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차츰 잦아들었던 눈발이 갑자기 거세졌다. 눈에 익숙지 않은 메르디에스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지둥 움직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하늘을 보던 아리아드네가 외투를 여미며 말했다.
“안 되겠어.”
“아리아드네 님, 안에서 기다리시면―”
“눈이 점점 거세지고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더 기다려!”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만류하며 붙잡는 신시아를 거세게 뿌리쳤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아리아드네는 처음이라 당황한 신시아가 손을 내렸다.
“……성주님과 기사단장님께도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전 인력이 동원되었으니 곧 찾을 겁니다.”
성을 탈환한 기쁨에 왁자지껄하던 주위가 점점 조용해졌다. 아리아드네는 간신히 숨을 내뱉으며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정말 성의 탈환에 소르체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가요?
―필요한 지원이라면 제가 거절했을 리가요.
소르체의 가주 이엘라가 그렇게 물었을 때, 아리아드네는 메르디에스 성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캐롤린을 떠올리며 이를 거절했다.
카이엔이 소르체에 묻어 둔 성물처럼, 성에 남은 캐롤린은 메르디에스의 안과 밖을 잇는 통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캐롤린은 자처해서 미끼가 된 거야. 누군가는 성 안에서 움직일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성에 남은 캐롤린은 거미줄처럼 엮인 비밀 통로를 통해 글레나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알리고, 수잔을 움직여 보물 창고로 위장된 통로를 열었다.
성을 주시하던 메르디에스 기사들에게서 드디어 비밀 통로가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리아드네는 기쁘기보다 불안했다. 성에 남은 캐롤린이 잘못될까 봐.
비밀 통로를 오가는 기사들에게 성 안의 일들을 전달한 것도, 성 밖에서 세운 탈환 계획을 듣고 이를 성내 상황에 맞춰 조율하고 실행한 것도 모두 수잔을 앞세운 캐롤린이 한 일이었다.
하지만 캐롤린은 끝까지 수잔 뒤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끝까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이라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역할이었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그런 것보다 캐롤린이 살아 주기를 바랐다.
―캐롤린,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모두를 부탁해. 아버지도, 백작님도.
그런 부탁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응, 잘 지키고 있을게.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언제나 네 대신인걸.
캐롤린은 늘 그런 식이었다.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그러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가야 해. 캐롤린은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리아드네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내가 같이 가지.”
내내 옆에서 아무런 말이 없던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한쪽 팔로 번쩍 들었다.
“담요.”
유진이 짤막하게 말했다. 신시아가 서둘러 가져온 담요로 아리아드네를 싸매다시피 한 유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당신도, 당신 친구도.”
“고마워.”
아리아드네는 유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안은 채로 눈 속을 달렸다. 새까만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이 자꾸만 시야를 가렸다. 눈이 원망스러웠다.
“나, 캐롤린이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아리아드네는 초조해서 유진을 붙잡고 아무 말이나 쏟아 냈다.
“그래.”
“캐롤린이 그랬어. 위험하다고.”
리뮈르에서 메르디에스로 귀환했던 그날, 아리아드네는 성벽 위에서 자신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캐롤린과 마주했다.
캐롤린은 성을 향해 다가오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붉은 깃이 달린 화살을 날렸다. 적색 깃이 달린 화살은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성벽 위에 선 캐롤린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를 내려다보는 캐롤린의 보랏빛 눈동자가 웃는 것처럼 휘어졌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리아, 우리 공주님. 네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
화살을 든 캐롤린은 꼭 그때와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알았다. 저건 캐롤린이 울음을 참는 얼굴이라는 걸.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을 하고서는 더없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캐롤린은 그런 얼굴을 하고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리아, 더 이상 오지 마. 여기는 위험해.’
캐롤린의 손에서 두 대의 화살이 더 날아왔다. 그중 하나는 깃대가 갈라진 채였다. 갈라진 나무는 ‘내부의 배신자’를 의미했다. 캐롤린은 아리아드네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조심해. 배신자가 있어.’
아리아드네는 당장이라도 성벽 위에 선 캐롤린을 끌어 내리고 싶었다. 저곳에 캐롤린을 혼자 둘 순 없었다.
[넌 내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지? 죽어서도 모를 거야, 너는.]
그런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다시는 캐롤린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공녀, 갈라진 나무는 다시 붙일 수 없습니다.’
코라를 통해 글레나의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날카로운 칼이 가슴을 헤집는 것만 같았다.
성에 남은 캐롤린이 어떤 마음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자신을 오해하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버틸 캐롤린이 너무 안타까워서. 도무지 캐롤린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돌아서면 둘로 갈라진 깃대처럼, 그렇게 캐롤린과 영영 헤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캐롤린은 끝내 성에 남는 것을 택했다.
