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148)
  • * * *

    성 상티모니아의 성도 살리바에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푸른 빛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짐을 꾸리고 있었다.

    “레이먼드 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레이먼드와 일부 상단원이 살리바에 남은 것은 엘바의 사후 처리 때문이었다. 마무리되지 못한 일들이 몇 가지 남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살리바의 동쪽 경계는 케이루스의 서쪽 경계와 맞닿아 있었다. 페렌트에 심상찮은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교황마저 성기사단을 이끌고 어딘가로 출정했다.

    이런 때에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상대의 영역에 남아 있을 순 없었다. 인질로 사로잡히기라도 한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레이먼드는 살리바에 남은 상단원 전원과 함께 메르디에스로의 즉시 귀환을 결정했다.

    “알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떠나도록 하지.”

    레이먼드는 마차에 실린 짐과 사람들을 확인하는 척하며 짐마차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짐마차 앞에 멈춰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살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짐칸을 덮은 천을 슬쩍 들었다. 그는 짐을 살펴보는 척하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이젠 출발합니다. 살리바 대신전만 나가면 제 마차로 모실 테니, 잠깐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자 짐칸 안쪽에서 하얗고 작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손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레이먼드의 손을 꼭 쥐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머뭇거리다 놓는 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두 알 것 같았다. 레이먼드가 멀어지는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짐칸의 천을 다시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이제 가십니까.”

    사제복을 입은 깡마른 여자가 천의 한쪽 끝을 단단히 틀어쥔 채로 레이먼드를 향해 말했다. 베아트리스의 훈육 담당이기도 한 수석 사제 레지나였다. 그녀가 서늘한 눈으로 짐마차를 훑어보았다.

    “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레이먼드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짐마차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여전히 싸늘한 얼굴을 한 레지나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브래들리 백작가에서는 감사를 이런 식으로 갚습니까?”

    들킨 걸까? 레이먼드의 손이 배어 나온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짐칸으로 불쑥 밀어 넣은 레지나의 손에는 작고 하얀 손이 잡혀 있었다. 끝이었다. 레이먼드는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베아트리스의 한쪽 손을 붙잡은 레지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질책했다.

    “성 상티모니아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십니다. 그런데 감히 마차의 짐칸에 모시다니요.”

    짐칸 안쪽, 천을 쌓아 만든 공간에 숨은 베아트리스가 거세게 몸을 떨었다. 이대로 잡히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살리바를 떠나야, 그래야 어머니를…….’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레지나가 칼같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조금 어색한 손길로 베아트리스의 손을 쓸어 주었다.

    베아트리스에게 레지나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었다. 어린 그녀를 키운 것은 아그네스가 아닌 레지나였다.

    하지만 그런 레지나가 자신을 선택해 줄 줄은 몰랐다. 레지나는 어머니의 사람이라고, 늘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맞잡은 손 위로 베아트리스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군가 들을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잠시만 참아 주세요.”

    레지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짐칸의 천을 덮어 정리하고는 레이먼드를 향해 까딱, 고갯짓을 했다.

    레이먼드는 레지나의 기세에 밀려 주춤거리며 앞장섰다. 베아트리스를 위해 준비한 마차의 문을 열자, 레지나가 엄격한 눈길로 내부를 스윽 훑었다.

    “안테로 주교를 이용하셨더군요.”

    “네, 그러니까 그것이…….”

    다만 몇 시간이라도 베아트리스가 사라진 것을 모르게 하려면 내부의 협력자가 필요했다. 성 상티모니아에서 레이먼드가 무언가를 부탁할 만한 사람이라곤 유진을 수행했던 안테로 주교뿐이었다.

    성녀를 빼돌리는 일이니만큼 그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안테로는 말을 꺼내자마자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제가 이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모두 메르디에스를 위함입니다. 제가 얼마나 애썼는지 메르디에스 공녀께 꼭 좀…….

    아무래도 안테로 주교는 아리아드네가 주었던 뇌물의 맛에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덜컹, 마차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스가 탄 마차는 살리바 대신전에서 점점 멀어졌다. 빼꼼 얼굴을 내민 베아트리스가 멀어지는 살리바 대신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차의 바퀴는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을 향해 굴러갔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기분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후련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베아트리스는 다시 짐칸 안쪽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눈을 감자 빛은 사라지고 소리만 남았다. 베아트리스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조금 더 울었다.

    * * *

    수적을 끌어들인 서쪽 관문 전투는 난전으로 끝이 났다. 수적들은 리카서스의 전력에 큰 타격을 주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서쪽 관문을 지키는 리카서스의 병력에 큰 공백이 생겼고, 왕후는 이를 막기 위해 왕궁을 지키고 있던 리카서스의 병력까지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왕도를 지키는 리카서스의 병력이 빠져나가자 1왕자 카이엔이 크게 반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내분의 시작이었다.

