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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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억, 헉헉―”

    목으로 피가 넘어오는 것 같았다. 셀레나는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카랑! 챙, 챙챙! 멀리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얼핏 들렸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버린 게 아니야. 케이루스가 우리를 버린 거야.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셀레나는 진득하게 따라붙는 죄책감을 떨쳐 내려 애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종일 내린 눈으로 발이 푹푹 빠졌다. 마음이 급하니 제 속도가 더욱 더디게 느껴졌다.

    ‘이젠 다 왔어. 마차를 숨겨 놓은 곳까지만 가면…….’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셀레나는 로브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종종걸음을 쳤다. 날리는 눈발 사이로 외진 곳에 세워 둔 허름한 짐마차가 보였다.

    심호흡을 한 셀레나가 짐마차 뒤편에 실은 물건을 확인했다. 위장한 짚더미를 걷어 내자 메르디에스의 보고에서 훔친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물건을 확인한 셀레나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내내 마음에 걸리던 부하들의 죽음도 이 순간만큼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아직 어수선할 때 잽싸게 사라져야 했다. 셀레나는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막 마차를 출발시키려던 그때였다.

    “어딜 가십니까! 이대로 떠나면 나는 어쩌라고!”

    마부석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튀어나와 셀레나를 덮쳤다. 셀레나는 마차에서 떨어져 자신을 덮친 남자와 함께 눈밭을 굴렀다.

    “이것 놔! 감히 너 따위가 어디서!”

    셀레나는 팔꿈치로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의 가슴을 강하게 가격했다.

    “커헉, 흑―”

    남자가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옷에 묻은 눈을 털어 낸 셀레나가 눈밭에 쓰러진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네가 어떻게 되든 그게 나랑―”

    셀레나는 남자의 왼쪽 팔을 등 뒤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대로 비틀었다.

    “무슨 상관이야.”

    빡! 소리가 나며 남자의 관절이 반대로 꺾였다.

    “하, 별 거지 같은 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셀레나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넌 처음부터 쓰고 버리는 패였어.”

    그녀의 말에 팔이 꺾인 남자가 고통과 절망이 뒤섞인 흐느낌을 뱉어 냈다.

    “그동안 고마웠어.”

    “이, 이대로는 못 보냅니다. 제 아들이라도 데려가십시오.”

    남자는 남은 한쪽 팔로 셀레나를 붙잡으며 매달렸다. 그녀가 남자의 남은 팔마저 부러뜨릴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그만둬. 배신자를 벌하는 건 주인의 몫이니까.”

    어둠 속에서 냉랭하고 고압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리아드네 님!”

    한쪽 팔이 꺾인 채로 눈밭을 구르던 남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아직도 네게 실망할 게 남았을 줄이야.”

    어둠 속에서 나타난 아리아드네가 남자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남자는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지만 말이 되지 못한 공기만 식식, 내뱉을 뿐이었다.

    “변명이라도 해 봐. 어떤 변명으로도 네 행동은 용서받지 못하겠지만.”

    “아, 아아, 저는, 저는 그러니까…….”

    팔이 꺾인 남자가 눈밭을 기어와 아리아드네 발치에서 눈물만 뚝뚝 흘렸다.

    “왜 할 말이 없어? 그럼 내가 물어볼까?”

    아리아드네는 싸늘한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쌓인 눈이 달빛을 반사해 주위는 도무지 밤 같지가 않았다.

    남자의 정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리아드네 곁에 있으며 그녀의 행적을 낱낱이 카이엔에게 전해 바친 배신자의 얼굴이 달빛 아래 환하게 드러났다.

    “조셉, 네가 메르디에스의 배신자인가?”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눈물만 뚝뚝 흘리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조셉은 엘바에서 실종된 메르디에스 상단원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는 죽은 친구의 원수를 갚고 싶다며 동행을 자처했다. 릭센을 떠나 리뮈르로 향하던 그때부터 조셉은 아리아드네와 내내 함께였다. 배신자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조셉이 온몸을 덜덜 떨며 더듬거렸다.

    “아, 아니, 저는 아닙―”

    그때였다. 아리아드네의 신경이 조셉에게 쏠린 틈을 타 셀레나가 짐마차를 향해 달렸다.

