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48)
  • * * *

    메르디에스는 겨울조차도 푸르다는 말이 정말이었다. 반 호수를 둘러싼 숲에는 여전히 푸릇푸릇한 나뭇잎을 가득 단 나무들로 무성했다.

    “으, 조금 지겹다.”

    반 호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크게 하품을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

    “아니, 펜타스. 그게 아니라 종일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으니까…….”

    “옥토, 앞이나 봐. 우리 일은 그거니까.”

    펜타스라 불린 남자가 차갑게 대꾸하자 옥토는 변명할 것처럼 우물거리던 입을 꾹 닫았다. 옥토와 펜타스는 음지에서 케이루스를 섬기는 검은 달의 일원이었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야 필요에 따라 이름을 받았지만, 그들처럼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는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옥토와 펜타스라는 호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차례를 나타내는 숫자에 불과했다.

    숫자 8이라는 뜻의 옥토가 다시금 반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동안, 느릿한 바람이 한차례 그를 훑고 지나갔다.

    옥토의 시선에 걸린 반 호수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물이 모두 빠진 호수 밑바닥은 어딘지 을씨년스러웠다.

    깊게 팬 땅은 축축하게 젖은 채였고, 호수 밑바닥에 깔린 자갈과 흙더미 사이로 흰 기둥이 반쯤 부서진 채 서 있었다. 저 흰 기둥이 먼 옛날 그들이 모시던 존재의 흔적이라는 것은 그들 또한 알고 있었다.

    “맨날 그게 그거지, 뭐.”

    옥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위를 휘익 둘러보았다.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풍경이었다.

    “어? 어, 어? 저게 뭐지?”

    주위를 둘러보던 옥토는 무언가를 살피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물이 빠진 반 호수의 밑바닥을 노려보다 펜타스를 잡아끌었다.

    “펜타스, 저것 좀 봐.”

    “쓸데없는 데 정신 빼놓지 말고 경계나 똑바로―”

    옥토를 면박 주려던 펜타스 또한 하던 말을 멈추고 호수 밑바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익숙한 풍경에 점 하나가 툭 찍힌 것처럼 위화감이 들었다.

    “저게 뭐야?”

    그것은 호수 바닥에 놓인 검은 물체 때문이었다. 펜타스는 허리춤에 맨 검을 만지작거리며 검은 물체를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 그런 그를 옥토가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가, 가지 마.”

    옥토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질려 마구잡이로 떨리고 있었다.

    “뭐라고?”

    펜타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임무는 반 호수의 경계였다. 경계 임무를 맡은 이가 수상한 것을 확인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가지 말라니. 이는 임무를 내팽개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어.”

    “…….”

    “정말이야. 종일 저것만 쳐다보고 있는데 잘못 볼 리가 없잖아.”

    옥토의 말대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아무것도 없던 호수 바닥이었다. 그곳에 어떤 기척도 없이 그들의 눈과 귀를 피해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마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장치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그럴 거야.”

    누가 봐도 수상한 상황이었다. 옥토의 말대로 저 물체에 손을 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럼 가 보면 알겠지.”

    “펜타스. 죽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펜타스를 붙든 옥토의 손가락이 그의 팔을 파고들었다. 그는 제 동료의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 내며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우리 목숨이 그렇게 무거웠다고. 그럼 넌 여기 있어.”

    검은 달에 속한 이들의 목숨은 가벼워야 했다. 언제든 비워지고 또 채워질 수 있는 자리. 그것이 바로 그들이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리는 이유였다.

    하지만 최근 검은 달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인인 케이루스를 향한 충성심은 점점 옅어지고, 제 몸을 사리는 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펜타스도 그런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1왕자 카이엔이 케이루스의 영광을 재현해 줄 사람이라고 믿고 따랐다. 하지만 카이엔은 그들의 믿음에 검은 달의 수장 제프리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 답했다.

    굳건했던 믿음이 흔들리자 꼭꼭 숨겨 두었던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도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고, 제 가족을 이루어 살고 싶었다.

    하지만 평생을 조직의 부품으로 살아온 펜타스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옥토, 너는 여기 있어. 나 혼자 다녀올게.”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인력을 쪼개 가며 그들에게 맡긴 임무였다. 이것은 반 호수를 지키는 것이 메르디에스 수성에 꼭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펜타스는 맡은 임무를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시, 싫어. 네가 간다면 나도 갈래.”

    옥토를 매단 채로 호수 바닥에 발을 디딘 펜타스가 검은 물체에 손을 올렸다. 호수 바닥에 곱게 누워 있는 것은 바로…….

    “물소네.”

    “그러게, 검은 물소야.”

    검은 물소였다. 가죽이 질기고, 뿔이 단단하며, 몸체가 몹시 큰 검은 물소는 매우 위협적인 동물이었다. 더구나 검은 물소는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어 노련한 사냥꾼들조차 피하는 동물이었다.

    “방금 죽었군.”

    물소의 상처를 살펴보던 펜타스가 말했다. 근처에서 이만한 크기의 물소를 사냥했다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셀레나 님께 보고해야겠어.”

    옥토가 그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뭐라고? 갑자기 죽은 물소가 땅에서 솟아났다고?”

    “판단하는 건 내 몫이 아니니까.”

    펜타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바람에 부딪힌 나뭇잎이 사그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 * *

    “셀레나 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말에 편지를 읽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케이루스의 비밀 조직, 검은 달의 일원인 그녀는 이번 메르디에스 성의 잠입을 지휘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그녀가 부여받은 이름은 셀레나였다. 평생을 이름 없이 살아온 그녀가 처음으로 갖게 된 이름은 달을 수호하는 신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가 나타났지?”

