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48)

* * *

한밤중에 소르체의 가주 이엘라를 찾아온 이들은 그녀 앞에 한 뼘 길이의 단검과 그 검집을 내려놓았다.

붉은 검집은 푸른 델피니움이 심어진 바위 밑에서 발견한 것이고, 그것과 한 쌍인 단검은 붉은 베고니아 사이에 떨어져 있었다. 이것들이 바로 1왕자가 소르체에 침범할 수 있었던 비장의 도구들이었다.

“이처럼 부정한 것이 이 땅에 들어왔을 줄이야…….”

이엘라는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는 신 모라’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검집과 칼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네가 넘긴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카이엔의 수족들도 함께였다. 그들은 이전에 침범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엄지손톱 아래에 그믐달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이 1왕자 카이엔이 벌인 짓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공녀께는 무엇이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대단한 무례를 범했습니다. 거기다 갚기 어려운 은혜까지 입었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이엘라가 몸을 숙여 사과했다. 이엘라의 태도에 부담을 느낀 아리아드네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가주께서 절 이리 대하시면 부담스럽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공녀께서는 소르체의 은인이 아니십니까.”

몸을 세운 이엘라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공녀는 소르체에서 무엇을 받아 가시겠습니까? 메르디에스 성을 탈환하기 위한 병력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엘라의 눈이 상대를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아리아드네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메르디에스의 짓이 아니라면 소르체에서는 마땅한 보상을 해야 할 거라고.

메르디에스 성을 빼앗긴 그녀가 요구할 보상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던 이엘라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메르디에스 성의 탈환을 위해 소르체의 지원을 요구하실 줄 알았는데요.”

“제가 메르디에스 성을 탈환할 병력을 얻기 위해 1왕자를 막아 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 작고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메르디에스 성을 탈환하기 위한 지원이 작고 가벼운 것이라면, 그녀가 말하는 마땅한 보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 공녀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엘라의 물음에 아리아드네가 답했다.

“저는 지원을 바라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같이 싸우자는 말을 하러 온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1왕자를 막아선 건 그것이 소르체만의 위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르체의 위기는 메르디에스의 위기고, 메르디에스의 위기는 소르체의 위기입니다.”

카이엔의 탐욕이 아리아드네만을 향한 것이 아니듯, 케이루스와의 싸움으로 위험한 것은 메르디에스만이 아니었다.

“가주님, 지금은 우리 모두가 페렌트를 위해 나서야 할 때입니다.”

카이엔을 막아 내지 못하면 페렌트 전체가 위험했다. 이제 이것은 페렌트를 지키려는 자와 페렌트를 삼키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소르체가 왜 그래야 하지요?”

지원이 아니라 연합을 바란다는 아리아드네에게 이엘라는 이유를 물었다.

“우리는 페렌트를 떠받치는 기둥들이니까요.”

이엘라의 물음에 아리아드네는 의무를 말했다.

“다시 묻지요. 공녀와 메르디에스의 목적은 1왕자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입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이미 왕가는 몇 번이나 우리의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섬기지 못할 왕가임이 드러났으니 페렌트의 역사에서 그 이름을 지울 겁니다.”

이엘라가 다시 물었을 때, 아리아드네는 왕조의 전복을 말했다.

“다시 묻지요. 공녀는 왕이 되려고 하십니까?”

“네.”

이엘라가 세 번째로 물었을 때, 아리아드네는 제 미래를 말했다.

“무엇을 위해서 왕이 되려 하십니까?”

이엘라의 네 번째 물음은 아리아드네의 여정과 맞닿아 있었다.

“시작은 1왕자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서였고, 다음은 1왕자로부터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 아리아드네를 움직인 건 제 속을 태우는 복수심 때문이었다. 카이엔에게서 제 사람들을 지키려 엘바로 떠났고 그곳에서 끔찍한 실상을 마주했다.

