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148)

* * *

리카르도는 어둠이 내린 병영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 색이 옅은 그의 금색 머리카락이 턱 끝에서 달랑였다.

‘분명 이쪽으로 가는 것 같았는데…….’

무력이라곤 한 톨도 없는 사람이 늦은 밤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병영을 돌아다니는 것이 걱정스러울 뿐, 다른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정말 그것 때문이었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아리아드네를 찾아다니는 것은.

‘내가 잘못 봤나?’

좀처럼 찾던 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어 그대로 돌아서려던 그때였다.

“……경.”

자신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리카르도는 황급히 주위를 확인했다. 휙휙, 고개를 돌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리카르도 경, 이쪽입니다.”

달빛이 비치며 나무 아래 기대 있던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다. 붉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남자가 리카르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리카르도를 부른 이는 리뮈르 공자 달미에르였다.

아, 낮은 탄식을 내뱉은 리카르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왜 여기서 저 남자가 나온단 말인가. 리카르도는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런 리카르도에게 달미에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 표정을 지으실 것까진 없을 텐데요.”

표정? 리뮈르 공자는 맹인이 아니었던가! 화들짝 놀란 리카르도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혼탁한 달미에르의 눈동자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달미에르는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실소 비슷한 것을 흘렸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 하는 말입니다.”

보지 않고도 다 안다니 귀신인가. 리카르도는 오싹한 느낌에 양팔을 쓸어내렸다.

‘눈치가 저렇게까지 없을 수가.’

달미에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눈치로 성기사단 부단장이란 자리에는 어떻게 올랐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찾으시는 분은 찾지 못할 겁니다.”

“찾, 찾다니요! 제가 누구를 찾는단 말입니까!”

뻔히 보이는 발뺌을 하느라 리카르도의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화르륵 달아올랐다. 달미에르가 붉어진 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달미에르가 기대 있던 나무에서 몸을 떼어 내며 말했다.

유진의 부재가 그리 길지 않을 것은 달미에르도 익히 짐작했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일찍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그의 귀환에 들썩이는 사람들을 보며 깨달았다. 이대로 그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자신의 진심을.

‘얼마나 더 못나게 굴려는지…….’

복잡한 마음이나 다스릴 셈으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는데 오늘따라 운도 참 더럽지.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뒤따라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 공간에서 둘의 인기척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하긴, 유진 정도 되는 이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으니.

유난히도 피곤했던 하루가 이렇게 끝나나 했는데 때마침 리카르도가 나타났다. 눈치 없고 맹한 이 성기사는 하루를 같이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상대였다.

달미에르가 리카르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리카르도가 한껏 경계하는 것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리카르도 한 발짝 앞에서 멈춰 선 달미에르가 잔을 쥔 것처럼 만든 손을 위로 꺾으며 싱긋 웃었다.

“그럼 저랑 술이나 한잔하시죠.”

“공자와 다시는 술 같은 거 안 마십니다.”

리카르도는 저 입에서 술 소리만 들어도 이가 갈렸다. 소르체로 향하는 길에 어쩌다 달미에르와 둘이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해 놓고! 멀끔한 저 얼굴에 속아서 같이 마셨다가 다음 날 나 혼자만 숙취로 기어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진짜…….’

그날, 리카르도는 말 안장 위에서 반쯤 엎어진 채로 리뮈르 출신과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지 마시고 간단하게―”

“안 마신다니까요!”

단호한 거절에도 달미에르는 집요하게 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실랑이가 오고 갔다.

“그러지 말고 실연 동지끼리 한잔하시죠.”

달미에르가 저도 모르게 실연 동지 운운한 순간, 리카르도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

순식간에 공기가 어색해졌다. 리카르도가 적잖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달미에르의 실수였다. 리카르도가 숨긴 마음을 제 입으로 내뱉은 건.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달미에르가 깍듯이 제 잘못을 사과했다.

리카르도는 파리하게 질린 채로 비척비척 뒷걸음질을 쳤다. 고개를 숙인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누군가 알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들켜 버린 것이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비참했다.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고개를 숙인 리카르도가 마른세수를 하며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달미에르 역시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리카르도를 내심 가깝게 여겼던 것이 입을 가볍게 만들었다.

한 번 더 사과해야 하나, 달미에르가 고민하던 그때였다.

