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48)

* * *

‘이것은 내 후회의 기억이다. 그리고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맹세이다.’

유진은 한때 제 육체의 일부였던 뜯어진 양팔을 안은 채로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황금빛 머리가 둥둥 떠올라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셋으로 갈라진 육체처럼, 육체를 떠난 그의 영혼은 정처 없이 차원을 떠돌며 헤맸을 터.

그는 유진의 심장이 자리한 왼쪽 가슴을 더듬거렸다. 손 아래에서 평소와 다르지 않은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이것조차 혐오스러웠다. 자신은 얼마나 많은 육체를 제 것처럼 탐하며 살아온 걸까.

제 고향 아르체처럼 온통 잿빛인 사막에서 심장에 총을 맞은 채 죽어 가던 누군가의 육체를 되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육체의 진짜 주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유, 진? 네가, 어떻게…… 넌…… 벌써 죽었어야, 죽어야…….

―유진? 그게 내 이름인가?

―괴, 괴물. 그때…… 분명, 심장에 총을 맞고…… 내…… 가 확인도 했…….

그를 보고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창백하게 질렸던 그 남자가 아니더라도.

―괴물……. 넌 괴물이야! 나만 그렇게 생각한 줄 알아? 다들 널 두려워했어. 5년 동안 머리카락조차 자라지 않는 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머리카락조차 자라지 않는 육체가 아니더라도, 시간을 다루는 괴물이 보통 사람일 리 없으니까.

시간을 다루는 그의 능력은 성 상티모니아의 살리바 대신전에서 카푸트를 손에 넣고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유진의 육체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자각한 능력이었다. 그는 모라의 첫 번째 권속 페루스였으니까.

실제로 그는 방주에서 탄환이 빈 리볼버를 가지고 군인들을 상대한 적도 있었다. 몇 번이나 시간을 제 뜻대로 조종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니 이 육체 또한 불가사의한 그 능력으로 차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의심했으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너무도 황홀해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죽음을 원했으면서도 그는 레오의 육체를 버리자마자 탐욕스럽게 생을 갈구했다.

“어떻게, 내가, 내가…….”

그는 팔 한쪽만 남은 쌍둥이 누이의 유해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감싸 안은 채 고개를 처박았다.

‘……도, 망 가. 어서.’

그때, 자신은 분명 디티의 죽음을 외면했다. 페루스와 마주한 순간,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 그는 제물로 바쳐진 쌍둥이 누이와 제 남은 삶을 저울질하고 망설였다.

기억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 헤매던 때에도 그는 늘 디티를 외면한 순간을 악몽으로 마주해야 했다. 그것은 그의 가장 큰 치부였으며, 가장 깊은 죄악이었고, 가장 저열한 욕망이었다.

“미안, 미안해. 디티…….”

―네 무지 또한 네 선택의 결과. 굳이 기억을 되찾으려 할 필요가 있나?

기억을 버린 것은 누구도 아닌 자신의 선택이었다. 디티의 기억이 버거워서, 제 죄가 무거워서, 모든 것을 잊고 편해지고 싶었다.

“이렇게 너를 또다시 버려서…….”

디티의 죽음을 외면했던 자신은 또다시 그녀를 버렸다. 버렸다는 기억마저도 봉인한 채.

“내가 어떻게 해야 네게…….”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디티의 팔을 쓸어내렸다. 조금도 부패되지 않은 디티의 팔은 살아생전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오로지 한쪽 팔만이 남아 있는데도.

그의 손이 디티의 팔을 지나 손목과 손등에 닿았다. 그때, 이상한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손가락이 모자랐다. 디티의 손에 달린 손가락은 다섯이 아닌 넷이었다.

그는 엄지와 검지, 중지를 지나 약지가 있어야 할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약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잘린 듯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은 각각이 인간이 가진 무언가를 품는 그릇이었다. 엄지는 신의와 믿음을, 검지는 꿈과 욕망을, 중지는 미련과 후회를, 소지는 결단과 약속을 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디티가 잃어버린 약지에 담긴 것은 바로 불멸의 영혼.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을 들어 페루스의 제단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을 제 양팔에 손을 올렸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그것들 가운데는 과거의 그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이곳을 떠난 뒤에 일어난 일인 듯했다.

