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48)

* * *

퍼엉, 펑펑!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거센 불길이었다. 반 호수를 둘러싼 숲에서 시작된 불은 삽시간에 케이루스의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셀레나는 새빨간 화염에 둘러싸인 반 호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리아드네가 반 호수의 신전을 통해 병사들을 보낼 거라 생각했다. 저쪽에는 성물 카푸트의 주인인 유진이 있었으니까.

동물 사체들도 공간 이동을 시험하기 위한 재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기름통이었을 줄이야. 셀레나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그리고 그 대가는 케이루스 전력의 절반 이상이었다.

성에 억류한 남부 귀족들을 최대한 이용해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잘 이용하면 퇴각할 시간 정도는 만들 수 있으리라.

그때,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구르듯이 방 안으로 들어온 기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셀, 셀레나 님! 인질들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라질 동안 대체 뭘 한 거야!”

셀레나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마구잡이로 던지며 화를 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적의 기사들이 인질로 위장하고 있었습니다. 적은 이미 성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화조차 나지 않았다. 셀레나는 비틀대다 책상에 겨우 몸을 기대었다. 적이 이미 성 안에 들어왔다면 셀레나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이곳은 적의 본거지였다. 이곳에서 싸운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이게 다 카이엔이 늑장을 부리며 제때 원군을 지원해 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 주제에 목숨을 걸고 싸운 자신들에게 죽으라니. 그따위 명은 조금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아직,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야.’

다행히도 셀레나에게는 메르디에스의 보고(寶庫)에서 훔쳐 낸 것들이 있었다. 그것만 있으면 어디서든 잘살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서둘렀어도.’

그녀는 오늘 밤, 그것들을 가지고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심지어 셀레나는 유월절이라며 케이루스 병사들에게 내린 말고기와 술에 감각을 둔화시키는 피피 가루를 소량 섞기까지 했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진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단 한 명도 포기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적을 맞아라.”

셀레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을.

“제 목숨을 아까워하는 자가 있다면 그 목을 가장 먼저 날리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은 병사들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줘야 했다. 셀레나의 명령을 받은 기사가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

홀로 남은 셀레나가 서둘러 화장을 지워 냈다. 평소 진한 화장을 하는 것은 본래 이목구비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가짜로 만든 입술 끝의 붉은 점도 감쪽같이 지웠다.

몰라보게 인상이 달라진 셀레나가 수수한 로브를 뒤집어썼다.

겨울이라 해가 부쩍 짧았다. 셀레나가 등불이라도 하나 들어야 하나 고민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때였다.

퍼엉! 퍼퍼퍼펑! 펑! 펑!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색색의 불꽃이 어두운 하늘을 수놓았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색을 지닌 별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것도 같고, 솜씨 좋은 화가가 남색 하늘을 캔버스 삼아 물감을 흩뿌리는 것도 같았다.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환상 같은 풍경에 셀레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멈춰 섰다.

“대체, 저게 뭐야.”

저런 것은 알지 못했다. 셀레나는 하늘을 수놓는 불꽃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저들이 저런 것을 쏘아 올린 의도였다. 성의 탈환을 축하하는 의미인 걸까. 모든 것이 끝났으니 항복하라는 압박일지도 몰랐다.

“아아…….”

싫어. 안 죽을 거야. 보란 듯이 살 거야.

“아아아악!”

셀레나는 두려움을 떨치려는 듯 고함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 * *

갑자기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이 당황스러운 건 성 밖에 있던 아리아드네도 마찬가지였다.

“선물 갖고 돌아오마, 하시더니…….”

성에 진입할 타이밍만 기다리던 사람들은 별안간 터진 불꽃 쇼에 다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어떠냐? 죽이지?”

불꽃 쇼를 벌인 당사자는 바로 이틀 전, 기다리던 물건이 도착했다며 신나게 사라졌던 레너드였다.

“곧 있음 우리 딸 생일 아니냐. 이 정도는 해야지.”

레너드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한껏 뽐내듯 말했다. 그 뒤에 도열한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얼굴 가득 뿌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레너드와 이하 기사들이 불꽃을 뽐내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생일’이라는 단어에 유진이 움찔 반응했다. 레너드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흥, 역시 애인보다 아비가 낫지?”