마지막으로 캐롤린의 손에서 세 대의 화살이 쏘아졌다. 전시에서 아군을 향해 세 대의 화살을 동시에 날리는 것은 귀환 지점을 알리는 신호였다.
‘리아, 여기로 돌아와. 난 여기서 기다릴게.’
결국,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돌아서는 캐롤린을 잡지 못했다.
“그 바보가 후회할 일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리아드네는 외투에 담요까지 두르고도 추워서 몸이 떨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눈이 뼛속까지 얼리는 것 같았다. 성벽의 북쪽 끝까지 달린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내려 주며 말했다.
“좋은 기억을 떠올려 봐.”
캐롤린과는 태어나서부터 쭉 함께였다. 그런데 그 많은 시간 중에 좋은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성벽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얼굴, 화살을 잡은 손끝이 떨리던 것. 그리고 바닥에 고인 수프 위로 떨어지던 캐롤린의 눈물. 그런 것들뿐이었다.
“기억이 안 나. 분명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아리아드네는 점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졌다. 유진의 커다란 손이 아리아드네의 뺨을 감쌌다.
그가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그의 호흡을 따라 했다. 아리아드네가 진정되자 유진이 물었다.
“왕궁에서 헤어질 때 했던 인사는 뭐였어?”
아리아드네는 캐롤린이 리뮈르로 떠나는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리아, 잘 다녀와.
“잘 다녀오라고.”
―너나 다치지 마. 제발 성급하게 굴지 말고.
“다치지 말고, 성급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기다릴게.
“그리고 기다리겠다고, 그렇게 말했어.”
아리아드네가 말을 마치자 유진이 잘했다는 듯 꼭 안아 주었다. 그가 나눠 주는 온기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신이 찾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어서 찾아야지.”
하지만 그의 온기에 기대지 않고서는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그의 품에서 숨을 고르던 아리아드네가 곧 고개를 들었다.
“그래야지.”
“시간은 그렇게 많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초조해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유진의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그제야 아리아드네는 유진이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유진은 아리아드네를 안은 채 눈 속을 전력으로 달렸다. 그리고 달리는 내내 시간의 흐름을 비틀었다.
“미안해. 당신이라고 힘들지 않을 리가 없는데…….”
“아니,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아리아드네의 사과에 유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게 더 끔찍해.”
유진은 상상만으로도 괴롭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 말을 하는 그는 어딘가 안타깝기도, 또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고마워.”
아리아드네는 결국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의 도움을 거절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캐롤린을 빨리 찾아서 당신을 쉬게 해 주는 거겠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아봤는데…….”
“아니면, 사람들이 모를 만한 곳을 떠올려 봐.”
어쩌면 캐롤린은 사람들을 피해 숨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쉽사리 찾기 어려운 곳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제 우리가 가 보지 않은 곳은 반 호수 근처와 서쪽 문 아래, 동쪽 탑 뒤쪽 정도야.”
“반 호수는 아닐 테고, 서쪽 문은 리스벨 백작께서 지휘하셨어. 서쪽 문 근처에 있었다면 캐롤린을 찾지 못하셨을 리 없어.”
아리아드네가 하나씩 후보를 제했다. 남은 것은 동쪽 탑 뒤편뿐이었다.
“동쪽 탑 뒤쪽은?”
“그곳에는―”
유진의 물음에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늘에서는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리아드네 님, 성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왜? 나 좀 더 놀면 안 돼?
―공비 저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파시파에가 죽은 그날처럼.
아리아드네는 얼어붙은 입술로 간신히 뒷말을 뱉었다.
“그곳은 어머니께서 생전에 계시던 곳이야.”
불행은 멀리 있지 않았다.
* * *
캐롤린은 공비가 타계한 뒤로 쭉 비어 있던 건물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온 참이었다.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던 마법 같은 빛도 이제는 끝난 모양이었다.
“아버지께서도 돌아오셨겠지?”
캐롤린은 커티스가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볼 작정이었다. 미안해서, 죄송스러워서, 차마 용기가 안 나서. 그런 핑계들로 피해 다녔던 날들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평민 기사와 염문을 일으킨 후계라니, 파문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커티스가 그런 일로 자식을 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겁이 났는지…….’
캐롤린은 이제는 발이 푹푹 파묻힐 정도로 쌓인 눈을 헤치며 걸었다. 동쪽 탑까지만 나가면 경비대와 가까우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캐롤린이 파시파에의 처소에서 막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다급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캐롤린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벌어졌다.
