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데엥! 뎅! 뎅!
둔중한 종소리가 공기 중으로 울려 퍼졌다. 자정이 지나 유월절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사라진 캐롤린을 찾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은 종소리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때론 이유도 없이 불안해지거나, 어떠한 예감에 강렬하게 사로잡히곤 한다. 그렇게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눈이 내리는 겨울밤.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는 서러운 작별을 위로하듯 길게 이어졌다.
투욱, 알버트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소복이 쌓인 눈 위로 맥없이 떨어졌다. 다 나은 팔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떨어진 검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무작정 내달렸다.
캐롤린을 만나면 다 나은 팔을 보여 주고, 양팔로 꽉 안아 주고 싶었다. 이 길의 끝에 분명, 캐롤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종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진 건 성의 서쪽 끝에서 사라진 딸을 찾던 커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메르디에스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었다. 사는 동안 수천, 수만 번도 넘게 들은 소리였으니까. 그런데 그 익숙한 소리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가슴을 파고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커티스는 저도 모르게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어서 딸아이를 찾아야 했다.
시에테에서 만난 아리아드네는 그와 레너드에게만은 진실을 말했다. 캐롤린이 성에 혼자 남아 외롭게 그곳을 지키고 있노라고. 그러니 그동안 고단했을 딸을 어서 안아 주어야 했다.
딸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별처럼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네 사랑을 응원한다고, 너는 언제나 내 자랑스러운 보물이라고. 그 말을 해야 했다. 캐롤린이 더 상처받기 전에.
그런데 아침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눈이 자꾸만 시야를 가렸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눈 때문에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때, 하얀 눈 사이로 섞여 날리는 무언가가 그의 눈에 띄었다. 커티스는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아, 내내 그를 따라다니던 이름 모를 보랏빛 꽃 한 송이가 거짓말처럼 그의 손 안에 떨어졌다.
이른 이별의 마지막 인사였다.
* * *
메르디에스의 첫 번째 손, 남부를 지배하는 푸른 가시나무의 가장 오래된 우방, 황금의 성 최전선을 지키는 굳건한 방패. 리스벨 백작가의 캐롤린은 그 이름에 걸맞은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그 의기와 신의를 칭송했으며, 그녀의 위대한 행적을 오래도록 노래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메르디에스 본성에서 치러진 캐롤린의 장례식은 열흘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애도의 마음을 덜어 내기에 열흘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이 멈춘 주검은 살아생전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다. 백자(白者)의 몸에 흐르는 검은 피는 죽은 사람의 상처마저 깨끗이 치료했다.
하지만 망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상처가 모두 사라졌어도, 죽은 뒤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이 남은 사람들을 더 슬프게 했다.
리스벨은 후계를 잃었고, 커티스는 딸을 잃었으며, 알버트는 연인을 잃었고, 아리아드네는 친구를 잃었다.
캐롤린을 떠나보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단 한 순간도 캐롤린이 없는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두 살 위인 캐롤린은 아리아드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늘 함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은 아리아드네가 카이엔을 저주하며 탑에서 떨어졌던 그 순간조차 캐롤린은 세상에 존재했다.
캐롤린이 없는 세상은 처음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 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캐롤린만이 남았던 과거와 캐롤린만을 잃은 지금 중 무엇이 더 괴로운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언제나 처음처럼 아프고 힘들었다.
“어디 가려고?”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창가에 서서 가만히 밖을 내려다보던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문가에 서 있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다가왔다. 다가온 그가 팔을 뻗어 열린 방문을 닫았다.
탁,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외부와 단절된 작은 방에 자신과 그만이 존재했다. 미지근한 물이 발목에서부터 서서히 차올라 머리끝까지 잠긴 기분이었다.
캐롤린이 죽은 이후로 내내 아리아드네를 맴돌던 한기가 잠시나마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그가 주는 평온함에 잠겨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든.”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살짝 그러쥔 채로 대답했다.
“나랑 같이 갈까?”
아리아드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이듯 물었다.
“……당신이 그러길 원한다면.”