    “잡아.”

    하지만 셀레나는 몇 걸음 떼지도 못한 채 잡혀 왔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셀레나는 계속해서 곁눈질로 짐마차를 힐끔거렸다. 짐마차에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짐칸에 실은 물건을 확인하더니 픽 웃고 말았다.

    “메르디에스를 점령해 놓고 고작 저거 훔친 거야? 케이루스의 지휘관님께서는 사람이 참 소박하네.”

    녹슨 무기와 오래된 물건을 쌓아 둔 창고에 비밀스럽게 만든 보고는 애초에 미끼로 활용하기 위한 곳이었다. 적당히 눈에 띄고 적당히 은밀한 보고. 그것은 메르디에스 성이 고립되었을 때, 외부와의 연결 통로를 여는 열쇠였다.

    탐내지 않는 미끼야 의미가 없으니 그곳에 둔 물건들은 모두 진품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좀 값이 나갈 뿐, 메르디에스에서 크게 의미 있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짐마차를 뒤적이던 아리아드네가 그중 하나를 꺼내 눈밭 위에 내던졌다. 이제는 사라진 고대 왕국의 대관식에 쓰였다는 보관이 눈밭을 데구르르 굴렀다.

    “네 수하들 목숨값인데 좀 더 챙기지 그랬어. 이건 너무하잖아.”

    돌멩이처럼 눈밭을 구르는 저것은 셀레나의 목숨값이었다. 셀레나가 핏발이 선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쏘아보며 말했다.

    “살고자 하는 게 뭐가 나쁜가. 나는 살고 싶었을 뿐이야. 살고 싶었다고! 나쁜 건 날 버린 사람이지. 나는 버림받은 것뿐이야!”

    아리아드네는 셀레나의 눈동자에서 익숙한 감정들을 읽었다. 배신감, 분노, 허탈함, 원망. 지금 셀레나가 느끼는 감정들은 아리아드네 또한 고스란히 경험한 것들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셀레나의 절망을 이해했다.

    “맞아. 나쁜 건 그놈이지. 그런데 넌 뭐가 달라?”

    사방이 고요했다. 이제는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성에 있던 케이루스의 병력이 더 이상 항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

    “너도 똑같이 했잖아. 네 수하들은 마지막까지 항전하라는 네 명을 따랐어. 조금만 버티면 네가 뭐든 해 줄 거라고 믿었지. 네가 자신들을 시간 벌기용으로 쓰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말이야.”

    셀레나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제 희망이 더는 가망 없음을 깨달았다. 절망에 잠기어 가는 그녀의 눈을 보며 아리아드네가 덧붙였다.

    “네 명을 따르다 죽은 네 수하들에게 너는 카이엔이 네게 한 짓과 똑같은 짓을 한 거야.”

    셀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제 엄지손톱 밑에 새겨진 검은 달의 문신이 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처음부터 전부 잘못이었다. 섬길 주인을 잘못 타고난 처음부터 전부.

    ‘결국 명하신 대로 끝이 나는가.’

    셀레나가 입 안에 숨겨 둔 독약을 깨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찰나였다. 새까만 잔상이 셀레나의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곧이어 목 뒤를 강타한 고통에 셀레나는 크흑,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럼 안 되지. 살고 싶다고 했잖아.”

    낮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셀레나는 흐릿해지는 의식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새까만 머리카락, 희고 창백한 피부, 다른 화가의 그림을 뚝 잘라 이어 붙인 것 같은 이질적인 존재감.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계의 방문자 유진.

    “어디 한번 죽고 싶어질 때까지 살아 봐.”

    셀레나는 이젠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셀레나의 몸이 눈밭 위로 축 늘어졌다.

    “마차는 회수하고, 저 여자는 자결하지 못하도록 사지를 결박하고 재갈을 물려서 지하 감옥에 가둬 놔.”

    아리아드네의 말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제 남은 것은 눈밭 위에서 움찔대며 통곡하는 조셉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것이었다.

    “아리아드네 님, 이곳에 계신다고―”

    두꺼운 외투를 들고 나타난 여자가 아리아드네 앞에 무릎 꿇은 남자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걸음을 멈추었다.

