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111화 (111/148)
  • 6. Eden or Abaddon

    프레모 대륙 최북단을 가로지르는 디움 산맥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땅이었다.

    그곳은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유난히 흉포하고 사나운 마물들이 시시때때로 튀어나오곤 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땅, 가장 많은 마물들이 모여 사는 곳,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의 끝. 그곳이 바로 디움이었다.

    “아니, 이 겨울에 디움을 넘는 건 미친 짓이라니까요. 파수꾼들이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거고요.”

    리뮈르 영지의 북쪽 끝에 위치한 리암 마을은 디움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들의 거주지였다. 리암에 홀연히 나타난 정체 모를 남자는 이 계절에 디움을 넘을 작정이라고 했다. 화들짝 놀란 조지가 입에 머금었던 독주를 바닥에 뿜어냈다.

    사시사철 마물이 쏟아지는 디움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극성인 계절은 단연 겨울이었다. 페렌트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리뮈르의 기사들조차 겨울에는 몸을 사렸다.

    “그런 건 상관없다. 디움 너머에는 뭐가 있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조지의 만류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금화를 내밀었다. 남자가 내민 금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조지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곳에는…….”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조지는 나무잔에 가득 찬 독주를 단숨에 비워 내고서야 멈췄던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디움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디움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진실로 두려워하는 것은 디움이 아니라 디움 너머의 땅이었다.

    “그곳은 생명을 가진 것은 풀 한 포기 살아남지 못하는 땅입니다. 마물들조차 그곳에는 오래 머무르지 못합니다.”

    먼 옛날, 디움 너머의 땅은 지상 낙원이나 다름없는 축복받은 곳이었다고 한다.

    축복받은 그 땅에서는 사시사철 황금 들녘이 바람에 물결치고, 나무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열매를 맺었다. 들에는 봄꽃과 여름꽃이 함께 나부꼈고, 길을 건너면 겨울이고, 돌아오면 여름이었다.

    가장 풍요로운 시간만이 흐르는 지상 낙원.

    하지만 어느 날, 하늘이 새까맣게 변한 후로 그곳은 저주받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겨우 도망친 몇몇만이 디움을 넘어와 페렌트에 정착했다.

    그 이후로 디움 너머의 땅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프레모 대륙의 사람들에게 디움 너머의 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이 아르체인가?”

    건장한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남자는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조지는 어쩐지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다들 그렇게 부르지요. 생명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로브 아래 숨겨진 남자의 회색 눈동자가 언뜻 드러났지만.

    “오로지 죽음만이 가득한 저주받은 땅, 아르체라고.”

    조지가 말을 마쳤을 때 그의 앞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앉아서 졸기라도 했나? 그렇게 생각하며 탁자 위의 잔을 든 순간이었다. 나무잔을 든 자리에는 반짝이는 금화들이 놓여 있었다. 조금 전 그 남자가 시답잖은 질문을 할 때마다 올려 둔 것이었다.

    “뭐야? 꿈이 아니었잖아.”

    그는 탁자 위에 놓인 금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 * *

    북쪽의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은 흡사 얼음덩어리처럼 딱딱했다.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세찬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유진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는 혼자인 자신이 낯설었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겨우 반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의 인생에서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은 불과 반년에 불과했다.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그는 혼자였다.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로 잿빛 눈이 내리는 사막에서 정신을 차렸던 그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도.

    ―괴물……. 넌 괴물이야! 나만 그렇게 생각한 줄 알아? 다들 널 두려워했어. 5년 동안 머리카락조차 자라지 않는 널.

    누군가는 그를 괴물이라고 했고.

    ―외로움에 미친 추악한 짐승, 실패한 염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퉁이, 제 반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장님, 심장이 파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머저리. 왜 더 말해 주랴?

    누군가는 그를 짐승이라고 했다.

    ―나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그런 그를 주저 없이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온기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혼자인 자신이 이토록 낯설어질 만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늘 혼자였던 그에게 주저 없이 옆자리를 내어 준 사람이었다.

    흔들림 없는 파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자신도 누군가에게 속할 수 있다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다시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고 해도 난 또다시 뛰어들 거야. 그 순간, 당신을 살릴 사람은 나뿐이었으니까.

    방주의 분수에서도, 리뮈르의 연못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존재 자체로 그의 구원이었다.

    그녀의 곁에 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다. 남들이 자신을 괴물이라 하든, 짐승이라 하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당신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세상을 멸하러 나타났던 신의 힘을 고스란히 가졌음은 알지요. 당신에게 힘을 빌려준 존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소르체를 떠나기 전날, 소르체의 가주 이엘라는 그에게 물었다.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을 대신해 줄 대리자. 제 머리로는 도무지 당신이 불려 온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군요.

