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48)

* * *

회색 눈이 내리는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라곤 그 혼자뿐이었다.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유진은 자신이 떠나온 외곽과 놀랍도록 유사한 아르체의 풍경에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내딛는 곳마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었다. 생명을 가진 것이라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존재하지 않았다.

유진은 소르체의 가주가 건네주었던 유리병을 품에서 꺼냈다. 자그마한 유리병에는 짙은 녹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부활초의 수액을 정제하여 만든 이 약이 아르체의 추위에서 그를 지켜 줄 거라 했다.

그는 유리병 속의 액체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품에 넣었다. 이런 것의 도움 따윈 필요 없었다. 이곳의 추위는 그를 해치지 못했다.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아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를 이 세계로 인도한 카푸트가 환희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니까.

분명, 낯설어야 할 이곳이 지긋지긋하리만치 익숙했다. 심지어 그는 이곳이 지상 낙원이라 불렸던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낼 수도 있었다.

새파란 하늘, 끝없이 펼쳐진 초원, 초원을 둘러싼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높이 솟은 산, 사시사철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

그의 꿈에 지겹도록 등장했던 그 풍경은 바로 지상 낙원이라 불렸던 과거의 아르체였다.

유진이 잿빛 눈으로 덮인 설원을 걷다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면, 이대로 과거를 외면하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잠시 망설이던 그는 발로 눈을 걷어 냈다. 공기 중에 떠도는 황금빛이 그를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황금빛이 터져 나오며 눈과 바위 따위로 막혀 있던 신전의 입구가 드러났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입구를 막은 듯했다. 오래전, 이곳을 찾았다던 랭스턴 공가의 짓이 분명했다.

유진은 그저 앞으로 발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입구를 막고 있던 눈과 바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래도록 기다려 온 주인을 맞이하는 것처럼.

신전의 입구는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계단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번성했던 과거의 흔적인 듯, 지하 신전은 대단히 호화로웠다. 흰 대리석과 황금, 보석을 통째로 녹여 만든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광채조차 잃지 않은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색 빛무리가 그를 인도하는 것처럼 한쪽으로 이어졌다. 그는 황금빛을 따라 걸었다. 황금빛은 점점 짙어지더니 신전 중앙에 이르자 마치 공기 중에 황금을 그대로 녹여 부은 것처럼 진득해졌다.

온통 금빛인 그 속에서 그는 마침내 발견했다.

‘결국 저것인가.’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한쪽 뿔만 남은 거대한 사슴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진은 저 외뿔의 짐승 또한 알고 있었다. 꿈에서 몇 번이고 자신을 집어삼켰던 바로 그 괴물이었다.

한쪽 뿔이 잘린 사슴 조각상 뒤로는 차오르는 달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 남자의 망토에 새겨진 그림과 같은 문양인가.’

한쪽 뿔이 잘린 사슴과 차오르는 달. 이젠 그것이 페렌트의 왕가, 케이루스의 문장이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았다. 처음 카이엔의 붉은 망토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눈이 반쯤 돌아갔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독한 악연이군.’

200년 전, 페렌트의 왕궁에 나타났던 카푸트가 원했던 것이 케이루스의 성물이라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케이루스의 흔적을 발견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진은 황금빛으로 가득한 공간을 가로질러 사슴 조각상 앞에 섰다.

사슴 조각상 바로 앞에는 허리까지 오는 대리석으로 만든 단이 있었는데, 그 위에 사람의 팔처럼 보이는 것이 놓여 있었다.

셋으로 나뉘었다던 신의 유해 중 하나가 분명했다. 유진은 단 위에 놓인 팔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단 위에 놓인 팔은 둘이 아닌 셋이었다. 셋 중 하나는 여자의 것처럼 보였는데, 그 팔은 네 번째 손가락이 잘려 나간 채였다.

심장이 기이할 정도로 시끄럽게 날뛰었다. 카푸트가 어찌나 비통해하는지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단 위에 놓인 세 개의 팔에 유진의 손이 닿은 순간이었다.

‘이것은 내 후회의 기억이다.’

신의 유해가 간직한 기억이 유진의 머릿속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나, 잘 살게. 그러니까 너도 행복해야 해.’

언제나 환한 달처럼 웃던 제 반쪽.

“디티…….”

그것은 그가 잊어버린 제 쌍둥이 누이의 이름이었다.

“아아, 이건…….”

유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그는 텅 빈 눈으로 호화로운 신전을 둘러보았다.

오랜 시간 헤매다 마침내 돌아왔으나, 아무도 남지 않은 땅에서 혼자가 되어 버린 버림받은 영광.

아르체는 자신의 고향이었고, 이곳은 제 신전이었다.

유진은 단 위에 제물처럼 놓인 제 팔과 디티의 팔을 감싸 안은 채 무너져 내렸다. 그의 입에서는 마치 내장을 끊어 내는 듯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외로움에 미친 추악한 짐승, 실패한 염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퉁이, 제 반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장님, 심장이 파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머저리. 왜 더 말해 주랴?

렉사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때론 알지 못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네 무지 또한 네 선택의 결과. 굳이 기억을 되찾으려 할 필요가 있나?

렉사의 말처럼 기억을 버린 것은 제 선택이었다. 그는 렉사처럼 영원토록 망각을 허락받지 못한 존재였으니까.

그는 모라의 첫 번째 권속을 살해한 인간이었다.

* *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곡식이 여문 황금 들판이 바람에 물결치며 흔들렸다.