    “아, 신시아.”

    메르디에스의 상단주인 신시아였다. 한숨을 내쉬며 다가온 신시아가 아리아드네의 몸에 외투를 둘러 주었다. 신시아가 오열하는 조셉을 괴로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정말 그게 다 조셉이 한 짓이었습니까?”

    “그동안 미안했어.”

    아리아드네는 그동안 노골적으로 신시아를 배척했다. 처음은 신시아조차 믿을 수 없어서였고, 나중에는 조셉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아닙니다. 모든 것은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신시아는 상단원인 조셉이 배신자였다는 사실에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으며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야말로 내 불찰이지. 그동안 조셉을 데리고 있었던 건 난데…….”

    “언, 언제부터 알고 계셨……. 아니, 아닙니다. 전 정말 아닙니다.”

    중얼거리다 제 실수를 고해바치고 만 조셉이 뒤늦게 젖은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조셉, 넌 너무 많은 일을 했어.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아리아드네가 처음 제 곁의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한 건 메르디에스 성을 빼앗기고 나서였다. 아리아드네는 처음부터 신시아와 조셉, 둘 중 하나가 케이루스의 세작이라고 확신했다.

    메르디에스 내에서 정보를 다루는 신시아, 아리아드네와 쭉 함께했던 조셉. 더 위험한 건 신시아 쪽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 월등히 많았으니까.

    아리아드네는 신시아가 세작일 것을 염려하여 몇 번이나 시험해 보았지만 그녀에게서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조셉일까.

    ―아리아드네 님, 마크를 그렇게 죽인 사람들이 다 밝혀진 게 아니지요? 랭스턴 공작이 끝이 아닌 게지요?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리아드네 님, 무슨 일을 시켜도 좋으니 제발 저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릭센에서 다시 만난 조셉은 그렇게 말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때, 전부 다 거짓만 말하지는 않는다. 본능적으로 진실을 섞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조셉의 진실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그 부분일 터.

    “가족들 때문이었나?”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마침내 조셉이 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아, 아아…….”

    그의 입에서는 말이 되지 못한 웅얼거림만이 새어 나왔다.

    “리뮈르에서 메르디에스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도 네 짓이었지?”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조셉은 고개를 처박은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문 닫힌 메르디에스 성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소르체로 가는 길에 달로아가 그런 말을 했다.

    ―다 끝난 일 같기는 한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말해 봐.

    ―리뮈르를 떠나기 전 아버지께 들은 말인데, 달리오스가 제 부관에게 그런 말을 했대. 안에서 새는 구멍을 막지 못하면 메르디에스도 곧 끝날 거라고.

    ―…….

    ―내가 좀 더 빨리 말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괴로운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린 달로아가 자신의 한쪽 눈을 쓸어내렸다. 아리아드네는 달로아의 표정과 행동을 보며 직감했다. 저 말을 들은 이는 아마도 달리오스의 부관이 아니라 달로아 그녀일 것이라고.

    여전히 양쪽 눈 모두 투명한 회색인 그녀가 어떻게 달리오스의 기억을 읽었는지는 아리아드네도 알지 못했다. 다만, 달로아는 아직 그것을 자신에게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듯했다.

    ―리스벨 영애가, 달리오스의 부관이 말한 배신자가 맞겠지?

    달로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리아드네의 생각은 달랐다. 달리오스가 말한 배신자가 캐롤린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일까.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발이 빠른 사람을 수배하여 포르타 너머 마을로 보내 두었으니 늦어도 보름달이 뜨기 전에는 돌아올 겁니다.

    리뮈르에서 메르디에스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이 정말 달리오스 때문이었을까? 엘바의 서쪽 숲에서도 탈출하여 소식을 전한 틸레가 정말 단 한 마리도 달리오스의 눈을 피하지 못했던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소식을 받고도 중간에서 그것을 숨긴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닐까. 이상한 일은 리뮈르를 떠나 메르디에스로 오는 길에도 계속되었다.

    동행했던 리뮈르 기사들이 돌아간 뒤로 아리아드네 일행은 마차 바퀴가 빠지거나 멀쩡하던 말이 갑자기 쓰러지는 등의 이유로 번번이 발이 묶였다. 마치 누군가 바로 옆에서 그녀의 귀환을 방해하는 것처럼.