    그의 몸을 숙주로 삼은 카푸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냐고. 아리아드네는 존재 자체로 그의 구원이었지만, 유진은 존재 자체로 그녀가 사는 세계의 재앙이었다.

    소르체 가주의 말을 들은 유진은 목만 남은 고독한 성물을 꺼내 들었다. 카푸트를 볼 때마다 느꼈던 불쾌함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금빛 머리를 마주하고 있을 때면 뿌연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답답하고, 제 것이 아닌 열망에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모두 카푸트가 이 세계를 멸할 대리자로 그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나.

    카푸트가 어떠한 열망을 가지고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진작 썩어 사라졌어야 할 시체가 품은 열망 따위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유진은 당장이라도 카푸트의 머리를 터트릴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런 그를 만류한 것은 소르체의 가주였다. 그녀는 카푸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200년 전, 이 땅을 멸하러 나타났던 존재에게서 우리를 구한 것은 바로 당신이 손에 쥔 ‘그것’입니다.

    ―카푸트는 200년 전, 이 땅을 멸하러 나타났던 신의 유해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것이 너희를 구했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카푸트를 손 위에 둥둥 띄운 유진이 되물었다.

    ―맞습니다. 카푸트(căput)란 본디 머리와 목숨을 뜻하는 고어. 그것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카푸트가 머리만 남은 형태이기도 하고,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유진의 손 안에서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는 카푸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200년 전, 소르체가 페렌트의 왕좌에 있었던 그때, 황금빛에 둘러싸인 존재가 나타나 왕궁은 단숨에 박살이 났습니다. ‘그것’은 제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모조리 지우며 나아갔습니다.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소르체 가주의 말은 오래도록 벼른 것처럼 조금의 막힘도 없었다.

    ―‘그것’이 바란 것은 바로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는 강탈자로부터 본디 제 것이었던 물건을 되찾으러 온 것이라 했습니다.

    유진은 그 말을 하는 카푸트를 알았다.

    달의 마법사가 남겼다는 리뮈르의 흰 저택에서 모라의 석상과 마주한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던 기억 가운데 그런 것이 있었다.

    카푸트의 얼굴을 한 황금빛 청년이 무언가를 찾아 제 앞을 막아선 이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케이루스는 죽을힘을 다해 버텼으나 바람 앞을 가로막는 촛불에 지나지 않았지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그것’을 막아 낸 존재는 바로 ‘그것’ 자신이었습니다.

    ―어떻게, 제 몸을 갈가리 찢기라도 했나 보지?

    유진이 머리만 남은 카푸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케이루스의 성물을 손에 쥔 순간, 스스로의 몸을 셋으로 조각내고는 그대로 흩어졌습니다.

    카푸트의 기억을 엿본 유진은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별의 그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한 것을 손에 쥐고도 스스로의 몸을 조각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진은 제 손 위에 놓인 황금빛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역겹고, 불쾌한 그것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페렌트를 지켜 낸 건 케이루스도, 성 상티모니아도 아닌 우리를 멸하러 나타났던 바로 ‘그것’이었던 셈이죠.

    페렌트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것도, 그 위기에서 구한 것도 하나의 존재였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경고했습니다. 흩어진 자신의 유해를 탐내지 말라고. 자신이 또다시 이 땅에 나타나면 그때야말로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카푸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진이 픽 소리를 내며 비웃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경고를 듣지 않았군.

    유진이 처음 카푸트를 보았을 때, 그것은 번쩍번쩍한 황금으로 사방을 치장한 공간에 과시하듯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이 보여 준 힘은 너무 압도적이었으니까요.

    소르체의 가주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날의 진실은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케이루스는 페렌트를 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왕가가 되었고, 성 상티모니아는 케이루스의 공로를 증언하고 카푸트를 얻었지요.

    특별할 것 없는 축성을 위해 페렌트의 왕궁을 찾았다가 사건에 휘말린 성 상티모니아는 뜻하지 않게 큰 성과를 얻고 돌아갔다.

    그날, 페렌트의 왕궁에 있었던 세력 중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오직 소르체뿐이었다.

    ―소르체는 그날의 진실을 아는 증인으로 남기를 선택했습니다.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 우리는 이 땅에서 머무르며 다음 가주에게만 그날의 진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를 ‘그것’을 마주할 우리의 딸들을 위해서.

    소르체의 가주는 그것이 자신들의 선택이라 말했지만,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실을 드러내어 마주할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다 덮고 이익을 취할 만큼 약지도 못한 비겁자의 변명인가?

    아무리 좋게 포장해 봤자 그들은 진실을 외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유진의 비아냥 같은 대꾸에도 소르체의 가주는 시종 담담한 얼굴이었다.