짧은 정적 뒤에 그가 그렇게 답했다. 유진은 아리아드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녀를 영원히 세상 끝에 숨겨 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세상 끝에서 일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세상의 중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그녀의 전장은 언제나 세상의 중심이었고, 그녀가 무찔러야 할 적도 그곳에 있었다.
더구나 아리아드네가 바라던 미래는 더 이상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약, 속해. 내가 다시 태어나면, 그곳은…… 네가 다스리는 페렌트일 거라고.
그것은 캐롤린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했다.
카이엔에게 짓밟힌 메르디에스를 지키려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이젠 이 싸움에 리뮈르와 소르체의― 아니, 페렌트 전체의 명운이 함께 걸려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리아드네도 유진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따라갈 수 없다면, 그를 붙잡을 순 없을까.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야?”
“…….”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다정한 손길로 길게 늘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차라리 편했을까. 유진은 캐롤린이 죽었던 그날 이후로, 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만으로 이별을 직감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랐다. 다만 아리아드네는 그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무엇인가와 맞닿아 있는 어떤 단서를 발견했을 거라 짐작했다.
왜 언제나 이별은 이토록 아픈 순간에만 찾아오는 걸까.
‘나는 지금 당신이 필요한데, 그 어느 때보다도 당신의 위로가 필요한데.’
유진을 붙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그가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로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면서도 캐롤린을 잃은 아리아드네의 곁을 내내 지키지 않았더라면, 모르는 척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잃은 아리아드네를 위해서 기꺼이 제 출발을 유예했다.
이 열흘이 그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유진은 아리아드네에게 이런 제 마음을 알아 달라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붙잡지 못했다. 그의 희생이나 애정을 당연하게 여기며 휘두르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서.
―당신이 내 파혼의 중재자가 되어 준다면 메르디에스가 가진 성물을 보여 주지. 어때?
―내 손을 잡아.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메르디에스가 구하지 못할 것이란 없어.
그와의 시작은 분명 서로가 필요한 것을 주고받기 위한 계약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언제나 계약 이상의 것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베풀었다. 이유는 언제나 하나였다.
―당신이 그러기를 바라니까.
아리아드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황금을 그에게 안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그가 함께 떠나기를 원할지라도 같이 갈 수 없었고, 그는 아리아드네가 그녀 곁에 남기를 원할지라도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은 아리아드네가 캐롤린을 보내는 추모의 시간 동안 그 곁을 지키는 것이었고, 아리아드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은 불편하지 않게 그를 보내 주는 것이었다.
“내게 줄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얼마든지.”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리아드네는 서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남은 시간은 나와 함께 있어.”
아리아드네가 발을 들어 그의 턱 끝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래.”
그의 손이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쓸었다가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방문을 열 것처럼 팔을 뻗었다.
“우선 여기서 나가서―”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팔을 붙잡은 아리아드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방문을 가로막듯 선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
그 말의 의중이 무엇인지 가늠하려는 것처럼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리아드네가 그를 올려다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오늘, 우리 함께 있어. 당신이 떠날 때까지.”
그 말이 불씨라도 던진 것처럼, 늘 서늘하고 관조적인 기운을 품고 있던 유진의 회색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열기를 품고 짙어졌다.
“그 말, 무슨 뜻이야?”
목 안에서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른 열망을 품고 있었다.
“이런 뜻.”
목에 팔을 걸어 그를 끌어당긴 아리아드네가 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몸을 쓸어내리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입 안을 가볍게 훑은 혀가 마지막으로 입천장을 건드리고 도망가듯 물러났다.
쾅! 아리아드네의 몸이 떠밀려 문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니, 문과 부딪힌 건 그녀의 머리와 어깨를 감싼 그의 손이었다.
유진이 도망가듯 물러나는 그녀의 혀를 거칠게 낚아챘다. 마치 잡아먹히는 듯한 키스였다. 머리를 감싼 그의 손이 그녀의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 깊은 곳까지 그의 혀가 거칠게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교감이나 안온한 배려 따위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본능만 남아 서로의 욕망을 채우는 데 갈급한 키스였다.
그가 모조리 숨을 앗아가는 통에 아무리 숨을 쉬어도 부족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쁜 호흡 사이로 들리는 젖은 소리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이나 서로를 탐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열기로 가득했다.
