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148)
  • * * *

    겨울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추위가 한창 기승이었다. 이 추위만 한풀 꺾이고 나면 곧 봄이었다. 그리고 봄이 되면 본격적인 내전의 시작이었다.

    메르디에스 회의장에 모인 사람 중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침묵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겨울바람은 더욱더 세차게 불어 댔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메르디에스 기사단장인 커티스였다.

    커티스는 겨우내 하루도 빼먹지 않고 꽃을 꺾어 캐롤린의 관 위에 올려 두었다. 그는 매일같이 꽃을 꺾으며 다짐했다. 네가 목숨을 걸고 지켜 낸 것들을 내가 끝까지 지켜 내마, 그렇게.

    커티스는 유난히도 혹독했던 이번 겨울을 오직 그 맹세 하나로 버텨 냈다. 딸을 잃은 아비의 눈동자를 마주한 레너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지. 이제 결정을 해야지.”

    레너드가 붉은 점이 빼곡히 표시된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회의는 메르디에스를 주축으로 한 남부 연합의 군대가 어느 경로로 진군할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케이루스는 왕도 릭센을 중심으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연이은 악재로 전력이 약화된 케이루스로서는 방어에 치중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다.

    1왕자 카이엔은 부상을 당한 상태였고, 메르디에스 성의 탈환 과정에서 케이루스는 적지 않은 전력을 잃었다. 릭센의 왕궁에 틀어박힌 케이루스를 치기 위해 메르디에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메르디에스 성에서 릭센으로 가는 황금 대로를 따라 북상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에움 산맥의 줄기를 따라 우회하여 릭센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경로로 진군할 경우, 케이루스와 맞닥뜨리게 될 곳은 잎새 평원이었다. 잎새 평원은 왕성에서 이레 거리에 위치한 드넓은 평원으로, 이곳을 전장으로 삼으면 원정군인 메르디에스가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에움 산맥의 줄기를 타는 두 번째 경로로 진군할 경우, 두 세력이 맞닥뜨리게 될 곳은 물새 협곡이었다. 물새 협곡은 이곳만 건너면 카이엔이 똬리를 튼 왕성이 불과 이틀 거리라는 거대한 이점이 있었다.

    양쪽 다 유불리가 명확했다.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때, 우아한 자태로 손을 든 여자가 입을 열었다.

    “얼마든지. 그러라고 모인 자리가 아닌가. 스타드 백작의 의견은 어떠한가.”

    레너드가 남부 연합을 대표하여 전략 회의에 참석한 스타드 백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황금 대로를 따라 북상하면 잎새 평원에서 양 병력이 맞붙게 되겠지요. 잎새 평원은 황금 대로를 뒤로 두고 있으니 우리 측이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기에 유리합니다. 뒤쪽을 받치는 것이 남부의 땅이니 후방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스타드 백작의 우아한 손가락이 황금 대로를 따라 죽 움직이다가 잎새 평원에서 멈췄다.

    “하지만 잎새 평원을 뚫는다 해도 릭센에 닿기까지는 두 개의 성을 더 지나야 하지요. 적에게는 천금 같은 시간이 될 겁니다.”

    메르디에스 전력이 두 개의 성에 발이 잡히는 동안 케이루스는 전력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게 된다.

    스타드 백작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디움에서 뻗어 나온 에움의 줄기를 따라 미끄러졌다.

    “에움의 줄기를 타고 우회하면 우리가 저들을 맞닥뜨리게 될 장소는 물새 협곡.”

    가느다란 손가락이 릭센의 북동쪽 지점에서 멈췄다. 그녀의 손가락이 멈춘 지점은 바로 물새 협곡이었다.

    “이곳만 지나면 왕궁까지는 불과 이틀 거리이나, 물새 협곡은 산세가 가파르고 지형지물이 복잡하여 매복에 유리한 곳입니다. 이곳을 아무런 피해 없이 돌파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물새 협곡은 그곳을 넘는 새 떼조차 쉬어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세가 험한 곳이었다. 이는 곧 매복에 적당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곳이니, 케이루스로서는 이곳이 전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터였다.

    “물새 협곡을 지키는 케이루스를 이기는 것은 원활한 지원을 받으며 두 개의 성을 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 되겠지요.”

    말을 끝마친 스타드 백작이 지도에서 손을 거두었다. 마찬가지로 지도를 보고 있던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어 스타드 백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스타드 백작님의 선택은 역시 잎새 평원인가요?”

