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메르디에스 성의 지하에는 성주의 직계 혈족들만이 묻힐 수 있는 가문의 무덤이 존재했다. 그곳에 다른 가문의 시신이 안치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메르디에스’가 아닌 다른 이가 이곳에 몸을 누인 것은 열 번이 채 되지 않았다.
“캐롤린.”
아리아드네는 투명한 수정으로 깎아 만든 관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캐롤린의 이름을 불렀다. 캐롤린의 관을 보관한 안치소는 꽃 모양으로 깎아 낸 자수정으로 가득했다.
“나, 요즘 그런 생각을 해.”
아리아드네는 자수정으로 만든 꽃송이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처럼 말했다.
“내가 탑에서 뛰어내렸던 이후의 시간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고.”
그때의 자신은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곳에는 캐롤린이 있었는데…….
“만약, 그곳의 시간도 미래로 흐르고 있다면 너는 아직 살아 있을까?”
희망처럼 내뱉은 말은 금세 힘없이 꺼져 버렸다.
[리아, 우리 공주님. 네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
아리아드네에게 그 시간이 지옥이었듯, 아버지와 연인을 잃은 캐롤린도 그 시간이 지옥이긴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아리아드네를 향한 원망은 어쩌면 캐롤린의 생을 지탱하는 유일한 동력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아리아드네가 탑에서 뛰어내렸을 때, 캐롤린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죽어서 너도 슬펐어? 그런데 그러지 마. 그곳의 너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모두가 불행해질 필요는 없었다. 비록 그곳의 자신은 저주를 쏟아 내고 죽었지만, 캐롤린이라도 행복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왜 난 네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지?”
캐롤린의 행복을 이토록 바라는데, 아리아드네마저 죽은 그 세상에서 캐롤린의 남은 삶이 평온했을 거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목이 꽉 잠긴 듯한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딸을 앞세우고 순식간에 늙어 버린 사내가 서 있었다.
“리스벨 백작님.”
캐롤린의 아버지 커티스였다. 뚜벅뚜벅 다가온 커티스가 캐롤린의 관 위에 손에 쥐고 있던 보라색 꽃다발을 조심스레 얹어 두었다.
“캐리, 오늘은 내가 너무 늦었구나. 겨울이 되니 꽃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서.”
한쪽 무릎을 굽힌 커티스가 부녀 사이를 가로막은 차가운 수정 위를 하염없이 쓸어내렸다. 관에 누운 캐롤린의 얼굴은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평온했다.
“그저 조금 긴 잠을 자는 것 같은데…….”
커티스는 아직도 딸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감은 눈을 뜨고 보랏빛 눈동자를 깜박이며 환하게 웃을 것만 같아서, 그는 도무지 캐롤린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캐롤린이 새로운 페렌트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까지만이라도 캐롤린의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었던 건데…….”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의 마지막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다.
―약, 속해. 내가 다시 태어나면, 그곳은…… 네가 다스리는 페렌트일 거라고.
캐롤린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새로운 페렌트를, 페렌트의 왕이 된 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녀의 바람은 유진으로 하여금 망자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
“제 욕심일까요?”
하지만 산 자의 욕심으로 죽은 자를 붙들어 두는 것일까 봐 때때로 두려워졌다. 캐롤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커티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캐리도 기꺼워할 겁니다. 누구보다도 그것을 바랐으니까요.”
자신의 딸은 그런 아이였다. 아리아드네가 가장 빛나기를 누구보다도 원하고 바라던 아이였다. 평생을 메르디에스의 방패로 살아온 자신보다도 훨씬 더 굳건하고 맹목적인 데가 있었다.
“캐롤린은 이따금 제게 그런 말을 했어요.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날 지켜 주겠다고. 어머니가 살아 계셨어도 그러시진 않았을 텐데…….”
―리아, 이제는 내가 지켜 줄게. 파시파에 님 대신 내가 지켜 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캐롤린의 끝없는 애정과 헌신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가 메르디에스로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어쩌면 저는 당연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누군가 날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걸.”
그녀는 언제나 위에 선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 무겁네요.”
하지만 이제는 그 자리가 가장 낮은 자리임을 알 것 같았다. 모두의 무게를 지탱하는 자리였다.
