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48)
  • * * *

    톡톡, 톡톡톡. 일정하게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리아드네가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흰 깃털에 붉은 반점이 찍힌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틸레’라고 했던가?”

    방 안을 크게 도는 흰 비둘기를 힐끗 본 유진이 물었다.

    “맞아. 메르디에스의 연락망을 담당하는 귀한 몸이지.”

    아리아드네가 손을 뻗자 틸레가 그 위로 우아하게 내려앉았다. 흰 비둘기는 마치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아리아드네 손에 제 부리를 문질렀다.

    “고생했다고 그러는 거니?”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턱 아래를 쓰다듬자 틸레가 부리를 벌려 손바닥에 무언가를 뱉어 냈다.

    “…….”

    틸레가 물고 있던 축축한 것이 아리아드네 손바닥에 떨어지자 유진은 저도 모르게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제 손바닥을 내려다본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틸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오늘은 특식을 줘야겠는걸.”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작은 통에서 견과류를 꺼내 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틸레는 부지런히 고개를 까딱이며 견과류를 쪼아 먹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리아드네가 유진에게 말했다.

    “전에 말한 적 있었지. 틸레는 메르디에스에서 특별히 개량한 품종이라고. 이 아이가 왜 특별한지 알아?”

    유진은 정신없이 견과류를 쪼아 먹는 눈처럼 하얀 새를 골똘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영리해서?”

    서신을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도로 훈련된 전서구는 금보다도 귀했다.

    “뭐, 그것도 맞지만 틸레는 보기보다 사납거든. 이렇게 다른 전서구의 편지를 약탈해 와.”

    웃으며 대답한 아리아드네가 도르르 말린 종이를 펼쳤다.

    “비둘기가?”

    “응. 기특하지?”

    “대단한 전력이네.”

    진심으로 감탄한 유진의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틸레가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유진은 그런 틸레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납기만 한 게 아니라 눈치도 대단한―”

    아리아드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유진이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왜 그래? 나쁜 소식이야?”

    틸레가 약탈해 온 서신을 보는 아리아드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별거 아니야. 어쩌면 이렇게 변함이 없을까 싶어서.”

    틸레가 약탈한 서신 귀퉁이를 손으로 짚은 아리아드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기 이 부분 말이야.”

    유진이 아리아드네가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검은 달은 영원한 어둠 속으로.”

    아리아드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가 가리킨 부분을 읽어 내렸다. 유진은 어렵지 않게 글귀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소르체의 땅에서 만난 케이루스의 수족들은 하나같이 손톱 밑에 그믐달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달이 그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 글귀는 카이엔이 메르디에스 성에 잠입한 제 수족들에게 내리는 경고였다. 실패의 대가는 오로지 목숨으로 치르라는.

    “왜 모를까. 사람은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닌데…….”

    그 말을 하는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언뜻 후회와 자책 같은 감정들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유진은 연기처럼 금세 사라진 것들의 존재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아리아드네는 때때로 아득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그는 덜컥 불안해졌다.

    “당신은 내게 그래도 돼.”

    “뭘?”

    아리아드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환한 달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얼마든지 나를 이용해. 내게 그럴 만한 것이 남아 있다면.”

    그가 달빛이 쏟아진 자리마다 입술을 눌렀다. 눈을 감은 채로 비가 내리는 것 같은 키스 세례를 받던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천천히 얽어 왔다.

    “당신은 존재 자체로 이미 충분해.”

    그렇게 대답하며 천천히 눈을 뜬 아리아드네가 유진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맞닿은 여린 살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내가 일을 너무 많이 시켰나, 입술을 문 채로 웅얼거리던 그녀의 말은 그대로 유진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달콤하게 감겨드는 부드러운 혀에 불안마저도 녹아들었다. 이것이 그를 죽이는 독이라 해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녀 곁에 남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악마에게 심장을 바쳐서라도― 아니, 불멸의 영혼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내가 가진 건 당신뿐이니까.”

    유진의 낮은 목소리가 서늘한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 * *

    해가 지고 주위가 어둑해지자 하녀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불을 켜 드리겠습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하녀가 등잔에 불을 붙였다.