“……리아.”
유진의 품에 안겨 있던 아리아드네가 구르듯이 내려왔다.
“캐롤린!”
다행이다. 다 잘 끝났구나. 캐롤린이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서 있던 유진이 기침 소리와 함께 피를 토했다. 하얀 눈 위에 점점이 흩뿌려진 피가 유난히도 붉었다.
캐롤린은 괜찮으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입에서는 말이 되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아아…….”
자신의 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너, 너만 없으면…….”
정신이 나간 것처럼 초점이 흐릿한 남자가 캐롤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쪽은 케인, 경비대 소속으로 우리 일을 아주 많이 도와주었답니다.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고요.
셀레나는 캐롤린 앞에서 케인의 가장 약한 곳을 드러냈다. 그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문 채로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수렁을 만들었다. 셀레나의 수렁에 빠진 케인은 결국 캐롤린을 향해 칼을 들었다.
‘나를 미행했었나. 대체 언제부터…….’
케인이란 남자가 자신에게 정체를 들킨 다음부터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좀 더 조심해야 했는데…….’
케인의 손에 들린 칼이 눈에 반사되어 푸르게 빛났다.
“너만 없어지면!”
푸욱, 이번에는 가슴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서느런 바람이 가슴을 관통하더니 이윽고 불로 지진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캐롤린!”
눈앞의 세상이 천천히 무너졌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눈에 묻혔구나.’
캐롤린은 그제야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앵, 남자가 들고 있던 칼이 무언가와 부딪혀 떨어졌다. 아마도 유진이 남자를 제압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피를 토하길래 걱정했는데…….’
캐롤린은 이 순간 그런 걱정을 하는 자신이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다 이윽고 끊어졌다.
‘남자가 기절했나? 아, 내 귀가 안 들리는 것일 수도.’
점점 감각이 사라졌다. 머리가 둔하게 움직여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캐롤린, 캐롤린! 안 돼. 제발, 조금만 기다려. 다, 다 끝났어.”
달려온 아리아드네가 눈밭에 쓰러진 캐롤린을 일으켜 피가 흐르는 가슴께를 꾹 눌러 왔다. 그제야 하늘이 보였다. 새까만 하늘에서 하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새파란 눈동자가 눈물로 온통 젖어 있었다.
“……리아, 울지 마. 예쁜 얼굴이 다 얼잖아.”
“아, 아아……. 캐롤린. 제발, 제발…….”
캐롤린은 성을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했던 그때,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울지, 마. 난 괜찮아. 말했잖아. 널, 지킬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그러니까…… 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각오했던 일이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 때문에 아파할 것이 걱정이었다.
“아, 버지는, ……무사, 하셔?”
자꾸만 숨이 차올랐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가 흐르는 캐롤린의 목을 감쌌다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무사하셔. 모두 무사해. 전부 네가 살린 거야. 전부, 전부 다 네가, 그러니까 제발,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줘. 백작님께서 오실 때까지만이라도…….”
아리아드네가 오열하며 애원했다.
“나, 잘했어?”
캐롤린이 입꼬리를 바르르 떨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 캐롤린……. 제발.”
아리아드네는 덜컥 겁이 나 그저 빌었다.
“……나 조금, 무서웠어. 다, 잘못될까 봐. 아버, 지가 지켜온 리스벨의 이름까지도 더럽혔는데…….”
밤에 눈을 감아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꿈을 꾸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눈을 떠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에서도 그녀는 메르디에스의 신의를 저버린 배신자였으니까.
“일, 이 잘못되어서, 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배신자로 죽으면……. 그러면 아버지께 너무……. 안 그래도 나 너무, 속 많이 썩여서…….”
점점 숨이 차올랐다. 자꾸만 목으로 피가 넘어왔다. 캐롤린은 숨을 내뱉었다고 생각했는데 핏덩어리였다.
“아, 캐롤린, 제발…….”
아리아드네가 상처를 지혈하려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캐롤린이 흘린 피로 하얀 설원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 안 돼, 제발, 제발…….”
캐롤린의 눈동자가 점점 초점을 잃고 느릿하게 깜박였다. 이대로 캐롤린을 보낼 수는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버트, 알버트도 왔어.”
“……아, 정말?”
캐롤린은 힘겹게 눈을 깜박였다. 아리아드네를 보고 싶은데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응, 팔도 다 나았어. 이젠 예전처럼 검도 쓸 수 있대.”
“다, 행이다.”
검을 쥔 알버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캐롤린은 사랑을 자각했던 그 새벽의 풍경을 떠올렸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 속에서 아름답게 움직이던 소년을 보고 울컥 터져 나오던 울음을 참던 그 순간을.