그리고 리뮈르로, 소르체로 오는 동안 과거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홀로 페렌트 북쪽 경계를 지키는 리뮈르의 외로움도, 혈족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을 경계하는 소르체의 고단함도 그녀가 사는 페렌트의 일부였다.

“지금은 페렌트가 좀 더 살 만한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아직도 페렌트 어딘가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힘든 싸움을 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흐릿하고 막연했던 것들이 점차 선명한 색과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럼 다시 묻지요. 소르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이 이엘라의 마지막 물음이었다.

“저는 소르체가 메르디에스와 연합하여 케이루스 왕가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페렌트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페렌트라…….”

결정하기가 쉽지 않은 듯 이엘라는 꽤 오랫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공녀, 그것을 아나요?”

오랜 침묵 끝에 이엘라가 입을 열었다.

“소르체가 페렌트에서 힘을 키운 것은 오로지 혈족의 생존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소르체 바깥은 언제나 혈족의 목숨을 노리는 적이었지요. 소르체를 제외한 페렌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페렌트를 위해 나서 달라는 공녀의 청은 우리에겐 적을 위해 나서 달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리아드네는 페렌트는 소르체의 적이 아니라거나, 소르체도 페렌트의 일부라는 그런 말로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어디에 속할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소르체의 몫이었다.

“나는 새로운 페렌트가 어떤 모습일지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공녀의 말을 듣다 보니 새로운 소르체의 모습은 조금 궁금해지는군요.”

좀 더 살 만한 곳이란 어떤 곳일까.

“내 아이들이 더는 탐욕에 눈이 먼 자들에게 희생당하지 않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런 날이 올까요? 공녀가 말하는 새로운 페렌트는 그런 곳일 거라고 내게 약속해 줄 수 있나요?”

그것을 묻는 이엘라의 시선이 까만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묶은 시안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정말 그런 곳이 될 거라는 약속은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그런 페렌트를 꿈꾸고 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약속 대신 희망을 말했다. 그 대답을 들은 이엘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전에 공녀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죠. 이미 공녀의 결백을 짐작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이미 짐작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제가 결백하다는 걸. 정말 절 의심하셨다면 저와 제 일행을 모두 한곳으로 몰아넣진 않으셨겠죠.

“공녀의 말이 맞습니다. 나는 공녀 일행이 이번 일과 무관할 거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코라의 눈이 틀렸을 리가 없으니까요. 알면서도 공녀를 시험한 것은 내 나름대로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코라의 붉은 눈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찾아낸다. 그렇기 때문일까? 코라는 유달리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코라가 아리아드네 일행이 벌인 짓은 아닐 거라고 말한 순간, 이엘라는 아리아드네를 향한 의심을 거두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들을 한데 가둔 것은 궁금해서였다. 저 어린 공녀가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지, 자신의 짐작이 어디까지 맞을지.

“저는 가주님께 확신을 드렸나요?”

“소르체는 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해독제가 있는 독 따위 먹이지 않습니다.”

아리아드네의 물음에 이엘라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아이들의 목숨을 노린 자와 내 아이들의 목숨을 지켜 준 자 중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는 너무 뻔한 결정이군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지난할지라도 결론은 언제나 간단하다. 1왕자 카이엔은 케이루스의 성물을 이용하여 소르체를 침범하였고, 메르디에스 공녀는 카이엔으로부터 소르체의 혈족들을 지켜 주었다.

“소르체는 결코 은원을 잊지 않죠. 소르체는 지금부터 메르디에스와 함께하겠습니다.”

마침내 소르체와의 연합이 결성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손을 내밀었다. 이엘라가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다.

“리뮈르 공녀와 공자가 함께인 걸 보면 리뮈르도 같은 뜻인가요?”

“봄이 오면 페렌트 최강의 전력이 합류할 겁니다. 그때까지는 리뮈르와 연락을 취하시어 케이루스-리카서스 연합에 대응해야 합니다.”