커티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저는 이제 아무도 잃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캐롤린의 목숨을 건 맹세였다.
* * *
메르디에스가 자신들의 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은 페렌트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메르디에스에 파견되었던 검은 달 전원의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검은 달의 수장 제롬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약에 취한 채 흐느적거리던 카이엔이 손가락을 까딱하며 비웃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제롬의 침통함은 깊어져만 갔다. 그들이 주인으로 섬긴 자에게 제 부하와 동료들의 희생은 개죽음에 불과했다.
흐리멍덩한 눈을 뜬 채로 색색 숨을 내쉬던 카이엔이 금잔을 들어 그 속의 희뿌연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약을 삼키자 눈앞에서 무지개가 아롱거리며 중력에서 벗어난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카이엔의 심신을 괴롭게 했던 메르디에스 탈환 소식도 먼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 날아든 메르디에스 탈환 소식에 그는 양손 가득 피를 토할 정도로 분노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 한동안 멀리했던 약을 털어 넣었다.
그제야 좀 살 만했다. 자꾸만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그는 손목 아래가 사라진 채로 덜렁덜렁 흔들리는 제 오른손을 보고는 미친놈처럼 낄낄거렸다.
잘린 자리가 간지러워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잘린 손목이, 아리아드네의 구두 장식에 긁혀 깊게 팬 볼이, 우글거리는 개미 떼에 한 입씩 뜯어 먹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카이엔은 참을 수 없는 가려움에 몸을 뒤틀다가 멀쩡한 왼손으로 볼을 득득 긁었다. 흉터 위를 덮고 있던 피딱지와 살점들이 떨어져 손톱에 엉겨 붙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제 몸을 긁어 대던 카이엔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행여나 인질로 사로잡힌 자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제롬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얌전히 대답했다.
검은 달에 속한 자들은 인질이 되어 정보를 누설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교육받았다. 메르디에스 성에서 무사히 탈출해 연락을 취한 자는 없었다.
그것은 임무를 위해 메르디에스 성에 잠입했던 검은 달 중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제롬은 카이엔의 서슬에 동료와 수하들의 죽음조차 마음껏 애도할 수 없었다.
“그때 리스벨만 손에 넣었어도, 이렇게까지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캐롤린, 그 여자가 메르디에스 성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카이엔은 캐롤린을 제 수중에 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평민 기사 나부랭이를 손에 넣었던 그때, 저것들만 제 역할을 했어도!’
곱씹을수록 화가 끓어올랐다. 고개 숙인 제롬을 보는 카이엔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기껏 성까지 점령하고도 얻은 것이 하나도 없잖아. 시키면 제대로 하는 게 하나라도 있어야지! 네 수하들이 인질을 죽이고 성을 불태우라는 내 명령만 제대로 수행했어도 남부가 이따위로 나오진 못했을 텐데!”
인질로 사로잡혔던 남부 귀족들의 분노가 대단했다. 당장 반란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흉흉한 분위기였다.
“…….”
바닥에 놓인 제롬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우두머리의 잘못이 가장 크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하여 제 수족을 탓하나.
이번 일이 실패한 것은 선발대만 덜렁 보내 놓고, 추가 병력을 보내지 않아 고립된 선발대가 모조리 몰살당한 탓이었다.
지원군만 제때 도착했어도 그렇게 맥없이 당하진 않았을 터였다. 지원군을 보내지 못한 것도 백자의 피를 구하겠다며 설치다가 다쳐서 돌아온 카이엔 때문이었다.
전부, 전부 카이엔의 잘못이었다. 그런데 카이엔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늘 남 탓만 하고 있었다.
‘저치가 지상 낙원으로 돌아가겠다는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 줄 수 있을까.’
제롬의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지금 그 반응은 뭐지?”
칼로 공기를 베어 내는 것처럼 섬뜩한 목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엔이 제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네가 제프리의 동생이라고 했던가.”
스릉,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집을 빠져나온 검날이 위험한 빛을 냈다.
“네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듣지 못했나 보지?”
카이엔이 검 끝으로 제롬의 고개를 들었다. 휘청대던 검날이 제롬의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갈라진 살갗 사이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아, 왼손으로 칼을 드는 게 낯설어서 말이야.”