    “우리에게 유리한 전장이 있는데 불리한 곳으로 굳이 뛰어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압도적으로 물자가 풍부한 메르디에스에게는 잎새 평원이 유리하고, 왕궁을 수성해야 하는 케이루스에게는 물새 협곡이 유리했다.

    “그래, 그렇지. 잎새 평원과 물새 협곡은 유불리가 너무 명확하지. 자네 의견은 어떤가?”

    레너드의 물음에 내내 침묵을 지키던 커티스의 입이 열렸다.

    “제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잎새 평원은 보급이 원활하며 후방이 안전하니 안정적으로 전황을 이끌 수 있을 테고, 물새 협곡은 왕성이 지척이니 그곳에서 이긴다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지도 위, 왕궁을 나타내는 한 점을 가만히 노려보던 커티스가 이내 고개를 들고 단호히 말했다.

    “물론 어느 길을 택하든 이기겠습니다. 제 역할은 그것입니다.”

    “너는?”

    레너드의 이번 물음은 아리아드네를 향한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스타드 백작님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잎새 평원으로 진군하면 전력을 유지한 채로 왕성까지 도달하겠지요. 쉽고 안전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네 의견도 스타드 백작과 같으냐?”

    “아니요.”

    아리아드네의 대답이 의외였던지 레너드의 한쪽 눈썹이 움찔 위로 들렸다.

    창 너머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막 돋아나기 시작한 잎눈들이 나뭇가지에 애처롭게 매달린 채로 함께 흔들렸다.

    “쉬운 승리가 눈앞에 있을지라도 돌아가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요. 저는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스타드 백작이었다. 얕게 고개를 끄덕인 아리아드네가 창밖을 가리켰다.

    “가을밀의 수확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잎새 평원이 전장이 된다면 인근 주민들은 기근을 면치 못할 겁니다.”

    지금은 가을에 씨를 뿌려 늦봄에 수확하는 가을밀이 한창 자라는 시기였다. 가을밀은 지난가을에 거둬들인 식량이 동날 때쯤 수확해 다음 추수 때까지 버티게 해 주는 중요한 작물이었다.

    잎새 평원은 대표적인 가을밀 재배 지역이었다. 잎새 평원에서 수확되는 가을밀은 가장 배고픈 자들의 생명줄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상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타드 백작 또한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잎새 평원을 전장으로 삼는 이득이 훨씬 크다고 판단한 것뿐이었다.

    아리아드네와 스타드 백작의 판단은 그 지점에서 갈렸다. 전쟁으로 피해를 감수하는 것은 누구여야 하는가.

    “전쟁에 승리하면 권력을 얻는 것은 우리입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도 우리여야죠. 전쟁을 하는 것은 병사여야지, 양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리아드네의 말에 스타드 백작은 제가 생각했던 가을밀에 대한 해결책을 꺼내 놓았다.

    “저 또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수확을 앞둔 잎새 평원을 전장으로 삼자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페렌트에서 소비하는 곡물 대부분은 우리 남부에서 나는 것입니다. 당장 급한 것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메르디에스만 해도 그렇지만 스타드 백작이 보유한 곡물도 적지 않은 양이었다. 남부 연합에서 모으면 어마어마한 양이 될 테고. 그것이면 잎새 평원의 가을밀을 충분히 보충하고도 남았다.

    “보통 때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전시 상황에서 보급의 최우선은 병사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곡물을 옮기는 데는 어마어마한 인력이 필요했다.

    전시에 병사들이 먹을 군량을 수송하는 것만도 부담인데, 가을밀을 수확하지 못해 굶주린 양민들을 넉넉히 먹일 식량을 운반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울 리 없었다.

    이 부담은 결국 가장 약한 자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 자명했다.

    “우리가 페렌트인 이상, 잎새 평원 일대는 전장으로 삼아서는 절대 안 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페렌트인 이상?”

    레너드가 아리아드네의 말 중에 한 마디를 잡아채 되물었다. 그러자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동자가 레너드를 돌아보았다.

    아리아드네의 파란 눈동자는 가장 넓은 바다의 한가운데처럼 깊고 잠잠했다. 레너드는 제 딸의 눈이 언제 저렇게 아득해졌나 싶었다가도 그것이 안쓰럽기도, 대견하기도 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적국과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싸우는 땅은 우리가 사는 곳이고, 싸움이 끝난 뒤 우리가 다스려야 할 땅입니다.”

    입을 연 아리아드네는 전쟁의 승리는 당연하다는 듯 그다음을 말했다.

