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48)
  • * * *

    시에테의 메르디에스 별장은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별채는 작은 인기척조차 나지 않았다. 머무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데다가 다들 피곤하다며 일찌감치 잠든 탓이었다.

    별채의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투덜대며 불평을 쏟아 냈다.

    “으, 찝찝해.”

    “오는 동안 다 마르지 않았습니까?”

    옆에 있던 사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입은 채로 꾸덕꾸덕 말린 옷이랑 깨끗하게 빨아서 말린 옷이 같아?”

    불평을 쏟아 낸 남자가 버럭 신경질을 내며 쿵쾅쿵쾅 움직이다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왜 이렇게 어두워? 불 좀 켜 봐.”

    남자는 불이 켜지기를 기다렸지만 다른 사내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왜? 왜?”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뭐?”

    남자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죽였다. 그런 남자를 보던 사내가 어딘가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진짜야. 아무도 모른다니까!”

    남자가 억울하다는 듯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러시겠지요.”

    사내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쓴다는 투로 흘려 버렸다.

    “또 내 말 안 믿지?”

    줄곧 불평을 쏟아 내던 남자가 발을 구르며 억울함을 내비쳤다.

    “쉿. 누가 옵니다.”

    사내의 말에 발을 구르던 남자가 쫑긋거리며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안 들리는데?”

    “그러시겠―”

    사내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칼이 남자의 발치에 꽂혔다.

    “도둑질의 기본은 정숙, 그것도 몰라?”

    어둠 속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건방진 것이 남자의 심기를 거슬렸다.

    “뭐어? 도두욱―질? 정수욱?”

    허허,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반쯤 실성한 웃음을 흘렸다.

    “아저씨, 말이 기네.”

    남자들을 향해 한껏 비아냥거린 달로아가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자 시안이 쏘아져 나간 것처럼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칼날이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와, 저 나이에 저런 움직임이라니, 진짜 사기다.’

    달로아는 홀린 것처럼 시안이 휘두르는 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페렌트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는 리뮈르 기사들 사이에서 자란 달로아는 알았다. 시안의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빈집이나 터는 도둑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사선으로 내려그은 시안의 검이 도둑들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카앙! 단단한 것들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유려하게 움직이던 시안의 검이 막혔다. 시안은 제 앞을 가로막은 사내가 태산이나 거대한 바위 같다고 생각했다.

    예상외로 강한 전력에 탐색하듯 검을 섞은 시안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사내는 다른 남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안은 사내와 제대로 겨뤄 보고 싶다는 아쉬움에 검을 움켜쥔 손을 움찔거렸다.

    “그런 재능이 있으면서 왜 도둑질이나 하고 다니는 거야? 그런데 들어는 보셨나? 우리에게는―”

    달로아가 마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손에 쥔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내밀며 유진을 슬쩍 밀었다.

    자다 끌려 나온 유진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유진은 달로아의 채근에 풀멘을 꺼내 성의 없이 갈겼다.

    타앙, 탕탕탕! 하지만 그의 성의와는 상관없이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은 상대를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달로아는 언젠가 허접하기 짝이 없는 패로 블러핑(bluffing:게임에서 좋지 않은 패를 쥔 플레이어가 허풍을 떨어 상대를 속이는 것)에 성공했던 그때처럼 손끝이 짜릿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성물의 주인이 있다는 말씀!”

    단지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달로아의 손에 든 패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최상의 패라는 점이었다.

    “잠깐! 이거 분명 그 하급 마물 같은 새끼가 들고 다니는―”

    “맞습니다. 풀멘입니다.”

    도둑들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래, 많이 놀랐겠지. 나도 처음 봤을 때 많이 놀랐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달로아가 집게손가락을 쭉 뻗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도둑 아저씨들, 출구는 저승이야.”

    “아까부터 누가 누굴 보고 도둑이래? 잠깐 집 비운 사이에 도둑고양이처럼 들어앉아서 집주인 행세하는 게 누군데!”

    ‘집을 비워? 도둑고양이?’

    남자가 내뱉은 단어에 위화감을 느낀 달로아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였다. 파앗, 어둡던 주위가 갑자기 밝아졌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등잔을 들고 나타난 아리아드네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환해진 주위에 도둑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도둑의 정체는 멀끔하게 생긴 중년 남자 둘이었다.

    그중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의 몸이 몹시도 건장했다. 그쪽이 시안의 검을 막아선 사람인 듯했다.

    건장한 사내 뒤에 숨어 있던 남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옅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중년 남자였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유진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투욱,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풀멘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뭐야? 왜?’

    달로아는 고개를 들어 유진의 얼굴을 확인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을 한 그가 제 손에 고개를 묻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망했다.”

    불길한 예감이 달로아의 등골을 서서히 타고 올라왔다. 그 불길함에 정점을 찍은 것은…….

    “아버지?”

    남자를 부르는 아리아드네의 목소리였다.

    * * *

    달로아는 어려서부터 돈을 걸고 하는 게임이 너무 좋았다. 좀처럼 돈에 욕심이 없는 그녀의 가족들은 그런 달로아를 늘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메르디에스 공작께서는 참으로 비범하신 분 같아. 직접 뵙고 고견을 여쭙고 싶어.

    들려오는 이야기 속의 메르디에스 공작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돈을 갖고 하는 게임에서 절대 지지 않는 불패의 신. 그것이 바로 달로아의 우상, 레너드였다.

