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48)

* * *

―당신이 나를 봐 주지 않아도, 나는,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을, 사랑했어.

자신을 붙든 채 기절한 유진이 남긴 말이 아리아드네의 귓가에서 맴돌았다.

“……드, 네?”

아무래도 유진이 마음에 걸렸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어서 그에게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

자신을 부르는 달로아의 목소리에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었다. 원탁을 둘러싼 사람들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아리아드네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의원, 지금 당장 의원을 불러!

기절한 유진을 붙잡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리를 지르는 아리아드네에게 살라가 다가왔다.

―제가 보죠. 여기 저보다 나은 의원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간단한 응급 처치를 마친 살라가 유진을 막사로 옮겼다.

―음, 아무래도 체내에 들어온 독을 무시하고 계속 움직여서 잠시 쇼크를 일으킨 것 같은데……. 이렇게 봐서는 무슨 독인지 모르겠네요. 코라라면 보는 것만으로 알겠지만.

막사로 옮긴 유진을 살펴본 살라가 그의 왼쪽 가슴에 보랏빛 멍처럼 남은 톱니에 찢긴 듯한 상처를 보며 말했다.

―신경도 살아 있고 독이 몸 전체로 퍼진 것도 아닌 듯하니, 열만 내리면 의식이 돌아오겠네요. 그때 환자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약을 쓰도록 하죠.

살라는 유진의 손끝부터 눈동자까지 구석구석 살펴보더니 하루 정도면 의식을 차릴 거라 했다. 위독한 것도 아니니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그가 걱정돼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아픈 모습이 낯설었다. 태산처럼, 하늘처럼 그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일 줄 알았다.

‘나는 당신을 대체 뭐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리아드네는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배고프면 먹고, 시간 되면 자고, 다치면 피 흘리는……. 당신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그도 다치면 아프고 무리하면 힘든 게 당연한 사람인데.

“괜찮을 거야. 열도 거의 내렸다며.”

달로아가 아리아드네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 괜찮겠지.”

유진을 혼자 두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촌각을 다투는 시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의 곁에만 붙어 있을 순 없었다. 한숨과 함께 겨우 마음을 다스린 아리아드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죠.”

그것을 시작으로 물새 협곡의 후방 진지에서는 향후 전투를 위한 전략 회의가 열렸다. 시중인으로 위장했던 소르체의 지원군이 함께 자리한 첫 전략 회의였다.

“아니, 저런 전력이 있으면 회의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회복이야 금방 할 테고.”

살라는 독에 중독된 상태로도 혼자 수백 명을 너끈히 상대했던 유진을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커 들고 있다고 안심하다간 패가망신하기 딱 좋으니까.”

지도 위의 말들을 바쁘게 옮기던 달로아가 고개를 들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인생에서 조커는 여분 같은 거죠, 덤.”

정리가 끝난 듯 손바닥을 두어 번 탁탁, 부딪힌 달로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이대로 시작해도?”

사람들의 동의를 얻은 달로아가 전략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달로아의 진짜 능력은 ‘심연의 눈’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전략에 특화된 인재였다. 달로아는 페렌트의 북방 경계선을 지키는 리뮈르에서 자란 터라 기본적으로 전술에 능했다.

―어렸을 때, 미에르한테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다 읽어 줬거든. 그런데 우리 집에 있는 책들이 다 그런 거라서……. 강제로 영재 교육한 셈이지.

거기다 달미에르의 눈이 되어 주겠노라며 리뮈르의 장서를 있는 대로 읽었던 경험 또한 달로아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리고.

―무조건 걸려들게 돼 있어.

―아니, 여기선 멈춰야 해. 더 들어가는 건 위험해.

치고 빠지는 감각이 가히 예술적이었다. 달로아가 어린 나이에 리뮈르 도박판을 휘어잡은 것은 단순한 요행이 아니었다.

“물새 협곡을 지키는 적의 병력은 3만, 리카서스와 케이루스에서 절반씩 차출했어. 그리고 그중 케이루스 정예 1만이 오늘 우리 진지를 쳤으니, 물새 협곡에 남은 케이루스의 병력은 5천에 불과해.”

달로아의 손가락이 지도 곳곳을 짚으며 현재 세력 구도를 설명했다.

“오늘 기습의 실패로 물새 협곡을 방어하는 케이루스-리카서스 연합 세력의 주도권은 리카서스가 쥐게 될 거야. 지금이라면 케이루스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리카서스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몰라.”