하지만 추수를 서두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들판은 언제나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많은 곡식을 거둬들여도 들판은 다음 날이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장 풍요로운 순간에서 시간이 멈춘 아르체.

아르체에서는 계절이란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봄이 좋으면 봄인 곳에서, 여름이 좋으면 여름인 곳에서 지내면 그만이었다.

아르체에는 굶주림도, 가난도, 재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의 축복을 받은 지상 낙원이었다.

“또 여기 있었어?”

꽃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여자가 그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양 갈래로 촘촘하게 땋아 내린 연한 갈색 머리카락, 그를 보고 곱게 휘어지는 다정한 회색 눈동자. 그의 쌍둥이 여동생 디티였다.

“아, 디티.”

제 쌍둥이 누이의 이름을 부른 남자가 몸에 붙은 풀과 먼지 따위를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 넌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디티의 물음에 레오는 디움 산맥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르체처럼 살기 좋은 곳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의 속내를 가늠하듯 가만히 바라보던 디티가 어깨를 으쓱하며 집으로 향했다. 레오는 한 발짝 뒤에서 얌전히 디티를 따라 걸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그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지상 낙원이 어쩐지 갑갑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그는 디움 산맥 너머에 있다는 광활한 대륙을 상상했다.

그곳은 고작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종일 일을 해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겨울은 어찌나 혹독한지 얼어 죽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늘 디움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다.

아르체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료한 얼굴이었다. 그것이 이 땅에 넘쳐나는 풍요 때문인지, 아니면 정지한 시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들 지루한 얼굴을 하고도 아르체의 풍요를 숭배했다. 아르체에서 가장 큰 형벌은 사형이 아닌 추방일 정도로.

고인 물처럼 고요하고 느릿한 아르체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건 레오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 소망이 디티에게 해가 될까 쉽사리 드러낼 수가 없었다. 결속이 단단한 곳일수록 남과 다른 행동을 하면 눈총을 받기 십상이니까.

레오에게 디움 너머의 땅이란 눈에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달이나 마찬가지였다.

“찬란한 저 하늘의 태양은 달을 그리고, 영광된 저 하늘의 달은 사라진 태양을 그리네.

하지만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은 별의 숙명. 하지만 달이 뜨고, 해가 지는 것은 별의 숙명.

잠든 네 곁을 지키는 별이 되리라. 찬란한 금빛이 너를 비추는 동안, 널 찾아온 악몽을 피해 꼭꼭 숨어라. 해가 악몽을 살라 버릴 때까지 꼭꼭 숨어라.

찬란한 금빛이 우리를 어루만지네. 찬란한 금빛만이 우리를 살게 하리라. 찬란한 금빛이 우리를 어루만지네. 찬란한 금빛만이 우리를 살게 하리라.”

미사의 시작을 알리는 건 아르체의 성가였다.

아르체의 사람들은 어릴 때는 성가를 자장가 삼아 자라고, 늙어서는 성가를 읊조리며 머지않아 닥칠 죽음을 준비했다.

아르체 사람들의 생애와 함께하는 성가의 청아한 멜로디가 대신전 내부를 가득 채웠다. 대신전 내부의 대리석은 어찌나 정교하게 다듬었는지 벽을 장식한 장미 부조(浮彫)마저도 마치 세필로 그려 낸 것 같았다.

성가대의 일원인 디티는 금실로 수가 놓인 흰 성가대 가운을 입고 반주에 맞춰 성가를 불렀다.

창을 통과한 햇빛이 성가대 위를 비추었다. 디티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성가를 부르는 디티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것은 레오가 제 소망을 포기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추위와 굶주림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모라의 첫 번째 권속 페루스는 이 땅의 수호자이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우리를 지켜 주는 모든 것은 그분의 의지입니다.”

신년 미사의 집전을 맡은 대사제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디움 너머의 땅 아르체는 본디 척박하고 메마른 곳이었다. 아르체가 지금처럼 마르지 않는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모두 모라의 첫 번째 권속 페루스를 모시면서부터였다.

페루스는 믿음을 대가로 이 땅에 풍요라는 축복을 내려 주었다. 한쪽 뿔이 잘린 사슴, 그것은 이 땅에 풍요를 내려 준 모라의 첫 번째 권속 페루스의 형상이었다.

“우리에겐 페루스의 축복을 받은 아르체를 지킬 의무가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영혼 또한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가 길어질수록 대사제의 목소리는 점점 격양되었다. 대신전에 모인 신도들은 대사제의 말이 끝날 때마다 두 손을 꼭 쥐고 고개를 숙였다.

페루스의 의지를 전하는 것은 신전의 사제들, 아르체에서 그들은 절대적인 제왕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르지 않는 풍요를 내려 주신 페루스께 우리의 영혼을 바칠 수 있다면 그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끝이 가까워졌다. 성호를 그은 대사제가 기도의 마지막 문구를 입에 담았다.

“당신께 우리의 영혼을 바칩니다.”

“당신께 우리의 영혼을 바칩니다.”

신전에 모인 신자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사제의 마지막 말을 복창했다. 미사의 끝이었다.

“레오, 오늘은 먼저 가. 난 반성회가 남아서.”

성가대 가운을 벗은 디티가 빠르게 다가와 속닥거렸다. 달에 두 번 있는 반성회가 오늘이었던 모양이다.