마물이 극성인 겨울에는 리뮈르가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겨울만 버티면 된다는 뜻이었다. 리뮈르는 평화로운 페렌트에서 유일하게 전투가 생활화되어 있는 집단이었다.

“저는 이대로 돌아가 메르디에스 성을 탈환할 겁니다. 연락은 그 후에 드리지요.”

“정말 성의 탈환에 소르체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가요?”

이엘라가 다시 한번 되물었다.

“필요한 지원이라면 제가 거절했을 리가요.”

아리아드네는 백자의 피를 구하려 소르체에 나타난 카이엔을 걷어차다 메르디에스 성을 탈환할 방법이 떠올랐다. 소르체의 도움을 받아 전면전을 치르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밤이 늦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리아드네가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아, 그리고 방문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엘라가 유진과의 대화를 청했다. 그녀의 시선이 유진을 올려다보는 아리아드네에게 슬쩍 닿았다가 떨어졌다.

“…….”

“다섯 가문의 성물을 확인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소르체의 성물 ‘백자의 피’라면 이미 만나 보지 않았던가?”

백자의 피란 코라나 살라처럼 치유의 힘을 지닌 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유진은 아리아드네로부터 시안 또한 치유의 힘을 지닌 소르체의 성물이라는 말을 들은 뒤였다. 그들을 모두 만나 보았으니 소르체에서 유진이 더 확인해야 할 것은 없었다.

이엘라가 천천히 손을 들어 유진의 왼손을 가리켰다.

“그 손에 카푸트를 지니고 계시다고요. 그것의 정체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무런 힘이 없는 이엘라는 유진의 왼손에 숨겨진 카푸트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소르체의 가주에게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200년 전, 이 땅을 멸하러 나타난 신이 있었습니다. 그 신을 막아 낸 공로로 케이루스는 왕가가 되었고, 성 상티모니아는 신의 유해를 얻었습니다.”

유진은 아무것도 없는 제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성 상티모니아가 얻었다는 신의 유해가…….”

“맞습니다.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는 200년 전, 이 땅에 나타났던 신의 유해입니다. 그날 신을 마주한 것은 그들만이 아닙니다. 당시 페렌트의 왕위를 이은 것은 소르체. 우리는 그날 페렌트의 왕궁에 있었습니다.”

유진은 힘이 빠진 듯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지겹게 옭아매던 카푸트의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제 것도 아닌 알 수 없는 분노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그녀의 곁에 남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방문자님은 그것의 남은 조각을 찾아야 해. 왼손에 갇힌 그것이 다른 조각들을 부르고 있어.

머리만 남은 성물이 찢어진 제 몸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카푸트의 절규는 아무리 귀를 막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꽉 움켜쥔 왼손으로 자신의 눈을 덮었다. 이번에는 새까만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의 악몽에서처럼.

그는 카푸트의 찢어진 유해를 모두 찾기 전까지 저 괴물이 자신을 놓지 않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찢어진 몸을 부르는 카푸트의 열망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 * *

하루 만에 십 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이엘라는 한결 깊어진 미간을 문지르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시안을 향해 물었다.

“떠나고 싶으십니까?”

“가주님.”

늘 담담하던 시안의 눈동자가 놀란 듯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무표정한 시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엘라만큼은 시안이 무슨 마음인지 늘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시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검은 피를 타고난 아이는 소르체를 떠난다고 했습니다. 시안 님께서 소르체를 떠나는 것은 각오했던 일이니, 그런 얼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먼 옛날, 하얀 피라 불리는 힘을 지닌 혈족들이 있었다. 그들의 피가 정말 하얀색이었던 건 아니다. 다만 백색증이라는 외모 때문에 그렇게 불렸을 뿐.

혈족이 지닌 하얀 피는 기이할 정도로 뛰어난 치유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깊은 상처도, 오늘내일하는 병도 그들의 피만 있으면 단숨에 나았다.

