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48)

* * *

유난히도 햇빛이 찬란한 봄날의 오후였다. 따사로운 봄볕이 두꺼운 차양 위로 내려앉았다.

금실로 화려한 수를 놓은 차양은 사치품의 영역을 훌쩍 넘어서 예술품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이며, 장식들까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값나가는 것들만 모여 있었다.

아무리 후방이라지만 이곳도 전장인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조금 지루하네.”

상아로 깎아 만든 의자에 앉아 금으로 만든 찻잔을 휘휘 돌리던 아리아드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렇게 체스만 둘 거면 대체 왜 이 골짜기까지 들어온 거야?”

맞은편에 앉은 달로아가 체스판 위의 말을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리며 그 위로 엎어졌다.

“아니, 게임은 끝이나 있지. 이건 대체…….”

달로아가 봇물이 터지듯 불평불만을 와르르 쏟아 냈다. 메르디에스를 주축으로 한 남부 연합 본대가 물새 협곡에 진입한 지도 벌써 한 달째였다.

물새 협곡을 지키는 케이루스-리카서스 연합 병사들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유인과 급습을 시도했다. 메르디에스는 이에 처음부터 물량으로 밀어붙였다.

서로의 수가 뻔하니 큰 패배도 큰 승리도 없는 교착 상태가 한 달 동안 이어졌다. 한 달째 전선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 그대로였다.

“둘의 동맹이 생각보다 끈끈한 모양이야. 마치 한 몸 같은걸.”

다른 것은 모두 예상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케이루스와 리카서스의 연계만큼은 생각 이상이었다. 단단히 뭉친 두 세력이 제집 같은 곳에서 벌이는 전투는 만만치 않았다.

달로아의 투덜거림 또한 지금의 교착 상태가 당분간 이어질 거란 전망 때문이었다.

하암, 차를 따르던 시녀조차도 지금 상황이 지겨운 듯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시녀는 사방으로 삐죽 솟은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긁적댔다.

꼿꼿한 자세로 전방만 바라보고 있던 소르체의 수호자 시안이 잔뜩 풀어진 시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주의할게요.”

시안의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친 시녀가 한쪽 손을 들더니 냉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오늘도 이렇게 지나가는 겁니까?”

“글쎄요…….”

시안의 물음에 애매한 대답을 흘린 아리아드네가 지상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물새 협곡 최전선에서 하루 거리에 자리한 후방의 진지는 마치 딴 세상처럼 고요했다.

거기다 전장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온갖 사치품들이 즐비하여 이곳은 마치 야외 연회장 같은 모습이었다. 차양을 따라 늘어트린 색색의 천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흔들렸다.

바람은 적당하고, 하늘은 청명했다. 차양 밖으로 뻗은 아리아드네의 손바닥 위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겨울이 끝나면 그를 기다리는 것도 끝인가요?

그럴 리가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이 끝날 리가 없었다. 이 기다림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가 돌아오는 것.

그때, 느릿한 공기 사이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햇볕이 고여 드는 오후, 손 위에 고인 따사로운 봄볕이 옅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채앵―! 챙챙챙, 어디선가 날붙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두두두,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기습이다! 적의 기습이다!”

“중앙 천막의 귀인들을 보호하라!”

후방 진지를 노린 적의 기습이었다. 날카로운 칼날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사방으로 반사했다. 반사되는 빛에 눈이 부셨다.

서걱! 바람에 나부끼던 색색의 천들이 조각조각 갈라지며 흩날렸다. 그중 일부는 바람을 타고 새파란 하늘 위로 날아갔다.

쨍그랑! 우당탕탕! 테이블 위에 있던 온갖 집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부서졌다. 호화스러운 물건들이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뭐야?”

달로아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안 또한 긴장한 모습으로 검을 빼어 들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리아드네 님, 이쪽으로―”

다급히 나타난 메르디에스 기사가 차양 아래로 들어오려던 순간이었다. 기사의 뒤에서 칼날이 번뜩이더니 그의 몸을 두 동강 낼 듯이 움직였다.

채앵! 탁―!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시안이 기사를 향해 내리긋던 검을 쳐 내자, 두 동강 난 칼날이 무른 땅에 박혔다.

그때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조각난 천 사이로 희미한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리아드네뿐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에 자신의 신체적 능력이 가장 보잘것없을 텐데.

날아든 검은 그림자가 아리아드네의 뒤에 자리하나 싶더니, 서늘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아리아드네!”

그때야.

“메르디에스 공녀!”

낯선 침입자를 인지한 사람들이.

“저하!”

앞다투어 아리아드네의 이름을 불렀다.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들과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과 제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달라서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릿하게 흐르는 공기는 금가루를 쏟아부은 것처럼 빛이 났다.

“미안해, 늦어서 미안해.”

새까만 어둠을 잘라 낸 것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황금빛 공기 사이로 흔들렸다. 마치 황금을 녹인 바다에서 너울대는 검은 파도처럼.