불꽃이 터지며 자욱하게 뒤덮은 연기와 매캐한 냄새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손부채질을 하며 연기를 쫓던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연인은 연인이죠. 전 둘 다 있는데요?”

냉큼 대답하는 아리아드네가 얄밉다는 듯 레너드가 작게 흘겨보며 말했다.

“넌 애가 꼭 그렇게 맞는 말만 하더라.”

자랑인지 투정인지 모를 대답이었다. 레너드의 팔불출 같은 태도에 아리아드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늘에서 색색깔의 불꽃들이 터질 때마다 눈 위에서도 작은 빛의 연주회가 열렸다. 아리아드네는 성 안에서 이 불꽃을 보는 사람들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했다.

케이루스의 가장 큰 기념일인 유월절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아니면 성의 탈환을 축하하는 메르디에스의 오만함으로 생각될까? 하나 확실한 건 이 불꽃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래오래 회자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던 레너드가 입을 열었다.

“아리아드네, 저건 말이다. 성물도 누군가의 성력이 담긴 것도 아니란다.”

하늘을 보고 있던 아리아드네가 레너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건 사람이 만들어 낸 거야.”

아리아드네는 제 망막에 새겨진 불꽃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사람이 그런 것을 만들어 내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내게 저것을 판 사람은 저것이 폭죽이라는 것이며 주재료는 화약이라고 설명하더구나.”

“누구에게서 사셨는데요?”

“티오그라드 군부 인사.”

티오그라드라면 서대륙 삼국 중 하나였다. 서대륙 삼국 브리아, 리가, 티오그라드는 비등한 국력을 바탕으로 늘 서로를 집어삼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세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그들은 한 번도 전쟁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 탓에 삼국 사이의 통행은 엄격히 제한되었고, 외지인의 출입이나 교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대륙 삼국은 중립 지역인 카타라를 통해서만 제한적 교역을 허용했다.

그런데 티오그라드 군부 인사에게서 물건을 사들였다니. 이는 레너드가 밀무역을 해 왔음을 시인하는 말이었다.

“어렵게 구해서 이번 교역선에 몰래 실었는데, 엘바에서 교역선이 통째로 사라지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했지.”

과거에는 끝내 랭스턴이 꿀꺽 삼킨 교역선을 찾지 못했다. 그때의 레너드는 저 물건을 사들이긴 했지만 끝내 확인하지 못했을 터였다.

“서대륙의 삼국 전쟁은 점점 승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변수가 없다면 승자는 브리아다.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려는 자들이 하나둘 터져 나와 저런 것들을 내놓기 시작했지.”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대륙 삼국 전쟁에서 한쪽으로 승기가 기울자 패색이 짙은 국가의 지도층들이 나라의 물건을 빼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들은 아름답긴 해도 크게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레너드는 저것을 군부의 인사에게서 산 것이라 했다.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는 명확했다.

“저게 사치품이 아니라 군부의 물건이라는 거죠?”

“그래, 내게 저것을 판 자는 화약으로 만든 것은 모두 군부의 통제하에 엄격히 거래된다고 했다. 그 말뜻을 알겠니?”

“우리는 알지 못하는 무기.”

저 아름다운 불꽃이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거다. 그것은 불꽃을 만드는 재료일 수도 있고, 불꽃을 만드는 방식일 수도 있었다.

그것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무서웠다. 그만큼 대륙 간에 기술 격차가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래, 서대륙은 세 나라가 세워진 이후로 전쟁을 멈춘 적이 없지. 우리는 그런 그들을 무시했다. 서로의 살을 파먹는 미련한 짓이라고.”

전쟁은 상흔을 남긴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문화와 예술을 후퇴시킨다.

“우리가 평화를 만끽하며 문화와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동안, 서대륙은 전쟁을 통해 다른 쪽의 발전을 이룬 거지.”

전쟁은 평소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물건들을 만들어 낸다. 상대를 죽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한다.

“놀랍네요. 저걸 인간이 만들어 냈다니.”

어둑한 밤하늘에서 끝없이 터지는 불꽃은 여전히 아름답기만 했다. 아리아드네는 언젠가 유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건 신이 남긴 흔적도, 성력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조작법만 알면 당신도 메로우의 머리를 날려 버릴 수 있지.