“이제껏 공자께서는 저와 비슷한 처지라고, 그렇게 생각하셨던 겁니까? 왜요? 같은 여자를 마음에 두었다는 그 이유만으로요?”

비아냥대는 리카르도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걸렸다.

“겸양이 지나치신 게 아니라면 조롱이 과하십니다.”

달미에르는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맞지만, 그것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정도인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공자와 제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지요. 리뮈르의 적자인 공자와 고아 출신 성기사가 어떻게 같은 처지일 수 있겠습니까.”

리카르도가 고아라는 것은 달미에르로서는 지금 처음 안 사실이었다. 몰랐으니 무시할 수도, 조롱할 수도 없는 것인데. 억지로 한숨을 삼킨 달미에르가 적당히 수습할 요량으로 말을 골랐다. 어찌 되었건 제 실수로 시작된 일이니.

“말씀하신 대로 저는 마물로부터 페렌트를 지켜 내는 디움의 최전선인 리뮈르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리뮈르의 누구도 오로지 실력만으로 성기사단 부단장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제 처지를 동정하셨습니까? 그래서 볼 때마다 술을 마시자고 하셨던 겁니까?”

달미에르는 술과 동정의 상관관계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제가 경을 동정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차라리 그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니던가. 도무지 영문을 알지 못하는 그를 향해 리카르도가 빽 소리를 질렀다.

“공자께서는 달헤임 전하를 부친으로 두셨지 않습니까!”

리카르도는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 그러니까 그 말씀은 마치…….”

리뮈르에 있는 동안 리카르도가 아버지를 제법 잘 따랐던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무인들에게 워낙 존경받는 분이니, 리카르도가 그러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반응은…….’

달미에르가 느물거리는 웃음을 건 채로 리카르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제가 경께서 존경하는 달헤임 전하의 아들인 것이 부러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누, 누가 그렇답니까!”

리카르도는 갈라진 목소리로 삑삑 소리를 지르더니 제 어깨에 걸쳐진 달미에르의 팔을 휙 잡아 던졌다. 당장이라도 도망갈 태세였다.

“그러지 말고 저랑 술 한잔하시지요. 경께서 그토록 존경하는 달헤임 전하의 이야기도 들려 드릴 겸.”

달미에르는 이번에는 반대쪽 손을 턱 하니 리카르도의 어깨에 걸치며 싱긋 웃어 보였다.

“됐습니다.”

리카르도는 리카르도대로 짜증이 났다. 나이도 한참 어린놈이 사사건건 저만 보면 시비를 걸어 댔다.

“아, 이거 치우십시오!”

다시금 올라온 팔을 내친 리카르도가 도망가듯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거머리 같은 달미에르가 그를 쫓아왔다. 경, 경 그를 애타게 불러 가면서.

* * *

왕도로 향하는 길에는 다섯 방향으로 난 관문이 있었고, 그것은 각 가문의 영역이었다. 그중에서도 해머리 강을 경계로 한 서쪽 관문을 지키는 것은 ‘창명의 리카서스’였다.

서쪽 관문의 경계인 해머리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리카서스에서 운영하는 선박을 이용해야만 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지라 해머리 강을 건너는 비용은 해마다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런 탓에 서쪽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까다로웠다. 평소에도 그러한데 전시인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해머리 강 양쪽으로 관문을 지키는 리카서스의 병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원래라면 검문을 받는 것은 강을 건넌 이후였으나, 지금은 강을 건널 수조차 없었다. 강 가까이만 다가가도 리카서스의 병사들이 거칠게 쫓아냈기 때문이다.

통행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던 성벽의 문은 굳게 잠긴 채였다. 무장한 병사들은 벽처럼 굳건하게 해머리 강을 지키고 있었다. 강을 건널 엄두도 내지 말라는 것처럼.

그때, 허름한 행색의 사내가 병사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 이것 좀 받아 주십시오.”

품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꺼낸 사내가 병사들에게 무작정 물건을 들이밀며 읍소했다.

“아프신 노모를 보러 가야 합니다. 제발 이것을 받고 저 좀 들여보내 주십시오.”

사내가 내민 것들을 힐끗 내려다본 병사가 쯧, 혀를 차며 그를 밀어냈다.

“겨우 이따위 것 먹자고 닫힌 관문을 여는 머저리가 어디 있다고.”

