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48)
  • 5. Unavoidable

    솨아아아아아―

    레너드는 지긋지긋한 물소리에 앓는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지하 동굴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밤낮없이 이어졌다.

    “아, 진짜 이러다 내가 제명대로 못 살지. 잘 때는 쟤네도 좀 쉬어 줘야 하는 거 아냐?”

    몸을 일으킨 레너드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불평불만을 쏟아 냈다. 일찌감치 일어나 식수를 구해 온 커티스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잘 때 무슨 소리가 들리긴 하십니까? 성주님 코 고는 소리에 비하면 물 흐르는 소리야 벌레 숨소리만도 못―”

    “자네는 오늘도 일찍 일어났구먼.”

    커티스의 뒷말을 냉큼 자른 레너드가 뻔뻔하게 화제를 돌렸다.

    지반이 무너지며 지하 동굴로 떨어진 레너드와 커티스는 다행히도 큰 상처 없이 살아남았다. 뒤로 넘어져도 황금을 줍는다는 레너드의 운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된 덕분이었다.

    문제는 지하 동굴의 내부가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게 이어져,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지반이 무너지며 길이 막힌 곳도 적지 않아 탈출은 더욱 난항을 겪고 있었다.

    지하 동굴은 자연적으로 생산된 곳에 인위적인 손길을 가한 모양새였다.

    ‘하긴, 칼 그놈이 아무리 미쳤대도 이만한 규모의 동굴을 파는 건 말이 안 되지. 아니, 그 미친놈이라면 가능할지도. 걔는 완전 돌았으니까.’

    레너드는 물미역 같은 그놈의 검푸른 머리카락만 생각하면 내장이 뒤틀렸다.

    이따금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레너드와 커티스는 바람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출구를 찾고 있었다.

    이렇게 헤매다 보면 생존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진 못했다.

    가끔 물에 떠내려온 짐꾸러미나 만년필 같은 물건들이 이곳에 떨어진 다른 사람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레너드는 제 몸 가누기도 힘든 마당에 그런 물건들을 발견하는 족족 챙기곤 했다. 누군가에게 이것은 죽은 가족의 유일한 유류품일 수도 있으니.

    주머니에서 꺼낸 육포를 질겅질겅 씹던 레너드가 물었다.

    “우리 여기 떨어진 지 얼마나 지났지?”

    “보름째입니다.”

    “이젠 먹을 것도 다 떨어져 가는데…….”

    레너드가 씹던 육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물에 떠내려온 짐꾸러미에서 발견한 식량도 이젠 슬슬 바닥이 보였다.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레너드가 미간을 문질렀다.

    ‘추수제가 끝나기 전에는 돌아가려 했는데…….’

    그전에 돌아가기는커녕 추수제가 끝난 지도 벌써 열흘은 훌쩍 넘긴 다음이었다.

    “추수제는 무사히 치렀는지 모르겠네. 저놈들이 애들한테는 무슨 수작을 안 부렸을지 걱정이야.”

    “……별일 없을 겁니다.”

    커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하 동굴로 떨어지는 순간 보았던 보랏빛 꽃 한 송이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뭐, 여길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그것만 생각하자고.”

    딱딱하게 굳은 커티스의 얼굴을 본 레너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그런데 어째 걷는 건 레너드 혼자였다. 따라오는 인기척이 없어 고개를 돌리자 커티스가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왜?”

    “이쪽입니다.”

    커티스가 반대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쩐지 머쓱해진 레너드가 괜히 꼬투리를 잡아 따지고 들었다.

    “……그래? 확실해?”

    “제가 이곳 지도를 손에 쥔 것도 아닌데 확실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바람이 이쪽에서 불어오니까요.”

    “그래, 나도 그런 것 같았어.”

    레너드는 처음부터 그쪽으로 가려 했다는 듯 태연하게 방향을 틀었다. 커티스가 말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바람이 점점 강하게 느껴졌다.

    ‘말하는 건 좀 얄미울 때가 있어도 실력만큼은 확실하다니까.’

    레너드는 커티스가 들었으면 뒷골을 잡고 넘어갔을 법한 생각을 하며 앞으로 걸었다. 통로가 점점 좁아지더니 나중에는 기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한참을 기어가던 레너드가 까진 손바닥을 호호 불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천국으로 가고 있는 거 아닐까?”