    “아니, 수적은 도대체 어떻게 끌어들이신 거래?”

    레너드의 공적을 찬양하는 달로아의 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수적(水賊)이란 페렌트의 통치 가문 중 하나인 리카서스에 대대로 핍박당한 이들이 모인 세력이었다.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당연히 리카서스였으나, 그렇다고 다른 귀족들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오랜 핍박으로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그들은 제 근거지를 철저히 숨겼다.

    그런 그들을 이끌어 내 리카서스를 상대하게 하다니. 어떻게 하면 이토록 아름다운 계책을 이렇게나 완벽하게 성공시킬 수 있는 걸까.

    “돈이지, 돈.”

    아리아드네의 더없이 담백한 대답이 감동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달로아를 자비 없이 끌어냈다.

    “돈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아닐 텐데?”

    “거기다 그들이 이번에 번 돈을 쓸 수 있는 좋은 거래처가 되어 주기로 했지.”

    “아…….”

    물 밑의 거래는 물 위의 거래보다 비싼 법이다.

    리카서스와 대적하는 수적들은 평범한 경로로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구입할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간단한 식료품을 사는데도 남들의 몇 배나 되는 값을 치러야만 했다. 그들에게 배를 곯는 것은 일상이었고, 얕은 상처도 제때 약을 구하지 못해 깊어지곤 했다.

    메르디에스가 수적의 거래처가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물 밑의 거래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리카서스를 상대하는 것은 우리의 요구에 따른 것이니, 출정에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가 지원하기로 했어.”

    수적들이 오랜 세월 리카서스를 끈질기게 괴롭히긴 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도망치는 쪽이었다. 도망쳐야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제대로 된 무기가 없어서, 상처를 치료할 약이 부족해서, 배불리 먹지 못해서.

    메르디에스가 수적들에게 준 것은 돈이나 물자 따위가 아니었다. 적 앞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을 때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자유였다.

    서쪽 관문 전투에서 수적들은 언제나처럼 리카서스를 두고 달아났지만 이번만은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전략상 후퇴였을 뿐이다.

    ‘어쩌면 다음 싸움에서는 도망가는 리카서스를 보게 될지도 몰라.’

    수적들에게는 그런 희망이 생겼다.

    “정말 훌륭하고 완벽한 계책이셔.”

    잠시 멈추었던 달로아의 찬사가 이어졌다.

    “남의 돈으로 내 원수를 죽일 기회를 얻다니. 이건 너무 완벽해. 협력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야.”

    “리카서스의 세력이 약해질수록 수적들의 숨통도 트이는 셈이니까. 그들이 앞으로의 기반을 다지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

    아리아드네는 수적들을 리카서스의 세력을 약화하는 데 이용하고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그들은 본디 어업에 종사하거나 강이나 바다에서 물류를 유통하던 사람들이었다.

    리카서스와의 분쟁으로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을 이들이었다. 그들의 일상을 되찾아 주고 싶었다.

    이전이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생각이었다. 리카서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상대가 메르디에스에 간섭할 빌미를 주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페렌트의 왕이 되고 싶었다. 가장 낮고 어두운 곳까지 비춰 주는.

    “나가자. 슬슬 손님 맞을 준비도 해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막사를 빠져나왔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차례 흩뜨리고 지나갔다.

    ‘이건 물새 협곡에서 불어온 바람일까.’

    그녀가 바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케이루스와 리카서스가 막아선 물새 협곡을 지나 릭센에 도달해야 했다. 오늘따라 눈앞을 가로막은 산이 더욱 높게 느껴졌다.

    병영 한가운데서 산을 바라보는 아리아드네의 귓가로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큰 망치 용병단 도착했수다. 약속한 보수는 틀림없겠지요?”

    “엥? 우리가 처음이 아니야?”

    “이거 왜 이래? 우리 하늘 독수리 용병단이 제일 처음 도착했다고. 너희는 다섯 손가락 안에도 못 들어.”

    진지에 도착한 용병들의 대화가 시끄럽게 이어졌다. 그 뒤로도 불곰 용병단, 땅끝 용병단, 유황불 용병단 같은 유명 용병단이 속속 도착했다.

    오후까지 물새 협곡 후방 진지에 도착한 용병단은 서른 곳이 훌쩍 넘었다. 속속 진지를 채우는 용병단을 구경하던 달로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어, 오늘 전투 계약한 용병단이 도착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도착했잖아.”

