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전략 회의를 마친 아리아드네가 서둘러 유진이 지내는 막사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대로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 메르디에스 공녀? 무슨 일이십―”
병영을 가로지르던 리카르도가 창백하게 질린 아리아드네를 보고 그렇게 물었지만.
“나중에, 보고는 나중에 받을게.”
아리아드네는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리카르도라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머리가 뒤죽박죽이라 사람들을 불러 그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병영 안을 마구잡이로 헤맸다.
‘제발, 제발.’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발견한 건 식량 창고로 쓰이는 목조 건물 뒤편에서였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까만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유진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드네?”
온통 땀범벅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는 아리아드네를 본 유진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향해 뻗는 그의 손을 내치며 소리를 질렀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그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버럭 화부터 났다.
“괜찮아?”
유진은 온통 땀범벅인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물었다. 그였다. 독으로 엉망이 된 몸을 하고도 겨우 땀에 젖은 것이 전부인 자신부터 걱정하는.
자신의 얼굴을 감싼 그의 손이 언제나처럼 서늘해서 울컥 울음이 터졌다.
“당신이 없어서……. 난 당신이 또 떠난 줄 알고…….”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조금 전 자신이 그토록 불안했던 이유를 알았다.
이대로 그가 사라질까 봐. 또 그를 보지 못하게 될까 봐. 또다시 누군가가 자신을 떠날까 봐.
텅 빈 막사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
그가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품으로 당겨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젠 어디에도 안 가. 당신만 날 버리지 않는다면.”
아리아드네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내가 왜 당신을 버려.”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그가 잔뜩 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리아드네, 나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
아리아드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었다. 유진의 뒤쪽으로 펼쳐진 남색 하늘에 귀퉁이를 살짝 베어 문 것 같이 이지러진 달이 걸려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뒤로 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다. 저 달만큼은 자신이 살았던 ‘그 시간’도 모두 지켜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아리아드네에게 ‘그 시간’은 후회와 증오로 점철된 얼룩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들이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은 누군가가 그 시간을 알아주기 바랐던 것인지도 몰랐다. 괴롭고,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발버둥 치며 꾸역꾸역 버텼던 그때의 자신을.
“당신도 기억해?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기 전의―”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그가 괴로운 듯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다른 시간을 살았던 나를.”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그의 손을 끌어 내렸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조금. 아직 전부는 아니지만.”
그는 레오의 유해에서 다른 시간을 살았던 ‘유진’의 기억을 읽었다. 하지만 레오의 유해에 남은 ‘유진’의 기억은 ‘유진’이 아르체의 지하 신전을 찾았던 그때까지였다.
다른 시간을 살았던 ‘유진’이 이후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꾸는 악몽의 편린 중에는 그 이후를 짐작할 만한 것이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 줄 건가?]
그때의 자신은 높은 탑, 두꺼운 창살 너머 돌바닥에 웅크린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내 가족을 돌려줘. 내 삶을 돌려줘. 내 시간을 돌려줘. 나를, 나를 돌려줘.]
제 영혼을 바쳐서라도 그녀의 후회를 전부 없던 것으로 해 주고 싶었다. 그녀의 삶을 되돌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 그들이라면 이미 죽었지. 그녀가 사랑하던 것, 그녀를 사랑하던 것, 이 세상에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아리아드네가 사랑하던 것과 아리아드네를 사랑하던 것이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세상. 그녀의 세상을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나는, 나는…….”
무슨 말로도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순 없었다. 시간을 되돌렸다고 해서 그녀가 경험한 그 모든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녀의 삶을 무너트리고도 뻔뻔하게 애정을 구걸하는 기만자에 불과했다.
유진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듯 땅바닥에 처박힌 꼴이 되었다. 그는 마지막 선고를 앞둔 죄인처럼 아리아드네 앞에 엎드렸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몸을 숙여 그의 몸을 감쌌다.
“있잖아. 나, 1왕자를 왕으로 만들었었어.”