“그래?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레오가 슬쩍 신전을 벗어나려는데, 디티 뒤쪽에 있던 여자가 붉어진 얼굴로 그를 잡았다.

“레오 형제님, 오늘도 미사만 보고 돌아가실 건가요?”

레오는 여자가 쥔 제 소매 끝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조심스럽게 뿌리쳤다.

“…….”

여자가 당황한 얼굴로 제 손을 뒤로 감추었다. 이름조차 흐릿한 여자였다. 지금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이 종종 그를 붙들곤 했다. 마을에서 겉도는 자신이 신기해서인지, 아니면 불쌍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럼 저는 이만.”

“저, 잠시―”

당황한 여자가 그를 불렀다.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그곳을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벌써 돌아가나? 레오 성도.”

미사를 집전했던 대사제가 나타난 탓이었다.

“대사제님.”

레오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아르체 거주민은 모두가 페루스의 신도였다. 그들에게 강제된 유일한 노동이 바로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사만 보고 돌아가는 이는 흔치 않았다. 자발적인 봉사로 신전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레오 성도도 신전의 일에 좀 더 마음을 써 주면 좋을 텐데…….”

“사제님,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하셨잖아요. 레오도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니까…….”

대사제의 지적에 디티가 다급한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그렇지요.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요.”

인자한 미소를 지은 대사제가 레오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부모들조차 지켜 주지 못한 그대들을 품은 건 아르체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자애로운 성직자의 얼굴을 한 대사제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지상 낙원 아르체는 자신들의 풍요를 과시하듯 버려진 고아들을 거둬들이곤 했다.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디움 너머 사람들은 아르체가 거둬들여 줄 것을 기대하고 디움 산맥에 아이들을 버렸다.

레오와 디티 역시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운이 좋아 죽기 전에 발견된 레오와 디티는 그들을 버린 부모의 바람대로 아르체의 풍요를 누리며 모자람 없이 자랐다.

하지만 그토록 풍요로운 아르체도 레오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진 못했다. 레오에게 가족이란 처음부터 함께였던 제 쌍둥이 누이뿐이었다.

‘먼저 가 있어. 금방 갈게.’

디티가 주위 눈치를 보며 입 모양으로 그를 달래고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전 안쪽으로 걸어갔다.

남겨진 그가 걱정되는지 디티가 계속 뒤를 돌아보다가 다리를 삐끗해 휘청였다. 그때, 바로 옆에 있던 남자가 재빠르게 휘청이는 디티를 붙잡았다.

“디티, 괜찮아?”

“고마워, 조엘.”

디티가 자신을 잡아 준 남자를 보며 친근한 웃음을 지었다.

‘새 남자 친구인가?’

레오는 디티 옆에 선 남자를 슬쩍 훑어보고는 신전을 나섰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디티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다. 원래도 고백해 오는 남자가 끊이지 않았지만 성가대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더 그랬다.

‘쟤가 세 번째던가, 네 번째던가.’

레오는 디티의 새로운 연인이 몇 번째였던가 헤아리느라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서로의 어깨가 부딪히며 맞은편 남자가 들고 있던 종이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죄송합―”

“됐어.”

레오가 사과하며 종이를 주우려고 했지만 남자는 이조차 불쾌하다는 듯 차갑게 거절했다.

“아, 진짜 눈은 뒀다 뭐 하는 거야.”

남자가 불타는 듯한 주황색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더니 신경질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못 쓰겠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살피더니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레오는 다시 한번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레오를 보는 남자의 얼굴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레오와 같은 고아 출신이라지만 남자는 다른 고아들과 여러모로 달랐다. 남자는 젊은 사제들 가운데 가장 촉망받는 인재였다. 대사제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검은 달의 차기 수장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것은 남자의 인품이나 학식과 같은 것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로지 타고난 성력이 탁월해서였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저리 비켜.”

남자가 레오의 어깨를 거칠게 치고 지나갔다.

레오의 손에는 남자가 채 줍지 못한 종이들이 들려 있었다. 레오는 남자가 두고 간 종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는 저렇지 않았는데…….’

또래보다 작은 데다 북부에서는 드문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탓에, 어린 시절 남자는 아이들 사이에서 약자였다. 그는 신전의 고아원에서 또래에게 쫓기거나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런 남자를 그나마 챙겨 준 것이 레오와 디티 남매였다.

남자는 울어서 팅팅 부은 눈을 한 채로 동갑인 레오를 형이라 부르며 따라다니곤 했었다. 하긴, 그것도 전부 남자의 성력이 발휘되기 전까지였지만.

사제로 발탁된 남자는 더 이상 레오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가 아니었다. 남자를 괴롭히던 고아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기었고, 그는 고아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 했다. 자신은 그런 고아들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듯이.

대사제의 잔소리에 이어 남자와 부딪히기까지 하다니. 여러모로 운이 나쁜 날이었다.

―레오, 넌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나도 그럴 거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남이 되는 건 아니잖아.

디티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그 시절 레오는 디티가 결혼하여 새 울타리가 생긴다면 자신도 이곳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디티, 이게 무슨 말이야? 네가 페루스의 신부라니!”

“아, 들었어?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는데…….”

“왜 하필이면 너야? 이건 아니야. 떠나자. 이건, 이건…….”

“레오.”

디티의 차분한 회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레오는 디티가 내놓을 대답이 두려웠다.

“난 안 떠나.”

“디티!”

“레오, 넌 이곳을 늘 떠나고 싶어 했지만 나는 아니었어. 내게 아르체는 살아온 고향이고, 앞으로 살아갈 터전이었어.”