“계속 기다렸어.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햇볕이 고여 드는 오후가 되면 문득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떠난 그를 멍하니 기다리다 보면 내 속에 뻥 뚫린 구멍이 보였다.

상실이었다.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외로움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들었다. 외로움에 흠뻑 젖은 채 또다시 그를 생각했다.

이것이 사랑일까. 이렇게까지 나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내가 아는 사랑은 언제나 ‘나’라는 사람이 하는 것이었는데, 그를 사랑하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 그를 사랑하는 나는 ‘나’와는 다른 존재처럼 낯설었다.

하지만 이토록 가슴 뛰는 이것의 이름을 달리 무엇이라 붙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사랑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면서 그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스쳐 가는 바람에도, 돋아나는 새싹에도, 뜨는 해와 지는 별에도 그를 생각했다.

그가 떠나간 자리에는 괴이한 공백이 생겼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어떤 음악을 들어도, 어떤 사람과 있어도, 그 공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게 되고 내게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생겼다.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오로지 그만을 위한 자리였다.

* * *

새까만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끝이 보이지 않는 미궁 속에서, 출구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디티의 손을 잡고 페루스의 신전을 벗어나려고 같은 길을 맴돌았던 그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걷고는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결정하기에는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나침반의 지침을 따르는 것처럼 그는 심장이 가리키는 대로 걸었다. 아르체를 벗어나, 디움 산맥을 넘고, 리뮈르를 벗어날 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양 진영 빼곡히 세워진 깃발을 보고서야 이곳이 전장의 한복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이곳이 물새 협곡이며, 케이루스-리카서스 연합군과 메르디에스를 중심으로 한 남부 연합군이 대치 중인 전장임을 알았다.

가시나무에 둘러싸인 방패. 메르디에스의 문장이 새겨진 녹색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쿵쿵, 사라진 줄 알았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말소리에 이상한 것들이 섞여 있었다.

급습, 후방 진지.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에게 거리 같은 것은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했다.

메르디에스 공녀, 생포, 지금. 뒤이어 그런 단어들이 그의 귓가에 마구잡이로 흘러들어 왔다. 그는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후방 진지에 있는 그녀가 위험했다. 그는 두 세력이 대치 중인 최전선을 지나 메르디에스 후방 진지에 도착했다.

느슨한 바람, 색색깔로 나부끼는 천, 눈 부신 햇살 아래에 태양보다도 눈부신 그녀가 있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성의 없이 찻잔을 휘젓던 그녀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빛이 비쳤다.

화려한 차양, 바람에 날리는 반짝이는 머리카락, 쭉 뻗은 하얀 손, 그녀의 손 위에 고여 든 오후의 햇빛.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풍경을 아름답다고 느끼기도 전에 다른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슬픔이었다.

내리깐 눈가에도, 쭉 뻗은 손끝에도, 입가에 맺힌 옅은 미소에도 슬픔이 가득했다. 그는 그녀가 친구를 잃은 그날의 슬픔에서 조금도 헤어나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가 그러하듯이.

그런데 이 자리의 누구도 그녀의 슬픔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태연한 표정, 꼿꼿한 몸짓, 이성적인 판단, 단조로운 말투. 그러한 껍데기에 홀려 그녀의 영혼이 지르는 비명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때였다. 채앵―! 챙챙챙,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와 두두두,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 따위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기습이다! 적의 기습이다!”

“중앙 천막의 귀인들을 보호하라!”

후방 진지를 둘러싸고 있던 적들의 기습이었다.

온갖 난리 속에서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던 그 순간,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분명 그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의 존재를 오직 그녀만이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만이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녀의 슬픔을 이해했듯이.

서걱, 공중에 걸려 있던 천들이 마구잡이로 잘려 그와 그녀 사이로 나부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도 그를 방해하지 못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부끼다 멈춘 천 사이로 손을 뻗은 그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미안해, 늦어서 미안해.”

그의 품에 안긴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공기 사이로 옅은 금색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시끄럽던 소음들이 모조리 사라진 세상은 온통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유속이 느린 강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계속 기다렸어.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천천히 몸을 돌려 얼굴을 마주한 아리아드네가 그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당신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지나 입술 위를 스쳤다. 그의 입술을 뭉개듯 짓이긴 아리아드네의 손이 그의 옷깃을 확 잡아당겼다.

그 상태로 반쯤 끌려간 그가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푸른 불이 붙은 것처럼 타오르는 새파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선택한 거야.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못 떠나.”

말을 마친 그녀가 그대로 그에게 입을 맞춰 왔다.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보다 아릿한 통증이 먼저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접촉이었다.

“안 보낼 거야.”

오래도록 참았던 숨을 토해 내는 것처럼 헐떡이는 목소리였다.

“이젠 다시는 어디에도 안 보낼 거야.”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그의 입술을 온통 적셨다. 새파란 눈동자에는 물기가 가득한데도 그를 쏘아보는 그녀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아, 결국 나는…….’

