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끼이이익, 시에테의 별장은 오래도록 비워 둬서 그런지 문이 열릴 때마다 그런 소리가 났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들어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했다.
“아, 신시아.”
“아리아드네 님, 추수제에 참석한 남부 귀족 명단입니다.”
“수고했어.”
서류를 받아 든 아리아드네가 팔락이며 종이를 넘겨 보았다. 그때, 그녀의 볼에 깃털 같은 감촉이 내려앉았다.
“다녀왔어?”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돌려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상대는 어느새 방 안에 들어선 유진이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난 유진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중에 태연한 건 아리아드네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유진의 등장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담담했다.
“확인은 끝났고?”
“물론. 언제든 가면 돼.”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유진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서늘하고 날카롭기가 빙벽 같은 남자가 아리아드네 앞에서만 봄볕처럼 굴었다.
“이젠 정말 우리 집에 초대할게.”
아리아드네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아리아드네가 지나온 길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카르도라고 합니다. 공녀께서 말에 오르기 어려우실 듯한데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메르디에스를 떠나 엘바에서 만난 리카르도.
―메르디에스 공녀,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야?
더벅머리 가발을 뒤집어쓴 채 리뮈르의 도박장에서 만난 달로아.
―로아는 리뮈르 바깥세상을 늘 궁금해했지만, 저는 한 번도 리뮈르 바깥이 알고 싶지 않았는데……. 일 년 내내 푸르다는 메르디에스는 과연 어떤 곳일지 조금 궁금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득한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던 달미에르.
―손이 아니라 목을 잘랐어야 했을까요?
카이엔의 손을 날린 소르체의 시안까지. 의미 없는 길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에 있어도 떠나온 곳이 그리웠다.
―아리아드네 님, 저희도 데려가세요, 네?
―제가 따라가야 하는데…….
남는 것이 싫다며 투정 부리던 이블린과 줄리가.
―부디 무탈하십시오.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배웅하던 글레나가 기다리는.
―아리아드네 님, 기다릴게요. 빨리 돌아오세요!
겨울에도 찬란한 녹음이 반겨 주는 그녀의 고향 메르디에스가 미칠 듯이 그리웠다.
“우리 이젠 집에 돌아가야지.”
아리아드네의 말에 엘바의 신전에 홀로 남겨져 가족을 그리워하던 조셉도, 메르디에스 상단주인 신시아도, 연인을 두고 온 알버트도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정말 메르디에스가 바로 눈앞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집에 돌아갈 준비를 모두 마쳤다.
* * *
그날 아침은 유난히도 고요했다. 하늘이 잔뜩 흐리다 싶더니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얼굴에 떨어지더니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눈이…….”
아리아드네는 손을 뻗어 눈을 받았다. 크고 탐스러운 눈송이가 하늘하늘 손 위로 떨어졌다가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아리아드네 님, 눈이 제법 올 것 같은데요. 잠시 멈췄다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후미에서 따라오던 기사가 그렇게 말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짐꾸러미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이 끌어 내려졌다. 일행이 모조리 멈춰 서서 수레나 마차 바퀴 따위를 갈자 달로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뭐야, 다들 눈 처음 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처음은 아니라도 오랜만이니까.”
“얼마 만인데?”
“12년.”
아리아드네 대답에 순간 멈칫했던 달로아가 짐짓 뻐기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엄살은. 리뮈르에서는 얼음처럼 꽝꽝 언 눈이 하늘에서 후두둑 떨어진다고. 이렇게 나풀나풀 포근한 눈이 아니라.”
“여기는 메르디에스니까.”
지금, 아리아드네 일행은 메르디에스 성과 불과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리아드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새어 나온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눈이라면 리뮈르에 있는 동안 지겹도록 보았다. 이젠 눈이 제법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리뮈르에서는 새하얗게 물든 세상이 아름답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왜 그래?”
말머리를 바짝 붙여 다가온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머리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털어 주며 말을 걸었다.
“뭐가?”
아리아드네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제 이마를 스치는 그의 손길을 받으며 되물었다.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아서.”