길을 잃은 마물들이 어쩌다 이곳을 발견해 둥지로 삼았다가 흉포하게 변한 채 죽어 가기도 했고, 자신의 경고를 어기고 신의 유해를 찾아 나섰다가 죽음에 이른 사람들도 간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다. 제법 멀쩡한 상태로 아르체에 도달한 한 무리가 제단에 놓인 세 개의 팔을 오래도록 살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 한 명을 결박한 채로 데려왔다. 겁에 질린 여자를 내려다보던 다른 여자가 말했다.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다. 너 같은 이는 꿈도 꿀 수 없는 높은 지위를 준대도.

그 말을 한 것은 금발에 엘바의 바다처럼 투명한 녹색 눈을 지닌 여자였다. 금발의 여자는 제법 고귀한 신분인 듯 갖은 보화로 치장한 차림새였다.

금발의 여자가 손을 내밀자 뒤에 있던 누군가가 디티의 손에서 네 번째 손가락을 끊어 냈다.

그는 그것이 제 유해가 지켜본 과거의 어느 순간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의 손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를 뿐, 디티의 손가락을 자르는 사람에게 조금도 닿지 못했다.

그는 무력하게 그 모든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디티의 손가락이 탐욕 어린 손길에 의해 누군가의 입에 들이밀리는 그 순간을.

“아, 아아…….”

이럴 수는 없었다.

―레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어.

디티가 바란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디, 티……. 디티가 다시 태어났어.”

인간이 지닌 가장 위대한 힘은 바로 불멸의 영혼.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기에 육체가 죽어도 다시 태어난다.

불멸의 영혼이 가진 후생의 권리조차 포기하고 영원한 안식을 선택했던 디티는 끝내 다시 태어나고 말았고, 불사인 신의 권속을 죽이고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넘겨받은 레오는 자신이 파멸로 이끈 땅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들은 아직도 지옥 한가운데 있었다.

* * *

봄이 온 릭센의 왕궁에는 전운(戰雲)이 짙게 감돌았다. 연일 궁으로 전서구가 날아들고, 단단히 무장한 병사들이 성벽을 빽빽이 에워쌌다. 끝내 성문마저 봉쇄되자 사람들이 불안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진짜 전쟁이 나는 거야?”

“그렇다니까. 메르디에스 성에서 벌써 한 차례 붙었다지 아마?”

불안과 동요는 사람들의 입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메르디에스 성에서 일어났던 전투가 메르디에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는 소식은 불안에 부채질을 더했다.

그 와중에 1왕자 카이엔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문까지 거리를 휩쓸었다.

“다행히도 아직 죽었다는 말이 나돌지는 않나 보군.”

거리의 소문을 들은 카이엔이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뺨에 난 상처가 욱신거렸다. 아리아드네의 구둣발에 차인 자리였다.

겨우내 그는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 속에 흠뻑 빠져 지내야 했다. 이것이 전부 소르체의 성물인 백자의 피를 구하지 못한 탓이었다.

백자의 피를 구하지 못한 대가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소르체의 땅에서 그는 아리아드네의 구두 장식에 긁혀 한쪽 뺨에 깊은 상흔을 얻었고, 정체 모를 여자로부터 한쪽 손을 잃어야 했다.

뺨에 남은 상처와 잘린 손목을 볼 때마다 속에서 분기가 차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카이엔이 분노로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전하께선 왕국의 주인이 되실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시지요.”

그렇게 말하는 이는 카이엔의 맞은편에 앉은 레비에 후작이었다. 그는 마치 카이엔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굴었다. 레비에 후작의 아부에 흡족해진 카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오면 감히 하늘에 거역한 대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게 해 줘야지.”

그가 응징해야 할 것은 남부의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양쪽을 저울질하던 이들이 메르디에스에 속속 붙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박쥐 같은 녀석들. 그들은 오판의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리라. 사납게 눈을 희번덕이던 카이엔이 눈앞의 충신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대는 하늘을 따른 보상을 받게 될 테고.”

