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48)
  • * * *

    수잔은 온몸이 쇠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그녀는 몹시 지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몸의 피로보다도 더 힘든 건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정신을 잃게 만든 ‘피피’를 성 안에 들인 장본인이었으니까.

    수잔은 그 공을 인정받아 운신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셀레나에게도 성의 일을 잘 아는 하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잔이 주로 하는 일은 억류당한 귀족들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메르디에스 내정을 관리하는 글레나와 마주한 날이면 죄책감으로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힘든 하루가 이렇게 또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수잔은 그녀의 방에 자리한 남자를 발견하고는 제 하루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케인, 왜 네가 내 방에 있어?”

    새된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수잔, 내 말 좀 들어봐.”

    케인이 수잔의 손목을 붙들며 애원했다. 수잔은 케인의 손을 뿌리치며 양 귀를 막았다.

    “싫어.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숨소리조차도 거짓이잖아!”

    한때는 케인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 적도 있었다. 경비대 소속의 케인과 사귀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케인을 만났던 것이 죽고 싶을 만큼 후회스러웠다.

    “나가. 당장 내 앞에서 꺼져! 널 좋아했던 나까지 한심해질 지경이니까.”

    수잔이 방문을 가리키며 돌아서자 화가 난 케인이 그녀를 향해 소리 질렀다.

    “셀레나에게 홀려서 피피를 성 안에 들인 건 너야. 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그래, 내가 그랬어! 셀레나의 꾐에 빠져서 내가 그랬다고!”

    홱 돌아선 수잔이 케인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였을까? 셀레나의 가게에 간 하녀가 나뿐이었던 것도 아닌데.”

    “…….”

    “그건 다 너 때문이잖아.”

    수잔은 밤마다 생각했다. 셀레나가 왜 하필이면 자신을 택했는지를.

    ―무엇을 묻고 싶어서 왔나요?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 케인이라고. 성의 경비로 일하는 사람인데…….

    ―경비대 소속의 케인, 이란 말이죠?

    셀레나는 처음부터 케인을 알고 있었다. 셀레나가 수잔을 선택한 건 그녀가 케인의 연인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케인이 메르디에스가 아닌 다른 주인을 섬긴 건. 그것을 생각하면 수잔은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 때문에 그 여자가 나를 선택한 거잖아.”

    케인을 쏘아보는 수잔의 눈에 벌건 핏발이 섰다.

    “그래. 네가 배신자 따위를 만나서 그런 일을 하게 된 거야. 그런데 그러면 뭐가 달라져?”

    “뭐?”

    “우린 이미 배신자라고! 메르디에스에서 우리가 있을 자리는 없어. 잘 생각해 봐. 그나마 셀레나가 우리를 받아 주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케인은 그 말을 끝으로 수잔의 방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수잔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걸까.

    “꺼져!”

    케인이라고 생각한 수잔은 소리를 내지르고는 귀를 막았다. 똑똑똑,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벌떡 일어난 수잔은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꺼지라고 했잖아!”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잔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방문을 닫고 그 앞에 주저앉았다.

    똑똑똑,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수잔은 그제야 눈치챘다. 소리는 등 뒤의 문이 아니라 벽 너머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누, 누구세요?”

    수잔이 조심스럽게 묻자 스르릉 소리를 내며 벽이 열렸다. 벽 뒤에서 나타난 사람을 본 수잔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런 수잔을 내려다본 여자가 말했다.

    “네 이름이 수잔이라고 했던가?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수잔은 멍청하게 여자를 올려다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톡톡, 셀레나의 손톱이 책상을 두드렸다. 책상 위에는 동그랗게 말린 자국이 남은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톡토독, 다시금 그녀의 손톱이 책상 위를 두드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편지가 겨우 이런 것이라니.

    셀레나는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 얇은 종이가 볼품없이 구겨졌다.