아리아드네는 더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어느 시간의 자신이 살았던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사냥이 끝나고 끓어오르는 솥에 던져진 개가 된 기분이 어떠신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남자에게 자신은 사냥을 대신해 줄 사냥개에 불과했다. 어리석었던 사랑의 대가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왕이 된 남자는 날 버렸어. 내 사람들을 죽이고, 내가 자란 성을 불 지르고, 나를 탑에 가뒀어.”
원망의 시작은 언제나 카이엔이었으나 그 끝은…….
“나는 나를 죽이고 싶었어.”
그때의 아리아드네가 가장 증오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아니, 아리아드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고개를 쳐든 유진이 그녀의 말을 강하게 부정했다. 아리아드네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길에 그의 눈이 반사적으로 감겼다.
“맞아. 내 잘못이 아니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난 개한테 물린 거였어.”
아리아드네도 알았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은 스스로를 할퀴는 것을 도무지 그만두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제 잘못을 면피하려는 변명으로만 느껴졌다.
“그때, 어둠 속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 줄 것처럼.”
눈을 감으면 탑에 갇혔던 그때의 절망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당신의 목숨으로 그 바람을 이루리라.]
그 말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말대로 내 바람은 이루어졌고, 나는 지금 이곳에 있어.”
그가 구한 것은 스스로를 원망하며 죽어 가던 제 영혼이었다.
“지금 내 삶은 당신이 내게 준 거야.”
그녀의 말에 그가 몹시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내는 사람처럼 힘겹게 말했다.
“아니, 나는, 나는…….”
알고 있었다. 때론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있다는 것을. 이대로 모르는 척 눈을 감으면 그녀는 결코 자신을 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제 삶을 구한 것이 그라고 믿고 있는 그녀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당신을 구한 게 아니야. 당신을 그 지옥으로 빠트린 건, 당신의 세상을 무너트린 건 바로 나였어.”
그녀의 불행은 1왕자만의 몫이 아니었기에.
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어떤 비난도, 추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고 아득한 눈동자로 말없이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때도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어. 그리고 지금과 달리 그때의 ‘나’는 1왕자가 내미는 손을 거절하지 않았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당신이 찾아 헤맨 물건이 이것 맞습니까?]
[…….]
[드리지요. 대신 저와 거래를 하나 해 준다면.]
카이엔은 별의 그릇을 미끼로 ‘유진’에게 거래를 제안했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모든 일이 끝나고 케이루스의 성물을 받는 대가로 1왕자에게 내 힘을 빌려주기로 했어.”
그의 손끝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황금빛 머리가 떠올랐다.
유진은 한때 제 육체였던 카푸트의 머리카락을 잘라 내어 아리아드네 손에 쥐여 주었다. 마치 황금에서 뽑아낸 듯한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에 가지런히 놓였다.
아리아드네는 ‘이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황금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탑에 갇힌 자신을 찾아온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던 무언가의 뼈와 그것을 꿴 줄에 함께 달려 있던 황금빛 술. 이것은 과거의 유진이 자신에게 주었던 그 황금빛 술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황금빛 술을 쥐고 있었던 그때, 세상의 시간이 제 뜻대로 움직였던 것도 기억했다. 카푸트의 머리카락을 쥔 아리아드네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약속한 횟수는 세 번, 그는 ‘이것’으로 세 번의 시간을 멈췄어.”
그는 마치 고해하는 죄인처럼 어렵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만든 세 번의 순간이 당신을 불행하게 했을 거야. 그는 그걸 이용해 당신의 가족을 죽이고, 당신이 자란 성을 불태웠겠지.”
아리아드네는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들 중에서 카이엔이 시간을 멈춘 것이 언제였을지 짐작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그의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유진의 몸이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몸을 떨었다.
“내가 당신의 시간을 되돌렸다면, 그건 내 잘못을 갚기 위해서였어. 내가 빼앗은 당신 삶을 돌려주기 위해서.”
감히 그녀의 사랑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저…….
“나는 당신이 다시 햇살 아래에서 눈이 멀도록 환하게 웃기를 바랐어. 당신의 눈동자가 다시 빛나는 광경을 보고 싶었어.”