입꼬리를 비틀어 조소를 띤 카이엔의 왼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검날이 제롬의 울대뼈 위를 꾹 눌렀다.
시퍼런 칼날이 잠시 그 위를 배회하다 그대로 쭉 미끄러지며 제롬의 가슴팍에 얇은 상흔을 남겼다.
“이런, 아무래도 왼손으로 검을 드는 건 좀 더 연습이 필요하겠어.”
나직이 웃음을 터트린 카이엔은 검 끝을 세워 제롬의 가슴팍을 꾹꾹 찌르며 말했다.
“어때? 내 연습 상대가 좀 되어 주겠나?”
파르르 떨리던 제롬의 입술이 열리려던 순간이었다.
“연습도 재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보기에 왕자는 재능이 없는 것 같은데…….”
비아냥대는 소리에 카이엔이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남자가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들어온 칼이 자리에 앉아 한쪽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실익이 없는 시간 낭비는 그쯤 하는 게 어떤가.”
명백한 조롱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카이엔이 손을 내저어 제롬을 물렸다.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칼의 조롱에도 카이엔은 그저 몸을 숙일 뿐이었다. 아직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됐네. 그래,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왕자는 메르디에스에 무얼 팔았나?”
칼의 짙은 남색 눈동자가 카이엔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무얼 할 텐가.
―메르디에스에 물건을 팔아 볼까 합니다.
칼이 리카서스로 내려가기 전, 둘은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칼이 메르디에스 공작 레너드를 밖으로 끌어내 붙잡아 두는 동안 카이엔이 메르디에스 성을 점령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카이엔은 검은 달을 떠돌이 상인으로 위장시켜 메르디에스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케이루스는 어렵사리 점령한 성을 맥없이 빼앗기고 말았다. 메르디에스를 상대로 남는 장사를 해 보겠노라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키득거리던 칼이 카이엔의 오른손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 왕자의 오른손을 팔았던가?”
이번 조롱은 끝까지 참아 내지 못했다. 카이엔은 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몽롱하던 약 기운이 단숨에 가실 정도로 머리가 펄펄 끓었다.
“왜, 메르디에스 공작을 놔주셨습니까?”
칼이 사로잡았던 메르디에스 공작 레너드와 메르디에스 기사단장 커티스를 그 자리에서 처치했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아리아드네의 발치에 제 아버지의 머리를 던져 주었더라면 그녀가 무너져 우는 꼴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남 탓이 지나치군.”
쯧, 가벼이 혀를 찬 칼이 한심하다는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맡은 역할을 해내지 못한 건 내가 아니야.”
오만한 얼굴로 카이엔의 실책을 지적한 그가 무릎 위에 양손을 포갠 채로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시간을 끌어 본다 했지, 내 손으로 메르디에스 성주를 처리한다고는 하지 않았네. 내가 벌어 준 시간이 부족했던가?”
“……아닙니다. 케이루스의 실수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실수라고는 하지 않았다. 칼은 같잖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어린 왕자가 싫지 않았다. 부수는 재미가 있었으니까.
몸을 앞으로 기울인 칼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소식은 들었나? 메르디에스에서 케이루스를 왕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전복 선언했다는 소식 말일세.”
카이엔의 얼굴이 놀람과 당황을 거쳐 경악과 분노로 물들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카이엔의 얼굴을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런, 왕자가 검술 연습에 몰두한 터라 그것까진 미처 듣지 못했나 보군.”
칼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의 예상대로 카이엔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칼은 메르디에스 전복 선언을 듣자마자 카이엔에게 달려온 참이었다. 제 수하를 겁박하는 데 정신이 팔린 카이엔은 정작 챙겨야 할 것들은 모조리 놓치고 있었다.
‘이번 일로 1왕자의 정보망이 적잖이 타격을 입은 모양이지.’
단숨에 상황 파악을 끝낸 칼이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귀가 너무 어두운 거 아닌가. 팔아먹은 게 왕자의 오른손만이 아닌가 보군그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왕자,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곤란할 텐데…….”
카이엔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칼은 분노로 온몸을 부들대는 카이엔을 그저 흥미롭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메르디에스 공녀가 리뮈르는 물론이고 소르체까지 녹여 낸 모양이던데, 리카서스까지 돌아서면 혼자 감당할 수 있겠나?”