“영광입니다, 전하.”

레비에 후작은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태도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래, 남부 연합의 본대가 물새 협곡으로 진군한다고?”

카이엔 앞에 놓인 탁자 위에는 전령이며, 척후대 등이 보낸 소식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네, 그렇다고 합니다.”

“잎새 평원에도 적지 않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쪽은 케이루스가 남부를 급습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인 듯하니.”

당연히 황금 대로를 따라 북상하여 잎새 평원에 진지를 구축할 줄 알았건만, 정작 잎새 평원에 도착한 병력은 방어선만 구축한 채로 요지부동이었다.

남부 연합의 본대는 잎새 평원이 아니라 물새 협곡을 택했다. 물새 협곡과 왕궁의 거리는 불과 이틀.

“속도전으로 가겠다는 건가?”

카이엔이 지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찬가지로 지도를 보고 있던 레비에 후작은 지도만 살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몇 가지 떠올렸다.

메르디에스 본대가 잎새 평원이 아니라 물새 협곡을 선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왕궁과의 거리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잎새 평원으로 진군할 줄 알았던 메르디에스 본대가 방향을 틀어 물새 협곡으로 향하자 사람들은 그 이유를 쉽사리 헤아리지 못했다. 누가 봐도 물새 협곡은 메르디에스에게 불리한 전장이기 때문이었다.

케이루스가 남하할 경로를 막기 위한 메르디에스 병력이 잎새 평원에 도착하고서야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잎새 평원에 주둔한 메르디에스 병력은 케이루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또 있었다.

‘가을밀의 수확을 앞둔 잎새 평원을 지켜라.’

메르디에스의 진의에 민심이 술렁였다.

다그마르의 승하 이후, 왕도에서는 조금만 눈에 띄는 행동을 해도 처형당하기 일쑤였다. 왕도에 남은 간자들을 경계하여, 카이엔이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명분은 사람을 일으키고, 민심은 사람을 움직인다. 지금 명분과 민심은 모두 메르디에스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레비에 후작은 이러한 것들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카이엔은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어찌 됐든 물새 협곡이라니,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지.”

메르디에스는 어마어마한 금력을 동원해 초반부터 압도적인 물량을 퍼붓고 있었다. 메르디에스의 병사라면 말단 사병들까지 모두 합금 갑옷을 지급 받았다.

전쟁에서 물자는 단연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쟁의 전부는 아니었다. 지리적 이점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나 물새 협곡이라면 그들의 압도적인 물량 공세와 붙어도 승산이 있었다.

‘아리아드네, 당신만큼은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카이엔은 그녀의 고고한 얼굴이 절망으로 무너지는 꼴을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비틀린 미소를 짓던 카이엔이 검은 달의 수장 제롬을 향해 물었다.

“그자의 행적은 여전히 알 수 없고?”

제롬은 ‘그자’가 누구냐고 묻는 우 따위는 범하지 않았다.

“네, 캐롤린 리스벨의 장례가 끝나고 메르디에스를 떠난 뒤로는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양손의 깍지를 끼려던 카이엔이 멈칫한 채로 손목 아래가 휑한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계의 방문자 유진…….”

‘카푸트의 참된 주인이 이 땅에 나타나리라.’

성녀 베아트리스의 예언이 전해진 날, 페렌트 왕궁은 크게 요동쳤다.

카푸트는 200년 전, 페렌트 왕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악귀였다. 그리고 카푸트는 케이루스의 오래된 원수이기도 했다.

케이루스의 선조들은 그자를 그렇게 불렀다. 지상 낙원 아르체에 종말을 불러온 더러운 씨앗.

케이루스는 고작 그따위 더러운 씨앗 때문에 스스로 이룩한 낙원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낙원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지독한 상실과 절망을 버텨 냈다. 낙원으로의 귀환은 케이루스의 가장 간절한 염원이었다.

―흩어진 내 유해를 탐내지 마라. 내가 다시 이 땅에 나타나면 그때야말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유진이 정말 그 더러운 씨앗이 남긴 무언가라면, 케이루스는 이번에야말로 그자를 막아야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맞붙어야 할 상대였어.”