하늘을 쳐다보지 않아도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던 당신이.
“아니, 다시는 내가 당신을 보지 못한다 해도 당신만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랐어.”
응달에 놓인 초목처럼 말라 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나는, 감히 이런 순간을 꿈꾸지 않았어.”
그럼에도 당신의 곧은 눈동자는 사랑에 빠진 그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당신을 다시 사랑하고 말았다. 당신을 절망의 구렁에 밀어 넣었던 것이 자신이라는 것도 잊고서.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숙여 흙바닥에 처박힌 유진과 시선을 맞추었다.
“유진, 내 가족을 죽인 건 당신이 아니야.”
지금 유진이 어떤 마음일지 알았다. 탑에 갇힌 자신도 그러했으니까.
“1왕자에게 힘을 빌려준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를 왕으로 만든 건 나였으니까. 그가 빌린 힘으로 무슨 짓을 했건,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이제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를 원망할 이유도 없었다.
“우린 미친개한테 물린 거니까.”
그녀는 유진이 쥐여 준 카푸트의 황금빛 머리카락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묻었다.
당신은 여전히 나를 구원했노라고. 아리아드네는 자그맣게 속삭였다. 밤의 달빛이 고개를 숙인 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쏟아져 내렸다.
유진은 엘바로 가는 선실에서 제 유해에 애도를 표하던 아리아드네를 떠올렸다.
―삶도 죽음도 속박하지 않는 땅에서.
그녀는 레오의 안식을 기원해 준 유일한 존재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조차 경멸했던 자신을.
“고마워.”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새까만 머리카락에도 입을 맞추며 낮게 읊조렸다. 아무리 간절하게 빌어도 이 말만은 그에게 닿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닿을 수 없을 줄 알았던 감사의 인사가 마침내 주인을 찾아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에도 나를 사랑해 줘서.”
[내가 남 일에 훈수 두는 성격은 아닌데, 당신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인지 잘 생각해 봐.]
[신의 이름으로 무한한 축복과 영원한 행복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내게 당신을 사랑할 기회를 줘서.”
―아가씨, 눈앞의 남자를 치워 줄까? 그러기를 원하면 그렇다고 말해.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다시 사랑해 줘서. 고마워.”
아리아드네가 변함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따스한 애정이 담긴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사랑해, 사랑해. 이런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서.”
토해 내듯 사랑을 말한 그가 아리아드네를 끌어안았다. 둘 다 흙바닥에 반쯤 뒹군 꼴이 되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바닥에 누운 채로 자신을 끌어안은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입술 끝만 겨우 닿은 가벼운 키스는 마치 솜털처럼 간지러웠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간지러운 숨이 새어 나왔다.
“유진.”
아리아드네의 부름에 유진은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찡그린 그의 눈꺼풀 위로 입을 맞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젠 들려줘. 당신이 알게 된 당신 이야기도.”
천천히 눈을 뜬 그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쓸쓸하고 상처받은 잿빛 눈동자, 그가 품고 있는 비밀이 알고 싶었다.
“알고 싶어. 당신이 어떤 존재라 해도 나는 당신을 계속 사랑할 테지만, 나는 당신을 전부 알고 싶어.”
그의 외로움을 안아 주고 싶었다. 유진은 낮은 한숨과 함께 느릿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아르체 사람이었어.”
아리아드네는 때론 느리게, 때로는 듬성듬성 건너뛰는 그의 이야기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들어 주었다.
“육체에서 떨어져 나온 내 영혼은 차원을 떠돌며 죽어 가는 몸을 숙주로 삼았던 것 같아. 그리고 끝내는 내 육체가 남아 있는 이곳으로 되돌아왔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리아드네는 그저 말없이 그를 꽉 안아 주었다.
“혼자 많이 힘들었지.”
한참 그를 안고 있던 아리아드네가 처음으로 한 말은 그것이었다.
“당신의 슬픔을 다 이해한다고, 그렇게 말할 순 없을 것 같아.”