    “죽어서까지 성주님을 모시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커티스는 웃음기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어조로 말했다. 레너드가 다시 팔꿈치로 바닥을 밀며 대꾸했다.

    “내가 죽었다고 자네를 놔줄 것 같은가?”

    어림도 없었다. 커티스는 레너드의 손에서 검을 놓게 한 장본인이었다. 한때 세계 제일의 검사를 꿈꿨던 레너드는 바로 옆에 있는 천재의 벽을 넘지 못했다.

    셈이 빠른 레너드는 금세 계획을 변경했다. 세계 제일의 검사를 제 부하로 두겠다고. 레너드의 두 번째 계획은 아직까지는 대성공이었다.

    죽어서도 놔주나 봐라. 레너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다시 좁은 통로를 기었다.

    “……아직 죽을 때는 아닌가 봅니다.”

    커티스의 말대로였다. 좁고 기다란 통로 끝에 환한 빛이 보였다.

    보름 만의 햇빛이었다. 레너드는 오로지 빛만 보고 기었다. 좁다란 통로를 빠져나오자 사람 열댓 명 정도가 자리할 수 있는 공동이 나타났다. 공동은 위가 뻥 뚫려 있었는데, 그곳에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데 무심코 위를 쳐다보았던 레너드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었나? 왜 저 새끼가 여기 있어?”

    위에서 레너드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라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살아 있었을 줄이야.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레너드가 그토록 씹어 댔던 왕후 칼이었다.

    “지하 동굴의 출구가 원래 네 곳인데 보름 전의 그 일로 두 곳은 막혔고, 한 곳은 무너졌고, 이곳만 남았는데…….”

    레너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이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유일한 출구를 찾아내다니, 자넨 정말 천운을 타고났나 보군.”

    “네놈이 지키고 섰는데 그게 무슨 천운이야? 천벌이지.”

    시종 유쾌한 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칼과는 달리 레너드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보름이 지나도 자네가 살아 나갔다는 소식이 안 들리니 정말 죽었나 했지. 오늘도 나타나지 않으면 이곳도 막을 작정으로 와 본 건데 반가운 소리가 들리지 뭔가.”

    “그렇게 뭘 못 막아서 아쉬우면 네놈 뚫린 입이나 처막지 그래?”

    레너드가 듣기 싫다는 듯 귀를 후비적대며 비아냥거렸다.

    “자네의 그 천박한 언사는 여전하군.”

    “네놈 말본새도 여전한데, 뭐. 근데 어째 말이 짧다? 네놈은 왕후고 나는 공작인데.”

    “이런 상황에서 그따위 지위가 무슨 상관인가? 메르디에스 공작의 목숨이 내 손에 달린 판국에.”

    “그래서 날 죽이겠다고 이 짓을 벌였냐? 페렌트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든 말든 네놈은 그저 알량한 권력만 손에 쥐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아무리 이미 존재하는 지하 동굴과 협곡을 이은 것이라 해도 이만한 규모를 만드는 데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걸렸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미친놈이 아니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너드는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칼의 행태가 정말 치가 떨리게 싫었다.

    “권력이란 것은 내가 갖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 네 딸도 그 알량한 권력을 쥐자고 그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아니었나?”

    “아니, 내 딸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네놈같이 비열한 짓은 안 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네놈 같은 사람이 흔한 줄 아냐?”

    레너드가 발끈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게 아니라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 몰려 본 적이 없는 거겠지. 공녀가 워낙 곱게 자랐잖나?”

    픽, 레너드가 코웃음을 쳤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메르디에스 공녀 아리아드네는 결핍을 모를 거라고.

    “아리아드네가 부족한 것 없이 다 누리고 산 것 같지? 그거야말로 그 아이를 모르니까 하는 소리지. 자신을 부정하는 어미조차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던 아이야. 그게 타고난 심성이라는 거다!”

    레너드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가 찼다. 부자면 뭐 고민도 없는 줄 알아? 꼭 저도 부자인 것들이 더 시끄럽게 짖었다.