“유진, 언젠가 당신이 말했지? 풀멘은 성물이 아니라고.”

그날 유진은 그렇게 말했다. 풀멘은 작동법만 알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고개를 끄덕인 유진이 풀멘을 꺼내 둥근 원통을 촤르륵 돌렸다. 그는 언젠가처럼 원통을 옆으로 젖혀 끝이 뾰족한 쇳덩이를 꺼냈다.

“이것도 화약으로 만든 거야. 내가 있던 곳에서 화약은 모든 병기의 기본이었어.”

아리아드네의 눈동자가 놀란 듯 크게 벌어졌다가 이윽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유진의 풀멘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무기인지 잘 알았다. 그가 풀멘은 성물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풀멘이 검이나 창처럼 흔한 무기인 시대가 온다면 기사는 사라질 거라고.

“이렇게 아름다운데…….”

아리아드네는 하늘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불꽃이 터지며 나는 매캐한 냄새는 유진이 풀멘을 쏠 때 나는 냄새와 매우 흡사했다.

“화약이 발전하면 이곳도 좀 더 많은 사람이 좀 더 쉽게 죽는 세상이 되겠지.”

유진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리아드네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까? 저런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전부 없애면 아무도 죽지 않을까?’

“그렇지만 없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어. 이미 저런 것이 있다는 걸 알아 버렸으니까.”

아니, 이미 존재하는 것을 지울 수는 없다. 굴러가는 바퀴를 세울 수 없다면 바퀴가 굴러갈 길을 정돈하는 수밖에.

“아버지, 서대륙의 삼국 전쟁이 곧 끝날 거라고 하셨죠?”

레너드가 지금 아리아드네에게 이것을 보여 준 건 단순히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래. 서대륙의 승자는 모든 것을 독식할 게다. 전에 없이 강한 나라가 탄생하겠지.”

삼국 중 누가 승리하더라도 전쟁의 뒷수습은 필요하다. 페렌트는 그 기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더욱더 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겠네요. 케이루스는 우리를 지켜 낼 수 없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아리아드네가 옅은 금발을 휘날리며 말을 달렸다. 요란한 하늘의 불꽃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안쪽에서는 성의 주인을 맞이할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드디어 메르디에스 성문이 열렸다.

* * *

성문이 열린 다음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애초에 상대 전력의 절반은 화염에 휩싸여 죽었고, 남은 전력의 상당수도 리카르도가 이끄는 기사들에 의해 제압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간혹 성에 남은 사람들을 인질 삼아 목숨을 구명해 보려는 인간들이 있었다.

타앙, 탕! 어린 시종을 인질 삼아 반항하던 케이루스의 기사 하나가 풀멘에 맞아 그대로 절명했다.

“……흐윽, 오실 줄, 오실 줄 알았어요.”

케이루스 기사에게서 풀려난 시종이 레너드와 아리아드네를 보더니 오열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레너드가 말에서 내려 오열하는 시종을 다독이며 말했다.

“커티스, 어서 남은 잔당들을 제압하게. 내 사람이 죽는 꼴 난 못 보네.”

“명 받들겠습니다.”

메르디에스 기사단장 커티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커티스는 빠르게 성 내에 남은 잔당들을 제압해 갔다. 마땅한 지휘관도 없이 오합지졸처럼 뿔뿔이 흩어진 잔당들은 커티스가 이끄는 기사단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쪽도 임무 완수했지!”

“반 호수에서 도망친 잔당도 모두 처리했습니다.”

리뮈르 남매와 시안이었다.

“봤어? 보여, 보여? 나 완전 잘했다니까.”

달로아의 자랑대로였다. 반 호수를 둘러싼 숲을 태우는 불은 아직도 꺼질 줄을 몰랐다.

“이젠 좀 꺼져도 될 텐데…….”

생각보다 크게 번진 불길이 걱정스러웠다. 케이루스 잔당을 처리하는 대로 화재를 진압해야 할 듯싶었다.

“오, 이쪽이 그 훌륭한 일을 하셨다는 소르체 기사인가?”

레너드가 시안을 보며 과하게 반겼다.

“소르체의 기사는 제가 맞으나 메르디에스 성주께서 말씀하시는 훌륭한 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안이 검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레너드는 어떻게 그런 큰일을 하고도 이렇게 겸손할 수 있냐며 더욱 시안을 치켜세웠다.

