잔뜩 걸렸다.
“아, 죄송! 일부러 늦으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요란하게 도착한 여자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부산하게 중얼거렸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석양에 물든 저녁 하늘처럼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포로 송환의 책임자는 리스벨 백작이라 하지 않았나.”
카이엔의 물음에 여자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다다다 말을 쏟아 냈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정신이 나갈 뻔했다니까요. 백작께서 원수를 마주할 생각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그러자 여자와 닮은 붉은 머리카락을 느슨히 묶은 남자가 그녀를 슬쩍 잡아끌며 말렸다.
“로아, 품위 없는 언행은 그쯤 해 둬. 지금 넌 포로 송환의 책임 대행이야.”
“아, 저 잔소리 귀신.”
여자가 입을 삐죽이며 불만스레 투덜거리다가 카이엔을 향해 과장되게 몸을 숙였다.
“아무튼, 그런 사정으로 급하게 리스벨 백작의 대행을 맡은 달로아 리뮈르라고 합니다. 1왕자 전하.”
“달미에르 리뮈르입니다.”
붉게 타오르는 낙조 같은 머리카락과 겨우내 내린 눈처럼 시린 눈동자를 보며 저들의 정체를 짐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얼음과 눈의 기사단을 거느린 디움 산맥의 파수꾼, 심판의 리뮈르.
“누군가 했더니 리뮈르 공녀와 공자였군.”
느슨히 눈을 내려 깐 카이엔은 소매 안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감히 이따위 수작을 부려?’
캐롤린의 부친인 커티스 리스벨이 자진하여 선봉으로 나섰단 것은 그도 익히 들은 바였다. 딸을 잃고 눈이 뒤집힌 아비를 상대하는 것도 피곤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미남이시네요. 얼굴이 마음의 창이란 것도 다 맞는 말은 아닌가 봐요.”
달로아가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카이엔은 그런 달로아의 행동이 제 속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심판자의 눈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귓가에서 울리는 환청에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카이엔은 결국 달로아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는 제롬을 불러 케이루스 진영의 횃불을 줄이라 명했다. 제 쪽이 어두워지자 밝은 쪽에 자리한 남매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카이엔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불안이 어느 정도 가시자 비로소 그의 이성이 돌아왔다. 심연의 눈 따위 이제는 사라진 능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생 쪽 눈이 조금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달미에르의 눈에 이상이 있다는 정보를 들은 카이엔이 그렇게 물었을 때.
―달미에르는 그저 어려서 앓은 열병으로 시력을 잃은 것뿐입니다. 걱정하시는 일 같은 건 없습니다. 달미에르가 정말 심연의 눈을 각성했다면 어째서 대주가 그를 후계로 지명하지 않았겠습니까.
달리오스는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제 정통성이 위협을 받을까 두려웠는지 다급히 반박했다.
‘하긴, 그 말도 맞지. 권능을 각성한 혈족을 후계로 삼지 않는 것은 가문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를 둘러싼 어둠이 카이엔의 이성을 한층 더 명료하게 해 주었다.
그가 불쾌한 것은 그저 껄끄러워서였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저따위 족속이 불편한 것은. 그것이 이제는 사라진 능력이라 할지라도.
“아 참, 리뮈르에 선물을 보내 주신 것은 몹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보내 주신 고기가 어찌나 질기던지 우리 집 개도 안 먹었지만.”
달로아는 카이엔이 마물을 보내 리뮈르를 습격했던 것을 지적했고.
“맛이 없었다니 유감이로군. 리뮈르 공녀가 거리의 음식을 즐긴다기에 특별히 신경 쓴 것인데.”
카이엔은 자신이 달로아의 평소 행적을 잘 알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차마 빈손으로 올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선물을 좀 준비했는데…….”
슬쩍 뒤를 돌아본 달로아가 손을 까딱 움직였다.
“그거.”
메르디에스 병사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수송용 마차에서 널따란 무언가를 내렸다. 귀한 물건인 듯 다루는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앞뒤로 가죽을 칭칭 동여맨 납작한 물건은 병사 십수 명이 달려들어 내려야 할 정도로 거대했다. 마침내 물건을 내린 메르디에스 병사들이 양 진영 사이에 그 물건을 세워 두었다.
“전하를 뵈러 간다니까 누가 이걸 주더라고요. 평소 전하께서 그렇게 탐내셨다며.”
달로아의 눈짓에 병사가 물건을 동여맨 끈을 잘라 냈다. 그러자 물건을 감싸고 있던 가죽이 스르륵 떨어졌다.
“……저게 뭐야.”
물건이 정체를 드러내자 사람들이 얼이 빠진 듯한 감탄사를 뱉어 냈다.
“거, 울?”
달로아가 꺼낸 물건은 오묘한 광채를 내뿜는 검은색 거울이었다.
“……누가, 무엇을 탐냈다고?”
카이엔이 소매에 숨겨진 손을 부들부들 떨며 뇌까렸다.
―이건 페르메라는 광물을 유리에 입힌 겁니다. 페르메 유리라고도 불리죠. 직접 보는 건 처음이신가요?
란데르의 메르디에스 여름 별장에서 그는 저것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차마 발길을 돌리기 어려우신가요? 이별의 선물이라고 치면 못 드릴 것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아리아드네 곁에 심어 둔 줄리라는 계집이 그를 배신하고,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파혼을 말했다.
―아가씨, 눈앞의 남자를 치워 줄까? 그러기를 원하면 그렇다고 말해.
그것도 모자라 이계의 방문자라는 작자가 그의 인생에 끼어들었다. 제 삶이 제가 만든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 모두 그때부터였다.
“메르디에스 공녀인가? 그녀가 그렇게 말했나? 내게 저것을 건네라고.”