    “씹다 뱉은 곰팡이 같은 새끼가 감히 누구를 들먹여?”

    푸른빛이 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칼에게 비유하기를 즐기는 레너드가 곰팡이 운운하며 받아치자, 한순간에 씹다 뱉은 곰팡이가 된 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런 상황이면 목숨만은 살려 달라 빌 법도 하지 않나?”

    레너드는 저게 실성했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칼과 레너드, 둘을 아는 사람들에겐 지겹도록 익숙한 광경이었다. 칼이 리카서스의 장자이고, 레너드가 메르디에스의 후계였던 과거에도 둘은 견원지간으로 유명했다.

    “누가? 내가? 누구한테? 네놈한테?”

    “내가 이래서 자네를 만나는 게 즐거워.”

    레너드는 칼이라면 질색하고 피했지만, 칼은 질색하는 레너드의 반응을 즐기는 편이었다.

    “이래서 인기가 많으면 피곤하다니까. 만인의 기피 대상인 네놈은 평생 모르겠지만.”

    레너드는 상대해 주기도 귀찮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 아버지가 이렇게 된 걸 알면 공녀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는군.”

    “네놈의 관심은 불쾌하니까 제발 좀 거둬 주라.”

    저게 아까부터 자꾸 아리아드네 이야기였다. 레너드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했지만, 칼이 그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뭐가?”

    “왕가의 예언에서 언급된 진정한 왕 말일세. 자네는 그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딴 잡소리에 미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네.”

    레너드가 다시 한번 귀를 후비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왕가의 예언은 빗나간 적이 없지. 단 한 번도.”

    칼 또한 그딴 예언에 얽매이는 왕가가 한심하다 여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제 부인도, 제 아들도 모두 그것이 말하는 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다그마르가 죽은 후로 칼은 이따금 생각했다. 그것이 제 죽음도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선왕 크리스티안이 받은 예언은 ‘네 죽음이 이 땅의 진정한 왕을 잉태하리라.’라는 것이었지. 선왕은 제 후사를 이을 딸이 진정한 왕이 될 거라 믿었지만 예언을 잘 살펴보면 그게 아니야. 선왕의 죽음으로 잉태되는 생명이 진정한 왕이 된다는 거지.”

    전자이든 후자이든 그딴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레너드는 그딴 예언에 미쳐 파국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선왕이 죽고 태어난 왕가의 혈족은 1왕자 카이엔과 내 아들 루안뿐이었지. 예언의 왕은 핍박받고 자란 1왕자일까, 아니면 내 아들일까. 정말 궁금하더군. 과연 누가 우뚝하게 선 왕이 될지.”

    ‘적어도 칼 같은 인간은 그런 예언에 휘둘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레너드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자네 딸이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내 궁금증은 평생 풀리지 않을 숙제로 남았지 뭔가. 이번 일은 숙제를 떠안은 작은 심술이라고 해 둠세.”

    칼이 한쪽 손을 들자 쿠르릉,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보름 내내 지겹게 들었던 바로 그 물소리였다. 뒤를 돌아본 레너드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저 물미역 같은 새끼가 진짜!”

    레너드가 지나온 좁은 통로로 거센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길길이 날뛰는 레너드를 가만히 지켜보던 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지나온 길은 수문의 개방 정도에 따라 수로가 되기도, 통로가 되기도 하지.”

    레너드와 커티스가 선 자리에 통로에서 쏟아진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 저, 미친놈이! 내가 반드시 너는 죽인다. 내가 물귀신이 되어서라도 넌 데려간다.”

    발밑에 차오르기 시작하는 물을 보며 레너드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던 칼이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되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왕위 계승권을 가진 이 중에 선왕의 죽음으로 잉태된 생명이 하나 더 있지 뭔가.”

    레너드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누구인지.

    ‘아리아드네…….’

    “그래, 자네 딸 말일세.”

    칼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왕이 진정한 왕이 될 거라며 그토록 아꼈던 왕녀 패트리샤가 메르디에스 공작에게 미쳐 있었던 건 제법 유명한 이야기지 않은가? 아버지는 제 딸의 과업을 이루어 주겠다며 미친 듯이 네 공가를 견제하는데, 그 딸은 아버지가 그토록 견제하는 상대에게 빠져서 혼인시켜 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설쳤다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빠졌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그렇게 덧붙인 칼은 몹시 우습다는 듯 쿡쿡대며 웃었다.