메르디에스 진영의 최우선 과제는 상대의 동맹을 깨트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리카서스 수뇌와 접촉할 필요가 있었다.

“왕후는 여전히 왕도에 있지?”

“현재로선 별다른 움직임은 보고받지 못했어.”

달로아와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은 아리아드네가 말들이 어지럽게 늘어선 지도를 가만히 내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리카서스와 케이루스 사이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아리아드네가 생각에 잠기자 막사 안은 자연스레 대화가 뚝 끊겼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살라가 오른손을 들었다.

“포로들의 처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처분이라니요?”

살라의 질문에 생각에 골몰했던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었다.

“포로로 사로잡은 적군의 병사가 1만에 가깝습니다. 정보를 얻을 만한 수뇌 몇만 남기고 빠르게 처형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적진에 교환할 아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로잡은 이들을 남쪽으로 이송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 물새 협곡은 우리보다 포로들에게 훨씬 익숙한 지형입니다. 포로들이 자력으로 탈출하기라도 하면 큰 화근이 될 겁니다.”

살라의 말을 모두 들은 아리아드네가 느긋한 얼굴로 대답했다.

“살라 군단장께서 걱정하는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포로들을 놓쳤을 때나 걱정해야 하는 일이지요. 메르디에스에 사로잡힌 포로들은 도망가고 싶지 않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지금 우리가 케이루스의 포로들을 처형하면 적은 1만의 병사를 잃게 되겠지만―”

아리아드네의 손이 지도 위에 놓인 케이루스의 붉은 말들을 툭툭 쓰러트렸다.

“우리가 저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두면 적은 그것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전력을 잃게 될 겁니다.”

아리아드네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말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포로를 잡아 두고 상대를 압박하겠다는 건가? 살라가 지도 위에 널브러진 붉은 말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심리전으로 가겠단 말입니까? 그것은 확실한 방법이 아닙니다.”

평소엔 온갖 편법에 미쳐 있는 살라였지만 전장에서만큼은 정도를 걷는 쪽이었다. 타인의 생명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자는 모험을 하면 안 된다. 그것이 살라의 원칙이었다.

“나태와 불안, 전장의 병사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들이지요. 적군의 포로들에겐 그것들이 역병처럼 번질 겁니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리뮈르의 달미에르가 나태와 불안 운운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 살라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가 전쟁에서 가장 경계하는 이는 경험이 적고 영민한 아군이었다. 바로 눈앞의 공자님처럼.

“전쟁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발밑을 단단히 방비하고, 눈앞의 적을 차근차근 해치우는 것이 지루하게 보일지 몰라도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런 이들은 몸이 아니라 머리로 싸움을 하려 한다. 작은 승리는 지루하게 여기고, 제 머릿속의 계획이 실패할 리 없다고 생각한다. 제 계산을 과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날마다 터진다. 계산에는 반드시 오류가 발생한다. 그것이 경험에서 기인하지 않은 것이라면 더욱더.

“싸움이란 본디 더 많이 인내하는 자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닙니다.”

살라가 목소리를 높여 항변했다. 원탁에 동그랗게 둘러앉은 이들이 좋은 말씀 잘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라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도, 그렇다고 설득이 되는 것도 아닌 묘한 분위기였다.

‘아, 답답해.’

살라가 셔츠 깃을 한쪽 손으로 길게 잡아당겼다. 단추 두어 개가 풀어졌지만 답답함은 조금도 가시질 않았다.

살라가 멀뚱멀뚱 눈만 깜박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안에게 자신을 도와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시안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저만 믿으라는 듯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살라, 메르디에스 공녀께서 바라는 건 요행이 아닙니다.”

‘아니, 지금 대체 누구를 돕는 거야?’

살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럼 뭐 믿을 구석이라도 있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라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아아, 하는 얼빠진 감탄사를 연이어 내뱉었다.

“그거라면 확실히…….”

“아, 우리가 그 이야기를 안 했구나.”

저희끼리 알 수 없는 말을 수군거리더니, 아리아드네가 막사 밖에 있는 누군가를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부름을 받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자 밀처럼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는 한때 살라의 환자였던 남자였다. 남자는 소르체를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탐이 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버트.”

살라의 부름에 알버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향해 짧게 묵례한 알버트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이거, 은인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박정한 거 아닌가?”

살라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웃음을 흘렸다.

“알버트, 살라 군단장을 포로 막사로 모시고 가서 설명해 드려.”

아리아드네의 명에 알버트가 살라를 향해 다가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살라는 막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알버트의 오른팔부터 살폈다.