관문을 여는 것은 말단 병사인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설사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적당한 금액이 필요한 법이었다. 저런 푼돈은 윗선에 뇌물을 바치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물론 지금은 뇌물을 받고 기강을 흐트러뜨리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제발 봐주십시오, 나리. 이대로는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할 겁니다.”

사내가 병사에게 끈덕지게 매달리며 애원했다.

‘어, 이거 좀 이상한데.’

머리를 스친 어떤 생각에 병사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뭐 하는 거야. 어서 쫓아내! 어수선하게 두지 말고.”

상관이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병사가 사내를 거칠게 다루었다.

“아니, 이게 미쳤나?”

병사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사내의 가슴팍을 퍽 소리가 나도록 걷어찼다. 사내는 가슴을 움켜쥐며 데굴데굴 굴렀다. 허억, 헉헉, 사내는 가쁜 숨을 내쉬더니 기침과 함께 피를 한 움큼 쏟아 냈다.

“아이고, 나 죽네. 아픈 어머니도 못 보고 나 죽네.”

사내는 상의에 피를 잔뜩 묻힌 채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사내의 고함에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웅성 시끄럽게 떠들었다.

병사들을 보는 눈초리가 사나웠다. 사람들은 그간 억눌렸던 불만을 터트리듯 소리 높여 항의했다.

“아니, 좀 심한 거 아니요?”

군중 속에 파묻힌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며칠째 발이 묶여서 거래고 뭐고 다 파투 났다고! 그렇다고 보상해 줄 것도 아니면서.”

“나는 원래 집이 저쪽이란 말이야! 지금 한 달째 집에도 못 가고 있어!”

군중의 거센 분노와 마주한 병사들은 당황했다. 원래 민중들이야 제 목숨 잃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이들이었다. 힘이 없어 밟히는 것에 익숙한 이들이 무장한 병사에게 이렇게 맞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어, 어어어! 이게 대체…….”

강을 등진 채로 열 맞춰 서 있던 병사들이 군중의 기세에 점점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풍덩! 밀려난 병사 중 누군가가 기어이 강에 빠지고 말았다. 어수선한 가운데에서도 그 소리는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강에, 여기 사람이 강에 빠졌다!”

열을 이탈한 병사들과 군중들이 뒤섞여 해머리 강 주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조금 전 추레한 사내에게 붙들렸던 그 병사였다. 그는 사내의 피가 묻은 제 손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마치…….”

이윽고 이상한 점을 발견한 병사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돼! 반항하는 자는 모두 죽여도 좋다.”

리카서스의 지휘관에게서 사람들을 죽여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반쯤 눈이 돌아간 병사들이 칼을 빼 들었다. 스릉, 검집을 빠져나온 칼이 빛을 내는가 싶더니 군중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채앵, 챙! 챙! 날붙이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군중 가운데 몇몇이 쇠막대기나 빼앗은 무기를 들고 병사들에게 대항했다.

“아니야. 저건 그냥 평민들이 아니야.”

사내에게 붙들렸던 병사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마구 내저었다. 깡마른 사내에게 붙들렸을 때,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도무지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내가 기침을 하며 토한 것도 피가 아니라 붉은 염료였다.

그렇다면 저들은…….

“적, 군이, 숨어 있―”

하지만 병사의 경고는 끝을 맺지 못했다. 사악― 날이 잘 든 칼로 종이를 베어 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병사는 마지막으로 제 목을 자른 이를 눈에 담았다. 역시 그자였다. 아픈 노모가 있다던.

“이자들은 평범한 농민이 아니다!”

군중 사이를 누비는 이들 중에 유난히 몸놀림이 범상치 않은 몇몇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교묘하게 전장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점점 뒤로 밀어냈다. 병사들의 뒤는 해머리 강이었다.

“지원, 지원을 요청해!”

풍덩! 아비규환처럼 변해 버린 서쪽 관문에서 밀려난 병사들은 강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가 콧바람을 내뿜으며 투덜댔다.

“흥, 그러게 왜 날 건드려. 그날 물귀신 될 뻔했던 걸 생각하면…….”

남자는 이걸로도 분이 안 풀린다는 얼굴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복수다! 이 물미역 같은 놈아.”

물미역 운운하는 남자는 바로 메르디에스 공작 레너드였다.