    하지만 레너드에게는 아리아드네가 하는 말보다 그 말을 하는 표정이 더 먼저 다가왔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아리아드네는 제가 고이 키운 딸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깊이를 알기 어려운 눈, 냉정한 표정, 망설임이나 혼란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태도.

    레너드는 딸의 낯선 얼굴에 압도되었다.

    “잎새 평원을 전장으로 삼는다면 수월한 승리를 얻는 대신 어려운 통치를 감내해야 할 겁니다. 저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전한 페렌트이니까요.”

    아리아드네는 나라를 다스리는 세력이 둘로 쪼개져 싸우는 전쟁을 시작하고도, 전쟁의 화마 따위가 미치지 않은 온전한 페렌트를 갖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리란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태도였다.

    선왕이 떠벌린 별의 예언은 레너드에게도 내내 숙제나 마찬가지였다.

    ‘네 죽음이 그토록 고대하던 이 땅의 진정한 왕을 잉태하리니, 홀로 우뚝하게 선 왕은 우리의 오랜 염원을 이루리라.’

    그 예언의 주인공으로 유력한 이가 바로 제 딸이었기에.

    레너드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는 진정한 왕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가 따위를 고민하곤 했다. 그는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답을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갈림길에서 누군가는 선택을 미루고, 누군가는 고민하고, 누군가는 사람들을 이끈다. 사람을 이끄는 것은 누가 되는가.

    “전장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어려운 통치를 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거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건 훗날의 민심이 아니야. 오늘의 승리이지.”

    레너드의 말은 스타드 백작의 손을 들어 주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깊은 바다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아버지, 우리는 페렌트의 영광과 번영을 회복하겠다는 기치(旗幟)로 내전을 일으켰어요. 그것이 내전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이어서는 곤란하죠.”

    사람을 이끄는 자리에 있는 자는 옳은 결정을 하는 자여야 했다. 갈림길을 헤맨 끝에 막다른 길에 도착하지 않도록.

    “우리는 케이루스와는 다르니까요.”

    케이루스 왕조를 전복하려면 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물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서슴없이 이용하는 자들과는 달라야 했다.

    “우리는 약탈자가 아니잖아요. 점령군도 아니지요. 집에 불을 지르는 건 침략자들이나 하는 짓이죠. 그렇지 않나요?”

    아리아드네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조금도 망설이는 것 없이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사람들은 알게 되겠죠. 누가 진짜 이 땅의 주인인지.”

    “진짜 주인이라…….”

    레너드의 낮은 뇌까림 사이로 스타드 백작의 다소 급한 듯한 물음이 들려왔다.

    “정녕 유리한 전장을 두고 불리한 전장을 선택하실 겁니까?”

    “누가 그러던가요? 물새 협곡이 우리에게 불리하다고.”

    덜컥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스타드 백작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스타드 백작께 약속드리지요. 잎새 평원을 지나가는 바람보다도 빨리 물새 협곡을 통과하겠노라고.”

    그리고 사람을 이끄는 자리에 있는 자는 옳은 결정을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하는 힘이 있어야 했다.

    “공녀 저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망설임이 끝난 스타드 백작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대답했다.

    레너드는 훌쩍 자란 딸의 모습이 더는 안쓰럽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딸인 동시에 페렌트의 다음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이 땅의 진정한 왕,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 눈으로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봄이 오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 * *

    ‘곧 잎이 돋으려나.’

    아리아드네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들이 세찬 바람에 밀려 춤을 추듯 움직였다.

    하지만 차가운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 대도 막 돋아나기 시작한 손톱만 한 잎눈조차 어쩌지 못했다. 계절의 흐름이란 그런 것이었다.

    “추운데 왜 나와 계십니까?”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더니 달미에르였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메르디에스 성에 빠르게 적응했다.

    “공자께서도 벌써 남쪽 사람이 다 되셨나 보네요. 이 날씨에 춥다는 말을 하시고.”

    리뮈르에서 평생을 자란 달미에르였다. 아리아드네는 남쪽의 날씨를 두고 춥다는 표현을 쓰는 그가 퍽 신기했다.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던 달미에르가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공녀께서는 남쪽 사람이시니까요.”

    소년과 청년의 경계 위에 선 듯한 그의 예민한 인상이 부드럽게 풀리며 단정히 묶은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보는 그의 얼굴이 조금은 버겁고, 꽤 서러웠다. 답하지 못할 애정이라 버거웠고, 사라진 사람을 떠올리게 해서 서러웠다.

    “이것도 끝이니까요.”

    “무엇이 말입니까?”

    “겨울이요.”