알고 있었다. 디티는 늘 레오에게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고 했지만, 한 번도 같이 떠나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이곳을 떠나지 못한 것은 남은 디티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였는지도 몰랐다.

“우리같이 버려진 고아가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는 땅이 또 있을까. 내가 페루스의 신부가 되면 아르체의 풍요는 계속될 거야. 그러면 나 같은 고아 중 누군가는 그 혜택을 보겠지.”

페루스의 신부란 외부와 격리된 신전에서 아르체의 풍요를 위해 평생 기도하는 사제를 일컫는 말이었다.

“레오, 내 희생으로 이곳을 지킬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럼 조엘인가 하는 걔는?”

“……알고 있었어?”

레오의 물음에 놀란 듯 눈을 깜박이던 디티가 이내 웃어 버렸다.

“그냥 하도 따라다녀서 잠깐 만난 거야. 그렇지 않아도 헤어지려고 했어.”

그 말을 하는 디티는 정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는 듯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레오, 신부의 의식이 끝나면 아르체를 떠나. 대사제님께서 네가 이곳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했어.”

디티를 이곳에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었다.

“넌 네가 바라던 삶을, 난 내가 선택한 삶을 사는 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남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 말은 반칙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디티를 그가 말릴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삶을 살더라도 너는 내 영혼의 반쪽이니까.”

그렇게 디티의 결심을 돌리지 못한 채 신부의 의식을 치르는 날이 되었다.

“괜찮아.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환하게 웃는 디티의 뒤로는 여느 때처럼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레오는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디티의 갈색 머리카락 위로 하얀 레이스로 짠 미사보가 얹어졌다.

하얀 미사보를 쓴 디티가 손을 내밀었다. 디티의 손을 잡고 걷는 이 길이 남매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길 끝까지 걸었다.

길 끝에는 금으로 장식한 흰 마차가 디티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오는 차마 손을 놓지 못했다. 미사보를 쓴 디티가 레오를 손을 떨치고 마차에 올랐다.

“나, 잘 살게. 그러니까 너도 행복해야 해.”

마차는 디티를 싣고 멀어졌다. 그는 제 영혼의 반쪽이 뜯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디티는 레오에게 곧바로 아르체를 떠나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 레오는 디티의 남은 흔적들을 보며 누이의 행복을 간절히 기원했다.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별안간 벌떡 일어난 그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그냥, 무작정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불길한 어떤 것과 마주하게 될 것만 같았다.

마구잡이로 쑤셔 넣은 짐가방을 든 레오가 막 집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콰앙! 쾅쾅쾅! 쾅쾅쾅쾅쾅! 문을 때려 부수기라도 할 것 같은 다급한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다급하고 거친 노크 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마주한 방문객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달의 마법사님?”

젊은 신관들 가운데 가장 장래가 유망하다는 달의 마법사가 땀에 흠뻑 젖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레오는 달의 마법사가 알려 준 길을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네 동생, 네 동생이 페루스의 신부가 되었다는 게 정말이야?

―네, 달의 마법사님. 그런데 그게 왜…….

―그 마법사님 소리 좀 집어치워! 누가 너한테 그따위 호칭 듣고 싶대?

―…….

―너, 페루스의 신부가 뭔지 알기나 해? 그건 아르체의 풍요를 얻는 대가로 악귀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디티는 아르체의 풍요를 위해 평생 기도할 거라고, 바깥출입을 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 빼면 다를 것도 없다고, 그렇게…….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네 동생이 페루스의 신부로 뽑혔겠어? 그건 너희가 지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고아이기 때문이잖아.

―디티…….

―내가 이래서 고아들이랑 정붙이기 싫었어. 그중 하나는 제물이 될 테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고아를 받아들인 것이 제물로 삼기 위해서라니.

달의 마법사가 알려 준 곳은 대신전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지하 신전이었다. 입구는 지키는 사람들로 대낮처럼 밝았지만 다행히도 달의 마법사가 알려 준 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하 신전을 장식한 황금과 보석 때문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 모든 것이 고아들을 제물로 바쳐 이룩한 것이라니.

레오는 황금을 녹인 강과 보석으로 만든 나무를 지나 신전 중앙에 다다랐다. 신전 중앙으로 갈수록 공기 중에 떠도는 황금빛이 점점 짙어졌다.

그의 앞을 페루스의 거대한 황금빛 조각상이 가로막았다. 레오는 페루스의 조각상 뒤에 숨어서 주위를 살폈다.

사슴 조각상 바로 앞에는 높은 단이 하나 있었는데 미사보를 쓴 디티가 그곳에 꿇어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디티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아마도 기도를 하는 듯했다.

“디…….”

디티를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주위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더니, 공기 중에 떠돌던 황금빛이 마치 파도처럼 요동쳤다.

그리고 ‘그것’이 이곳에 나타났다. 황금빛 외뿔, 황금빛 털, 황금빛 눈을 가진 모라의 첫 번째 권속 페루스가.

레오는 아르체 곳곳에 자리한 페루스의 형상을 보며 자랐다. 지금 자신이 몸을 숨긴 조각상 역시 페루스의 형상을 본뜬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페루스의 모습을 조금도 담아내지 못했다. 페루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과 광휘는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은 그 무엇이었다.

페루스와 마주한 레오는 마침내 신을 섬기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했다. 어째서 신을 죽인 고대의 인간들이 그토록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았는지도.