    릭센의 왕궁에서 카이엔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곧 원군이 도착할 테니 퇴각하지 말고 메르디에스 성에 남아 최대한 버티라는 내용이었다. 시기도 규모도 알려 주지 않고 그저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카이엔은 제 생각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법이 없었다. 다른 이의 의견을 듣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것만이라면 이렇게까지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을 터. 서신의 말미에는 협박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이 적혀 있었다. 셀레나는 마지막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검은 달은 영원한 어둠 속으로.”

    종이를 쥔 손과 어깨가 떨렸다. 셀레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직접 이 말을 했을 카이엔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생생했다.

    지독히도 오만하고 이기적인 케이루스의 주인.

    검은 달의 수장이 그녀에게 죽으라는 건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녀 또한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렇지만 그들을 구원할 케이루스의 주인이 그래서는 안 되었다. 검은 달에게 케이루스의 주인은 신과 그들을 연결하는 사제였으니까.

    검은 달로 태어난 셀레나는 피아(彼我)를 구분하기도 전에 충성을 강요받았다. 케이루스의 영광에 쓰일 수 있다면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지금 제 꼴은 뭔가. 버림받은 개와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아무 쓰임도 되지 못하고 버려질 처지에 놓여 있었다.

    “폐하는 제깟 놈이 무슨 폐하야.”

    검은 달조차 복속시키지 못하는 케이루스의 주인이 무슨 왕이야. 셀레나는 이죽대며 뇌까렸다.

    “믿음을 버린 신도는 신 앞에서도 무릎 꿇을 필요가 없지.”

    셀레나는 더 이상 케이루스의 검은 달로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아주지 않는 주인을 위해 헌신하는 건 지긋지긋했다. 토토독, 다시금 그녀의 손톱이 책상을 두드렸다.

    ‘검은 달을 떠나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역시 돈이었다. 돈이라면 이곳에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메르디에스의 본성이었으니까.

    복도를 장식한 장식물이나 곳곳에 널려 있는 물건 몇 개만 잡아도 한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해?’

    막상 그렇게 하려니 검은 달이 자신을 잡으러 올 일이 걱정이었다.

    ‘또 무엇이 필요하지?’

    셀레나가 초조하게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였다. 똑똑,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셀레나 님, 저 케인입니다. 수잔과 함께 들었습니다.”

    케인이라면 메르디에스 경비대 소속의 남자였다. 제법 오래전부터 검은 달이 회유하여 쏠쏠하게 써먹은 자였다. 수잔은 메르디에스 성의 하녀로 셀레나의 암시에 걸려 피피를 이곳에 들인 여자였고.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 케인이라고. 성의 경비로 일하는 사람인데…….

    제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말하던 것이 눈에 선했다.

    “들어와.”

    셀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달칵 소리와 함께 수잔과 케인이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

    “드디어 마음을 정했어?”

    셀레나의 물음에 수잔의 어깨가 파드득 떨렸다. 케인더러 수잔을 회유하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검은 달을 버리기로 한 지금은 아무 필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도 수상해 보일 테니까.’

    셀레나는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야 했다. 그저 적당히 맞장구나 쳐 줄 요량으로 수잔을 힐끗 바라보았다. 셀레나와 눈이 마주친 수잔이 큰 결심을 한 듯한 태도로 한 발 내디뎠다.

    ‘이제 와서 저래 봤자…….’

    셀레나는 수잔이 무슨 말을 하든 적당히 상대하고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먼저 약속해 주세요. 이번 일만 끝나면 저와 케인이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하지만 하녀의 도 넘은 맹랑한 요구는 셀레나의 심기를 거슬렸다. 피식, 조소를 머금은 셀레나가 케인을 보며 물었다.

    “네 연인에겐 아직도 내가 입술연지나 파는 떠돌이 장사치로 보이나 보지?”

    “그, 그게 아니라…….”

    당황한 케인이 더듬대며 변명을 늘어놓는데 수잔이 성큼 다가와 셀레나의 시야를 가렸다.

    “저와 이야기하시던 중이었어요.”

    유순하게만 보였던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쭉정이 같은 남자 쪽보다야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약속, 안 해 주실 건가요? 그렇다면 저도 더는 도와드릴 수 없어요.”