“……나, 비?”
그때, 어디에선가 날아온 나비가 캐롤린 주위를 맴돌았다. 캐롤린은 나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겨울에 나비가 있네…….”
떠나야 할 때를 놓쳤을까? 아니면 잠들어야 할 시기를 놓친 걸까. 캐롤린은 팔랑팔랑 날갯짓하는 나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비의 날개는 그 새벽의 공기처럼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예, 쁘다. 네 눈, 처럼…… 파란, 색이야.”
아리아드네가 흰 눈만 펑펑 쏟아지는 허공을 보다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 겨울에 나비가 있을 리 없었다. 캐롤린이 보는 나비를 자신은 볼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서로가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증거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리아, 나, 네가 다, 스리는 페렌트가 보고 싶었어……. 네가, 다스리는 나라라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살, 아도 좋을 것 같았어.”
캐롤린은 제 환상이 만들어 낸 푸른 나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비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온몸을 조각내는 듯한 고통이 점점 사라져 갔다. 이대로라면 저 나비처럼 훨훨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생엔, 저런 나비로 태, 어나도 좋을 것 같아.”
“그런 말 하지 마, 살아서 나랑 같이, 오래오래 같이 살아서…….”
아리아드네가 눈물 가득한 얼굴을 부비며 애원했지만, 캐롤린은 고개를 저었다.
“약, 속해. 내가 다시 태어나면, 그곳은…… 네가 다스리는 페렌트일 거라고.”
캐롤린은 손을 더듬어 아리아드네의 손을 붙잡았다. 대답하기 전까지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마지막 힘을 다해 꼭 붙잡았다.
“약속할게, 캐롤린.”
아리아드네가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캐롤린이 아리아드네를 놓아주었다.
캐롤린은 왕이 된 아리아드네를 상상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는데, 왕이 된 아리아드네 곁에 있는 자신은 어쩐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예감했다.
―네 곁에 이젠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아.
자신의 역할은 아리아드네가 왕이 되기 전에 끝날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조금 억울했다.
캐롤린이 마지막 힘을 짜내 입술을 달싹였다. 아리아드네는 혹시나 캐롤린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하게 될까 봐 서둘러 피로 젖은 입가에 제 귀를 붙였다. 숨소리에 섞인 희미한 말이 툭 떨어졌다.
“폐하.”
아, 했다. 캐롤린은 뿌듯한 듯 눈을 접어 웃었다.
셀레나가 카이엔을 그렇게 불렀을 때, 캐롤린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그 말을 따라 했다. 자신도 아리아드네를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안녕, 나의 왕.”
사랑하는 나의 왕.
그 말을 마지막으로 캐롤린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아, 아아…….”
아리아드네가 떨리는 손으로 캐롤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얼굴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눈이 캐롤린 위로 계속해서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는 캐롤린 위로 쌓이는 눈을 털어 내다 제 몸으로 감싸 안았다.
“아, 어떡해, 캐롤린이, 캐롤린이…….”
희미한 온기가 빠르게 식어 갔다. 사자(死者)의 몸이었다.
“난, 나는 또, 또, 아무것도…….”
아무도 잃지 않겠다고 숱하게 다짐했다. 하지만 자신은 또다시 누군가를 잃고 말았다.
유진이 오열하는 아리아드네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몸부림치는 아리아드네를 감싸듯이 붙잡았다.
“날 원망해. 내가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자신이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아리아드네의 친구는 살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를 이곳에 뿌리내리게 해 준 그녀에게 언제까지나 쓸모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 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또다시 누군가를 잃어야 했다.
그의 품을 벗어난 아리아드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전부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좀 더 빨리 찾았어야 했어. 아니, 캐롤린을 두고 돌아서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내가 조셉을 좀 더 빨리 눈치채서 메르디에스에 제때 도착만 했어도…….”
부풀어 올랐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으며 한숨처럼 이어졌다.
“내가, 지키지 못했어.”
아리아드네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소복이 쌓인 눈 위로 떨어졌다. 눈물과 닿은 눈은 녹아내려 물이 되었다.
캐롤린 앞에 무릎을 굽힌 유진이 그녀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이 캐롤린의 몸을 감쌌다.
산 자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죽은 자의 시간을 멈출 수는 있었다. 생명이 떠난 사자(死者)의 몸에 흐르는 시간은 사물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물의 시간은 그의 영역이었다.
죽은 자의 시간을 멈추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자의 마지막 순간이라도 눈에 담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그만큼의 위로였다.
하얀 눈이 쏟아져 내렸다. 아리아드네에게 이별은 언제나 시리고 차가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