신 앞에서 인간은 천적을 마주한 피식자에 지나지 않았다. 천적을 마주한 거부감에 온몸이 빳빳이 굳었다.

저것이 거대한 사슴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더라도 제 느낌은 달랐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아니, 세상 그 무엇과도 비슷하지 않은 이질적인 존재감.

사람은 제 인지로 수용할 수 없는 것과 마주하면, 그것을 극렬히 거부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앙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섬기기로 마음먹었다 하여 천적을 마주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단 위에 꿇어앉은 디티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하얗게 질린 그녀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페루스를 향해 예를 올렸다.

황금빛 광채를 두른 페루스가 제 형상을 본뜬 조각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레오는 페루스가 조각상 뒤에 숨은 자신을 알아차렸을까 봐 겁이 났다.

‘정말 날 보고 있는 걸까.’

아니, 저만한 존재가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디티를 데리고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레오의 손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가능할 리 없어. 저토록 대단한 존재에게서 디티를 데려오는 일이 가능할 리 없잖아.’

그는 페루스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려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주춤거리던 그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디티를 두고 혼자 도망갈 순 없어.’

고민을 끝낸 그가 조각상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민 그때였다.

페루스의 몸에서 다시금 황금빛이 터져 나오고 디티 앞에 흰 뼈 같은 것이 툭 떨어졌다. 디티는 사전에 들은 말이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그것을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아아악―”

공포에 질린 디티의 비명이 신전을 가득 채웠다.

디티가 흰 뼈를 손에 쥐자 공기 중에 떠돌던 황금빛이 달려들어 그녀의 다리를 먹어 치웠다. 레오가 목격한 광경은 그렇게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성스럽고 반짝이는 빛이 그의 유일한 가족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공포에 질린 몸은 사슬에 묶인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흐, 흐윽―”

디티가 흐느끼며 남은 팔로 그곳을 벗어나려는 듯 바닥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때, 뒤를 돌아본 디티와 레오의 눈이 마주쳤다. 레오는 디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과 마주했다. 겁에 질려 누이의 죽음을 외면하고 있는 자신을.

그는 머리를 감싼 채로 자신을 원망하고 저주할 누이의 모습을 기다렸다. 그를 발견한 디티가 작게 입을 벌렸다.

‘……도, 망 가. 어서.’

아아, 레오는 머리를 처박은 채로 오열하고 말았다.

디티의 죽음 앞에서 겁을 낸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디티가 그런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음에 안심하고 만 자신이 역겨워서.

그것을 끝으로 디티의 머리가 황금빛 속으로 사라지고, 단 위에는 흰 뼈를 쥐고 있던 팔 한쪽만이 남았다. 오열하는 레오의 울음소리가 신전을 가득 채웠다.

팔만 남은 디티를 두고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디티를 죽인 그것에게 복수할 수도 없었다.

페루스는 한참 동안 오열하는 레오를 물끄러미 살펴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디티, 디, 티…….”

레오는 디티의 유해를 품에 안은 채 울부짖었다.

이것이 아르체가 누려 온 풍요의 진실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지상 낙원은 없었다. 아르체는 악귀 페루스에게 바쳐진 가장 깊은 지옥이었다.

“……오, 레오, 일어나 봐. 레오!”

레오는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레오는 눈을 깜박이다 자신을 깨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와락 껴안았다.

“디티…….”

꿈이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살아 있는 디티였다. 레오는 디티가 다시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더욱 꽉 붙들었다.

“살아 있었어. 살아 있을 줄 알았어. 그렇게, 그렇게…….”

레오는 디티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 뒷말을 삼켰다.

디티가 정말 죽었었는지, 죽었던 디티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디티가 살아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번에야말로 그 악귀에게서 디티를 구해야 했다.

“나, 분명 죽었는데……. 페루스의 신부가 이런 것일 줄은…….”

공포에 질린 디티의 얼굴은 눈물로 흥건했다. 레오는 우는 디티를 달래며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것이 다시 들이닥치기 전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온 길로 돌아가면 돼.”

레오는 디티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디티가 휘청거리며 그에게 반쯤 기댄 채 걸음을 옮겼다.

“고마워, 레오. 날 데리러 와 줘서.”

“아니야. 나는…….”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디티를 제가 온 길로 이끌었다.

나는 네 죽음 앞에서 망설였노라고. 그것은 레오의 가슴 속에 빠지지 않는 가시처럼 깊게 박혔다.

“……레, 오.”

“아니, 이럴 리가 없어. 내가 분명 이 길로―”

희망으로 잠시 빛났던 디티의 눈동자가 절망에 잠겨 들었다. 그들은 아무리 걸어도 지하 신전을 벗어날 수 없었고, 페루스의 조각상과 대리석 제단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디티는 밤이 되면 나타나는 페루스에 의해 끝나지 않는 죽음을 반복해야 했다. 그녀는 이후로도 아흔여섯 번의 죽음을 더 경험해야 했고, 레오는 그만큼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죽음은 레오와 디티의 정신을 완전히 망가트렸다.

“레오, 내가 살아나는 것 말이야. 아무래도 이것 때문인 것 같아.”

디티가 제 한쪽 손을 이로 물어뜯었다. 살점이 뜯긴 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녀는 피가 나는 손으로 흰 뼈를 쥐었다. 흰 뼈 주위로 모여든 황금빛이 상처 난 손을 감싸더니, 엉망이 되었던 디티의 손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아, 아닌가? 그냥 내가 괴물이 되어 버린 건가?”