    ―무엇이라 생각해도 좋습니다. 당신이 정말 이 세상을 멸하려는 ‘그것’의 의지를 이어받았다면 무엇으로도 당신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이 세계를 다 부숴 달라는 요청은 아닐 테고.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당신뿐이니까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소르체의 가주가 카푸트 앞으로 다가왔다.

    ―소르체는 제 몸을 조각내어 우리를 지켜 준 ‘그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의지를 이은 당신 또한 우리를 지켜 줄 것이라 믿습니다.

    몸을 숙인 그녀는 카푸트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쥐어 그것에 입을 맞추었다. 유진은 그 모습이 어쩐지 불쾌해 인상을 찡그린 채 카푸트의 머리카락을 잡아 빼었다.

    ―날 그렇게 쉽게 믿어도 되겠어? 내가 카푸트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해 버리면 어쩌려고.

    ―당신 또한 이 세계를 지켜야 할 이유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유진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이 세계를 지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아리아드네의 세상이었으니까.

    ―우리는 메르디에스 공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손익을 따지지 않고 지원할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계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이게 셋 중 하나라면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지?

    신의 유해를 탐낸 이 땅의 인간들을 비웃어 놓고 자신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마치 새어 나가는 것처럼 점점 흩어지는 자신의 힘을 붙들기 위해서라도, 신의 유해란 그것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이젠 그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니까.

    ―그날 찢어진 신의 유해는 크게 셋으로 갈라져 각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머리인 카푸트는 왕궁에 남아 성 상티모니아의 차지가 되었으나, 나머지 둘이 어디 있는지는 우리도 알지 못합니다.

    ―정말 모르나?

    ―하지만 ‘그것’이 보여 준 압도적인 힘을 잊지 못하고 신의 유해를 찾아 헤맨 자들은 있었지요. 엘바의 랭스턴 공가도 그런 세력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소르체의 가주가 되었던 해에 랭스턴으로부터 시체 몇 구와 함께 그들의 사인을 연구해 치료 약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

    ―그 시체들의 사인은 동사(凍死)였습니다. 일반적인 동사는 아니었지요. 혈액까지 모두 얼었던 탓에 몸속 혈관이 죄다 터진 상태였으니까요. 우리는 디움 산맥에 자생하는 부활초의 수액을 정제하여 치료 약을 만들어 주고 거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산 사람을 그렇게 얼릴 수 있는 땅은 오직 한 곳뿐입니다. 디움 너머에 존재하는 저주받은 죽음의 땅.

    ―……아르체.

    유진은 제가 말하고도 허탈한 듯 실소를 터트렸다.

    ―나는 뭐지?

    언젠가 그가 무렉스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그건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 그곳에 가면 알게 될 게다.

    무렉스는 분명 그에게 답을 알려 주었다. 죽음의 땅, 아르체에 가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

    하지만 그는 아르체를 눈앞에 두고도 그곳을 외면했다.

    리뮈르에서 디움 산맥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가슴의 수런거림,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끊이지 않던 악몽과 알 수 없는 기억들.

    아르체를 눈앞에 두고도 외면한 건 제 두려움 때문이었다. 정말 괴물이면 어쩌나, 정말 짐승이면 어쩌나, 그래서 그녀 곁에 남을 수 없으면 어쩌나.

    유진은 그토록 알고 싶었던 제 존재와 맞닿은 단서를 발견하고도 그것을 들추는 일을 계속 미뤄 왔다. 아직 다른 성물을 모두 확인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 가며.

    그러는 동안 그는 착실히 죽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을 줄 알았다. 제 몸이 조금 더 버텨 줄 거라 믿었다. 카푸트의 흩어진 유해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커져도 이대로 외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가끔은 그녀 곁에서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그것이 나쁘지 않은 결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의 자만이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의 자만 때문에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을 잃어야 했다.

    캐롤린을 잃고 울부짖는 아리아드네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녀 곁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제 소망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이었는지.

    아리아드네에게 또 다른 상실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짜 제 욕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살고 싶었다.

    사람들이 저에게 괴물이라 손가락질할지라도 죽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좀 사람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죽고 싶지 않았다. 오래도록 그녀 곁에 살아남고 싶었다.

    이 세계를 멸하려 할지도 모르는 카푸트의 흩어진 유해를 모두 모아서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신의 유해를 탐낸 대가로 어떠한 것을 치르게 될지라도.

    ‘난 결국 카푸트의 바람대로 움직이고 있는 건가.’

    점점 세차게 불던 눈보라가 일시에 멎었다. 유진은 제 얼굴을 덮고 있던 로브를 천천히 내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잿빛이었다. 마치 그가 떠나온 외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곳이 바로 생명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저주받은 죽음의 땅, 아르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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