    아리아드네의 담담한 대답에 입을 떡 벌린 달로아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저, 저 많은 용병단들과 전부 전투 계약을 맺었다고?”

    “아니, 전부는 아니지.”

    즉각적인 부정에 머쓱해진 달로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 그렇지?”

    “아직 덜 왔으니까.”

    응? 덜? 달로아는 제가 조금 전 무슨 말을 들었나 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스무 곳 정도 더 올 거야.”

    “……어, 그래. 그렇구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아리아드네의 태도에 달로아도 덩달아 차분해지고 말았다. 메르디에스의 스케일에 제법 적응했다 싶으면 이런 일이 뻥뻥 터졌다.

    ‘쉰 곳, 쉰 곳이라면, 매우 많은 숫자지만 쟨 메르디에스니까.’

    여러 차례 심호흡을 한 달로아가 진정하며 머리를 굴리자 아리아드네의 의도가 읽혔다.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이 되면 가진 무력만으로 싸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용병을 고용해 빈 전력을 메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1왕자가 계약할 용병단을 구하느라 골치 좀 썩겠네.”

    달로아의 결론에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일은 없을걸.”

    케이루스 쪽도 벌써 계약을 마쳤나? 달로아는 얼핏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도 오답이었다.

    “그들과 계약할 용병단은 단 한 곳도 남겨 두지 않았으니까.”

    아리아드네는 길드에 이름을 올린 용병단이라면 모두 전투 계약 여부와 상관없이 용병단 급과 규모에 따라 일정 금액을 지급했다.

    통상 계약금은 보수의 1/10의 수준에서 결정되는데, 메르디에스가 보내 온 돈은 각 용병단의 한 달 수입에 육박했다.

    메르디에스와 계약서를 쓰기도 전에― 아니, 계약 이야기가 오가기도 전에 돈부터 받아먹은 용병단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이 돈 받았다고, 전투 계약에 동의한 거라고 우기는 건 아니겠지?’

    ‘아니, 우리 의사는? 우리는 아직 도장 안 찍었다고!’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며 몸값 올릴 생각을 하고 있던 몇몇 몸집이 큰 용병단은 더욱 그러했다.

    ‘겨우 이 정도 돈으로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혼란을 틈타 목돈을 만질 생각뿐이던 그들은 메르디에스가 함께 동봉한 안내장을 열어 보고는 얼음처럼 굳었다.

    「페렌트 내전이 끝날 때까지 케이루스에 협력하지 않으면 동봉한 금액의 두 배, 메르디에스에 협력하면 최소 네 배의 금액을 지급한다.

    임무 수행 강도와 활약에 따라 보수는 추가 지급될 것이며, 각지의 메르디에스 상단 지부에 도착하는 순서에 따라 임무가 부여된다.

    도착이 늦어 임무를 부여받지 못하는 용병단의 보수는 케이루스에 협력하지 않는 경우와 동일하게 산정한다.」

    ‘심지어 계약이 선착순이냐!’

    각 용병단은 바람처럼 달려 가까운 메르디에스 상단 지부로 뛰어들었다. 프레모 대륙 곳곳에 흩어진 메르디에스 상단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계약해 주십사 달려드는 용병단과 순조롭게 계약을 마쳤다.

    ‘선착순’이라는 조건 때문에 계약을 마친 용병단이 스스로 계약 사실을 숨겼기 때문에, 정보는 어디에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 계약한 용병들을 투입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케이루스가 계약할 용병단을 찾느라 시간과 인력을 허비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배포가 너무 작은 것 같아.”

    달로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꾹 누르며 반성했다.

    최근 들어 전략을 세우며 ‘정말 돈을 이렇게 막 써도 되나. 고민해 보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돈을 너무 가볍게 쓰는 거 아닐까.’ 따위의 고민을 했던 달로아는 제 걱정이 정말 기우에 불과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건 손바닥만 한 찻잔을 들고 강물을 퍼내면서 이렇게 퍼 쓰다간 강물이 마르지 않을까 걱정하는 꼴이었다.

    ‘아, 나는 정말 그동안 바보같이 굴었구나.’

    달로아는 또다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나 이젠 정말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을래. 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니까.”

    달로아가 몹시 감동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향해 양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고마워?”

    그녀가 어떤 것을 깨달았는지 알지 못하는 아리아드네만이 난데없는 칭찬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내일 중으로 남은 용병단도 모두 도착할 거야.”

    아리아드네는 용병들이 도착하는 것을 지켜보다 유진의 막사로 발을 옮겼다.