디티는 키득키득 웃다 울음을 터트렸다.

“내 몸이 점점 이상해져. 그 괴물의 힘이 내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아.”

울다 갑자기 고개를 든 디티가 레오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다급하게 말했다.

“레오, 도망가. 이러다가 내가 미쳐서 너마저 죽이면 어떡해.”

레오도 디티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디티는 그 모든 것을 잊은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렀다.

“도망가! 가라니까! 어서 내 앞에서 사라져!”

디티는 레오의 등을 마구잡이로 떠밀다가도 그가 멀어지면.

“아니야, 가지 마. 나 여기서 꺼내 줘.”

그를 붙든 채 자신을 꺼내 달라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때 디티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레오, 나 죽고 싶어. 진짜로 죽고 싶어. 다시 살아나는 그런 거 말고.”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디티는 그 말을 할 때만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레오만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디티의 확신은 날이 갈수록 굳어졌다.

“너만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그랬어. 여기에 모인 영혼들이 내게 말해 줬어. 내 반쪽이 나를 죽여 줄 거라고.”

디티는 앞서 희생된 사람들의 찢어진 영혼 조각이 그 뼈에 남아 자신에게 죽음을 속삭여 준다고 말했다.

“그래 줄 거지? 레오, 날 죽여 줄 거지?”

레오는 디티의 가느다란 목에 손을 올렸으나, 차마 제 쌍둥이 누이의 목숨을 끊을 수가 없었다.

“왜! 왜 날 죽이지 않아? 왜, 네가 대신 죽어 주지 않아?”

다시 살아난 디티는 오열하며 그에게 물었다.

“아니, 아니야. 나는 네가 대신 죽기를 바란 건…….”

제가 한 말에 스스로 놀란 디티가 고개를 저으며 울먹였다.

“아니, 내가 대신 죽을게. 그러니까, 너는 진짜로 죽어도 돼.”

디티의 소망이 진짜 그것이라면 레오는 그것을 들어 줘야 했다. 그것은 디티의 첫 죽음을 외면한 자신이 마땅히 치러야 할 죗값이었다.

“잘 가, 디티.”

레오는 디티의 손에서 흰 뼈를 받아 그것으로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디티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미, 안해. 네가 떠나자고 했을 때, 같이 떠날걸.”

너무 오래된 후회였다.

“디티, 미안해. 널 여기서 꺼내 주지 못해서.”

레오의 눈물이 디티의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다시 태어나면, 그러면…….”

불멸의 영혼을 지닌 인간에게 다시 태어나 만나자는 약속은 남은 자를 위한 위로였다.

“레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어.”

하지만 디티는 이대로 죽고 싶다고 했다. 그의 손에서 늘어진 디티는 예전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레오는 숨진 디티를 안은 채로 밤을 기다렸다.

지하 입구로 새어 드는 빛이 모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되었다. 페루스가 나타날 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황금빛 광채와 함께 페루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평소처럼 금빛으로 빛나는 입자들이 디티의 몸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네 짓인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페루스의 목소리는 악기 소리 같기도 하고 어떤 울림 같기도 했다.

그 물음과 동시에 디티의 한쪽 팔이 공중에 떠올랐다. 공중에 떠오른 디티의 손에는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이걸 찾아?”

레오는 손에 든 흰 뼈를 페루스에게 보였다. 이것만 없으면 디티는 살아나지 않는다고 했다.

‘네가 내게서 그 여자를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디티는 죽고 싶다고 했어. 디티를 살리지 못했으니, 죽게라도 해 줘야지.”

레오의 손에 들린 흰 뼈 주위로 황금빛이 모여들었다. 페루스의 눈동자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너처럼 내 힘과 친화력이 뛰어난 인간은 처음 보았다.’

페루스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무미건조했다.

‘그 여자를 살리고 싶었다면 네가 이곳의 사제가 되지 그랬나. 너 정도의 친화력이라면 인간의 우두머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페루스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페루스는 그저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 레오를 절망케 했다.

레오는 언제나 아르체의 공기 중에 떠도는 황금빛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사제들이 말하는 성력이란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힘을 드러내어 아르체에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레오는 그렇게 자신의 힘을 숨겼다. 페루스의 말대로 그가 고위 사제가 되었다면 디티가 제물이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네가, 네가 뭘 알아!”

레오는 흰 뼈를 쥔 손으로 페루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강한 영혼은 더 오래 버틸 수 있지. 그 여자 대신 널 받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황금빛 입자들이 레오의 몸을 먹어 치웠다. 그것이 레오가 경험한 첫 번째 죽음이었다.

그날, 레오는 페루스의 다음 신부가 되었다.

레오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덜덜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곧 밤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디티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는 은연중에 죽음을 지켜보는 자신의 고통이 디티의 고통보다 작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황금빛 입자들이 그의 몸을 먹어 치우기 시작하면 그는 제 몸에서 피가 솟구치는 환상을 보았다. 솟구친 피가 붉은 덩어리가 되어 쏟아져 내려야 그의 악몽도 끝이 났다.

눈을 뜨면 다시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는 다시 살아난 몸을 웅크린 채 밤을 기다려야 했다.

그 시절, 레오의 유일한 소망은 완전한 죽음이었다. 그것은 죽은 디티의 소망이기도 했고, 그 이전의 신부들이 남긴 소망이기도 했다.

