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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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드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유리창에 덧그리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자식 키워 봐야 다 헛일이라더니…….”

    들으란 듯이 하는 이야기에 결국 아리아드네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가지고 온 음식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아리아드네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아버지, 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식사 안 하실 거예요?”

    “왔니?”

    그제야 고개를 돌린 레너드가 아련한 표정으로 아는 체를 했다.

    “저 아까부터 와 있었잖아요.”

    “늘그막에 자식한테 이런 홀대를 당할 줄이야…….”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온 레너드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전 아버지랑 이렇게 가까이에서 식사하니까 오히려 더 좋은데요. 아버진 싫으세요?”

    아리아드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치자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너드의 얼굴에서도 따스한 웃음이 퍼져 나갔다.

    “역시 너무 불공평하다니까.”

    “뭐가요?”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차이 나니 말이다.”

    레너드는 제 스테이크 접시에서 가장 연한 부위를 뚝 떼어 아리아드네 접시 위에 놓아 주며 대답했다.

    “그건 절 너무 사랑하신다는 거죠?”

    “그래.”

    “전 됐어요. 아버지 드세요.”

    아리아드네가 레너드가 떼어 준 부위를 다시 되돌려주며 웃었다. 둘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둘이 아니라 세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작은 테이블에서 소담스럽게 차린 음식을 먹다 보니 서로의 팔이 자연스럽게 스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눈이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리아드네는 유진을 보며 아주 행복한 듯이 활짝 웃었다.

    손바닥만 한 테이블에서 몇 번이나 그 광경을 목격해야 했던 레너드는 괜스레 심통이 났다. 유진의 손이 가는 데마다 톡톡 끼어들며 심술을 부려 봤지만, 젊은 놈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얌전히 제 손을 물렸다. 그러면 혼자만 속 좁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더 심통이 났다.

    “왜 저런 쓸데없는 걸 달고 와서는…….”

    그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면 아리아드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지금 저보고 쓸데없다고 하신 거예요? 전 아버지가 아직도 필요한데……. 전 아버지가 평생 제 곁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로 레너드의 입을 막았다. 뻣뻣하게 생겨서 남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그 하급 마물 같은 놈은 한술 더 떴다.

    “부족한 점을 알려 주시면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아리아드네와 함께 메르디에스 영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누구에게나 하대를 찍찍하던 놈이었다. 그랬던 놈이 제 눈치를 보며 정중하게 구는 모습이 더 레너드의 심기를 거슬렸다.

    ‘왜, 왜, 왜 저놈이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래! 저건 분명 내 딸한테 다른 마음이 있다는 거잖아!’

    여기서 더 심통을 부려 봤자 얻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태연히 넘기자니 유진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레너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난관에 빠져 있든 말든, 아리아드네는 만개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왜 그래? 설마 우리 아버지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거야?”

    유진이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처럼 굴 때마다 아리아드네는 웃음이 터졌다. 세상과는 담을 쌓은 것처럼 부러 냉랭하게 굴던 남자였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그가 자신과의 관계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아니,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존경받을 만한 분이시니까.”

    귀 끝이 붉어진 유진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한 채로 어물거렸다.

    존경이라니. 그만큼 유진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있을까. 아리아드네는 결국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는 네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말이 그렇게 우습니?”

    레너드는 존경이라는 말에 웃음이 터진 아리아드네에게 서운해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간신히 웃음을 그친 아리아드네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사람이 평소랑 너무 다르니까 그렇죠. 원래 저런 사람 아니란 말이에요.”

    연달아 날아드는 공격에 잠시 정신을 놓은 레너드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야, 사랑에 원래가 어딨어? 사랑에 빠지면 다들 회까닥하고 그런 거지, 뭐. 너는 평소랑 똑같은 줄 알아?”

    사랑, 사랑, 사랑! 그 끔찍한 단어를 제 입으로 말하고야 만 것이다.

    아아, 레너드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며 머리를 쥐어뜯다 그놈이 조금 전보다 훨씬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 아버지는 식사 자리에서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셔서…….”

    아리아드네가 난처하다는 듯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지금 이것은 마치 레너드가 둘의 사랑을 땅땅 확정 지은 듯한 분위기였다. 저놈, 저놈,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마음에 안 들더라니. 역시 제 예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유진은 잠시 굳었다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식사를 마쳤다.

    아리아드네만 좋다면 어차피 반대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정말 자신이 인정이라도 해 버린 듯한 분위기였다.