    ―아, 의식을 차리셨다고요? 그럼 가 봐야죠. 그러잖아도 치료사로서 한 번쯤 꼭 살펴보고 싶은 대상이었거든요.

    유진이 의식을 차렸다는 소식에 살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냉큼 달려갔다. 살라가 봐 준다니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어쩐지 걱정이 되어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이 지내는 막사 앞에 멈춰 섰다.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막사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안으로 들어섰다.

    “치료는 잘 끝났―”

    “……아직, 잠시―”

    하지만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유진과 눈이 딱 마주치는 통에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뭐야, 왜 들어가다 말아!”

    뒤따라오던 달로아가 멈춰 선 아리아드네 등에 이마를 박은 채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어, 나 왜 돌아 나가야 할 것 같지?”

    그제야 막사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 달로아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당황했다. 윗옷을 벗은 채로 맨 가슴을 드러낸 유진과 그의 가슴에 손을 댄 살라의 모습에 막사 안의 공기가 일순 쩡 하니 얼어붙었다.

    “이건, 그러니까…….”

    당황한 유진이 서둘러 옷을 입으며 살라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살라가 샐쭉 웃으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 왜 하필 이럴 때 와서는…….”

    부러 신경을 긁듯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살라의 행동에 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게 뭔데?”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유진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는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저 여자 손이 내 몸에 닿은 건 상처를 보느라 그런 거였어. 정말이야.”

    타인과 맨살이 닿는 일 따윈 정말 질색이었다. 그렇다고 대뜸 이 말을 해 버리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것만 같았다. 유진은 어디까지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알아.”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이라, 니…….”

    반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던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차분한 태도에 도리어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알아. 전에 알버트 치료할 때도 환부에 손대고 있는 거 봤어. 당신이 정신을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아리아드네의 대답에 살라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 무슨 말을 해도 석상처럼 무덤덤한 방문자님께서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볼만했는데…….”

    그제야 살라의 장난질에 당한 것임을 눈치챈 유진이 옷을 여미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네는 키득대는 살라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장수일 때의 살라는 믿음직한 사람이었는데 의원으로 마주하는 살라는 성격이 참…….

    “유진의 상처는 좀 어떤가요?”

    자리에 앉은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의원에게는 환자의 비밀을 지켜 줘야 할 의무가 있어서요. 방문자님, 여기서 우리끼리의 비밀을 말해도 괜찮을까요?”

    살라가 유진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또 그따위 장난을 쳤다. 유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살라에게서 멀어진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그의 경계에 어깨를 작게 으쓱한 살라가 설명을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환자와 의사, 환자 애인 사이에 끼어 난감해진 달로아가 뒤꿈치를 들고 슬금슬금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달로아는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유진의 현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듣게 되었다.

    “리뮈르에서 타우루스 집게발에 찍힌 상처가 낫지 않았던 거예요. 드물긴 한데 그 투구벌레 중엔 집게발에 독을 가진 애들이 있어서.”

    살라는 그 말을 하며 양손으로 집게발 모양을 만들어 까딱거렸다. 유진의 가슴팍에 남은 흔적이 타우루스 집게발에 찍힌 상처라는 건 아리아드네도 짐작했던 부분이었다.

    “한 번 찔리면 상처가 제법 오래가거든요. 처음 다쳤을 때부터 상처가 꽤 깊었던 모양인데 치료를 전혀 하지 않아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괜찮냐고 물어볼 때마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길래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아리아드네가 속상하다는 듯 한숨을 깊게 내쉬자 유진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확실한 건 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소르체에서 데켐을 넣은 음식을 먹고 방문자님 혼자만 아무렇지 않았던 것도 이미 타우루스 독에 중독된 상태라 그랬던 것 같네요. 독에도 상성이 있어서 이렇게 먼저 들어온 독이 나중에 들어온 독을 밀어내는 경우가 있거든요.”

    “…….”

    유진은 무엇이라도 물으려다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불사인 신의 권속과 동화된 인간이었다. 그런 탓에 그에게 독은 그다지 효험을 발휘하지 못했다.

    잿빛 사막에서 처음 의식을 차렸을 때, 그는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가리지 못해 몇 번이나 독충을 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맹독이라도 그에겐 찰나의 고통에 불과했다.

    분명 그랬는데, 왜 이제야 멈추었던 그의 시간이 흐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진은 상처가 난 제 가슴께를 꾹 눌러 보았다. 아리아드네가 하지 말라는 듯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 제대로 치료만 받으면 열흘이면 깨끗이 나을 거예요.”

    “그 치료라는 거 혹시 아까 본, 그런 방식의…….”

    달로아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뒷말을 흐렸다.

