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48)

* * *

성전(聖戰)을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났다.

성 상티모니아의 전사들은 성스러운 전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더구나 이번 전투는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이 직접 참전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성 상티모니아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듯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이 그들에게 내린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시체가 쌓인 산을 넘고, 피가 흐르는 강을 건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설사 제 피와 제 시체가 될지라도.

“죽는 걸 저리 기꺼워해서야.”

아그네스는 도열한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픽 웃으며 장갑을 꼈다. 금사로 수를 놓은 새하얀 장갑이 아그네스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살리바의 마녀를 초대한 왕자는 과연 무슨 대접을 하려나.”

아그네스는 손을 들어 햇빛을 잡을 듯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펼쳐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붉은 눈으로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그네스가 곁에 시립한 노인에게 물었다.

“바실리오, 귀찮다고 제때 쥐를 잡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아그네스가 질문을 한 상대는 성 상티모니아 최고 의결 기구인 멘술라의 의장 바실리오 추기경이었다.

바실리오는 자신의 대답이 아그네스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침묵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그네스 또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닌 듯 담담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쥐새끼 입질에 곳간이 텅 비기 마련이지. 물에 빠진 쥐새끼가 바짝 독이 올랐을 테니 덫을 놓아야겠구나.”

아그네스는 쥐새끼가 제 일을 그르치도록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평생의 숙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수습 사제의 사생아로 태어난 아그네스였다.

―아니야, 난, 난 아니야. 나는 변절하지 않, 았어.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나는, 나는……. 나는 몰라. 나는 저런 괴물을 낳지 않았어.

―어, 머니?

―저리 가! 제발,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제발…….

생모조차 거부한 생명이 살아남아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멘술라의 의장조차 고개를 조아리는 이 자리에.

아그네스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살리바 대신전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대리석에 황금을 바른 건물이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번쩍이고 있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성물의 수호자이자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대변자인 교황의 거처. 이 모든 것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한때는 저곳의 가장 작은 방 하나도 가지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바실리오, 살리바는 네게 맡기마.”

“비천한 종 바실리오가 교황 성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바실리오가 고개마저 바닥에 붙인 채로 말했다.

“성 상티모니아는 오직 성하께서 가는 길을 따를 것입니다. 부디 신의 사명을 잊은 무지한 이들을 구원해 주소서.”

노인은 이 전쟁이 ‘무지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성전’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아그네스가 바실리오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구원이라……. 아직도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것을 구원이라 하느냐.”

바실리오의 멱살을 틀어쥔 아그네스가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접으며 웃었다.

“그럼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 구원은 네가 하려무나. 타락한 성직자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대로 바실리오의 멱살을 내던지듯 놓은 아그네스가 준비된 말 위에 올라 한쪽 손을 들었다.

“전군―”

깃발을 든 기수가 막 출정을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잠시, 잠시만요.”

살리바 대신전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금빛 타래가 휘날렸다.

“어머니! 어머니, 제발, 기다려 주세요.”

베아트리스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성녀님! 안 됩니다.”

“베아트리스 님!”

살리바 대신전에 남은 사람들을 줄줄이 이끌고 나타난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베아트리스.”

한숨을 내쉰 아그네스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베아트리스에게 물러서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가지 마세요.”

혼자 남는 건 이젠 정말 지긋지긋했다. 베아트리스는 유진마저 떠난 살리바에서 홀로 아그네스를 기다리며 시들어 가고 싶지 않았다.

바닥이 난 희망과 기대를 들여다보며 절망과 실의에 빠지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영혼이 조각조각 깨지는 기분이었다.

“어머니, 제발, 가지 마세요. 가시면 안 돼요. 이대로 가시면…….”

베아트리스가 간절하게 매달렸지만, 아그네스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베아트리스, 경거망동하지 마라. 네가 이러면 출정하는 병사들의 사기가 어찌 되겠느냐. 성 상티모니아의 성녀가 출정하는 병사들의 무운을 빌어 주지는 못할망정 앞을 막아서다니.”

아그네스의 질책에도 베아트리스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저는 그런 건 몰라요. 제발, 제발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베아트리스의 황금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흙바닥에 주저앉은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저 말 잘 들을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마침내 말에서 내려온 아그네스가 다정한 손길로 베아트리스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베아트리스, 내 딸아.”

아그네스는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못한 제 딸을 안고는 도닥여 주었다.

“아직도 그를 기다리니?”

꿈에서나 바랐던 다정한 목소리로.

“이런 가엽게도…….”

아그네스는 꽃 같은 입술을 열어 독 같은 말을 쏟아 냈다.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은 잊으라고.”

몇 번이나 베아트리스의 귓가에 속삭였던 말들을.

“그는 널 버렸어. 그러니까 이젠 너도 그를 버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네 심장만 다 문드러져 버린단다.”

아그네스는 언제나 베아트리스에게서 희망을 앗아 가고 절망을 선사했다.

“문드러진 심장에서는 악취가 나. 네 몸이 썩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돼. 알겠니?”

아그네스가 주는 절망의 마지막은 항상 똑같은 말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사랑하지 말렴. 그러면 상처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네 세상에 사랑은 없을 거라고.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간에.