    수잔은 마주 잡은 두 손을 덜덜 떨면서도 셀레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배포는 이쪽이 더 좋네. 빈손으로 도망가도 굶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셀레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딴에는 칭찬이라고 꺼낸 말이었다.

    “빈손이라니요? 평생 일하지 않아도 좋을 돈이 제 손에 떨어지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하녀는 제법 앙칼지게 대들었다. 흐음, 셀레나는 턱을 문지르며 수잔을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는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약속하지. 이번 일이 끝나면 꿈에서도 만져 보지 못했을 돈을 주지. 단, 네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말이지만.”

    교차한 손 위로 턱을 괸 셀레나가 수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과 마주하려니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긴장한 수잔은 더듬거려 케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조금 놀란 눈으로 수잔을 보던 케인이 손을 마주 잡아 왔다. 마치 자신이 옆에 있으니 힘을 내라는 듯.

    “케인 말이 맞아요. 전 이미 너무 멀리 왔어요. 제게는 이게 마지막 기회겠죠.”

    수잔은 어젯밤 자신을 찾아왔던 여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곧 메르디에스의 진짜 주인이 돌아올 거야. 네가 한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지금뿐이야.

    “그러니까 저도 최선을 다할 거예요.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잘 해낼 수 있겠어? 그 여자가 너를 신뢰하도록 만들어.

    수잔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지금이라도 전부 다 내던지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수잔은 꿋꿋이 버티고 서서, 자신을 뜯어보는 셀레나를 노려보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그래. 나는 네게 새로운 신분과 평생 만지지 못할 돈을 줄 예정인데, 넌 내게 뭘 줄 생각이지?”

    수잔은 제 손에서 떨어진 땀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셀레나가 제 속을 모두 들여다볼 것만 같아서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메르디에스의 보물이 있는 곳을 알아요.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그 순간, 셀레나의 두 눈이 잠시 커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금붙이나 보석 몇 개가 아니라 메르디에스의 보물이라니. 그것만 있다면 검은 달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알고 있다면 왜 네가 먼저 그것을 차지하지 않았지?”

    셀레나는 수잔이 내던진 이야기를 덥석 물지 않고 탐색하듯 질문을 던졌다.

    “기사도 되지 못하는 경비대 소속의 애인과 값비싼 보물을 훔쳐서 달아나라고요? 성을 나서기도 전에 창칼에 꿰인 신세가 되겠죠. 전 죽고 싶지 않아요.”

    수잔이 제법 단호한 어조로 대꾸했다.

    “무엇보다 저는 그런 보화를 처리할 방법도 알지 못하고요. 제게는 어디서나 편하게 쓸 수 있는, 아무 문제 없는 돈이 필요해요.”

    하긴, 진귀한 물건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치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추적당하지 않도록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이들이야 있지만.

    ‘평범한 하녀가 그런 자들을 알 리 없지.’

    셀레나는 당장이라도 수잔의 멱살을 끌고 앞장서라고 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초조함을 드러내는 것은 제 약점을 내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문의 보고(寶庫)라니, 하녀가 알 만한 정보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중요한 곳이라도 하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어요. 다만 문을 여는 사람이 제가 아닐 뿐이죠.”

    “문을 열 수 없다고? 지금 장난해?”

    셀레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놀란 듯 눈을 홉뜬 수잔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멍청이 같은 실수를…….’

    셀레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성 안에 열쇠가 있을 거예요. 열쇠 모양을 기억해요.”

    셀레나가 성을 점령했을 때 수거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수잔의 발치에 던졌다.

    “이 열쇠 중에 네가 말하는 그 열쇠가 있어야 할 텐데.”

    열쇠 꾸러미가 절그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수잔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열쇠 모양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셀레나가 심술을 부리는 것 같은 말투로 덧붙였다.

    “그게 아니면 내가 널 도와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야.”

    멈칫 몸을 굳힌 수잔이 다시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열쇠 꾸러미의 열쇠를 모두 확인한 수잔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꾸러미는 없나요?”