아리아드네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유진의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살피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온통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유진의 눈과 마주하고 있으니 서걱거리던 가슴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나, 눈을 싫어했던 것 같아.”
언제나 호불호가 명확한 아리아드네가 하는 뜻 모를 말에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본 그날은 아리아드네의 생모 파시파에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처음으로 본 눈, 처음 맞이한 이별, 처음 경험한 죽음. 그것들은 그대로 한 덩어리가 되어 그녀 안에 똬리를 틀었다.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어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살살 문질러 폈다.
“그런데 이젠 그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 될 테니까.”
오늘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메르디에스 성에서 유진과 함께라면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염려스러운 그의 눈길이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아리아드네는 어깨를 으쓱하며 화제를 돌렸다.
“무엇보다 정말 기분 나쁜 사람은 따로 있는걸.”
아리아드네가 마치 다 산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죽상을 한 리카르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리카르도는 오늘 맡은 임무가 내키지 않는 듯 내내 저 얼굴이었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유진의 가차 없는 대꾸에 아리아드네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리아드네의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당신, 정말 괜찮아?”
“그럼. 아버지께서 선물 갖고 돌아오마, 그러셨는걸.”
이틀 전, 레너드는 기다리던 물건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냉큼 달려 나갔다.
―다음에는 집에서 만나자꾸나. 아버지가 기가 막힌 생일 선물을 가지고 돌아갈 테니.
그러고 보니 곧 아리아드네 생일이었다.
‘무슨 선물을 주시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시 출발할 준비를 끝냈는지 기사가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왔다.
“아리아드네 님, 방설(防雪) 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그럼 가 볼까? 다들 오늘 밤은 집에서 자게 해 줄게.”
아리아드네의 그 말에 멈췄던 일행이 다시금 메르디에스 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메르디에스의 성에도 눈이 내렸다. 셀레나는 유월절을 맞이해 메르디에스 성에 주둔 중인 병사들에게 저민 말고기와 약간의 술을 내렸다.
케이루스의 병사들은 말없이 저민 말고기를 술과 함께 씹어 삼켰다. 유월절에 말고기를 먹는 것에는 이동 수단인 말을 먹으며 도망쳐야 했을 정도로 절박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갑자기 눈이 내리자 몇몇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셀레나의 신임을 얻은 뒤로 수잔은 더욱 자유롭게 인질들이 갇힌 방을 드나들게 되었다.
“린즈 부인,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너도 몸조심하렴.”
할 일을 모두 마친 수잔이 글레나에게 인사하고 몸을 돌려 방에서 나왔다. 달칵, 인질들이 갇힌 방문을 연 수잔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다 막 그곳에서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앗, 죄, 죄송합―”
맞은편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수잔은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를 작게 부딪치고 말았다. 당황한 수잔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
상대는 지나치리만큼 아무 반응이 없었다. 슬쩍 고개를 든 수잔은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리, 리스벨 아가씨.”
수잔과 부딪힌 사람은 바로 캐롤린 리스벨이었다. 캐롤린의 보랏빛 눈동자가 무감하게 수잔을 훑어 내렸다.
“앞은 잘 보고 다니도록 해.”
“주, 주의하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수잔이 서둘러 캐롤린에게서 멀어졌다. 캐롤린은 멀어지는 수잔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이 펑펑 내리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메르디에스에 눈이 내리는 건 12년 만의 일이었다.
―리아, 이제는 내가 지켜 줄게. 파시파에 님 대신 내가 지켜 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12년 전, 캐롤린은 그런 약속을 했었다.
“리아…….”
캐롤린의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익숙한 이름이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그녀는 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도 모를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잠시간 창밖을 바라보던 캐롤린은 곧 그 자리를 떠났다.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든 풍경 사이로 스며들듯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다. 세상이 온통 고요 속에 잠든 날이었다.
* * *
물이 모두 사라진 호수에도 눈은 공평하게 내렸다. 오늘도 반 호수에는 케이루스의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성을 점령한 인력 중 절반은 반 호수에 투입되었다.