    “고맙구나, 수잔.”

    꼿꼿한 자세로 창밖을 보고 있던 글레나가 불을 붙이고 막 방을 나서려는 하녀에게 말했다. 놀란 듯 고개를 든 하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차올랐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수잔은 그대로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셀레나의 암시에 걸려 피피라는 선인장의 꽃을 연회장에 들인 사람이 바로 수잔이었다.

    ‘수잔이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벌어졌을 일, 수잔을 탓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니.’

    글레나는 종일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어둠에 잠긴 메르디에스 성에 하나둘 불이 밝혀졌다. 해가 지고 불을 밝히는 이때는 경계를 서는 자들의 교대 시간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갇혀 지내야 하나요?”

    같은 방에 감금된 셸란 자작 부인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연회에 참석한 가족들은 무사한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군요.”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이는 스타드 백작이었다. 그녀는 가족들과 떨어진 것이 못내 불안한 모양이었다.

    “부군과 아드님께서는 모두 무사하실 거예요.”

    셸란 자작 부인이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셸란 자작가와 스타드 백작가 모두 메르디에스의 오래된 우방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대접이라니, 글레나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성에 비축된 물자가 넉넉해 인질들의 처우가 나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창밖에서 시선을 뗀 글레나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근래 성을 경계하는 인력들의 배치가 자주 바뀌더군요.”

    “그렇단 말씀은…….”

    글레나의 말뜻을 좀 더 빨리 눈치챈 건 스타드 백작 쪽이었다.

    “조만간 어떤 변화가 있을 겁니다.”

    글레나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력 배치에 조정이 있다는 것은 수성 전략이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셸란 자작 부인이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풀려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 변화가 우리에게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아직 알 수 없지요. 부디 좋은 쪽이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빼앗은 성을 지키지 못하고 퇴각할 때, 간혹 성에 남은 인질들을 해치기도 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변화가 인질들에게 좋은 것이라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방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고요한 정적 사이로 고인 물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똑, 또옥, 똑똑, 똑, 또옥, 똑똑.

    당연하게도 이곳에는 고인 물도, 물이 새는 곳도 없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사람들 사이로 긴장감이 퍼져 나갔다.

    똑, 또옥, 똑똑, 똑, 또옥, 똑똑.

    다시금 소리가 났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방 안이 아니라 벽난로 너머에서 들려왔다.

    똑, 또옥, 똑똑, 똑, 또옥, 똑똑.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는 것처럼 물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아, 벌써 해만 지면 이렇게 춥다니까요.”

    긴장감을 깨뜨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셸란 자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셸란 자작 부인께서는 줄곧 남부에 사셨으니까요.”

    “스타드 백작님은 뭐 다른가요?”

    “그렇군요.”

    스타드 백작의 딸로 태어난 그녀 또한 한 번도 남부를 벗어난 적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스타드 백작이 양팔을 쓸어내리며 글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도 좀 싸늘하군요. 린즈 부인, 벽난로의 불을 좀 봐 주시겠어요?”

    “네, 그러지요.”

    글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근처로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절그럭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났다. 벽난로 옆에 세워진 부지깽이를 들고 불이 붙은 나무 사이를 한차례 휘젓자 화르륵 불길이 더 거세졌다.

    글레나는 끝에 묻은 재를 털어 내기 위해 타앙, 탕, 타탕, 부지깽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그러자 벽난로 너머에서 마치 화답하듯 똑, 또독,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탕!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부지깽이를 털어 낸 글레나가 그것을 벽난로 옆에 곱게 세워 두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불을 높였으니 오늘 밤은 괜찮을 겁니다.”

    글레나의 말에 셸란 자작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벌써 따뜻해진걸요.”

    거짓말처럼 물방울 소리가 멎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벽난로의 불길만이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를 뿐이었다.

    * * *

    “점점 늘어나는군.”

    반 호수의 경비를 책임진 펜타스가 동물들의 사체로 새까맣게 뒤덮인 호수 바닥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디 호수였던 곳에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온갖 희귀한 동물들의 사체가 대신하고 있었다.

    “정말 이걸 다 옮기라고?”