    레너드는 힘없이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이렇게 말하면 식욕이 떨어져 덜 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이미 음식을 바닥까지 싹싹 비운 다음이었다.

    식사가 모두 끝나자 제 입가를 닦은 아리아드네가 레너드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성을 탈환하실 생각이었어요?”

    레너드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물어 뭣하니? 거긴 내 집인데 남들이 내 집 차지하고 앉았다고 들어갈 문이 없을까.”

    메르디에스 성은 페렌트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었다. 그 말은 개보수와 증축이 그동안 수도 없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성의 지하에는 아리아드네조차 알지 못하는 길들이 존재했다.

    “아리아드네, 저것들이 우리 추수제를 망쳤으니 되돌려줘야 하지 않겠니?”

    “유월절 말씀이신가요?”

    유월절(留樾節)은 북방 이민족인 케이루스가 오랜 유랑을 마치고 페렌트에 정착한 것을 기리는 날이었다. 추수제가 메르디에스의 최대 축제라면 유월절은 케이루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날이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레너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유월절의 덕목은 말이다. 바로 포용과 화합 아니겠니? 저것들에게 선물을 좀 줘야 할 것 같은데…….”

    페렌트를 다스리는 다섯 가문만 해도 그 시작과 문화가 서로 달랐다. 각기 다른 신을 모시고 다른 문화를 향유했던 수많은 세력들이 페렌트라는 이름 아래 모여 있었다. 북방에서 내려온 케이루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와 다른 모습을 한 이들이라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포용,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하나가 되는 화합은 페렌트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레너드는 유월절을 맞이하여 그놈들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선사할 생각이었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었니?”

    문득 딸의 생각이 궁금해진 레너드가 물었다. 느릿하게 눈을 뜬 아리아드네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까 이번 추수제에 들판에 불을 놓는 걸 못 했더라고요. 그래서 불을 지를까 했죠. 활활, 멀리서도 잘 보이게. 다시는 이런 짓 엄두도 못 내도록.”

    어휴, 쟤는 정말. 살짝 눈을 흘긴 레너드가 뿌듯한 얼굴로 자랑하듯 말했다.

    “넌 누구 딸인지 애가 참 대범하단 말이야.”

    언제 봐도 참 남다른 아이였다. 레너드의 칭찬에 샐쭉 눈웃음을 친 아리아드네가 맞장구를 쳤다.

    “제가 누구 딸이겠어요?”

    그 말에 레너드의 얼굴이 헤벌쭉 벌어졌다. 참으로 화목한 부녀지간이었다.

    “그런데 같이 간 다른 기사들은 어쩌고 두 분만 오셨어요?”

    레너드가 기사들을 끌고 요란스레 도착한 것이 아니라 다행이긴 했으나, 보우 강을 탈출한 기사들이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 뭐 좀 챙겨 오라고 보냈어. 그렇지 않아도 슬슬 연락 올 때가 됐는데…….”

    레너드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다.

    “뭔데요?”

    “좋은 거.”

    아리아드네가 궁금하다는 듯 대답을 졸랐지만 레너드는 아직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깜짝 선물을 준비할 때처럼 입가를 씰룩이던 레너드가 부러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그런데 1왕자 쪽은 왜 이리 굼떠? 영 반응이 없다?”

    메르디에스 성을 점령했으면 당연히 그다음 계획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케이루스는 성을 점령한 지가 제법 되었는데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은 케이루스의 우두머리인 카이엔이 현재 명령을 내릴 만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리아드네가 한쪽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럴 만도 하죠. 소르체에 발을 잘못 들였다가 한쪽 손이 날아갔거든요.”

    눈이 휘둥그레진 레너드가 유쾌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뭐? 누가 그런 기특한 짓을 했대?”

    카이엔의 손목을 날린 시안을 보면 껴안아 주기라도 할 기세였다.

    “아리아드네, 남은 손 하나는 내 몫이다.”

    레너드는 빼앗길세라 서둘러 제 몫을 챙겼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아리아드네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제 몫은 겨우 손 하나가 아니니까.”

    * * *

    1왕자 카이엔이 거처하는 주각궁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거대한 침묵에 둘러싸여 있었다. 유일한 직계 왕족인 카이엔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 오른손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가 발견된 곳은 케이루스의 성물인 별의 그릇을 보관하는 안치소였다. 연이어 발생한 왕가의 비극에 왕궁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케이루스 왕가의 대가 끊기려는 것일지도 몰라.’

    ‘성물이 버렸다면 케이루스는 이젠 공가만도 못한 것 아닌가.’