눈물을 뚝뚝 흘리던 베아트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 전 그렇게 못 해요.”

덜덜 떨면서도 베아트리스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억눌러 온 소망을 터트리듯 베아트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사랑하면 안 돼요? 어머니도, 유진도, 제 가족이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내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가족이라고 해서 서로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되진 못한단다.”

베아트리스의 눈물을 닦아 주던 아그네스의 손이 뱀처럼 아래로 기어갔다. 뺨과 턱을 지난 손이 베아트리스의 가느다란 목을 쥐었다.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할 것 같았으면 내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이지도 않았겠지.”

아그네스의 생부인 선대 교황 테오도로가 성교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은 그녀가 테오도로의 애인과 만난 다음 날이었다. 딸이 준비한 독은 애인의 손에 들려 아비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그네스에게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베아트리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누구인지 이젠 알겠니?”

아그네스의 피처럼 붉은 눈에는 황금을 녹인 듯한 소녀가 비쳤다. 어머니의 눈에 담긴 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이제야 알았니?”

꿀처럼 다디단 목소리로 속삭인 것은 칼처럼 날카로운 진실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베아트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거짓, 말…….”

베아트리스가 아그네스에게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절 사랑, 한다고, 저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로 충분하다고, 그러셨잖아요!”

―널 사랑하는 것도, 네가 사랑하는 것도 나로 충분하잖니? 그렇지? 베아트리스.

그 말도 못 견디게 서러웠지만.

“딸아, 그러니까 아무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거란다.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으니까.”

지금 이 말은 더 서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그네스가 베아트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대로 말에 올라 멀어졌다. 언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가 베아트리스의 심장을 짓이기는 것 같았다.

“아, 아아, 왜, 왜 다들…….”

베아트리스는 언 땅에 고개를 처박은 채 오열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이렇게 자신만 두고 모두 떠나갈 순 없었다.

“성녀님…….”

그녀를 부르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털이 잔뜩 달린 망토가 베아트리스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얼굴이 차갑습니다.”

레이먼드의 따뜻한 손이 베아트리스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눈물을 흘린 채로 얼어붙은 얼굴이 엉망이었다. 베아트리스는 레이먼드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사정했다.

“레이먼드, 나 좀, 나 좀 데려가 줘요. 나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제발, 제발, 나 좀 데려가 줘요.”

레이먼드는 베아트리스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다들 정상이 아니었다. 교황 아그네스만이 아니었다. 이것을 지켜보는 성 상티모니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베아트리스를 마치 보물처럼 다루던 이곳의 사람들은 그녀의 울음에 아무도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성력을 담은 그릇만 멀쩡하다면 그녀의 마음이야 어떻든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아그네스의 방치와 학대, 교묘한 세뇌는 다른 사람들의 외면과 똘똘 뭉쳐 베아트리스를 병들게 했다.

‘성녀님을 이곳에 두고 떠나도 될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교황의 친딸이자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였다. 한낱 백작가의 차남에 불과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주먹을 쥔 레이먼드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항상 나만 이렇게 남겨져야 해요? 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내가 그렇게 큰 걸 바란 거예요?”

어머니가 날 사랑해 줬으면 했던 것이 그렇게 잘못이었을까. 베아트리스는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어머니, 카푸트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막 뛰어요.

황금빛 머리카락이 아니더라도 카푸트와 자신은 어딘가 닮은 것만 같았다. 그것이 그와 저 사이를 증명해 주는 어떤 흔적처럼 느껴졌다.

―저건 네 반쪽이니까.

―제 반쪽이요? 아, 그래서 이렇게 가슴이 뛰었던 거구나.

카푸트를 볼 때면 가슴이 벅차고, 자꾸 눈물이 났다. 눈앞에 두고도 그리워서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것에 닿고 싶어서,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어머니, 저 여기서 가만히 카푸트를 보고 있으면 소리가 들려요.

―…….

―이 땅에 카푸트의 참된 주인이 돌아올 거예요.

―카푸트의 주인이 돌아올 거라고?

나란히 서서 카푸트를 보고 있던 아그네스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몇 번이나 베아트리스에게 되물었다.

―네, 꼭 돌아올 거예요. 우리는 서로의 반쪽이니까. 카푸트의 주인도 저를 기다리고 있겠죠. 빨리 보고 싶어요.

―그래, 정말 기대되는구나. 카푸트의 진정한 주인이 이 땅에 나타나는 날이.

아그네스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칭찬을 하는 것처럼 베아트리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

그녀는 어머니의 칭찬에 마치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베아트리스는 날마다 빌었다. 어서 그와 만나게 해 달라고. 그러면 더는 혼자가 아니게 될 줄 알았다.

“진짜 가족은 상대의 행복을 빌어 주는 거래서, 그래서 나 계속 참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참아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유진이 행복하기를 바랐는데……. 그런데, 내 행복은 어디에 있어?”

혼자 우두커니 남은 베아트리스의 행복을 빌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나도 행복해지고 싶은데, 왜 다들 날 떠나?”

유리 전시관에 놓인 성물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정말,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어머니 말대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까?

“정말 날 버렸어? 날 잊었어?”

영혼을 나눠 가진 제 반쪽이 자신을 버리기 전에, 그를 버려야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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