그는 강 건너 굳게 닫힌 성문을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보우 강 상류에서 수장당할 뻔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분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수문이 열리며 쿠르릉, 물이 몰아치던 소리가 떠오를 때면 등 뒤가 섬뜩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곤 했다.

서쪽 관문이 뚫리면 왕도로 향하는 길이 또 하나 열린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지만 레너드는 다른 것이 더 기대되었다. 예를 들자면, 제집 안방이 털린 칼의 매끈한 면상이 구겨지는 그런 것. 레너드는 상상만으로도 몹시 흡족하여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피융! 푸슉! 잠잠하던 강 건너 성벽에서 화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던 군중들의 기세가 주춤해졌다.

“원군이다! 조금만 더 버텨!”

리카서스의 병사들이 소리 높여 서로를 독려했다.

“뭐, 아직도 모르면 그게 바보지.”

지켜보던 레너드가 중얼거렸다. 강 건너에서 벌어진 소란을 관문에서 알게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성벽에서 쏘는 화살로 전황을 뒤집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강 가까이 있던 리카서스 병사들이 한 차례 떨어진 다음 진영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뒤엉킨 지 오래였다.

아군을 모조리 죽일 셈이 아니라면 화살은 분위기를 환기하는 수단,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기울어진 전황을 뒤집기 위해서는 더 큰 무언가가 필요했다.

스윽, 처억, 척척척.

강 위에 유유히 떠 있던 배가 줄줄이 강가에 정박하더니, 그 속에서 리카서스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심해처럼 짙푸른 남색의 갑주를 입고 있었다. 말단 병사들이 아니었다. 리카서스 이름 아래에서 작위를 부여받은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이 양옆으로 도열하자 새까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남자는 장식이 없는 새까만 옷을 걸치고 있었다.

주위를 느릿하게 둘러본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리카서스의 영역을 어지럽힌 자들을 살려 두지 마라.”

남자의 말에 기사들이 합류하기도 전인데도 리카서스 병사들의 기세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와아아아아아!”

“왕후께서 오셨다!”

왕후 칼의 등장에 리카서스 병사들은 눈이 벌겋게 변해 군중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군 출진.”

때를 기다리며 몸을 숨기고 있던 메르디에스 기사들 또한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양쪽 기사들이 합세하자 싸움은 엎치락뒤치락하며 팽팽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어찌나 굼뜬지, 지루해서 원.”

멀찍이서 모습을 드러낸 레너드가 부러 하품을 하며 칼을 도발하듯 말했다.

“아, 역시 자네였군.”

칼이 레너드를 보며 반갑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네놈도 참 한결같아. 나는 네 얼굴만 봐도 이렇게 기분이 뭐 같은데.”

레너드는 질린다는 얼굴로 칼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레너드의 행동에 칼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나는 언제나 자네가 반가운데 영 환영받지 못하는군.”

“나와는 다르게 네놈이야 어딜 가나 환영받는 인사는 아니니까?”

레너드의 이죽거림에도 칼은 소리 없이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 꼴을 지켜보는 레너드의 속만 터져 나갔다.

“그러게 나 모르게 움직이려거든 좀 더 얌전히 움직였어야지. 가는 길마다 쿵쿵 흔적을 남기니 이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잠입을 들켜서는 의미가 없지 않나. 충고처럼 덧붙이는 왕후의 말은 제법 다정한 껍데기를 쓰고 있었다. 물론 레너드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렸지만.

“원래 큰 인물은 큰 족적을 남기는 법이지. 자네 같은 소인배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레너드의 뻔뻔한 대응에도 칼은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레너드가 칼을 질색하는 만큼, 칼도 레너드가 하는 짓에 익숙한 탓이었다. 평생을 부대끼며 살아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왜 혼자 왔나?”

칼의 난데없는 물음에 레너드는 제가 데려온 메르디에스 병력을 손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네 눈에는 이게 혼자로 보이냐?”

“자네가 분신처럼 여기는 이가 없으니 혼자와 무엇이 다른가.”

칼은 메르디에스의 기사단장인 커티스의 부재를 들먹였다.

“왜, 리스벨 백작이 이젠 자네 뒤치다꺼리하기 지쳤다고 하던가? 그러게 잘 좀 해 주지 그랬나.”

칼의 빈정거림에도 레너드는 조금도 발끈하지 않았다. 커티스의 부재를 말하는 레너드의 어조는 더없이 진중했다. 평소의 경박한 말투와는 달랐다.