    ‘1왕자가 성물의 저주를 받았대. 계속 아픈 것도, 손목이 잘린 것도 모두 그 때문이라던데?’

    사람들의 입을 넘나들 때마다 이야기는 끝없이 불어났다. 그 이야기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하나였다.

    케이루스의 쇠락.

    “후작님?”

    카이엔의 처소로 향하던 레비에 후작이 걸음을 우뚝 멈추자 안내하던 시종이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아무것도 아니다.”

    다섯 공가를 섬기는 것보다 하나의 왕가를 섬기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선택이 틀렸던 걸까?

    레비에 후작은 카이엔의 최측근이라는 제 위치가 몹시 불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젠 되돌리기도 너무 늦어 버렸다.

    ‘달리는 말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릴 순 없으니.’

    그는 한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시종이 레비에 후작의 도착을 알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콰앙! 쨍그랑! 물건이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범벅이 된 시종들이 방에서 실려 나왔다.

    “내 손, 내 손을 다시 돌려 내란 말이다!”

    열린 문 사이로 카이엔의 노성이 흘러나왔다. 레비에 후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전하, 신 레비에 부름을 받고 도착했습니다.”

    “후작.”

    오른손에 붕대를 칭칭 휘감은 카이엔이 그를 돌아보았다.

    “잘 왔네.”

    난장판이 된 방 한가운데 서 있던 카이엔이 휘청이며 레비에 후작을 향해 걸어왔다. 백자(白者)의 피가 필요하다며 소르체를 들쑤시던 카이엔은 백자의 피를 얻기는커녕 오른손마저 잃었다.

    지금 카이엔은 마약성 진통제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꿈인가 싶으면 현실이었고, 현실인가 싶으면 꿈이었다.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점점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죽은 다그마르가 돌아와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기도 했고, 생부 케네스의 목이 그의 발치에서 데구르르 구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건 제 오른손이 잘리는 순간이 반복되는 환상이었다. 소르체에 남기고 온 그의 오른손이 수십, 수백 개로 불어나 그의 발치에서 마구잡이로 굴러다니곤 했다.

    “후작, 나는 말이야. 나는 예전부터…….”

    카이엔은 잔에 든 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고통이 사라지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여자가 싫었어.”

    카이엔의 인생을 가로막는 건 늘 여자들이었다.

    그의 인생을 막은 첫 번째 여자는 다그마르였다. 왕이되 왕으로 군림하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적법한 왕자로 태어난 그의 인생을 망쳐 버렸다.

    두 번째는 그의 전 약혼녀였던 아리아드네였다. 모든 것을 줄 것처럼 다가왔다가 차갑게 돌아선 그 여자.

    “웃는 얼굴에 속으면 안 돼.”

    하마터면 그것도 모르고 사랑이라고 믿을 뻔했다.

    소르체의 땅에서 제 오른손을 자른 것도 여자였다. 마치 인형처럼 아무 표정이 없는, 유리알처럼 반질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

    그것도 모자라 카이엔의 몸을 이 지경으로 만든 리카서스의 성물 무렉스조차 여성체의 모습이었다.

    ―너, 여자에게 죽는구나.

    그것이 남긴 마지막 말은 카이엔의 인생을 지배해 온 별의 예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여자, 여자, 여자! 정말이지 그는 여자라는 존재가 지긋지긋했다. 그것들이 자신을 해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죽기 전에 죽인다. 제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들의 당연한 본능이 아닌가.

    “메르디에스 성에 있는 검은 달에게 연락해야겠어. 인질은 필요 없으니 모두 죽이고 성을 불태우라고.”

    죽은 제프리 대신 새로이 검은 달의 수장이 된 제롬이 카이엔의 말을 받아 적었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검은 달은―”

    소리 없이 움직이던 제롬의 손이 멈추었다.

    “영원한 어둠 속으로.”

    새로울 것 없는 말이었다. 임무가 실패하면 케이루스에 해를 끼치지 말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뜻이었다.

    검은 달로 명명된 그들은 언제나 케이루스를 위해 살았다. 케이루스 일족을 따라 북쪽 땅을 떠나왔을 때도, 리카서스의 서슬에 몸을 낮춰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케이루스를 섬기는 그들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케이루스의 영광이 곧 자신들의 영광이었다. 빛나지 않아도 좋았다. 검은 달이란 본디 어둠 속에 묻혀 있어야 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오늘따라 새로울 것 없는 그 말이 유난히도 제롬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그것은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은 제프리가 자신의 친형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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