그는 어서 다음 신부가 제게서 이 뼈를 가져가 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것 또한 이 뼈를 지나간 이들이 간절히 원했던 일이었다.

‘네게 죽음을 선물할 여자를 찾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헤매리라.’

모든 것은 디티의 말대로였다. 앞서 희생된 이들이 그에게 죽음을 속삭여 주었다.

하지만 레오에게만은 그들의 속삭임이 희망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은 영원과도 같은 시간 뒤에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너를 죽이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군. 언젠가는 네가 날 소멸시키는 날이 올지도.’

어느 날, 페루스는 그렇게 말했다. 다음 날 다시 깨어난 레오는 페루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내 몸이 점점 이상해져. 그 괴물의 힘이 내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아.

레오는 디티의 말을 떠올리며 흰 뼈로 제 목을 그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는데도 목에 난 상처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어떻게 해야 페루스를 죽일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했다.

흰 뼈가 죽은 그를 되살리는 원리는 간단했다.

페루스는 시간을 다스리는 모라의 권속.

페루스의 한쪽 뿔로 만든 이것이 죽은 사람의 시간을 되돌리기 때문이었다. 상처가 낫는 것도 같은 원리였다. 신체의 시간을 다치기 전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디티는 어떻게 죽은 것일까.

레오는 페루스의 오른쪽 가슴에 박힌 흰 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모라의 권속인 페루스의 심장에서는 피가 아닌 황금색 빛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방법을 알아냈군.’

늘 무미건조했던 페루스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기쁨이 묻어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시간을 빼앗는 것도 가능하겠지.”

‘맞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려면 빼앗은 시간을 받을 그릇이 필요하지. 너는 내 시간을 가져간 것이다.’

페루스의 형상이 투명해질수록 레오의 몸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카론의 노를 넘겨받은 인간아. 네 죽음이 너무 멀지 않기를 기원하마.’

온통 황금색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레오는 자신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모라의 첫 번째 권속 페루스를 살해한 인간이자, 인간으로부터 살해당한 모라의 첫 번째 권속 페루스의 힘을 이은 자였다.

페루스가 살아온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레오의 안으로 흘러들었다.

―페루스, 너는 내가 처음으로 만든 권속이다. 내 자매와 형제들이 차원의 문을 모두 지날 때까지 네가 이곳을 지켜야 한다.

차원의 문을 연 모라는 페루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차원의 문을 유지하는 것은 네 힘으로도 쉽지 않은 일. 이것이 필요하겠지.

모라가 페루스에게 건넨 것은 그의 뿔로 만든 별의 그릇이었다. 태초의 혼돈에서 태어나 최초의 질서를 세운 위대한 신 모라가 가장 아끼는 성물을 제 뿔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의 큰 자랑이었다.

하지만 페루스는 자신을 버린 모라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권속으로 태어난 그의 숙명이었기에.

이 땅을 떠난 신들이 차례로 문을 건너가고 모라는 반대쪽에서 차원의 문을 닫았다.

페루스는 닫힌 차원의 문 앞에서 오래도록 홀로 서 있었다. 이곳을 떠나간 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누구도 시간과 공간을 관장하는 모라가 닫은 문을 열 수는 없었다.

페루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의 외로움과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기만 했다. 외로움에 지친 권속은 괴물이 되어 갔다.

그는 자신의 시간이 모라의 곁에서 행복했던 그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절망에 물든 페루스의 선택은 세계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필요한 것은 시간을 담기 위한 별의 그릇과 인간의 영혼. 인간의 영혼은 불멸, 이것은 영원에 가장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풍요를 내려 주고, 인간들은 풍요를 대가로 그에게 다른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

별의 그릇에 인간의 영혼에서 받아 낸 시간들이 한 방울, 두 방울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반복되는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깨지고 부서졌다.

깨어진 영혼이 다시 붙으려면 그 역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하지만 그것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제물로 바쳐진 인간의 영혼이 깨지면 신부라는 이름으로 다음 제물이 바쳐지곤 했으니까.

페루스의 시간은 무료하게 흘렀다. 그는 기계처럼 인간의 시간을 취했고, 별의 그릇에는 그에 비례하여 시간이 고여 갔다.

그는 때때로 별의 그릇에 고인 시간을 흔들어 보곤 했다. 모라가 존재했던 그때로 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세계의 시간은 모라가 존재했던 그때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도무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알고 있었던 일이다. 자신은 버림받았고, 다시는 모라의 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모라가 준 권능을 확인할 때만 제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형벌과도 같은 페루스의 기다림을 끝내 준 것이 바로 레오, 자신이었다.

레오는 자신과 디티를 수없이 죽인 페루스의 고통과 기다림, 고독과 외로움을 이해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해야 할 상대를 가장 불쌍히 여기게 된 제 처지가 우스웠다.

하지만 그는 페루스의 고통과 레오의 증오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페루스의 시간을 건네받은 순간부터 그는 이미 페루스, 그 자체였으니까.

죽음의 강을 지키는 뱃사공 카론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노를 건네주어야 그 천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페루스의 시간은 레오에게 있어 카론의 노나 마찬가지였다.

‘내게서 카론의 노를 가져가 줄 이는 언제쯤 나타날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뒤의 언젠가.

페루스의 힘을 얻은 레오는 가장 먼저 아르체의 풍요를 거둬들였다. 왜곡된 풍요의 시간이 머물고 있던 아르체에는 그만큼의 빈곤이 찾아왔다.