“팔은 괜찮은 것 같은데.”

“덕분입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흐음, 살라는 턱을 쓸어내리며 알버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이상했다. 핼쑥해진 얼굴하며, 날 선 칼처럼 예리한 기세도 그렇고, 무엇보다 텅 빈 것 같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기사로 자신을 찾았을 때도 저 정도로 엉망이진 않았다. 왜? 기사에게 팔을 다친 것보다 더 큰 일이 무엇이기에.

“왜, 네가 치료받는 동안 네 정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라도 했어?”

그런 거라면 나쁘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은 결국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살라는 알버트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화를 낸다면 제 말이 얼마쯤은 진실이리라, 그렇게 짐작하려 했다.

“군단장님.”

하지만 알버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저를 희롱하시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나 그분을 모욕하는 일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쪽입니다.”

알버트가 점점 멀어지는데도 살라는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처연하게 내리깐 남자의 눈동자에 차오른 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물기에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지켜보노라니 머리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군단장님?”

“아, 그래.”

따라오지 않는 것이 의아한 듯 알버트가 살라를 불렀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살라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여기입니다.”

알버트는 수십 개의 대형 막사가 모인 곳에 다다라 걸음을 멈추었다.

“이 중에 어디?”

포로에게 막사라니 대접이 후했다. 포로의 대우야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한 채 말뚝을 박은 공간에 격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부입니다.”

“전부? 이게 전부 포로 막사라고?”

“네.”

당황한 살라가 막사의 입구를 들추었다. 막사 안에는 갖가지 호화로운 음식들과 옷가지, 보석과 장신구, 심지어 아리아드네가 손수 공수해 온 미술품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포로들에게 아낌없이 제공되고 있었다. 포로들은 눈이 반쯤 풀린 채로 고급 옷감을 온몸에 휘감고, 아찔할 정도로 황홀한 광채를 발하는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흐느적대는 중이었다.

“이게, 대체…….”

후방 진지에 가득했던 사치품들은 케이루스 척후병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설마 나머지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살라는 수십 개의 막사를 일일이 들추어 보았다.

다른 곳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포로들은 상아로 깎은 의자와 황금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 주위로 왕궁 연회에서나 볼 법한 진귀한 음식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먹다 잠들었는지 접시를 껴안은 채 꾸벅대는 이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자신한 대로 포로들이 쉽사리 도망치진 않을 것 같았다. 이토록 완벽한 낙원에서 벗어나야 한다면 그것은 탈출이 아니라 추방일 테니까.

“아직 여기 계셨어요?”

그때였다. 달로아가 무언가를 잔뜩 짊어진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물건들이 막사 안으로 끝도 없이 들어갔다.

이 시간부로 포로들에게는 이국의 카펫과 귀한 술들이 추가로 제공되었다. 포로들은 기하학적인 문양이 복잡하게 짜인 카펫 위를 뒹굴며 황금 잔에 술을 따라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중 몇몇은 잔에 따른 술로는 성에 안 차는지 병째로 목구멍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리뮈르 공녀,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아, 돈맛을 보여 주는 중이에요. 역시 맛 중의 맛은 돈맛이죠.”

달로아가 양손 엄지를 치켜들며 환하게 웃었다.

“과연 이 중에 몇이나 악마의 시험을 통과할까요?”

페렌트에 구전되는 이야기 중에는 ‘돈’이 악마가 인간의 욕망을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돈 앞에서 갈등하는 상황을 흔히들 악마의 시험이라 부르곤 했다.

포로들의 막사에 풀린 사치품들은 아리아드네가 손수 고른 것이었다.

―포로 중에는 귀족도 심심찮게 있을 거야. 웬만한 것으로는 마음을 흔들 수가 없지.

과연 메르디에스의 딸은 안목이며 배포가 참으로 남달랐다. 그런 아리아드네가 직접 안배한 극상의 향락이 제공되었다.

선왕 다그마르의 국상 이후로 왕도에서는 애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몸을 즐겁게 하는 향락이 모두 금지되었다. 반년 만에 누리는 온갖 즐거움에 메르디에스에 사로잡힌 케이루스 포로들은 마치 천국에 발을 디딘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믿는 구석이라는 게…….”

살라가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간신히 돌리며 뒷말을 흐렸다. 달로아는 개구진 얼굴로 싱긋 웃음을 지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돈이죠, 돈. 악마의 금전.”

심지어 진짜 돈지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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