천천히 고개를 내린 그가 아리아드네의 관자놀이에 짧게 입을 맞췄다 떼어 냈다. 탐색하듯 미끄러져 내려온 입술이 귀를 지나 쇄골 위에 안착했다.
그가 쇄골의 우묵한 부분을 혀로 덧그리듯 핥았다. 등골이 저릿하게 달아오르며 그녀의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리아드네가 눈을 감으며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에 감겨 왔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양 그가 아리아드네의 허리를 받치고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된 몸에서 그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도 다르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한겨울이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온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가 주는 열기에 취해 허덕이며 달뜬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술이 닿는 자리마다, 그의 혀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일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아랫배가 긴장과 열기로 죄어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와 좀 더 가까이 닿고 싶고, 그와 좀 더 뜨거운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당신, 얼굴이 보고 싶어.”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에 유진이 입술을 붙인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겨울을 닮은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눈을 돌리면 그대로 목을 물어 숨을 끊어 놓기라도 할 것 같은 시선이었다.
유진은 아리아드네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제 입술을 더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그의 입술이 타액으로 젖은 쇄골을 지나 윗가슴에 내려앉았다.
맨살에 닿는 입술의 감촉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지나치게 뜨거웠다. 달아오른 것이 그의 입술인지, 제 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흐려진 시야에 유진의 까만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그가 가쁜 숨을 내쉬며 제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숨을 고르는 듯 그의 등이 들썩였다. 한동안 그 상태로 가만히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켜 아리아드네를 꽉 안았다.
하아, 그의 낮은 한숨 소리가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조금의 틈도 없이 꽉 맞물린 포옹이었지만, 열에 들떴던 조금 전과는 달랐다. 온몸에 들끓었던 열기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아리아드네에게서 떨어져 나간 그가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말했다. 가려진 얼굴에는 아직도 채 떨쳐 내지 못한 흥분과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가 멀어진 거리만큼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얼굴을 가린 그의 손을 끌어 내리며 물었다.
“왜?”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아리아드네의 눈가를 확인하듯이 쓸었다. 마른 눈가에서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우는 당신을 안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눈동자에 피어올랐던 열기와 욕망은 어느덧 흔적을 감추고, 익숙한 배려와 애정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제 눈가를 쓸던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속삭였다.
“울지 않을게.”
평소보다 뜨거운 손은 그가 제 욕망을 억지로 눌러 참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나, 눈이 싫었어.”
아리아드네는 그의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열흘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아직도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메르디에스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언제나 활기차고 북적이던 메르디에스 성은 눈이 불러온 고요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도 눈이 내렸거든. 처음 보는 눈이 신기해서 캐롤린과 뛰어노는데 유모가 날 찾아와서 그랬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은 기억은 없다. 어머니를 애달프게 사랑한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날의 기억은 조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날 좋아하지 않으셨어.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쓰셨던 것 같긴 하지만……. 남은 생을 앗아간 존재를 원망하지 않기란 어려웠겠지.”
그의 손끝이 위로하듯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녹지 않는 얼음처럼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의 위로는 언제나 거짓말처럼 그녀를 구원했다.
“어머니를 많이 사랑했다거나, 돌아가신 것이 못 견디게 슬펐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아름답던 눈이 왜 그렇게 차갑고 시리게만 느껴지던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그의 앞에만 서면 넘쳐흐르는 것처럼 쏟아졌다.
“눈이 오면 마치 거짓말처럼 누군가는 날 떠나. 나는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혼자 남아.”
그에게는 가장 약한 부분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낼 수 있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마.”
양손으로 아리아드네의 뺨을 감싼 유진이 서서히 입술을 내렸다.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가 한 손으로 엉덩이 아래를 받쳐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가 아리아드네를 안은 채 성큼성큼 걸어 침대로 가는 동안에도 맞붙은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아리아드네의 등이 침대 시트에 닿자 유진이 찍어 누르듯 그녀의 몸을 제 몸으로 덮었다. 묵직한 무게와 함께 입 안으로 그의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은 키스였다.