“커티스는 이번 전쟁에서 본대의 선봉장을 맡았다. 그것은 물새 협곡을 뚫고 페렌트의 왕궁에 메르디에스 깃발을 꽂는 첫 영광이 그의 몫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평생 자신의 목숨을 걸고 레너드를 지켜 주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커티스의 역할이 레너드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어서는 곤란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하는 이따위 장난질에 커티스가 동행할 수 없는 이유다.”

“아니, 그게 아니지.”

레너드의 말을 듣던 칼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인간의 영혼을 손에 넣은 악마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죽었다면서, 자네 딸을 구하려다.”

조용한, 그렇지만 매우 또렷한 목소리였다.

“자네 입장에서는 딸을 잃은 리스벨 백작이 앙심을 품지는 않았을까 의심스러울 테고, 리스벨 백작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전처럼 충성하긴 어려울 테지.”

칼은 막힘없이 말을 이어 갔다.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등을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니. 내 말이 틀렸나?”

제가 내린 결론이 흡족하다는 듯 그는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아, 네놈 개소리는 어째 지치는 법이 없냐.”

레너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애처롭다는 눈길로 칼을 쳐다보았다.

“너도 자식을 잃었으니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레너드의 눈에 비친 칼은 평소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돼먹지 않은 헛소리만 하는 것도, 성격 나쁜 웃음도 여전했다. 하지만 그 속까지 그럴까. 레너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칼의 매끈한 얼굴조차도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자네 생각 같진 않을 걸세.”

조금도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칼은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백이라면, 백 가지 마음이 있겠지. 자식을 잃었다는 공통점만으로 내가 리스벨 백작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네.”

레너드같이 제 핏줄을 아끼는 이들은 모두가 그런 마음을 타고나는 줄 알았다.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이들이 훨씬 더 많은데도. 참으로 폭력적이고, 진실로 다정하지 않은가. 칼은 레너드를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네놈을 잠시나마 불쌍하게 생각했던 내가 미친놈이다.”

“그건 동감일세. 자네가 미쳤다는 그것 말일세.”

칼의 도발에도 레너드는 더는 엮이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한 입씨름은 됐고. 내가 오늘 여기 나타난 것은 자네에게 직접 할 말이 있어서네.”

할 말? 매끈하던 칼의 표정에 금이 갔다. 의아하다는 듯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들렸다.

레너드의 방금 그 말은 결국 이 모든 것이 칼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는 뜻이었다. 대체 자신에게 할 말이 뭐기에 메르디에스의 성주, 남부 귀족 연합의 수장 레너드 메르디에스를 미끼로 쓴단 말인가.

곧은 시선으로 칼을 응시한 레너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자식을 죽인 진짜 원수가 누구인지 그건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네. 이계의 방문자 유진, 자네 딸과 정분이 난 그 남자.”

“네 아들을 죽인 사람은 그가 아니야.”

“내 아들의 가슴팍에 그자가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구멍이 있는데도 말인가?”

칼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믿지 않았다. 그는 제 판단만을 믿었다. 이번 판단의 근거는 루안의 가슴에 남은 상처였다.

“나는 오늘 자식을 둔 아버지로 이 자리에 섰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자네의 아들을 죽인 진짜 범인은 따로 있어.”

레너드의 푸른 눈이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가 아는 레너드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 저런 얕은수로 상대를 설득하려 드는 이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럴듯한 다른 증거를 만들어 내면 몰라도.

“……장사치의 혓바닥을 내가 믿으리라 생각했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가늘어진 칼의 눈동자가 레너드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자식을 둔 아비로, 어쨌든 평생 얼굴을 맞댄 상대에 대한 예의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네.”

믿든 안 믿든 그건 네놈이 알아서 할 일이고. 어느새 평소 같은 어투로 돌아온 레너드가 그렇게 덧붙이며 돌아섰다.

“…….”

“아 참, 선물을 잊을 뻔했군. 보우 강 상류에서 네놈한테 받은 게 워낙 많아서 차마 빈손으로 올 수가 있어야지.”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멈춰 선 레너드가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칼의 뒤쪽을 가리켰다.

피융― 펑! 퍼엉! 펑펑펑! 마치 꼬리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강을 향해 떨어졌다.