그들이 새로이 건설한 지금의 낙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 줄 때가 됐지.”

카이엔은 제 가슴에 품은 페루스의 한쪽 뿔을 마치 으스러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꽉 쥐었다.

* * *

눈에 닿는 것은 모조리 다 잿빛인 죽음의 땅, 아르체. 잿빛 눈이 내리는 한가운데 남자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는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그곳에 서 있었는지 그의 어깨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페루스의 시간을 이어받은, 레오의 영혼을 가지고, 유진의 육체에 깃든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부모들조차 지켜 주지 못한 그대들을 품은 건 아르체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고아들을 팔아 아르체의 풍요를 샀던 페루스의 신관들을 죽여야 할까? 인간을 제물로 바쳐 페루스가 던진 부스러기를 먹으며 호의호식하던 기생충 주제에.

―우리의 주인은 네가 아니다. 우리가 널 섬겨야 할 의무는 없다.

모시던 존재마저 부정하던 그 버러지 같은 작자들을.

―당신이 찾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이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그래, 감히 제 일부인 별의 그릇으로 자신을 좌지우지하려 들었던 그 건방진 작자가 살아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들을 당장 눈앞에 데려와 갈가리 찢어 죽여야 했다.

페렌트의 왕궁으로 향하려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레오.’

내리는 눈 사이로 들꽃을 한 아름 품에 안은 디티가 눈이 부시게 웃고 있었다.

“디티…….”

이 세상 어딘가에 디티가 살아 있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어.

원하지 않았던 삶을 살아야만 하는 디티가.

―……레오, 나 죽고 싶어. 진짜로 죽고 싶어. 다시 살아나는 그런 거 말고.

하지만.

―그래 줄 거지? 레오, 날 죽여 줄 거지?

디티가 여전히 죽음을 바라고 있으면, 자신은 그녀의 소망을 이루어 줘야 하는 걸까? 그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제 손 안에서 늘어지던 디티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차갑게 굳은 몸이 순식간에 황금빛 공기 중으로 녹아들던 그 모습 역시도.

“제발, 디티……. 우리 이대로 좀 더 살면 안 돼?”

그는 디티가 무엇을 바랄지라도, 그녀가 좀 더 살아 주었으면 했다.

“나는 살고 싶어.”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파묻힌 땅 위에서 애원하듯 무릎을 꿇었다.

얼음덩어리같이 꽝꽝 언 땅이 그가 내려친 주먹에 닿아 산산이 부서졌다. 깨지고 갈라진 얼음이 그의 주먹에 박혀 상처를 냈다. 새빨간 피가 잿빛 눈 위에 뚝뚝 떨어졌다.

붉은 핏방울 위로 레오의 팔에서 읽은 다른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흩어졌다. 새빨간 핏방울에 떠오른 기억은…….

[아, 그들이라면 이미 죽었지. 그녀가 사랑하던 것, 그녀를 사랑하던 것, 이 세상에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한 남자는 교활한 뱀의 얼굴을 한 채 흡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이계의 방문자여, 지난 선택을 후회하나? 아리아드네를 구하고 싶나? 그대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녀가 잃은 것들을 되찾아 줄 순 없을 텐데.]

그 말을 하는 남자는 그녀의 행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페렌트의 새로운 왕 카이엔 케이루스.

[나를 왕으로 만든 건 아리아드네일지 몰라도, 내가 다른 가문을 없앨 수 있도록 도운 건 그대이지 않나? 그대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이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테니.]

그리고 이것은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른 시간의 흔적.

페루스가, 레오가, 그리고 언젠가의 유진이 지은 죄가 켜켜이 쌓여 그를 짓눌렀다. 지은 죄의 무게가 버거워서 압사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이젠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그의 위로 두꺼운 구름을 뚫고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사랑과 죽음이 함께 오나니, 사랑도 죽음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제게 남은 것이 오직 그것이라면…….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빛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의 끝에 사라진 그의 심장을 가져간 주인이 있을 터이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