    하지만 그 우상과의 첫 만남이 이런 식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어, 그게 그러니까 메르디에스 공작님께서 귀환하셨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빈 별장을 노리는 쥐새…… 끼, 아니, 쥐새끼님이, 아니, 이게 아니라…….”

    평소 존경해마지 않았던 레너드와 최악의 형태로 조우하게 된 달로아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멀쩡한 상태에서 만났어도 정신을 못 차렸을 텐데 레너드의 집에서 그를 신나게 도둑으로 몰았다.

    “누이의 결례를 대신 사죄드립니다.”

    달미에르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달로아가 따라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시안은 양 볼이 조금 붉어진 채로 말없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

    하지만 이 상황이 제일 불편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입 안을 질끈 깨문 유진이 무엇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레너드가 쌩하니 고개를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성기사단 부단장 리카르도라고 합니다.”

    달로아의 방에서 제일 먼 곳에 자리 잡은 터라 야밤의 소동에서 운 좋게 빠진 리카르도만이 해맑게 웃으며 제 소개를 했다.

    이로써 별채에 머무르고 있는 모두가 옹기종기 모인 셈이었다. 레너드는 모인 사람들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한 번 까닥하고 말았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레너드를 포옹하자 아직 제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니라는 듯 레너드는 마주 안은 딸의 등을 짧게 두어 번 탁탁, 두드렸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 레너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입을 달싹이며 망설이자 아리아드네가 더 가까이 다가와 앉으며 조르듯이 채근했다.

    “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말씀 좀 해 주세요.”

    “흠흠, 그게 그러니까…….”

    네가 그토록 조르니 어쩔 수 없이 입을 연다는 듯 헛기침을 한 레너드가 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미역의 함정이었다.”

    “이번 일에 왕후가 개입했단 말씀이세요?”

    아리아드네는 물미역이라는 말만 듣고도 자연스럽게 그것이 왕후를 칭하는 것임을 알아들었다. 레너드는 생각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보우 강 상류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빠져나왔는데…….”

    레너드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래, 그렇게 되었다더구나.”

    메르디에스 성이 정체 모를 이들에게 함락되지만 않았어도 부녀의 재회는 그곳에서 이루어졌을 터였다.

    이후 행적은 레너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았다. 메르디에스 성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노출되지 않은 거점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레너드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리아드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으면 캐롤린 이야기도 들으셨겠네요.”

    “듣긴 했다만…….”

    커티스를 힐끗 바라본 레너드가 뒷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커티스 앞이라 말을 아끼는 듯했다.

    “아버지, 나쁜 소식이 하나 더 남았어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레너드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우리 안에 1왕자의 눈이 있어요.”

    어디든 세작은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내밀한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게 정말이냐? 누가 그런 짓을 해?”

    “여기서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아요. 제 짐작일 뿐 아직 확신할 단계도 아니고요.”

    벌떡 일어났던 레너드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별채에 머무르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그래, 그렇구―”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던 레너드가 별안간 고개를 홱 쳐들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난 어디서 지내고?”

    그 말인즉슨 레너드와 커티스의 귀환도 숨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유진의 총성에 놀라 달려온 사용인들을 문밖에서 죄다 돌려보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당분간은 불편해도 별채 사용인 숙소를 사용하셔야 할 것 같아요.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니까요.”

    다행히도 사용인들은 모두 본채에 묵도록 지시한 터라, 별채의 사용인 숙소는 아예 열지도 않은 상태였다. 레너드가 그곳을 사용한다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난 여기가 별챈지도 몰랐어! 하도 어두워서 본챈 줄 알고 들어왔다고! 나는 가장 큰 방이 아니면 두드러기가 나는 사람인 거 너 모르니?”

    “사용인 숙소에서 가장 큰 방 쓰시면 되잖아요.”

    “뭐? 아리아드네, 너! 늙은 아비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지금 이게 말이―”

    레너드의 불평이 또 끝도 없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아리아드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쉬십시오.”

    내내 레너드 곁에 말없이 서 있던 커티스가 짧게 묵례를 하며 말했다. 커티스와 눈이 마주친 아리아드네가 멈칫하더니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백작께서도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실 텐데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죠.”

    “……알겠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커티스가 레너드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성주님은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어딜 데리고 간다는 거야? 난 가기 싫어, 싫다고!”

    의자에 몸을 딱 붙인 레너드가 격하게 항의했지만.

    “자다 깨서 피곤하실 텐데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레너드를 억지로 일으킨 커티스가 그의 몸을 단단히 붙잡은 채 사용인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야, 너 이거 안 놔? 놔! 놓으라니까!”

    발뒤꿈치를 세워 버티던 레너드는 커티스의 손에 질질 끌려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달로아가 물었다.

    “괜, 괜찮으실까?”

    “그냥 괜히 그러시는 거야. 원래 그런 거 가리시는 분이 아니야.”

    레너드는 어디 한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륙 곳곳을 누비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면 더 열악한 상황도 숱하게 겪곤 했다.

    괜스레 툴툴거리며 불평을 쏟아 내는 건 주위 사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레너드 나름의 배려였다. 지금도 캐롤린 일로 마음이 심란할 커티스를 배려해 일부러 저러는 것이 틀림없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던 레너드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아리아드네는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리아드네는 그것만으로도 벌써 이곳이 집인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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