    셀레나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자 입술 끝에 찍힌 붉은 점이 덩달아 움직였다.

    “숨이 붙어 있는 곰입니다.”

    반 호수의 경계를 맡은 펜타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답을 들은 셀레나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지며 그녀의 손 안에 있던 편지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처음 반 호수의 바닥에 동물의 사체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불과 사흘 전이었다. 사흘 만에 호수 바닥을 가득 채울 만큼의 동물 사체들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쏟아졌다.

    “물소, 코끼리, 기린, 사슴, 공작에다가 오늘은 살아 있는 곰이라…….”

    하나같이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귀한 동물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죽은 것도 아닌 숨이 붙은 곰이란다.

    “호수에 물을 뺀 김에 동물원이라도 차릴 셈인가?”

    하, 기가 찬 듯 숨을 뱉어 낸 셀레나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엉망이 된 그녀의 엄지손톱 아래에는 그믐달 모양의 문신이 선명했다.

    “좀 괴이하기는 하나 동물의 사체가 나타난 것뿐입니다. 너무 걱정하시지 않아도―”

    지나칠 정도로 초조해하는 셀레나를 위로하려 꺼낸 그의 말은 단박에 끝이 잘렸다.

    “아니,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셀레나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것들은 아무 기척도 없이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나타났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펜타스의 입이 무언가를 말할 듯이 벌어졌다가 이내 다물렸다. 하지만 셀레나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저쪽은 모라의 권능을 시험해 보고 있는 거야.”

    “모라의 권능…….”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는 모라의 권능. 이제껏 그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마물을 적진에 떨구고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었다.

    펜타스도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말 두려웠던 것은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케이루스의 성물도 없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살아 있는 생물을 옮기는 것은 별의 그릇만이 가진 권능입니다.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오직 케이루스의 혈족들뿐이고요.”

    모라의 권능을 이용해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케이루스뿐이어야 했다. 그것이 깨어진다면 케이루스도, 케이루스를 따르는 자신들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마음이 복잡한 건 마찬가지인 듯 셀레나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저쪽에는 지상 최고의 성물이라 불리는 카푸트가 있다.”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 그것은 200년 전 이 땅에 나타났던 신의 유해였다. 그리고 ‘카푸트’는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는 ‘모라’로부터 비롯된 존재였다.

    “그래, 근원이 같으니 카푸트가 별의 그릇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셀레나가 자신의 손 안에서 구겨진 편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리아드네 일행을 지켜보는 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계의 방문자가 반 호수를 이용할 거라고.

    “그러면…….”

    펜타스가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반 호수의 신전을 통해 메르디에스 병력이 순식간에 물밀듯이 들이닥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아무 승산이 없어.”

    현재 메르디에스 성을 점령한 케이루스 병력은 선발대에 불과했다. 지금 인원으로는 인질을 붙잡아 두는 것만도 벅찰 지경이었다.

    “왕도에서는 아직도 아무 연락이 없고?”

    “네.”

    “본대가 어서 도착해야 할 텐데…….”

    추가 병력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어렵게 성을 점령한 것이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 셀레나는 너덜너덜해진 손톱을 틱틱, 튕기며 초조한 속을 달랬다.

    “전하께서…….”

    짧게 숨을 삼킨 펜타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남은 말을 뱉었다.

    “정말 우리를 버리신 걸까요?”

    “…….”

    “연락이 오지 않은 지도 벌써 보름이 훌쩍 넘었습니다. 이대로 메르디에스 병력이 밀고 들어온다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펜타스는 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비록 숫자 5로 불리는 삶일지라도.

    셀레나는 펜타스의 눈동자에 넘실거리는 불안과 욕망을 읽었다. 그녀가 낮은 한숨과 함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펜타스, 나는 이제껏 여섯 명의 펜타스를 보았다. 일곱 번째 펜타스를 보게 된다고 해도 조금도 아쉽지 않아. 무슨 말인지 이해해?”

    “…….”

    언제든 대체 가능한 자리, 그것은 더 이상 펜타스를 설득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한마디였다. 대답 없는 펜타스를 보는 셀레나의 시선이 점점 사나워졌다.

    “네 머리가 내린 판단에 네 손이 옳다 그르다 참견한 적 있나? 우리는 케이루스의 뜻대로 움직이는 손과 발이다. 하라면 하고, 죽으라면 죽어. 그게 우리 역할이야.”

    퍼억, 묵직한 문진이 날아와 펜타스의 어깨를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손에 죽기 싫으면 시키는 일이나 똑바로 해.”

    셀레나가 차갑게 일갈하자 고개를 꾸벅 숙인 펜타스가 물러났다. 홀로 남은 셀레나는 양손에 고개를 파묻었다.

    펜타스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왕도의 카이엔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그들을 도와줄 추가 병력은 고사하고 어떻게 하라는 지시조차도 없었다.

    ‘정말 저희를 버리신 겁니까?’

    셀레나의 마음속에서는 희미한 불안이 점점 몸집을 키워 갔다. 펜타스에게 화를 낸 것도 그런 제 불안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제발, 저희에게 길을 보여 주십시오.’

    그녀는 어두운 밤하늘을 보며 간절히 속삭였다. 달이 뜬 어두운 밤하늘을 하얀 새가 가로지르며 날았다.

    하지만 셀레나가 그토록 기다리는 소식은 그날도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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