    옥토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

    “아니, 대장 좀 미친 거 아니야?”

    옥토는 매일같이 쌓이는 동물의 사체를 치우라는 셀레나의 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장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아니, 반 호수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렇지. 지금 성은 텅텅 빈 거나 마찬가지라고.”

    펜타스의 만류에도 옥토의 불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셀레나가 끌고 온 검은 달과 케이루스의 병사들은 빠르게 성을 점령하기 위한 선발대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아도 빠듯한 인력인데 셀레나는 반 호수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인력을 투입했다. 한정된 인력을 한곳에 집중하면 다른 곳은 필연적으로 비게 된다.

    반 호수로 사람들을 빼 오느라 정작 메르디에스 성을 지키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텅텅 빈 거나 마찬가지라는 옥토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동물 사체나 치우자고 또 사람을 빼 와?”

    셀레나는 그것도 모자라 호수 바닥에 쌓이는 동물 사체들을 모조리 치우라며 병사들을 보내 왔다. 이대로라면 수성은커녕 제대로 된 퇴각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성을 점령한 것도 셀레나 님의 공이야. 셀레나 님께 생각이 있으시겠지.”

    펜타스는 불평불만을 쏟아 내는 옥토를 무시하며 사체를 옮기는 병사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해가 지기 전에 빨리빨리 움직여. 겨울 해는 짧다.”

    옥토와 펜타스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동물의 사체를 옮기기 위해 움직였다. 검은 물소의 몸에 두꺼운 밧줄을 칭칭 동여매고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검은 물소를 끌어당겼다.

    “왜 이렇게 무거워? 팔 빠지겠네.”

    “검은 물소는 그 속이 죄다 돌이기라도 한가. 꿈쩍도 안 하네.”

    검은 물소를 끌어당기던 병사들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휴, 이걸 대체 누가 갖다 놓은 거야.”

    누군가 불평하듯 내뱉은 말에 밧줄을 손목에 감던 병사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못 들었어? 아무 기척도 없이 땅에서 갑자기 솟아났다는―”

    “거기, 쓸데없는 말을 할 시간이 있나 보지?”

    하지만 병사의 이야기는 펜타스의 불호령에 뒷말이 뚝 잘린 채 끊기고 말았다.

    “아, 아닙니다.”

    병사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밧줄을 어깨에 메고는 검은 물소를 끌어당겼다. 구령에 맞추어 조금씩 끌어당긴 검은 물소가 땅 위로 올라오자, 그것을 또 질질 끌고는 숲속으로 옮겼다.

    “아구구구, 나 죽는다.”

    어깨에 멘 밧줄을 바닥에 내려놓자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간신히 한 마리 옮겼네.”

    “어휴, 크기도 크다. 이렇게 크니 그렇게 무겁지.”

    숲에는 호수 바닥에서 끌어낸 동물들의 사체가 이미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전부 몇 마리야?”

    밧줄에 쓸린 어깨를 주무르며 잠시 쉬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재촉해 왔다.

    “아직도 새까맣게 남았어.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 없다고.”

    호수 바닥에 남은 동물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숨을 내쉬었다가 깊게 들이마시던 병사가 킁킁대며 주위 냄새를 맡았다.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그럼 죽은 동물이 이렇게 쌓여 있는데 아무 냄새도 안 나겠냐?”

    “아니, 썩어서 나는 쿰쿰한 그런 냄새 말고 다른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다시 킁킁대며 냄새의 정체를 밝혀 보려 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가 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와. 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옮겨 둬야지.”

    “오늘 저녁에도 배때기에 기름칠할 수 있으려나. 진짜 먹는 것 하나 보고 산다.”

    병사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메르디에스 성은 물자가 풍부해 곳간에 고기와 술이 넘쳐났다. 육즙이 좌르르 흐르는 고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졌다.

    “어서 안 와?”

    다시금 내지르는 소리에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갑니다, 가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동물들의 사체만 남은 숲속에 바스락 소리와 함께 유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쯤이면 충분하겠군.’

    숲속 가득 쌓인 동물의 사체를 내려다보던 유진은 다시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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