    “너라면 마차 바퀴를 망가뜨리거나 말이 먹는 사료에 약을 타는 건 별로 어렵지도 않았을 거야.”

    그 덕에 아리아드네는 예정보다 훨씬 늦게 메르디에스 성에 도착했다. 그때는 이미 셀레나가 지휘하는 케이루스 병력이 메르디에스 성을 점령한 다음이었다.

    “정말, 정말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닙니다. 어쩔 수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발, 제 가족들만이라도…….”

    조셉이 아리아드네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붙든 조셉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 상처는 최근에 다친 것 같네. 어쩌다 다쳤어?”

    조셉의 손은 손톱이 부러지고 여기저기에 긁혀 엉망이었다.

    “소, 소르체에서, 아리아드네 님을 구하려다 다친 상처입니다! 아리아드네 님이 지하 창고에 갇혔단 말을 듣고, 반, 반항하다가…….”

    “아, 기억나.”

    소르체에서 아리아드네 일행이 지하 창고에 갇혔을 때,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조셉은 반나절 사이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조셉. 애초에 우리가 왜 갇힌 건 줄 알아?”

    “소, 소르체에 침입자가 나타나서…….”

    “맞아. 누군가 모라의 성물인 단검으로 제 손을 찔러 소르체의 땅에 피를 적시고, 바위 아래에 단검을 숨겼어. 그렇게 하면 1왕자가 사용할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지거든.”

    아리아드네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부러진 손톱 조각이 놓여 있었다. 소르체를 침입한 자들의 정체를 조사하던 중에 푸른 델피니움이 가득 핀 풀숲에서 발견한 손톱 조각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손톱 조각을 발견한 뒤 일행의 손을 모두 살펴보았다. 소르체에서 팔을 치료 중이던 알버트까지도.

    “뭐가 그렇게 급해서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일을 한 거야. 손이 엉망이 되었잖아.”

    일행 중 손톱이 부러진 건 조셉뿐이었다. 그렇게 배신자의 정체를 확신하게 되었다.

    “소르체의 기사들에게 반항한 이유도 짐작이 가. 손의 상처가 부자연스럽게 보일까 봐 일부러 맞은 거지?”

    아리아드네는 조셉이 배신자임을 알게 되고도 신시아를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치 아리아드네가 신시아를 의심하는 것처럼. 안심한 조셉은 예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내부의 정보를 빼돌렸다.

    아리아드네는 조셉 앞에서 유진이 반 호수를 이용할 것이란 말을 여러 번 흘렸다. 유진이 한 일은 카이엔처럼 공간을 뛰어넘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동물의 사체를 버려둔 것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의도적으로 흘린 정보는 조셉을 통해 셀레나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셀레나는 반 호수를 통해 메르디에스 병력이 쳐들어올 것이라 확신하고 말았다.

    “잘, 잘못,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제 가족들만이라도, 살려, 살려 주십시오.”

    흐으윽, 하늘에서 떨어진 눈과 흘러내린 눈물이 뒤섞인 조셉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눈물로 엉망이 된 조셉의 얼굴을 보며 엘바에서 만난 ‘그’를 떠올렸다.

    “조셉, 네가 정말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마치 두 눈이 구멍 난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던 사람의 얼굴을 한 마물 마르티코라스. 그것은 ‘마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크를 그렇게 만든 건 너였지?”

    조셉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숨기고 싶었던 마지막 진실까지 낱낱이 발가벗겨진 얼굴이었다.

    ―조……셉, ……를 ……죽, 여.

    마르티코라스가 된 마크는 그 말만을 반복했다. 그 말을 들은 조셉은 ‘마크가 원하는 대로 어서 그를 죽여 달라.’고 간청했다. 마크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기라도 할까 두려운 사람처럼.

    “마크가 한 말이 정말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이었을까?”

    그 말은 조셉을 죽여 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어쩌면 조셉의 말대로 이렇게 된 자신을 죽여 달라는 말일지도 몰랐다. 마크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이젠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조셉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아리아드네는 최대한 천천히, 조셉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 말을 들려주었다.