칼의 협박에 카이엔의 눈앞이 점멸하듯 깜박였다. 분노로 머리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간신히 화를 억누른 카이엔이 쇠를 긁는 것 같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루안의 죽음을 잊으셨습니까?”
“잊지 않았으니 가라앉는 배에서 아직 내리지 않은 거 아닌가.”
“제가 가라앉는 배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라고 할 셈인가? 메르디에스가 성을 탈환한 것이 유월절이었다지? 그것이 하늘마저 케이루스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고 뭔가.”
천공의 케이루스, 그것이 케이루스의 이름이었다. 케이루스의 가장 큰 무기는 언제나 하늘이었다. 천체의 움직임을 읽는 데 기민한 능력을 가진 그들은 하늘의 뜻을 핑계 삼아 제 세력을 키워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이 도리어 케이루스의 목을 졸랐다. 유월절은 케이루스의 가장 큰 축일이었다. 그런데 그 유월절의 승자가 케이루스가 아닌 메르디에스라니, 민심은 빠르게 술렁였다.
카이엔은 금잔을 거꾸로 들어 그 안에 든 액체를 머리 위에 천천히 쏟아부었다. 흠뻑 젖은 꼴이 되어서야 그는 제 머리를 잠식한 분노를 쫓아낼 수 있었다.
“케이루스는 저주받은 죽음의 땅, 아르체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이 땅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케이루스는 북방에서 내려온 이민족이었다. 페렌트에서 ‘북방’이란 디움 너머의 땅 아르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다.
아르체가 지상 낙원으로 불리던 먼 옛날, 케이루스는 아르체의 지배자였다. 어느 날, 아르체의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고 그곳은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
저주받은 땅에서 도망쳐 페렌트에 정착한 그들은 마침내 페렌트의 단 하나뿐인 왕가가 되었다. 카이엔은 제 안에 새겨 넣듯이 천천히 말을 골랐다.
“케이루스가 유월절을 기념하는 것은 승리를 만끽하기 위함이 아니라, 패배를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지상 낙원에서 쫓겨나야 했던 자신들의 원통함. 다섯 가문 중 가장 늦게 페렌트에 정착하고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신들의 위대함.
그것이 카이엔이 우뚝 세워야 할 케이루스였다.
“우리는 이번 유월절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맨몸으로 쫓겨 온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섰듯이, 이번에도 우리는 최후의 승리자로 남을 겁니다.”
그리고 그 끝은 빼앗긴 낙원을 되찾는 것이었다. 카이엔은 열망에 가득 찬 얼굴로 단호히 말했다.
“승리는 의지만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지. 기울어진 세력을 회복할 방안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발갛게 달아오른 열망 위로 찬물을 붓는 것처럼 냉정한 지적이었다. 칼의 물음에 카이엔은 제법 의기양양하게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만만한 어조였다.
‘대책이 아예 없진 않은 모양이지.’
칼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카이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 상티모니아가 우리를 도울 겁니다.”
“아그네스 교황이? 그 교활한 호랑이가 페렌트 내전에 끼어든다고?”
예상치 못한 인물의 언급에 조금 놀란 칼이 되물었다.
역대 가장 강력한 교황이라 불리는 아그네스였다. 더구나 그녀는 유일한 적대 세력이던 랭스턴 공국을 쳐 내며 전에 없이 강력한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성 상티모니아가 아군이 된다면 분명 전력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테지만, 종교 집단인 그들로서는 페렌트 내전에 끼어드는 것이 적잖은 부담일 터. 아그네스를 끌어들이려면 그들의 부담을 상쇄할 만한 대가가 필요했다.
“성 상티모니아의 염원을 이룰 기회는 쉽사리 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교황은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겁니다.”
카이엔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믿는 구석이 있나 보군. 그럼 좀 더 지켜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칼이 카이엔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직은 이 배가 가라앉을 때가 아닌가 보군. 나는 왕자만 믿겠네.”
칼이 그렇게 말하며 사라지자 카이엔은 제 품을 더듬거려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무렉스에게 죽을 뻔한 뒤로 한시도 품에서 떼 놓지 않았던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이었다.
‘이걸 미끼로 성 상티모니아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었다. 카이엔은 손에 든 흰 뼈를 바스러질 듯이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