하지만 그 힘을 탐낸 사람들이 많아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하얀 피를 지닌 자들은 점차 사라지고, 그 명맥이 끊겼다. 심지어 소르체에서도 하얀 피는 전설 속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드문드문 붉은 눈이나, 푸른 손과 같은 치유 능력을 각성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나 그조차도 점점 줄고 있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이 능력도 점점 그 끝이 다가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시안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치유의 힘을 지닌 자들은 마치 긴 잠복기를 거치고 발병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힘을 각성한다.

코라는 열여덟에 붉은 눈의 힘을 각성했고, 살라는 스물넷에 푸른 손의 힘을 각성했다.

힘을 각성한 자들은 피에 흐르는 힘을 모두 소진하기 전까지 노화와 성장이 매우 더디게 이루어진다.

예외가 있다면 하얀 피였다. 그들은 힘을 각성한 채로 태어나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자라고 늙어 간다. 단지 그 수명이 안타까울 정도로 짧았다.

치유의 힘을 각성한 채로 태어난 시안을 보고 다들 그 능력이 하얀 피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시안의 능력은 하얀 피보다도 드물다는 검은 피였다.

검은 피는 하얀 피의 변종이었다. 치유의 힘만을 지닌 하얀 피와 달리, 검은 피는 상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약과 독, 삶과 죽음의 조율사라는 말을 듣는 소르체의 능력 그 자체였다.

하지만 큰 능력에는 큰 부담이 따른다. 하얀 피를 지닌 자들이 단명하는 숙명을 지녔다면 검은 피를 지닌 자들은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영생에 가까운 삶, 그것이 검은 피의 숙명이었다.

검은 피를 지닌 자들은 자신들의 숙명이 천형이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늙고 죽어 가는 것을 영원에 가까운 세월 동안 지켜봐야 하는 하늘이 내린 벌. 그래서 검은 피를 타고난 아이는 이르든 늦든 모두 소르체를 떠났다.

소르체를 떠난 그녀들이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그녀들이 어딘가에 살아 있는 한, 소르체의 땅에 있는 모든 혈족이 죽더라도 소르체는 끝이 아니었다. 그녀들이 살아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는다면 그들이 소르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소르체는 남는다.

그것이 검은 피를 타고난 이들을 소르체의 시작과 끝이라 부르는 이유였다.

이엘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운명을 타고난 시안이 늘 안타까웠다. 시안을 보며 옅은 웃음을 지은 이엘라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안 님께서는 유달리 손이 가지 않는 아이셨죠. 울지도, 떼를 쓰지도, 보채지도 않아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안은 언제나 담담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는 일조차 드물었다.

“저는 백자를 품기 위해 스스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엘라는 제가 낳은 자식을 더 예뻐할까 두려워 스스로 불임이 되기를 자처했다.

“저는 열 달 동안 아이를 품어 본 적도 없고, 몸을 찢는 듯한 출산의 고통도 모릅니다.”

세 명의 딸을 두었으나, 그중 이엘라가 낳은 아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의 부드러운 손이 제 손을 꽉 움켜쥘 때, 열이 오르는 아이 옆에서 밤새 잠 못 이룰 때, 아이가 처음으로 세상에 발을 디뎠을 때, 아이가 처음 나를 불러 주었을 때, 세상이 어떤 색으로 물들었는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보통 치유의 힘을 각성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란 뒤이기 때문에 소르체의 가주들은 대체로 육아에 무지했다. 힘을 각성한 채 태어난 갓난아이를 딸로 들여야 했던 이엘라는 마치 재난 속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아이가 울 때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녀는 차라리 같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가 웃을 때면 같이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시안 님께서는 제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분입니다. 그러니 부디 무사하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세상 어떤 귀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아이. 이엘라는 조심스럽게 시안을 끌어안았다.

“네, ……어머니.”

망설이던 시안의 혀끝에서 평생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호칭이 뚝 떨어졌다. 이별의 시간이었다.