파랗던 하늘은 새까맣게 변했고, 생명을 가진 것들이 죽어 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잿빛 눈과 비가 동시에 내렸고, 마물이 된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날뛰었다.

“이 땅의 주인은 어디에 갔느냐!”

지하 신전으로 내려온 대사제는 페루스를 찾았다.

“내가 죽였다.”

레오의 주위가 삽시간에 모래가 되어 무너졌다. 대사제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이젠 날 섬겨 볼 테냐?”

“히이이익―”

“버러지들의 섬김 따위를 받아 봤자 불쾌하기만 한걸.”

레오는 별의 그릇으로 대사제의 심장을 갈랐다.

“그토록 경외하던 네 주인의 뿔이니 서럽지는 않겠지.”

레오는 심장에 별의 그릇이 박힌 대사제의 시체를 밟고 지하 신전을 빠져나왔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땅이 무너지고 산이 솟구쳤다. 지상 낙원 아르체는 지옥이 되어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살아남은 자 중 일부는 마물이 되어 디움 산맥으로 숨어들었고, 또 다른 일부는 디움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향했다.

레오는 자신이 만든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을 바라보았다.

“레오, 아니, 이젠 페루스라 불러야 하나?”

대지를 적신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강 건너편에서 나타났다. 한때는 강이었던 말라붙은 잿빛 땅에서 레오는 달의 마법사와 조우했다.

달의 마법사는 묵묵히 땅을 파더니 아무렇게나 흩어진 시체들을 한데 묻어 주었다. 마지막 시체를 묻은 달의 마법사가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땅을 짚으며 일어섰다.

대지 가득 쌓인 시체를 묻는 것이 힘들었던 모양인지 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가 물었다.

“떠날 건가? 내게도 네가 가는 길 정도는 방해하지 않을 의리가 남아 있지.”

레오는 손을 휘저어 달의 마법사 앞에 길을 만들어 주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길 위에 선 달의 마법사가 말했다.

“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하는 풍요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후두둑 떨어졌으나, 그것들은 대지에 닿지 못하고 빛의 길 위에서 흩어졌다.

“그런데 내 선택은 또 다른 파멸을 불러왔으니, 나는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겠다.”

그 말을 끝으로 달의 마법사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달의 마법사는 아르체의 사제 중 성력이 가장 뛰어난 이에게 주는 칭호. 페루스의 사제인 그가 공간을 다루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달의 마법사마저 떠난 아르체에 레오는 홀로 남았다.

―레오, 난 아르체가 좋아. 세상 어디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없을 거야.

―넌 네가 바라던 삶을, 난 내가 선택한 삶을 사는 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남이 되는 건 아니잖아.

―어디에 있더라도, 어떤 삶을 살더라도 너는 내 영혼의 반쪽이니까.

‘디티, 넌 지금의 나를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레오는 디티가 남긴 팔을 품에 안은 채 긴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부여받은 레오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를 움직인 것은 페루스의 오래된 열망이었다.

모라와 함께했던 시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페루스처럼, 그는 이 세계를 디티가 살아 있던 그때로 되돌리고 싶었다.

필요한 것은 시간을 담기 위한 별의 그릇과 인간의 영혼. 레오는 먼 옛날 대사제의 심장에 꽂은 채로 던져 버린 별의 그릇을 찾아 나섰다.

아르체의 하늘이 까맣게 변한 날, 이곳을 탈출한 몇몇 사제들이 대사제의 심장에서 강탈한 별의 그릇을 자신들의 것인 양 쥐고 있었다.

“본디 내 것이었던 물건을 되찾으러 왔다.”

“우리의 주인은 네가 아니다. 우리가 널 섬겨야 할 의무는 없다.”

아르체의 사제들은 시간이 지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지상 낙원 아르체에서 쫓겨난 것에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었다.

“버러지들의 섬김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그것은 본디 내 일부였던 것. 오늘 나는 나를 돌려받을 것이다.”

레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별의 그릇을 손에 쥐었다. 그 순간, 그는 디티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레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어.

디티의 유일한 소망은 영원한 안식. 레오는 디티를 살리고 싶은 제 소망과 안식을 원하는 디티의 소망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이 형벌 같은 시간을 무엇으로 버텨 내야 하는가.”

별의 그릇에 남은 찢어진 영혼 조각들이 그의 질문에 답하였다.

‘네게 죽음을 선물할 여자를 찾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헤매리라.’

그것이 제 숙명이라면,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헤맨 끝에 그에게 죽음을 선물할 여자와 마주할 수 있기를.

그는 제 몸을 셋으로 갈라 나누었다. 다시는 페루스의 열망에 현혹되지 않도록.

“흩어진 내 유해를 탐내지 마라. 내가 다시 이 땅에 나타나면 그때야말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자신은 아르체에 버려진 고아 ‘레오’였고, 아르체에 풍요와 저주를 내린 ‘페루스’의 시간을 이어받은 존재였으며, 머리만 남아 지상 최고의 성물로 추앙받은 ‘카푸트’인 동시에, 잿빛 사막에서 죽어 가던 ‘유진’의 몸을 차지한 약탈자였다.

그들 모두가 ‘자신’이었으나 동시에 ‘자신’은 그들 중 누구로도 온전히 남을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버림받은 외로움에 미친 추악한 짐승이었고, 실패한 염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퉁이였으며, 제 반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장님이자, 심장이 파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머저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