    셀레나의 손에서 묵직한 열쇠 꾸러미가 떨어졌다. 어찌나 성이 복잡하고 거대한지, 열쇠 중 절반은 아직도 어느 문을 여는 것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수잔은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열쇠 모양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손이 떨려서 자꾸 열쇠를 놓쳤다.

    ―열쇠 손잡이에 마름모꼴 모양의 루비가 박힌 게 있을 거야. 그게 그곳 열쇠야.

    분명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마름모꼴 모양의 루비, 마름모꼴 모양의 루비…….’

    수잔은 속으로 계속 중얼거리며 열쇠 손잡이에 마름모꼴 모양의 루비가 박힌 것을 찾아 손을 놀렸다.

    ‘찾아내지 못하면, 그러면…….’

    눈에서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이 뚝뚝 떨어져 시야를 가렸다. 이를 닦아 내며 다음 열쇠로 넘긴 순간이었다.

    “아, 찾았다…….”

    손잡이에 마름모꼴 모양의 루비가 박힌 열쇠였다. 울컥,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가져와.”

    수잔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셀레나의 손에 열쇠를 쥐여 주었다.

    “이게 그 열쇠란 말이지? 하녀로 두기엔 아까운 인재인걸. 계속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고?”

    열쇠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셀레나가 제법 너그러워진 말투로 물었다. 수잔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로 했잖아요? 전 험하게 죽기 싫어요.”

    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낚아 보려 던진 말이었다. 수잔이 냉큼 그러겠다고 했으면 도리어 의심스러웠겠지만.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럼 먼저 확인부터 해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셀레나는 수잔을 앞세웠다. 수잔은 보물 창고라면 으레 떠올리는 지하 깊숙한 곳이나, 본성 높은 곳이 아니라 성곽과 가까운 외진 곳으로 향했다.

    셀레나는 불안한 마음에 으름장을 놓았다.

    “날 속이는 거라면 재미없을 거야. 네가 잘못 안 거라 해도 마찬가지고.”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셀레나의 협박에도 수잔은 제법 대담하게 굴었다. 덜덜 떨리는 손까지 감추지는 못했지만.

    수잔은 녹슨 무기나 오래된 물건을 쌓아 두는 창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창고 안쪽에는 작은 문이 달려 있었는데, 수잔은 그곳을 가리켰다.

    “여기예요.”

    수잔이 가리킨 곳을 가만히 쳐다보던 셀레나가 픽하니 웃으며 물었다.

    “대체 열쇠를 어디 꽂으라는 거야?”

    “어, 분명 여기였는데…….”

    하지만 그곳에는 손잡이만 있을 뿐 열쇠를 꽂는 자리가 없었다. 당황한 수잔이 손잡이를 잡은 채로 덜덜 떨었다.

    “됐어. 알 것 같아.”

    셀레나가 손잡이를 비틀어 잡아당겼다. 그러자 손잡이에 숨겨진 열쇠 구멍이 드러났다. 검은 달로 평생을 살아온 그녀였다. 이 정도 속임수는 어린애 손목 비틀기보다 쉬웠다.

    열쇠 구멍에 수잔이 찾은 열쇠를 꽂자 짤깍, 맞물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빙고!’

    셀레나는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를 잡은 손끝에서부터 혈관이 팔딱팔딱 날뛰었다. 끼이익, 뒤틀린 나무문이 비명을 질렀다. 나무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무겁다 싶었더니 안쪽은 철로 된 문이었다.

    창문이 없는 내부는 어둑했다. 셀레나가 연 문으로 새어 든 빛이 희미하게 안을 밝혔다.

    내부를 확인한 셀레나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아아, 셀레나의 입에서는 흐느낌을 닮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너무 가슴이 벅차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페렌트의 왕 같은 건 아무나 되라지.’

    이곳에 있는 것만 제 차지가 된다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불안한 듯 곁을 서성이던 수잔이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제 가치가 증명되었나요?”

    그걸 말이라고. 셀레나는 지금 수잔을 껴안고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충분히.”

    그제야 수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창고의 안쪽 문이 열리며 끼이이익, 무언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물에 눈이 먼 사람들은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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