    겨울이 끝나면 메르디에스 성을 벗어날 테고, 그러면 이곳에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일도 끝이었다.

    “겨울이 끝나면 그를 기다리는 것도 끝인가요?”

    유진이 떠난 그날 이후로 아리아드네는 종종 이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달미에르는 그런 아리아드네를 귀신같이 찾아냈다.

    어딘가 힘이 빠진 듯 푸시시 웃는 얼굴을 한 아리아드네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건 봄이 되면 알게 되겠죠.”

    그를 사랑한 것도, 그를 기다리는 것도 제 의지대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를 기다리는 것이 언제까지일지 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봄이 되면 그때는 저도 공녀를 기다려도 될까요?”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내 고개를 든 그녀가 단호한 얼굴로 거절의 말을 덧붙였다.

    “저는 리뮈르와 함께할 날을 꿈꾸지만, 그것은 제가 꿈꾸는 페렌트에 리뮈르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리뮈르가 치러 온 희생의 대가를 내놓으라면 마땅히 그럴 수 있었다.

    “공자께서 리뮈르로서 기다리시겠다면 기꺼이 맞겠으나, 제 마음을 바라시는 것이라면 드릴 답이 없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제 왼손 약지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매끈한 손가락에는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제 곁에 매어 둘 작은 약속조차도 나누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은 그의 곁에 꽁꽁 묶인 꼴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이 세계에 있긴 한 건지 그것조차 알 수 없는 지금도 제 안은 온통 떠나간 그 사람으로 가득했다.

    자신을 향한 호의와 관심을 적당히 넘길 정도의 여유조차 제게는 남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다.

    달미에르의 혼탁한 눈동자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아리아드네의 얼굴 한 뼘 앞에서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 것처럼 허공을 더듬었다.

    “지금 공녀께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렇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요?”

    달미에르는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편하긴 했으나 그것이 지금처럼 부당하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은 뒤로 그는 때때로 제 시력이 제 기회조차 앗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녀의 마음은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달미에르는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제가 공녀의 친우가 되고 싶다면 받아 주실 건가요?”

    자신이 이토록 집요한 사람이었던가. 달미에르는 이러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아리아드네 주위를 맴도는 리카르도를 한심하다 여길 때가 아니었다.

    아니, 연인과 친구를 잃고 마음이 약해진 사람을 상대로 이러는 것이 훨씬 더 저열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리뮈르와 메르디에스는 이미 친우 이상의 전우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게 공녀를 기다릴 기회조차 주지 않으실 거라면, 오늘처럼 바람이 차가운 날에 온기를 나눌 기회 정도는 주셔도 되지 않나요?”

    “그것이 제게 바라는 전부입니까?”

    그럴 리가. 달미에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그런 안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 하나 제 몫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다 지치는 날에는 저를 붙잡고 욕을 해도 좋겠지요.”

    ‘오지 않을 사람’ 운운한 것은 반쯤은 오기였다.

    “문득 이유 없이 쓸쓸해지는 날에는 식도가 타는 듯한 독주를 함께 들이켜도 좋고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그녀 곁에 있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었다.

    “공녀께서 힘들 때 저를 찾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차가운 바람을 하염없이 맞아 가며 기다리는 것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그 바람을 잠시라도 막아 주고 싶었다. 자신에게 남쪽의 겨울바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바스락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더없이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공자와는 술을 마신 적이 없네요. 다음에 한 번 자리를 마련해 보죠. 로아도 함께요.”

    완벽한 거절이었다. 심지어 자신과 그녀는 리뮈르의 어느 도박장 뒤편 허름한 술집에서 술을 마신 적도 있는데.

    그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특별했던 순간이었으나 그녀는 이를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사랑이란 이토록 불공평했다.

    “그럼 이만.”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아리아드네는 달미에르에게서 멀어졌다.

    ‘힘들 때?’

    그것을 되뇌는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씁쓰레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힘들 때 자신을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은 애정을 돌려 달라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부탁이었다.

    캐롤린의 죽음을 등에 지고, 무슨 일이 있어도 페렌트의 왕위에 오르겠다 결심한 그날 이후로 아리아드네는 레너드 앞에서조차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부러 괜찮은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과 불안을 눌러 삼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 이곳에 없어서였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모조리 드러내어도 그것이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그가 돌아오지 않는 한 누군가와 함께 있든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목표만을 보고 달리기에는 어쩌면 지금 이 상태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약해질 장소조차 존재하지 않는 지금이.

    아리아드네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맞았다.

    이제 겨울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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