그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 내느라 아리아드네의 몸이 푹신한 침대에 파묻혔다. 그가 짓누르는 무게가, 그의 단단한 품이, 마치 요새처럼 그녀를 감싸 안았다.
“당신이 그렇게 만들어 줘.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투명한 창 너머로 쏟아진 석양에 방 안은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새하얀 침대도, 아리아드네의 몸도, 달뜬 숨도 모두 노을빛이었다. 그는 이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알지 못했다. 그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가 밀려 들어왔다.
누군가와 몸을 겹치고 싶다는 욕망을 가져 본 적도, 그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것은 그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몰라서.
온몸의 혈관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그를 높이 끌어당겼다가 바닥으로 처박기를 반복했다. 발밑이 꺼져 아래로 처박힌 그가 그녀를 잡아당겨 품에 가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후회할지도 몰라.”
이런 순간에도 그는 제 불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추락하는 듯한 이 감각이 그의 불안을 더 충동질했다.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그녀는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깊고 푸른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을 만난 것, 당신을 사랑한 것, 그리고 오늘 일도.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당신은 후회할 것 같아?”
이 물음에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이란 하나뿐이었다.
“아니.”
대답을 마친 그가 손깍지를 낀 채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자잘한 키스를 뿌렸다.
땅 깊이 뿌리박은 나무처럼 그녀는 언제고 흔들림 없이 그를 지탱해 주었다. 언제나 이방인이었던 그에게 제 옆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녀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도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속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또다시 누군가를 잃게 할 순 없었다.
아픔을 참는 것처럼 흐려졌던 눈동자가 그를 보며 가늘게 웃었다.
아리아드네가 손을 뻗어 왔다. 그가 몸을 숙이자 그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건 그녀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확신을 줘. 당신이 내 곁에 다시 돌아올 거란 확신.”
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넘쳐흘러 목울대가 빳빳이 긴장했다. 항상 그랬다. 자신이 지금 가장 원하던 말이 무엇인지 그녀의 입을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다시 돌아오라는 말이, 여전히 그의 자리를 남겨 두겠다는 말 같아서.
“돌아올게.”
그는 뜨거워지는 목울대를 눌러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내게 당신을 새겨 줘. 기다리다 외로워지면 꺼내 볼 수 있게.”
이미 울긋불긋한 흔적들로 빼곡한 그녀의 몸 위로 그가 입술을 내려 며칠이면 지워지고 말 흔적들을 남겼다. 그것이 서러워 그는 조금 더 오래 남을 흔적들을 새겼다.
어느새 창밖은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별의 순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나 잠들면 떠나.”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 주던 유진이 뒤에서 아리아드네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자.”
맞닿은 그의 체온이 너무 따스해서 열흘 내내 예민하게 곤두섰던 아리아드네의 신경이 누그러졌다. 이대로 그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별의 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고민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열흘 내내 제대로 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거짓말처럼 곧 정신없이 수마에 빠져들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을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정신을 차렸을 땐, 그는 이미 떠난 다음이라 그것이 제 꿈이었는지 아니면 현실이었는지 알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홀로 남은 침대 위에서 무릎을 모으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내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친구와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떠났다.
다시 혼자였다.
그와 함께 밤을 보낸 일조차 모두 꿈처럼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제 몸에 남은 흔적들이 있었다. 그가 새긴 흔적들과 아릿한 고통이 지난밤의 증거였다.
한동안 그렇게 제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던 아리아드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대강 옷을 걸친 아리아드네가 침대 옆의 설렁줄을 당겼다.
잠시 뒤, 성의 하인이 의아한 얼굴로 나타났다. 이계의 방문자가 메르디에스 성에서 지내는 동안 줄을 당겨 사람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하인이 유진의 방에서 맞닥뜨린 건 이 성의 손님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 님?”
그의 부름에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보는 서늘하고 차가운 시선에 쭈뼛 한기가 들었다. 처음 마주하는 얼굴도 아닌데 어쩐지 낯설어서 몸이 굳었다.
“이블린에게 내가 찾는다고 해.”
“네? 네, 알겠습니다.”