“제법 값비싼 물건이라고 하던데요. 같은 부피의 다이아몬드보다도 훨씬 비싼 것이라고.”
하, 하하하. 카이엔은 왼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제게 선물한 것은 값비싼 보물 따위가 아니었다. 조롱이었다. 그녀는 겨우 카이엔을 조롱하기 위해 같은 부피의 다이아몬드보다 비싸다는 페르메 유리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엔이 페르메 유리를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이것이 내 선물이라면 내 것이란 말이겠군.”
“그렇―”
카카가각!
달로아가 채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카이엔의 왼손에 들린 칼이 페르메 유리 정중앙에 박혔다.
“그러니 어떻게 처분하는가도 내 몫이란 말이지.”
카이엔은 페르메 유리에 칼을 박은 채로 맞은편의 달로아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미, 미친―”
카이엔의 돌발 행동에 놀란 달로아가 입을 달싹이며 유리에서 멀어졌다.
“그러게, 도발도 적당히 했어야지.”
겉으로는 태연한 척 안간힘을 썼지만, 칼을 쥐고 있는 그의 왼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마치 단단한 돌에 부딪힌 것처럼 손아귀가 찡하고 울렸다.
더구나 유진의 풀멘은 페르메 유리를 산산조각 낸 데 반해 카이엔의 칼은 겨우 자그마한 흠집을 내는 것에 그쳤다.
카이엔은 힘에 부친 자신의 모습을 들키기라도 할까 서둘러 쥐고 있던 칼을 내던졌다. 짤랑, 페르메 유리에 박혀 있던 칼이 카이엔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로아, 괜찮아?”
달미에르가 놀란 달로아를 감싸더니 소리 높여 항변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남매 사이가 제법 각별한가 보군.”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달로아가 번들번들한 거울 너머에 있을 카이엔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밝은 쪽에 자리한 그녀는 페르메 유리에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만 봐야 했다.
“전하께선 그렇지 않으셨나 보죠?”
“나라고 내 아우가 어찌 귀하지 않았겠나. 이 세상에 나와 피를 나눈 이라곤 그 아이 하나였는데.”
서쪽 관문 전투에서 메르디에스 공작이 2왕자를 죽인 진짜 범인 운운했다는 소리는 그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아우를 죽인 자들과.”
카이엔은 페르메 유리 너머에서 자신을 향해 악을 쓰는 달로아를 보며 웃었다.
“거짓말! 그것도 당신이 꾸민 짓이 분명해! 달리오스를 이용해서 리뮈르를 함정에 빠뜨렸던 것처럼!”
역시, 저것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카이엔은 달로아의 반응을 보며 제 생각에 한층 더 확신을 가졌다. 상대의 모든 죄를 들여다본다는 심연의 눈 따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눈에 심판할 내 죄가 보이나?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지은 죄가 없는데.”
그의 죄를 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니까.
“만나서 반가웠네. 선물은 고맙게 받지.”
카이엔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그의 어깨에 달린 붉은 망토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카이엔을 노려보던 달로아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리아드네, 우리가 1왕자와 대면하겠어. 내가 그의 기억을 읽으면 그가 2왕자를 어떻게 죽였는지 밝혀낼 수 있어.
자청하여 카이엔과 대면하겠다는 달로아의 말에 아리아드네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달로아, 넌 지금도 충분히 네 역할을 하고 있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다른 방법을 찾는 중이니까…….
심연의 눈이 리뮈르에게 어떤 상처였는지, 그것을 알아주는 아리아드네가 고마웠다.
―아니, 다른 방법은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하지만 그런 아리아드네의 태도는 달로아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뭐, 메르디에스도 곧 끝날 거라지? 안에서 새기 시작하면 끝이지. 리뮈르나 메르디에스나.
달리오스의 기억을 읽었던 그때, 아리아드네를 믿고 모든 걸 털어놓았더라면…….
―리뮈르 공녀와 공자이신가요?
―처음 뵙겠습니다. 리스벨의 캐롤린입니다. 함께 귀환하신단 말은 들었는데, 지금은 손님을 대접할 상황이 아니라서요.
깊고 아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던 캐롤린 리스벨은 어쩌면 살 수도 있었다. 친해진 다음에는 ‘아, 그때 첫인상 진짜 별로였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 아아……. 캐롤린. 제발, 제발…….
무너져 우는 아리아드네를 보지 않을 수도 있었고, 커티스나 알버트와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르디에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그 말, 달리오스가 제 부관에게 한 말이 아니었어. 내가 달리오스의 기억을 읽은 거였어. 내가, 내가 좀 더 빨리 말했더라면…….
―아니, 그랬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그날 일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나고, 후회도 내가 해. 모든 건 내가 지고 갈 거야. 그게 내 역할이니까.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제라도 말해 줘서 고마워.
아리아드네의 신의를 저울질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나서야 할 때였다. 설사 이 저주받은 능력이 만천하에 까발려진다 하더라도.
“로아, 괜찮아?”
달미에르가 경련하듯 떠는 달로아의 몸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달로아가 고개를 저었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토할 것 같아.”
달로아는 당장이라도 속엣것을 모두 게워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의로 가득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적지 않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악의로 가득한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보다도 몇 배는 더 힘든 일이었다.
“알아냈어. 사막 거머리야.”
달로아는 카이엔의 기억을 읽었다. 페르메 유리 너머, 카이엔과 눈을 마주친 달미에르가 그의 죄를 비춘 그 순간에.
“2왕자 가슴에 난 상처는 서대륙 마물이 심장을 파먹은 흔적이었어.”
카이엔이 지은 죄의 유일한 목격자는 바로 카이엔 자신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