    ―조……셉, ……를 ……죽, 여.

    “조셉이 나를 죽였어.”

    조셉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조셉, 마크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범인을 지목한 거야. 그렇지?”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죄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

    “아, 아아, 아아아―”

    눈밭에 얼굴을 파묻은 조셉은 가장 약한 곳을 찔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하늘에서는 지상의 추악한 것을 모두 덮으려는 것처럼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때, 쏟아지는 눈 사이로 기사 차림을 한 남자와 여자 한 명이 다가왔다. 기사 차림을 한 남자는 다름 아닌 알버트였다.

    “공녀 저하, 이 하녀가 저하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알버트가 웬 하녀를 한 명 데리고 와 그렇게 말했다. 아리아드네가 의아한 얼굴로 알버트를 바라보았다.

    “캐롤린과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알버트에게 인질들을 빼내는 임무를 맡긴 건, 맡은 일이 끝나면 캐롤린을 찾아 함께 있으라는 뜻이었다.

    “아가씨께서는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이 하녀가 캐롤린 아가씨 방 근처에서 맴돌고 있길래 물어봤더니 공녀 저하께만 말씀드리겠다고…….”

    아리아드네가 알버트 뒤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하녀에게 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그제야 고개를 든 하녀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말했다.

    “공녀 저하, 저는 메르디에스 성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수잔이라고 합니다.”

    하녀의 이름까지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수잔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수잔이라면…….”

    셀레나의 속임수에 빠져 피피를 성에 들였다던 그 하녀였다. 수잔이 갑자기 눈밭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네, 제가 바로 그 수잔입니다. 제가 한 일에 대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 전에 제발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아리아드네는 손을 내밀어 수잔을 일으켰다.

    “아니, 넌 상을 받을 거야. 저지른 죄에 비해 쌓은 공적이 훨씬 크니까.”

    수잔에게 잘못이 있다지만 그녀는 제 잘못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한 일들을 해냈다.

    “그것보다 내게 할 말이란 게 뭐지? 그게 캐롤린과 무슨 상관이지?”

    아리아드네는 자꾸 시야를 가리는 눈 때문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눈이 갑자기 귀찮게 느껴졌다.

    “리스벨 아가씨께서는, 아가씨께서는…….”

    수잔이 울먹이다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리스벨 아가씨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공녀 저하를 배신한 게 아닙니다. 제발 아가씨를 향한 노여움을 거두어 주세요.”

    “…….”

    아무 대답이 없는 아리아드네가 불안했는지 수잔은 빠르게 이야기를 덧붙였다.

    “큰 잘못을 한 제게 기회를 주신 것도 리스벨 아가씨셨어요.”

    ―……아, 리스벨 아가씨?

    ―네 이름이 수잔이라고 했던가?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수잔이 지내던 방의 벽이 열리며 나타난 것은 모두가 메르디에스 성을 팔아넘긴 배신자라고 욕하는 캐롤린 리스벨이었다.

    ―잘 해낼 수 있겠어? 그 여자가 너를 신뢰하도록 만들어.

    ―열쇠 손잡이에 마름모꼴 모양의 루비가 박힌 게 있을 거야. 그게 그곳 열쇠야.

    수잔에게 셀레나를 꾀어낼 방법을 알려 준 것도 모두 캐롤린이었다. 오늘 아침, 인질들의 수갑과 족쇄를 몰래 풀어 준 수잔이 방에서 나왔을 때 캐롤린과 부딪힌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앞은 잘 보고 다니도록 해.

    ―주, 주의하겠습니다.

    수잔이 막 모퉁이를 지나쳤을 때, 케이루스의 병사들이 투덜대는 소리를 들었다.

    ―뭐야, 그 여자. 자기가 뭐라고 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모르냐? 리스벨이잖아.

    ―흥, 그 리스벨.

    수잔이 병사들과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캐롤린이 시간을 벌어 준 거였다. 자신은 그저 캐롤린이 시킨 대로 한 것뿐이었다. 정말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 런데 다들 리스벨 아가씨가 적에게 성을 넘겼다고, 그건 아닌데, 정말 아닌데…….”