“이거나 배 터지게 먹어라.”

레너드는 미친놈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몰아 사라졌다.

“저, 전하! 왕후 전하, 배가, 배가…….”

칼은 기사들의 수선에 강을 돌아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 같은 것에 맞은 배는 구멍이 난 채로 뒤집히거나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다.

레너드가 선물이라며 던지고 간 이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불화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저런 물건이 있었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운석 같은 것이 더는 날아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것이 추가로 더 날아오지만 않는다면 이쪽이 질 일은 없었다.

‘현재로선 저 물건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모양이군. 어쩌면 제대로 된 생산이 아직 가능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고.’

냉정하게 전황을 확인한 칼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선떨 거 없다. 물에서 우리를 이길 자가 있을 것 같으냐?”

배 몇 척 잃은 것으로 승패가 바뀌지는 않는다. 물 위에서 그들은 언제나 승리자였다.

금세 전열을 가다듬은 리카서스의 기사들이 강 위로 떨어진 적들을 손쉽게 제압해 나갔다. 배에 매달리기 급급한 적들과는 달리 리카서스의 기사들은 조각난 널빤지 위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였다.

“돌아간다.”

전황이 이쪽으로 기울었으니 그가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칼이 전장을 떠나려던 그 순간이었다.

“거기 서라. 이 깡패 같은 놈들아.”

앞뒤 없이 내지르는 천박한 언사가 마치 레너드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괴한들이 악을 쓰며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합류하자 기세는 다시 변했다.

“리카서스의 물뱀 따위 우리가 그냥 가죽을 쭉 벗겨서 잡아먹지!”

우하하하, 저들끼리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린 괴한들은 갑판을 밟고 공중제비를 돌며 배를 넘나들었다. 개개인의 역량으로만 보면 괴한들 쪽이 리카서스 기사들보다 우위였다. 물 위에서 태어난 것처럼 움직이는 저자들의 정체야 뻔했다.

“……수적(水賊).”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듯 괴한 중 한 명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그게 아니지. 땅 뱀을 잡으면 땅꾼이니까 우리는 물뱀 잡는 수꾼이지, 수꾼.”

일반적으로 수적(水賊)이란 바다나 강에서 노략질로 생계를 꾸려 가는 이들을 말했다. 하지만 수적이라 불리는 이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물에서의 활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이들 중에는 바다의 지배자를 자처하며 온갖 횡포를 부리는 리카서스에 반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리카서스에서는 그들을 수적이라 부르며 소탕했고, 그들 쪽에서는 리카서스를 물뱀이라고 부르며 대응했다.

리카서스의 끈질긴 추격을 버텨 내며 살아남은 수적들은 그 저력이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물 위에서 움직임만 놓고 보면 수적들이 리카서스의 기사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들이 리카서스에 밀리는 것은 조직력과 제대로 된 무기가 부족한 탓이 컸다.

까앙― 깡! 깡!

리카서스의 기사가 든 검과 수적이 든 검이 거세게 부딪쳤다. 그렇게 부딪힌 두 개의 검 중 하나가 두 동강이 나더니 그대로 풍덩, 강으로 빠졌다.

“와 씨, 아름답다. 이 광채!”

둘 중 살아남은 검은 수적이 들고 있던 것이었다.

“역시 메르디에스. 쩨쩨한 물뱀이랑은 상대가 안 되지.”

페렌트에서 가장 양질의 철을 생산하는 광산은 당연히 메르디에스의 것이었다. 메르디에스에서 공급한 질 좋은 검을 든 수적들은 날개라도 달린 듯 펄펄 날아다녔다.

그렇다면 리카서스는 조직력으로 저들을 상대해야 했다.

“전열, 을…….”

칼은 차마 ‘전열을 가다듬어라.’ 같은 명을 내릴 수가 없었다. 리카서스의 배는 구멍이 뚫려 물이 줄줄 새거나 산산조각이 난 채로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 배로는 제대로 된 전략을 수행할 수 없으니 싸움은 백병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허우적대며 뒤엉킨 채로 서로의 머리를 물에 처박고 밑에서 당기는 꼴이 개싸움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주 개판이었다.

“내 아들을 죽인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날 죽일 놈이 누군지는 알겠구나.”

칼은 미친놈처럼 웃으며 사라지던 레너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레너드가 보았다면 참으로 즐거워했을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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