* * *

어느새 해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떠올랐다. 소르체를 떠날 시간이었다.

시안은 바쁘게 짐을 정리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함께 가겠다는 말에 아리아드네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도 시안은 카이엔에게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시안이었으니 어쩌면 이번에도 함께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떠나는 거야? 이렇게 이용만 하고?”

배웅을 나온 살라는 지치지도 않는지 알버트에게 수작을 걸었다.

“질척거리지 좀 마. 넌 내기에 지고도 아직 그 짓이야?”

코라가 내기를 들먹이며 살라를 말리자 그녀가 분하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넌 메르디에스의 딸이 아직도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네가 몰라서 그래. 그렇게 끝날 사람이면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어. 내기해도 좋아. 내가 지면 푸른 피 열 병을 내놓지.

살라는 자신이 왜 그딴 내기에 응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완전히 당한 거잖아. 넌 공녀와 메르디에스 성에서 13년이나 같이 지냈다며! 가진 정보가 다른데 내가 미쳤다고 그딴 내기에 응해서…….”

살라의 한탄에 막 말에 오르려던 알버트가 말에서 내려왔다. 그가 살라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살라에게 마음을 줄 수는 없다지만 그녀는 그에게 팔을 되찾아 준 은인이었다. 알버트의 정중하고도 단호한 대답에 살라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아.”

“그럼 평안하시길.”

알버트는 그저 안부를 묻는 것으로 제 대답을 대신하고 말 위에 올랐다. 아리아드네가 살라 곁에 선 코라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여러모로 고마웠어, 코라.”

“메르디에스 성에서 지낸 지난 시간은 내게도 즐거운 시간이었어. 꼭 탈환에 성공하길 바랄게.”

코라가 싱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아리아드네가 그 손을 마주 잡자 코라가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푸른 피 백 병, 절대로 잊으면 안 돼.”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코라가 주위를 둘러보다 덧붙이듯 말했다.

“그리고 리뮈르 공자의 눈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야. 병이라면 내 눈에 무언가가 보여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모르겠어.”

달미에르를 만나기 전에는 코라를 소개해 주는 것으로 리뮈르의 비극에 일조한 과거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미에르와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그의 눈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리뮈르의 성물이 깃든 것이라는 걸.

“리뮈르 공녀와 공자에게는 아까 말해 뒀어.”

아리아드네가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는 달로아 남매를 힐끗 바라보았다. 눈을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도, 그들은 언제나와 다름이 없었다.

그때, 아리아드네의 시선을 눈치챈 듯 달로아가 성큼 다가와 물었다.

“왜 그렇게 봐? 혹시 내 욕했어?”

달로아의 주황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리아드네는 무엇을 봐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녀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코라에게 들었어.”

“아, 난 또…….”

코라를 힐끗 본 달로아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미에르의 눈이 나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병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냥 내 마음 편해지자고 그랬던 거야.”

달로아가 눈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입술 끝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고마워. 너도, 코라도.”

우는 것처럼 웃는 얼굴을 한 달로아가 그 말을 남기고 훌쩍 멀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아리아드네를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덥고 습한 소르체에도 겨울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리아드네 님,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신시아가 마침내 떠날 시각이 되었음을 알렸다.

“유진은?”

아리아드네가 오전 내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유진을 찾았다.

“여기.”

아리아드네 뒤에서 나타난 유진이 대답했다.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어 있더니.’

아리아드네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잘 잤어?”

“그럭저럭.”

남자는 누가 봐도 밤새 한잠도 못 잔 얼굴을 하고도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드네는 채근하는 대신 남자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품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무거우면 언제든 말해도 좋아. 당신을 향한 귀는 늘 열려 있으니까.”

유진은 아리아드네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런 그를 향해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젠 갈까?”

유진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오의 강렬한 햇빛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Quintus : 다섯 번째의, 소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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