    “그런 치료라면 안 받―”

    “치료 안 받는다는 소리 하기만 해 봐!”

    살라의 장난질에 질릴 대로 질린 유진이 몸서리치며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 했으나, 아리아드네의 서슬에 단박에 무시되었다.

    “저기, 두 분. 치료 방법을 결정하는 건 저거든요. 그리고 이건 의료 행위고요.”

    그것을 지켜보던 살라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살라의 질책에 신성한 의료 행위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한 것 같아 어쩐지 면구해졌다.

    “아깐 상처를 살펴보느라 그런 거고, 제가 직접 손을 댈 환자는 제법 가리는지라.”

    신체 접촉을 통한 치료는 시전자의 감정이 중요한 요소였다. 상대가 낫길 바라는 마음이나, 시전자가 느끼는 정서적 친밀함 등이 부족하면 별 효과가 없었다.

    그 때문에 살라는 치료할 상대를 따지는 편이었다. 이성은 특히나 더.

    “전 어떻게 해 보고 싶은 남자 아니면 치료할 때 손 안 대요. 어차피 중독은 제 능력으로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상처만 좀 빨리 아무는 정도일 텐데, 그거 고치자고 능력을 쓰기에는 좀…….”

    치유력을 사용하면 소진한 힘만큼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전장에서 치유력을 남용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살라가 전장에서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제 부하들이 다쳤을 때뿐이었다.

    뻣뻣한 남자는, 그것도 눈 돌아가게 예쁜 애인이 있는 남자는 그녀의 포용 범위가 아니었다.

    “괜찮은 연고 하나 드릴 테니 그거나 바르세요. 하루에 두 번, 빼먹지 말고.”

    황당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살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쪽은 취미고 제 본업은 칼질이라서.”

    내내 어색하게 굴던 달로아가 이제야 나설 때라는 듯 냉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 본업 쪽을 논의해도?”

    “그렇게 하시죠.”

    살라의 대답에 달로아는 신이 나서 아리아드네가 달성한 업적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살라의 표정이 점점 괴상해지더니, 길드에 이름을 올린 전 용병단에게 한 달 치 수입을 지급했다는 소리에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까 대륙에 존재하는 용병이란 용병은 돈으로 전부 사 버렸다는 그 말씀인가요?”

    메르디에스 재력에 상대적으로 면역력이 부족한 살라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네, 역시 돈이 좋죠.”

    달로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뽐내듯 말했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돈지랄…….”

    포로들을 상대로 온갖 사치품을 공급할 때도 느꼈지만 메르디에스의 전략은 정말 이상했다. 이렇게 이상한데 아무도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겨우 이 정도로 돈지랄이라고 하면 안 되죠. 진짜 지랄은 지금부터인데.”

    아리아드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뭐가 남았습니까?”

    “곧 페렌트 곳곳에서 케이루스 영지와 왕도를 향한 공격이 시작될 겁니다. 케이루스를 공격하는 건 우리와 계약한 용병들입니다. 규모가 적은 대신 산발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공격들이 이어질 겁니다.”

    물새 협곡에 도착한 용병의 몇 배, 몇십 배 되는 용병들이 페렌트 각지로 흩어졌다. 물론 그들의 공격이 왕도의 세력을 당장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름밤 귓가에서 왱왱거리는 모기만큼이나 성가실 것 같아.”

    하지만 달로아의 말대로 카이엔을 신경 쓰이게 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니까 서쪽 관문 전투로 케이루스와 리카서스 사이의 내분을 유도하고―”

    벌써 손가락 하나를 접은 유진이 다음 손가락을 접었다.

    “용병들이 전개하는 게릴라전으로 적의 신경을 분산하고, 그리고?”

    유진이 세 번째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리아드네가 까딱이는 유진의 세 번째 손가락을 살짝 잡은 채로 살라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잘 먹여 살찌운 포로들을 돌려보낼 겁니다.”

    살라는 며칠 전, 전략 회의에서 아리아드네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가 저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두면 적은 그것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전력을 잃게 될 겁니다.

    ‘그날 했던 말이 이것이었나.’

    살라의 짐작대로라는 듯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돌려보낸 한 명의 포로가 수십의 적을 죽여 줄 겁니다.”

    아리아드네의 말에 살라는 오래된 격언 하나를 떠올렸다.

    ‘메르디에스가 네게 돈을 줄 때는 반드시 경계하라. 그들이 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것은 네 주머니에서 몇 배로 털어 갈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살라는 그 격언이 실행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거, 내 생각보다도 판이 훨씬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그녀는 눈앞의 공녀가 다음에는 무슨 일을 벌일지 점점 기대되기 시작했다.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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