반 호수의 경계를 살피던 옥토가 몸을 부르르 떨며 옆에 있던 펜타스에게 물었다.
“좀 으스스하지 않냐?”
물이 사라진 호수를 둘러싼 숲에는 죽은 동물들로 가득했다. 휘이잉,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같아 소름이 쭈뼛 돋았다.
“또 헛소리.”
펜타스가 지겹다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하고 피곤한 날들이었다. 옥토의 장난질에 대꾸할 기력조차도 남지 않았다.
“넌 사람이 너무 차가워.”
옥토가 말고기와 함께 지급된 술을 꿀떡 삼켰다. 찔끔찔끔 마시다 보니 요의가 느껴졌다. 추운 게 싫어 꾹 참아 보았지만 그럴수록 요의만 심해졌다.
“나 물 좀 빼고.”
그 말과 동시에 반쯤 바지춤을 풀어낸 옥토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숲속으로 들어간 옥토는 몸을 부르르 떨며 신나게 오줌을 휘갈겼다. 오래 참아서 그런지 오줌 줄기가 유난히도 길었다.
옥토의 다리 사이에서 떨어진 오줌 줄기가 숲 곳곳에 널린 동물의 사체 위로 떨어졌다.
눈이 내려 주위가 유독 조용했다. 그래서였을까. 옥토는 오줌이 떨어지며 들리는 소리가 어딘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대로 돌아섰을 텐데 술을 마신 뒤라 난데없는 호승심이 솟아났다.
옥토는 숲속에 널린 동물 사체를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진즉 딱딱하게 굳었어야 할 동물 사체들이 옥토의 손길에 따라 꿀렁꿀렁 움직였다.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옥토가 허리춤의 칼을 꺼내 사슴의 배를 갈라 보았다.
주우욱, 내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웬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체가 흘러나오며 확 퍼진 냄새는 옥토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옥토는 사슴의 배에서 흘러내린 액체를 손에 묻혀 조금 더 자세히 냄새를 맡아 보았다. 투명한 액체에서는 쇠에서 나는 듯한 비릿하고 싸한 냄새가 났다.
“안, 안 돼, 어서 펜타스한테 알려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옥토가 펜타스를 향해 내달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피잇, 갑자기 날아든 화살이 옥토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옥토는 화살이 스친 제 볼을 감쌌다. 화살이 지나간 자리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열감이 느껴졌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조금 전 그를 스쳐 지나간 것은 그냥 화살이 아니라 불화살이었다. 옥토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파파파팍, 갑자기 사방에서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화살은 반 호수를 지키는 병사들을 노리지 않았다. 불화살이 노린 것은 이미 죽은 채로 호수 주변에 널려 있는 동물들이었다.
화르르륵! 동물의 사체에 화살이 박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옥토는 제 손에 묻은 투명한 액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름이었다. 이 숲 곳곳에 널브러진 동물 사체들은 그 속에 기름을 가득 품고 있었다. 이곳에는 수백 개의 기름통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불이 붙은 기름 위로 눈이 내렸다. 퍼엉, 펑펑, 펑! 뜨거운 기름과 만난 눈은 순식간에 수증기로 변해 거센 폭발음을 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옮겨붙은 불은 삽시간에 숲 곳곳으로 번졌다.
“침입이다! 적이 쳐들어왔다!”
“적을 찾아 죽여라!”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옥토에게는 아득하게만 들렸다. 새빨간 화염이 그를 덮쳤다. 옥토의 몸은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숫자 8이라 불렸던 검은 달은 그렇게 사라졌다.
“……옥토.”
펜타스는 화염에 휩싸인 숲을 보며 중얼거렸다. 옥토가 오줌이 급하다며 사라진 방향이었다.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불은 삽시간에 숲 전체를 집어삼켰다. 숲을 지키던 케이루스의 병사들은 그대로 화마에 스러져 갔다.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수증기와 닿을 때마다 불은 폭발음을 내며 더욱 크게 번졌다. 기름으로 인한 화재라는 뜻이었다.