놀란 듯 멍하게 있던 하인이 허둥지둥 사라졌다. 곧 불려 온 이블린의 시중을 받아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아리아드네가 방을 나섰다.
“아버지는?”
“아마도 성주님 방에…….”
아리아드네는 성큼성큼 걸어 레너드의 방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페렌트 남부를 지배하는 메르디에스는 정식으로 케이루스 왕가에 대한 전복(顚覆)을 선포한다. 케이루스-메르디에스 내전의 시작이었다.
『……케이루스-메르디에스 내전을 알리는 시작은 메르디에스의 케이루스 왕가에 대한 전복 선언이었다. 메르디에스는 전복 선언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페렌트를 떠받치는 다섯 가문은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 바, 메르디에스는 남부의 수장이자 왕가 케이루스의 신하로서 그 역할을 다해 왔다.
그것이 유사 이래, 프레모 대륙의 유일한 패자(霸者)로 군림해 온 페렌트의 안정과 번영을 도모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에야 그것이 페렌트를 망국으로 이끄는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케이루스 왕가는 랭스턴 공국과 결탁하여 마물을 만들어 내 대륙을 도탄에 빠트렸으며, 이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하였다.
그들은 디움 산맥으로부터 페렌트를 지키는 이 땅의 파수꾼 리뮈르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마물을 이용해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였으며, 소르체가 가진 백자(白者)의 피를 탐내 우리의 땅에 피를 흩뿌리고, 메르디에스의 보화를 탐내 우리의 성을 침략하였다.
이에 메르디에스는 케이루스 왕가에 대한 신의와 충성을 버리기로 결의한 바,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케이루스 왕가의 항복이 있을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페렌트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공가의 권리로 페렌트를 다스릴 다음 왕으로 메르디에스의 아리아드네를 추대한다.
우리는 케이루스의 야욕에 희생당한 모든 희생자를 추모하고, 그들에게 항거한 의인을 기린다.
우리는 이 선언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과 끝까지 함께한다.
우리의 싸움은 오로지 페렌트의 영광과 번영을 회복하기 위한 것임을 맹세한다.’
메르디에스가 이처럼 강경한 선언을 한 것은 ‘유월의 폭설’이라 불리는 892년 겨울, 메르디에스 성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 때문이었다.
파혼 이후, 메르디에스와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1왕자 카이엔은 추수제를 맞아 남부 귀족이 결집한 메르디에스 성을 강제로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는 메르디에스 성을 점령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추가 지원 병력을 파견하지 못해 점령한 지 사십여 일 만에 성을 다시 빼앗긴다.
메르디에스가 성을 탈환한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케이루스의 최대 축일인 유월절이었는데, 따뜻한 메르디에스로서는 매우 드물게 폭설까지 겹쳐 그날 메르디에스 성의 탈환은 ‘유월의 폭설’이라 불리게 되었다.
‘유월의 폭설’은 메르디에스에게 내전의 명분과 남부 귀족들의 결합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으나 아리아드네 개인에게는 뼈아픈 상실을 경험하게 한 사건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유월의 폭설’로 함께 자라 친자매나 다름없는 친우이자, 가장 신뢰하는 측근이었던 캐롤린 리스벨을 잃는다. 그녀는 성에 남아 아리아드네가 메르디에스 성을 탈환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나, 케이루스 세작의 칼에 찔려 명을 달리했다.
그녀에 대한 아리아드네의 신임은 매우 두터웠는데, 이를 알려 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같은 남부 진영의 귀족이었던 스타드 백작이 아리아드네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공녀께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리아드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리스벨의 캐롤린이다.’
스타드 백작은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로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리아드네는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두 번째 역시 리스벨의 캐롤린이다.’
이에 스타드 백작이 물었다.
‘어찌하여 가장 신뢰하는 자와 그다음 신뢰하는 자가 같을 수 있습니까?’
‘내 신뢰는 모두 캐롤린에게 주어 남은 것이 없다.’
아리아드네의 대답을 들은 스타드 백작은 더는 묻지 못했다고 한다.
-발트 저, 페렌트 전쟁사 중에서.』
Unavoidable : 피할 수 없는
L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