    “부녀가 쌍으로 미쳐서 돌아가며 괴롭혔으니 자네가 진절머리를 내며 영지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근 것도 이해가 가. 그런데 그건 다른 여자와 혼인해 버리면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왜 혼인하지 않았나? 내심 왕녀가 마음에 들었나?”

    “고인을 욕보이는 건 그만하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레너드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젊은 시절 레너드에게 패트리샤 왕녀는 분명 지겹고 귀찮은 존재였다. 하지만 칼의 반정으로 죽은 패트리샤 왕녀에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레너드는 칼이 반정을 획책하는 것을 알고도 그것을 막아서지 않았다. 칼이 반정 이후 무고한 왕족들을 학살하는 것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예언에 미쳐 버린 선왕이 자초한 비극이라 생각하면서도 칼의 손아귀에 놓인 다그마르를 볼 때면 자신 또한 가해자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 불편한 감정은 꽤 오래도록 레너드를 괴롭혔다.

    “다 지난 일이야. 그만하게.”

    하지만 칼은 할 말이 끝나지 않은 듯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아, 왕녀의 질투를 받아 낼 여자가 마땅치 않았나 보군. 왕녀의 집착이 그토록 지독했으니 자네 부인이나 아이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겠지. 이거, 그러고 보니 자네가 나한테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 내가 반정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혼인도 못 할 뻔하지 않았나?”

    마치 술자리에서 한담을 나누는 것처럼 경박한 태도였다. 칼은 소리 높여 낄낄대더니 이제는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네가 자네 부인을 처음 만난 것이 선왕의 추도식에서라지? 그야말로 선왕의 죽음이 이어 준 연분이 아닌가. 이거 정말 자네 딸이 진정한 왕이 될 모양이야. 내가 자네 은인이 되게 생겼어.”

    목숨이라도 구해 준 양 으스대던 칼이 물었다.

    “후보는 셋이었는데 내 아들이 죽었으니 이젠 둘만 남았군. 자네도 기대되지 않나? 자네의 딸이 그 예언이 말한 진정한 왕일지, 아닐지.”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저놈이 진짜 미쳤나?”

    종아리까지 찰랑찰랑 차오른 물을 발길질해 대자, 레너드 주위로 물방울이 마구 튀었다. 레너드는 정말 화가 난 듯 벌게진 얼굴로 악을 쓰듯 말했다.

    “자네는 정말 진정한 왕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들이 자식보다 더 중요했나? 그랬다면 2왕자는 참 불행했겠군. 내 딸이 무엇이 되든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난 그 아이가 행복하다면 거리의 악사가 되어도 좋아.”

    진정한 왕이 아니면 그 아이가 내 자식이 아니기라도 하단 말인가? 자식을 부모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작자들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물론 내 딸은 거리의 악사가 되어도 떼돈을 벌겠지만.”

    내 딸은 예쁘고 똑똑하니까 아마 세계 제일의 악사가 되겠지. 레너드는 제가 한 생각에 스스로 동의를 표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다시금 위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놈은 평소에는 기껏해야 비웃음이 전부인 주제에 레너드만 보면 저렇게 웃어 댔다.

    “패트리샤 왕녀가 자네에게 빠진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 아마 왕녀도 행복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유쾌하고 명료한 레너드를 다들 좋아했다. 그는 마치 태양처럼 세상의 어둠을 불사르는 사람이었다. 칼은 먼 곳을 바라보며 씁쓸한 듯 옅게 웃었다.

    “그런데 나는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썩 유쾌하지 않던데…….”

    그래서 제 곁에 두려 망가트렸다. 상대는 끝내 자살로 도망쳐 버렸지만. 하지만 칼은 그 끝이 이러리란 것을 알아도 같은 선택을 반복할 자신을 알았다.

    “아마도 그게 자네가 말하는 심성인가 보군.”

    그래, 이따위로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그럼 생존을 비네. 살아야 행복이니 뭐니 그딴 잡소리도 계속할 거 아닌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새까만 옷을 두른 칼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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