파파파팟! 다시금 쏘아진 화살이 곳곳에 널린 동물들을 맞췄다. 화르륵, 퍼엉, 펑! 펑! 새로운 불길이 시작되는가 싶기 무섭게 눈과 만난 불은 무서운 폭발음을 내며 사방으로 번졌다.
“……대체 어디냐?”
펜타스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찾아 헤맸다.
파팟! 탁! 펜타스가 자신을 향해 날아온 화살을 쳐 낸 그 순간이었다. 큰 나무 뒤에서 마치 불꽃 같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저곳이구나.’
궁수의 위치를 확인한 펜타스는 그곳을 향해 은밀히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 숲을 태우는 불처럼 강렬한 주황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녀 한 쌍이 있었다.
“미에르, 서쪽으로 10시 방향.”
여자의 말에 그 곁의 남자가 시위에 활을 걸어 날렸다. 타앙! 남자의 손에서 날아간 화살이 다시금 숲에 불을 붙였다.
“어떤 멍청이가 우리 기름통을 이렇게 골고루 뿌려 준 거래? 고맙게.”
여자가 불이 붙은 숲을 바라보며 쉼 없이 재잘거렸다. 자신이 위험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였다.
‘너라도 데려가야겠다.’
펜타스가 등을 돌린 여자를 향해 검을 내리친 그때였다. 서걱! 그의 귓가에 종이를 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하얀 눈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내가 저 여자를 베었던가?’
하지만 펜타스의 손에 들린 칼은 여전히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펄럭,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시야에서 흔들렸다. 그의 뒤에서 나타난 여자가 피 묻은 칼을 가볍게 털었다.
‘어, 언제, 다른 기척은 조금도 느끼지 못…….’
펜타스는 그제야 눈 위에 떨어진 피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피를 흘린 건 바로 자신이었다.
“정녕, 우리를 버리셨습니까…….”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은 펜타스는 그대로 숨이 끊겼다.
“고마워, 시안.”
“아닙니다.”
달로아의 인사에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시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 시안의 반응에 픽, 웃음을 지은 달로아가 다시 제 옆의 달미에르를 재촉했다.
“아무 데나 쏴. 사실 널린 게 동물 사체라서, 어디를 쏘나―”
파파팟, 말없이 날아간 달미에르의 화살이 그대로 케이루스의 병사들을 꿰뚫었다.
“움직이지 않는 동물 사체야 네가 위치를 알려 줘야 한다지만 사람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지. 살아 움직이는 것에서는 소리가 나니까.”
“시안, 봤어? 내 동생 솜씨!”
달미에르의 활약에 달로아가 제법 뿌듯한 얼굴로 뻐기듯 시안을 돌아보았다. 피융! 퍽, 퍼버벅! 시안이 날린 화살은 달미에르보다 배는 멀리 날아가 사람과 동물을 동시에 꿰었다.
“와― 신궁이다, 신궁.”
달로아가 질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네?”
폭발음 때문에 무슨 말인지 듣지 못한 시안이 달로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달로아가 시안의 손에 들린 활을 턱으로 가리켰다. 네 활 솜씨가 죽여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그 턱짓을 오해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럽다는 듯 활을 내려놓았다.
“활은 손에 익지 않아서…….”
“너, 일부러 그러니?”
“네?”
시안은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리카르도에 이은 새로운 눈치 강자의 출현이었다.
“메르디에스에 눈치도 팔던가? 눈치 없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달로아는 어쩐지 답답해져 눈을 한 움큼 잡아 가슴에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시안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됐다, 됐어. 동생아,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것 같아.”
달로아가 한숨을 내쉬며 달미에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너지. 나는 내 역할 충분히 하고 있어.”
달미에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달로아와 선을 그었다. 동생의 얄미운 대답에 달로아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티격태격하는 남매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을 마친 시안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새빨간 화염이 달로아가 있는 근처까지 거세게 번져 왔다. 새빨간 불티가 탁탁 날아들었다.
“잊을 수 없는 유월절이 되겠군.”
달로아가 화염에 휩싸인 숲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메르디에스 탈환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