마음을 두드리는 음악처럼, 그녀의 위로가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런데 있잖아. 사람을 잃은 슬픔은 흐려지는 게 아닌 것 같아. 잊은 것처럼, 모르는 척 덮어 두고 지낼 뿐이지.”
아리아드네가 경험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눈을 감고 자갈밭을 걷는 것처럼, 언제든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 것.
그렇게 넘어지면 어떤 날은 흙먼지만 털고 일어나기도 하지만, 무릎을 깨 먹고 기어이 울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 길이 언제쯤이면 걸을 만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는 억지로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넘기는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에도 어쩔 수 없는 체념과 슬픔이 묻어났다.
“우리 그냥 그렇게 살자. 바람이 좋은 날, 문득 덮어 둔 기억이 떠오르면 슬퍼할 만큼 슬퍼하고……. 눈이 오는 날, 그 사람과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면 그리워할 만큼 그리워하고 그렇게…….”
아리아드네는 잊으라는 말도, 괜찮아질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슬퍼하라고, 그리워하라고.
“내가 들어 줄게. 당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은 어땠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당신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전부 다 들어 줄게.”
기억하라고.
“그러면 나도 그 사람을 기억하는 거잖아.”
함께 기억해 주겠다고 말했다.
“우리 그렇게 살아. 우리가 잃은 것들을 서로가 기억하면서 그렇게…….”
아리아드네는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디티에 관해서 물었다. 디티가 좋아하던 꽃이 뭐였는지, 어떤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 그러한 것들을.
그조차도 잊고 지냈던 디티의 모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디티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해 보지 못했는데.
이상했다. 그녀와 있으면 모든 것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제 속에서는 그렇게 무겁던 것들이 그녀 곁에서는 훌훌 가벼워졌다.
유진이 손을 뻗어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살짝 쥐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방주의 분수에서 보았던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
그때는 그것이 무너진 신전에서 본 성화 속의 여자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그를 구하기 위해 리뮈르의 연못에 뛰어든 아리아드네인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구원이라는 것을.
“당신도 케이루스가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아마도.”
200년 전, 케이루스와 대치했던 레오가 물러난 것은 그들을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디티의 소망을 깨트리려 한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젠 케이루스와의 싸움은 아리아드네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레오와 그들 사이의 오랜 악연을 끊어 내는 싸움이기도 했다. 낙원을 꿈꾸며 지옥을 만들어 낸 이들을 너무 오래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가 카이엔을 없애야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무렉스에게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무렉스는 그의 일부인 페루스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정말 너를 두고 떠난 주인을 원망하지 않나?
유진이 그렇게 물었을 때.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원망하더냐? 내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내 운명은 결정된 셈이지. 내 존재가 멸할 때까지 오직 그분만을 그리워하고 슬퍼하도록.
―별 거지 같은 관계도 다 있군.
무렉스는 그 말을 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자신을 만든 신에게 버림받은 권속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이상하다.
권속을 품은 자가 그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무렉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쳤을지 이제야 짐작이 갔다.
유진은 머리로는 여전히 그 감정을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 안에 남은 페루스의 감정은 그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것은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권속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사라지기 전에 너를 보게 되어 다행이다. 나의 이 기다림을 이해해 줄 존재는 너뿐이니까.
유진은 이제야 무렉스의 기다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기다림을 이해해 줄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렉사와 무슨 약속을 했는데?”
―나는 얼마 남지 않았다. 다른 것은 상관없어. 내가 루안을 지키지 못하거든……. 저 아이를 죽인 자를 죽여다오. 그것이 내 요구 조건이다.
“그것이 무렉스가 내게 원한 성채였어.”
아― 아리아드네는 낮은 탄식을 내쉬었다. 전략 회의 내내 제 신경을 거슬리던 것의 정체를 이제야 깨달았다.
“카이엔에게 복수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주머니에 넣어 둔 무렉스의 구슬을 꺼내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깨어진 구슬의 단면이 날카롭게 빛났다.
“루안의 죽음. 카이엔은 그 값을 치러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