    수잔은 캐롤린을 옹호하려 아리아드네를 찾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아리아드네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 캐롤린은 어디 있지?”

    “저도 그건 알지 못합니다. 오늘 아침, 인질로 잡힌 분들의 수갑과 족쇄를 풀어 드릴 때 잠깐 마주친 게 전부예요. 그 이후로는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

    “짐작 가는 곳도 없고?”

    “네, 전혀…….”

    천천히 고개를 내젓던 수잔이 눈밭 위에 엎어진 조셉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케인은 찾으셨나요?”

    “케인?”

    “경비대 소속의 케인이요.”

    그 순간, 엎드려 있던 조셉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케인은, 케인은 안 돼! 수잔, 너 어떻게! 케인이 네게 어떻게 했는데!”

    “조셉 아저씨야말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아저씨도 케인도 죗값을 치르셔야죠.”

    수잔이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둘은 전부터 잘 알던 사이인 듯했다. 조셉은 팔이 부러진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아드네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닙니다. 케인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그저 아비를 잘못 둔 죄 밖에 없습니다.”

    주위 기사들이 조셉을 질질 끌어내었다. 조셉은 아리아드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며 울부짖었다.

    “케인이라는 자가 조셉의 아들을 말하는 건가?”

    “네.”

    수잔이 조셉을 힐끗 보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은 경비대 소속인데, 예전부터 셀레나가 메르디에스에 심은 세작이라고 했어요. 추수제 연회가 있던 날, 경비대에게 약이 든 음식과 술을 먹인 것도 케인이 한 짓이에요.”

    경비대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면 승급 시험을 치러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기사가 되고 싶은 평민들은 경비대에 들어 기회를 노리곤 했다.

    조셉은 늘 자랑처럼 말했다. 제 아들은 언젠가 기사가 될 거라고. 그런 조셉의 아들이 경비대 소속이라는 것은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아리아드네는 낭떠러지 위에 올라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거, 메르디에스에 억류 중이던 루안이 독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메르디에스 경비대 소속의 남자였다.

    그때도 저 케인이라는 자는 케이루스의 세작이었을 터. 그는 루안을 죽여 케이루스가 메르디에스를 공격할 불씨를 마련했다.

    “케인은, 케인은 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겁니다. 전부, 전부 제 잘못입니다.”

    조셉은 끝까지 제 아들을 감싸려 발악했다. 왜 그러는지 알 만했다. 조셉과 케인은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었던 거다. 조셉을 움직일 때는 아들을 들먹이고, 케인을 움직일 때는 아버지를 들먹였겠지.

    “수잔, 넌 조금 전 조셉에게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했어. 그건 조셉이 케인의 아버지이기 때문인가?”

    수잔이 본 건 조셉이 눈밭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광경뿐이었다. 조셉이 무슨 짓을 했는지 성 안의 하녀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아니요. 조셉 아저씨가 저하 곁에 붙어 있는 세작이라고 했어요.”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알았지?”

    또다시 눈이 아리아드네 얼굴 위로 떨어졌다. 눈이 닿은 자리마다 얼굴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차가웠다.

    “리스벨 아가씨께서 알려 주셨어요. 이제부터는 절대 케인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실은 제가 케인과 사귀는 사이였거든요.”

    수잔은 어떤 오해를 받을까 두려웠는지 서둘러 케인과의 관계를 부인했다.

    “아, 저 이젠 케인 안 좋아해요. 애초에 셀레나가 절 노린 것도 전부 케인 때문이었는걸요.”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 뒷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쿵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마치 귓가에서 북을 치는 것처럼 거슬렸다.

    케인은 조셉의 꼬리가 잡혔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했다. 죽을 게 뻔한 아들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지도 모른다.

    “캐롤린은 그걸 어떻게 알았고?”

    “셀레나가 케인 앞에서 알려 줬다고 했어요. 서로의 약점을 잡고 있으면 다시는 배신하지 못한다면서.”

    약점을 아는 자를 처리하면 약점은 사라진다.

    “알버트, 지금 당장! 케인이라는 그자를 찾아.”

    ―리아, 잘 다녀와. 나는 언제나 네 대신인걸.

    “캐롤린이 위험해.”

    케인보다 빨리 캐롤린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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