“아니, 자네가 그놈 손모가지를 쓱싹했다면서!”

“1왕자 손목 말씀입니까?”

“그래, 그거!”

레너드가 두 손바닥을 짝, 부딪히며 열렬히 반응했다. 레너드의 호들갑에 시안이 부끄러운 듯 붉어진 얼굴을 슬쩍 숙였다.

“목을 날렸으면 일이 더 쉬웠을 텐데, 제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아닐세. 그렇게 쉽게 죽일 수야 있나? 우리 같이 연구해 봄세.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 소문이 날지.”

레너드가 시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하듯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눈치만 살피던 달로아가 별안간 손을 번쩍 들었다.

“메르디에스 성주님!”

레너드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달로아를 바라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메르디에스의 황금 손, 돈을 탐하는 이들의 절대적인 우상인 레너드와 첫 만남을 망쳐 버린 달로아는 내내 곤두박질친 제 이미지를 회복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이라 확신했다.

“저도 그 연구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리뮈르 공녀가 말인가?”

“그러합니다. 북쪽 지방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엄격한 형벌이 매우 많습니다. 그중 성주님께서 흡족하게 여기실 것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또박또박 말을 마친 달로아가 상기된 얼굴로 손을 내렸다. 달로아는 레너드가 원한다면 극악한 형벌을 끝도 없이 쏟아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으음, 그, 그래. 그거 고맙군.”

레너드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이게 아닌가.’

우상을 만나 긴장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평소처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진짜, 저것도 핏줄이라고…….”

나지막한 한숨 소리와 함께 뭐라 뭐라 중얼대는 달미에르의 목소리가 몹시도 거슬렸다. 달로아는 당장이라도 평소처럼 달미에르와 드잡이질을 벌이고 싶었으나 레너드 앞이어서 참았다.

아! 그 순간, 섬광 같은 아이디어가 달로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1왕자, 그 극악무도한 놈을 편히 죽일 수는 없지요. 그놈은 아주 괴롭게 죽어야 합니다. 죽일 놈 같으니!”

달로아는 카이엔을 향한 악담을 쏟아 냈다. 레너드의 두 귀가 쫑긋거리며 점점 다가왔다.

“아니, 젊은 친구가 아주 바람직해. 역시 리뮈르 대주시구먼. 자식 농사 하나는 대풍일세, 대풍이야.”

레너드가 아주 흡족한 얼굴로 찬사를 쏟아 냈다. 달로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삼켰다.

역시 어색할 땐 공공의 적을 욕하는 게 최고였다. 달로아가 레너드를 깜빡 녹여 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그때였다.

누군가가 주위 병사들을 뻥뻥 날려 대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가냘픈 체구와 곱상한 외모, 어깨에서 찰랑대는 금발을 지닌 기사가 널브러진 병사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었다.

“네 눈에도 내가 여자로 보이냐?”

“……아, 아닙―”

“왜 대답이 늦어!”

버럭 화를 낸 리카르도가 다시금 병사를 하늘 높이 날려 버렸다. 리카르도의 손에 잡히면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너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저기, 쟤 성기사단 부단장이라지 않았냐?”

리뮈르의 기사들이 그 땅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성기사들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존재였다. 사람들은 성기사라면 거룩하고 성스러운 무언가를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그런 곳의 부단장이라는 자가 저러고 있으니.

“아마도요.”

정작 리카르도를 저렇게 만든 아리아드네는 어깨를 으쓱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했다.

“이것 참, 돈 주고도 못할 구경이구나.”

레너드가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불꽃이 펑펑 터지고 있었고,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래도록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짓 두 번 하라면 전 못 해요.”

하지만 이런 일은 오늘로 끝이어야 했다. 레너드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몸속의 피가 죄다 마르는 것 같았다.

“이젠 다 끝났잖아. 잘했어.”

유진의 서늘한 손이 아리아드네의 손을 감싸 왔다. 그녀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았어. 내 집에 숨어 있는 도둑을 잡아야지. 겁도 없이 메르디에스를 팔아먹은.”

바깥의 적을 잡았으면 이제는 내부의 적을 잡을 차례였다. 아리아드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물 뒤쪽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긴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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