또다시 무엇을 버리게 된다 해도, 어떤 후회를 하게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당신이 떠난다 해도 난 이젠 당신 못 보내. 그러니까―”

아리아드네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그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말을 하느라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다급하게 밀려들었다.

그는 모조리 삼키고 싶다는 듯이 그녀의 입 안을 갈급하게 탐했다. 누군가 그의 품에서 그녀를 뺏어 가기라도 할 것처럼 어딘가 절박하고 다급한 키스였다.

꽉 끌어안고도 부족했는지 작은 틈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아리아드네를 더욱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조금씩 들려 끝내 발끝으로 서서 그에게 매달렸다.

아리아드네의 허리가 조이도록 꽉 붙든 팔이 다시 그녀를 끌어 올렸다. 위로 들린 발이 땅이 아닌 허공을 디디고 있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밖에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목을 감은 손에 힘을 줘 그에게 매달린 채 깊은 키스를 받아 냈다.

“……이젠 어디에도 가지 마.”

맞물린 입술 사이로 몰아쉬는 숨과 함께 아리아드네는 제 불안을 토해 냈다.

“이젠 나를 혼자 두지 마. 내 곁에 있어 줘, 유진.”

“다시 불러 줘.”

마침내 입술을 떼어 낸 그가 아리아드네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애원했다.

“……날, 불러 줘. 한 번만 더.”

그는 품에 안은 아리아드네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꽉 끌어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

아리아드네는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몇 번이고 그의 귓가에 이름을 속삭여 주었다. 그가 원한다면 밤새도록 그의 이름을 불러 줄 것처럼.

“당신이 날 그렇게 부른다면 나는 ‘유진’으로 살 거야.”

기억을 되찾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레오의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서 유진으로 살았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진으로 사는 동안 그녀를 만났고, 영원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가장 반짝이는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아리아드네를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 그는 과거의 레오와 같은 사람일 수가 없었다. 페루스의 시간과 기억을 이어받은 레오가 페루스와 동일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처럼.

페루스와 레오와 유진의 시간을 가진 그는 선택해야 했다. 무엇이 되어 남은 삶을 살 것인지.

페루스의 시간을 넘겨받았던 레오는 제게 주어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버거워 오로지 죽을 날만을 기다렸다. 가끔은 페루스의 것인지, 제 것인지 알 수 없는 열망에 시달리며 시간을 되돌리려 하기도 했다.

그것은 페루스가 닿고 싶었던 모라가 존재하던 때이기도 했고, 레오가 원했던 제물이 되기 이전의 디티가 살아 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가졌던 여러 가지 소망 중, 지금의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유진, 이젠 떠나지 마. 가지 마. 누군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는 건, 이젠 정말 더는…….”

눈물을 쏟아 내던 아리아드네가 힘이 빠진 듯 휘청이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캐롤린이 죽고 자신마저 떠나 내내 혼자 버티던 그녀의 안에서 고여 있던 슬픔들이 넘치다 못해 끝없이 흘러내렸다.

“이젠 혼자 두지 않을게. 어디에도 가지 않을게.”

그에게는 페루스의 시간이 열망한 것보다, 레오의 영혼이 갈구한 것보다, 지금 유진의 소망이 더 간절했다.

“그러니까 내게 허락해 줘.”

그가 다시금 애원하듯 아리아드네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말했다.

“나 당신 곁에 있어도 된다고, 내가 무엇이든 날 버리지 않겠다고…….”

숨을 쉬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듯, ‘유진’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했다. 그에게 아리아드네는 ‘유진’이라는 존재를 허락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당신 자리는 여기야. 당신이 무엇이든 누구도 내게서 당신을 뺏어 갈 수 없어.”

아리아드네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그의 옷깃을 꽉 틀어쥔 채로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로 자신이 무엇이든 놓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녀와 함께라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유진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설사 그것이 신이라 해도 내게서 당신을 뺏어 가지 못해.”

아, 정말……. 다시 입 맞추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유진은 그대로 아리아드네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녀가 넘겨준 숨, 열기 따위와 함께 그의 내부에서 피어오르던 불안이 사그라들었다.

내 삶은 언제나 한 겹 가짜 낙원을 두른 나락이었다. 거짓 위에 쌓아 올린 가짜 낙원이 무너지면 나는 내내 새까만 어둠 속을 헤매야 했다.

끝도, 출구도 없는 깊디깊은 어둠. 영원토록 이어질 것만 같았던 절망.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줄 알았던 희망.

나락에 빠진 나를 구원한 것은 한 줄기 빛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나는 그 빛을 본 순간 눈이 멀고 말았다.

희망과 맞바꾼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싼 대가였다. 나는 한 줄기 빛을 위해서라면 눈이 아니라 심장이라도 바칠 수 있었으니.

그 빛에 다가가는 순간, 이 몸이 불에 타 한 줌의 재가 된다 해도, 그것이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 주지 못한다 해도, 나락에 떨어진 나에게 한 줄기 빛은 그 자체로 낙원이었다.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낙원은 바로 당신이었다.

Eden or Abaddon : 낙원 혹은, 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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